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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롱도르/시상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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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롱도르의 수상자 선정에 대한 논란을 서술한 문서.

2. 대표적인 논란

발롱도르는 투표로 선정되는데 최고의 선수를 뽑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고, 축구 외적인 요소가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어[1] 매년 논란이 일어나긴 하나, 그 중에서도 특히 논란의 규모가 크고 수상자와 후보의 차이도 적었던 사례들을 뽑자면 다음과 같다.

2.1. 1977년 알란 시몬센

1976-77 시즌 케빈 키건 리버풀 FC 풋볼 리그 우승과 유러피언컵 우승을 이끌어 유력한 발롱도르 수상 후보로 떠올랐다. 그러나 분데스리가 함부르크로 이적한 1977-78 시즌에 신임 감독 루디 구텐도르프가 팀을 말아먹는 가운데 고군분투하자 분데스리가 최고의 공격수였던 알란 시몬센의 지지자가 늘어났고, 1위 표는 시몬센보다 더 많이 받았지만 2, 3위 표가 밀려 3점 차이로 발롱도르를 내줬다.

하지만 키건이 이끈 리버풀이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시몬센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꺾은데다, 키건의 하반기 활약상이 그렇게까지 부진한 것은 아니었기에 논란이 됐다. 1977-78 시즌 겨울 키커 랑리스테 외국인 선수 부문에서 시몬센이 WK-1을 받긴 했지만, 키건은 바로 다음인 IK-2를 받아 팀의 부진과는 별개로 개인 기량은 인정을 받았다. 당시 양측의 여론전도 매우 치열했으며 IOC 유럽 올해의 축구 선수상은 시몬센이, 옹즈도르는 키건이 나눠서 가져갔다.

2.2. 1978년 케빈 키건

1978년 수상자 케빈 키건 잉글랜드 1978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탈락해 1978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했고, 1977-78 시즌 분데스리가에서 본인의 활약상은 뛰어났지만 소속 팀 함부르크가 10위에 그쳐 논란이 됐다.[2]

IOC 유럽 올해의 축구 선수상은 리버풀 FC 유러피언컵 2연패를 이끈 케니 달글리시가 수상했다. 다만 달글리시는 월드컵 1차 조별리그(16강)에서 탈락해 기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투표에서 8위에 그쳤다. 문제는 월드컵 활약을 이유로 달글리시를 거르고 뽑은 선수가 월드컵에 참가조차 못한 키건이었다는 것이다.

옹즈도르에서 키건은 포디움에 들지 못한 반면 다른 발롱도르 포디움 선수인 한스 크란클 로프 렌센브링크는 여기서도 2위, 3위에 오르며 월드컵 MVP 마리오 켐페스 다음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크란클은 월드컵에서 4포트에 배정된 약체 오스트리아 2차 조별리그(8강)에 진출시켰고, 그 과정에서 본인의 멀티골로 서독을 꺾기도 했다. 비록 빅리그가 아닌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에서 뛰긴 했으나 리그 36경기 41골을 기록해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했다.

렌센브링크는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준우승으로 이끌고 어시스트 1위, 브론즈 부트를 받는 등 맹활약한 것에 더해 소속 팀 안데를레흐트에서도 UEFA 컵위너스컵, UEFA 슈퍼컵 우승의 주역이었다. 클럽과 대표팀에서 골고루 최고 수준의 활약을 선보였음에도 수상자가 되지 못했다. 월드컵도 개최국 아르헨티나 편파판정을 당하며 우승을 내줬는데 발롱도르까지 놓치는 불운한 해를 보냈다. 후세에 이 결과는 키건이 작년 발롱도르를 수상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 심리가 들어갔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한다.

2.3. 1986년 이고리 벨라노프

1986년 최고의 선수는 설명할 필요도 없이 디에고 마라도나가 꼽히지만 당시 유럽 선수만 후보에 오를 수 있었던[3] 발롱도르는 이고리 벨라노프의 몫이었다. 벨라노프는 UEFA 컵위너스컵에서 5골로 공동 최다 득점을 기록하며 디나모 키이우를 우승시켰고,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선 16강 벨기에 해트트릭 포함 4골을 기록해 브론즈 부트를 수상했다. 이에 따라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투표에서 마라도나에 이은 2위로 선정돼 당시 팬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현재는 외신들이 역대 가장 논란이 되는 발롱도르 수상자들을 선정할 때 자주 등장하며 불편한 재평가를 받고 있다. 컵위너스컵에선 단독 득점왕이 아닌 공동 득점왕이었고 소비에트 톱 리그에서도 특출난 활약을 보여준 건 아니었다. IOC 유럽 올해의 축구 선수상과 소련 올해의 축구 선수상을 팀 동료 올렉산드르 자바로프에게 내줬다는 사실도 벨라노프가 키이우의 독보적인 에이스는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게리 리네커도 그에 밀리는 활약을 보여줬다고 보기 어렵다. 리네커는 잉글랜드의 에이스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6골을 득점해 월드컵 득점왕에 오른데다 1985-86 시즌 잉글리시 풋볼 리그에서도 30골을 폭격해 득점왕 및 MVP로 선정됐다.[4] 리네커가 헤이젤 참사로 인해 유럽대항전에 참가하지 못했음에도 월드컵과 리그에서 벨라노프보다 뛰어난 활약상을 보여줬기에 투표 결과에 많은 이들이 의문을 가졌다.

2.4. 2000년 루이스 피구

루이스 피구는 1999-00 시즌 라리가에서 도움왕 돈 발롱 외국인 MVP를 차지하고 유로 2000에서도 포르투갈의 4강 진출을 이끈 후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유로 우승을 이끌고 유로 MVP에 오른 지네딘 지단도 유력한 후보자였기에 논란이 됐다.

클럽 활약상은 피구가 우위에 있었다. 피구는 돈 발롱 MVP에 더해 ESM 이달의 팀에 5회 뽑히는 꾸준한 활약으로 ESM 올해의 팀에 선정된 반면 지단은 비교적 활약이 미미해 세리에 A 올해의 선수 혹은 올해의 외국인 선수를 수상하지 못하고 ESM 이달의 팀도 2회 선정에 그쳤다.

그러나 대표팀 활약은 지단이 우위에 있었다. 유로에서 지단은 퍼포먼스로 보던, 평점으로 보던 명실상부 대회 최고의 선수였으며 우승컵과 MVP까지 거머쥐었다. 피구 역시 유로 2000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긴 했으나 결정적으로 4강 프랑스전에서 지단에게 결승골을 내주고 패배했다. 지단은 그 해 축구계 최고의 대회인 유로에서 피구와의 맞대결을 승리하고 우승을 한 반면, 피구는 클럽에서든 대표팀에서든 무관에 그쳤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그런데 지단이 2000-01 시즌 UCL 함부르크전에서 상대 선수에게 박치기를 하고 퇴장당하는 사고를 쳐버려 표심이 피구 쪽으로 쏠리게 됐다. 결국 투표 결과 1위 표는 지단이 더 많이 받았지만[5] 총점 197점의 피구가 181점의 지단에 16점 앞서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다른 개인상들을 보면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RSSSF 올해의 선수상은 피구가 수상했고, FIFA 올해의 선수, 옹즈도르는 지단이 수상했다.

