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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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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지성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클럽 경력


2.1. 프로 데뷔 이전

아버지 박성종은 전남 고흥군 점암면 신안리 용강마을 출신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정육점 반찬가게 등을 했고, 20대 초반 젊은 나이에 장명자와 결혼하여 22세 때 아들 박지성을 낳았다.

박지성은 신림동에 정착한 신혼부부에게서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서 출생했으나, 아버지의 사정으로 태어난지 1~2년 안되어 본적지이기도 한 아버지의 고향으로 낙향해 전남 고흥군 점암면 신안리에서 자라며, 고흥의 신안초등학교(현 점암초등학교 신안분교장)에 입학하여 3학년을 마칠 때까지 다녔고, 1990년 1월 가족과 함께 수원으로 이사했다. 대부분의 매체에는 박지성이 초등학교 2학년때 수원으로 전학되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박지성이 1990년 1월에 고흥 신안초에서 수원 산남초로 전학했다는 기록에 근거한다면 3학년을 마칠 무렵 전학한 것이 된다. 박지성의 생일은 양력으로 1981년 3월 30일이지만, 음력으로는 1981년 2월 25일이 생일이며, 박지성의 부모는 그를 음력 생일로 출생신고를 하여 실질적으로 한 학년 먼저 초등학교를 진학시켰다. 때문에 동갑인 이천수가 박지성을 형이라 부르고 한 살 많은 차두리와 친구로 지내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80년생과 빠른 81년생은 1987년(6세)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90년 2월 시점에 초등학교 3학년 과정을 마치고 4학년 진학을 준비하게 된다.

부친 박성종은 아들 박지성이 공무원이 되길 바랐으나, 박지성은 어린 시절 야구 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야구를 좋아해서 주로 거의 야구를 했었다고 한다. 박지성은 전남 고흥에서 수원 산남초등학교로 전학 온 후 야구부에 들어가려 했으나 선생님이 4학년이 되어야 입단시켜 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얼마 후 박지성은 다시 수원 세류초등학교로 전학갔는데 여기는 야구부가 없었고 때마침 축구부가 창단되어 축구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때 전학을 가지 않았다면 아마 야구를 계속하여 야구 선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야구를 계속했다면 프로 선수가 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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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차범근축구상 장려상을 수상했다. 장려상 공동 수상이긴 하지만 박지성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수상자 6명 중 자신이 꼴지였다고 한다. 이후 안용중학교에 진학했는데, 중학교 시절 별 볼 일 없던 팀을 도내 상위권 팀으로 도약시켰다. 참고로 안용중은 차범근이 서울로 전학가기 전에 다녔던 학교였다. 이 때문에 국외에서 유명한 한국 축구계 전설 2명을 배출한 학교가 된 셈이다. 안용중학교 축구부는 여러차례 축구부 해체설이 돌다가 2020년 결국 축구부가 해체되었다.

허나, 수원공고 시절부터는 왜소한 체격 때문에 여러모로 박대를 당했다. 거기에 더해 발 또한 평발.[1][2] J리그에서 은퇴하자마자 수원공고의 감독으로 부임한 이학종 감독은 그의 체격을 보완시키기 위한 훈련만 시켰고, 이는 박지성이 기본기를 철저히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의 부모는 박지성의 체격을 보완하고자 개구리로 즙을 만들어 먹이는 등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고, 키가 158cm에서 170cm로 컸다. 현재 박지성의 키는 공식 프로필 상 175cm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수원공고에서 주전으로 활약했으나 수원공고가 고교 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박지성도 선수로써 주목받는 선수는 아니었기에 고등학교 졸업 후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대학을 졸업한 후 프로 리그로 가는 것이 대부분이였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 후 프로 직행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3] 그러나 이학종 감독의 도움으로 김희태 감독이 있었던 명지대학교에 입학한다. 일반적인 인식 상으로는 박지성이 실력이 딸려 명지대도 겨우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에 대해 김현회 등이 밝힌 바에 따르면 과정이 조금 다르다. 당시 박지성이 노리던 곳은 관동대학교[4]와 수원 삼성이었다. 하지만 수원 삼성은 너무 경쟁이 치열했고, 관동대의 경우 당시 박지성이 재학 중이었던 수원공고에서 다른 선수 두 명을 끼워서 넣으려다 실패한 것이다. 그래도 수원공고 졸업 전 연고 구단인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 동기 네명과 함께 일주일 간 입단테스트를 봤지만, 동기 유기천을 제외하면 1999 K리그 드래프트에서 수원의 우선지명을 받지 못해 프로행이 좌절됐다. 고향팀인 수원 삼성 블루윙즈만을 고집하던 박지성이 수원 입성이 좌절되자 갈 곳이 없어졌고, 이에 우여곡절 끝에 명지대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명지대 감독이었던 김희태의 일화에 따르면 당시 명지대 축구부는 이미 신입생 선발을 끝냈기 때문에 박지성을 추가로 입학시키기 위해 테니스부를 찾아가 T.O(정원)을 빌려와서 박지성을 축구부에 입부시켰다고. 그래서인지 박지성 또한 선수 시절에 한국에 입국하면 대부분 학교에 방문하는 등 애교심을 보였다. 더불어 명지대학교 자연과학캠에는 '박지성 장학금' 까지 있다. 물론 100% 박지성 출자다.[5]

그 후 명지대 축구부가 울산에서 전지훈련을 할 때 마침 울산으로 전지훈련을 왔던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과 친선경기를 하게 되고, 이때 왼쪽 윙백으로 출전해 뛰어난 활약을 펼치자 허정무 감독의 눈에 띄어 바로 올림픽 대표로 선발된다.[6]

그러나 박지성의 올림픽 대표 선발을 두고 당시 참 말들이 많았다. 일단 당시에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며 작은 체격에 이리저리 뛰어다기만 하는 걸로 보였으며, 박지성 스스로도 수비 헛발질 등으로 삽을 푸기도 했다.

