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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0000> 나리타야 | 이치카와 신노스케 → 이치카와 에비조(공석) → 이치카와 단쥬로( 11대, 12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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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오노에 키쿠고로 七代目 尾上菊五郎 | Onoe Kikugorô V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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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ruby(寺嶋, ruby= てらじま)][ruby(秀幸, ruby= ひでゆき)] (테라지마 히데유키, Terajima Hideyuki) |
예명 |
5대 오노에 우시노스케 4대 오노에 키쿠노스케 7대 오노에 키쿠고로 |
출생 | 1942년 10월 2일 ([age(1942-10-02)]세) |
도쿄도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67cm, 65kg, AB형 |
학력 |
쇼난 학원 부속 유치원 (수료) 모리무라 학원 초등부 (졸업) 모리무라 학원 중등부 (졸업) 모리무라 학원 고등부 (졸업)[1] |
가족 |
아버지 7대 오노에 바이코우 (1915-1995)[2] 어머니 테라지마 타마코 누나 테라지마 키요에 (1940-) 남동생 2대 오노에 에이노스케 (1944-)[3] |
아내 후지 스미코 (1972년 결혼)[4] 장녀 테라지마 시노부 (1972-) 장남 8대 오노에 키쿠고로 (197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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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손 초대 오노에 마호로 (2012-)[6] 친손 6대 오노에 키쿠노스케 (2013-)[7] 친손 테라지마 토모요 (2015-) 친손 테라지마 아라타 (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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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가부키 배우 |
야고[8] | 오토와야 (音羽屋) |
문장 |
1. 개요
일본의 가부키 배우.가부키 4대 명문가 중 나리타야 다음으로 명성과 위상이 높은 오토와야 오노에 종가의 현 당주이다. 일본의 무형문화재인 인간문화재에 등재된 배우로 인간 국보이며 일본 예술원의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즉 일본 예술계의 최고 핵심에 서있는 인물.
현대 가부키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인물이며 가부키계에서는 코오라이야의 당주 2대 마츠모토 하쿠오와 더불어 살아있는 역사, 전설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2. 생애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아버지인 7대 오노에 바이코우와 어머니 테라지마 타마코 사이에서 2남 1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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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자택의 정원에서 |
그렇게 7대 오노에 바이코우는 태어나자마자 6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양자로 오토와야에 입적되어 일본 무용과 가부키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훗날 6대 오노에 키쿠고로에게 친자가 탄생했음에도[9] 7대 오노에 바이코우는 출중한 실력으로 오노에 종가의 직계로 인정받으며 그 위치를 꿋꿋히 지켰다. 그렇게 현재에 이르러 그의 아들과 장손까지 오토와야 오노에 종가의 당주의 명적인 오노에 키쿠고로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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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7대 오노에 바이코우와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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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6대 오노에 키쿠고로와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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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스케로쿠> 中 찻집 여방 |
그리고 1948년 4월, 긴자의 가부키좌인 신바시 연무장에서 5대 오노에 우시노스케를 습명받아, 5대 오노에 우시노스케로서 첫 무대를 가졌다. 습명 피로연의 대표 연목은 <스케로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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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시절의 7대 오노에 키쿠고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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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산노스케 (三之助)[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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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장실에서 대본을 확인하는 당시 4대 오노에 키쿠노스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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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 대하드라마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中 요시츠네 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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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관련으로 후지 스미코와 대화를 나누는 키쿠고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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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후지 스미코와의 결혼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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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7대 오노에 키쿠고로 습명을 발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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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습명을 기념하여 아내와 아사쿠사 방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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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테라지마 카즈야스 탄생 기념 촬영한 가족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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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아들의 시치고산을 맞이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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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손녀 테라지마 토모요의 탄생 기념으로 촬영한 가족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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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 7대 오노에 우시노스케의 습명 발표 회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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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손자 초대 오노에 마호로 습명 공표[14] |
1942년생인 7대 오노에 키쿠고로는 현재 몸 상태가 많이 쇠약해져 대부분의 배역을 장남인 키쿠노스케에게 넘기고 휴연을 취할 때가 많은 편이다. 동갑내기인 2대 마츠모토 하쿠오 또한 같은 상황인데 둘 다 하나 둘씩 작품에서 물러나며 다음 세대들을 위한 작품 양성이나 멘토로 위치를 옮겨가고 있다. 물론 주요 연목의 경우 특별 공연 형식으로 단기간에 공연하기도 하며 티켓을 구하기 어려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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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과 장손의 동시 습명 발표 회견에서 |
2.1. 연기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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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진쵸>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役[15] |
무용 스타일은 온나가타를 오래 연기한 배우답게 선율이 가볍고 동작의 폭이 좁지만 동선을 많이 확보한 특유의 연기 스타일을 고집하여 볼거리가 풍부하다고 인간 국보 지정 당시 궁내청에서 평했다.
