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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거르는 고대가드/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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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례
1.1. 2013년1.2. 2014년1.3. 2015년1.4. 2016년1.5. 2017년1.6. 2019년1.7. 2021년1.8. 2022년1.9. 2023년
2. 그렇다면 선배 가드들은 어땠는가?
2.1. 50년대2.2. 70년대2.3. 80년대2.4. 90년대 (KBL 드래프트 이전)2.5. KBL 드래프트 이후
2.5.1. 1998년2.5.2. 2000년2.5.3. 2001년2.5.4. 2002년2.5.5. 2005년2.5.6. 2006년2.5.7. 2007년2.5.8. 2008년2.5.9. 2010년2.5.10. 2011년2.5.11. 2012년
3. 한편 연대 가드들은 어땠는가?
3.1. 70년대3.2. 80년대3.3. 90년대(KBL 드래프트 이전)3.4. KBL 드래프트 이후
3.4.1. 1999년3.4.2. 2000년3.4.3. 2001년3.4.4. 2004년3.4.5. 2006년3.4.6. 2007년3.4.7. 2008년3.4.8. 2009년3.4.9. 2010년3.4.10. 2011년3.4.11. 2012 가을3.4.12. 2014년3.4.13. 2016년3.4.14. 2017년3.4.15. 2019년3.4.16. 2020년3.4.17. 2021년
4. 한편 중대 가드들은 어땠는가?
4.1. 70년대4.2. 80년대4.3. 90년대 (KBL 드래프트 이전)4.4. KBL 드래프트 이후
4.4.1. 2000년4.4.2. 2001년4.4.3. 2002년4.4.4. 2007년4.4.5. 2008년4.4.6. 2009년4.4.7. 2010년4.4.8. 2011년4.4.9. 2012년 가을4.4.10. 2016년4.4.11. 2017년4.4.12. 2018년4.4.13. 2019년4.4.14. 2020년

[clearfix]

1. 사례

* 1라운드에 선발 받은 고려대학교 출신 가드를 표기한다.
* O X로 나눠 표기한다.
* 소포모어(2년차) 시즌까지는 '?'로 표기할 수 있다.

1.1. 2013년

1.1.1. 박재현 O

2013년 드래프트는 하위권 팀들의 탱킹 의혹이 생길 정도로 대형 유망주들이 몰려나오는 황금드래프트라 평가받았다. 박재현 또한 이승현, 이종현과 함께 고대 왕조의 주역이였으며, 그 해 고려대가 대학농구리그 및 프로아마 최강전을 우승할 수 있게 만든 주축이였다. 당시 평가 중 이승현, 이종현이 골밑을 받쳐줘 박재현의 실력이 미화된 측면이 있다는 의견들도 있었으나, 박재현이 보여준 개인 기량은 충분히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설득력을 얻지 못했었다. 그해 빅 3로 불렸던 김종규, 김민구, 두경민에 이은 차상위 순번이 확정적이였으며, 막판까지 두경민과 3순위를 두고 논쟁이 벌어질 정도로 큰 기대감을 받았다. 신인 드래프트 당일 서울 삼성은 1.5%의 확률을 뚫고 행운의 4픽을 거머쥐었고 박재현을 지명했다. 이는 앞선 김종규, 김민구, 두경민의 바로 뒷 순번이자, 5순위인 이재도, 7순위인 전성현보다도 앞 순번이였다.[1] 삼성팬들은 드디어 암흑기를 뚫고 비상을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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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014년

