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bordercolor=#fff><tablebgcolor=#fff> |
독일 연방의회 원내 구성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
숄츠 내각 (2021 ~ 현재) |
||
여당 | |||
독일 사회민주당 207석 |
동맹 90/녹색당 117석 |
||
야당 | |||
CDU/CSU 196석1 |
|||
자유민주당 90석 |
독일을 위한 대안 77석2 |
||
좌파당 (그룹) 28석 |
자라 바겐크네히트 동맹 (그룹) 10석 |
||
비교섭단체 및 무소속 8석3
|
|||
'''재적 733석 '''
|
|||
1.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 153석)과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CSU, 43석)은 연방의회에서
CDU/CSU라는 공동
교섭단체로 활동함. 2. 독일을 위한 대안 소속 의원 1명은 의회 교섭단체에 가입하지 않아 미포함. 3. 독일을 위한 대안 1석, 남슐레스비히 유권자 연합 1석, 무소속 6석. |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bordercolor=#fff> |
독일 연방의회 원내정당 목록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여당 | |||||
독일 사회민주당 207석
|
||||||
동맹 90/녹색당 117석
|
자유민주당 91석
|
|||||
야당 | ||||||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153석
|
독일을 위한 대안 78석
|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 43석
|
||||
좌파당 28석
|
자라 바겐크네히트 동맹 10석
|
남슐레스비히 유권자 연합 1석
|
}}}}}}}}} |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1]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colbgcolor=#E3000F> 약칭 | SPD(에스페데) | |
영어 명칭 | Social Democratic Party of Germany | ||
한국어 명칭 | 독일 사회민주당 | ||
슬로건[2] |
Soziale Politik für Dich (당신을 위한 사회 정치) |
||
창당일 | 1875년 5월 27일[3] | ||
이념 |
사회민주주의 유럽 연방주의[4] |
||
스펙트럼 | 중도좌파[5] | ||
주소 |
독일
베를린 빌리 브란트 하우스 D-10911 |
||
상징 색 |
[[빨간색| 빨간색 (#E3000F) ]](주색)[[자주색| 자주색 (#980267) ]](보조색)
|
||
유럽 정당 | 유럽 사회당(SPE)[6] | ||
청년 조직 | 젊은 사회주의자의 SPD(JUSOS) | ||
유럽의회 교섭단체 |
(S&D) |
||
국제 조직 |
(PA)[7] |
||
연방 당대표 |
자스키아 에스켄 라르스 클링바일[8] |
||
당원 수 | 365,190명(2023년 9월) | ||
연방의회 의원 |
207석 / 733석 (28.24%)
|
||
연방상원 의원[9] |
22석 / 69석 (31.88%)
|
||
주의회 의원 |
450석 / 1,893석 (23.7%)
|
||
유럽의회 의원[10] |
14석 / 96석 (13.67%)
|
||
기관지 | 전진(Vorwärts) | ||
정책 연구소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 | ||
공식 홈페이지 | |||
공식 SNS | }}} |
[clearfix]
1. 개요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정당, 현 집권여당.독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정당이며 세계 최초의 좌파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다. 중도우파 정당 ' 기독교민주연합(CDU)'과 함께 독일 정계의 양대 수권정당으로 영국 노동당 및 프랑스 사회당과 함께 유럽의 사회주의 중도좌파 정치를 주도해왔고, 수정주의 논쟁의 중심에 서는 등 그야말로 서구 좌파 정치 철학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이름대로 사회민주주의를 행동원칙 삼아 민주적 의사결정과 기본적인 정치, 경제, 문화적 권리를 실현함으로써 민주사회주의를 달성하는 것을 강령으로 한다.[11][12]
창당 초창기에는 철저한 노동자 계급정당(Klassenpartei)이였으나, 고데스베르크 강령과 베를린 강령 등 대중정당 노선을 채택하면서 오늘날에는 사실상 국민정당(Volkspartei)으로 평가받는다.
2. 내부 정파
사회민주당 내의 정파는 크게 민주사회주의,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 케인스주의를 지지하는 의회좌파 계열 당원(이하 당 내 좌파)과 제3의 길을 지지하는 제하임 서클에 속하는 중도 성향 당원(이하 당 내 우파)으로 나뉜다.당 내 우파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 시절부터 시작된 '아겐다 2010'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다. 반면 당 내 좌파는 고전적인 사민주의 정책과 복지국가 체제를 유지하는 것을 지향하며, 최근 몇년간 아겐다 2010을 바탕으로 시행된 경제적 자유주의에 기반한 개혁 프로그램으로 인해 복지국가가 축소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지지하는 당 내 우파에 부정적이다.
2003년도에 발표된 아겐다 2010의 반작용으로, 2005년에 당 내부에서 오스카 라퐁텐 전 연방재무장관 등 의회좌파 강경파를 중심으로 탈당 운동이 있었다. 탈당파는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 대안(Arbeit und soziale Gerechtigkeit – Die Wahlalternative)'이라는 이름으로 당 내 의회좌파 강경파 일부가 2003년 사회민주당 탈당 후 2007년도에 민주사회당과 합당해서 좌파당을 창당했다.
2010년대 중후반 들어선 다시 사회민주주의로의 노선 복원을 시도 중이다.
3. 역사
3.1. 초창기 (창당 ~ 1914)
독일 통일 이전인 1863년 페르디난트 라살이 창당한 전독일노동자동맹이 그 원류다. 1869년 아우구스트 베벨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가 만든 독일 사회민주노동당과 합당해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으로 재창당했으나,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강력한 反사회주의 정책과 이를 기초로 한 탄압으로 제도권 정치에는 참여하지 못했고 편법적으로만 참여했다. 이 시기 사회민주당은 정치조직으로서 산업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을 표방하면서 정당의 틀을 갖춰나가는 중이었고, 노동운동과 친화적이었다.[13]1890년 총선에서 대약진하고 이 선거에서 패한 비스마르크가 물러 난 뒤엔 빌헬름 2세에 의해 반사회주의법이 폐기되면서 오늘날의 당명인 독일 사회민주당으로 개칭했으며, 마르크스주의를 당의 핵심 이념 및 지향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말년의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사회민주당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사회민주당의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 흔히 공산주의가 마르크스-레닌주의로 호칭되지만 인적 계보로만 본다면 사회민주당이 마르크스의 직계이고 후의 소련 볼셰비키, 독일 공산당이나 동독의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좌파당은 오히려 방계에 가깝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자유주의가 진보적인 이념 취급을 받았을 시절이라 이 시절 포지션은 극좌였다.
이후 제국의회 선거에서 꾸준히 주요정당의 자리를 차지했으나, 당시 독일 제국의 선거제도가 현재 프랑스처럼 결선투표제인 데다가 계급투표 성향이 강했고, 도시지역에 의석수가 인구에 비해 덜 배정되어 있어서 집권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제도권 진출을 통한 사회주의 성립이라는 수정론적 관점으로 바뀌게 된다. 이 시기 사민당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카를 카우츠키는 '우리 당은 혁명적이지만 혁명은 하지 않는다.'라고 냉소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여전히 당의 핵심이념은 마르크스주의 였지만, 독일 사회민주당은 적극적, 폭력적 활동과 세계적인 공산주의의 확산을 주도하기보다는 내부에서 사회주의의 기반을 갖추겠다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르크스적인 역사 발전론에 따라 산업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국가에서는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주의가 확산될 수 있다는 것이 그러한 이론의 토대였는데, 이는 이후에 자본주의의 '자동 붕괴론'으로 이름 지어졌다.
