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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문제점 및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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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비판
2.1. 제작진들에 대한 비판2.2. 패널들의 태도 문제
2.2.1. 반론
3. 논란 목록
3.1. 시즌 1
3.1.1. 1~3화 설민석 강의 편3.1.2. 4화 페스트3.1.3. 5화 진주만 공습과 핵폭탄3.1.4. 6화 진시황제
3.2. 시즌 2
3.2.1. 13화 네로 황제3.2.2. 21화 칭기즈 칸
3.3. 시즌 3

1. 개요

tvN 역사 예능 벌거벗은 세계사의 나오는 문제점과 비판을 정리한 문서.

2. 비판

2.1. 제작진들에 대한 비판

2.2. 패널들의 태도 문제

중반 이후부터 패널들이 너무 터무니없는 답변을 하거나 지나친 리액션, 강의와 전혀 연관이 없는 잡담을 하며 강의 분위기를 깨는 모습이 종종 나오면서 불거진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특히 규현 은지원의 티키타카는 거의 매화마다 나오는 수준인데, 가끔은 정말 주제와 무관한 뜬금없는 잡담이 대놓고 방송으로 나오는지라 시청자들의 불만이 있는 편이다.[6] 그나마 이 둘은 좀 나은 수준인데, 가끔 몇몇 게스트들이 제대로 집중도 안하고 잡담을 떠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어, 이에 대한 주의가 상당히 크다.[7]

퀴즈의 답을 찾는 과정도 비판을 꽤 많이 듣는다.[8] 특히 은지원의 오답 범위가 지나치게 어처구니가 없는 경우도 있는지라 이에 대한 비판도 있는 편. 그러나 시청자들의 비판과 달리 정작 가르치는 교수들은 "흥미롭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많고[9], 오히려 똥볼인줄 알았던 오답이 정답인 경우도 있는지라 최근에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오답이 아니면 이러한 비판이 거의 없고, 이마저도 본인들도 '뭔가 아닌거 같은데'라며 신호를 주기에 시청자들이 적당히 걸러듣기도 하여 조금은 나아졌다.

2.2.1. 반론

단, 해당 비판은 우선 교양 '예능'인 이 프로그램을 강의와 지식 전달 자체가 주 목적인 순수 교양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또한 강의 진행 자체도 일반적인 강의에 비해 소통이 많이 이루어지는 형태이다. 강의가 중심이고 출연자가 집중하여 수업을 듣는 모습만 보여줄 것이라면 굳이 예능 이미지가 강한 연예인들을 출연시킬 필요가 없을 것이다. 특히 은지원, 규현은 역사에 대해 문외한인 일반인들이 청강 중 들 수 있는 생각 또는 태도를 실제로 드러내 보여주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이런 부분이 프로그램의 주요 컨셉이기도 하다.

또한 김형오 PD와 이윤호 PD가 추구하는 방송 방향성에 대해서 기사에 언급한 말로는 다음과 같다.

한편 <벌거벗은 세계사>는 인문학적 지식과 교양을 전달하는 방송이지만 또한 재미를 추구해야하는 예능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김형오 PD는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제작진이 예능 출신이다. 강의 형식의 포맷이기 때문에 몰입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예능적인 요소를 살리고자 노력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강연 도중에 시청자들이 궁금해 할 법한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황당한 농담으로 티격태격 하는 규현, 은지원, 이혜성은 방송의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웃음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벌거벗은 세계사’의 김형오 PD와 이윤호 PD는 “3명의 MC중 두 명은 예능적으로 센스가 있고, 지루하게 설명할 때도 웃음 한스푼을 첨가할 수 있는 사람을 원했다. 또 한사람은 지적이고 모범생의 이미지가 필요했다”고 말한 바 있다.

연예인 패널들을 잘 뽑았다는 생각이 든다. 은지원과 규현은 자신의 역할을 잘하고 있다. 지적이고 모범적 이미지에 이혜성만큼 어울리는 패널이 없다.

3. 논란 목록

3.1. 시즌 1

3.1.1. 1~3화 설민석 강의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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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4화 페스트

4편에도 많은 오류가 있었다. 자문에 참여한 박흥식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카파 공성전에 관한 자료는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신뢰할 수 없으며, 흑사병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르네상스라는 희망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가 시작된 이후 흑사병이 발생한 사실을 지적하고, 그밖에 강의 전반에 깃든 중세에 대한 편견을 비판했다.