1.2.1. 김지후 O

김지후는 고려대학교 시절 대학리그 최고의 슈터라고 불렸다. 외곽으로 주는 킥아웃 패스를 받아 그대로 받아먹는 캐치 앤 샷에 최적화된 모습을 보였으며, 팀의 고비 때 마다 3점슛을 터트리는 강심장의 면모 또한 보여줬던 선수이다. 기복이 있지만 슛 하나 만큼은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4년 드래프트는 이승현, 김준일, 정효근 등 대어급 유망주들이 상위 순번에 포진해있었으며, 전년도보다는 못하지만 역시 대형 드래프트라고 평가받았다. 드래프트 당시 전주 KCC는 4순위로 김지후를 지명했고 이후 원주 동부가 5순위로 허웅을 지명했다. 당시 농구 팬들 사이에서는 '왜 KCC가 허웅을 잡지 않고 김지후를 잡았냐'는 논쟁이 계속 이어지곤 했다. 당시 KCC는 허웅의 아버지인 허재가 감독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논란을 피해가기 위해 일부러 아들을 지명하지 않은 것'이라는 의견도 존재했다.[2] 당시 암흑기였던 KCC에서 데뷔시즌 평균득점 7.17로 신인으로는 좋은 활약을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결국 허웅은 리그 정상급 슈팅가드이자 슈퍼스타로 성장했고, 반면 김지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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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2015년

1.3.1. 이동엽 O

포인트 가드 치고 많이 느리고 떨어지는 운동능력을 갖고 있지만, 농구 감독인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우월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대학무대에서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였기에, 믿거고 신화를 끊을 수 있을까 기대를 모았다. 리그 최하위권 가드진이라고 평가받는 삼성이기 때문에 데뷔시즌부터 꾸준한 기회를 받고 있지만 항상 평범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다. 그 사이 해당 드래프트 1순위였던 문성곤은 매년 리그 최우수 수비수에 선정되고 있으며, 2순위였던 한희원은 3&D로 늦게나마 포텐셜을 터트리며 국가대표까지 승선, 3순위였던 송교창은 리그 MVP에 선정, 6순위였던 정성우는 기량발전상과 수비5걸을 동시에 수상하며 최상위권 수비형 핸들러로 성장, 7순위였던 이대헌은 올스타급 빅맨으로 성장했다. 이동엽의 앞 뒤 순번 선수들이 리그에서 큰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지만, 정작 5순위라는 낮지 않은 순번에서 이동엽의 활약은 많이 아쉽다는 평가이다. 2023년에는 놀랍게도 3억원이라는 거액에 FA 재계약을 했다. FA 이후에는 연봉이 무색하게 끔찍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삼성 팬들에게 큰 질타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1번으로 뛰기에는 부족한 리딩 능력, 패싱센스, 운동능력이 발목을 잡았고 2번으로 뛰기에는 공격 스킬이 부족했기 때문에 결국 믿거고의 사슬을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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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2016년

1.4.1. 최성모 O

2016년 드래프트에서 천기범, 박지훈과 함께 가드 최대어 3인방으로 분류되어, 1라운드 7순위로 원주 동부에 뽑혔다. 대학 시절에는 흔치 않은 슬래셔 타입의 듀얼가드라고 평가 받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돌파형 가드들이 그렇듯이 프로에서는 장점이 죽어버렸고, 슈팅이 안정적이지 못해 득점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결국 kt 소닉붐으로 트레이드 되면서 허훈의 백업이나 파트너 역할을 맡았다. 본인의 약점이었던 슈팅 부분도 일부 개선된 모습을 보여줬다. 시즌 종료 후 기대감을 안고 상무에 입대했지만, 뜬금없이 포텐이 터져버린 정성우 때문에 전역 이후 경쟁에서 밀려버린 상황이다. 이후에는 팀에서 평범한 백업가드로 출전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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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2017년

1.5.1. 김낙현 X

고려대 시절부터 연세대 허훈과 라이벌 관계를 가져가며 대학리그를 양분한 가드이다. 슛에 있어서는 고교 시절부터 인정받아왔으며, 특히 클러치 능력이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프로 진출 이후 데뷔 시즌에는 본인이 클러치 상황에서 반대로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시즌이 끝나고 출전한 2018 아시안게임 3X3 농구 결승에서는 희대의 본헤드 플레이를 저질러.. 믿거고의 단어를 언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2년차 시즌부터 급격하게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즌 이후 '식스맨 상'을 수상했다. 3년차 시즌에는 더욱 발전하여 괄목상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결국 시즌 이후 '기량 발전상'까지 수상하며 믿거고의 타이틀을 완전히 떼어내버렸다. 이후 리그를 대표하는 가드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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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2019년

