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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9:43:18

모하메드 데이프

<colbgcolor=#007f00><colcolor=#fff> 이즈 앗딘 알카삼 여단 참모장
모하메드 데이프[1]
محمّد ضيف
파일:news-p.v1.20240801.6348657696d94cf38cf92343dcebe669_P1.jpg
출생 1965년
아랍 연합 공화국 가자 칸유니스 난민캠프
(現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국적
[[팔레스타인|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
팔레스타인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학력 가자 이슬람 대학교 (생물학 / B.A.)
정당
직업 군인
계급 불명
참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파일:모하메드 데이프.jpg
2000년에 촬영된 그의 사진.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모습이다.
팔레스타인의 군인으로 하마스의 군사조직 이즈 앗딘 알카삼 여단의 참모장이다. 2002년 이래 현재까지 하마스 군사조직의 사령관으로 활동해 왔다.

하마스의 수뇌부인 이스마일 하니예, 야히야 신와르와 더불어 이스라엘 최대의 적수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이스라엘군의 수많은 암살시도로 인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철저히 막후에서 활동하는 은둔형 지휘자로서 비상한 두뇌와 전략안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슬람 팔레스타인 무장투쟁을 지지하는 측에선 그야말로 전설적인 인물로 추앙받는다. 가자지구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첨단장비로 무장한 이스라엘군의 최소 7차례에 달하는 직접 암살시도와 숱한 공습에서 모조리 살아남았고 지난 30여년간 이스라엘군 납치, 로켓포 개발, 땅굴 건설 등 하마스의 대부분의 군사작전에 관여한 베테랑이며 군사적 재능 뿐 아니라 이란의 지원을 이끌어내 하마스의 전력을 강화하는 등 정치적 수완도 상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숙적인 이스라엘군조차 '사기를 올리기 위한 가상인물 혹은 죽을 위기를 매번 넘기는 전설적 인물'이라고 평할 정도다.

반면 이스라엘 및 친서방에게선 하마스 군사 조직을 이끌며 이스라엘군 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히는 테러리스트로 평가받는다. 미국은 이미 2015년 부터 그를 테러리스트로 지정했으며, 유럽연합 역시 2023년 부터 모하메드 데이프를 테러리스트로 지정했다.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발생한 하마스의 여러 잔악행위에 있어서 책임이 있다고 판단되어 국제형사재판소로부터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 당했다.

워낙 치밀하게 정체를 숨기고 다닌 인물이라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연설한 경우는 없다. 흔히 그의 이름으로 알려진 데이프(Deif)도 가명이며 본명은 모하메드 디압 이브라힘 알마스리(Mohammed Diab Ibrahim Masri, محمد دياب ابراهيم المصر)로 알려져 있다. "데이프"는 아랍어로 "손님"을 뜻하는 가명인데 이는 그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현재 그의 사진으로 알려진 것도 최소 20년 전에 찍힌 오래 전의 모습이며 그의 은신처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다.

2024년 8월 1일, 이스라엘군이 7월 13일에 그가 공습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하마스측의 공식입장은 없으며 하마스 구성원인 이자트 알-라쉬크는 데이프의 살해 소식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하며 데이프의 죽음을 부정했다. # 그동안 이스라엘 측은 데이프를 제거하기 위해 수차례 공습을 시도했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했고 현재까지도 그의 생사는 불분명한 상태이다.

2. 생애


1965년 가자 지구의 칸 유니스 난민 캠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 등은 모두 1950년대에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가풍과 난민촌의 열악한 환경은 이후 그의 행적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980년대에 가자 이슬람 대학교에 입학해 생물학을 전공했는데 이 시절부터 교내의 이슬람주의 학생단체에서 활동해 왔고 20대 후반이 되었을 즈음 하마스에 가담했다. 이후 폭탄 제조법을 배우고 이스라엘군의 납치 및 살해에 관여하는 등 하마스에서 존재감을 키워 갔다.

1996년 하마스의 폭탄 제조책이었던 예히야 아야시가 이스라엘군에게 사살되자 그의 뒤를 이어 하마스의 폭탄 공격 및 테러 공작을 배후에서 지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0년 12월 팔레스타인의 제2차 인티파다 당시 수감 중이었던 팔레스타인 교도소에서 탈출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측은 당시 데이프가 탈옥한 것이라고 밝혔지만 이스라엘 측은 교도소의 간수들이 그를 풀어주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후 이스라엘에 의해 최우선 수배 대상자에 지목되었다.