중세는 신본주의이고, 르네상스는 인본주의라는 단순한 도식으로는 당대의 현실을 설명할 수 없으며[10] 인민 주권, 권위의 상승이론과 같이 근대의 특징이라고 여기는 것들의 상당수가 이미 중세 시대부터 오랫동안 준비되고 형성된 것들이었다.[11] 설령 흑사병이 그러한 개념의 발전을 촉진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가정하더라도, 흑사병이 당시 사회에 미친 영향이 전부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아래의 박흥식 교수의 논문에도 언급되는 것처럼 자선이 보편적 인 의무로 간주되었던 이전과 달리 흑사병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빈민층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강화되었다.

중세인들이 신앙에만 의존하며 흑사병에 대한 합리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거나, 근대 초기에 교황의 권위는 몰라도 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등의 설명은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사실 관계가 틀린 것이다. 일례로 밀라노 공국처럼 재빠른 격리조치 등을 실행하여 큰 피해 없이 넘긴 케이스도 엄연히 존재한다.[12] 또한 이런 사례가 아니더라도 명확한 반박 사료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1347년 10월 초 제노바의 갤리선이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흑사병을 퍼뜨린 이래로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유럽 대부분의 지역은 치명적인 전염병의 굴레에 빠져들었으며, 엄청난 인적•물적 손실을 입었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각 공동체들도 점차 적응력을 갖게 되었다. 도시들이 초기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것은 이 전염병이 전방위적으로 미칠 파괴력을 미리 가늠할 수 없었으며, 공동체의 지도층 가운데 다수가 희생을 당하여 효과적인 대응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중북부 도시들 가운데 흑사병에 대한 도시의 대응을 잘 보여주는 사례는 피스토이아이다. 이 도시는 인근 도시들이 흑사병으로 피해를 입자 그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보건위생규정>(Ordinamenta sanitatis)이라 이름붙인 법령을 제정하여 대응했다. 1348년 5월 2일 제정된 이래 6월 중 순까지 무려 세 차례나 개정된 이 법령은 당시 도시의 구체적인 대응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총 23개 조항으로 구성된 이 법령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조치는 피사나 루카와 같이 이미 전염병 발생이 확인된 지역을 방문하거나 그곳으로부터 도시로 진입하는 행위를 금지한 것이다. 문지기들은 어느 누구도 비밀리에 잠입하지 못 하도록 철저히 경계를 서야만 했으며, 불법적으로 들어온 자는 발각되면 500 데나리우스라는 엄청난 금액을 지불해야 했다. 시민들이 불가피하게 감염지역을 여행해야 할 경우에는 시참사회의 특별 허가가 필요 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품도 통제했으며, 특히 직물의 반입을 경계했다.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에서 보고했듯이 직물을 통해 오염된 독기가 전염병을 옮길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흑사병 시기 도시정부가 시행하였던 여러 조치들은 사실상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일부 중북부 이탈리아의 도시에서는 그 이전에도 전염병이 발생하면 거리 청소, 비위생적 요소 제거, 위험인물 추방, 종교적인 속죄행진 등으로 질병에 대처했다. 예컨대 피렌체의 1325년 <도시법>은 도시 내에서 동물의 가죽과 같이 악취를 풍기는 상품의 교역을 금지시켰고, 공적인 장소에서 도축도 금지시켰다. 정기적으로 시장과 도시 전역에 걸쳐 청소 작업도 행하여졌고, 분뇨 구덩이는 밤에만 비우도록 했다. 이와 같은 조치들은 독기가 공기를 오염시키고 사람들을 병들게 한다는 오랜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1348년 3월 피렌체에 흑사병이 발병했을 때도 앞선 시기의 환경개선조치들을 재차 실행했던 것이다.
오물이나 쓰레기를 치워 도시의 위생상태를 전반적으로 개선하고, 육류 및 생선의 찌꺼기 처리과정을 비롯하여 식료품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며, 흑사병 환자들을 수용할 특별병원을 한적한 지역에 건설하여 환자들을 효율적으로 격리시키고 치료하려 노력했던 점 등은 이 시기에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었던 보편적인 조치들이었다.
도시는 중세 말기에도 외부인들에게 배타적인 공간이었지만, 근대 초기까지 이어진 만성적인 흑사병으로 인해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정부 당국은 전염의 위험성이 큰 빈민들을 도심의 공공장소와 중심가로부터 격리시킬 기회를 얻었다. 흑사병 환자들의 이동을 제한하거나 금지시키던 조치들로 인해 빈민들과 하층계급은 도시 내에서 뿐만 아니라, 타 지역으로 이동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시 당국의 각종 통제조치들, 즉 출입금지와 위험한 인물에 대한 보고 의무, 빈민들과 떠돌이들에 대한 추방 등은 점차 강화되는 추세를 띠었다. 흑사병은 근대 초 부랑자 및 빈민들에 대한 도시의 편견과 억압에 빌미를 제공했으며, 그 결과 유랑민들의 삶은 더욱 위험한 상황에 내몰렸다.
박흥식, <흑사병에 대한 도시들의 대응>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19세기 후반에 만들어져 널리 퍼진 신화, 즉 '과학자'와 '종교주의자' 사이의 장대한 논쟁을 묵인한다. 유감스럽게도 양 진영의 일부 구성원들이 오늘날까지 이런 신화를 지속시키는 활동을 하고 있지만, 어떠한 과학사가도 이러한 '갈등' 모형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적 상황을 올바르게 반영하지 못한다. 16세기와 17세기, 그리고 중세 시대에는 '종교주의자'의 박해에서 벗어나려고 고군분투하는 '과학자' 진영이 존재하지 않았다. 박해와 갈등이라는 대중적인 이야기들은 기껏해야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거나 아니면 과장한 것이며, 최악의 경우 민간에서 지어낸 이야기다(갈릴레이에 관한 3장의 언급을 참고하라).
근대 초기의 자연철학을 이해하려면 오늘날의 여러 가지 상식적인 가정과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첫째, 거의 모든 유럽인, 특히 이 책에서 거론된 모든 과학사상가는 기독교를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현대적이든 아니든 간에 과학 연구에는 무신론-에둘러 표현하자면 '회의론'-이 필요하다는 개념은, 과학 자체를 종교로 삼기를 바라는 (대체로 자신들을 그러한 종교적 위계질서에 포함시키는) 이들이 제안한 20세기의 신화다.
로런스 M. 프린시프, 《과학혁명》