2.2. 교토 퍼플 상가



그 이후 각급 국가대표팀에서 여러 포지션에서 뛰다가 J리그의 상위권팀 시미즈 S펄스와 하위권팀 교토 퍼플 상가[7]의 영입제의를 받게 된다. 시미즈 S펄스는 C계약(대학생 조건부 계약)[8]을 제시했고, 교토 퍼플 상가는 정식선수 계약을 제시해서 교토 퍼플 상가로 입단하게 된다. 당시 한국선수 최연소 해외진출 기록이었다.[9]

2002 월드컵 후 다시 교토에서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며 팀의 1부 리그 재진입과 천황배 JFA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천황배 결승전은 1월 1일에 열리는 게 관례인데, 교토 퍼플 상가는 결승에 갈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팀이기에 선수 계약을 12월 31일까지 하곤 했다. 박지성도 전날인 2002년 12월 31일 계약이 만료되었으나 팀을 위해 돈 안받고(!!!) 뛰었다. 그리고 0:1로 뒤지던 팀은 후반 7분에 터진 박지성의 헤딩 골로 동점이 된 후, 박지성의 패스를 받은 공격수 쿠로베 테루아키가 넣으며 결국 2:1 역전승을 거두게 된다. 영상(7번이 박지성이다) 이 우승 컵은 지금까지도 구단이 보유한 유일한 우승 컵. 당연히 구단 측에서는 줄 필요 없다고 했던 출전 수당에 보너스까지 푸짐하게 얹어주었고, 구단 공식 스폰서인 교세라의 창업주 이나모리 가즈오
"어딜 가든 응원하겠지만 언젠가 반드시 돌아와 달라. 절름발이가 되어 돌아와도 받아주겠다."
라는 명언[10]을 남겼다. 박지성이 떠나간 뒤에도 두고두고 영웅 대접을 한 건 덤. 2020년 6월 일본의 축구전문지 사커 다이제스트가 선정한 J리그 구단별 역대 최고 선수에서 박지성은 교토 퍼플 상가 역대 최고의 레전드로 뽑혔다.

그렇게 2002 시즌을 교토에서 보낸 뒤 2003년, 히딩크가 이끄는 PSV 에인트호번으로 3년 계약을 하게 된다.[11]

2000 시즌 (J1리그): 16경기 1골
2001 시즌 (J2리그): 40경기 4골
2002 시즌 (J1리그): 29경기 8골

2.3. PSV 에인트호번



네덜란드 진출 후 처음엔 잘 적응하지 못하여, 저조한 성적을 이어갔다. 심지어 경기장에서 박지성이 공만 잡으면 원정팬들이 아닌 홈팬들로부터 야유를 받았으며, 이 상황을 본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을 원정경기에만 출전시켰다. 박지성 본인도 이 시기를 매우 고통스러웠던 시간으로 회상하고 있으며, 그 후 네덜란드에 완전히 적응하고, 실력이 일취월장하자 그 많던 야유가 환호성으로 바뀌었는데, 이 때의 경험을 박지성은 신기하게(또 약간은 냉소적으로) 반응하기도 했다. [12]

2003-04 시즌 중반부터 발군의 활약을 보이기 시작한 박지성은, 2004-05 시즌 주전으로 출전하며 PSV의 에레디비시 독주에 공헌함과 함께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철의 수비를 펼치던 AC 밀란을 상대로 골을 넣어 전 유럽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이때 PSV는 2000년대 최고의 성적인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까지 진출했다.

AC 밀란과의 준결승전은 밀란의 홈에서 0:2로 패배하며 PSV 팬들의 희망이 꺼져가고 있었으나[13], 에인트호번의 홈에서 열린 2차전에서 3:1로 승리하는 압도적인 경기를 펼친다. 특히 2차전 전반 9분경, 하셀링크와의 연계 패스를 통해 카푸-스탐-네스타(!)[14]의 밀란 수비진을 뚫고 호쾌한 첫 골을 터뜨리며 홈팬들을 열광에 빠뜨리는 동시에 추격의 발판을 마련했다.[15]

리옹과의 8강 2차전부터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눈에 들었던 박지성은, AC 밀란과의 4강에서도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내며 결국 맨유로 이적하게 된다. 당시 리버풀, 첼시, 데포르티보 등 유럽 여러 클럽이 영입 제안을 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2002/03 시즌: 8경기 (선발 2경기)
에레디비시: 8경기 (2)

2003/04 시즌: 40경기 (선발 30경기) 6골 4도움
에레디비시: 28경기 (19) 6골 2도움
챔피언스 리그: 5경기
유로파 리그: 5경기(4) 2도움
KNVB 베이커: 1경기
요한 크라위프 스할: 1경기

2004/05 시즌: 44경기 (선발 43경기) 11골 7도움
에레디비시: 28경기 (27) 7골 5도움
챔피언스 리그: 11경기 1골 1도움
챔피언스 리그 예선: 2경기 1골 1도움
KNVB 베이커: 3경기 2골

2.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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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2.5.1. 2012-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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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PSV 에인트호번 (임대)

한국시간 2013년 7월 28일 언론을 통해 PSV 에인트호번으로 임대 이적할 것이란 기사가 나오고 있다. 기사 메디컬 테스트가 예정되어있다고 박지성 본인이 측근에게 메세지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으며,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PSV와의 이적 협상이 지연되고 있는 가운데 언론에 따르면 그 이유는 금전적 문제와 계약 형식 때문이라고 한다. QPR에서 연봉을 70억원 가량 수령하고 있는 박지성에게 PSV측에서는 15억원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네덜란드 리그 자체가 매우 침체되었고, 2011년부터 PSV 측에서는 샐러리 캡 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중이다. 박지성에게 제시한 연봉이 딱 그 샐러리캡에 해당하는 100만 유로 가량으로,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만 이 샐러리캡을 무시할 수 있다는데 현재 박지성이 최고의 자리에서 많이 내려온 상태인데다가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 예외에 해당되지는 않는 듯 하다. 박지성 입장에서는 주급의 80%를 삭감하고 이적을 감행하기가 부담스러운 모양. 게다가 계약기간 2년을 놓고 1년 임대 이후 완전 이적이냐 2년 계약의 완전 이적이냐를 놓고 줄다리기 중인 듯 하다. 결국 2013년 7월 30일 PSV와 계약했다. 기사

감독이 과거 PSV 시절 같이 뛰던 필립 코쿠에, 코치가 맨유 시절 같이 뛰던 뤼트 판니스텔로이이다. 위 두 명과의 친분이 꽤 시너지로 작용한 듯 싶다.

이적이 결정된 후, 부상으로 복귀경기가 늦어지다가 그가 제일 필요한 AC 밀란과의 챔피언스리그 플레이오프에도 출전이 불투명할 줄 알았으나 귀신같이 회복했는지 당당하게 선발에 이름을 올렸다. 복귀 당시의 포지션은 오른쪽 윙어로 68분간 8.8Km를 뛰었다.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수비가담과 압박을 하는 평소처럼의 플레이를 보여줬다. 그리고 경기는 1:1로 비겼다. 경기 후 골닷컴에선 뛴 선수들 중 가장 높은 평점인 5점 만점에 4점을 받아 MOM에 선정하였다.(여담으로 평점이 가장 낮은 선수는 문타리였다.)

