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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9 22:18:30

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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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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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ece5b6> 굴원
屈原
파일:굴원.jpg
<colbgcolor=#008000> (羋)
(屈)
(平)
(原)
최종직위 좌도(左徒) 겸 삼려대부(三閭大夫)
고향 단양(丹陽) 자귀(秭歸)[1]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343?년 ~ 기원전 278?년 5월 5일
1. 개요2. 초년3. 시련4. 국가의 위기5. 초왕의 실수6. 죽음7. 기타8.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전국시대 초기 초나라(楚)의 정치가이자 시인.

2. 초년

성은 미(羋), 씨는 굴(屈).[2] 이름은 평(平). 자(字)인 원(原)을 붙여 굴원이라 부른다. 성과 씨가 다르기에 드라마 등에서 미원이라고 호칭되는 경우도 있다. 초 회왕(楚懷王)[3]의 좌도(左徒)[4] 및 삼려대부[5](三閭大夫)의 직책에 있었다.

3. 시련

모국인 초나라의 귀족이자 고위공무원, 굴원이 높은 자리에 오르자 그를 시기하던 동료가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기에는 상관대부(上官大夫)라고 직책만 나올뿐,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흔히 근상(靳尙)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동일인물이라는 근거는 없다.
王使屈平為令,衆莫不知,毎一令出,平伐其功,(曰)以為 『非我莫能為』也。
대왕께서 굴평(屈平)에게 법령을 만들게 하신 일은 모르는 자가 없는데, 법령이 나올 때마다 굴평은 자기의 공적을 자랑해 내가 아니면 만들 수 없다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사기 굴원열전

당연히 이 말을 들은 왕은 분노하여 그를 멀리했다. 상관대부는 굴원의 직책과 동급이었는데, 왕의 명을 받들어 만들고 있는 법령의 초안이 작성되기 전에 그 일을 뺏으려고 하였다가 거절당하자 이런 일을 저질렀다 한다.

그렇게 삽시간에 백수가 되어버린 굴원은 하소연할 곳도 없고, 우울한 마음에 글을 쓰게 되는데, 그것이 한문학의 역사를 논하면 빠지지 않는 작품인 이소(離騷)이다. 제목의 뜻에 대해선 사기 굴원 열전 중 '이소란 근심스러운 일을 만났다는 뜻이다(離騒者 猶離憂也)'라고 나와 있다. 이 작품과 구가, 천문 등을 포함한 작품이 초사이다. 글항아리에서 처음으로 출판하였다.

4. 국가의 위기

(秦) 혜왕(惠王)[6](齊)를 정벌하기 전 동맹관계에 있던[7] 초나라와의 관계를 단절시키고자 그 유명한 종횡가(縱橫家) 장의(張儀)를 보냈다. 진 혜왕 9년(기원전 328년)에 장의가 재상이 되었고, 13년(BC 325)에 초나라와 전쟁을 벌였으니 사신으로 파견된 시기는 그 사이일 것이다.
大王誠能聴臣,閉關絶約於齊,臣請獻商於之地六百里 使秦女得爲大王箕婦之妾,秦楚娶帚嫁女,長爲兄弟之國。此北弱齊而西益秦也,無便此者。
대왕(초회왕)께서 진정 신의 말을 따라서 관문(關門)을 닫고 제나라와의 합종의 맹약을 끊어버린다면, 신은 상(商), 오(於) 일대의 땅 6백리를 초 나라에 바치고, 진나라의 여인을 대왕의 시첩(侍妾)이 되게 할 것이며, 진나라와 초 나라는 서로 며느리를 맞아오고 딸을 시집보내 영원히 형제의 나라가 되게 하겠습니다. 이는 북쪽으로는 제나라를 약화시키고 서쪽으로는 진나라에 보탬이 되게 하는 계책으로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라고 설득을 했는데, 이것이 먹혀들어[8]제나라와 단교를 하니[9] 제나라는 진나라와 동맹하게 된다. 장의가 연횡가였으므로 진나라 우위의 동맹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초왕은 6백리 땅을 털도 안 뽑고 잡술 생각에 부풀어 사신을 보냈는데,
臣有奉邑六里,願以獻大王左右。
신이 소유한 진나라의 봉읍 6리를 대왕께 바치고자 합니다.
분노한 초왕은 군대를 일으켜 진나라로 쳐들어갔지만, 오히려 단양(丹陽)과 한중(漢中)지역을 빼앗기고 많은 인명손실[10]을 입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차 공격, 허나 안타깝게도 남전(藍田)에서[11] 패배하여 결국 성 두개를 건네주고 강화를 맺게 된다.