독일에서 제1야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이들은 1912년 총선에서 드디어 원내 1당이 되는 쾌거를 이룩했고, 중도 자유주의 세력과 합치면 의회 과반수를 넘길 정도로 넉넉하게 세를 확보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전쟁 수행을 위한 독일의 국채 발행을 지지하는 데서 시작하여 독일의 전쟁수행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14] '(아직 자본주의의 후진국인) 러시아 따위에게 독일이 무너지면 (자본주의의 최종 단계에 더 가까운, 즉 공산주의에 더 가까운) 독일 내 사회주의의 기반도 붕괴할 것'이라는 논리였지만, 한편으로는 국제주의를 지향하는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흔드는 것이었다. 결국 제2인터내셔널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된다. 이로 인해 당 내부에서는 반전을 주장한 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소수파'가 독일 공산당으로 떨어져 나갔다.[15]
3.2.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시절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휴전을 요청했다. 그러나 협상국에서 전범으로 취급한 빌헬름 2세와 독일 군부와는 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독일 군부는 사회민주당에 전후처리를 떠맡겼다.11월 혁명으로 제2제국이 종식되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사회민주당은 정국의 주도권을 얻었다. 그리하여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중심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전부터 받아들였던 수정론적 관점을 당의 핵심목표로 구체화하며, 혁명론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제도권 정당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대신 혁명론은 독일 공산당이 가져가게 된다.
사회민주당은 독일 신정부 구성에 큰 공헌을 했으며, 신생 바이마르 헌법에도 자신들이 추구하는 여러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사항들을 삽입하는 등 성공적으로 새 국가의 출발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무엇보다 11월 혁명에서 무장봉기에 반대한 것이 중도층의 호응을 얻었으며, 우파에서도 이념은 다르지만 대화는 할 수 있는 파트너로 인식하게 된 것이 큰 효과를 얻었다. 덕분에 중도파 독일 민주당이나 중도우파 가톨릭 중앙당과 바이마르 연정을 구성하여 공화국 초기에는 다수의 총리를 배출하는 등 내각을 주도했다.
패전 직후의 혼란과 프랑스군- 벨기에군의 루르 점령 등 내외적 악재로 여러 차례 곤경에 빠졌다. 이후 사회가 좀 안정된 1928년 총선에서 승리, 다시 연정을 구성해 이번엔 제대로 나라를 꾸려나가려 했는데 세계 대공황이 터져버렸다.
대공황과 뒤이은 국내 정치의 혼란 속에 사회민주당은 중도 지지층 다수를 우파 및 나치당에, 좌파 지지층 다수를 공산당에 빼앗겼다. 1930년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발동해 헤르만 뮐러 총리를 해임하면서 총리직까지 잃게 된다. 사민당은 꾸준히 과반은 아니어도 원내 1당이었으니 다른 정당의 협조를 얻어 의회 과반의 지지도 얻지 못한 대통령 내각[16] 따위 불신임을 때려버리면 될 일이지만, 나치당과 공산당이 공공연히 공화국을 끝장내겠다고 선동하는 마당에 불신임 때렸다간 나치 혹은 공산당이 집권해 공화국이 작살날 것 같아 불신임을 포기했다. 이 시기 사민당은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정치지도자가 부재하여 위기를 헤쳐가지 못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고 수권법이 통과되면서 활동 금지 및 정당해산을 당했다. 사민당의 당수였던 오토 벨스가 수권법의 하원 표결 당시 연설로 저지했지만 오히려 히틀러의 역공을 받아 실패하고 만다. 당시 독일 정계에서는 중도 진영과 나치를 포함한 우파가 수권법에 동의했고, 똑같이 수권법을 반대했던 극좌파 공산당은 수권법 제정 전에 히틀러가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을 구실로 금지해버렸는데, 그 상황에서 공식적인 경로로 수권법 제정에 저항한 마지막 정당이 사민당이었지만 소용없었다. 사민당은 나치당이 강성하던 1932년 이후로도 줄곧 원내 제2당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정국 주도권을 쥐지 못한 것이 끝내 파국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오토 벨스, 쿠르트 슈마허 등 기존 사민당의 핵심지도자들은 체포되거나 국외 망명을 떠났다.
3.3. 전후 쿠르트 슈마허의 당수 취임과 기나긴 야당 시절
제2차 세계 대전에 나치 독일이 패망한 직후, 1945년 5월 외국에 망명했던 기존 사민당 주요 정치지도자들과 쿠르트 슈마허 등 국내에 남아 계속 나치에게 저항했던 세력이 결합하여 미국과 영국 군정청의 승인 하에 하노버에서 당을 부활시켰다. 특히 영국 노동당 출신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가 독일 사민당의 재건에 우호적이어서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고, 덕분에 독일 패망 후 우파 정치 세력들이 좌충우돌하고 있던 시기에 사민당은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당을 재건했다.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소련은 막대한 자금과 무력이라는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동원하며 주도 면밀하게 동유럽의 사회주의 정당들을 장악해 나갔고, 각 나라 사정에 맞게 폭동 선동, 무력 점거, 언론 탄압, 군사적 압박 등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동유럽을 일거에 공산화해 나가고 있었다. 동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군사력과 자금력 등 여러 수단을 동원해 동독 지역의 사회주의 정당을 장악해 갔는데, 미영프 점령 지역에서는 자금 동원 이외에는 군사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결국 사민당과 공산당 등 주요 사회주의 정당의 동서 분할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동독 지역 사회주의 정당은 소련이 직접 접수하고 서독 지역 사회주의 정당에는 직접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지만 자금 지원을 계속하여 간접 영향력을 미치거나 최소한 소련의 우호 정치 세력으로 잔존시킬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사민당의 경우, 독일의 소련 점령 지역에서는 소련의 영향력하에 오토 그로테볼이 동독 내 사민당 세력을 규합, 별도의 사민당 조직을 구성해 나갔고, 공산당과의 합당을 주장했다. 하지만 쿠르트 슈마허 등 서독의 사민당 지도부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폭력과 폭동 등 공산당의 파괴주의를 혐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당과의 통합에는 분명히 선을 긋고 있었다. 결국 소련의 영향력하에 동독 지역 사민당은 단독으로 공산당과 합당해 사회주의통일당을 구성해 사민당으로부터 이탈해 나갔다.
한편 서부 독일에 잔존한 사회민주당은 쿠르트 슈마허의 주도 아래 하노버에서 재구성되는데, 나치 시절 지하 조직 형태로 유지되며 슈마허 중심의 권력 집중화가 이루어져 있었고,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사회민주당이 당내 계파 싸움 등으로 무력하게 무너진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당수 슈마허에게 강력한 권한을 집중시켰다. 당헌에 명시된 당수의 권한을 떠나서 사민당 당원들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지하 조직을 이끌었던 슈마허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였다. 이렇게 슈마허를 중심으로 사민당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사분오열하던 모습에서 환골탈태하여 강한 결속력과 조직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편 앞서 언급된 것처럼 사민당 수뇌부들은 대부분 공산당의 폭력 운동에 동의하지 않아 공산당과는 명확하게 선을 긋고 있었던데다가 소련이 동독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세력을 장악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소련과 스탈린에 대해 경계하게 되었다. 때문에 서독 사민당은 정통 마르크스주의 강령을 따르는 사회주의 정당을 추구하면서도 스탈린과 소련을 비판하였다. 그렇지만 사민당은 사회주의자로서 미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대한 간섭을 확대하는 것도 원하지 않아 독일의 자결권을 주장하면서 연합군 국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17] 사민당은 서독이 공산진영, 자유진영 모두로부터 자유로운 중립국을 추진했다. 아울러 사민당은 중립국 서독의 경제 체제로 모든 산업의 국유화, 계획경제 도입 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소련의 공산주의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인식했다.