2013년 8월 25일 PSV가 전반 6분만에 실점하며 0-1로 끌려가자 코쿠 감독은 후반 21분 박지성을 교체투입했고, 박지성은 후반 41분 동점골을 넣으며 이에 화답했다. 무려 575일 만에 리그득점이었다.

그러나 4일 후 원정경기로 치른 AC 밀란과의 챔피언스리그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는 마티아 데실리오에게 집중마크 당하며 최악의 경기력을 보였고, 후반 15분 플로리안 요셉손과 교체당했다. 영국 골닷컴은 박지성에게 5점 만점에 단 1.5점만 부여하는 최악의 평점을 줬다. 골닷컴은 "교체되기 전까지 매우 실망스러웠다"며 "공격에서 상대에 문제를 일으키는데 실패했다"며 박지성의 플레이에 냉혹한 점수를 매겼다.

10점 만점으로 환산해도 3점에 불과한 평점은 박지성이 유럽 무대에 진출한 이후 받은 최악의 평가였다.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했을 당시 영국 스카이스포츠, 골닷컴으로부터 몇차례 평점 4점을 받은 적은 있다. 영국 ESPN 사커넷은 2011-2012 시즌 평가에서 박지성에 "그가 마지막으로 출전한 3경기에서 맨유가 모두 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면서 평점 4점을 매긴 적도 있었다. 결국 에인트호번은 보아텡에게만 2골을 내주며 0-3 완패를 당했고 챔피언스리그 본선행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같은 대회, 같은 팀과의 시합에서 평가가 극단으로 오가는 것은 박지성의 플레이가 골을 넣기 보단 그저 열심히 뛰면서 욕 먹지 않을 소극적 플레이만 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팀이 대패하면 선수들 평점도 낮게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만, 보통 같은 시합 같은 팀과의 경기에서 MOM과 최저평점을 왔다갔다 할 정도로 극단적이진 않다. 동료들이 잘 하고 팀이 승리했을 때는 공격포인트가 없어도 열심히 뛰어다닌 것을 칭찬할 만 하지만 팀이 졌을 때는 그저 뜀박질 하고 윙어 포지션이 수비에 치중하는 것을 잘 했다 볼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2013년 9월 23일 리그 우승을 위하여 이겨야 할 라이벌 AFC 아약스와의 에인트호번 안방경기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팀은 4:0으로 아약스를 대파하며 리그 1위로 올라섰다.

그 후 몇 경기 더 나오다 부상으로 한 달 이상을 결장했다. 그 사이에 PSV는 순위가 10위까지 떨어졌으며 네덜란드의 한 언론으로부터 먹튀 평가도 받았다. 2014년 3월 16일 리그 28차전, 2위 비테세 아른햄 원정에서 쐐기골을 도왔다. 이 승리로 팀은 3위까지 올랐다. 아직 트벤테가 추격 중이지만 비테세와 승점차가 2점으로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이 걸린 2위를 두고 에인트호번이 한층 힘을 내게 되었다.

2014년 3월 22일 29라운드 로다 JC 케르크라더와의 홈경기에 선발출전하여 풀타입을 소화하며 위르겐 로카디아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해 3:1 승리에 기여했다.

이 후 2위 경쟁에서 중요한 3연전 중 2경기에 선발출전하였고 한 경기는 결장하였으며 3경기에서 전패를 하며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확보하지 못했다.

2014년 4월 27일 33라운드 PEC 즈볼러와의 원정경기에 출전하여 풀타임을 소화해 팀의 2:1 승리에 기여했다.

2014년 5월 3일 리그 마지막 경기인 34라운드 NAC 브레다와의 홈경기에 선발출전하여 2:0으로 압선 후반 45분 교체아웃되며 프로 마지막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였다. 팀은 4위로 시즌을 마무리하여 유로파리그 예선진출권을 따내며 씁슬하게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2013/14 시즌: 27경기(선발 25경기) 2골 5도움
에레디비시: 23경기(21) 2골 5도움
챔피언스리그 예선: 2경기
유로파리그: 2경기

2.6. 현역 은퇴

2013-14 시즌이 끝나고 은퇴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박지성의 나이는 만 33세로 선수에 따라 몇 년 가량 더 현역 생활을 이어갈 법한 나이지만, 고질적인 무릎 부상 후유증과 QPR 이적 이후의 폼 저하 때문에 다소 이른 은퇴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16]

결국 2014년 5월 14일, 수원 박지성축구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더 이상 무릎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5월 24일 창원축구센터에서 열린 경남 FC PSV 에인트호번과의 친선전이 프로선수 박지성으로서는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이로써 박지성은 1991년 세류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작해 한국 축구의 부흥기와 영광을 함께하며 국가대표팀의 캡틴으로 활약해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남은 후, 24년 동안의 축구 선수 인생을 마감하며 역사의 한 페이지로 들어가게 되었다.

3. 국가대표 경력

3.1. 개요

2000년 4월 5일 2000년 AFC 아시안컵 지역예선 라오스 전[17]에 성인대표로 데뷔하였으며, 2011년 1월에 열린 2011 AFC 아시안컵에서 본인의 국가대표 100경기 출장을 달성한 직후 만 29세의 나이에 스스로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국가대표팀에서 10년 9개월 동안 활약하며 총 100경기 출장, 13득점을 기록했다.

3.2.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

2000년 4월 5일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초창기에는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하였고 윙백, 중앙 미드필더 포지션으로 출전하기도 했다.

조별리그 3차전 인도네시아전에서 이동국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기도 했다.[18]

초년에 별다른 활약을 안한 선수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박지성이 뛴 경기를 직접 본 입장에서는 박지성은 제법 눈에 띄는 선수였다는 주장이 있다. 동포지션의 경쟁자가 1998년 월드컵 주전이었던 하석주였고, 하석주를 제끼고 선발된 선수가 눈에 띄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당시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엔 축알못 팬들과 FC 코리아들은 '무명이던 박지성을 히딩크 감독이 발굴해냈다'느니 하면서 소설이나 댓글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히딩크가 부임하기도 전에 이미 박지성은 국가대표 멤버였을 뿐만 아니라 월드컵 다음으로 중요도가 높은 대회인 아시안컵에서 주전으로 중용되었던 선수였다. 그리고 당시 J리그와 계약하면서 받은 계약금 규모만 봐도 전혀 듣보잡은 아니었다. 후술하겠지만 히딩크의 업적은 과감한 포지션 변경을 시도하여 박지성의 재능을 만개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박지성이라는 원석을 허정무가 발굴하고, 히딩크가 훌륭하게 제련해낸 것이다.[19]

3.3.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VC
· 7 김태영 · 8 최태욱
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C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거스 히딩크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항서
스태프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해성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의 공격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윙포워드로 포지션을 변경하면서 잠재력을 뽑아내기 시작한다.

