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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0 00:53:03

홋카이도 대학 백골 사건


北大人骨事件
北海道大学文学部古河講堂「旧標本庫」人骨問題

파일:hokudai_41b.jpg
유골이 발견된 후루카와 강당

1. 개요2. 사무실의 두개골3. 이들은 누구인가4. 누가 이들을 두었는가
4.1. 유골에 대한 내막
5. 뒤늦은 안식6. 유사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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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5년 7월 26일 홋카이도대학의 연구실에서 신원 미상의 두개골 6구가 무더기로 발견된 사건.

과거 '표본'이라는 이름으로 '수집'해온 유골들이 뒤늦게 발견된 사건으로 그동안 연구라는 명목으로 암암리에 만행을 저질러온 어두운 과거를 다시 되새기게 한 사건이다.

한국에서는 수습된 유골중 하나가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의 것으로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었던 사건이다.

2. 사무실의 두개골

1995년 7월 26일, 삿포로 경찰은 홋카이도 대학 삿포로 캠퍼스에서 사람 유골이 나왔다는 신고를 받고 캠퍼스에 출동했다.

유골이 발견된 곳은 홋카이도 대학 삿포로 캠퍼스의 후루카와 강당(古河講堂)이었는데, 1909년에 건축되었으며 일본의 유형 문화재로 지정되기 이전까지 대학 문학부 교수연구동 및 사무동으로 쓰이고 있었다.

그 건물의 8호실[1]은 홋카이도 대학 문학부 교수였던 요시자키 마사카즈(吉崎 昌一)가 본인의 사무실 겸 표본창고[2]로 쓰고 있다가 1995년 3월에 정년 퇴직하면서 공실이 되었고, 후임 교수가 들어오면서 새 사무실을 내주기 위해 이 방을 정리하게 되었다. 이때 청소 작업을 하던 대학원생이 선반 맨 꼭대기에서 "취급주의. 인골(人骨)"이라는 문구가 매직펜으로 쓰여진 종이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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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진술을 한국 교양 프로그램 ' 역사스페셜'이 그래픽으로 옮긴 것이다.

대학원생이 상자를 뜯어보니 두개골 6구가 신문지에 싸인 채로 차곡차곡 포개져 있었다. 처음에는 유적지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수습한 유골을 보관한 것이 아닌가 싶어 교수에게 물어보았으나 그런 일은 없다[3]는 대답을 듣고 경찰에 신고하면서 유골이 세상에 드러났다.

3. 이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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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골을 발견한 대학원생이 간단한 위령제를 지내준 모습

박스 안에는 총 6구의 두개골이 들어 있었다. 쪽지가 없는 한 구를 제외한 두개골 5구의 정면 이마 부분에는 그 발굴지와 신원을 정리한 쪽지가 하나씩 붙어있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윌타인 유골 (원문은 '오타스 부락 - 풍장 오로코 オタスの杜・風葬オロッコ') - 3구

한국인 남성 유골 - 1구

20세 일본인 남성(원문은 '일본남자 20세 日本男子 20才') 유골 - 1구

신원 및 연고지 불명(원문은 '기증 두개골 출토지 불명 寄贈頭骨出土地不明') - 1구

그중 한국인 유골 한 구는 쪽지가 아닌 붓으로 다음과 같이 쓰여있었다.
韓國東學黨首魁ノ首級ナリト伝フ 佐藤政次郞氏ヨリ
한국 동학당 수괴의 수급이라고 한다. 사토 마사지로 씨로부터.
이외에 한국인 유골의 대공[4]안에는 문서 한장이 들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
촉루(髑髏).
메이지 39년( 1906년) 9월 20일 진도에서
메이지 27년, 한국 동학당 궐기가 있었다.
전라남도 진도는 그들이 가장 극심하게 창궐한 곳이었다. 그들을 평정하고 돌아올 때, 그 수괴자 수백명을 죽여서 시체가 길을 가로막고 있을 정도였다.
수괴의 머리는 효수되었는데 이 촉루는 그 중의 하나로 해도(海島)를 시찰할 때 채집한 것이다.
사토 마사지로.