연합군의 군정이 끝난 후 최초의 서독 민간인 정부 구성을 위해 치러진 1949년 제1회 독일 연방하원 선거에서 사민당은 기민-기사 연합에 이어 제2당 자리를 차지했다.[18] 슈마허는 이때 중공업 국유화 및 계획경제 채택을 주장하고, 미국의 마셜 플랜을 비난하는 동시에 콘라트 아데나워가 이끄는 기민련을 '제5의 점령국'[19]이라며 강하게 비난했는데 이게 서독 국민들의 외면당하고 말았다. 슈마허는 서독이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립지대로 남아야한다고 주장했지만, 그와 사민당이 내세웠던 산업 국유화 및 계획경제 도입은 중립지대가 아니라 사실상 공산권 국가들과 같은 경제체제를 도입하겠다는 것이므로, 미국과 소련 사이에 중립을 취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대해 상당수의 사람들은 결국은 사회주의로 가기 위해 중간 단계로 내세우는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사민당이 주장하는 서독 체제는 결국 소련과 큰 차이가 없는 사회주의 국가 경제체제인데 결국 그렇다면 동독과 마찬가지로 소련의 위성국가가 될 것이라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고, 결령 슈마허와 사민당이 주장하는 대로 소련과 동맹을 맺지 않는 사회주의 국가가 된다면 결국 서방, 공산진영 양측에서 모두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소련이 독일 전지역 총선안을 거부함에 따라 결국 1949년 미영프 3개 점령 지역, 즉 서독 지역에서만 총선이 치러지게 되었다. 이미 연합군 군정기에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질서가 서독에 자리잡은데다가, 전후 복구와 베를린 봉쇄로 현실화되는 냉전기 소련의 군사적 위협 속에서 위기감을 느낀 서독 국민들은 기민련을 비롯한 자유민주주의 중도 보수 정당에 많은 표를 주었고, 결국 기민-기사 연합을 중심으로 자유민주당, 독일당 등이 연정을 구성하여 기민당수 콘라트 아데나워가 독일연방공화국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20]
이렇게 쓰라린 패배를 겪었지만 이후 독일의 제1야당으로서 위치를 공고히 했다. 이 과정에서 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과 함께 유럽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핵심축으로 나서게 된다. 하지만 1952년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받던 슈마허가 뇌졸중으로 급사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거기다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서독의 경제 부흥이 계속되면서 아데나워 총리와 기민련의 위세는 더할 수 없이 높아졌고 사민당은 에리히 올렌하워가 새로운 당수로 취임한 뒤 치른 두번의 총선에서 기민련-기사련 연합에게 2연속으로 대패를 당하는 굴욕을 겪어야만 했다.
결과가 이렇게 되자 자기들도 케케묵은 마르크스주의로는 결코 집권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21]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채택해 공식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하고 대중정당으로 변모하는 대변화를 시도했다. 이데올로기의 수호보다 대중의 지지를 얻어 선거에서 승리를 더 우선적으로 추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까지도 서독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콘라트 아데나워의 기세에 눌려 만년야당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3.4. 다시 찾아온 전성기와 전후 첫 총리 배출
1965년 총선에서도 패배의 쓴잔을 마시며 후일을 기약하는듯 했지만, 키징어가 치열한 기민련 내 당내 다툼에서 승리해 총리 후보가 되자 반격의 실마리를 잡게된다. 증세안과 관련하여 자민당의 반발로 인해 전임 총리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내각이 붕괴된 것에 반감을 품고 있던 키징어는 모두의 생각을 뒤엎고 사민당 쪽에 손을 내밀었고, 당시 당수로 취임해있던 빌리 브란트가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22], 1966년에 기민당과 대연정을 구성하면서 연립 여당 자리에 오르게 됐다.[23] 빌리 브란트는 부총리 겸 외무장관 직에 올라 사민당의 집권 역량을 쌓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대 공산권 강경 정책을 밀어붙이는 기민련과 대 공산권 유화 정책을 주장하는 사민당의 연정이 애초부터 오래가긴 힘든 상황이었고, 1969년 총선을 앞두고 대연정이 붕괴되었다.1969년 총선에서 총선을 앞두고 68 혁명의 분위기가 서독의 전역을 감싸면서 과거 청산이 총선의 핵심 키워드로 떠올랐고, 안그래도 오랜 기민련의 집권으로 국민들의 염증이 보통이 아닌 상태에서 나치 부역 경력이 있는 키징어가 위기에 몰리게 됐다. 그러나 선거 결과 여전히 기민-기사 연합이 242석으로 승리하였다. 사민당은 22석 증가하여 224석을 차지하는 약진을 보였지만 여전히 2당이었다. 그러나 사민당이 59년 대중 정당으로 변신을 시도한 후 당권을 잡고 있던 빌리 브란트는 이전 기민-사민 연정을 했던 경험을 살려 기민당과 사이가 나빠진 자민당에 연정을 제안했고[24], 60년대 중도 좌파 성향의 표를 흡수하기 위해 좌향좌를 시도하던 자민당이 사민당의 연정의 제의를 덥석 받아들이면서 사민-자민이라는 좌우 연정이 성립되었다. 그렇게 1969년 사민당 당수 빌리 브란트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전후 처음으로 총리를 배출하게 된다. 아울러 총선에서 1등하지 못한 당에서 처음으로 총리가 배출된 사례이기도 했다.
집권 이후 브란트 동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2차 대전 시기 나치 독일의 만행에 대한 반성과 화해 시도를 통해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빌리 브란트가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를 방문해 전쟁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직접 무릎끓고 사죄한 사건은 전세계에 충공깽을 선사했다.[25] 그덕분에 1972년 총선에서는 처음으로 기민련/기사련 연합을 아예 눌러버리고 제1당으로 등극하며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 승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민당 정권의 통화, 외환 정책의 여파와 서독의 경제 성장 둔화 등으로 야기된 경기 침체와 스태그플레이션의 공포가 민심을 집어삼켰고, 1974년에는 브란트 총리의 비서가 동독 간첩으로 드러나고, 아울러 브란트의 섹스 스캔들까지 생기면서 결국 브란트는 당 내부 압력으로 총리직에서 사퇴했고, 재무부 장관이었던 헬무트 슈미트가 후임 총리에 올라 이 위기를 수습했다.
경제 관료 출신인 슈미트는 사민당 내 우파 성향을 대표했고, 그는 철저하게 케인스주의에 입각한 확장재정정책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고자 했으며 수출을 적극적으로 장려해 경제 위기를 탈출하고자 했다. 한편 국내 안보적으로는 극좌파들의 테러행위를 완벽하게 제압하고 외교적으로는 미국과 소련의 극한 대립 속에서 NATO를 통해 리더십을 보여주는 등 정치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1976년 선거에서는 경기 침체의 여파로 다시 기민-기사 연합에 밀려 2당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여전히 자민당과의 연정 지속으로 정권을 유지했다. 70년대 후반 재정확장정책으로 경제 침체를 완화하는 듯 했으나, 제2차 오일쇼크로 경기는 다시 침체되었다. 1980년 총선에서도 이전과 비슷한 의석을 유지하며 자민당과의 연정을 이어갔다.
하지만 확정재정정책이 장기화되면서 점차 재정적자가 심해지자 자민당과 노선갈등이 격렬해졌다. 결국 1982년에는 자민당이 사민당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헬무트 콜의 기민-기사 연합과 함께 내각불신임결의를 제출했고, 이것이 의회에서 통과되며 사민당 정권은 붕괴되었다. 그리고 내각불신임이 통과됨과 동시에 기민당의 헬무트 콜이 총리에 취임했다.
3.5. 제1야당 복귀, 동서독 통일과 제3의 길을 통한 재집권
1989년부터 2021년까지 사용한 로고[26]
독일연방공화국 역사상 최초의 내각불신임 가결로 헬무트 콜이 총리에 오르자, 총리에서 물러나 헬무트 슈미트는 불신임으로 총리 자리를 차지했지만 이것은 국민의 의사는 아니라고 주장했고, 이에 콜은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실시했다. 이렇게 치러진 1983년 조기 총선에서 기민-기사 연합은 18석 이상 의석을 늘리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반면 사민당은 25석이나 의석을 잃는 참패를 당했다.
이후 기민련의 헬무트 콜 총리가 연승하면서 장기 집권을 이어 나갔고, 사민당은 다시 한번 오랜 기간 제1야당의 위치를 지켰다. 하지만 콜의 화려한 외교력에 비해 당시 기민련 정부의 내치 능력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었기 때문에 기민당의 지지율은 조금씩 하향 곡선을 띄고 있었다. 그러나 사민당의 사정 역시 좋지 않았는데, 그것은 80년대 녹색당이 떠오르며 사민당의 표를 잠식했기 때문이다.
1989년 즈음에는 기민당의 지지율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사민당을 비롯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급진적인 정국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바로 동서독 통일이었다.