잉글랜드와의 평가전에선 동점 헤딩 골을 넣은 데 이어, 며칠 뒤에 열린 마지막 평가전[20]에서는 프랑스에 0:1로 뒤진 상황에서 김남일의 롱 패스를 받아 중거리 슛으로 동점을 만들어내는 등의 활약을 펼쳐 본격적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끌게 된다.



한국은 폴란드, 포르투갈, 미국이 속한 32강 조별리그 D조에 속했다.

1차전 폴란드전에서는 공격포인트는 없었지만 선수들 중 가장 가벼운 몸놀림을 보였고 특히 전반 25분 순간적인 움직임으로 수비 2명을 뒤로 무르게하며 황선홍의 선제골에 간접적으로 기여했으며 한국은 2:0으로 승리했다.

2차전 미국전에서 전반 초반 공격에서 여러번 기회를 만들거나 파울을 유도하는 등 준수한 활약을 펼쳤으나 30분에 상대의 거친 태클에 이른 시간 교체 아웃되었다. 한국은 1:1 무승부 승점 1점을 거뒀다.

파일:주앙핀투 백태클.gif
3차전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주앙 핀투에게 백태클을 당하는 반칙을 당하였고 주심은 바로 퇴장처리했다. 그리고 이영표의 크로스를 받아 가슴으로 트래핑 후 오른발로 공을 터치후 왼발 슛으로 결승골을 넣어 한국을 1-0 승리로 이끌며 조별리그 1위 통과에 큰 기여를 하였다. 골을 넣고 난 후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 안기는 장면도 화제가 되었다.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도 설기현의 동점골 과정에 기여한다.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도 선발 출전했고 승부차기에서 2번째 키커로 나와 침착하게 슛을 성공시켰다. 그렇게 박지성은 월드컵 4강 신화를 창조해낸 2002년 국대의 멤버로 큰 인기를 얻는다.[21]

3.4.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이후 PSV로 이적하면서 한때는 부상 및 부진으로 부침을 겪었지만 부상 회복 이후 2004년부터 점점 국가대표팀의 중심으로 성장하였고, 2005년 맨유 이적 이후로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절대적인 에이스이자 주장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전력의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아졌다.

2004년 하계 올림픽 당시에 박지성 차출을 놓고 대한축구협회와 PSV 에인트호번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결국 박지성은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는 대신 2004년 AFC 아시안컵에 차출되었다.

조별리그 3차전 쿠웨이트전에서 차두리의 골을 어시스트하고 8강 이란전에서도 설기현의 골을 어시스트했다.

3.5. 2006 FIFA 월드컵 독일

1 이운재
C
· 2 김영철 · 3 김동진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김진규 · 7 박지성 · 8 김두현
9 안정환 · 10 박주영 · 11 설기현 · 12 이영표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백지훈 · 16 정경호
17 이호 · 18 김상식 · 19 조재진 · 20 김용대 · 21 김영광 · 22 송종국 · 23 조원희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딕 아드보카트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스태프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홍명보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기동




아시안컵이 끝나고 우여곡절 끝에 최종예선에 진출했으나 최종예선의 경기력은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박지성만큼은 다른 선수들 보다 한단계 위의 플레이를 선보이며 대한민국을 진두지휘해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월드컵 조기 진출을 확정지었다. 이때 박지성은 윙어가 아닌 공격형 미드필더에서 플레이하였다.

감독이 아드보카트로 교체되며 4-3-3으로 포메이션이 바뀌었다. 그 덕택에 김남일-이을용의 보좌를 받은 박지성은 맨유에서보다 좀 더 공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32강 조별리그 1차전 경기 토고 전에선 MVP급의 활약을 펼쳐주며 토고 대표팀을 멘붕시키는 데 일조했다. 0-1로 뒤지던 한국 대표팀이 터뜨린 2골 모두에 관여했다. 후반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패스를 받아 토고의 주장인 아발로의 무게중심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대시로 1:1 찬스를 만들었지만 그 아발로가 박지성에게 태클을 걸게 만들어 프리킥을 얻어낸다. 이미 전반에 박지성에게 파울을 저질러 경고를 받았던 아발로는 그대로 퇴장. 그렇게 박지성은 두 데드볼 스페셜리스트 이천수와 이을용에게 천금같은 찬스를 줬고 이천수가 깔끔하게 성공시키며 동점.

그 후 페인팅 모션 한 번으로 안정환에게 짧은 노마크 찬스를 줬으며 안정환이 이를 놓치지 않고 환상적인 터닝슛으로 마무리 지으며 역전에 성공. 원정 월드컵 최초 승리를 거두게 되는 데에 1등 공신이 된다. 32강 본선 조별리그 2차전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후반전 설기현의 측면 크로스를 조재진이 헤딩으로 떨궈준 공을 오른쪽 발등으로 절묘하게 차서 골을 성공시키며 극적인 1-1 무승부 승점 1점을 얻었다. 뒤에 있는 골키퍼는 프랑스의 바르테즈.[22]

박지성은 지역예선부터 월드컵 본선 전 마지막 평가전인 가나전까지 모두 공격형 미드필더로 출전했는데, 특이하게 본선에서는 이호를 주전으로 올린데다 안정환의 역할을 종전에 원톱에서 세컨드 스트라이커로 기용했기 때문에 맨유에서처럼 윙어로 모두 출전했다.

