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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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江虨(? ~ 368)
동진의 인물로 자는 사현(思玄). 연주 진류군 어현(圉縣) 출신. 강통의 아들로 아버지 사후 항부남 작위를 이었다. 동생으로는 강돈이 있다.
사서에 구체적인 기록은 나와있지 않으나 아버지 강통이 영가의 난을 피해 도망치다가 병사한 점, 첫 활동 시기가 서진 멸망 후 수년은 지난 시점인 점[1] 등을 고려하면 아버지를 따라 피난가다가, 아버지가 병사한 후에도 계속 도망쳐 강동에 무사히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2. 생애
주에서 수재로 천거되어 평남장군 온교 휘하에서 참군을 지냈다. 이후 양주별가, 장산현령, 사공 치감의 사마, 황문랑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함강 6년(340년) 정월, 강주자사 거기장군 유빙이 무창(武昌)에 진수할 때, 강반은 유빙의 장사가 되어 함께 종군했다.
건원 2년(344년) 11월, 강주자사 유빙이 사망하자, 유빙의 동생인 형주자사 유익은 강반을 자신의 군자좨주로 삼았다가, 얼마 후 장사로 옮겼다.
영화 원년(345년) 7월, 형주자사 유익이 병사했다. 유익의 부장 간찬이 이를 기회삼아 관군장군 조거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키니, 강반은 주도, 원진, 모목지 등 유익의 부장들과 함께 간찬을 베고 반란을 평정했다.
영화 연간(345년 ~ 346년) 동안 어사중승, 시중, 이부상서, 호군장군, 회계내사, 우군장군, 상서복야를 역임했다.
태화 원년(366년) 10월, 승상에 오른 낭야왕 사마욱은 매번 원로대신인 강반과 더불어 정사를 의논했다. 강반은 다시 호군장군에 임명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국자좨주로 옮겨졌다.
태화 3년(368년), 재직 중 사망하고 아들 강애(江敳)가 뒤를 이었다.
3. 기타
[1]
온교가 평남장군에 임명된 시기를 생각하면 강반의 활동 시기는 아무리 빨리 잡아도 326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