동유럽 혁명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동독의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정권이 붕괴, 1990년 동독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자유 선거가 실시됐다. 사민당과 기민련은 독일의 통일 방식을 두고 이 선거에서 다시 충돌했다. 정작 이 정국을 위한 물밑 작업인 동방정책을 주도한 사민당에서는 급진적 통일로 인해 발생할 사회적 부작용을 막기 위해 점진적인 통일을 주장했는데, 사민당의 주장을 자유에 굶주린 동독 주민들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결국 급진 통일 및 화폐 통합을 주장한 동독 기민련이 압승을 거뒀고 동서독 통일이 이루어지면서 열린 1990년 12월 첫 동서독 통합 연방의회 선거에서도 CDU/CSU가 압승하면서 정권 탈환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후 콜은 통일 총리로서 초반 엄청난 인기를 누렸지만, 곧 통일의 부작용으로 독일 경제가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구 서독과 동독 지역에서 모두 콜과 기민당은 빠르게 인기를 잃어갔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3의 길을 주창한 사민당 내 우파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당수 자리에 오른뒤 1998년 총선에서 무려 기존에 비해 의석을 46석이나 늘리며 제1당을 탈환, 녹색당과 독일 역사상 최초의 적녹연정을 만들며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생산적 복지 개념을 독일에 도입해 콜 총리 임기말 경제 하강 국면을 탈출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엘베 강 홍수 때 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민당 정권에서도 독일의 경제 상황은 기민당 정권보다 나아지지 않았고 이런 실망감으로 2002년 총선에서 기민-기사 연합은 회생하여 사민당의 3표차 밑까지 따라잡았다. 어쨌거나 그래도 3석 차이로 1당을 유지했고, 녹색당과 연정도 이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슈뢰더의 핵심 정책인 하르츠 개혁을 둘러싼 사민당 내 좌우파의 갈등이 깊어졌고, 골디락스 경제가 마무리되면서 경기 침체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치러진 2005년에서 사민당은 기민-기사 연합에게 제1당을 내주고 말았다. 하지만 이 선거에서 기민-기사 연합, 사민당 모두 이전보다 지지율을 많이 잃었기 때문에 기민당으로서도 제1당이 되었다고 기뻐할 수 만은 없는 상황이었다.[27] 기민-기사 연합은 자민당과 연정으로 과반을 구성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사민당 역시 민주사회당이나 녹색당과 연정으로 과반을 만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기민-기사 연합의 앙겔라 메르켈은 메르켈 내각에 사민당을 포함하는 대연정을 제안했고, 사민당은 이를 받아들여 7년간의 재집권을 마무리하고 정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3.6. 두번의 대연정과 추락
기민당과의 대연정에 참여한 이후 지지층 일부가 녹색당이나 좌파당으로 옮겨가는 지지층 이탈 현상이 벌어졌다.2009 총선에서 사민당은 146석이라는 역대급 참패를 거두었고, 선거 후 사민당은 기민당으로부터 연정을 제안받지도 못했다. 총선 후 메르켈은 사민당에서 자민당으로 연정 파트너를 바꾸었다.
2010년 이후에도 지지층이 녹색당이나 좌파당으로 옮겨가는 이탈 현상이 지속되면서 여론조사상 지지율이 녹색당보다도 뒤지는 위기에 처한 상태였다.
자민당이 붕괴한 2013년 총선에서 사민당은 의석수를 193석까지 회복했지만, 311석이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차지한 기민-기사 연합의 위세에 빛이 바랬다. 하지만 기민당은 원내 진입에 실패한 자민당을 대신해 새로운 연정 파트너를 찾아야 했고, 이에 사민당은 다시 기민당으로부터 대연정 제안을 받고, 협상에 착수했다. 결국 주요 쟁점이었던 시간당 8.5 유로의 최저임금제 도입을 관철시키며 대연정에 참가하였다. 사민당은 내각에서 6개의 장관직을 얻었으며, 지그마어 가브리엘 당수는 경제부 장관을 맡으면서 환경부 소관이었던 에너지 분야를 가져왔고, 부총리를 겸하게 되었다.
하지만 2016년 들어서 메르켈 총리의 지지율이 점점 하락하자 사민당은 기민/기사련을 버리고 좌파당[28], 녹색당과 연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2017년 2월 여론조사에서 잠시 지지율 1위를 찍었다. 무려 일주일만에 10%가 수직 상승했는데, 이 지지율 상승의 비결에는 고졸 블루워커 출신으로 청년시절부터 사민당에서 활동하여 유럽의회 의장까지 지낸 입지전적인 인물인 마르틴 슐츠를 가브리엘 당수가 깜짝스럽게 총리 후보로 내세우고 당수 직도 이양한 덕분으로, 독일에서도 슐츠 효과라고 부르는 중. 메르켈의 장기 집권에 따분해 하는 유권자들과 극우들의 거짓말, 선동퍼레이드에 피로함을 느낀 지지자들이 결집하는 모양세로, 기민당과 독일을 위한 대안의 지지율도 동반 하락했다. 게다가 슐츠는 '누가 더 독일 내 사회문제를 잘 해결할 것인가?'라는 설문조사에서는 39%대 14%로 메르켈 총리를 무려 25% 차로 압도하고 있어 동서독 통일 후 첫 적적녹 연대도 꿈이 아닌 듯 싶다. 2월 18일 정당 지지율 여론조사에서 사민당이 33%, 기민당이 32%로 나타났다.
2017년 독일 총선 전 대통령 간선 선거에서 외교부장관이였던 사회민주당 출신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전후 사민당 출신 독일 대통령으로서는 3번째다.
그러나 메르켈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인상을 확실히 심지 못한 채 자를란트 주 의회 선거에서 대참패 하며 다시 지지율이 빠지고 있다. 결국 9월 총선을 앞두고 통일세 폐지를 공약으로 걸었다. #
이에 대해 슐츠 측은 비대칭적 동원해제라는 용어를 써가면서 비판했다. 메르켈이 정치적 쟁점에 대해 견해를 밝히지 않음으로서 국민들이 그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게 만드는 전략이라는 것. #
그러는 와중 총선을 1달 앞두고 사민당에 대한 큰 의혹이 터졌다. 니더작센의 주 총리가 디젤게이트 사건에 관한 연설문을 사전에 폭스바겐 측에 보여주고 폭스바겐의 입맛에 따라 연설문이 수정되었다는 것. 이로 인해 좌파당과 주 연립 여당인 녹색당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 거기다가 사민당 출신 전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가 러시아 국영석유 기업 이사로 스카웃 되가면서 또 한번 독일 정계에 충격을 주었다.