2.5. 2001년 마이클 오언

2001년은 절대 강자가 없었던 혼돈의 해였다. 당시 수상자는 리버풀에서 미니 트레블을 달성하고 2002 월드컵 예선 독일 원정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마이클 오언이었다. 하지만 가장 주목받는 리그와 UCL은 우승하지 못했고, FIFA 올해의 선수 투표에선 8위에 그쳤다.

라울 곤살레스 루이스 피구 레알 마드리드 라리가 우승과 UCL 4강을 이끌며 두 대회에서 각자 득점왕, 도움왕에 등극했다. 두 선수는 돈 발롱이 선정한 라리가 자국인 MVP와 외국인 MVP를 받기도 했다. 라울은 발롱도르 2위와 FIFA 올해의 선수 3위에 올랐고, 피구는 발롱도르에선 6위에 그쳤지만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올리버 칸도 자격이 충분했다. 바이에른 뮌헨의 분데스리가, UCL 더블을 이끌었고 특히 UCL에서 골키퍼도 에이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미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8강에서 베컴이 이끄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4강에서 라울, 피구가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를 차례로 꺾었고, 결승전은 승부차기 선방쇼까지 펼치며 POTM에 선정,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올해의 독일 축구 선수상을 수상했다. 사실상 클럽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라 봐도 무방했는데, 월드컵 예선에서 오언에게 완패한 임팩트 때문인지[6] 발롱도르 3위, FIFA 올해의 선수 7위에 그쳤다.

베컴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이끌고 프리미어 리그 도움왕에 오르며 오언에 밀리지 않는 활악을 보여줬다. 베컴은 발롱도르 4위, FIFA 올해의 선수 2위에 올랐으며, FIFA 올해의 선수 투표에서 수상자 피구보다 더 많은 1위 표를 얻었다.

그러나 위 선수들에 대한 설명은 이들도 수상 자격이 충분했다는 의미지 오언보다 나았다는 건 아니다.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상은 슈테판 에펜베르크가 가져갔고, 옹즈도르는 자국 선수인 지네딘 지단을, 월드 사커와 RSSSF의 회원들은 오언을 선택했다. 그리고 언급한 후보들 중 ESM 올해의 팀에 선정된 선수들은 오언과 칸 2명이다. 눈에 띄는 점은 각 상들의 투표 결과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현재는 득점 기록이 가장 좋은 라울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는 주장이 나오는 반면, 오언은 대표적인 논란의 수상자로 꼽히고 있다. 어느새부턴가 '그때 그 발롱도르를 왜 오언이 받았지?'하는 의견이 하나 둘 생겨나더니 현재는 아예 잘못된 투표로 취급받고 있다.[7] 그러나 수상 당시에는 오언에 대한 평가는 높았고 대규모 논란 따위는 없었으며 실제로 그럴 만한 퍼포먼스와 임팩트를 보여줬던 것도 사실이다. 애초에 다른 후보들과 상당한 차이로 1위 표들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오언의 수상은 당시에는 그다지 큰 논란이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오언의 사례 때문에 이른바 '뻥룡인 프리미엄'이라는 식으로 잉글랜드인이 발롱 수상에 유리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는데, 정작 잉글랜드의 발롱도르 수상자는 역사상 총 4명으로 그다지 많지 않을 뿐더러 프랑스는 잉글랜드와 라이벌 의식이 짙어 뻥룡인 프리미엄을 줄 이유 자체가 없다. 게다가 이 오언을 끝으로 20년이 넘도록 발롱도르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으며 잉글랜드인이 아니라 프리미어 리거로 따져도 호날두 이후 16년째 발롱도르가 없다.

2.6. 2004년 안드리 셰브첸코

이 해 가장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 선수는 호나우지뉴였으나 수상자는 안드리 셰브첸코였기에 2001년과 함께 2000년대에 가장 논란이 컸다. 당시 호나우지뉴는 화려하면서도 예측하기 어려운 개인기를 매 경기 선보이며 스페셜을 양산했고 ' 외계인'이란 별명과 함께 시대의 아이콘으로 등극했다. 그는 FIFA 올해의 선수,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RSSSF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축구인, 팬을 가리지 않고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기자단은 소속팀 바르셀로나의 성적이 좋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팀 성적을 본다면 이 해 가장 좋은 성적을 남긴 선수는 셰브첸코가 아닌 데쿠였다. 데쿠는 비록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후 호나우지뉴에게 팀 내 에이스 자리와 스포트라이트를 내줬으나, 포르투 UEFA 챔피언스 리그, 프리메이라리가 더블과 포르투갈 유로 2004 준우승을 이끌며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상과 UEFA 올해의 미드필더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티에리 앙리도 셰브첸코의 아래로 보기 어려웠다. 셰브첸코는 세리에 A MVP를 팀 동료 카카에게 내줬지만 앙리는 아스날의 프리미어 리그 무패 우승을 이끌고 MVP, 득점왕, 유러피언 골든슈를 싹쓸이했다.[8] 셰브첸코가 2004-05 시즌 전반기에 경기당 1골에 육박하는 기록을 남기긴 했으나, 이 활약이 다른 후보들을 누르고 발롱도르를 수상할 수 있을 정도의 활약이었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부호가 붙는다.

2.7. 2010년 리오넬 메시

당시 가장 유력한 수상 후보였던 웨슬리 스네이더 인테르 트레블을 이끌고 UEFA 챔피언스 리그 도움왕을 기록한데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대회 최다 POTM으로 네덜란드를 32년 만의 결승으로 이끌었다.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월드컵 실버볼과 UEFA 올해의 미드필더를 수상했고, 모든 대회에서 골고루 높은 점수를 받아 발롱도르를 수상할 것으로 예측됐다. 그리고 스네이더가 수상하지 못하더라도 월드컵에서 최다 기회 창출을 기록하며 스페인의 사상 첫 우승을 이끌고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사비 에르난데스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다. 그러나 수상자는 리오넬 메시가 됐고 스네이더는 사비,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에 밀려 포디움에도 못 드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메시는 바르셀로나에서 경기당 1골에 근접한 우수한 득점력을 포함해 뛰어난 개인 기량을 선보였다. 클럽 활약만 본다면 라리가를 우승하고 라리가,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메시도 수상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대회인 월드컵에서 무득점에 그쳤고[9] 8강에서 탈락해 메시가 수상할 것이란 예측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변수는 당시 발롱도르가 FIFA 발롱도르로 개편됐다는 것이다. 스네이더는 기자단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해 이전 기준이면 발롱도르를 수상했을 것이나 선수, 감독들이 투표를 시작하자 시즌 동안의 활약상을 전체적으로 평가하기보단 최근의 임팩트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됐고, 하필이면 투표 시기에 스네이더는 과 함께 극도로 부진한 모습을 보여줘 외면받았다.

