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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준(1980)

이동준의 수상 및 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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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M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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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997 시즌 1997-98 시즌 1998-99 시즌 1999-2000 시즌 2000-0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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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 포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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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 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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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전 농구선수
파일:/image/109/2015/08/15/201506020208771544_556c91a7c3374_99_20150815084402.jpg
<colbgcolor=#eeeeee> 이동준
李東俊|Daniel Lee Sandrin
출생 <colbgcolor=#ffffff,#191919> 1980년 1월 27일 ([age(1980-01-27)]세)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1980~2006)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2006~ )[1]
신체 200cm| 체중 100kg
포지션 파워 포워드
학력 보델 고등학교 (졸업 / -1998)
포틀랜드 대학교 (편입 / 1998~1999)
시애틀퍼시픽 대학교(Div.II) (졸업 / 2000~2003)
연세대학교 (졸업 / 2006)[2]
프로 입단 2007년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 인천 전자랜드[3])
소속 <colbgcolor=#eeeeee> 선수 대구-고양 오리온스 (2007~2012)
서울 삼성 썬더스 (2012~2015)
서울 SK 나이츠 (2015~2016)
가족관계 부모님
이승준
형수 김소니아
아내
아들 이백호[4](2019년 03월 26일생)
딸 이미호[5](2020년 6월생)
종교 개신교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소개2. KBL 입단 전3. KBL 시절
3.1. 대구-고양 오리온스 시절3.2. 서울 삼성 썬더스 시절3.3. 서울 SK 나이츠 시절
4. 국가대표5. 플레이 스타일6. 기타7. 관련 문서

[clearfix]

1. 소개

대한민국의 前 농구 싸이클 선수. 별명은 노머시.[6][7]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미국인이었으나 한국으로 귀화하여 현재 한국 단일 국적자이다.

형인 이승준과 함께 귀화혼혈 선수에 속한다. 귀화 전의 이름은 다니엘 산드린(Daniel Sandrin). 단, 형은 귀화혼혈선수 특별 드래프트를 통해 한국 무대에 데뷔하지만, 동생인 이동준은 정규 드래프트를 거쳐서 프로에 무대를 밟았다. 그리고 김민수와 함께 정규 드래프트를 거친 유일한 귀화혼혈 선수.

2. KBL 입단 전

아버지 주한미군 헌병이었던 이탈리아계 백인계 미국인, 어머니 한국인이며 미국 워싱턴주 출신이다.

아버지가 경찰관 농구 리그에서 뛰어서, 형 이승준과 함께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농구를 접했다.

포틀랜드 대학교 시절 기록
고교 졸업 후 형인 에릭 산드린이 다니고 있던 West Coast Conference 소속 포틀랜드 대학교에 입학하지만, 마침 이때 은 고향 워싱턴주의 시애틀퍼시픽 대학교(NCAA 디비전 II)로 전학을 결정하면서 1년 유급[8]중이라 함께 뛰지는 못했다. 99-00 시즌 포틀랜드대에서 단 9경기밖에 뛰지 못한 대니얼 산드린(이동준)은, 한 시즌만에 포틀랜드대에서 나와 형이 뛰고 있던 시애틀퍼시픽 대학교로 전학을 선택하고[9], 팀내 주전센터였던 형과 함께 01-02 시즌을 함께 뛰게 된다.[10]

