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a252b><colcolor=#fff>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 |
킨테츠 후지이데라 구장 近鉄藤井寺球場 | Fujiidera Stadi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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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오사카부
후지이데라시 카스가오카 3-1-1 (大阪府藤井寺市春日丘3-1-1) |
기공 | 1925년 12월 |
개장 | 1928년 5월 25일 |
폐장 | 2005년 1월 31일 |
소유 | (주)킨테츠흥업 |
홈 구단 |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1950~2004) |
수용인원 | 32,000명 |
건축비용 | 1926년 기준 약 53만 엔 |
크기 |
좌우측 폴대 - 91m 좌우중간 - 110m 중앙 - 120m 펜스 높이 - 5m |
잔디 | 인조잔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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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오사카부 후지이데라시에 있었던 야구장으로 정식 명칭은 킨테츠 후지이데라 구장(近鉄藤井寺球場)이었다. 운영은 킨테츠 그룹 산하의 주식회사인 '킨테츠흥업'이 맡았다.1950년에 창단한 킨테츠 버팔로즈(창단 당시엔 킨테츠 펄스)의 홈구장으로 쓰이다 킨테츠가 해체된 후인 2005년 1월 폐쇄, 이듬해인 2006년 8월에 해체되었다.
2. 역사
모기업인 킨키 일본 철도가 오사카 교외인 후지이데라 주택지, 자연 체험 학습을 위한 화훼 농장과 과수원, 스포츠시설 등을 건립하기로 계획하였다. 1923년 한신 전기철도가 건설한 한신 고시엔 구장이 고시엔 대회로 인기를 얻고 있는 모습을 본 킨테츠는 킨테츠 미나미오사카선 후지이데라역 인근에 야구장을 건설했다. 1949년 일본프로야구가 2개의 리그로 분열되면서 킨테츠는 새로운 구단( 킨테츠 펄스)을 창설하고 이 구장을 홈으로 삼았다.그러나 조명 시설이 없어서 야간 경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로 밤에 열리는 평일 경기는 오사카 구장(1950~1957년), 일본생명 구장(1958~1983년)에서 개최하고 후지이데라 구장에서는 주로 낮에 열리는 주말 경기나 공휴일 경기 또는 2군 경기에만 사용하는, 그저 명목상의 홈구장이었다. 킨테쓰가 주로 사용한 일본생명 구장은 오사카 시내에 있어[1] 교통편이 좋고, 관객동원에도 수월했다. 게다가 그라운드와 객석의 거리가 가까워 팬들의 꾸준한 인기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생명 사회인 야구팀을 가진 일본생명보험에서 사용하는 구장이라 수용 인원이 적고(25,000석) 그라운드도 좁은 데다 조명이 다른 구장에 비해 어두운 점 등 때문에 프로 야구에 적합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연유로 일본 야구기구와 퍼시픽리그가 아이치현과 미에현 등의 긴테쓰 연선의 주쿄 지역으로의 이전을 검토했지만, 그 지역 터줏대감 팀의 독점 권익 침해와 팬 분산으로 이어질 수 있어 단념했다.[2]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후지이데라 구장과 일본생명 구장 모두 일본시리즈 및 올스타전 개최 조건인 "조명 설비가 있는 수용인원 3만명 이상의 구장"이라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것이었다. 오랫동안의 성적 부진에 따른 회색 구단, 지하철 구단이라는 오명을 딛고 1970년대 중후반부터 전성기를 맞이한 킨테츠는 1975년 후기리그 우승 및 페넌트 레이스 승률 1위 확정 후 진출한 플레이오프에서는 이 구장을 사용했지만 홈경기였던 4차전에서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패배하며 탈락하고 말았고, 리그 우승을 처음 달성한 1979년과 이듬해 1980년에 2연패 달성 당시의 플레이오프와 일본시리즈는 당시 난카이 호크스의 전용 구장인 오사카 구장을 빌려서 개최했다. 하지만 일본시리즈에서는 2년 연속으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우승을 허락하고 말았다.
개수 공사 과정에서 구단 측과 인근 주민들의 다툼 그리고 중재가 거듭되었고, 그 결과 방음벽 설치 및 나팔, 트럼펫 등의 응원도구를 이용한 응원 금지를 조건으로 합의를 봐 비로소 스탠드 개수 및 조명 시설을 설치하게 되면서 킨테츠는 1984년부터 다시 이 구장을 정식 홈구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후 1984년 팀을 외로이 지탱하던 초혼의 에이스 스즈키 케이시의 300승 달성[3]과 1989년 리그 우승[4] 등 명장면을 연출했고, 1996년까지 홈구장으로 쓰다가 이듬해인 1997년 오사카 돔로 이전하였다. 이전 후에도 2군 홈구장 및 연습장으로 계속 사용했고, 팀명에 오사카가 처음으로 붙은 1999년엔 팬서비스 차원에서 정규리그 최종전을 이 곳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경기가 킨테츠가 마지막으로 후지이데라 구장에서 개최한 1군 경기가 되었다.
