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23:22:33

남한(오대십국시대)

남한(십국)에서 넘어옴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동아시아에 위치한 한반도의 남부 지역과 그 부속도서를 실효지배하는 국가에 대한 내용은 대한민국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중국의 역사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font-size: .92em; letter-spacing: -.4px"
황하 문명
하(夏)
상(商)
서주(西周)
동주(東周) 춘추전국시대 ( 춘추 | 전국 )
춘추오패 | 전국칠웅
초한쟁패기
후초(後楚) | 서초(西楚) | 십팔제후국
전한(前漢)
신(新)
현한(玄漢)
후한(後漢)
삼국 위(魏) 촉(蜀) 오(吳)
서진(西晉)
동진(東晉)
환초(桓楚)
오호십육국
전진(前秦)
남북조 송(宋) 북위(北魏)
제(齊)
양(梁)
후량(後梁)
수(隋)
당(唐)
무주(武周) | 위연(僞燕) | 황제(黃齊)
오대십국 여러 민족들
요(遼)
서요(西遼)
북송(北宋)
남송
(南宋)
금(金)
몽골 제국
원(元)
북원(北元)
명(明)
순(順) | 남명(南明) | 후금(後金)
오주(吳周) | 동녕(東寧)
청(淸)
태평천국(太平天國)
중화민국
(中華民國)

군벌세력
청황실 소조정 | 임시정부(臨時政府)
북양정부(北洋政府)
중화제국(中華帝國) | 호법정부(護法政府)
중화인민공화국
(中华人民共和国)
}}}}}}}}}


십국(十國)
마초
(馬楚)

(吳)
오월
(吳越)
전촉
(前蜀)

(閩)
남평
(南平)
남한
(南漢)
후촉
(後蜀)
남당
(南唐)
북한
(北漢)

대한
大漢
909년 ~ 971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후량 북송
별칭 <colbgcolor=#FFF,#191919> 남한(南漢), 남평(南平),
남해(南海), 대월(大越)
위치 중국 광둥, 베트남 북부
수도 반우 흥왕부(番禺興王府)
정치 체제 군주제
국가원수 황제
국성 유(劉)
주요 황제 고조 유엄(911~942)
언어 중세 중국어
문자 한자
종교 대승 불교, 유교, 도교
종족 한족
통화 건형중보(乾亨重寶) 등
현재 국가 중국, 베트남

파일:중국 남당.jpg
951년경 오대십국 후반기의 형세.

1. 소개2. 역사3. 역대 황제

[clearfix]

1. 소개

중국 오대십국시대 10국 중 하나로, 당나라 멸망 후 지금의 광둥성 광시 지역을 지배한 국가.

2. 역사

건국자 유은(劉隱)의 선조는 후난성에 있었는데 조부 유안인이 복건 지역으로 이주하여 남해 교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획득하고, 지역의 유력자가 되었다. 아버지 유겸(劉謙) 때 광저우로 옮겨 황소의 난 때 공적을 세우고, 봉주[1] 자사가 되었다. 유은의 선조는 아랍계라는 설도 있다.

유겸이 사망한 후, 그 지위를 이어받아 자사가 된 유은은 정해군 절도사의 반란을 진압하고, 오히려 이것을 기회로 삼아 904년 정해군 절도사가 되었다. 그 후 광동 전 지역과 광서의 일부를 지배하고, 당나라 멸망과 더불어 자립할 준비를 하였다. 거기에 남해 교역으로 얻은 이익을 토대로 광동, 광서에 세력을 넓혀 반독립 세력화했다. 이에 대해 당시 중원의 세력이었던 후량은 909년, 그를 남평왕(南平王)으로 봉하였고, 911년에 남해왕(南海王)으로 다시 책봉하였다. 유은은 남해왕에 임명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뒤를 계승한 동생 유엄(劉龑)은 917년 황제를 칭하고, 완전히 독립했다. 국호는 처음엔 대월(大越)이라고 했으나, 918년에 서한, 동한을 건국한 유씨(劉氏)와 같은 성씨라고 하면서 국호를 한(漢)으로 고쳤다. 남한(南漢), 월한(越漢)이라는 이름은 다른 정권과 구별하기 위해 후대의 역사가가 명명한 것이다.