특히 칸진쵸의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경우 그가 연기하는 요시츠네가 현대에서 확일할 수 있는 가장 요시츠네 다운 요시츠네라는 평이 자자하다. 이는 키쿠고로의 아버지인 7대 오노에 바이코우가 요시츠네 연기를 오랜 세월 간 주력으로 삼아왔기에 그에게서 직접 연수받았기 때문인 것도 크다.[16]
온나가타, 타치야쿠뿐만 아니라 사자 춤이나 현대극에도 강하며 연기 폭이 굉장히 넓은 배우이다. 흔히 비교 상대로는 나카무라야의 선대 당주인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가 꼽혔었고 이를 의식했는지 쇼치쿠 자체의 연말 일본 무용 공연에 둘이 페어로 나온 경우가 잦았다.
최근엔 고령의 나이탓인지 동작들이 많이 뻣뻣해지고 간소화된것을 볼 수 있다.
3. 세습명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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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과 장손의 동시 습명 발표 회견에서 7대 오노에 키쿠고로 명적 유지를 선언하는 7대 키쿠고로 |
보통 여기서 자식에게 이름을 물려준 배우는 은거명을 사용하게 되지만 7대 키쿠고로는 영원히 오노에 키쿠고로로 남은 채, 이 명적과 함께 영면에 들고 싶다며 은거명의 사용을 거부하였다. 이로써 같은 하늘 아래 두 명의 오노에 키쿠고로가 존재하는, 400년의 가부키 역사상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다.[17]
4. 여담
- 현재는 작고한 나리타야 이치카와 종가의 선대 당주 12대 이치카와 단쥬로와 절친한 사이였다.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도 있었고 같이 연기하는 작품의 스타일이 비슷한 것이 컸다고 한다. 때문에 이들의 가족은 가깝게 지냈으며 아들인 8대 오노에 키쿠고로와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도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로서 연을 쌓았다.
- 아내와의 결혼 발표 당시, 유명 여배우와 가부키 황태자의 결혼이라는 타이틀로 인해 일본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렇기에 아이들의 탄생 이후 여러 광고 출연 요청이 끊임없이 들어왔다고 한다. 보통 가부키 배우의 광고는 아버지와 자녀만 출연하는 것이 다반사인데, 이쪽은 온 가족 모두가 CM에 출연해야지만 효과가 있었다.
- 장남인 8대 오노에 키쿠고로가 7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젊은 시절 외형을 빼다 박았다는 의견이 많다.
- 최근 '정말 열심히 배우고자 하여 그것을 증명한 이에게만 오노에 키쿠고로의 세습명을 맡길 것이다'라는 인터뷰를 하였는데, 장남인 당시 5대 오노에 키쿠노스케가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여 연습 때마다 자잘한 일에 화를 많이 냈다는 증언이 나왔었다. 또한 외손자 초대 오노에 마호로에 대해 오노에 바이코우를 물려주고 싶다는 발언까지 했는데, 첫손주에 대한 애정이 강한 듯 하다. 다만 엄연한 장손이 있는데다 장손의 외가 역시 가부키 명문가 하리마야이기 때문에 곧 해당 발언을 철회하긴 했다. 이 때문인지 한살 차이인 두 손자들은 현재 선의의 경쟁자 사이라고.
[1]
모리무라 재벌의 창립자인 6대 모리무라 이치자에몬이 1910년,
요코하마시에 설립한
일관제
사립학교이다.