투표 기준 변화를 감안해도 인기상 논란이 식지 않는 것은 스네이더가 사비, 이니에스타에게 밀려 포디움에도 못 들었기 때문이다. 사비, 이니에스타도 스페인의 월드컵 우승, 바르셀로나의 라리가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곤 하지만, 사실 양 팀에서 독보적인 1인자로 보긴 어려웠다. 당시 스페인은 특정 선수의 하드캐리가 아닌 팀 전체가 잘해서 우승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고, 월드컵 브론즈볼은 다비드 비야가 수상했다. 거기에 바르셀로나 동료인 메시가 많은 표를 가져간 상황이라면 두 선수에 대한 평가가 그만큼 낮아지는 게 이치에 맞았다. 반면, 스네이더와 함께 인테르의 트레블을 이끌며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디에고 밀리토는 포디움은 커녕 후보 23인 명단에도 들지 못해 스네이더의 표가 갈릴 요소가 되지 못했다. 무엇보다 스네이더는 네덜란드에서만큼은 확실하게 에이스 역할을 했고, 월드컵과 UEFA 시상식에서 바르셀로나 선수들을 누르고 개인상을 수상했다. 결국 바르셀로나 3인방에 표가 쏠려버리니 인기 투표란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

또한 상술됐듯 메시, 스네이더에 뒤지지 않는 기량을 보여준 밀리토가 23인 후보 명단에서 제외되어 평가를 받을 기회조차 잃었던 것도 상당히 문제였다. 비록 월드컵에서 큰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지만 클럽 대회 최고의 선수이자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던 인테르 트레블의 최대 공신 중 하나였던 밀리토를 후보 명단에서 제외하는 것부터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2.8. 2013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상술된 논란들은 예상 밖의 결과가 나온 것이 주 원인이었는데, 2013년은 과정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다.

당시 가장 유력한 후보는 바이에른 뮌헨의 트레블을 이끈 프랑크 리베리였다. 최고의 팀 성과를 기록했고 개인 기량과 기록적인 면에서도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다운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 FIFA 월드컵이나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같은 메이저 국제대회가 개최된 것도 아니라 변수도 없었고, UEFA 올해의 선수상도 리베리가 무난히 수상했다.

그런데 발롱도르 투표가 마감된 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월드컵 예선 플레이오프에서 해트트릭을 하며 포르투갈을 본선에 진출시키자, FIFA 회장 제프 블라터갑자기 발롱도르 투표 기간을 연장하고, 심지어 기존 투표도 변경이 가능하게 했다. 이 사상 초유의 재투표 사태에 당연히 리베리와 그의 소속 팀 뮌헨은 대놓고 불만을 표출했고, 언론들도 FIFA의 일처리 행태를 맹비난하며 이 돌발 행동의 원인을 추측했다. 당시 블라터는 호날두를 조롱하는 듯한 언행으로 논란을 일으킨 후 호날두가 공개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발롱도르 시상식 보이콧을 선언하자 적극 사과 공세를 보내고 있었다. 따라서 투표 기간 연장도 사과 제스처의 일환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리고 재투표 결과, 무관에 그친 레알 마드리드의 호날두가 수상자로 선정되자 또다시 인기상 논란에 휩싸이게 됐다. 심지어 리베리는 재투표로 인해 본인의 표를 대거 호날두에게 뺏긴 결과 리오넬 메시보다도 낮은 3위까지 내려갔다. FIFA는 연장 재투표 전후로 집계한 순위에 변동은 없었다고 발표했지만, 뮌헨이 연장 재투표 이전의 결과를 공개하라 요구하자 이를 무시했다. 이는 2012년에 무리뉴 감독상과 관련해 일어났던 투표 조작 논란엔 지체없이 투표 용지를 공개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기자단 투표는 예상대로 리베리가 1위로 선정됐고, 투표 기간 연장이 이뤄지기 전엔 도박 사이트들의 배당률이 하나같이 리베리가 1위, 메시가 2위, 호날두는 3위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월드컵 플레이오프 이후 리베리와 호날두의 배당률 순위가 바뀌었다. 투표 기간 연장 재투표와 호날두의 플레이오프 활약이 실제 투표 심리에 영향을 미쳤단 증거로 볼 수 있다.

일부는 호날두의 득점 기록을 보고 호날두의 개인 기량이 가장 뛰어나서 수상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개인 퍼포먼스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기회 창출 횟수, 드리블 횟수 등이 포함된 세부 스탯을 참고하면 리베리는 득점만 호날두에 밀릴 뿐 전체적인 기량이 호날두에 밀린다고 보기 어려웠다. 애초에 리베리는 호날두처럼 팀의 기회의 대부분을 독차지하는 유형의 선수도 아니다. 이런 기준이면 과거에 엄청난 득점력을 보여줬던 수많은 공격수들도 재평가를 받을 여지가 필요하고[10], 따라서 현재의 기준이 골게터에만 지나치게 관대한게 아닌지도 논란이 생겼다.

2013년 발롱도르는 FIFA 발롱도르의 신뢰성 논란에 기름을 부었고 결국 3년 후인 2016년부터 다시 예전처럼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이 분리되는 계기가 됐다. 결과 발표 이전 발롱도르 장식장까지 사놨던 리베리는 현재까지도 호날두에게 발롱도르를 강탈당했다는 인터뷰를 할 정도다.

2.9. 2020년 미시상

코로나19 유행으로 인해 역사상 처음으로 발롱도르 시상이 취소됐다. 프랑스 풋볼은 코로나 19로 인해 수상자 결정에 필요한 경기가 너무 적고 220명의 채점자들이 전 세계에 퍼져 있어 관찰이 어려운 점 등 공정성을 기하기 어렵다는 것을 취소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일부 리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주요 대회들이 정상적으로 마무리됐고, 코로나 자체가 문제라면 더 베스트 FIFA 풋볼 어워드처럼 화상통화로 시상식을 진행하는 방법도 있었기에 많은 이들의 반발을 샀다. 프랑스 풋볼이 자국 리그인 리그 1이 조기에 종료됐다는 이유로 시상식을 취소한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당연히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바이에른 트레블을 이끌고 요한 크루이프 이후 2번째 득점왕 트레블을 달성한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였다. 포포투가 102개국의 기자들에게 연락해 발롱도르와 같은 방식으로 한 해 최고의 선수를 가린 결과 레반도프스키가 2위 케빈 더 브라위너의 5배에 가까운 점수를 받는 압도적인 결과로 선정됐고,[11] 정상적으로 진행된 UEFA 올해의 선수, FIFA 올해의 선수상도 전부 레반도프스키가 수상했으며, 팬들과 전문가들 그 어느 쪽도 레비의 수상 자격을 의심치 않았다.

이 사건은 분데스리가 선수에 대한 차별 논란으로 이어졌고 2021년 시상식까지 논란을 번지게 했다. 선수들의 2020년 활약상을 2021년 시상식에 적용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게르트 뮐러 트로피를 신설한 의도가 레반도프스키에게 발롱도르를 주지 않기 위해 대체품을 만든 것 아니냐는 음모론도 등장했다. 이는 결국 레반도프스키가 뮌헨을 떠나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계기로 이어졌다.

발롱도르 시상식의 고위 관계자 니콜라스 마니시에는 2021년 시상식 이전에 레반도프스키의 쓰라림을 이해하며 지난해의 발롱도르를 올해 시상식에서 시상할지를 논의했으나, 2021년 수상 실패에 대한 위로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무산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시상식 취소에 반발하는 의견이 많았고 2021년 시상식에서 메시가 공개적으로 레반도프스키의 2020년 수상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자 프랑스 풋볼 편집장 파스칼 페레가 이를 검토해보겠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이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흐지부지됐다.

