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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17:11:56

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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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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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나두영(羅斗永)
본명 나인영(羅寅永)
문향(文鄕)
경전(耕田) → 홍암(弘巖)
본관 나주 나씨
출생 1863년 12월 2일
전라도 낙안군 남상면 금곡리
(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사망 1916년 9월 12일[1] (향년 52세)
황해도 안악군 구월산 삼성사
묘소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화룡시
룽청진 칭후촌 삼종사 묘역
종교 대종교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3.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1612838572555.jpg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대종교의 초대 도사교(都司敎)[2].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63년 전라도 낙안군 남상면 금곡마을(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나용집(羅龍集)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철이 썼던 한시가 김윤식의 눈에 들어 그의 문하생으로 있었다고 한다. 1891년 식년시 문과에 병과(丙科) 16위로 급제 #한 후 승문원, 승정원 등 관청에서 문신으로 근무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1904년 유신회(維新會)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벌였다.

을사조약 체결 후인 1907년부터 자신회를 결성한 그는 오기호 등과 함께 오적 암살단을 조직, 암살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여 3월 2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을사오적을 암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서창보 등이 붙잡히면서 동지들의 고문을 덜어 주기 위해 오기호, 최인식 등과 함께 자수하여 10년의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에 고종의 특사를 받아 풀려난 그는 1908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적인 방법으로 구국 운동을 계속하였으나, 아무 소득 없이 귀국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동지들과 함께 한성부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훗날 대종교)를 공표하였다. 이 날이 바로 중광절(重光節)이다. 곧 교직을 설치하고, 초대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하여 5대 종지를 공포하였다. 또한 단군의 개국과 입도(立道)를 구분하여 서기전 2333년에 124년을 더하여 천신강세기원(天神降世紀元)이라고 하였다. 1910년 8월에는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1년 일본이 종교 간섭을 시작하자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인 일부가 만주로 이동하여 중광단(重光團)을 설립했다. 1914년에 나철은 아예 대종교 총본사도 만주로 옮겼으며 수많은 대종교인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급속한 교세 확대에 일본은 1915년 종교통제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화했다.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서자 나철은 이를 막기 위해 애를 썼으나 되지 않았고 마지막 수단으로 6명을 데리고 1916년 음력 8월 구월산 삼성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같은 달 15일 죽음을 택한 이유를 밝힌 유서를 남기고 김교헌을 2대 도사교로 지명한 뒤 삼성사에서 자결했다. 그 후 대종교에서는 그가 운명한 날을 가경절(嘉慶節)이라 하여 4대경절(四大慶節)의 하나로 기념한다.

대종교 교단에 따르면 자결 방법은 폐기법(閉氣法)이었다고 한다. 폐기법이라는 것은 스스로 숨을 멈춘다는 뜻이다. 나철의 묘는 중국 지린성 허룽시(和龙市)에 있다. 나철과 함께 김교헌, 서일의 묘도 함께 있다. 국외 독립운동사적지 정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3. 기타



[1] 음력 8월 15일 [2] 대종교 최고지도자 [3]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90328_0000602995 [4] http://sports.donga.com/SPORTS/3/all/20190328/94791391/1 [5] https://www.yna.co.kr/view/AKR20190402102900054?section=search [6] http://sports.donga.com/SPORTS/3/all/20190405/94912734/2 [7] http://www.nb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5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