하지만 디비전 II 대학교 출신인 이동준으로선 프로 진출은 어려운 일이었고, 졸업 후인 2004년 유럽으로 건너가 아마추어리그 수준이던 룩셈부르크 리그와 독일 3부리그에서 뛰다가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평범한 직장인(은행원)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농구에 대한 열정을 버릴수 없었던 이동준은 어머니의 나라에서 농구를 하겠다는 결심을 품었고, 마침 당시 대학농구연맹전에서 빅맨 수급 실패로 고전하던 연세대학교[11]의 레이다망에 걸리면서 2005년 말 한국으로 건너간다. 한국어, 국사시험을 거쳐 마침내 2006년 6월 만 26세의 나이에 어머니의 나라 대한민국으로 귀화[12]한 이동준은 연세대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며 하반기 2006 대학농구연맹전 출전을 준비하지만, 이미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데다 독일 3부리그에서 뛴 경력까지 있는 선수는 대학농구에서 뛸 수 없다는 타 대학 관계자들의 반발로 이동준의 출전은 벽에 부딪히게 된다. 특히 연세대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던 고려대의 반발이 가장 심했는데[13], 기존의 황금세대 에 장신 이동준의 가세로 인한 연세대의 전력 급상승을 우려한 다른 대학교들까지 합세하면서, 결국 대학농구연맹은 이동준이 대학농구연맹 주최 대회에 출전할수 없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14]

파일:이동준 연세대.jpg
(결국 몸만 풀다 끝난 2006년 연고전.)

파행으로 끝난 연고전 이후, 이동준은 대학농구연맹 주최가 아니었던 2006년 김천 전국체전 농구대회에 나서며 한국에서의 첫 공식출전무대를 갖게된다. 1회전 단국대와의 경기에서 대학리그 상위권 빅맨이던 정휘량(198cm)을 상대로 수차례 파워덩크를 꽂으면서 21분만 뛰고도 30점 5리바운드를 올리는 맹활약을 펼쳤고, 이후 4강에선 같은 귀화 혼혈선수인 김민수의 경희대를 만나 18점 11리바운드로 분전했지만, 김민수에게 28점을 내주며 아쉽게 패배하며 동메달에 그친다. 이후 11월 2차연맹전과 농구대잔치에도 출전하지 못한 이동준은 팀을 떠나 2007 KBL 신인 드래프트에 지원, 황금세대 드래프트로 불린 기라성 같은 선수들 사이에서 전체 2순위로 대구 오리온스[15]에 뽑히게 된다. [16]

3. KBL 시절

3.1. 대구-고양 오리온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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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온스에서는 기대만큼 성장한 것은 아니었지만, 김유택 코치의 지도 아래 빅맨으로서 점차 기량이 늘면서 2010-11 시즌에는 수준급 빅맨으로 군림하기에 이른다. 쇼맨쉽이 뛰어난 편이라서 2008-2009 올스타전에서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2011-12 시즌에는 부상으로 인해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중. 형보다 신체조건이나 경력도 떨어지고 공격적인 화려함은 적지만 형보다 포지션에 맞는 블루워커적 플레이를 조금 더 하는 편. BQ가 떨어져 민폐 플레이를 자주 보인다는 점에서 형제가 같다.

2011-12 시즌 종료 후에 FA로 풀려 소속팀인 오리온스와 재계약했다. 그런데 전태풍과 5억원, 김동욱과 4억 5천만원에 계약을 해서 샐러리캡 문제가 있는 오리온스가 이동준과 재계약한 것이 의문이라는 반응이었고, 한 편에는 트레이드를 예상했다. 그리고 결국 예상대로 이동준은 서울 삼성 썬더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조건은 공개되지 않았는데, 현금 아니면, 드래프트 픽이 넘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으로는 박유민 트위터 섹드립에 한 몫을 거들어 그의 섹드립 트윗이 더더욱 흥하게 만들었다(…). 자세한 항목은 박유민 참조.

3.2. 서울 삼성 썬더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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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3 시즌에는 용병 대리언 타운스와 함께 골밑을 이끌며 삼성의 6강 PO 강제 진출에 기여하였다.