3. 그 외 토론

아래 수상자들은 위 수상자들에 비해 논란의 규모가 작거나 정당한 근거들이 제기된 수상자들이다. 해당 사례들 역시 특정 국가, 팀 혹은 팬덤이 의문을 표하거나, 당대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경기력을 직접 보지 못한 후대인들이 기록표를 보고 의문을 제기하거나, 아니면 수상자 자체는 아예 논란이 없는데 다른 외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존재하는 등 아예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논란의 여지를 1조차 주지 않고 모든 축구인들과 팬들을 만족시킬 완벽한 결과를 내는 것이 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3.1. 1956년 스탠리 매튜스

초대 수상자 스탠리 매튜스는 그 해 최고 선수급 활약을 펼쳤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고, 냉정하게 한 해의 퍼포먼스를 비교하면 레알 마드리드 유러피언컵 초대 우승으로 이끌고 라리가 득점왕에 오른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가장 뛰어났다는 평가가 중론이다.[12] 그러나 발롱도르가 탄생한 이유 중 하나가 스탠리 매튜스가 이전까지 축구사에 기여한 공로와 축구계 대선배로서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서이니 당연히 초대 수상자는 스탠리 매튜스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디 스테파노 입장에선 그저 발롱도르라는 상이 본인 커리어 후반부에나 생겼다는게 아쉬울 뿐.

3.2. 1958년 레몽 코파

레알 마드리드에서 유러피언컵과 라리가를 우승하고 프랑스 월드컵 3위에 올린 레몽 코파가 1위 표 16개 중 14개를 가져가며 수상했다. 국가대표 동료 쥐스트 퐁텐은 월드컵에서 6경기 13골이라는 경이로운 득점력을 보여줬고[13] 리그 1에서도 득점왕을 차지했지만 스포트라이트를 코파에게 내준 후 포디움에 드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원래 대중들은 골을, 전문가들은 플레이메이킹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으니 전문가들이 선정하는 상에서 플레이메이커인 레몽 코파가 골잡이 쥐스트 퐁텐보다 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인정받은 것은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다.[14] 게다가 레몽 코파는 클럽에서도 라리가와 유러피언컵을 모두 우승한 핵심 멤버 중 하나였고 1위 표 16개중 14개를 쓸어간 것에서 알 수 있듯 레몽 코파의 수상은 딱히 논란거리가 아니다.

논란은 따로 있는데, 놀랍게도 유러피언컵과 라리가에서 득점왕을 달성하며 레알 마드리드의 에이스 역할을 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단 1점조차 못 받고 아예 명단에서 제외된 것이다. 아무리 디 스테파노가 월드컵 예선에서 탈락해 국가대표 활약상이 없다곤 해도 0표를 준 건 너무 가혹한 느낌이 있는데, 언론들에 따르면 당시 기자들 사이에서 한 선수에게 발롱도르를 여러 개 주는 것을 피하자는 여론이 형성돼 작년 수상자인 디 스테파노를 의도적으로 외면했다고 한다. 하지만 1959년에 다시 디 스테파노가 수상한 것을 보면 그러한 결심들이 오래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3. 1960년 루이스 수아레스

바르셀로나의 라리가, 인터시티 페어스컵 우승을 이끈 루이스 수아레스가 레알 마드리드의 유러피언컵 우승을 이끈 페렌츠 푸스카스를 꺾고 발롱도르를 차지했다. 푸스카스는 36경기 47골이란 훌륭한 득점력을 보여주며 유러피언컵, 라리가 득점왕을 차지했음에도 아쉽게 자신의 첫 발롱도르 수상을 놓쳤다. 하지만 수아레스도 당대 전문가들에게 활약상을 크게 인정받은데다 펠레가 이끄는 남미 최강 클럽 산투스를 인상적인 활약으로 꺾어 많은 표를 얻었다.

이 해는 이미 30대에 들어선 푸스카스가 발롱도르를 수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결국 그는 결국 커리어를 마무리지을 때까지 발롱도르를 수상하지 못했다. 발롱도르가 좀 더 빨리 만들어졌다면 헝가리의 매직 마자르를 이끌며 1950년대를 풍미한 푸스카스도 여러 개를 수상할 수 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고 있다.

3.4. 1964년 데니스 로

데니스 로는 1963-64 시즌 42경기 46골이라는 엄청난 득점 기록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그러나 팀 성과가 부족했던 점, 지미 그리브스에게 풋볼 리그 득점왕을 내준 점, 28경기 46골을 기록한 에우제비우의 득점력이 더 좋았다는 점 등으로 인해 팬들 사이에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 당시 팀 커리어가 가장 좋았던 선수는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1964와 1963-64 시즌 유러피언컵을 우승한 루이스 수아레스이며, 유로 챔피언스 리그를 동시에 우승한 최초의 선수로 축구사에 이름을 남겼다. 따라서 수아레스를 지지하는 의견도 꽤 있는 편. 그러나 수아레스도 개인의 활약상에 대해 팬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리고 있는데, 양 대회에서 MVP급 활약을 보여준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일부 있다.

3.5. 1966년 바비 찰튼

1점 차이로 결과가 바뀐 1966년 발롱도르는 에우제비우 바비 찰튼이 유력한 수상 후보였다. 에우제비우 프리메이라 리가 득점왕, 유러피언컵 공동 득점왕, 월드컵 득점왕을 수상하며 출전하는 대회마다 최고 공격수의 모습을 보여줘 발롱도르 투표에서 80점을 얻었으나 바비 무어와 함께 MVP급 활약으로 잉글랜드에게 최초의 월드컵을 안겨준 바비 찰튼이 81점을 받아 1점 차이로 발롱도르를 내줬다.[15]

3.6. 1974년 요한 크루이프

당시 1974년 서독 월드컵, 유러피언컵, 분데스리가를 모두 우승한 프란츠 베켄바워는 발롱도르 수상을 기대했으나, 이 해 발롱도르는 그의 숙명의 라이벌인 요한 크루이프가 차지했다. 이 결과에 베켄바워는 "도대체 내가 뭘 더 했었어야 했나, 크루이프가 나보다 나은 선수일지는 몰라도 나는 세계를 제패했다"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실제로 다른 연도였다면 발롱도르를 수상하기에 넘치도록 충분한 성과였으니 베켄바워 입장에선 아주 아쉬운 결과였다. 그러나 당시 크루이프는 월드컵에서 토탈 풋볼이란 혁신적인 전술을 주도하며 단일 대회 역대 최다 기회 창출을 기록하는 엄청난 임팩트를 남겼고,[16] 또한 이 대회를 계기로 축구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17]

크루이프와 베켄바워에 대부분의 표가 쏠린 것을 보면 당시 기자들도 크루이프의 기량과 베켄바워의 실적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국 크루이프의 임팩트를 무시할 수가 없었던 기자들은 약간의 차이로 크루이프의 손을 들어줬다.

