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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08 16:09:10

밴 존슨

<colbgcolor=#2b2024><colcolor=#ffffff> 밴 존슨
Van Johnson
파일:Van_Johnson_profile.jpg
본명 찰스 밴 델 잔슨
Charles Van Dell Johnson
출생 1916년 8월 25일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
사망 2008년 12월 12일 (향년 92세)
미국 뉴욕주 나이액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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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배우
영화 데뷔 1940년, 'Too Many Girls'
활동 기간 1935 ~ 1992년
배우자 이브 애벗 (1947년~1968년)
1. 개요2. 위상3. 생애 및 활동4. 주요 출연 작품5. 사생활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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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배우.

2. 위상

전시와 전후인 1940-50년대에 MGM 소속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185cm의 장신이지만 붉은색 머리와 주근깨 등 보는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키는 친근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할리우드 황금기에 선호하던 미남[1] 부류들 중 하나인 이웃집 소년 유형에 부합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징집에서 배제됐음에도 불굴의 의지를 지닌 군인 역으로 전쟁영화에서 활약했다. 역시 같은 시기에 큰 인기를 끌었던 준 앨리슨이나 에스터 윌리엄스[2]와 자주 엮여, 선하고 상냥한 남자주인공이 비슷하게 다정한 성미의 여자주인공과 연애하는 내용의 영화들도 독점하다시피했다.

노래를 잘해 가벼운 내용의 뮤지컬에 자주 출연했다. 비뮤지컬 영화 속에서도 노래 부르는 모습을 자주 선보였음에도 프랭크 시나트러의 인기에 육박한다는 뜻에서 '목소리가 빠진 시나트러(the voiceless Sinatra)'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동시대에 활약한 많은 스타들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데 반해 노년까지 활동을 길게 이어나간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다. 최초로 제작된 TV 영화의 주연이기도 했다.

3. 생애 및 활동

1916년 8월 25일,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에서 스웨덴 이민자 출신인 아버지와 독일계인 어머니 밑에서 찰스 밴 존슨(Charles Van Johnson)으로 태어났다. 알코올 의존증 환자였던 어머니와 이혼한 배관공 아버지의 손에 길러졌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일을 보조하는가 하면 동네 술집에서 공연하며 가계를 도왔다.

19살 때 뉴욕에 상경해 1935년에 오프 브로드웨이 레뷰 "Entre Nous(우리끼리 말인데)"로 데뷔했다. 1939년 전설적인 연출가 겸 제작자 조지 애벗[3]에 의해 "Too Many Girls(여자들이 너무 많아)"의 주연 삼인방의 대역으로 뽑혔다가 결국 그중 한 자리를 꿰찼다.

다음 해 역시 애벗이 만들었으며 리처드 라저즈와 로렌츠 하트가 작사작곡한 " Pal Joey"의 코러스 보이이자 진 켈리의 대역으로 발탁되면서 브로드웨이에 데뷔했다. 뮤지컬 "Too Many Girls"가 1940년 루실 볼과 데지 아네즈 주연으로 영화화 되면서 코러스로 출연하게 돼 영화계에 진출했고 잠시 워너 브라더스에 머물렀다가 MGM과 계약했다.

캐서린 헵번 주연의 <Keeper of the Flame>(1942)의 스크린 테스트를 받으러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이마에 철판을 박게 되면서 제2차 세계 대전 징집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 일이 전화위복이 되어 주연급 남자배우들이 전부 전장으로 끌려간 공백을 차지하게 되었다. 의사 킬데어(Dr. Kildare) 영화 연작 기획의 상징 그 자체였던 루 에어즈를 강판 시키면서 <Dr. Gillespie's New Assistant>(1942)에 출연했을 정도. 존슨은 이상을 품고 있으면서도 소박하고 다정한 소년미가 있는 남성 배역을 찾을 때 일순위로 거론되게 되었고 특히 10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1960년대에 MGM과의 계약도 끝나고 중년에 접어들며 인상이 우울하게 변한 점이 눈에 띄면서 영화 출연이 줄어들었다. 밤무대와 뮤지컬 중심으로 활동하게 돼 뮤지컬 "The Music Man"의 1961년 웨스트엔드 공연과 연극 "Come on Strong"의 브로드웨이 공연에 나왔다. 1962년 피부암에 걸리면서 림프선 제거 수술로 한동안 활동을 중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정감 가는 조연 역으로 다시 자리를 잡았고, 코미디 <나, 너 그리고 우리>(1968), TV 영화 <Company of Killers>(1970) 등을 찍었고, 유럽에서도 활동했다. 1976년 ABC의 TV 미니 시리즈 "Rich Man, Poor Man"으로 에미상 후보에 올랐다. 1980년대에는 극장식 식당이나 하기 순회 공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뮤지컬 "No, No, Nanette"의 1983년 공연에 나왔으며, 1985년엔 브로드웨이에 복귀해 뮤지컬 "라카지(La Cage aux Folles)"의 초연 주인공이 되었다.

1991년 건강 문제로 은퇴했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요양시설에서 지내던 중 2008년 12월 12일 사망했다. 향년 92세.

4. 주요 출연 작품

5. 사생활

6. 여담


[1] matinee idol. [2] Esther Williams. 1921 - 2013. 오늘날엔 잊혀졌으나 40년대 중반에서 50년대 중반까지 크게 각광 받아 인기 순위 10위권에 자주 들었던 스타다. 페르난도 라마스의 네 번째 아내다. [3] George Abbott. 작가로서의 능력도 출중해 희곡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적이 있으며 < 서부 전선 이상 없다>(1930)의 대본으로 아카데미 각색상 후보에 올랐다. [4] Eve Abbott. 1914 - 2004. [5] Keenan Wynn. 1916 -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