2013-2014시즌은 좋은 미들슛과 한층 업그레이드 된 훅슛으로 리그 수위급 빅맨으로 다시 부상했다. 특히 더니건 합류이후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 삼성의 선전에 힘을 보태고 있다. 문제는 그의 활약과 반비례해 팀의 성적은 점점 추락하고 있어서 은근히 영고라인의 기운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2014-15 시즌에서는 신인 김준일의 등장으로 출전기회를 많이 못잡고 있다. 이동준 본인의 기량도 떨어졌는데 김준일에게 밀려 제대로 경기를 나오지 못하다 보니 경기 감각도 떨어지는 바람에 경기에 간간히 나와도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는 중. 결국 시즌이 끝나고 연봉이 2억 가까이 삭감된뒤, 삼성의 샐러리캡 비우기 계획의 일환으로 이정석과 묶여 2:2 트레이드로 SK로 이적했다.

3.3. 서울 SK 나이츠 시절

2015-16시즌 SK나이츠에서의 모습은 완벽한 먹튀. 형 이승준은 조금씩이나마 백업으로 출장하고 있지만 허리 부상으로 인해서 출장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D리그에서 가끔씩 모습을 보이던 중에 11월 29일 1군 경기에 출장했다. 무득점.

김우겸, 이대헌에게도 밀려서 현재는 백업.

2016년 6월 10일 은퇴를 선언하면서 형 이승준과 함께 더 이상 코트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4. 국가대표

파일:이동준_국대.jpg
(2007년 대표팀의 이동준(14번))

대한민국 국적 취득 후 1년이 지난 2007년 8월, 이동준은 일본 도쿠시마에서 열린 2007 FIBA 아시아선수권대회 국가대표팀에 이름을 올린다. 당시 KBL을 외국인 빅맨들이 점령한 데다 서장훈이 2006 도하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사실상 국대에서 은퇴하는 바람에 KBL에서 국대급로 보낼 만한 빅맨은 김주성이 유일한 상황이었고, 이에 대표팀 김남기 감독은 NBA G 리그에서 돌아온 하승진과 대학생 김민수, 그리고 2007년 1월 KBL 드래프트에서 대구 오리온스에 선발된후 프로데뷔는 커녕 국내 공식경기도 겨우 2차례[17]뿐이던 이동준을 국가대표 빅맨진에 합류시키기로 결정한다. 당초 팬들이 가졌던 화려한 테크니션으로서의 환상 대신 운동능력에만 의존한 투박한 블루워커의 모습을 보여준 이동준이었지만, 대회초반 김민수가 뛰지 못하는 상황에서 김주성 하승진의 백업 역할을 충실히 해줌으로써, 1년전 도하 참사(아시안게임 5위)를 겪었던 대표팀이 대회 최종 3위를 따내는 데 기여한다.
파일:이동준 국대2.jpg

2009년 새롭게 사령탑에 오른 허재 감독은 6월 나고야 동아시아선수권을 앞두고, 부상으로 빠진 김주성 하승진을 대신해 대학생 오세근과 이동준을 선발했고, 이동준은 대회 예선에서 오세근과 선발 빅맨으로 출장하며 맹활약, 대표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하지만 같은해 8월 중국 톈진에서 열린 2009 FIBA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대표팀에 복귀한 김주성, 하승진, 그리고 오세근에 밀려 출장기회를 거의 잡지 못했고, 대표팀은 이란, 레바논에 이어 대만에까지 지는 졸전을 펼치며 대회를 7위로 마치는 바람에, 이동준은 농구대표팀의 흑역사 중 하나인 톈진 참사 멤버에 이름을 올리고 만다.

이후 2009년 이승준, 2011년 문태종, 문태영 형제가 각각 대한민국으로 귀화했고, FIBA에서 "18세 이후에 국적을 바꾼 선수는 1명만 대표팀에 오를 수 있다"는 규정을 신설함에 따라, 이동준은 문태종에 밀리며 대표팀에 다시 뽑히지 못했다.