2004년을 끝으로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와 오릭스 블루웨이브가 합병되면서 2군 홈구장 및 합숙소는 오릭스가 기존에 사용하던 효고현 코베시로 이전[5]했고, 시설 노후화로 2005년에 구장 폐쇄, 이듬해에 해체되어 현재 야구장 부지는 학교 법인과 건설 회사에 매각하여 학교 및 평생 학습센터, 아파트 등이 들어섰다. 인근에는 킨테츠 버팔로즈와 후지이데라 구장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3. 기타
구장이 작아서 홈런이 나오기 쉬운 구장이었으며 2m 높이의 펜스에 3m 높이의 펜스를 추가로 설치했음에도 홈런이 계속 많이 나왔다. 이렇듯 작은 구장 크기 때문에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스즈키 케이시는 일본 기록인 560피홈런을 허용했으며, 1980년 10월 3일의 킨테츠 대 롯데 전에선 단일 시합 타이 기록인 13홈런이 터지거나 1986년 8월 6일의 킨테츠 대 세이부 전에선 세이부가 8회 초에 홈런을 6개나 터뜨리면서 1이닝 홈런 신기록을 세우는 등 갖가지 기록들이 이 구장에서 수립되기도 했다.한일 슈퍼게임 1회 대회(1991년) 제4차전이 이 곳에서 펼쳐졌다. 한국 팀은 1~3차전을 연달아 내주고 4차전에서 첫 승을 거뒀는데, 한용덕이 선발로 등판하여 6회까지 6안타 1실점으로 잘 막았고 김성한이 1-0으로 뒤지던 4회말 좌월 솔로홈런을 때리며 1-1 동점을 만들었다. 김성한은 4타수 3안타 2타점을 기록하며 이 날의 MVP로 선정되었다.
문교지구이며 지방 유수의 고급 주택지에 위치해 있어 인근 주민들의 반발이 심했다. 전신주나 벽에는 "야간 경기 반대" "엄마, 시끄러워서 내가 공부를 할 수 없어"등 동네 주민들의 거부 반응이 쓰여 있었다. 나시다 마사타카는 "인근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고생들로부터 야유를 받거나 얼음이 날아든 적도 있었다"라고 술회했다.
18세의 4번타자였던 도이 마사히로는 "1년 내내 이 구장은 아마추어 야구경기에 사용되기 때문에 그라운드 상태가 좋지 않아 원바운드되는 외야 타구 처리에 신경을 썼다.", "외야석은 만원이 안 되기 때문에 관중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힘내라고 응원했던 사람이 다음 날 야유를 하기도 했다."고 술회했다.
후지이데라 구장이 TV 스포츠 뉴스나 신문 기사에 반복해서 등장하게 되면서 작은 동네였던 후지이데라 시의 이름이 전국에 알려졌다. 동네에 고분군이 있었지만 역사와 고분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생소한 동네 이름이었으나 후지이데라 구장이 있는 곳이라는 관용어구를 통해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 소개하기 쉬워졌다.
후지이데라 구장의 역사와 변천에 자세히 설명해 놓은 사이트가 있다. #
[1]
모리노미야역 인근에 있었다. 오사카 성 근처.
[2]
다만, 긴테츠 구단은 일부 홈경기를 당시
그 지역 터줏대감 팀의 홈구장인
나고야 구장에서 치른 적이 있다. 후지이데라 구장을 다시 메인 홈구장으로 쓰기 시작한 이후에도 후지이데라보다 관중동원이 좋았기 때문에, 계속
그 지역 터줏대감 팀의 홈구장에서 일부 홈경기를 치렀다고 한다.
나고야 돔이 개장한 이후에는,
그곳으로 옮겨서 일부 홈경기를 치렀는데, 이전과는 달리 관객 동원력이 떨어져 버려서, 1999년을 끝으로
나고야에서는 더 이상 홈경기를 개최하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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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는 일본프로야구에서 최후의 개인 통산 300승이다.
[4]
그러나
같은 해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에게
3연승 후 4연패의 대역전을 허용했다. 심지어 마지막 7차전이 후지이데라 구장에서 열리며 킨테츠 선수들과 홈팬들은 홈구장에서 역스윕이란 굴욕을 지켜봐야 했다.
[5]
현재는 다시
마이시마로 이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