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8:20

경복궁 신무문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3
현무문
천하제일복지천
오운각 옥련정
벽화실 청와대 관저
청와대 본관 청와대 녹지원 춘안당 융문당
칠궁 양정재 수궁(구 관저터) 융무당 태화궁
지희실 경농재(관풍루) 대유헌 경무대
청와대 위민관,헬기장
수궁 청와대 춘추관
마장 관가문 희맹공신단
금화문 팔도배미
청와대 영빈관,경호실
추성문 금위군직소 춘화문 춘생문
신무문 수문 계무문 광무문 춘도문 수문
숙문당 수문장청 군사방 팔우정 집옥재 협길당 각감청 관문각
건청궁
서녹산 어구 동녹산
태원전 영사재 대왕대비전 세답방
순화궁 세답방 중궁전 세답방 종각
빈궁 세답방 공묵재 왕대비전 세답방 가회정 보현당 남여고 육우정 녹직처소 내재실
동장고 통화당 순화궁 외소주방 숙경재 서진설청 선원전 동진설청 경안당
순화궁 내소주방 진전 소주방 진전 생물방 화락당 나인처소
회안전 문경전 서장고 향원정 만화당 벽혜당(왕대비전 생물방) 대향당 나인처소
정훈당
함화당 집경당 전기등소 만경전 건기당(왕대비전 내소주방) 요광당(왕대비전 외소주방) 어린이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나인처소
숙설소 영훈당
빈궁 생물방 상궁처소 다경합 건복합
회광당(빈궁 내소주방) 광원당(빈궁 외소주방)
원역처소 수인문 흥복전 중궁전 수방 대왕대비전 수방 제수합 영보당 벽월당(상궁처소)
중궁전 침방 대왕대비전 침방
제관방 원역처소(접견소) 장방 원역처소 아미산 자미당 자경전 집희당(대왕대비전 내소주방) 춘소당(대왕대비전 침방) 취운당(대왕대비전 수방) 나인처소
침채고 예춘당(대왕대비전 생물방) 벽로당(상궁처소) 웅향당(상궁처소)
함정당(대왕대비전 외소주방) 계응당(상궁처소)
임향당 나인처소
국별장직소 함원전 건순각
인지당 나인처소 보월당(상궁처소) 자운당(상궁처소) 나인처소
경회루 함홍각
교태전 원길헌
복희당(대전 생물방)
국출신직소 흠경각
양의문 대전 내소주방 난지당(대전 외소주방) 대소대금방(나인처소)
무겸직소 응지당 강녕전 연길당
북소위장직소 경성전 연생전
수문 파수각 향오문
영추문 수문장청 내각( 규장각) 검서청( 규장각) 대전장방( 내시부) 천추전 사정전 만춘전 자선당 비현각 장방 수문장청 건춘문
습회당 협오당 장원당 중궁전 수랏간 왕대비전 수랏간 등촉방 등촉방 장방 관리사무소
군사방 수정전 별감방 군사방
초관직소 장무관직소 입심억석( 내의원) 주원( 사옹원) 수정문 사정문 오상방 원역처소 세자궁 수랏간
훈국군번직소 침의청( 내의원) 약방( 내의원) 내반원( 내시부) 협의문
융무루ㅓ
근정전 계인문
융문루
통장청 문기수청 춘방
서소위장직소 의약청( 내의원) 영화문 계방
옥당
( 홍문관)
검서청( 규장각) 대전 수랏간 계조당 훈국군번처소 초관처소
누국 당후( 승정원) 정원( 승정원) 숭양문 월화문 근정문 일화문
일영대 선전관청 빈청
기별청
유화문
수각

덕양문
수각
봉선문 별군직청 주차장
영제교
춘방책고대청 상의원 면복각
신당 덕응방 북마랑 흥례문
전사청 연고 내사복시 거달처소 중마랑 동마랑 용성문 어도 협생문 계방 오위도총부
우마랑 국립고궁박물관 좌마랑 내구 연지 수문장청
매표소
군사방
수문장청
매표소
남소부장청 동소부장청
견마배청 남마랑 군사방 초관처소
영군직소
측사
측사 충장장청
서십자각 수문 광화문
( 월대)
수문 동십자각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colbgcolor=#bf1400> 경복궁 신무문
景福宮 神武門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 세종로)
건축시기 1433년 (창건) / 1867년 (중건)
파일:external/news.donga.com/6984601.1.jpg
파일:경복궁_신무문_전경.jpg
<colbgcolor=#bf1400> 신무문[1]
1. 개요2. 이름과 현판3. 역사4. 용도5. 구조6. 여담

[clearfix]

1. 개요

경복궁의 북문(北門)이다. 단, 정북(正北)이 아닌 서북쪽으로 치우쳐있다.