2017년 연초에는 집권여당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가 있었으나, 슐츠 효과는 달랑 2주였고 이후로는 지지율이 떨어지다가 계속 침체하며 20% 극초반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 기민/가사련의 지지율은 30후반을 찍었다. 최근 사민당이 슈뢰더 시절에도 친 시장정책을 폈고, 최근 우파정당과 연정에 참여하며 친시장주의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이에 실망한 노동자들이 사민당에 등을 돌리고 있다고 FT는 분석했다. 지난 5월 치러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주의회 선거에서 사민당이 기민련에 밀려 패배한 것이 노동자들의 변심을 방증한다.[29]
독일경제연구소(DIW)도 최근 사민당 지지층이 블루칼라 노동자에서 화이트칼라 근로자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며 사민당 지지자 중 일반 노동자의 비율은 17%에 불과하다는 연구결과를 내놨다. 반면 독일을 위한 대안의 노동자 유권자 비율은 34%에 달했다. 전문가들은 사민당 지지층이 투표권을 포기하거나 노동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서는 포퓰리스트 정파로 옮겨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사민당의 몰락이 슈뢰더부터 이어진 당의 우경화에 의한 결과일 뿐만 아니라 아닌 메르켈이 이끄는 기민/기사련의 좌경화 때문일 수도 있다. 메르켈은 본인이 보수정당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난민이나 복지 정책 등에서 사민당과 크게 차이가 없는 정책을 펼치면서 좌향좌했고, 이것이 10년을 훨씬 넘게 안정적으로 독일을 운영해온 메르켈의 리더십과 합쳐지면서 사민당의 존재감이 크게 없어졌고, 결국 굳이 좌파 유권자가 사민당만을 바라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또한 독일인의 전체적인 정치 스펙트럼은 우파보다 좌파가 약간 우세한 것에 비해서[30] 기민/기사련의 지지도가 사민당을 압도하는 것은 기민/기사련이 지속적으로 좌파적 의제도 포함하면서 중도화되는 것에 비해서 사민당은 슐츠의 당대표직 수락 이후로 선명성을 이유로 계속 좌경화 되는 모습을 보이면서 중도좌파 유권자들이 예전처럼 사민당만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제19대 독일 연방하원 선거에서 대패했다. 출구조사 결과 전후 최저치에 해당하는 20.0%가 나왔다. 마르틴 슐츠를 새롭게 내세워 공격적인 캠페인을 펼쳤으나, 민심을 돌리는 데 실패했고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
메르켈 수상이 연정 협상이 늦어지자 결국 사민당에게 손을 내밀었고, 결국 2018년 2월 7일에 사민당이 대연정을 수용하면서 대연정이 꾸려졌다. 기사
날이 갈수록 좌파의 헤게모니를 녹색당에 넘겨줄 각이 보이고 있다. 2018년 말이 돼서는 엄청난 상승세를 타 20%대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는 녹색당과 반대로 지지율이 15% 정도로 추락한 상태다.
3.7. 2017년 대연정 이후
201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득표율 15.8%라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았다.[31] 2위인 녹색당에게 중도좌파 지지층을 큰 폭으로 빼앗긴 덕분에 독일을 위한 대안과 지지율 3위 자리를 놓고 경합을 펼치는 수준으로 몰락했다. 지속적으로 친난민-좌파 세력을 흡수한 녹색당이 일부 조사에서 기민련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는 것에 비하면 눈물이 날 수준. 이 선거 참패로 인해 안드레아 날레스 대표가 사임했다. #대연정에 비판적인 노르베르트 발터-보르얀스와 자스키아 에스켄 공동후보가 53.06%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 이 결과로 현재의 대연정이 붕괴되는 것이 아니냐는 예상이 나왔지만, 그로 인해 벌어질 정치적 불안정을 우려하여 두 공동대표는 대연정에 한번 더 기회를 줄 것이라며 당장의 연정 붕괴에는 선을 그었다. #
당대표 교체 이후로도 녹색당으로 이동한 지지층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좌우 연립내각에 참가하는 사민당에 대한 불만+녹색당 자체의 매력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인듯. 그나마 다행인 점은 2020년 2월에 있었던 함부르크 지방선거에서 4석만 잃으며 1당 지위를 지키고 적녹 연정을 유지해 페터 첸처가 시장 직을 지켰다는 것. # 사실 사민당의 텃밭이나 다름없는 함부르크에서 진다는 건 사민당이 해산해야 한다는 소리와 같다.
2021년 제20대 독일 연방하원 선거 총리 후보로 재무장관 올라프 숄츠를 지명했다. # 코로나19 확산에 대응하여 적극적으로 재정을 풀어 타격을 최소화시킨 점이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올라프 숄츠가 슈뢰더 라인으로 불릴 정도로 당내에서 우측에 위치한 후보라고 평가 받는데다, 주류정치계에서 꾸준히 활동한 사람이라, '아웃사이더' 이미지의 마틴 슐츠가 처음에 큰 지지율 반등을 올린 것 같은 효과는 보이지 못했다.[32]
2021년 총선도 지금으로선 1당이 되긴 어려워 보이는데, 여론조사상 15% 정도 지지율을 유지하면서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반정부 행보를 보이고 있는 독일을 위한 대안과의 차이는 7%p 정도로 벌렸지만, 여전히 녹색당에 밀리는 3위이며 사민당과 녹색당을 합쳐도 기민련·기사련 연합에 근소하게 뒤지고 있어 # 이대로 선거가 치러진다면 집권을 위해서는 좌파연립내각(적· 녹 내지 적· 적·녹)이 아닌 또다시 흑적 대연정을 해야 될지도 모를 상황이기 때문.
2021년 3월에 치르어진 라인란트팔츠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회 선거에서 사민당이 득표율을 유지하였다. 마스크 스캔들과 코로나사태로 두 주의회 선거 모두 기민련과 독일을 위한 대안당의 득표율이 4~5%가까이 떨어지는 반면 녹색당은 소폭 상승, 사민당은 유지하는 결과가 나와, 사민당의 지지율이 이제 반등세에 올라섰다는 해석이다. 라인란트팔츠에서는 기민련의 득표율이 폭락하며 득표율 격차를 벌리며 제1당을 수성하는데 성공하였고, 바덴뷔르템베르크에서는 독일을 위한 대안 당의 득표율이 추락하며 녹색당과 기민련에 이어 다시 3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반영되는 것인지 전국구 여론조사에서도 사민당의 지지율이 조금씩 상승하며 녹색당을 추격하고 있다. 다만 자민당의 지지율도 10%대로 오른 상황이라, 현재로선 녹적연정의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자민당과 독일을 위한 대안당의 지지율이 각각 10%대를 유지하고 기민련의 지지율도 20%대 중반을 유지할시 비좌파계열 정당들이 도합 과반의 의석을 차지할 것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좌파당을 녹적연정 공식에 넣어도 구성을 못한다는 의미.
3.8. 2021년 총선 : 16년만의 정권교체
|
Soziale Politik für Dich.
당신을 위한 사회 정치
당신을 위한 사회 정치
총선을 앞두고 제작한 새 로고.
2021년 총선을 기점으로 메르켈이 정치에서 은퇴하기 때문에 메르켈 이전의 보수적이던 기민련 이미지가 유권자들에게 다시금 회자되고 있는 상황이라, 마스크 스캔들이 역린이 되어 코로나 사태 동안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던 기민련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있다. 기민련에서 빠져나가는 지지율을 얼마나 챙기느냐에 따라 사민당이 이번 총선에서 어느정도의 득표를 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민당 입장에서는 2021년 총선의 결과에 따라 정부구성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장기적 전략에서 손해볼 것이 없다는 조심스러운 전망을 내놓고 있다. 사민당의 지지율은 기민련과 대연정을 할 때마다 폭락해왔기 때문에 2019년 당대회에서 확인되었다시피 이제는 야당 입장에 서서 당의 입장을 선명히 해달라는 당원들의 요구가 거센 상황이다.[33] 그리고 기민련과 녹색당 사이에 연정이 성립한다 치더라도 기후변화에 대한 두 정당의 입장이 너무나도 판이하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두 정당간 정쟁이 벌어질 것이 예상되는데다, 어느 한쪽이 양보라도 하는 순간 자기 정당지지율에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뻔하다.
거기에 한때 언론들의 극성보도로 정치계를 뒤덮으며 사민당을 곤란하게 했던 난민 사태 이슈는 사라진지 오래이고,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도 현재의 백신 접종율을 보면 총선이 있는 가을 쯤에는 어느정도 해소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독일 유권자들의 주요 관심 이슈는 기후변화와 그에 따른 일자리변화/창출이 될 가능성이 크다.
2021년 7월 라인란트팔츠주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서 유례가 없는 대홍수가 일어났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주총리이자 기민련의 차기 총리 후보인 아르민 라셰트는 기존에도 기후변화에 대해 '서둘러서 해결할 이유가 없다'라는 등 기후변화 해결에 미온적인 입장을 보였던데다 홍수가 난 당일엔 기후변화에 대한 입장을 하루에도 3번씩이나 왔다갔다 바꾸는 등, 기후변화에 따른 자연재해에 전혀 대응을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그 와중에 홍수로 피해를 입은 지역을 찾아가서는 자연재해에 유감을 표하면서도 인터뷰하는 대통령의 뒤에서 다른 사람들과 농담을 주고 받으며 웃고 떠드는 모습이 TV 카메라에 잡히는 바람에 온갖 구설수에 올랐다. 덕분에 후보 비호감도가 급등하고 있다.