3.6.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1 이운재 · 2 오범석 · 3 김형일 · 4 조용형 · 5 김남일 · 6 김보경 · 7 박지성
C
· 8 김정우
9 안정환 · 10 박주영 · 11 이승렬 · 12 이영표 · 13 김재성 · 14 이정수 · 15 김동진 · 16 기성용
17 이청용 · 18 정성룡 · 19 염기훈 · 20 이동국 · 21 김영광 · 22 차두리 · 23 강민수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허정무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해성
스태프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태하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2007년에는 무릎 부상으로 아시안컵에 출전하지 못했다. 부상 회복 이후 국가대표에 복귀해 다시금 활약을 보였고 2008년 하반기부터 김남일의 뒤를 이어 허정무호의 국가대표팀 주장으로 선출되었고, 국가대표에서 은퇴할 때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았다. 주장 선임 이후 한동안 부침을 겪던 축구 대표팀은 이후 반등에 성공하여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박지성은 5골을 기록하며 조 1위 무패통과에 기여하였으며, 이란과의 홈&원정에서는 극적인 동점골을 각각 기록하면서 이란의 월드컵 진출을 가로막았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직전 일본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전반 5분, 엔도 야스히토의 헤딩미스를 가로챈 김정우가 내준 공을 잡아 뒤에서 따라오는 나가토모를 따돌리고 일본의 수비진이 일제히 따라오는 와중에 중간 지점에서 선제골을 넣어 한순간에 일본 응원단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특히, 골을 넣은 후 산책 세레머니를 선보이며 일본 관중들에게 굴욕을 안겼다.

당시 경기 끝난 후 인터뷰에서는 '일본 응원단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세지였다'라고만 대답하여 일본 기사에서는 J리그에서 뛴 경험이 있던 박지성이 매너있게 조용한 세레머니를 한 것이었다는 긍정적인 해석을 하기도 했으나, 4년이 지난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SBS 특별 방송위원으로 참가한 박지성이 직접 세레머니의 뜻을 확실하게 밝혔다. 박지성의 발언에 따르면, 이날 선수 소개 당시 박지성의 이름이 울리자 수많은 일본 관중들이 야유를 보냈기에 약간 건방진 세레머니로 그에 대한 응답을 해준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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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동국 우라와 레즈를 상대로 골을 넣고,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박지성의 산책 세레머니를 똑같이 따라하기도 했다. 그래서, 박지성이 산책 세레머니를 시작한 이후부터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골을 넣으면 산책 세레머니를 똑같이 따라해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자 일종의 밈이 되었다.


또 2022년 8월 22일 일본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AFC 챔피언스 리그 8강전 일본 구단 비셀 고베를 상대로 문선민이 골을 기록하며 관제탑 세레머니를 선보였고 한국 전북현대가 3:1로 승리하였다.
박지성의 해설
사실 박지성은 한국 축구 선수들 중에서도 일본 쪽에 팬이 많은 편이고, J리그 출신이었기에 한국인 선수임에도 일본에서 인정받는 선수 중 한명이다( 교토 퍼플 상가에서 프로 데뷔를 했고 그 팀의 레전드이다). 당시 일본방송 중계에서도 '아시아 NO.1 플레이어'란 자막을 따로 써서 설명해주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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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전에서의 세레머니
2010년 남아공 월드컵 32강 조별리그 1차전 그리스 전에 그리스 수비수의 공을 빼앗아 골키퍼를 향해 질주, 쐐기골을 넣으며 2-0 승리, 대한민국 월드컵 원정 최다 점수차 승리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이 경기의 맨 오브 더 매치(Man of the match)에 선정되는 쾌거를 맛보았다.

4-1의 뼈아픈 대패를 기록했던 아르헨티나 전을 넘어 3차전인 나이지리아 전에서 시종일관 뛰어다니며 2-2 무승부를, 대한민국의 첫 원정 2라운드(16강)를 이루는데 기여하였다. 박지성은 이 경기에서도 그리스전 때와 마찬가지로 맨 오브 더 매치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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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강 우루과이전에서는 고군분투하며 돌파와 상대 진영에 침투한 공격수들에게 양질의 전진패스와 키패스를 찔러주는 등 폼이 잔뜩 오른 좋은 플레이를 보여줬지만 끝내 2-1로 패배하여(대회 15위) 아쉽게도 빛이 바랬다. 특히나 후반전 마지막쯤에는 이동국에게 완벽한 킬패스로 동점골 기회를 만들어 주었으나 이동국이 아쉽게도 넣지 못하였다. 경기 후 다수의 매체로부터 MOM으로 선정된 것을 보면 활약상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23]

경기들을 보면 알겠지만 남아공 월드컵 때는 정말 대표팀을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3.7.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월드컵 이후 1년 뒤에 열린 2011년 AFC 아시안컵은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 무대가 되었다. 16개국 본선 조별리그 1위를 다툰 상대인 호주와의 경기에서 아쉽게 비겼지만 박지성은 Man of the Match에 선정되었다. 이란전에서는 상대의 역습을 완전히 차단하는 엄청난 슬라이딩 태클을 여러차례 선보였다.

4강전의 한일전에서는 그의 A매치 100경기를 달성하여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다. 이 경기에서 PK를 유도하여 선제골에 기여하는 등 큰 활약을 하였으나 팀은 동점골을 내주고 연장전에 돌입했다. 다만 여기서 얻어낸 pk는 오심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달려오던 일본 선수가 접촉도 거의 하지 않았지만 박지성은 넘어졌고 그과정에서 그상황을 잘못 판단한 주심이 페널티킥을 부여했다.그리고, 오심에 의한 실점과황재원의 극장 골 등 승부는 연장전을 치른 우여곡절 끝에 승부차기까지 갔고 결과는 삼연뻥으로 아쉽게 패배하면서 우승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박지성은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한다.

3, 4위전에는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고 대표팀 우즈백을 상대로 3:2 승리를 거두면서 대회를 3위로 마무리했다. 박지성은 활약을 인정받아 대회 우수 선수 4인에 선정되었다. #

3.8. 국가대표 은퇴 선언

국가대표 100경기 출장을 채운 직후인 2011년 1월 31일 만 29세의 이른 나이에 국가대표팀 은퇴를 공식적으로 선언을 하였다.

이청용과의 대화나 일전의 인터뷰 등에서 밝혀졌듯이 박지성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기점으로 대표팀 은퇴를 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황선홍이 "팬들이 원한다면 계속 대표팀으로 뛰어야 한다"라고 설득하려 하는 등 주위에서 대부분 ' 2014년 브라질 월드컵까진 뛰어야 한다'라는 식으로 말리고 있어, 2010년 5월에 발간한 자서전에 따르면, 좀 더 생각해보자는 쪽으로 바꿨다고 한다. 자세히 말하자면 여전히 남아공 월드컵을 자신이 대표팀 선수로서 뛰는 마지막 월드컵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브라질 월드컵이 열릴 때까지 자신의 기량이 좋다면 뛰어도 될 거라 생각하는 쪽으로 바뀐 것이다[24].