이 사실은 언론을 통해 한국에까지 알려지면서 당시 문민정부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이 진행중이던 한국 사회에 큰 충격과 반향을 일으켰다.

4. 누가 이들을 두었는가

일본 경찰은 일단 현장에 출동했으나 이 유골이 범죄로 인해 사망한 것이 아닌 대학교의 사무실 겸 서고에서 내려오던 물건이고, 유골을 싼 신문지가 1978년 스포츠 신문[5]이라는 것을 미루어 1970년대 말 또는 1980년대 초에 누군가 마지막으로 손을 댄 적이 있다는 사실만을 추정했을 뿐 범죄 혐의의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홋카이도 대학 측에 이를 반환하며 자체 조사를 요청했다.

대학은 이를 받아들여 「홋카이도 대학 문학부 후루카와 강당 '구 표본창고' 인골사건 조사위원회(北海道大学文学部古河講堂「旧標本庫」人骨問題調査委員会)」를 발족하였고, 최근까지 방을 사용했던 전임 교수 요시자키 마사카즈는 경찰 조사에서 '교수 임용 당시 사무실에는 자신의 소지품 외에도 전임자들이 놓고 간 물건이 남아 내려오고 있었는데, 이때 전에 이 방을 사용하던 나토리 타케미츠(名取武光) 교수(고고학자다)의 물건이 섞여 있던 것 같다. 자신도 인수인계 당시 물품들을 모두 확인하지 못해 두개골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지 못한다.'고 증언했었다.

그러나 요시자키는 대학 조사위원회의 조사에서는 증언을 번복해 ' 전학공투회의의 학생운동이 극심하던 1969년에 홋카이도 대학 역시 학생들의 점거시위가 벌어지면서 이때 교수들의 물건이 한데 뒤섞이게 되었고, 자신도 사태가 수습된 후 연구실에 돌아왔다가 이때 못보던 박스를 발견했다. 박스를 열어보니 해골이 있는 것을 보았지만 자신의 연구 대상은 아니었기에 다른 교수의 물건인 줄 알고 한소리 듣지 않기 위해 제자리에 그대로 두었다'고 진술했다.

4.1. 유골에 대한 내막

우선, 한국인 유골을 반출한 사토 마사지로(佐藤政次郞)는 홋카이도 대학의 전신인 삿포로 농학교를 수료하고 한국통감부의 하급농업관리(농업기사)가 되어 대한제국에 도래했다.

1906년 당시에는 목포부 일본인 거류지 내 영사관통[6]에 살면서 목포의 권업모범장[7]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이후에는 면화재배소장으로 근무하다가 1910년 퇴직과 함께 진주 실업학교 교장[8]을 지냈으며, 1945년 8.15 광복까지 지켜보고 한국에서 패주했다. 아래 항목에 서술된 홋카이도 대학이 연구를 목적으로 자행한 만행의 사례에서 볼수 있듯, 진도에서 도굴된 동학농민군의 유골에 대해서는 삿포로 농학교 출신으로 조선 땅에 온 사토 마사지로가 '모교의 인류학적 연구에 보탬이 되고자' 기증한 것이 한국 사학계의 중론이다.

유골중 가장 많으며, 분류 쪽지에는 '오로코(オロッコ)[9]'로 명기되어 있던 '윌타'는 과거 홋카이도 러시아 사할린, 쿠릴 열도에 걸쳐 분포했던 퉁구스 소수민족으로, 러일전쟁 이후 사할린 남부에 거주하던 윌타인들은 남사할린이 일본제국 영토가 되면서 ' 가라후토 토인(樺太土人)'으로 분류되어 일본에 편입되었다.