한편 기후변화 해결에 가장 주도적으로 나섰던 녹색당이 이에 반사이익을 보는듯 싶었으나, 녹색당 총리 후보인 아날레나 베어보크의 비호감 이미지 역시 표절 논란 등으로 상당히 강해서인지, 2021년 5월에 최고치에 달했던 지지율은 그 이후로 계속해서 하향세를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 덕분에 사민당의 총리 후보인 올라프 숄츠에 대한 유권자들의 호감도가 경쟁 후보들에 비해 두세배나 압도적으로 높은 상황이 되었다. 이 부분이 앞으로 사민당의 지지율을 끌어올릴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지지율도 크게 상승하여 8월 말 기준 20% 중반으로 올라 20% 초반으로 추락한 기민/기사 연합을 제치고 1위를 기록하여 차기 집권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결국 2021년 9월 26일 총선 결과 25.7%를 득표하며 총선에 승리하고 원내 1당을 되찾았다![34] 녹색당으로 젊은층 지지자들이 많이 빠져나가긴 했지만, 좌파당에서 지지자들을 대거 흡수한데다, CDU/CSU를 지지하던 고연령대가 사민당으로 지지를 바꾼 점이 승리의 요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즉 녹색당과 비교하여 '마일드'한 기후변화 공약들을 펼쳐 손해를 본 측면이 있지만,[35] 중도소리를 듣던 사민당이 좌파적 정책들을 다시 대거 수용한데다, 상대 총리 후보인 아르민 라셰트의 비호감과 비교되는 올라프 숄츠의 높은 호감도로 인해 좌파당[36]과 고연령층의 지지율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에 무려 16년만에 사민당 주도의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열렸다.
총선 승리 이후인 10월 29일, 노르베르트 발터-보르얀스 공동대표가 연말인 12월에 있을 대표 선거에는 불출마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대표직에서 사퇴했다. # 이에 당 지도부에서는 선거 승리를 이끈 전략가인 라르스 클링바일 사무총장을 후임 공동대표로 승격시키기로 했다. #
11월 23일, 마침내 자민당, 녹색당과의 신호등 연정 협상이 공식 타결되며 숄츠가 제9대 독일 총리로 지명됐다. # 이후 각 당의 연정 수립안을 거쳐 12월 8일 연방의회의 신임 투표[37]를 통과하고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으면서 공식적으로 16년만의 정권교체를 완수했다.
3.9. 올라프 숄츠 총리 시절
2022년 1월까지만 해도 허니문 기간을 한껏 누리며 65%라는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였으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갈등으로 인해 연정에서 파열음이 나면서 숄츠 내각 지지율이 한달만에 50%대로 추락하는 아픔을 맛봐야했고, 당 지지율도 1년만에 CDU/CSU에게 다시 역전당하고 말았다. 특히 숄츠 총리가 전임 앙겔라 메르켈 총리 대비 외교 무대에서 약한 존재감을 보여 투명인간이라는 모욕적인 별명까지 얻고 말았다. #하지만 숄츠 총리가 취임한 지 100여 일만이 되는 2022년 3월 28일 열린 자를란트 주의회 선거에서 사민당이 40%가 넘는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 단독 과반을 확보하는 대승을 거뒀다. 이로써 앙케 렐링어 자를란트주 경제장관을 필두로 한 사민당은 단독 정부 구성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23년 만에 기민련을 제치고 주총리직을 거머쥐었고, 숄츠 총리는 취임 이후 첫 시험대에서 사민당의 압승을 이뤄내면서 굳건한 여론의 신임을 증명했다. #
하지만 두달 뒤인 2022년 5월에 열린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지방선거에서 연거푸 패배하며 지지가 흔들리고 있다. 특히 당내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문제에 대해 우왕좌왕 하고있는 것이 주 이유. 정당 지지율 역시 연일 하락세를 거듭하면서 CDU/CSU, 녹색당의 뒤를 잇는 3위로 다시 추락했다. #
그래도 2022년 10월 열린 니더작센 주의회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위안을 얻게 되었는데, 특히 선거의 주요 의제 중 하나가 엠슬란트 원전 폐쇄 문제 및 에너지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번 선거를 통해 숄츠 총리와 사민당이 내세우는 주요 의제인 탈원전에 대해 국민들의 승인을 얻은 것으로 평가받았다. #
2023년 12월에 열린 전당대회에서 대러외교정책 기조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이 전당대회에서 의결된 외교정책 제안서를 보면 러시아와 경제적 관계를 강화하면 러시아의 민주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존의 가정이 잘못됐고, 결과적으로 에너지 분야에서 정책적 종속을 불러왔다고 시인했다. #
202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청소년층까지 투표연령이 확대되면서 너도나도 청소년층 표심 공략에 들어갔는데, 대안당이 틱톡을 포함한 SNS를 통한 적극적인 선거운동으로 Z세대의 표심을 사로잡은 것과 달리, SNS를 통한 선거운동에 미숙한(…) 사민당은 본 선거에서 청소년층에서 저조한 지지세를 기록했다. # 이전부터 지지층의 노쇠화와 청년층들을 대상으로한 홍보 부족이 문제점으로 지적당했는데 그 부분이 제대로 드러나고 만 것.
2024년 9월, 작센 주의회 선거와 튀링겐 주의회 선거에서 기민련, 대안당, 자라 동맹에도 밀리며 집권여당으로서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하지만 9월 22일 진행된 브란덴부르크 주의회 선거에서 대안당을 간신히 앞서면서 일단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당의 지지세 상승이 뚜렷했던 선거인 만큼, 대안당에서는 자축하고 있는 상황이다.
2024년 11월, 자민당이 연정에서 탈퇴하면서 소수내각이 됐다. 숄츠 총리는 야당들에게 2025년 1월 신임투표를 제안했지만 야당에서는 즉각적인 신임투표를 요구했다. 결국 2024년 12월 신임투표 - 2025년 2월 23일 조기 총선을 하기로 합의하면서 과도 내각 형식으로 정부를 유지하게 됐다.
2025년 총선 공약으로 소득세 감면과 전기차 보조금 부활을 내걸었다. #
2024년 12월 16일, 의회 신임투표안이 부결되면서 조기 총선이 현실화됐다. 총선 국면이 다가오면서 지지율이 소폭 반등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AfD에도 밀리는 지지율 탓에 CDU/CSU에 정권을 내주는 건 명약관화한 상황. 다만 정국 안정을 위한 CDU/CSU 주도 대연정 가능성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4. 비판 및 논란
- 사회민주당(SPD)이 주최하고 올라프 숄츠 수상과 하원의원들이 참석한 초청 행사에서 최소 9명의 여성이 데이트 강간약에 중독되었던 사건이 있었다고 밝혔다. 사회민주당이 행사를 주최하며 고의든 비고의든 성범죄자들이 초대되었다는 것이어서 논란이 되었다.
5. 역대 선거결과
1949~2021년 총선까지의 결과.