반대로 크루이프는 1971-72 시즌에 아약스의 구단 사상 첫 트레블을 이끌었으나 곧바로 개최된 유로 1972를 우승한 베켄바워 등 서독 선수들에 밀려 포디움에도 못 든 적이 있다.[18]

3.7. 1994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1993-94 시즌 UCL 결승에서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가 이끄는 바르셀로나는 파올로 말디니가 이끄는 밀란에 0:4로 완패했다. 그러나 그 직후 열린 1994 미국 월드컵에서 스토이치코프는 약소국인 불가리아를 캐리하며 월드컵 4위로 이끌고 득점왕까지 차지하며 유럽 선수들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게 됐다. 말디니도 월드컵에서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며 이탈리아의 준우승에 기여하긴 했으나, 이탈리아를 결승까지 이끈 에이스는 로베르토 바조였다는 평가가 많았고[19] 월드컵에서 큰 점수를 받은 스토이치코프가 1위를, 바조가 2위를 차지해 말디니는 3위로 밀리게 됐다. 스토이치코프와 바조 둘 다 역대급 캐리력과 임팩트를 보여줬으니 이해하지 못할 결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밀란 팬들은 아쉬움을 표현하곤 한다. 또한 당시 월드컵에서 브라질 에이스로서 결승에서 바조와 대결을 펼치고 우승과 MVP를 따낸 호마리우 역시 당시에는 발롱도르가 유럽인 최우수상이었던 탓에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3.8. 1995년 조지 웨아

1995년 발롱도르는 유럽 선수였던 후보 기준을 UEFA 소속 클럽의 선수로 완화했고 이 해 최초로 비유럽 출신 수상자가 등장했다. 그 주인공은 아프리카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꼽히는 조지 웨아로, 1994-95 시즌 파리 생제르맹 쿠프 드 라 리그, 쿠프 드 프랑스 우승을 이끄는 동시에 챔피언스리그 4강에 도달해 11경기 7골로 득점왕을 차지했다.

다만 웨아의 경기를 보지 못한 팬들은 의문을 품곤 하는데, 웨아가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득점력을 가진 스트라이커는 아니었기에 기록상으론 생각보다 평범하다고 느낄 수 있다. 웨아는 1994-95 시즌 리그 34경기에서 7골을 득점했다. 이들이 주목하는 선수는 유니세프 올해의 유럽 축구 선수 수상자이자 발롱도르 투표 3위에 오른 야리 리트마넨이다. 리트마넨은 비록 득점왕을 수상하진 못했지만 에레디비시에서 27경기 17골, 챔피언스리그에서 11경기 6골을 기록, 훌륭한 득점력을 보이며 두 대회를 모두 우승했다.

하지만 당시 경기를 본 팬들은 웨아가 발롱도르를 수상할 만한 퍼포먼스를 보여줬다고 평가한다. 득점력이 압도적인 선수는 아니었어도 크랙 유형의 드리블러였기에 득점만으로 평가할 수 있는 선수는 아니었다. 득점 기록이 온전하게 실제 활약상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20] 웨아는 이 해에 능력을 인정 받아 밀란으로 이적했고 이후에도 전성기를 이어갔다.

3.9. 1996년 마티아스 자머

1996년 발롱도르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분데스리가 우승과 독일 유로 1996 우승을 이끌며 초대 유로 MVP를 수상한 마티아스 자머가 가져갔는데, 투표에서 호나우두1점 차가 나는 초접전을 벌였다.[21]

기량적으로 1996년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은 선수는 호나우두였다. 호나우두는 1995-96 시즌 후반기를 에레디비시에서 보냈지만,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1996-97 시즌 전반기에 월드 사커, 프랑스 풋볼, 돈 발롱 등의 언론사들이 바로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와 같은 역대 최고의 선수들을 소환해 비교하기 시작할 정도로 경이적인 퍼포먼스와 득점 행진을 보여줬다. 그 결과 FIFA 올해의 선수,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RSSSF 올해의 선수상은 전부 호나우두가 수상했고 1위 표도 호나우두가 자머보다 3개나 더 받았다.

결국 이 해 발롱도르는 팀 성적의 자머와 개인 퍼포먼스의 호나우두의 싸움이었는데, 결국 유로 우승과 해당 대회 MVP라는 업적을 무시할 수 없었는지 발롱도르는 자머에게 돌아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빅리그에서 겨우 반년 활약한 선수가 유로 MVP와 접전을 벌이는 게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만큼 호나우두가 보여준 퍼포먼스가 당대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는지 알 수 있는 결과다.

3.10. 2002년 호나우두

2002년 수상자는 2002 월드컵 득점왕을 차지하며 브라질의 5번째 우승을 이끈 호나우두였다. 다만 클럽에서의 활약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투표였기에 논란이 있었다. 호나우두는 장기 부상 끝에 월드컵 직전에야 피치에 복귀했고, 리그에서 불과 10경기에만 출전했다. 아무리 월드컵이 축구계 최고의 대회라지만, 그래도 클럽에서의 활약상이 매우 적었음에도 단순히 월드컵에서 보여준 포스로만 상을 수여했기에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았다.[22]

물론 발롱도르는 전통적으로 대회의 위상을 중시했다.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중요할 수 밖에 없는게, UEFA 유로, 월드컵 같은 국가대표 메이저 대회는 4년 주기로 열려서 희소성도 큰데다 국가대표 경기인 만큼 대중들의 훨씬 많은 주목을 받는다.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챔피언스 리그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이 월드컵 때만큼은 축구얘기를 한다. 그래서 리그, 챔피언스리그에서 활약한 선수보다 유로, 월드컵에서 활약한 선수가 사람들의 뇌리에 더 짙게 각인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FIFA 발롱도르 시기인 2010, 2014년을 제외하면 월드컵 시즌마다 월드컵에서 맹활약했던 선수들이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일관적인 역사가 있었고, 월드컵 활약만으로 발롱도르를 탄 사례는 1982년의 파올로 로시도 있었다. 심지어 이쪽은 더욱 극단적이다.

다만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2001-02 시즌에 거의 모든 경기를 훌륭히 소화하며 레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견인하고 월드컵에서도 대활약을 펼친 브라질과 레알 마드리드의 동료 호베르투 카를루스가 수상하는 것이 더 정당하다는 의견도 많았다. 브라질의 에이스는 호나우두가, 레알 마드리드는 지네딘 지단이 꼽혔지만, 실제 1위 표는 카를루스가 호나우두보다 7개나 더 많이 가져갔다. 각 팀의 2인자였어도 고려할 만한 팀 내 비중을 차지했기에 나온 이야기였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팀 커리어로 대충 퉁치는 분위기가 있는데 해외에서는 팀의 1인자였는가, 우승 기여도 1위인가 하는 이른바 옵션론을 엄청 중요하게 여기기에 양쪽에서 활약 했다지만 양쪽에서 '2인자'였던 카를로스는 이 점에서 불리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해 최고의 선수로 가장 인정받은 선수가 호나우두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FIFA 올해의 선수상도 호나우두가 수상했고,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옹즈도르, RSSSF 올해의 선수 등 팬들의 선정도 모두 호나우두의 몫이었다. 축구계 가장 큰 위상을 지닌 대회에서 기여도 1위로 우승을 차지했으니 당시 사람들이 호나우두를 발롱도르 위너로 뽑은 것은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3.11. 2003년 파벨 네드베드

파벨 네드베드는 2002-03 시즌 유벤투스 세리에 A 우승과 챔피언스 리그 결승으로 이끈 1등 공신이었고, 기자들과 팬들의 많은 지지를 받아 52개의 1위 표 중 과반수인 27개나 가져가며 무난하게 수상했다. 그러나 투표 결과가 나온 후 일부 이탈리아 축구인들의 강한 비판이 나왔고, 이들은 대체로 AC 밀란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끈 파올로 말디니를 강하게 지지했다. 네드베드 본인도 겸손한 성격이라 자신이 다른 후보들을 이긴 이유를 모르겠다고 인터뷰를 했다. 이것이 화제가 되어 네드베드의 발롱도르는 논란거리가 돼버렸다.