애시당초 저 시대에는 병원균의 존재를 몰랐다.[13] 당시 주류 견해는 ' 모든 질병과 해충, 해수 등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였으며, 신앙에 의지하거나 교리에 의지하는 것 역시 저렇게 '인간을 잔혹하게 죽이는 질병이 자연적으로 발생했다 = 우리의 타락으로 신이 심판을 내리는 것이다'라는 인과관계를 유추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당시 인류가 질병에 무지했던건 맞지만 이걸 무조건 신앙의 탓으로 돌리기엔 무리가 있다.[14]

그리고 교황의 권위가 줄어든 이유는 십자군 전쟁의 실패와 더불어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간의 알력다툼에서의 교황의 열세가 큰 작용을 했으며, 결정타로 아비뇽 유수에 의해 세속 군주(프랑스 왕)가 교황보다 더 강한 힘을 보인 것을 증명하여 교황의 권위가 크게 추락했다. 이 과정에서 흑사병의 도움이 아예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흑사병이 100% 원인이 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러한 오류들은 140화 세균 감염병 편에서 15분 정도 페스트를 다시 다룰 때도 대부분 수정되지 않았다. 4화의 강사 장향석은 외과의사, 140화의 강사 김응빈은 미생물학자로 둘 다 전염병 자체에 대한 전문가지 중세 유럽 역사를 제대로 연구한 건 아니다 보니 사학계와 괴리된 대중의 편견이 고스란히 반영되는 모습이다.

3.1.3. 5화 진주만 공습과 핵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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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 6화 진시황제

3.2. 시즌 2

3.2.1. 13화 네로 황제

네로가 입양된 클라우디우스 씨족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래로 율리우스 씨족과 하나의 가문이 되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로 불렸음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따라서 네로의 입양 전 사용한 개인 이름(프라이노멘)인 '루키우스'를 철저히 금지해 사용하지 않은 클라우디우스 가문에서 루키우스와 클라우디우스가 같이 사용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는 클리엔텔라 관계로 클라우디우스 가문에게 성씨를 하사받은 이들의 후손들도 마찬가지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맏사위였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는 자신의 아들에게 루키우스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클라우디우스를 아예 빼고 이름을 지어줬다.