5.1. 제국의회
1871 3석 3.2%1874 9석 6.8%
1877 12석 9.1%
1878 9석 7,6%
1881 12석 6.1%
1884 24석 9.7%
1887 11석 10.1%
1890 35석 19.8%[38]
1893 44석 23.3%
1898 56석 27.2%[39]
1903 81석 31.7%
1907 43석 28.9%[40]
1912 110석 34.8%[41]
5.2. 바이마르 하원
연도 | 당수 | 의석수 | 득표율 | 증감 | 집권 | |
1919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165/423 | 37.9% | - |
샤이데만 내각 (사민+중앙+민주) |
|
1920 | 헤르만 뮐러 | 103/459 | 21.9% | -16.0 | 비집권 | |
1924.5 | 오토 벨스 | 100/472 | 20.5% | -1.4 | 비집권 | |
1924.12 | 오토 벨스 | 131/493 | 26.0% | +5.5 | 비집권 | |
1928 | 오토 벨스 | 153/491 | 29.8% | +3.8 |
뮐러 2기 내각 (사민+중앙+인민+민주+바이에른인민) |
|
1930 | 오토 벨스 | 143/577 | 24.5% | -5.3 | 비집권 | |
1932.7 | 오토 벨스 | 133/608 | 21.6% | -2.9 | 비집권 | |
1932.11 | 오토 벨스 | 121/584 | 20.4% | -1.2 | 비집권 | |
1933.3 | 오토 벨스 | 120/647 | 18.3% | -2.1 | 비집권 |
겉보기에는 사민당이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서 일당 우위 정당제를 구축한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도 나치당의 부상 이전까지는 원내 1당을 놓치지 않았으나 의석 과반수를 차지하는것은 번번히 실패했고 내각도 몇 번 밖에 구성하지 못했다.[42] 그러나 사회민주당은 중도우파 중심 소수연정을 신임투표 등에서 지원하는 등[43] 제1당으로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5.3. 서독 연방의회
연도 | 총리 후보 | 의석수 | 득표율 | 증감 | 집권 | |
1949 | 쿠르트 슈마허 | 131/402 | 29.2% | - | 비집권 | |
1953 | 에리히 올렌하우어 | 151/488 | 28.8% | -0.4 | 비집권 | |
1957 | 에리히 올렌하우어 | 169/497 | 31.8% | +3.0 | 비집권 | |
1961 | 빌리 브란트 | 190/499 | 36.2% | +4.4 | 비집권 | |
1965 | 빌리 브란트 | 202/496 | 39.3% | +2.9 | 비집권 | |
1969 | 빌리 브란트 | 224/496 | 42.7% | +3.4 |
브란트 1기 내각 (사민+자민) |
|
1972 | 빌리 브란트 | 230/496 | 45.8% | +3.1 |
브란트 2기 내각 (사민+자민) |
|
1976 | 헬무트 슈미트 | 214/496 | 42.6% | -3.2 |
슈미트 2기 내각 (사민+자민) |
|
1980 | 헬무트 슈미트 | 218/497 | 42.9% | +0.3 |
슈미트 3기 내각 (사민+자민) |
|
1983 | 한스 요한 포겔 | 193/498 | 38.2% | -4.7 | 비집권 | |
1987 | 요하네스 라우 | 186/497 | 37.0% | -1.2 | 비집권 |
5.4. 독일 연방의회
연도 | 총리 후보 | 의석수 | 득표율 | 증감 | 집권 | |
1990 | 오스카 라퐁텐 | 239/662 | 33.5% | -3.5 | 비집권 | |
1994 | 루돌프 샤르핑 | 252/672 | 36.4% | +2.9 | 비집권 | |
1998 | 게르하르트 슈뢰더 | 298/669 | 40.9% | +4.5 |
슈뢰더 1기 내각 (사민+녹색) |
|
2002 | 게르하르트 슈뢰더 | 251/603 | 38.5% | -2.4 |
슈뢰더 2기 내각 (사민+녹색) |
|
2005 | 게르하르트 슈뢰더 | 222/614 | 34.2% | -4.3 |
메르켈 1기 내각 (기민/기사+사민) |
|
2009 |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 146/622 | 23.0% | -11.2 | 비집권 | |
2013 | 피어 슈타인브뤼크 | 193/631 | 25.7% | +2.7 |
메르켈 3기 내각 (기민/기사+사민) |
|
2017 | 마르틴 슐츠 | 153/709 | 20.5% | -5.2 |
메르켈 4기 내각 (기민/기사+사민) |
|
2021 | 올라프 숄츠 | 206/736 | 25.7% | +5.2 |
숄츠 내각 (사민+녹색+자민) |
5.5. 유럽의회
1979 35석 40.8%1984 33석 37.4%
1989 31석 37.3%
1994 40석 32.2%
1999 33석 30.7%
2004 23석 21.5%
2009 23석 20.8%
2014 27석 27.3%
2019 16석 15.8%
2024 14석 13.90%
6. 기타
|
|
빌리 브란트 하우스 (독일 사회민주당의 중앙당사, 베를린) |
당사 이름이 빌리 브란트 하우스(Willy-Brandt-Haus)다. 크로이츠베르크에서 포츠담 광장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있다. 독일식의 평범한 현대건축물의 외관을 하고 있지만 내부에 자연채광이 들어오는 큰 홀이 있어, 대부분의 실내 연설, 기자회견과 언론과의 인터뷰를 이곳에서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름답게 전임 총리 빌리 브란트의 동상이 있다.
하부조직으로 국기단이 있었다. 정식명칭은 흑적금 국기단인데,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는 준군사조직이었으며, 독일 공산당의 적색선전군사동맹과 대립했다.
한국의 제18대 대통령 선거 직후 손학규 의원이 독일 사회민주당의 초청을 받고 독일을 방문한 적이 있다.
7. 둘러보기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요정당 |
||
공산주의 | 독일 공산당 | |
사회주의 · 사회민주주의 | 독일 사회민주당 | |
독일 독립사회민주당 | 독일 사회주의 노동자당 | |
자유주의 · 급진주의 | 독일 민주당 | 독일 인민당 |
가톨릭 | 독일 중앙당 | 바이에른 인민당 |
보수주의 · 개신교 | 독일 국가인민당 | |
독일 조국당 | 독일 중산층 제국당 | |
극우 민족주의 | 독일 노동자당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
독일 민족자유당 |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 |
[1]
조치알데모크라티셰 파르타이 도이칠란트
[2]
약칭인 SPD를 응용해서 만든 슬로건이다.
[3]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 집권 후 강제 해산,
1945년
나치 독일 패망 후 재창당.
[4]
2019년 독일의 유럽의회 선거/각 정당들의 입장(독일어)
[5]
독일 제국 시기에는
좌익 ~
극좌로 분류되기도 했다. 완전한 중도좌파로 자리잡은 것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부터이다.
[6]
영어와
프랑스어 명칭은 유럽사회당(영어: Party of European Socialists·PES, 프랑스어: Parti socialiste européen·PSE)이지만
독일어 명칭은 독일 사회민주당과의 연계를 강조하기 위함인지 유럽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Europas)으로 표기하고 있다.
[7]
기존에 속해 있던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이 비
민주적 정당의 가입을 허가하여 독일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거세게 반발한 끝에 별도로 결성한 정당 연합이다. 다만 사회주의 인터내셔널과 달리
사회자유주의 성향에 가까운 정당들도 가맹시키고 있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탈퇴하였다.
[8]
에스켄 대표와 함께 공동대표를 맡고 있던 노르베르트 발터보르얀스가 총선 이후 사임하면서 2021년 12월 11일 당 대의원 86.3%의 지지를 받아 후임자로 추대되었다.
[9]
주 정부에서 연방 상원의원을 지명하며 임기가 정해져 있지 않기에 각 주 의회의 선거 이후 사민당이 가진 의석 수가 변동 가능성이 있다. 보통은 주 총리를 비롯한 주 정부의 각료들이 연방 상원의원이 되는데, 독일은 주 정부까지
의원내각제이므로 이들은 모두 주 의회 의원이기도 하다. 사실 독일의 연방 상원은 의원들이 소속 정당보다는 소속 주가 더 중요하다.
[10]
96석은 유럽의회에서 제공되는 독일 의석에 한정된다. 유럽의회 총 의석은 총 720석.
[11]
독일 사회민주당의 비영리 재단인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한국사무소에서 번역한 '사회민주주의의 기초' p.95 1-3줄에서 발췌. 또한 이 문장은 사회민주당의 'Hamburger Programme 2007; 16f'를 토대로 작성되었다.
[12]
우리의 역사는 민주사회주의 사상과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들의 사회에 의해 규정되었으며, 우리의 핵심가치들은 그 속에서 실현된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인 시민권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권리가 모두에게 보장되고 모두가 착취, 억압,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적・인간적 보장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경제, 국가, 사회질서가 요구된다. 우리에게 민주사회주의는 연대 속에서 자유롭고 공정한 사회의 비전이다. 민주사회주의의 실현은 우리의 영원한 과업이다. 우리의 행동원칙은 사회민주주의이다(Hamburger programme 2007: 16f).
