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문은 특히
고대 로마에서 성행했는데, 공화정기에는 개선장군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으나, 제정기에 접어들면서
팍스 로마나가 정착되자 개선문을 세울 승전의 기회를 얻지 못한 황제들은 공공사업을 통해 쌓은 업적도 개선문을 세울 만한 명예가 된다며 개선문 건립을 정당화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로마 시대 이후에는 국왕의 권위와 영광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인식되어 근대 유럽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개선문을 세웠다. 당시에 세워진 개선문 중 가장 큰 것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세운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이다.[4] 하지만 정작 건설을 명령한 나폴레옹 본인은 생전에 개선문을 지나지 못했다. 그가 개선문을 통과한 건 1821년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사망한 후 유해를 파리의
앵발리드로 이장할 때인 1840년이었다. 반대로 나폴레옹은
베를린의 랜드마크이자 이후 근대 프랑스의 숙적이 될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의 대표 개선문이 된
브란덴부르크 문의 첫 개선식을 치른 것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다.
중국의 옛 도시들에 남아있고, 중국의 중심가 혹은 세계 각지의 차이나타운 입구에 있는 패루 (패방) 역시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1]
라틴어
[2]
이탈리아어
[3]
니콜라이 2세가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91년에 지어졌다.
[4]
보통 사람들이 개선문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도 이 개선문이다.
[5]
Grande Arche. 에투알 개선문과는 별개의 개선문.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기념해 만든 개선문으로, 파리 근교의 계획도시인 라 데팡스에 위치해 있다.
[6]
1888년 바르셀로나 엑스포 출입문 목적으로 건축.
[7]
이름은 모스크바인데 정작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다.
[8]
러시아의
조국전쟁 승전을 기념하여 지어진 개선문이다.
[9]
칼 2자루가 교차한 모습으로,
이라크 전쟁 때 바그다드를 함락시킨 미군들이 점령한 보도사진으로 유명하다.
[10]
(
영국 국왕이자)
인도 황제
조지 5세의 귀빈방문을 기념하여 지어진 개선문으로, 세워진 이래 식민 시절 인도를 방문한 귀빈들을 맞은 중요한 개선문이었으며
1948년 인도 독립으로 철수하는 영국 장병들이 마지막으로 떠난 곳도 이곳이다.
[11]
영국군의 일원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인도인 장병을 위한 개선문이다.
[12]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후 1915년 아프간 독립 쟁취를 기념하여 세워짐
[13]
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전쟁 중 희생된 라오스 사람들을 추모하기위해 1950년대에 세워진 건축물이다. 빠뚜싸이 주변으로 공원이 있다.
[14]
로마의
포로 로마노에 위치해 있으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세웠다.
[15]
그래서 서울의
숭례문도 방화테러 전 성벽 없이 문만 남아 있었을 때에는 외국인들이 일종의 개선문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