1.6.1. 김진영 O

레전드 김유택의 아들이자 이복형제 최진수의 동생으로서 청소년 시절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대형 유망주였다. 포지션 대비 큰 신장과 뛰어난 운동능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대학 3학년을 마치고 2019년 얼리 드래프트로 참가하여 서울 삼성에게 전체 3순위로 지명 받았다. 데뷔 시즌은 장점과 단점이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었지만 아직 어린 선수이기 때문에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2년차 때는 훨씬 많은 출전 시간과 롤을 부여받으며, 김진영 또한 좋은 신체조건과 운동능력, 패기로 종종 하이라이트 필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아직까지 부족하지만 큰 가능성을 보여준 시즌이기도 했다. 중요한 3년차를 준비하던 도중.. 비시즌 만취한 상태로 음주운전을 하는 큰 사고를 내어 선수인생에 급격한 위기를 맞이했다. 향후 징계 여부에 따라 차후 시즌 활약에도 큰 변동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이다.

KBL 재정위원회 결과에 따른 27경기 징계 + 구단 자체 징계 54경기 까지 총 81경기 징계가 확정되며 1시즌 반을 못 뛰게 되었다. 또한 범죄 이력에 따라 상무에 가는 것도 불가능할 것으로 보여 현역 or 공익으로 병역을 이행한다면 선수생활 3~4년을 통째로 날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한창 성장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수 년을 실전경험 없이 보내야 하는 상황이라 향후 선수 생활 자체가 불투명한 상태이다. 2022-23시즌에 복귀하긴 했지만 냉정한 은희석 감독의 평가와 함께 워크에씩이 떨어진다는 세간의 악평을 뒤집지 못하고 있다. 이후에도 출전시간을 받지 못했고 잊혀진 선수가 되어 정관장으로 트레이드까지 되는 수모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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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2021년

1.7.1. 정호영 O

2미터에 육박하는 윙스팬 뛰어난 운동능력을 갖춘 듀얼가드로서 내외곽을 가리지 않는 뛰어난 공격력을 대학무대에서 보여줬다. 프로무대에서도 종종 득점 폭팔력을 보여주면서 본인의 장점을 어필했지만 부족한 웨이트와 수비력 등 약점이 부각되면서 백업가드 이상의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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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2022년

1.8.1. 김태완 O

빠른 스피드와 3&D를 강점으로 고려대 시절 앞선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3학년 때 얼리드래프트로 KBL에 지명됐다. 신인시절부터 적지 않은 출전시간을 부여하며 팀에서 경험치를 주고 있지만 뚜렷한 성과는 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 1번으로 뛰기에는 기량이 부족하고 2번으로 뛰기에는 사이즈가 작은 애매한 듀얼가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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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2023년

1.9.1. 박무빈 X

연세대 유기상과 함께 학년을 대표하는 가드 2명으로 불리었고, 문정현과 함께 빅3라고 평가받던 대어급 선수였다. 2순위로 지명 후, 프로에 와서도 신인 시절부터 어느정도 기대치를 충족시켜주는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후 젊은피로 국가대표에도 승선하는 등 창창한 미래가 기대되는 선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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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렇다면 선배 가드들은 어땠는가?

2.1. 50년대

2.2. 70년대

2.3. 80년대

2.4. 90년대 (KBL 드래프트 이전)

2.5. KBL 드래프트 이후

2.5.1. 1998년

2.5.2. 2000년

2.5.3. 2001년

2.5.4. 2002년

김주성 & 낙생고 3인방 드래프트로 기대를 모았으나, 김주성(1순위), 진경석(3순위), 박지현(4순위), 이한권(5순위)을 제외하곤 대부분 프로에서 폭망하는 등(2순위 정훈 포함) 실제 뎁스는 매우 떨어졌던 해로, 사실 누굴 뽑았어도 망픽이었다.