일제 정부는 이들을 야마토인은 물론 아이누인보다도 낮게 여겨 1926년부터  1927년에 걸쳐, 윌타인들을 일본인과 아이누인으로부터 격리시킨다는 방침으로 인근 일대에 거주하던 윌타족을 가라후토의 항구도시 시스카정[10]을 흐르는 호로나이강(幌内川)의 삼각주에 윌타족, 니브흐족, 어웡키족, 오로치족, 사하인 등 다섯 '토인' 민족을 집중적으로 수용해 오타스(オタス)라는 이름으로 마치 북아메리카의 '인디언 보호구역'같은 집단 거주지를 만들었다.
이들이 이곳에서 각자의 풍습을 영유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한때는 ' 이민족이 사는 이국적인 공간'으로 여겨져 당시에는 대표적인 인기 관광지로 여겨졌다. 이들의 생활상과 풍장 등의 독특한 장례문화는 인류학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제국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었는데, 이때 두개골 3구가 무단으로 절취되어 반출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밖에 홋카이도 대학은 홋카이도제국대학 시절부터 인류학( 우생학)적 연구를 명목으로 홋카이도· 쿠릴 열도· 남사할린 일대에서 연구 명목으로 아이누족 묘지를 무단으로 도굴해 수집했다. 이에 유족이 저항하면 일본 제국 경찰을 불러 탄압하는 방식으로 무단으로 유골을 도굴하여 공식적으로 확인된 규모로만 1939년부터 패전 후인 1956년까지 도굴된 유골의 수가 1004구에 달했다.

이런 어두운 과거는 패전과 일본의 급격한 현대화로 인해 묻혀졌다가 1980년대에 들어 아이누인들의 권익을 되찾고자 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면서 반환을 촉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1984년 홋카이도 대학 측의 사과와 함께 봉안당이 세워져 소실되지 않은 유골 969구가 안치되는 것으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다른 일본인 남성 두개골과 연고지를 알수 없는 두개골 역시 이러한 인류학적 연구에서 비교 대상으로 사용하기 위해 적출해 낸 것으로 추정되며, 신원을 알수 없는 두개골 역시 아이누인이거나 기타 북방지역 소수민족으로 추정된다.

즉, 저 유골들은 일본인의 주류를 이루는 야마토 민족과 다른 민족들[11]의 '차이'를 연구하기 위해 '표본'이라는 명목으로 도굴한 것이다.

5. 뒤늦은 안식

조사위원회는 공식 사과와 함께 두개골의 소유권에 대해서 유족이나 유관단체의 요청이 있는 경우 조건없이 반환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따라 홋카이도대학 문학부 학장 하야시 겐사쿠(林謙作) 교수와 조사위원 이노우에 가쓰오(井上勝生) 교수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 공식 사과함으로써 첫 번째로 동학농민군의 두개골이 1996년 5월 30일, 한반도를 떠난지 90여년 만에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한국으로 귀환하였다. 이후 두개골의 신원과 안장 장소를 두고 진도군 전주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간의 병림픽 법정공방이 오갔고, 결국 2018년에는 전라북도 정읍시 황토현전적지에 안장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가 문화재청이 반대하면서 무산됐다. 그렇게 후손들이 탁상공론을 벌이는 동안 국립전주박물관 수장고에서 시간을 보내던 두개골은 반환 23년만인 2019년이 되어서야 전주시 완산동의 동학농민운동 기념공원 '녹두관'에 안장되었다.

윌타인의 두개골 3구는 주일 러시아 대사관을 통해 사할린 포로나이스크로 반환되었으며, 20세 일본 남성의 두개골과 신원을 알지 못하고 '기증 두개골 출토지 불명'이라는 쪽지가 붙어있던 두개골은 그 연고지를 찾지 못해 2006년 삿포로의 사찰 묘지에 안치되면서 두개골 6구가 모두 안식을 되찾게 되었다.

6. 유사 사례


[1] 훗날 문화재 지정과 함께 101호실로 개명 [2] 사무실과 창고, 서재가 뒤섞여 있는 공간이었다. [3] 보통 발굴조사 도중 수습된 유골은 대학 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된다. [4] 척수가 이어져있는 구멍. 의학계에서는 '큰구멍(foramen magnum)'으로 부른다. [5] 정확히는 요미우리 신문의 자회사인 '스포츠 호치(スポーツ報知)'라는 신문이다. [6] 현재의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동(대의동2가) [7] 현재는 대부분 농촌진흥청이나 한국농어촌공사 지사 농장에 통합되었다. [8] 경상국립대학교 가좌캠퍼스 [9] 윌타인들을 부르는 아이누어이다. [10] 敷香町, 현 포로나이스크 지역. [11] 한민족, 아이누, 윌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