[13]
당과 노동조합과의 관계는 노동자운동에 친화적인 좌파 내의 굉장히 오래된 논쟁이다. 일반적 좌파이론으로 보면, 당이 주로 정치투쟁을 통한 사회변혁을 지향한다면,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삶의 조건과 이를 지키기 위한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한 경제투쟁을 지향한다. 당은 정치조직이고 노동조합은 경제조직이다. 반사회주의자법이 있을 당시 사회민주당이 군주국가에서 벗어난 법치국가, 의회의 인정, 정당의 합법화 등을 위해 투쟁했다면,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의 합법화, 임금, 노동자 처우 개선을 위한 관리감독과 노동시간 준수를 위한 노동입법 등을 주장했다. 물론 사회민주당은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노동자계급의 정당을 표방했고, 노동조합의 요구를 수용했고 이를 입법화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노동조합과 친화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민주당의 주요 간부들은 노동조합보다는 주로 야학이라 할 수 있는 노동자교양협회를 통해 주로 조직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박근갑, 2009. <복지국가 만들기 - 독일 사회민주주주의 기원>, 현대의지성 참고.
[14]
프랑스에서도 비슷하게 프랑스의 세계대전 진행을 돕기 위해 노동계급이 파업과 혁명 시도 등을 하지 않는다는 국가와 노동계급 간의 "
신성동맹"이 체결되었다.
[15]
러시아, 프랑스를 포함한 대다수의 유럽 국가에서도 좌파진영은 너나 할 것 없이 찬전여론에 적극 동참했다. 예외가 당시에 러시아 좌파 내에서도 소수파에 불과했던 레닌 그룹 정도였고,
러시아 혁명으로 굴욕적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수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전쟁 중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게 되면서, 러시아 공산세력은 "
제3인터내셔널"로 계승을 주장하게 된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소련을 차린 후
코민테른(국제 공산주의자회)을 차리면서, 공산주의의 주도권은 소비에트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오시프 스탈린의 집권과
독소전쟁을 통해 코민테른 역시 러시아의
일국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를 획일적으로
위성국에 하달하는 위계조직이 된다.
현실사회주의는 결과적으로 국가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
[16]
바이마르 체제에서 의회 지지 없이 대통령 비상대권에 의존해 유지되는 내각. 뮐러 내각 붕괴 이후
나치 독일 성립 이전까지 있었던
브뤼닝 내각이나
파펜 내각,
슐라이허 내각, 그리고
히틀러 내각이 대통령 내각이었다.
[17]
워낙에 연합군에 대한 비타협 노선을 견지한터라 심지어 독일 신헌법 제정 과정에서도 독일 민중의 기본권 추가 확대를 주장하며 반대표를 행사하라고 당원들에게 종용할 정도였다.
[18]
엄밀히 말하면 사민당은 기민당보다 많은 득표를 올렸지만, 기민당과 기사당은 의회에서 같은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자매 정당으로 기사당은 바이에른주 밖에는 후보를 내지 않고, 기민당 역시 바이에른주에는 후보를 내지 않는 관계였다. 독일 의회는 철저히 교섭단체 단위로 돌아가며 독일 의회에서 교섭단체는 하나의 정치단위로서 단일 정당이나 거의 마찬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19]
쉽게 말해 2차 대전 당시 독일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한 연합군들의 똘마니라는 비칭이다.
[20]
선거 결과 기민-기사 연합이 139석, 사민당이 131석을 차지하였고, 기민-기사 연합은 자민당, 독일당 등 다른 중도 보수 정당들과 연정을 구성했다.
[21]
특히 당시 경제장관이었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주창한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 이론이 결정적이었는데, 국가의 기본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이고, 경제 운용에 있어서 되도록 시장의 원리와 민간기업에 맡기지만, 공정한 시장 질서의 확립이나 각종 복지 및 사회보장 제도에 있어선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이념으로 오늘날의
사회자유주의에 가까운 이론을 기민련이 빠르게 채택하면서 사민당의 입지에 큰 타격을 입혔다.
[22]
1961년 당시 서베를린 시장으로
베를린 장벽이 촉발한 위기 탈출을 위해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서베를린으로 초대하고 군사 지원 약조를 받는 등 대활약했고 그 덕분에 국민들 사이에서 큰 지지를 받았다.
[23]
당시 빌리 브란트는 사민당의 집권 실패 이유를 단순히 기민련의
매카시즘과 서독 국민들의
레드 컴플렉스 때문만이 아니라 수권경험 부족에 따른 국민들의 외면이 크다고 판단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이 판단은 정확했다.
[24]
지난 66년 연정 때 기민-기사 연합과 자민당은 연정을 구성했지만 심한 갈등을 표출했다.
[25]
일명
브란트의 무릎꿇기(Brandt Kniefall)로 불리는 그 사건이다. 당시 헝가리의 뉴스 캐스터가 이 소식을 전하며 "무릎을 꿇은 것은 브란트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민족이었다."라는 명언을 남긴 바 있다.
[26]
현재 것과 크게 차이는 없어보이지만, 잘 보면 현재의 로고보다 SPD 글씨가 조금 작다. 그리고 현재의 로고에는 옆에 슬로건이 같이 표기되어 있다.
[27]
사실만 놓고보면 선거 결과는 사민당-녹색당의 적녹연정과
기민련-
기사련-
자민당의 흑황연정 중 그 누구도 연정으로 과반을 만들지 못하는 무승부에 가까웠다.
[28]
동독 공산당인 사회주의 통일당의 후신인데, 슈뢰더와 불화를 빚던 정통좌파
오스카 라퐁텐 파가 사민당을 탈당한 뒤 이 당과 합쳐 사민당을 수정주의라고 열렬히 디스하고 있어 서로 적대하는 사이였다.
[29]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는 인구 1천800만의 최대인구주이자 사민당 텃밭으로, 사민당은 이 지역을 지난 46년간 장악해왔다.
[3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81&aid=0002852644&viewType=pc
[31]
1887년 독일 제국의회 선거 이후 무려 132년 만에 기록한 사민당 최저 득표율이다.
[32]
물론 마틴 슐츠는 유럽의회에서 오래 활동한 중진 정치인이다. 다만 독일 국내 정치에 모습을 많이 드러낸적이 없기 때문에 대중들이 그렇게 인식하였다.
[33]
오죽하면 메르켈 총리의 별명이
연정 파괴자다. 연립정부가 아니라 연정 파트너를 파괴해서 그렇다.
[34]
물론 2017년과 비교하여 많이 오른것이지, 메르켈 이전에 사민당이 받던 득표율에는 발끝도 쫒아가지 못하였다. 오히려 2013년 선거결과와 동률이다. 전통적인 군소정당이던 녹색당이 많이 성장하고, 극우정당 AfD의 등장으로 30~40%대 득표율을 받던 양당 CDU/CSU와 사민당의 득표율이 전반적으로 쪼그라들었다.
[35]
사민당 내에서도 청년단체인 JUSOS등을 기수로 기후변화 해결에 대한 목소리는 매우 강한편이다. 하지만 주요 지지계층인 노동조합과 더불어 사민주의적 복지정책을 떠받드는 일자리 및 세금을 늘 고려해야하는 사민당 입장상, 어차피 녹색당이 포함된 연정정부를 꾸릴 수 밖에 없으니, 녹색당에 '급진적'인 정당 이미지를 부여하고 자신들은 중재를 본다는 포지션을 갖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36]
실제로 좌파당의 지지율이 높은 편이던 구 동독 지역에서의 사민당 득표율이 이번 선거에서 많이 올랐다.
[37]
찬성 395표, 반대 303표
[38]
득표율 1위 기록 원내 4당
[39]
원내 2당 등극
[40]
원내 4당
[41]
원내 1당 등극
[42]
선거 직후 구성한 내각만 센다면 2번, 총리 교체 등으로 인한 개각까지 포함한다면 4번이다.
[43]
중도우파 정당 상당수가 사회민주당을 경계했지만 이들이 아니라면 정치과정 속 극우나 극좌의 정치적 영향력이 확대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