2.5.5. 2005년

2.5.6. 2006년

특히 임휘종은 2003년 그리스 FIBA U-20 대회에서 한국이 16팀 중 12위를 차지할 때 주전으로 뛰던 장신 가드였는데,[10] 이른바 황금세대 사이에서도 주전으로 뛰었음에도 불구, 대학 시절 별 발전이 없이 프로에 와서 미미한 커리어를 보낸다. 바로 뒷순번이 무려 한양대 조성민으로 KTF 추일승 감독이 낼름 가져갔고, 2 라운드 15 순위에는 괜찮은 빅맨인 중앙대 한정원이 있었다.
그리고 안양 KT&G 김동광 감독은 2년 연속 2라운드에 고대 가드를 뽑고 이듬해 서울 삼성 감독으로 이직한다.

2.5.7. 2007년

2.5.8. 2008년

2.5.9. 2010년

2.5.10. 2011년

2.5.11. 2012년

3. 한편 연대 가드들은 어땠는가?

3.1. 70년대

3.2. 80년대

3.3. 90년대(KBL 드래프트 이전)

3.4. KBL 드래프트 이후

KBL 시기 슈터로 이름을 날렸던 문경은, 우지원, 조상현, 방성윤은 커리어의 대부분을 스몰 포워드로 뛰었기에 이 항목에 넣지 않았다.

3.4.1. 1999년

3.4.2. 2000년

3.4.3. 2001년

3.4.4. 2004년

3.4.5. 2006년

3.4.6. 2007년

3.4.7. 2008년

3.4.8. 2009년

3.4.9. 2010년

3.4.10. 2011년

3.4.11. 2012 가을

3.4.12. 2014년

3.4.13. 2016년

3.4.14. 2017년

3.4.15. 2019년

3.4.16. 2020년

3.4.17. 2021년


프로에서의 커리어까지 종합을 해보면 연대 가드가 미세하게 우세하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연고전은 상황이 좀 달랐는데, 전반적인 선수 풀 구성에서 고려대에 밀리다 보니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하던 과거와는 다르게 2000년대부터 연고전 농구 전적이 비등비등해지더니 2010년대에는 2승 6패로 절대적인 열세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2000년대 고려대가 그랬던 것처럼 고교 최고급의 가드를 긁어모은 것과는 다르게 2010년대 이후 지명된 연대 가드들이 선배들의 활약보다는 못 미친다는 점도 감안하자. 현재 그나마 이름값을 하는 연대 가드들은 2014 드래프트 동기 허웅과 김기윤 정도이며, 허웅도 허재의 혈통빨(...) 때문에 본인의 노력이 저평가를 받고 있고 김기윤도 사익스와 이정현이 빠져나가자 2015-16시즌의 활약상은 온데간데 없이 이원대와 박재한에게도 밀리는 등 짭태술이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민망한 경기력을 보이고 있다.

4. 한편 중대 가드들은 어땠는가?

4.1. 70년대

4.2. 80년대

4.3. 90년대 (KBL 드래프트 이전)

4.4. KBL 드래프트 이후

KBL 시기 스윙맨(슈팅 가드 겸 스몰 포워드)도 가드를 맡았던 선수는 기재했다.

