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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Élection présidentielle française de 19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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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별 결선 결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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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7px -12px" | 1974 대선 | → | 1981 대선 | → | 1988 대선 | }}} | |||
선거 일시 | 1차: 4월 26일 | ||||||||
결선: 5월 10일 | |||||||||
투표율 | 1차: 81.09% ▼ 3.14%p | ||||||||
결선: 85.85% ▼ 1.48%p | |||||||||
선거 결과 | |||||||||
후보 |
[[사회당(프랑스)| 사회당 ]]프랑수아 미테랑 |
[[프랑스 민주연합| 민주연합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
|||||||
1차 | |||||||||
25.85% 7,505,960표 |
28.32% 8,222,432표 |
||||||||
결선 | |||||||||
51.76% 15,708,262표 |
48.24% 14,642,306표 |
||||||||
당선인 | |||||||||
사회당 프랑수아 미테랑 |
[clearfix]
1. 개요
1981년에 치러진 프랑스 대통령 선거. 공화국연합의 자크 시라크가 이 선거에 합세하여 데스탱을 공격하면서 우파 진영이 분열되었다. 2차 투표에서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과 대선 3수인 프랑수아 미테랑이 맞붙었고,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권 도전에 승리하면서 우파에서 좌파로 정권이 교체되었다.2. 배경
조르주 퐁피두 사후 엘리제궁에 입성한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은 여소야대의 정국에서 자크 시라크를 프랑스 총리로 임명하였지만 두 인물은 상시 대립하였다. 시라크는 확고한 드골주의 우파 성향의 인물이었지만 지스카르데스탱은 보다 자유주의적인 비드골 중도우파 성향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자크 시라크는 1976년에 총리직을 사임하고 공화국 연합이라는 정당을 창당하면서 프랑스 우파의 리더를 자처하였다.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은 유럽 경제 공동체를 유럽연합으로 발전시키는 초석을 닦고 G7을 창설하는 업적을 세웠지만 이미 프랑스의 경제는 조르주 퐁피두 임기 후반부터 오일 쇼크로 인해 스태그플레이션과 경기침체를 겪고 있었다.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은 이것이 자신의 말을 잘 따르지 않는 시라크 총리 때문이라고 생각해 시라크 총리에게 압박을 넣어 사임하게 한 후 자신의 측근이었던 레몽 바르를 총리 자리에 앉혔다. 바르 총리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석유 수입을 대폭 축소하는 한편 전임자 피에르 메스메르의 정책 기조를 받아들여 대대적으로 원전 사업을 육성한다. 또 물가를 인공적으로 조정하고 부가가치세를 인하하는 "바르 플랜"을 실시한다. 그러나 이 정책은 대실패로 돌아갔고 실업자 수가 백만명을 넘기는 등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되며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의 지지율은 크게 떨어진다.
결국 우파 진영은 1977년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는 기록적인 참패를 거두었다. 그 다음해에 있었던 1978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 우파가 좌파에게 정권을 내주어 좌우 동거정부가 들어설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공산당에 대한 반감 속에서 좌파가 예상 외로 부진하며[1] 우파 진영은 한숨을 돌리게 된다. 또한 1980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두고 소련을 지지한 공산당과 소련에 반대한 사회당의 정치인들이 충돌하며 좌파의 내분이 일어난다. 따라서 경제 상황과는 별개로 1981년 대선에서 지스카르데스탱의 근소한 재선이 점쳐졌다.
그러나 1979년 쿠데타로 쫓겨난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독재자 장 베델 보카사가 지원을 끊고 쿠데타를 지원한[2] 프랑스 정부에 앙심을 품고 자신이 알고 있던 프랑스 고위 관리들과 정치인들의 각종 부정부패를 자서전을 통해 폭로하는 변수가 발생했다. 지스카르데스탱 정부는 즉각 자서전을 출판 금지 조치시켰으나 대중의 관심을 막을 수는 없었고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과 그의 가족, 측근들이 보카사로부터 다이아몬드를 수차례 건내받고 중앙아프리카의 인권 유린을 묵인, 암묵적으로 지원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며 지스카르데스탱의 이미지는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더구나 대선을 앞두고는 루이 르 그랑 고교- 에콜 폴리테크니크- ENA라는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가 부각되면서 지스카르데스탱은 거만하고 무능한데다 부패하기까지한 이미지가 덧씌워졌고 점차 데스탱의 재선 여부는 불투명해졌다.
반면 미테랑은 1980년 이후 점차 이미지를 회복해나갔는데, 조르주 마르셰 프랑스 공산당 서기장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논점 차이로 사회당과의 동맹을 파토내고 사회당을 공격하면서 사회당이 상대적으로 온건한 좌파 정당으로 비추어졌던 점, 우파의 장기 집권에 중도층이 좌파 지지로 마음을 돌렸던 점 등이 있었다. 또 미테랑은 언론인 베르나르 앙리 레비,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 정치인 로랑 파비위스와 미셸 로카르 등 젊은 지식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승기를 잡아나가기 시작한다.