5. 초왕의 실수

이렇게 탈탈 털린 회왕이지만, 자존심만은 세우고 싶었다. 진나라에서 땅을 교환하자는 제의가 들어오자
不願易地,願得張儀而黔中地。
땅은 필요없고, 장의를 받는다면 검중(黔中)의 땅을 바치겠소.
(사기 장의열전, 굴원열전에 공통으로 기록)
지도자로써, 세 치 혀에 속아서 나라의 운명을 기울게 한 것으로도 모자라 치졸하게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서 국토를 양도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장의는 갔다.

초왕 입장에서는 회를 떠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이지만, 사신으로 왔으니 일단 가두고 이후 죽이려고 했는데, 초왕의 사랑을 받던 부인(夫人)[12] 정수(鄭袖)를 모시는 근상(靳尙)[13]과 친했던 그는 초왕이 부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준다는 것을 알고 부인이 자신을 풀어달라 부탁하게 만든다. 사기 장의열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근상: 진나라에서 땅과 미녀들을 보내 장의를 살리려 할 터인데 왕은 땅을 좋아라 하고 진나라도 존중하니 당연히 받을 터이고, 그 미녀들도 총애하실 겁니다.
정수: (왕에게) 장의를 죽이면 진나라가 처들어 올 것인데 저는 진나라에 끌려가 죽고싶지 않습니다.
초왕: 내가 생각이 짧았구려. 장의를 잘 대접하겠소.

그리고 장의는 풀려났다. 그냥 풀려난 것도 아니고, 전처럼 후하게 대접했다(懐王後悔,赦張儀 厚禮之如故。''').

이에 굴원이 "어찌하여 장의를 죽이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묻자 그제서야 군사를 보냈으나 잡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부분은 굴원열전과 장의열전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굴원열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굴원: 전에 대왕이 장의에게 속으셨으므로 신(굴원)은 대왕께서 그를 삶아죽이실꺼라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차마 죽일 수는 없다하더라도 다시 그의 사설(邪説)을 들으시는것은 안 됩니다(前大王見欺於張儀,張儀至,臣以為大王烹之。今縦弗忍殺之,又聴其邪説,不可。).
초왕: 장의를 용서하고 검중을 얻는 것은 큰 이익이오. 약속후에 배신하는 것은 불가하오(許儀而得黔中,美利也。後而倍之,不可。).

6. 죽음

그렇게 시간은 흘러, 장의로 초나라를 괴롭히던 진나라 혜왕이 죽고, 소양왕(昭襄王)[14] 때까지도 초 회왕은 살아있었다. 소양왕은 초 회왕에게 진나라로 와서 만나자고 제의했고, 어리석은 초 회왕은 진나라에 직접 가려고 하였다. 소양왕이 초나라와 혼인관계가 있다고 하는데, 장의가 말한 국혼의 결과로 추정된다. 이에 굴원은 "진나라는 호랑이와 이리같은 나라입니다. 믿지도 말고, 가지도 마십시오(秦虎狼之國。不可信,不如毋行。)."라고 반대하였다. 하지만 자란(子蘭)이 "왜 진나라의 호의를 거절하십니까(柰何絶秦歓?)?"라고 말하는 바람에 그만 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들 예상했다시피 진나라의 무관(武關)에 들어서자 병사들이 뒤를 차단하고 억류한 채 땅을 내 놓으라고 요구를 하였다. 땅의 할양을 거부한 회왕은 조(趙)나라로 도망쳤으나, 그곳에서 더 달아나지 못하고, 결국 진나라로 끌려가 죽게 된다.

그리하여 한많은 초왕의 삶은 종지부를 찍고, 그의 장자가 즉위하게 되었다. 이 자가 경양왕(頃襄王)으로 초나라가 제나라에 패하고 난 후 제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다른 왕자도 아니고 장자를 볼모로 보낼 정도로 비참하게 당했다는 얘기. 즉위 과정도 기가 막힌게, 회왕이 잡히자마자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태자를 데려와서 왕위에 앉혔다. 당시 초나라 정세를 보아 간신들이 잡혀서 단물 다 빠진 왕을 구할 바엔 새로운 허수아비를 세울 생각으로 일을 진행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토목의 변으로 정통제가 사로잡히자 오이라트가 이를 이용할 것을 우려해 경태제를 세운 명나라의 예처럼, 진나라가 초 회왕을 이용할 것을 우려해 새로 왕을 세웠을 수 있다.[15] 동생 자란은 영윤(令尹. 초나라 최고의 관직)이 되었다. 그러나 초나라 사람들은 사실상 전대 왕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를 비판했고, 굴원도 나라가 잘 되길 바라는 충심에 쓴소리를 하고 시도 지었다.