4.4.1. 2000년

4.4.2. 2001년

4.4.3. 2002년

4.4.4. 2007년

4.4.5. 2008년

4.4.6. 2009년

4.4.7. 2010년

4.4.8. 2011년

4.4.9. 2012년 가을

4.4.10. 2016년

4.4.11. 2017년

4.4.12. 2018년

4.4.13. 2019년

4.4.14. 2020년


프로에서의 커리어까지 종합을 해보면 중대 가드도 미세하게 우세하다고 할 수 있겠다. 허재와 강동희는 역대급이고 김승기 또한 선수로서 준수했으며 명 코치(수석코치) 겸 감독이 되었다. KBL 시대 이후 임재현과 황진원을 보면 각자의 장단점이 있지만 적어도 팀에는 보배였다. 박지현 또한 처음에는 식스맨이었지만 점점 베스트로서 발전했다. 중앙대 52연승 시절 강병현과 이후 팀에 알토란 레벨이 된 유병훈은 스카우트가 예전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팀에는 준수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2010년대 초중반 이후 중대 가드들의 입지가 예전만 하진 못하다. 청대 출신 가드들을 많이 입학시켰으나, 박지훈을 제외하고는 프로에서 기대만큼의 활약을 하지 못 하는 중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연대 가드보다는 아쉬움이 있어도 적어도 고대 가드에 비해 한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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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드래프트 당시 경희대 BIG3 + 박재현과 5픽인 이재도와의 차이는 확실히 크다는 평가였다. [2] 지명 후 허재 감독은 "고민 많이 했다. 하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김민구 자리에는 김지후가 더 낫다고 판단했다. 부자지간에 한 팀에서 뛰는 것도 좀 그렇다. 허웅이 서운해 할 수도 있겠지만, 동부라는 팀에 지명 받았으니, 순위에 연연하지 말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후에도 이 드래프트에 대해 허웅을 지명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맡고 있는 팀에서 뛸 경우엔 허웅에게도 팀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허웅이 프로 선수로 성장하는 것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지명을 포기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3] 이충희의 플레이 스타일이 바로 3점슛 시대 이전, 고전적 스몰 포워드의 역할이었다. [4] DB 프로미 윤호영 스몰 포워드이다. [5] 90년대까지는 허재의 아성을 넘을수 없었고, 허재가 사고를 쳐서(음주운전) 국대에 없을 때는 운동 능력과 센스가 좋은 이상민이 강동희와 함께 백코트를 이뤘다. 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는 포워드 문경은이 2번에서 뛰었고, 김병철은 03년 하얼빈 아시아선수권 이후부터 짧은 기간 동안 활약하였다. [6] 신기성보다 고려대 1년 후배지만, 자퇴 후 바로 입단하는 바람에 드래프트 없이 97-98시즌부터 KBL에 데뷔했다. 97-98시즌 신인상 수상자임에도 다음 해 신기성이 드래프트로 같은 팀에 합류하면서 서울 삼성으로 트레이드된다. [7] 물론 KBL 초창기 시상식 기준이 엉망이었던 점은 감안해야 한다. [8] 전시즌 꼴찌였던 오리온스는 김승현이 가세하자마자 01-02 시즌 우승을 차지한다 [9] 김동욱은 원래 00학번으로 입학해야 했으나 수능 점수 미달로 1년을 통으로 날렸고 뒤늦게 입학한 후에는 잦은 부상에 시달리면서 드래프트 당시 평가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10] 당시 주전은 김태술-임휘종- 양희종- 차재영- 하승진 + 윤호영, 이광재, 함지훈, 정영삼 [11] 공교롭게도 이순철 또한 연세대 출신이다. [12] 후에 삼성 썬더스에서 그의 등번호 10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한다. [13] 픽은 모비스에서 나왔지만 지명권 양도로 인해 KCC에서 선수시작을 했다. [14] 김동현과 손진우(211cm,센터)는 낙마했고, 김용우는 얼리로 나갔지만 3라운드에서 간신히 지명되었고 이후의 활약도 그리 좋지 못했으며, 박성훈은 스포츠 도박 가담으로 흑역사가 되었다. [15]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백업 슈팅 가드로는 뽑힐 법 하다 수준의 이야기지. 선발이 당연하다는 레벨은 아니다. 또한 국대 발탁에서의 문제는 키 185짜리를 포워드로 뽑았다는 게 문제(근본적으로는 허훈을 가드로 뽑았기 때문에 허웅을 원래 뽑혀야 할 포지션인 가드로 뽑아놓을 경우 포워드 라인이 휑해지기 때문에 꼼수성으로 보는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