3.2.2. 21화 칭기즈 칸

3.3. 시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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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텝롤에서 빼려고 했다거나, 자문료를 무리하게 깎으려고 한 것 등 [2] 페스트 편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벌어졌으며 이번에는 스텝롤에 포함이 되었다. [3] 그리고 특히 1929년 대공황에 대한 설명도 빈약하고, 3편의 경우 산둥반도에 대한 일본의 점령도 그 때 당시에 조차지로 삼고 있었던 독일이 와서 점령하는 것처럼 오해하게 편집하였다. [4] 네로 황제는 유명한 '로마 대화제'와 '그리스도 대학살' 등이 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은 애초에 일대기 자체가 전쟁 수준이고, 링컨은 '미국 남북전쟁', 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과의 '칼레 해전' 등이 존재하고, 루이 14세도 일생에 전쟁을 했다. [5] 인물사나 과학 등. [6] 실제로 조규현과 은지원은 여러 프로그램을 같이 하기에 꽤 친한데, 이 탓인지 유독 '조은사이'랍시고 이 기믹을 우려먹으려고 시도하는 정황이 지나치게 많다. 문제는 이 프로가 순수 예능 프로가 아닌, 역사 교육도 어느정도 분담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구조상 예능프로도 아니고 교양 프로그램이다. [7] 특히 잦은 해외 콘서트를 다니는 규현의 특성상 게스트가 자주 나오는데, 이진호가 출현했을 당시, 게스트임에도 잡담을 하는 모습을 보이며 이에 대한 비판이 가중됐다. [8] 은지원이 "게임에서 봤어요"라고 말하지만, 정작 해당 게임의 묘사 내용과도 크게 다른 경우마저 있다. [9] 실제로 교수들이 은지원의 신박한 오답 중, 몇몇은 듣는 교수도 '발상의 전환이다'라고 호평하기도 했다. [10] 당장 중세 이미지의 대표격인 마녀사냥은 오히려 르네상스~근대 시대에 더 많이 이루어졌다. [11] 예를 들어 농노제 문서의 상단에 인용된, 중세 후기의 법률가 보마누아르의 신분제에 대한 설명을 보자. 그는 당시의 많은 사람들처럼 신심이 깊은 기독교인이었고 귀족 출신의 고위 관료였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책에서 왕과 귀족들의 권력은 기본적으로 다수의 민중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임을 강조했으며, 이를 자신의 신앙이나 신분적인 특권과 모순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12] 당시 밀라노의 방식이 환자와 의심군을 완전히 가두고 굶겨죽이는 비인간적인 격리법이긴 했으나, 엄연히 현대에도 시행하는 '격리조치'의 원시적인 단계임을 고려하면 아예 의학적 지식이 0이 아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13]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데, 인류가 세균을 직접 관찰한건 17세기 경이지만, 병원균을 눈치챈건 1861년 파스퇴르의 실험으로 자연발생설이 원천적으로 부정당한 이후, 로베르트 코흐에 의해 1883년 비브리오균이 콜레라를 일으키는걸 밝혀내면서 본격적으로 병원균에 대한 인식이 밝혀졌다. 즉, 현대에서도 채 200년도 지나지 않은 셈이다. [14] 애당초 과학이 어느정도 발전한 20세기에도 방사능의 존재를 몰랐던 탓에 원폭 실험지에 방사복 보호의 없이 돌아다니거나, 방사능 원소를 이용한 원자력 발전소를 애들 장난감으로 판매하는 일도 있었다. 대표적인게 바로 다음화인 5화에서 나온 '트리니티 실험' 후 관계자들이 신발에 종이만 감고 폭심지를 돌아다니던 사진이다. [15] 다만 '육군항공대'라는 명칭 자체가 일반인에게 생소한 단어임을 고려하면 시청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공군'이란 용어로 칭했을 가능성도 있다. 영문 명칭 자체도 육군항공대가 Army Air Force이고, 공군은 Air Force라서 별 차이가 없는 것도 있고. [16] 물론 단순히 한 민족이 분단된 사례는 정말 끝도 없다. 대체로 독립된 한쪽이 강대국에게 아예 집어삼켜진 케이스인 북아일랜드, 아일랜드나 내몽골, 몽골과 같은 사례나 서로 통일을 포기한 채 완전히 독립국을 유지하기로 합의한 네덜란드, 벨기에, 수단 등 이래저래 따지고보면 분단국은 생각보다 많지만, 서로가 통일을 원하며 각자 독립된 별개의 정부를 둔 한 민족끼리의 분단국은 사실상 저 3개국을 포함하면 극히 드물다. [17] 이 사례와 일치하는 대표적 사례들이 과거의 서독, 동독과 북베트남, 남베트남 정부 등이 있다. 예멘은 북예멘, 남예멘때는 이 사례가 맞지만, 최근 내전은 또 다른 사례라 섣불리 집어넣기엔 복잡한 케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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