전란의 시대라 압도적으로 군인 주도의 정치가 이루어졌던 오대십국시대에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문관이 주도하는 정치가 이루어졌다. 지방관은 전부 문관이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당나라 시대 중앙에서의 권력 다툼에서 패한 관료들의 좌천 지역으로 선택된 곳이 바로 이 지역이기 때문이었고, 그대로 이곳에 눌러앉아 정착한 이들도 많아, 이런 사람들이 남한 세력에 참가하게 된 것이었다. 유은 자신도 이러한 문관의 참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이 지역을 비교적 평온한 상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또한 남해 교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올려, 궁정의 재정은 크게 윤택하였다.

그러나 939년에 베트남 독립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중국의 베트남 점령기가 사실상 종식된다.[2]

그러나 942년, 유엄의 사후에는 왕위 계승권 다툼으로 인해서 혼란이 일어났다. 즉 유엄의 3남 유분[3]이 뒤를 잇자, 그를 동생 유성[4]이 살해하고, 자신이 즉위했다.

유성은 제위를 다투던 동생들을 모두 살해하고, 황권을 안정시킨 뒤, 이윽고 북쪽 초나라의 내란을 틈타 출병하여 영토를 빼앗았다. 그러나 원정의 성공 후 자만해진 유성은 동생들의 아내를 후궁으로 들이는 등 불량한 행동을 일삼았고, 이윽고 정치를 환관에게 맡기면서 남한의 정치는 부패하게 되었다.

유성은 958년에 죽고, 장남 유창[5]이 계승했으나, 유창은 의심이 매우 강해 문관들을 살해하고 그 자리를 모두 환관으로 메우면서 조정을 거의 환관이 독점하는 일이 벌어졌다. 등용하려는 인물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거세(!)를 해야만 등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유창은 매일마다 페르시아인 첩과 검열삭제를 하는 것에 빠져 정치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 때문에 민심은 떠났고, 971년, 북송의 침공 때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 유창은 재물을 갖고 도망치려 했으나 신임하던 환관에 의해 붙잡혀 송군의 포로가 되었고, 그의 영토도 송에 병합되었다. 유창과 그의 일족은 카이펑으로 옮겨져서 왕족으로서 대우받았다. 유창은 송나라의 좌천우위 대장군이 되었고, 사후에는 남월왕에 추봉되었다.

3. 역대 황제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 기간 능호
- 태조(太祖) 문황제(文皇帝) 유안인(劉安仁) - - -
- 대조(代祖) 성무황제(聖武皇帝) 유겸(劉謙) - - -
- 열종(烈宗) 양황제(襄皇帝)
,<남해양왕(南海襄王)>,
유은(劉隱) - - 덕릉(德陵)
1대 고조(高祖) 천황대제(天皇大帝) 유엄(劉龑) 건형(乾亨) 917년 ~ 925년
백룡(白龍) 925년 ~ 928년
대유(大有) 928년 ~ 942년
917년 ~ 942년 강릉(康陵)
2대 - 상황제(殤皇帝) 유분(劉玢) 광천(光天) 942년 ~ 943년 942년 ~ 943년 -
3대 중종(中宗) 문무광성명효황제(文武光聖明孝皇帝) 유성(劉晟) 응건(應乾) 943년
건화(乾和) 943년 ~ 958년
943년 ~ 958년 소릉(昭陵)
4대 - -
,<후주(後主)>,
,<위국공(衛國公)>,
,<남월왕(南越王)>,
유창(劉鋹) 대보(大寶) 958년 ~ 971년 958년 ~ 971년 -


[1] 지금의 광동(廣東) 지방. [2] 엄밀히 말하자면 남한 존속기간 중 극히 짧은 시기만 베트남 지역을 점거했다. [3] 본명은 유홍도(劉弘度). [4] 본명은 유홍희(劉弘熙). [5] 본명은 유계흥(劉繼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