3. 1차 투표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1차 투표 (1981. 4. 26.) |
||||||
순위 | 후보명 | 정당 | 성향 | 득표수 | 득표율 | 결선 여부 |
1위 |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 민주연합 (UDF) | 중도우파 | 8,222,432 | 28.32% | 진출 |
2위 | 프랑수아 미테랑 | 사회당 (PS) | 좌파 | 7,505,960 | 25.85% | |
3위 | 자크 시라크 | 공화국연합 (RPR) | 우파 | 5,225,848 | 18.00% | 탈락 |
4위 | 조르주 마르셰 | 프랑스 공산당 (PCF) | 좌파 | 4,456,922 | 15.35% | |
5위 | 브리스 라롱드 | 환경정치운동 (MEP) | 생태주의 | 1,126,254 | 3.88% | |
6위 | 아를레트 라기예르 | 노동자 투쟁 (LO) | 좌파 | 668,057 | 2.30% | |
7위 | 미셸 크레포 | 좌익급진당 (PRG) | 극좌 | 642,847 | 1.99% | |
8위 | 미셸 드브레 | 기타우파 (DVD) | 우파 | 481,821 | 1.66% | |
9위 | 마리 프랑스 가로 | 기타우파 (DVD) | 우파 | 386,623 | 1.33% | |
10위 | 위게트 부샤르도 | 통합사회당 (PSU) | 중도좌파 | 321,353 | 1.11% | |
<rowcolor=#000> 선거인수 | 38,128,507 | 투표수 | 30,406,038 | - | ||
<rowcolor=#000> 무효표수 | 621,934 | 투표율 | 81.09% | - |
4. 대선 후보 토론회
지스카르데스탱과 미테랑의 토론. |
미테랑은 그런 지스카르데스탱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응수했는데 이 말은 지금도 상당히 유명하다.
Je ne suis pas votre élève, vous n'êtes pas ici le président de la République
나는 당신의 학생이 아니며, 당신은 이 자리에서 공화국 대통령이 아니라 나와 같은 대등한 후보요![3][4]
지스카르데스탱이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며 토론은 물론 선거 판세도 미테랑의 완승으로 흘러간다.나는 당신의 학생이 아니며, 당신은 이 자리에서 공화국 대통령이 아니라 나와 같은 대등한 후보요![3][4]
5. 결선 투표
1981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 (1981. 5. 10.) |
||||||
순위 | 후보명 | 정당 | 성향 | 득표수 | 득표율 | 당선 여부 |
1위 | 프랑수아 미테랑 | 사회당 (PS) | 좌파 | 15,708,262 | 51.76% | 당선 |
2위 |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 민주연합 (UDF) | 중도우파 | 14,642,306 | 48.24% | 낙선 |
<rowcolor=#000> 선거인수 | 36,398,762 | 투표수 | 30,350,568 | - | ||
<rowcolor=#000> 무효표수 | 898,984 | 투표율 | 85.85% | - |
[6]
이전까지 종이나 계기판으로만 출구조사를 발표하던 이전과 달리 1981년에는 미니텔을 이용하여 처음으로 디지털화된 출구조사 그래픽이 사용되었는데, 이때 도트로 그려진 미테랑이 전면에 비추어진 장면은 우파 우위의 공화국이었던 5공화국에서 처음으로 좌파가 승리한 역사적인 순간을 상징하는 유명한 장면이 되었다.
미테랑은 취임 후 프랑스 국민의회의 해산권을 발동했고 6월 14일과 6월 21일 조기총선이 실시되었다.
6. 관련 문서
[1]
여기서 유일한 의의가 있다면 그나마 사회당이 공산당과 표차를 벌리며 좌파 진영의 헤게모니를 잡았다는 것 밖에는 없다. 그나마도 득표수가 아닌 의석수에서는 공산당이 사회당보다 더 선전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
[2]
사실 보카사가 잘한건 없는데, 지스카르데스탱 대통령이 보카사의 학정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해 특사를 보내 선정을 배풀라고 설득했는데 보카사가 대통령 주제에 황제에 명령한다!라는 황당한 이유로 특사를 폭행해 추방한 것이 프랑스가 보카사에 대한 지원을 끊은 하나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자세한건
장 베델 보카사 문서를 참조.
[3]
위 영상의 1시간 11분 10초에 미테랑이 이 말을 한다.
[4]
자크 시라크는 이 토론이 인상적이었는지 1988년 대선에서 비슷한 말로 응수했는데, 미테랑이 당신 말이 맞구려, 총리!라고 답하며 마찬가지로 미테랑한테 박살났다. 자세한 것은
1988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문서 참조.
[5]
다만 2017년 대선과 2022년 대선에서는 두 번 다 마크롱이 이겼지만 여기서는 미테랑과 데스탱이 1승 1패를 나눠가졌다는 차이점이 있다.
[6]
출구조사 발표 장면은 13분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