그리고 열받은 자란은 상관대부를 시켜 굴원을 모함하게 하였다. 이 상관대부가 초 회왕에게 굴원을 매도한 그 사람과 동일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결국 굴원은 추방된다. 그 다음엔 굳이 말할 것도 없이 초나라는 진나라에게 허구헌날 털리는 신세로 전락한다. 백기에게 수도까지 털려서 여러 선왕들 무덤을 약탈되고 수도가 불바다가 되면서 부득이하게 수도를 옮겨야 했으니... 엄청난 피해를 겪어야 했다. 진나라와 동맹을 맺자고 하던 친진파들은 덕분에 이런 초나라의 막장 짓에 분개한 여론에게 얻어터지고 일부는 극형에 처하게 되었지만 나라를 말아먹은 자란에 대한 기록은 이게 끝이다.

추방당한 굴원은 슬픔으로 시를 읊으며 멱라강을 떠돌다 어부를 만났다. 어부는 그를 알아보고 놀라 물었다.
子非三閭大夫與?何故至于斯 ?
"당신은 삼려대부가 아니십니까? 어찌 이곳에서 방랑하시나요?"
굴원이 답하였다.
擧世皆濁我獨淸,衆人皆醉我獨醒,是以見放
"온 세상이 모두 흐린데 나 혼자 맑으며, 뭇 사람이 모두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으니, 이로써 추방당했다오."
어부가 다시 말하였다.
聖人不凝滯於物,而能與世推移。世人皆濁,何不淈其泥而揚其波 衆人皆醉,何不餔其糟而歠其釃?何故深思高擧,自令放爲?
"성인은 만사에 엉키거나 얽매이지 않고 능히 세속과 어울려 옮아갈 수 있다 했습니다. 세인이 모두 탁하다면 왜 그대는 썩는 진창의 물을 더욱 어지럽게 하고 탁한 물결을 일게 하지 않으십니까? 또한 뭇사람들이 모두 취해 세인이 혼몽하다면 왜 그대는 어울려 술지게미를 먹고 그 찌꺼기술이라도 마시지 않으십니까? 무슨 까닭에 깊이 생각하고 고결하게 행동하여 스스로가 쫓겨나게 만드셨습니까?"
그러자 굴원이 답했다.
吾聞之,「新沐者必彈冠,新浴者必振衣。」安能以身之察察,受物之汶汶者乎?寧赴湘流,葬於江魚之腹中。安能以晧晧之白, 而蒙世俗之塵埃乎?
"내가 듣기를, '새로이 머리를 감은 사람은 관을 털어 머리에 얹고, 새로이 몸을 씻은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고 걸친다.'라고 했소. 그러니 어찌 청결한 몸에 더럽고 지저분한 것을 받을 수 있겠소? 차라리 상강 흐르는 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의 배 속에 묻히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오. 어찌 깨끗하고 흰 내가 세속의 더러운 티끌과 먼지를 뒤집어쓸 수 있겠소?"
<어부사(漁父辭)>中 [16]
대부님과 세상살이를 논하는 지나가던 어부의 위엄[17]

사기 굴원세가에서는 강가를 떠돌며 시를 읊다가, 마침내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멱라수는 오늘날 후난성 동북부에 흐르는 미뤄강이다. 어떤 책들에는 율라(汩羅)로 잘못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물 이름 멱()"자와 "흐를 율()"자가 비슷하여 오기한 것이다.

이 부분이 참 비극적인데, 굴원 부분 한 곳에서 다루기에는 분량이 너무 많으므로 여기를 참조...하는 게 좋겠으나 지금은 지워져 없으므로 부득이하게 <어부사(漁父辭)>를 인용하여 얕게나마 최후의 비극을 표현하였다. 전설에서는 그가 투신을 하자 근처 백성들이 배를 몰아 구해내려 했으나 시체조차 건지지 못해 슬퍼하며 참대 잎에 찰밥을 싼 ' 종자(棕子)'를 뿌리며 애도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때가 5월 5일인 단옷날로 지금도 미뤄강 일대에는 명절을 맞이하며 굴원을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배를 몰고 나오는 것에서 유래한 배몰기 시합인 '새룡선(賽龍船)경기'를 하고 대나무에 찹쌀과 여러 재료를 넣어 찐 만두류의 음식을 먹는 행사를 거행한다. 이 풍습이 한국에도 전래되어 수릿날에 나뭇잎으로 싼 떡을 먹는 등의 풍습이 생겼다.

