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2-12 07:25:27

노흠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 유화 · 유선, 유총 ,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盧欽
(? ~ 278)
1. 개요2. 생애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자약(子若)으로 노육의 아들, 노식의 손자, 노정(盧珽)의 형이다.

2. 생애

유주 범양군 탁현 사람으로 마음이 깨끗하고 담박한 성격으로 앞일을 헤아리는 식견이 있으면서 경서, 사기에 뜻이 깊었으며, 어려서부터 명예와 지위가 높아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었고 청빈하게 살았다. 같은 군 사람인 장화가 가난하고 나이가 어려서 고아가 되자 동네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려고 하지 않았지만 노흠만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귀하게 여겼으며, 노흠은 효렴에 천거되었지만 응하지 않았고 조상에게 벽소되었다.

조상의 동생도 과거에 노흠을 수중에 넣겠다고 했지만 노흠은 조상의 자제가 법도를 함부로 범해 좋지 않다고 했으며, 조상이 이를 깊이 받아들여 조상의 동생에게 벌을 주었고 상서랑이 되었다가 249년에 고평릉 사변으로 조상이 주살되자 면직되었다. 이후 시어사에 임명되고 아버지의 작위인 대리정후를 계승했으며, 낭야태수로 옮겼다가 사마의가 태부가 되자 종사중랑으로 벽소되었고 낙양을 나와 양평태수, 회북도독, 복파장군 등을 역임했고 노흠의 치적은 칭찬받았다.

산기상시, 대사농, 이부상서 등을 역임했고 대량후로 작위가 올랐으며, 선우사가 장화를 추천해 태상박사로 임명하게 하자 노흠은 이를 사마소에게 이야기해 장화가 하남윤승에 임명되었다. 265년에 사마염이 서진을 건국해 황제에 오르자 도독면북제군사, 평남장군, 가절 등에 임명되고 여러 물품과 함께 3만 전을 받았으며, 노흠이 출진해 너그러움과 엄격함으로 변방의 근심을 없앴고 낙양에 들어가 상서복야에 임명되었다가 시중이 덧붙여졌다.

노흠의 생활이 청렴하고 가난해 비단 100필이 하사되었고 재능에 따라 인재를 천거해 청렴하고 공평함을 실현했다고 칭송받았으며, 278년에 사망하자 위장군에 추증하면서 의동삼사로 삼았고 여러 물품과 3만 전을 하사했다. 노흠은 예법으로 인한 제도에 근거해 아내가 죽자 지팡이를 갖추고 규칙대로 상의 기간을 마칠 때까지 외출하지 않았으며, 그가 쓴 시, 부, 논란 등은 수십 편이 되었고 작은 길이라는 제목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