[2]
본명은 테라지마 세이조. 일본의 무형문화재,
인간 국보이다. 아버지는 사업가였으며, 태어나기 전부터 자녀가 없던 6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양자로 입적되기로 정해져 있었다. 훗날 친자인 2대 오노에 쿠로에몬이 태어났음에도 양자인 오노에 바이코우가 우시노스케와 키쿠노스케를 습명하며 종가의 후계를 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현대의 오노에 종가 또한 바이코우의 후계이다.
[3]
1979년 2월 무대를 마지막으로
가부키를 그만두었다.
[4]
본명은 테라지마 준코로, 혼전 성은 슌도. 절세 미녀 연기로 명성이 자자하며
쇼와 시대의 유명 여배우였다. 결혼 후 사실상 연예계에서 은퇴했으나 2010년에 다시 복귀했다.
[5]
본명은 테라지마 카즈야스.
[6]
본명은 테라지마 마호로. 장녀인
테라지마 시노부의 장남이며 가부키 활동 외에도 혼혈인 아역 배우로서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외삼촌인
5대 오노에 키쿠노스케와 함께
탑코트에 소속되어 있다.
[7]
본명은 테라지마 카즈후미. 장남인
8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장남이며 직계 후계인
장손이다.
[8]
가부키 배우로서 가지는 집안 이름. 세습명 구도를 중심으로 창시되며, 가부키계에는 4대 명문가를 포함한 40개 정도의 주요 야고가 있다고 한다.
[9]
2대 오노에 쿠로에몬. 본명은 테라지마 키요아키. 6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첫 번째 부인은 아니고 후처 테라지마 치요의 소생이다. 6대 오노에 키쿠고로가 병사한 뒤 미국으로 이민하여
하버드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며
가부키를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하와이에서
폐렴으로 사망한다. (1922-2004)
[10]
전시 상황이 이어지던 때에 태어났던지라 하츠오메미에를 비교적 늦게 치렀다.
[11]
좌측부터 당시
6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초대 오노에 타츠노스케, 4대 오노에 키쿠노스케. 훗날 6대 이치카와 신노스케는 10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지낸 뒤,
12대 이치카와 단쥬로를 지냈다. 이 셋을 언론과 팬들은 '산노스케'라 칭했는데 전부 이름에 '노스케'가 들어가며 같은 시기에 태어난 동년배에 서로 친한 사이였기에 삼인방을 묶는 것이 가능했다. 여담으로 산노스케는 이들의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는데 이는 '
헤이세이 산노스케'라고 분류된다. 구성원은 그대로 당시
7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2대 오노에 타츠노스케,
5대 오노에 키쿠노스케.
[12]
7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본명인 테라지마 히데유키에서 따온 것.
[13]
일본은 법적으로 3촌까지만 친족에 해당되며 4촌 관계부터는 합법적으로
결혼이 가능하다. 키쿠고로 본인이 가부키 배우만 아니었더라면 바로 혼인신고를 올렸겠지만 가문의 당주로서 세세히 따져봤다고 회고한 적이 있었다. 현재는 일반인들도 주변 시선이 안 좋기에 빈도 수가 줄다 못해 소멸했다시피 하여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혼인은 아니게 되었다.
[14]
좌측부터 사위 로랑 그나시아, 장녀
테라지마 시노부, 손자 초대 오노에 마호로, 장남
8대 오노에 키쿠고로, 7대 오노에 키쿠고로.
[15]
코오라이야의 당주,
2대 마츠모토 하쿠오가
무사시보 벤케이를 연기했다.
[16]
7대 오노에 바이코우는 나리타야의 선대 당주인
12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습명 피로연 칸진쵸에서도 요시츠네를 연기하였다.
[17]
2024년, 요로즈야의 4대 나카무라 토키조가 아들인 4대 나카무라 바이시에게 '나카무라 토키조' 명적을 내려주고, 초대 '나카무라 만쥬'라는 은거명을 직접 만들어 이를 습명한 것과 상반된다. 직접 지은 이유도 집안의 최고 명적이 '나카무라 토키조'로 그 선대 명적은 없었기에 이번에 새로 지은 것이라 한다. 오토와야 또한 '오노에 키쿠고로'가 최고 명적이지만 장남이 아버지가 키쿠고로가 아닌 것은 낯설다며 명적 유지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