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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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孔安國(? ~ 408)
동진의 인물. 공안국의 안국(安國)은 휘가 아니라 자(字)이다. 영주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 출신. 여불정후 공유의 3남으로, 공자의 26대손.
2. 생애
공안국의 다른 친척 형제들은 출사해 각자 관직을 얻었는데, 공안국과 그의 형 공왕은 명성과 재능이 부족하여 둘 다 30세가 넘도록 관직에 진출하지 못 했다. 효무제 시기에 공왕이 우연히 조정의 부름을 받아 시중에 임명되고, 동생인 공안국 또한 관직에 올라 시중, 태상을 역임했다.태원 21년(396년) 9월, 효무제가 붕어하자, 원래 몸이 수척하던 공안국이 상복을 입고 하루종일 눈물을 흘리며 애도하니, 사람들은 그가 참된 효를 행한다고 감탄했다. 이후 관직이 점점 높아져, 회계내사, 영군장군, 동해왕사(東海王師)을 차례로 지냈다.
융안 5년(401년) 6월, 호독(滬瀆)을 함락시키고 오국내사 원숭을 살해한 반란군의 수괴 손은이 바다에 배를 띄워서 도성 건강(建康)을 노렸다. 손은의 함선이 단도(丹徒)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대신들은 벌벌 떨며 두려워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공안국을 다시 영군장군으로 삼아 안팎으로 철저히 경계하게 하고, 백관들은 관청에 숙직하도록 명했다.
의희 2년(406년) 10월, 상서좌복야로 옮겨지고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의희 4년(408년) 4월, 공안국이 사망하고, 그 자리는 이부상서 맹창이 대신하였다. 사후 조정에서 그를 좌광록대부로 추증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