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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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심사위원회 위원장 (1948) | ||||
초대 김용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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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위원회 위원장 (1948~1960) |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장 (1960~1963) | ||||
초대 노진설 |
제2대 조용순 |
제3대 김두일 |
제4대 고재호 |
제5대 이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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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1963~현재) | |||||
초대 사광욱 |
제2-4대 주재황 |
제5대 김중서 |
제6대 강우영 |
제7대 윤일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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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이회창 |
제9대 윤관 |
제10대 김석수 |
제11대 최종영 |
제12대 이용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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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유지담 |
제14대 손지열 |
제15대 고현철 |
제16대 양승태 |
제17대 김능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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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이인복 |
제19대 김용덕 |
제20대 권순일 |
제21대 노정희 |
제22대 노태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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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호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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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0> 前 대한민국 대법관 | |||
대한민국 제4대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장 고재호[1] 高在鎬 | Go Jae-h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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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3년 8월 7일 | ||
전라남도
창평군 군내면 삼천리 (現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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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1년 10월 18일 (향년 78세) |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고려대학교 안암병원 | |||
본관 | 제주 고씨[2] | ||
호 | 취봉(翠峰) | ||
재임기간 | 제4대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장 | ||
1960년 6월 24일 ~ 1962년 10월 2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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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0> 부모 | 아버지 고광희, 어머니 연일 정씨 | |
형제자매 |
형 고재선(高在宣)[3] 남동생 고재량(高在亮)[4], 고재청, 고재윤(高在倫)[5], 고재명(高在明)[6] 누이 2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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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민효식 | ||
자녀 | 슬하 3남 2녀 | ||
학력 |
창평공립보통학교 (졸업) 광주중학교[7] (졸업)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 / 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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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대구지방법원장 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 대구고등법원장 대법관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장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신문윤리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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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법조인, 친일반민족행위자.2. 생애
1913년 8월 7일 전라남도 창평군 군내면 삼천리(현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8]에서 아버지 고광희(高光熙, 1890. 1. 1 ~ 1965. 10. 22)와 어머니 연일 정씨(1890. 12. 30 ~ ?) 정운시(鄭雲始)[9]의 딸 사이의 6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1927년 3월 창평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주로 일본인들이 취학하던 구제중학교인 광주중학교에 입학해 1932년 3월 졸업했다. 이어 1932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해 1934년 수료하고 법문학부로 진학, 1937년 3월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39년 조선변호사시험과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모두 합격하였고, 일제강점기 말기 판사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 후에도 판사로 근무하였다. 대구지방법원장, 대구고등법원 부장판사, 대구고등법원장을 거쳐 1954년부터 1960년까지 대법관을 지냈다. 대법관 임명 당시 41세로 이는 최연소 대법관 기록으로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대법관 퇴임 후 1961년에 서울특별시에서 변호사로 개업했으며, 1960년 6월 24일부터 1962년 10월 23일까지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65년 5월부터 1966년 5월까지, 1973년 5월부터 1974년 5월까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1966년에는 신문윤리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91년 10월 18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5가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