태평광기에 따르면 굴원이 5월 5일 멱라수서 투신하자 초나라 사람들은 굴원을 애도하며 이 날이 되면 대나무통에 쌀을 담아 강에 던져서 굴원에게 제사를 지냈다. 한나라 건무(建武, 광무제의 연호) 연중에 장사(長沙)의 구곡(區曲)이 백주대낮에 갑자기 어떤 선비를 보았는데, 그 선비는 스스로를 삼려대부(살아있을때 굴원의 관직)라 하며 구곡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내게 제사 지내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매우 고맙소. 다만 해마다 전해주던 것은 항상 교룡이 훔쳐갔소. 이번에도 은혜를 베풀 것이라면 단향나무 잎으로 그 위를 막고 채색 실로 감아서 주시오, 이 두 물건은 교룡이 꺼리는 것들이오." 하니, 구곡은 그 말대로 해주었다. 오늘날에 세상 사람들은 5월 5일에 웃기떡(粽)을 만들어 단향나무 잎에 오색 실을 두르는데, 모두 멱라수의 유풍(遺風)이다라고 하였다.

7. 기타

8. 대중매체에서

8.1. 삼국지 시리즈

파일:external/san.nobuwiki.org/1041.jpg
삼국지 12,13

삼국지 12 PK 고대무장으로 등장. 68/28/91/92에 계략, 내정에 적성이 맞는 무장. 물론 전투능력치는 전투에 쓸모없는 능력치에 전법이 진정이라서 계략부에 배치된 모습을 볼수있다. 혐오무장에 진시황이 들어가있는데 문제는 굴원이 살아있는 시기가 진시황이 태어나지 않거나 왕위에 올라가지 않은 상태이다. 차라리 장의로 설정해야 하는데

삼국지 13에서도 당연히 등장한다. 능력치는 68/28/84/89로 중신특성은 원정보좌. 전법은 어그로 형인 도발. 병종은 C/B/B이다. 당연 도발을 쓰는 순간 다굴과 함께 퇴장당한다. 특기는 농업5 / 문화7 / 언변5 로 달랑 3개다.

8.2. 대진제국 시리즈

대진제국 2편과 3편까지 등장. 특히 3편에선 그의 최후인 어부사를 다루면서 그가 큰 돌을 안고 점점 깊은 물로 들어가서 나중엔 수장되는 장면을 멀리서 보여준다.

8.3. 미월전

미월과 황헐의 스승으로 궁에서 천덕꾸러기 시절을 보내던 미월을 짧은 시간이나마 가르쳤고 초위후가 미월 남매를 순장시키려 했을 때 거희와 마찬가지로 도움을 주었다. 이후 제자 황헐을 보내 미월과 미융을 교육시킨다. 회왕이 제를 지내고 온 후 굴원이 미월 남매를 궁으로 불러들일 것을 부탁했다. 진과 대적할 5국을 다지기 위해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초가 5국을 이끄는 강대국이었고 진 혜문왕이 초국을 방문할 때 근상은 한 나라의 군주를 그렇게 내버려 두면 안 된다고 하였으나 굴원은 5국의 협력을 다지기 위해 병을 핑계로 만나지 말라고 한다. 황헐은 미월과 혼인하기 위해서 스승께 청하고 소사명대제 때 이루어지나 싶었으나 위후의 방해를 받아 실패한다. 그 후 회왕이 점점 총명함을 잃고 간신배 근상만을 총애하여 입지가 어려워고 초나라가 진나라에 크게 당하여 국력이 많이 쇠퇴한다. 회왕이 진나라에 잡혀가고 태자 미횡이 왕위에 오른 후 정치를 잘하여 초나라가 다시 일어서나 싶더니 또 근상의 입놀림에 당하고 굴원은 크게 실망하여 멱라강에서 자살한다.

8.4.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인으로서의 면모 덕분에 문명 6에서 고전 시대 위대한 작가로 등장한다.