최근의 언론들은 티에리 앙리가 발롱도르를 타지 못한 것을 주목할 때 과거 논란이 되었던 네드베드의 발롱도르를 회상하곤 한다. 앙리가 고점이었던 시기가 2002-03 시즌이었고 그 시즌의 프리미어 리그에서 24골 20도움을 기록했다. 단일 시즌 동안 20골과 20도움 동시에 기록한 선수는 프리미어리그에서 앙리가 유일했고, 유럽 빅리그로 넓혀도 2020년에 리오넬 메시가 라리가에서 기록하기 전까지 유일했다. 또한, 2003년 동안 42골 26도움을 기록한 것도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시대 이전엔 나오기 쉽지 않은 기록이었다.

하지만 위의 논란들로 네드베드가 말디니와 앙리에 미치지 못했다고 단정할 순 없다. 네드베드는 FIFA 올해의 선수 투표에선 5위에 그쳐 낮은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분명 전체적인 여론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네드베드는 UCL에서 4강 레알 마드리드전까지 출전한 경기마다 큰 임팩트를 보여줬다. 결승전을 경고 누적으로 결장하고 유벤투스가 패배한 뒤 '네드베드만 있었다면' 같은 가정법과 보상 심리가 적용됐다는 주장은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네드베드의 공백이 매우 컸음을 의미한다. 네드베드는 대회 종료 후 UEFA 기술위원회로부터 올해의 미드필더를 수상했고 이는 세 선수 중 유일한 UEFA 개인상이다. UCL 챔피언인 말디니는 호베르투 카를루스에게 UEFA 올해의 수비수상을 내줬다.

세리에 내에서도 말디니보다 네드베드가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기자들의 평점으로 선정한 구에린도르와 선수들이 선정한 AIC 올해의 선수상은 모두 네드베드의 몫이었다. 특히 선수들의 MVP로도 뽑혔다는 사실로 논란의 시발점이 된 이탈리아 축구인들의 주장이 극히 일부의 주장이라는 걸 알 수 있고, 저들이 말디니와 함께 꺼내던 선수가 해외에선 전혀 거론되지 않던 프란체스코 토티였단 점을 볼 때 국수주의자들의 시선이라 볼 수 있다.

앙리의 경우 당시 프리미어 리그의 주목도가 기자들 사이에서 낮았다는 점을 근거로 들 수가 있다. 앙리는 ESM 이달의 팀에 단 2번 밖에 선정되지 못했고 올해의 팀에서 제외됐다. 그도 그럴 것이 챔피언스 리그 결승의 2팀과 4강의 3팀이 세리에 클럽인 반면 프리미어 리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8강에 진출한게 전부였고, 앙리의 아스날 FC는 2차 조별리그에서 떨어졌다. 오히려 앙리가 2위에라도 오른 것은 기자들이 그의 기록을 존중해줬기 때문이다.

당시 팬들 사이에서도 네드베드가 최고라는 의견은 그다지 논란이 되지 않았다. 월드 사커와 RSSSF의 올해의 선수상도 큰 차이로 네드베드가 수상했다. 오히려 네드베드의 경기를 접하지 못했고 축구를 직접 시청하기보단 경기 후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움짤이나 스탯 등만 보는 경향이 강한 최근의 팬들이 공격 포인트가 적다는 이유로 그를 저평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12. 2014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2010년의 리오넬 메시와 함께 유이하게 월드컵 활약이 고려되지 않은 수상자가 됐지만, 독일 쪽 여론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아주 큰 논란이 되지 않았다. 2014 월드컵에서 특출난 모습을 보여준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승국 독일도 2010년의 스페인처럼 팀 전체가 잘해서 우승했다는 이미지였고 실버볼의 토마스 뮐러, 골든글러브의 마누엘 노이어가 약간의 차이로 주목받았지만 역시 공로를 모두 가져가기엔 애매했다. 월드컵 골든볼을 수상한 메시는 최다 드리블과 최다 기회 창출을 기록하며 아르헨티나를 결승으로 이끌었지만 토너먼트 활약상은 부족했다는 논란이 있었고, 브론즈볼 수상자 아르연 로번과 득점왕 하메스 로드리게스도 팀 성적은 최선이 아니었다.

결국 국가대표에서 마땅히 눈에 띄는 선수가 없으니 차라리 클럽 대회에서 확실하게 활약한 선수를 찾는 것이 나았고, 그 선수는 이견의 여지 없이 호날두였다. 호날두는 챔스 최다 득점 기록을 17골로 갈아치우며 레알 마드리드의 UCL 우승에 크게 기여했고, 라리가 최다 득점도 기록해 유러피언 골든슈도 수상했다. 월드컵에서 극도의 부진으로 포르투갈을 조별 리그에서 탈락시킨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월드컵에서 특출난 선수가 없었기에 쉽게 발롱도르의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기자단도 호날두에게 가장 많은 표를 줬다.
한편 메시는 라리가 우승도 실패하고 UCL 8강에서 탈락해 무관에 그쳤지만, 그래도 훌륭한 개인 기량을 보여줬고 다소 논란이 있어도 월드컵 골든볼을 수상했으니 2위에 올랐다.

노이어는 조국의 월드컵 우승 뿐만 아니라 바이에른의 분데스리가 및 포칼 우승에도 기여해 발롱도르 포디움에 올랐다. 스위퍼 키퍼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준 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스위퍼 역할을 겸업하는 것으론 축구계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플레이메이커와 골게터를 능가하지 못했고 3위에 만족해야 했다. 아니면 사실은 능가할 수 있었으나, 경쟁 상대가 하필 역대급 공격수로 평가 받는 호날두와 메시라서 패배했을 수도 있다.[23]

3.13. 2018년 루카 모드리치

루카 모드리치는 레알 마드리드의 UCL 우승과 전통 강호가 아닌 크로아티아 2018 월드컵 준우승에 크게 기여해 UEFA 올해의 선수, 월드컵 골든볼, 그리고 발롱도르까지 수상하며 2018년의 주인공이 됐다. 이에 모드리치의 레알 마드리드 동료이자 발롱도르 2위에 오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일부 팬덤이 투표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곤 하는데, 이들은 모드리치가 크로아티아 팀 동료들의 공로를 불합리하게 독차지했고, 레알 마드리드의 1인자는 모드리치가 아니라 호날두였으며, 호날두가 성폭행 논란을 겪어 발롱도르 투표에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억지주장에 가까웠기에 그다지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오히려 포디움 이외의 아래 순위 산정 방식에 비판점이 더 많았는데 자세한 건 후술.