그러나 무릎 부상 재발 때문에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2010년 12월, 2011년 1월에 치러지는 아시안컵을 끝으로 국가대표에서 은퇴하겠다는 뜻을 확고히 했다.

20대말의 나이에 한창 때에 있는 선수가 감독의 뜻도 아니고 스스로 은퇴를 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경우는 국내에서는 사실상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축구계에선 상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황선홍, 홍명보 등은 결국 본인 몸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본인 의사가 제일 중요하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회택 등은 박지성의 은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대의사를 보이는 등 축구계에서 찬반여론이 확연히 갈리고 있다. 스스로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는 일은 해외에서도 가끔 있는 일이긴 하지만 드문 일이다. 한국 축구계에서는 박지성이 처음이었다. 해외 유명 선수들도 국가대표는 자신을 불러 줄 때까지 하겠다고 말하는 경우 대부분이며, 국내에서도 당연히 이렇게 생각해 왔다. 축구는 아니지만 야구에서 한 레전드급 선수는 국가대표는 불러줄 때까지는 가는 것이지 스스로 은퇴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야구에서는 박찬호가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 케이스가 있지만 박찬호는 한창 때 지역 예선까지 와서 뛸 정도로 국가대표에 헌신했었고 당시 우리나이로 서른 일곱살(만 36세)였기 때문에 국민들이 누구나 그의 은퇴를 인정할 수 있었다. 축구에서는 아직 뛸만한 나이에 스스로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한 것은 박지성이 최초이며, 이후로는 기성용 구자철의 사례가 있다.

이른 나이에 국대 은퇴를 결심한 원인은 아무래도 무릎 문제가 가장 큰 이유로 꼽히고 있다. 박지성이 무릎이 좋지 않은건 J리그 교토 퍼플상가 때부터 좋지 않다고 본인이 언급을 했다. 부상을 입은 후 몇차례의 수술로 인해 무릎 상태가 정상이 아니기에 계속 잘 관리해줘야 하는데 국대 소집으로 장거리 비행을 하고 나면 무릎에 물이 차는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 맨유에서도 박지성이 한국 국가대표로서 시합을 치르고 나면 무릎에 이상이 생겨 한동안 못 뛰는 걸 불만스럽게 여긴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맨유 의료진의 검사 결과 무릎 상태가 길어야 4~5년, 계속해서 국대에 차출되면 겨우 2년 정도 밖에 버틸 수 없는 상태라는 기사가 났는데, 다름 아닌 그 유명한 최원창 떡밥으로 박지성은 물론 처음 박지성의 은퇴를 공식화한 아버지 박성종도 거짓이라고 못박았다. 맨유 의료진들이 박지성의 무릎이 정상상태가 아니니 조심하라는 경고는 하고 있지만 기한을 밝힌 적은 없고, 특히 국대와 연관되는 것은 민감한 상황이라 해당 부분에 대한 발언은 극도로 조심한다고 한다.

다만 그런 시한부 판정의 진실여부를 떠나 장거리 비행을 하고 나면 무릎에 물이 차서 한동안 경기를 뛰지 못하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확인된 사실이며 박지성 본인도 결국 그것 때문에 은퇴를 결심했다고 한다. 이후 조광래 감독이 경기출전을 별로 안 하더라도 박지성이 계속 대표팀에 있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친선경기나 예선 등 중요하지 않는 경기에선 빠지고 월드컵 최종예선이나 본선 같은 중요한 경기에만 부르는 선별출장에 대한 이야기도 계속 나오고 있지만 박지성 본인이 그런 애매한 상황은 원치 않는다고 한다. 본인 말에 따르며 2014년 월드컵 때는 지금의 기량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고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고 싶다고 했으며 결국 2011년 AFC 아시안컵/4강&결승에서 이영표와 함께 은퇴식을 치렀다.

2011년 1월 31일, 한국으로 돌아와 공식적으로 은퇴발표를 했다. 2014년 월드컵에 복귀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으며 현역 선수 생활을 언제까지 하겠다고 정해놓은 것은 없지만 적어도 3, 4년은 더 뛸 것이라고. 은퇴관련 기자회견문 전문.

다만, 월드컵 본선에서 활약할 가능성이 없는건 아니다. 해외에서도 지네딘 지단 같이 국대에서 은퇴한 스타 플레이어가 월드컵 때에 복귀한 경우도 적지 않다. 대표팀과 여론이 박지성 출전을 강력히 원할 것이고, 본선에만 출전하면 예선의 많은 경기와 장거리 여행에 대한 걱정도 없다. 그리고 QPR에서의 박지성의 입지는 단연 독보적이기 때문에 구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는데다 QPR은 당장 잔류가 문제인 수준의 팀이라 경기 수도 적어 혹사당할 위험도 적다. 무엇보다 맨유에서의 명예로운 은퇴가 무산된 이상 국가대표로 뛰다 은퇴하는 명예나 월드컵 출전 자체의 유혹도 적지 않을 것이다. 다만 2011년부터 박지성 본인은 월드컵에 출전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선을 그었다.

2013년 한국 대표팀이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에는 성공했지만 팀이 아주 개판 오분전인 상황이라 홍명보 감독이 사실상 내정되었다는 소식에 언론들은 한 목소리로 홍명보 감독이 박지성를 복귀시켜야 한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다. 그러나 박지성의 아버지는 대한민국이 최악의 위기라고 해도 지성이가 대표팀에 복귀할 일은 없다라고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상황. 박지성 본인도 6월 20일 기자회견에서 홍명보 감독이 부른다고 해도 대표팀에 복귀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클럽의 경우 팬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맨유에서 은퇴하느냐 아니면 다른 곳에서 은퇴하느냐였다. 가장 좋은건 역시 맨유에서 명예롭게 은퇴하는 것이었지만 결국 QPR로 이적했기 때문에 이 쪽은 무산되었다. 다른 대안이라면 K리그나 교토에서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 되겠다.[25]

다만 현재 30줄을 넘긴 현재 시점에서 10경기 정도를 뛰고 무릎 부상을 당해서 누워버리고, 회복기간이 예전에 비해서 상당히 길어졌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지성의 무릎 상태나 몸상태가 확실히 예전만 못한 것은 사실로 보이며 본인도 인터뷰에서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수차례 언급한 만큼, 박지성의 선수생명도 그다지 길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맨유에서처럼 로테이션을 돌며 무릎에 부담을 줄이게 된다면 모르겠지만 현재 팀이 팀인지라 박지성이 로테이션 멤버로 뛸 가능성은 거의 없어보인다. PSV때나 퀸즈파크 시절을 봐도 한번 부상을 당하면 최소 70일~100일동안 결장을 했는데 이걸 봐서 무릎이 회복력이 떨어진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은퇴 시기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있었는데, 박지성의 아버지 박성종씨에 의하면 남은 계약기간을 모두 다 채우고 은퇴한다고 한다. 즉 원소속팀인 QPR과의 계약기간이 끝나는 2015년 6월 은퇴하게 되는 셈이다. 은퇴 후에는 FIFA 마스터코스를 거쳐 축구행정가가 될 계획이라고 한다.