5. 플레이 스타일

플레이 스타일은 좋은 피지컬과 운동능력을 활용해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 플레이어이다. 포인트 가드로 주로 활동 했었기 때문에 빅맨 스킬은 한국 와서 다시 배웠다. 3&D 스몰포워드에서 빅맨으로 전업한 형 이승준과 마찬가지...형은 센터도 가끔 했지만, 본인은 가드만 하다가, 빅맨 하려니까 너무 힘들었다고. 가까운 시대에 KBL에 진입한 김민수, 이승준과 비슷한 스타일일 것 같지만 은근히 다른 편이다. 이동준이 가장 스킬이 투박하고 운동능력이나 개인 기량이 떨어지는 편이니 이렇게 보면 보급형 같지만 그래도 좋은 가드 만나면 잘 어울리는, 백지는 되는 선수다.[18] 형이나 김민수와는 달리 골밑을 비비고 뛰어다니면서 컷인, 박스아웃, 수비에 나서는 등 궂은 일과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전투적으로 나서기 때문이다. 투박하지만 슈팅 거리도 제법 긴 편, 운동능력과 하드웨어도 저들에 비해서 안 좋다는 것이지 기존 선수들과 비교하면 충분히 상급. 하지만 스킬셋이 모두 투박해서 안정적이지 못하고 시야가 좁고 수비 이해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초창기에는 훌륭한 피지컬을 갖고 있어서 팀에서 공격롤로 많이 활용하려고 했지만, 외국인들이 주로 골밑요원을 맡는 KBL 특성상 스킬이 부족한 이동준이 공격에서 딱히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19] 당시 혼혈선수 영입 초기였는데, 덩크를 마음대로 꽂는 혼혈선수들을 보고 기대가 부풀었던 팬들로부터 욕을 먹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농구에 적응되고 자신에게 맞는 역할을 찾아 궂은 일로 팀에 공헌해줄 수 있는 선수로 거듭나면서 평가가 반전되었다.[20] 완전히 적응하고 나자 (비록 뛰어난 편은 아니라도) 공격력도 살아나서 한때 16점이나 기록하기도 했다.