크로아티아의 득점 해결사 역할을 한 마리오 만주키치 이반 페리시치, 중원 싸움을 도운 이반 라키티치, 2번의 승부차기를 모두 승리로 이끈 다니옐 수바시치 등 모드리치에게도 든든한 동료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드리치는 대회 공식 스폰서를 포함한 통계 매체들과 각 언론사들, 팬 투표까지 만장일치로 대회 베스트 11에 선정돼 이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평가를 받았다. 전문가와 팬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객관적인 통계까지 모드리치가 최고의 에이스였다는 것에 이견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팀의 에이스가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는 현상은 스포츠계에서 흔한 일이고, 발롱도르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딱히 문제될 일이 아니다. 호날두 본인도 마르셀루의 드리블 돌파, 라모스의 수비력과 클러치, 그리고 모드리치의 탈압박과 조율 등등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여러 대회들을 우승하고 5개의 발롱도르를 가져간 것이지, 호날두가 팀보다 위대해서 공로를 전부 가져간 것이 아니다.

호날두는 UCL 조별리그 첫 경기부터 8강 2차전까지 10경기 15골을 폭격하는 압도적인 득점력으로 레알 마드리드를 4강으로 이끌었고, 이때까진 호날두가 레알 마드리드의 1인자였다.[24] 그러나 주목도가 더 올라가는 4강과 결승에선 최악의 경기력에 공격 포인트를 올리지 못했고, 에이스 자리를 모드리치한테 내줬다.[25] 대회를 우승한 후 득점왕과 시즌의 공격수상을 수상했지만, UEFA 올해의 선수상은 모드리치가 가져갔다.[26] 또한 UEFA 시상식은 호날두의 성폭행 논란 이전에 열렸기에 성폭행 논란이 호날두의 팀 내 위상에 영향을 줬다고 볼 수도 없다. 결론적으로 호날두가 2018년 이전에 레알 마드리드의 에이스로서 보여준 엄청난 활약과 높은 스타성 때문에 이에 따른 후광으로 골 기록만 보고 경기력에 대한 세부적인 분석 없이 호날두를 해당 시기의 독보적인 에이스로 오해하여 2018년 발롱도르에 이의를 제기하는거지, 2017-18 시즌, 특히 해당 시즌 후반기의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팀의 에이스라고 보기 어려웠다.[27]

결정적으로 호날두는 월드컵 초반엔 스페인전 해트트릭, 모로코전 결승골로 맹활약했지만 이후 이란전에서 PK를 실축하고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서도 부진한 경기력으로 끝내 무득점으로 침묵해 조기 탈락했다. 온라인 팬 투표에선 대회 베스트 11에 선정됐지만, 통계와 전문가, 언론들은 모두 호날두를 외면해 모드리치와 대조적인 평가를 받았다. 결국 모드리치가 발롱도르 투표에서 753점을 받아 478점의 호날두를 무려 300점에 가까운 차이로 크게 따돌렸다. 호날두는 오히려 414점으로 3위에 오른 앙투안 그리즈만과 표 차이가 별로 없었다. 게다가 모드리치는 발롱도르, UEFA 선수 뿐만 아니라 FIFA 올해의 선수,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등 여러 개인상들을 싹쓸이했고, 이는 기자, 축구인, 팬 등 신분에 상관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드리치를 지지했다는 의미다.

한편 프랑스의 월드컵 우승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UEFA 유로파 리그 우승을 이끈 그리즈만은 발롱도르 투표에서 3위에 그치자, '내가 뭘 더 해야 했을까? 나는 모르겠다'고 불만의 목소리를 냈다.[28] 그리즈만도 월드컵 우승 팀의 에이스 역할을 했기에 이해가 안 되는 발언은 아니지만[29], 클럽에서의 활약상이 비교적 부족했다. 라리가, UCL, UEFA 슈퍼컵 등 그리즈만이 인상을 남길 수 있는 대회가 더 있었고, 여기서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면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30]

유력 후보들과 조금 거리가 있긴 했지만 아래 순위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다. 라리가와 코파 델 레이에서 바르셀로나를 우승시키고 라리가 MVP 및 득점왕에 오른 리오넬 메시[31], 리버풀을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진출시키고 프리미어 리그 MVP 및 득점왕에 오른 모하메드 살라가 각자 5, 6위에 그쳐 저평가를 받았다는 의견이 나왔다. 4위에 오른 킬리안 음바페는 파리 생제르맹의 도메스틱 트레블에 기여하긴 했지만 두 선수를 이기기엔 클럽 활약상이 역부족이었는데, 월드컵에서 많은 점수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10대의 어린 선수가 월드컵에서 크게 활약하며 펠레에 비견되는 최연소 기록들을 세우고 특히 16강에서 메시의 아르헨티나를 침몰시키는 임팩트를 남기자 많은 주목을 받았다

3.14. 2021년 리오넬 메시

리오넬 메시는 2020-21 시즌 라리가 득점왕에 오른 것에 이어 2021 코파 아메리카에서 사상 최초로 우승, MVP, 득점왕, 도움왕을 모두 차지했고, 처음으로 자신의 커리어에 메이저 국제대회 우승 경력을 추가, 클럽과 국가대표 팀 양 쪽에서 훌륭한 기량을 선보여 2021년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메시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는 2020-21 시즌 분데스리가에서 29경기 41골로 분데스리가 단일 시즌 최다 골 신기록을 세우며 바이에른 뮌헨의 우승을 이끌었고, 시즌이 끝난 후 VDV 올해의 선수, 올해의 독일 선수, 유러피언 골든슈를 차지했다. 그러나 UEFA 유로 2020에선 압도적이지 않았고[32], 발롱도르 투표에서 580점을 받아 613점의 메시에 밀렸다.

그런데 이 투표 결과는 축구계에서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 코파 아메리카 종료 후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한 메시가 2021-22 시즌 전반기에 득점력은 물론이고[33] 경기력 측면에서도 극심한 부진에 빠진 것이 원인이었다.[34] 반면 경쟁자인 레반도프스키는 2021년 하반기에도 뛰어난 기량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하반기의 퍼포먼스를 제대로 적용해야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이 주장도 문제점이 있는데, 발롱도르 투표 종료일은 10월 26일이고 리그 1 개막일은 8월 6일이었다. 즉, 메시에게 고려할 2021-22 시즌 전반기 활약상은 3달도 안 됐고, 이는 다른 선수들도 비슷하므로 사실상 이 시기 발롱도르는 '연 단위'가 아닌 '시즌 단위'였다. 프랑스 풋볼도 이게 논란이 될 걸 예상치 못했는지 아예 차기 시상식부터 발롱도르 평가 기간을 시즌 단위로 공식화시켰다. 결국 시점에 따라 수상자가 바뀔 수 있다면 투표 시점만 일정하게 지키면 될 일이다. 오히려 투표 시점이 불일정한 상은 FIFA 올해의 선수상이다.[35] 2017~2019년처럼 9월 이전에 투표가 마감됐다면 FIFA 올해의 선수상도 메시가 차지했을 확률이 높다.[36]