정리해보면, 박지성이 아시안컵이 끝나고 은퇴를 시사했던바는 맨체스터에서 주전경쟁이 쉽지 않고, 국가대표 차출로 인한 장거리 비행이 그의 무릎을 악화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4년 당시 박지성은 과거에 뛰었던 PSV로 임대간 신분이기 때문에 소속팀 기여에 대한 큰 부담이 없으며[26] 맨유시절에 비해 그의 무릎이 부담될 만큼 경기가 많은 것도 아니고 A매치나 최종예선으로 통한 경기가 부담이었다면, 월드컵 본선이 그렇게 부담스러운 상황은 아니다. 그리고 곧 장가도 가게 되면 경기 외적으로 안정도 찾게 될 것이며, 모든걸 갖춘 상황에서 예전보다는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다

박지성이 은퇴무대로 생각했던 아시안컵에서 대한민국은 일본과의 4강전에서 PK로 패해 3위에 머물렀는데, 이영표는 공식 은퇴한 상황이었고, 박지성은 비공식(인터뷰로만)으로 아시안컵을 우승하고 은퇴하겠다고 했는데, 우승을 하지 못했기에 그냥 은퇴하는걸 아쉬워 하는 팬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지단과 피구는 적어도 월드컵 개최 1여년전 최종예선을 시작으로 복귀한데 비하여 지금 같은 경우 월드컵이 6개월도 채 남지 않아 복귀시점이 이미 지났다고 보는 팬들도 많으며 그리고 후배 양성을 위해서 복귀 안하는 것이 낫다고 보는 팬들도 많다.

그러던 중, 홍명보 감독이 복귀의사를 물어보겠다는 기사가 떴다. #

하지만 박지성은 이미 수차례 밝혔듯이 대표팀 복귀는 없다고 확실하게 못박았다. 그리고 홍명보 감독이 직접 네덜란드에 가서 박지성과 진솔하게 대화를 한 결과, 우리가 예상한 것 보다 무릎 상태가 심각하다라며 복귀는 없다고 공식 발표했다.

4. 여담

은퇴 기자회견에서 선수 생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무릎부상이라고 하였다.

2006년 독일 월드컵 토고전에서 기록한 2골에서 이천수와 안정환의 골을 도왔고, 프랑스전에서는 동점골을 기록하여 경기 MOM으로 선정 되었다.

2010년 6월 12일 그리스와의 월드컵 32강 B조 1차전에서 득점에 성공하여 3개의 연속된 월드컵 대회에서 골을 넣은 최초의 아시아 선수이자, 월드컵에서 3골 이상을 넣은 두번째 한국인 선수가 되었다.[27][28] 2차전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도 역시나 선발 출전하였고 온 경기장을 누비고 다녔으나 활동량만 많았을 뿐 아르헨티나의 하비에르 마스체라노에게 완벽하게 지워지며 팀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 3차전 나이지리아전에서는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고 그리스전과 마찬가지로 MOM에 선정되었다.

2010년 10월 12일 한일전을 앞두고 머리를 붉게 염색[29]하여 부진탈출이라든가 한일전 필승 다짐의 표현이라는 말들이 많았지만, 박지성 본인이 말하길 자기도 그런 색으로 염색이 될 줄은 몰랐다는 모양이다.

2011년 1월 25일에 있었던 2011년 AFC 아시안컵/4강&결승 한일전에서 이영표에 이어 센추리 클럽[30]에 가입했다.

학창시절 때 트라우마 때문에 페널티 킥을 차는 것을 싫어한다고 한다.[31]2011년 아시안컵 4강전 한일전에서도 주장이였는데도 불구하고 차지 않았을 정도. 근데 아이러니하게 페널티 킥을 잘 차긴 하는 듯 하다. 히딩크가 한때 페널티 킥 전담 키커로 정했을 정도[32]. 그리고 잘 안 알려진 사실인데, 2002년 월드컵 미국전에서 이을용이 실축한 페널티 킥은 원래 박지성이 차기로 되어 있었다! 경기 전 히딩크 감독이 페널티 킥 전담 키커를 미리 정했었는데, 제 1순위가 박지성, 2순위가 이을용이였다. 근데 박지성은 미국과의 경기에서 전반전 38분쯤에 부상을 당해서 이천수와 교체되었다. 만약 이 때 박지성이 부상을 당하지 않고 페널티 킥를 차서 성공시켰다면 아시아 최다골 기록을 가질 수도 있었다. 현재는 일본의 혼다 케이스케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 1골을 더 기록하며 통산 4골로 단독 최다 골 기록을 보유 중이다.

박지성은 월드컵에서 3을 넣었는데 모두다 후반시간에 다 골을 넣었고 그리고 모두 월드컵에서 유럽팀에서 뽑았다(2002: 포르투갈, 2006: 프랑스, 2010: 그리스).