2002년 살라 셰하데가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알카삼 연대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이스라엘군은 이후 최소 7차례나 데이프를 암살하려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다만 그도 불사신은 아닌지라 이스라엘군의 습격에 중상을 입어 신체 일부에 장애를 얻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한때 중상으로 인해 부관인 아흐마드 알자바리에게 최고 사령관직을 넘기기도 했다.

2009년, 미국 국무부는 데이프를 테러리스트로 지정하며 그가 하마스 군부의 핵심인물로서 이스라엘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수많은 테러 공격의 책임자라고 밝혔다.

2012년 11월에 후임 사령관인 아흐마드 알자바리가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사망하자 다시 최고 사령관직으로 복귀했다.

2014년에 육성 메세지를 공개하면서 이스라엘이 기자 지구에 대한 봉쇄를 멈출 때까지 휴전은 없다는 뜻을 밝혔다. 2014년 8월 19일, 이스라엘군이 데이프의 저택을 공습했으나 암살에 실패했다. 대신 데이프의 아내 위다드 아스푸라(27세)와 3살배기 딸, 생후 7개월의 아들이 사망했다.

2021년에 육성 메세지를 공개하여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에 대한 하마스의 요구를 받아 들이지 않으면 댓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 경고했다. 2021년 이스라엘-하마스 무력충돌 사건 기간 동안 이스라엘군은 두 차례나 그를 노리고 공습해 모하메드 데이프를 살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2023년 10월 7일 이른바 "알아크사 홍수" 작전으로 이스라엘을 선제공격하는 등 다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스라엘 침공 직후 육성 메세지를 공개하면서 "지구상 마지막 점령을 끝내기 위한 가장 큰 전투의 날", "광란의 장벽을 부수고 혁명시대를 되찾을 것"이라고 발언하였다.
"오늘은 세계에서 마지막 인종차별 정권인 이스라엘에 종지부를 찍는 위대한 혁명의 날입니다."

"우리는 신의 도움과 힘으로 '알 아크사 홍수 작전'의 첫 번째 타격을 처음 20분 동안 적의 공항과 군사 요새들을 목표로 했고, 5000개 이상의 로켓과 미사일을 발사했음을 알립니다."

"우리는 신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의 압제를 끝내려 한다. 적들은 아무 책임 없이 괴롭히는 시간은 끝났음을 이해해야 한다."

2023년 10월 11일 이스라엘 공군이 그를 노리고 그의 저택에 공습을 가했는데 그 결과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제인 메드하트 데이프는 물론이고 그의 자녀들과 친척들까지 몰살당했다고 한다. #

2023년 12월 22일 이스라엘 언론에 의하면 앞서 언급된 데이프의 부상이나 휠체어, 의족설 등이 부정되는 영상이 입수되었다. 그에 따르면 데이프는 걸음을 절기는 했어도 활동에는 무리가 없다고 한다. 그로 인해 데이프의 신상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스라엘 정보부의 무능이 부각되었다. #

2024년 7월 13일, 이스라엘 공군 F-35A 전투기가 그를 노리고 2000파운드 폭탄을 투하했고 그 결과 모하메드 데이프가 그의 부하인 라파 살라마[3]와 함께 폭사했다고 이스라엘 측에서 주장했다.[4]

하마스 측에선 하마스 조직원을 통해 데이프의 사망을 부정했지만 이후 이스라엘 방위군은 성명에서 “정보 평가에 따르면, 모하메드 데이프가 7월 공습에서 제거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재차 주장했다. #

다만 하니예, 신와르 등 하마스 고위관료들의 사망을 인정했던 하마스가 데이프의 사망을 부정한것을 보면 사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1] 이름은 가명이며 데이프는 아랍어로 "손님"이란 뜻이다. [2] 한쪽 눈을 잃어 외눈박이라는 설, 팔, 다리가 날아가 불구가 됐다는 설이 있으나 이것도 추정일 뿐 정확한 상태는 밝혀진 적이 없다. [3] 하마스 칸 유니스 연대 지휘관. [4] 그 과정에서 민간인 100명 이상이 사망해 국제사회의 비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