[1] 연구 시기가 2010년부터 2016년까지로 7년 중 6년이 가장 논란이 컸던 FIFA 발롱도르 시기이긴 하나, 투표자와 선수의 국적, 언어, 종교, 인종은 물론 출생지역이나 식민지 여부에 따라서도 결과가 편향된다는 연구 결과가 유명하다. 결국 인기 투표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위해선 보다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하단 의견이 있다. [2] 팀은 부진했지만 키컨은 유일하게 여름과 겨울의 키커 랑리스테에서 모두 WK 평가를 받으며 리그 MVP급 활약을 했다. [3] 1995년 이전까지 발롱도르는 '유럽 최우수 선수상'이었기에 당시 비유럽인은 애초에 후보 대상자가 아니었다. [4] PFA 올해의 선수, FWA 올해의 선수상을 모두 수상했다. [5] 피구 20표, 지단 24표 [6] 이전 해에 있었던 1차전 원정에선 클린 시트를 기록했지만 2차전에서 오언의 해트트릭을 포함해 5실점을 하며 패배했고 결국 9조 1위 자리를 잉글랜드에게 내줬다. [7] 특정 선수들의 팬덤끼리 논쟁을 할 때 '발롱도르를 받았다고 무조건 위면 오언이 앙리, 라울보다 위냐?'라는 의견이 단골로 나올 정도로 논란 많은 발롱도르의 대표적인 예가 돼버렸다. [8] 앙리는 37경기 30골, 셰브첸코는 32경기 24골을 기록했다. [9] 다만 골든볼 10인 후보에 포함됐고 우승국 감독 비센테 델 보스케는 메시가 골든볼을 수상해야 된다고 말했을 정도로 경기력은 뛰어났다. [10] 플레이메이커 요한 크루이프, 프란츠 베켄바워의 그늘에 가려져 1회 수상에 그친 골잡이 게르트 뮐러 등. 그리고 이런 기준은 사실상 발롱도르를 그냥 득점왕 상으로 취급한다고 볼 수 있다. [11] 3위는 사디오 마네가 선정됐고 메시, 호날두는 각각 4, 5위를 차지했다. [12] 그러나 이제 초회차 대회인 만큼 유러피언컵의 위상이 FA컵보다 높지 않았다고 보면 어느정도 이해는 가능하다. [13]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단일대회 득점 1위 기록이다. [14] 예를 들어 1970 브라질의 경우 자이르지뉴가 전경기 골+득점왕이란 엄청난 위업을 세웠음에도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친 선수는 플레이메이커였던 펠레가 꼽힌다. 1986 월드컵에서도 득점왕은 게리 리네커지만 아무도 그의 활약상이 감히 마라도나보다 뛰어났다고 하지 않는다. [15] 찰튼은 프랑스 풋볼과 레퀴프의 기자들이 선정한 월드컵 MVP로, 무어는 BBC 올해의 스포츠인으로 선정되었다. [16] 7경기 36회. 여기에 근접한 선수는 공동 2위 사비 에르난데스(2010년 7경기 30회), 카지미에시 데이나(1974년 7경기 30회), 4위 펠레(1970년 6경기 28회) 정도고, 한 대회에서 20개 전후의 찬스만 창출해도 해당 대회의 가장 뛰어난 플레이메이커로 평가받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어마무시한 기록인지 알 수 있다. [17] 당시 월드컵에 공식적인 MVP가 없었음에도 Tyc 스포츠, Dos 스포츠, 클라린, ESPN, 이콴지, 스포츠넷, 소파스코어, 캐스트롤, 키커까지 모든 언론사에서 크루이프를 대회 MVP로 선정했으니 그냥 크루이프가 독보적인 대회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 유로가 유러피언컵보다 높게 평가받은 걸 감안하면 베켄바워의 수상 자체는 문제가 없었으나, 유로에 지나치게 주목하여 트레블 팀의 에이스를 저평가한 것은 지적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19] 당시 바조의 퍼포먼스와 클러치는 결승 승부차기만 이겼으면 역대급 캐리우승으로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것이었다고 대부분의 전문가와 올드팬들이 동의하고 있다. 슬프게도 결과는 '비운의 영웅'으로 두고두고 회자되는 신세가 됐지만... [20] 항상 지적되는 문제인데 발롱도르=득점왕 상이 아니다. [21] 역대 2번째 1점 차 접전이다. 최초는 1966년. [22] 요한 크루이프는 2002년 발롱도르 결과에 월드컵의 비중이 과도하게 들어갔다고 비판하며 당시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 티에리 앙리가 수상하는 것이 옳았다고 평했다. [23] 그래도 2위 메시와는 0.04% 밖에 차이가 안났다. [24]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에서의 활약은 2018 발롱도르와 무관하다. [25] 모드리치는 특히 결승전에서 최고의 활약을 했다. 해당 시즌 UCL에서 호날두와 모드리치의 구도는 2022-23 시즌 맨시티의 로드리 엘링 홀란의 구도와 비슷하다. [26] UEFA 올해의 선수상은 UEFA 주관 대회인 유로, 챔피언스 리그 가중치가 매우 큰 상이다. 따라서 유로가 없었던 이 시즌만큼은 조별리그부터 결승전까지 꾸준히 우수한 경기력을 보여준 모드리치가 챔피언스 리그의 1인자로 인정받은 셈이다. [27] 모드리치 역시 2017-18 시즌 초반에 부상과 부진이 약간 있었지만, 이는 한 해를 기준으로 보는 2018 발롱도르와는 무관하다. [28] 1974년의 프란츠 베켄바워와 비슷하다. 베켄바워는 발롱도르 수상자였던 요한 크루이프를 월드컵 결승전에서 직접 꺾은데다, 클럽에서도 유러피언컵과 분데스리가를 우승하는 등 최고의 성과를 냈기에 더 아쉬웠을 것이다. [29] 월드컵에서 브론즈볼과 실버 부트를 수상했다. 그런데 우승을 했음에도 골든볼과 실버볼을 모드리치와 에덴 아자르에게 내줌으로써 임팩트나 팀 내 비중이 두 선수만큼은 아니었다고 평가 받은 것으로 보인다. 팀 동료 음바페와 팀에서의 지분이 나뉜 영향도 있었다. [30] UEFA 슈퍼컵은 우승했지만 본인의 활약은 미미했다. [31] 바르셀로나 감독과 팀 동료들, 비센테 델 보스케 등 일부 축구인들이 메시의 순위에 불만을 품었다. [32] 3경기 3골을 넣긴 했으나 무조건 잡았어야 할 슬로바키아를 상대로 무득점에 그쳤다. 다만 동점 상황에서 불필요하게 퇴장당한 그제고시 크리호비아크가 직접적인 패배의 원인이긴 했다. [33] 11월 20일에야 데뷔골을 기록했다. [34] 트랜스퍼마켓, 토마스 뮐러, 로타어 마테우스, 토니 크로스 등 특히 독일에서 거센 반발이 나왔다. 이미 2013년에 프랭크 리베리가, 2020년에 레반도프스키가 발롱도르를 타지 못했기에 유독 독일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이 저평가를 받는다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35] FIFA 선수상은 투표 종료일이 일정하지 않았는데, 2016년엔 11월, 2017~2019년엔 9월 이전에 투표를 끝냈고, 2020~2021년은 12월 중순까지 끝나지 않았다. [36] 실제로 발롱도르 시상식 이후 메시의 부진은 계속된 반면 레반도프스키는 2021년 69골을 기록하는 등 놀라운 퍼포먼스를 유지했고, 이에 따라 수상 기준이 연 단위인 FIFA 올해의 선수, 포포투, 가디언, 투토스포르트 선정 올해의 선수는 레반도프스키가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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