[1] 일화로, 2002년 당시 박지성은 발이 아파 어느 병원에 진단을 받으러 갔다. 그런데 축구를 잘 몰라 박지성이 누구인지 몰랐던 그 의사는 "평발이니까, 운동 많이 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고. 박지성은 그때 자기가 평발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고 한다. [2] 참고로 전문가에 의하면 박지성의 발은 유연성 평발이라 운동을 하는데에 있어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실제로 일상에 지장을 주는 강직성 평발은 오래 서있어도 통증이 생기기도 할 정도로 운동선수에겐 치명적이다. [3] 고종수, 이동국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만이 고교 졸업 직후 프로로 직행했다. 박지성이 단지 프로의 문을 두드리다가 문전박대 당했다고 잘못 알려진 면이 있는데, 명지대 진학 이후 올림픽 대표를 거쳤기 때문에 K-리그에 가려 했으면 충분히 갈 수 있었으나 박지성은 빨리 프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명지대 재학 중 좋은 조건으로 J리그에서 영입 제의를 받고 대학 중퇴 후 교토 퍼플상가로 갔다. 그리고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자유계약이 아니라 K-리그로 진출하려는 신인 선수들은 무조건 K리그 드래프트에 참가해 팀의 지명을 받아야 프로에 데뷔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일본으로 진출하는 것은 외국인 용병 신분이기 때문에 드래프트에 참가하는 것보다 더 많은 연봉을 수령할 수 있었다. [4] 관동대학교는 명지학원 시절에는 명지대학교 2군 취급이었지만 축구부는 상당히 강했다. [5] 입단 당시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에 와서는 명지대와 김희태 감독으로서 정말 신의 한 수다. [6] 70m를 홀로 드리블 질주하며 올림픽대표 5명을 제친 후 골키퍼까지 제치고 골을 성공시켰다고 한다. 허정무가 올림픽 대표로 깜짝 선발할 만 했다. 박지성은 그때를 회상하며 마치 수비수가 비켜주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7] 박지성 입단 전 교토 퍼플 상가는 전반기 리그를 꼴찌로 마감했고, 6개월 후 2부 리그로 강등된다. [8] 약 5000만원 [9] 당시 수령 연봉이 약 5천만엔(4억원)으로 당시 K-리그 최고 연봉자인 최용수의 연봉보다 1억원 이상 많은 금액이었다. [10] 유럽으로 가기전 박지성 가족들과의 식사자리에서 했던 말이라고 박지성이 밝혔다 [11] 이적 루머가 돌던 당시 보도매체와 네티즌들은 히딩크가 애제자를 에인트호번으로 영입하려 한다는 소식에 해당 선수가 이천수라는 소리를 양산했던 적이 있다. [12] 대한민국 국대에서 박지성의 공격 재능을 만개시켰던 히딩크는 당시 한 술 더 떠서 박지성을 케즈만과 함께 포워드로 기용하기도 했었다. [13] 1차전 0대1로 뒤지던 90분경 욘 달 토마손에게 쐐기골을 허용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14] 이 당시 밀란의 선발진은 말네스카를 포함해 밀란 제너레이션이라고 부를 정도로 엄청난 실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 밀란의 수비진은 32강 5차전부터 4강 1차전까지 단 한 골도 실점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 경기엔 시즌 중엔 그렇게 모이기 힘들었던 그 네 명이 다 나왔다! [15] 역사적인 한국인 UEFA 챔피언스 리그 본선 첫 골이기도 하며, 아시아 선수의 첫 골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압도적인 경기력에도 불구하고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결승전 진출은 좌절되었지만, 이 시즌을 기점으로 박지성은 주목을 받게 된다. 골 장면을 보면 오른쪽 하프스페이스에서 볼을 따냈는데 튀어버린 볼을 중원까지 내려가서 다시 뺏어오고, 아군에게 공을 넘겨준 뒤 그대로 최전방까지 달려서 라인을 깼다가 패스가 오는 타이밍에 맞춰서 오프사이드 라인에 안 걸리게 내려왔다가 그대로 골을 넣었다.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압박에 충실한 공격수의 정석같은 골. [16] 이에 대해서 안티팬들은 아직 QPR과의 계약 기간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QPR에서의 부진때문에 도망치듯 은퇴하는 것 아니냐며 비판론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은퇴 후 시간이 지날수록 박지성의 무릎 상태가 상상 이상으로 좋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이른 은퇴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오죽하면 이제는 자선경기에서 뛰는 것도 무리일 정도로 무릎이 안 좋다고 하니. 무엇보다도 QPR에서는 부진했으나 2013-14 시즌에는 친정팀 PSV로 임대되어 부상만 아니면 여전히 클래스 있는 활약을 보여준 만큼, 단순히 QPR에서의 부진때문에 은퇴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에는 어폐가 있다. [17] 당시 감독은 허정무다. [18] 이동국은 이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했으며 결국 총 6골로 대회 득점왕에 등극한다. [19] 무릎팍도사 허정무가 출연했을 당시에, 당시 올림픽 대표팀과 명지대학교 축구부의 전지훈련 연습경기 당시에 눈에 보인 것이 박지성이여서 당시 김희태 명지대학교 감독에게 양해를 구한 뒤 올림픽 대표팀 선발을 위한 테스트를 하고 싶으니 1주일만 올림픽 대표팀에 데리고 가도 되겠냐고 먼저 요청을 했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에 김희태 감독 역시 흔쾌히 허락을 했고 이후 테스트에 통과하면서 기술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감독의 직권으로 뽑았던 것. 다만 연령별 대표팀도 거치지 않은 선수를 감독이 직접 뽑은 것에 대해 당시에 말이 많았다고 한다. 김희태 감독과 허정무가 친해서 뽑았다는 헛소문도 퍼졌었다고 한다. [20] 김남일의 그 유명한 "아, 내 연봉에서 까라고 하세요." 발언이 나온 경기다. 김남일 어록 참고. [21] 독일과의 준결승전에서 탈락 후 터키와의 3,4위전에서 패해 최종 4위를 기록했다. [22] 당시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였던 윌리엄 갈라스가 주춤주춤거리며 공을 걷어내지 못하다가 결국 골을 먹히고 분노를 일으켜 공을 하늘 높이 뻥차는 장면은 아직도 많은 팬들이 기억하는 장면이다. [23] 다만 공식적인 MOM은 루이스 수아레스다. [24] 남아공 월드컵이 끝난 후 인터뷰에서 '나의 월드컵이 끝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는데, 얼마 후에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때 기량이 괜찮다면 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건 이래서다. [25] 박지성은 MBC 스페셜을 통해 에인트호번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교토 구단주도 박지성이 사지가 망가져도 영입한다고 했으니 맨유를 제외하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이었다. [26] 과거의 기여도로 충분히 대우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27] 첫번째는 2002년 미국, 이탈리아전과 2006년 토고전에서 득점한 안정환이며, 세번째는 2014년 알제리전과 2018년 멕시코, 독일전에서 득점한 손흥민이다. [28] 참고로 정규시간 골은 아니지만 2002월드컵 8강 준준결승 스페인과 승부차기전에서 박지성은 안정환과 승부차기에서 득점한것 까지 포함하면 박지성 4골, 안정환 4골이다. [29] 원래부터 가끔 염색을 하긴 했다. [30] 국가대항전 100경기 이상 출전 [31] 쓰리박에서 밝히길 학창시절 승부차기에서 4연속으로 실축을 한적이 있다고 한다. 영상 [32] 실제로 2002년 월드컵 8강 스페인전의 승부차기에서 두번째 키커로 나와서 이케르 카시야스를 상대로 킥을 여유있게 성공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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