2. 이름과 현판

‘신무’는 ‘신령스러운(神) 현무(武)’라는 뜻이다. 4신 현무가 북쪽을 나타내는 동물이므로, 경복궁의 북쪽 문에 ‘무(武)’ 자를 넣은 것이다. #

현판 글씨는 고종 때 관료인 이현직(李顯稷. 1797 ~ ?)이 썼다. #

3. 역사

1395년( 태조 4년)에 경복궁을 창건할 때는 없었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 동, 서, 남쪽에만 궁문을 설치했고, 북쪽 궁성은 목책으로 만들어두었다. 그러다 1433년( 세종 15년)에 비로소 북문을 만들자고 7월 21일자 실록에 나온다. 그러나 곧 언관들이 강녕전과 경회루 등 세종이 고칠 곳을 너무 많이 한꺼번에 요구하는 데다가 흉년이 들어서 풍년이 들 때까지 공사를 보류하자는 상소를 올리자 경회루와 강녕전만큼은 반드시 고쳐야한다고 명령을 내린다(세종실록 15년 7월 27일 기사)

그리고 언제 공사가 시작되어 언제 마쳤는 지에 대해서는 실록에 기록이 없고, 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경도부에 "궁성 동문 건춘, 서문 영추, 남문을 광화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걸 보면, 세종실록편찬이 완료되는 문종시기에도 신무문은 착공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성종 6년(1475년) 8월 23일에 가서야 "북성문은 신무문으로 정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

아마도 그 이전에 신무문은 완공되었으나 이름을 부여받지 못하다가 성종 6년이 되어서야 이름이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즉 세종 이후로 문종,단종,세조,성종의 4대 임금을 거쳐야 문의 이름을 정함으로서 비로서 완공되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기묘사화 당시 남곤 심정 등 사화의 주역들이 들어온 장소이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270여 년간 방치되었다. 1865년( 고종 2년)에 중건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으나 곧 복구되었고 이후 큰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른다.
파일:일제강점기 신무문.png
<colbgcolor=#bf1400> 무너진 신무문 성벽

4. 용도

평소에는 닫혀있었다.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북쪽에 있는데다 풍수지리적으로 북쪽이 음(陰)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닫혀있었던 것은 한양도성의 북대문이었던 숙정문도 마찬가지였지만, 풍수와 별개로 현실적으로는 드나드는 출입구가 필요했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한양도성에 북소문을 여러 개 설치했다. 반면 ' 한양'이라는 지역과 달리 단순 궁이었던 경복궁은 북쪽에서 오는 통행량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신무문을 제외한 소문을 따로 두지는 않았고 그냥 서문이나 동문을 이용했다. 애초에 신무문 바깥은 인가가 없는 곳이라 들어올 일이 별로 없었다.

다만, 비상시나 나라에 변고가 생겼을 때, 또는 이 비밀리에 밖을 나갈 경우에는 사용했다. 기묘사화 당시 중종이 조광조 일파였던 승지들도 모르게 친위 병력을 들어오게 한 곳이 바로 신무문이다.

조선 중 · 후기에는 문 밖에 신하들의 공훈을 기록한 회맹단(會盟壇)이 있어 임금이 신하들과 회맹제[2]에 참석할 때 이용했다. # # # 여기서,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이 재건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신무문을 이용했나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아마 문루는 없지만 남아있던 석축을 통로로 활용한 듯 하다.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 사당 육상궁에 참배할 때에도 신무문을 사용했다. # #

1860년대 경복궁이 중건된 이후 신무문 밖은 경복궁의 후원이 되었다. 신무문은 후원을 오가는 문으로 기능했다.

5. 구조

6. 여담


[1]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會盟祭. 공신들의 충성을 다짐하는 모임. [3] 약 45cm. [4] 영추문이었다고도 한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9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9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