6. 기타

7. 관련 문서



[1] 일반귀화를 하고도 아르헨티나 특유의 국적법으로 인해 복수국적이 유지된 김민수와는 다르게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면서 미국 국적이 말소되었고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단일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2] 원래는 룩셈부르크와 독일 3부리그에서 활동하다가 연세대 3학년으로 편입하였는데 연대 소속으로 뛴 경기는 2006 전국체전 2경기가 전부였고, 대학농구연맹전에는 단 한경기도 출장하지 못했다. [3] 2005-2006 시즌 중 리벤슨-브라운 트레이드 과정에서 시즌 후 정재호-박지현 트레이드와 함께 1라운드 지명권 트레이드도 함께 이뤄졌고 전자랜드의 지명을 받았지만 사실상 오리온스의 지명이었다. 전자랜드는 8순위로 김영환을 지명. [4] 미국 이름은 Jack Gabriel sandrin이다. [5] 미국 이름은 Josephine sandrin이다. [6] 2007년 아시아 선수권 대회 일본전에서 유래됐다. 일본을 상대로 골밑을 박살내면서 미국 해설자가 'No mercy!'를 연발하면서 쓰이기 시작했고 국내 나이키 이벤트 경기 영상에서 길거리 고수를 상대로 덩크슛과 블락샷 등을 아낌없이 퍼부어(…) 그의 별명으로 굳어진 것이다. 본인은 그 별명에 대해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형 이승준의 별명 큰머시는 여기서 파생됐다. 별명이 말해주듯 서로 다른 스타일이다. 둘 다 쇼맨쉽이 강한 것은 맞는데 이승준은 동생과는 달리 그렇게 무자비하지 않은듯. [7] 사실 노머시란 별명 자체가 그리 호의적인 상황에서 붙은 것은 아니다. 이 별명은 문자그대로 "자비가 없다" 즉 압도적인 기량의 선수가 하수를 상대할 때 자비없이 압도할 때 나오는 말이다. 그런데 이동준이 KBL에 데뷔한 후 초창기에는 좋은 피지컬과 운동능력에 비해 아쉬운 모습을 많이 보였고, 일반인을 상대로 무자비하게 하는 모습을 두고 비꼬는 의미로 팬들이 "(약자에게만)노머시"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 농구에 적응을 하면서 본인의 좋은 피지컬을 활용한 훌륭한 허슬플레이어로 거듭나면서 애정을 담아 부르는 의미가 됐다. 처음에는 조롱조로 시작한 별명인데다가 어쨌든 이동준의 플레이스타일과 어울리는 별명은 아니니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듯. [8] NCAA 대학교간 트랜스퍼 제한 [9] 역시 트랜스퍼 제한으로 인한 출전금지로 이동준도 1년간 유급하게 된다. [10] KBL에서의 모습을 보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대학시절 이동준은 주로 가드와 포워드 자리에서 뛰었다고 한다. 연세대학교에 처음 합류했을 때에도 장신 스윙맨으로 소개되었고, 드리블 스킬을 자랑하는 영상이 돌기도 했다. [11] 그 유명한 황금세대 트리오 김태술- 양희종- 이광재가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었지만, 확실한 빅맨이 없다보니 김민수(경희대), 윤호영- 함지훈(중앙대), 주태수(고려대), 김봉수- 송창무(명지대) 등 우수한 빅맨을 보유한 팀들에 골밑에서 밀리는 날이 많았다. [12] 당시는 이중국적이 허용되지 않아 이동준은 미국 국적을 아예 포기한 일반귀화였다. 1년 후 귀화한 형 이승준, 그리고 전태풍도 마찬가지. 이후 2011년 "외국인 우수인재 특별귀화"라는 제도가 생기면서 문태종- 문태영 형제는 외국 국적 불행사 서약을 하는 조건으로 미국-대한민국 복수국적을 보유한 채 귀화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후에 형 이승준과 함께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에 출연했을 당시에 이야기한 것이라면 이러한 것에 상관없이 대한민국에 귀화를 하고 싶어했던 듯한데, 이미 친척들이 모두 대한민국에 자리를 잡았던 상태여서 본인도 대한민국에 거주를 목적으로 귀화를 하는 것을 꽤 많이 원했었다는 모양이다. [13] 2006년 연고전에서 연세대 박건연 감독은 이동준의 출전을 강행하려 했으나,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선수단을 내보내지 않으며 1시간 반 가량 맞선 고려대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결국 물러설수 밖에 없었고, 이동준 없이 치른 경기는 66:53 고려대의 승리로 끝났다. [14] 2년 전 김민수를 아르헨티나로부터 데려와 국가대표까지 키운 경희대학교 최부영 감독 또한 강력하게 반발한 인물중 하나라는게 아이러니다. [15] 인천 전자랜드에서 드래프트 픽 양도 [16] 2009 귀화혼혈선수 특별 드래프트를 통해 입성한 형과는 달리, 국내 대졸 선수들과 함께한 신인 드래프트였다. 전체 1순위는 연세대 김태술, 3순위 역시 연세대 양희종이었으며, 이때 드래프트 동기들 중 무려 7명( 김태술, 이동준, 양희종, 정영삼, 이광재, 김영환, 함지훈)이나 A대표팀 경력이 있다. [17] 2006년 10월 전국체전에서의 2경기 [18] 김민수, 이승준의 경우에는 반대... [19] 이런 스타일이 피지컬이 딸리는 상대를 만나면 그야말로 폭격을 할 수 있다. 2007년 대회에서 일본을 상대로 활약한 것이 좋은 예. 만화지만 슬램덩크의 강백호가 골밑슛도 못 쏘던 시절 피지컬 딸리는 동료들을 발라버리던 것도 비슷하다.(당연히 이동준이 저때 강백호만큼 스킬이 딸린다는 건 아니다) [20] 기대치가 현실적으로 조정된 것도 컸다. 초창기에 혼혈선수들에 대한 팬들의 기대치는 외국인선수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