[1] 현재의 후베이성 이창시 [2] 사기 굴원열전(屈原列傳) 중 '초나라 왕실과 동성이다(楚之同姓也)'란 구절이 있다.이는 초나라 왕성이 미성 웅씨(熊氏)인데, 분가하면서 다른 씨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춘추시대 중원국가에서 공손씨(公孫氏)를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3] 기원전 329년 ~ 기원전 299년. 이 사람의 후손이 항우 항목에 나오는 허수아비 황제 초의제. [4] 왕을 도와 정사를 돕고, 법령을 만드는 직책. [5] 왕족(王族)인 소씨(昭氏), 굴씨(屈氏), 경씨(景氏)의 세 가문을 관리하는 직책. [6] 기원전 356년 ~ 기원전 311년. [7] 사기 장의열전(張儀列傳) 중 진이 제를 정벌하려 하자 제나라와 초나라가 동맹을 맺었다.(秦欲伐齊 齊楚從親)로 보아, 이미 두 나라가 진나라의 전쟁계획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8] 진진(陳軫)이라는 유세객이 장의의 속을 꿰뚫어 본 듯이 반대를 한 것으로 나온다. [9] 사람을 시켜 국경에서 제나라 왕을 욕하게 했다. [10] 초나라가 배신했던 제나라가 진나라와 연합하여 병사 8만이 죽었다 [11] 남전은 무관 지나 위수 건너 관중 코앞에 위치한 도시이니 초군이 거기까지 진격해서 싸웠단 것은 엄청나게 치열한 싸움이 있었음을 암시할 수 있는 부분이다 [12] 제후의 정처(正妻). 초왕을 등에 업고 권세를 누리다보니 후궁들 몇명을 골로 보낸 일도 있었다. 한번은 후궁을 새로 들이자 그 후궁에게 '왕은 다른 이의 콧김 냄새를 싫어하니 그를 알현할 때 코를 막고 있으라' 고 했고, 그렇게 한 후궁에게 왕의 냄새를 역겨워했다는 누명을 씌우고 처형당하게 했다. 그만큼 왕의 총애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장의의 입장에서는 로비하기 쉬운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13] 사기 장의열전에서는 신하라는 말도 없고, 그냥 초왕의 부인을 모시는 일을 한다(尚得事楚夫人鄭袖)고만 되어있다. 상관대부가 어떤 직책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려대부이자 좌도벼슬을 하던 굴원과 동급이었다 하니, 부인을 모시던 근상이 상관대부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14] 기원전 306년 ~ 기원전 251년. 혜왕과 소양왕 사이에 진무왕(秦武王, 기원전 311년 ~ 기원전 307년)이 있었으나, 무왕은 천자를 굴복시킬 셈으로 주나라에 갔다가 호기심에 보기인 의 무게를 재어보던 중 다리가 부러져 죽었다. 소양왕은 진무왕의 이복동생. [15] 이전 글엔 경양왕이 볼모 출신의 왕이라 힘을 쓸 수 없을거라고 되어 있었으나, 춘추전국시대는 각국이 동맹을 맺는 와중에 왕손을 서로 인질로서 교환하였기에 그들 중 한명이 왕위에 오르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춘추오패중 하나인 진문공도 수십년을 타국을 전전하며 몸을 의탁하였고 진시황의 아버지인 장양왕 또한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있었던 사람이다. [16] 굴원의 대표작이라 알려지지만『사기』의 「굴가열전(屈賈列傳)」 가운데에 나오는 굴원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서술하고 있는 것이나 물에 빠져 고기밥이나 되겠다는 문장은 노골적으로 그의 최후를 암시하기에 후대에 만들어졌다는게 정설이다. [17] 다만 어부사의 어부(漁父)는 초야에 묻혀 사는 은자(隱者)의 의미가 강하며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어부(漁夫)와 차이가 있다. 즉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뿐 학문과 정치에 한 때 몸 담았을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설령 그 당시 심심풀이로 고기를 낚거나 잡거나, 혹은 생업으로 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서구에도 스피노자 같은 사람은 유리를 깎아 렌즈를 만들며 살았다. [18] 초사는 굴원의 글과 굴원에게 헌정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대부분 자신의 처지를 굴원에 비유한 글들이 상당수인데, 워낙에 굴원이 드라마틱한 인물이라서 괜찮은 글들이 많다. 가의의 글이나, 빙탄불상용으로 유명한 동방삭의 글도 초사에 포함되어 있다. [19] 혹은 연산군과 표연말로 나오기도 한다. 이 때는 표연말이 충언을 올리니까 빡쳐서 물에 던지게 했다가 잠시 뒤 구해준 후 니는 뭐 하러 물속에 들어갔냐며 놀리자 표연말이 굴원을 만났다고 하고 이에 표연말이 자신을 회왕에 빗대 화가 나 트집을 잡으려고 정말 굴원을 만났냐고 다그쳤는데 표연말이 저 말을 해서 연산군이 기분이 풀어졌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