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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6 22:29:35

호꾸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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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초대 제2대
국조 장황제 호한트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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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 초대 황제
호꾸이리
胡季犛 | Hồ Quý Ly
<colbgcolor=#330066>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제호 국조장황(國祖章皇)[1]
존호 선충위국대왕(宣忠衛國大王)
흠덕흥렬대왕(欽德興烈大王)
보정해교황제(輔政該教皇帝)
호(Hồ, 胡/호)
꾸이 리(Quý Ly, 季犛/계리)
리 응우옌(Lý Nguyên, 理元/이원)
연호 타인응우옌(聖元, 1400년)
생몰기간 1336년 ~ 1407년
재위기간 1400년

1. 개요2. 생애
2.1. 조상과 출생2.2. 쩐 왕조 입궐
2.2.1. 태상황 예종의 등용2.2.2. 조정 장악과 반대파 제거2.2.3. 찬탈
2.3. 대우 건국
2.3.1. 소제 폐위와 즉위2.3.2. 개혁 정책
2.4. 내우외환
2.4.1. 명나라의 공격, 왕조의 멸망2.4.2. 망국 이후 행보
3. 가계도4. 참고 항목5. 관련 항목
5.1. 쩐 왕조5.2. 호씨 일가와 심복5.3. 대외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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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월(구 베트남) 쩐 왕조 권신이자 대우(大虞)의 초대 황제.

묘호는 국조(國祖), 시호는 장황제(章皇帝)로 알려져 있지만 이 칭호들은 쩐(진) 왕조의 권신이었을 때 참칭한 칭호이다. 묘호와 시호는 군주가 죽고 조정에서 논의해 종묘에 올려야 비로소 정식 묘호로 인정되기 때문에 이 칭호들은 정식 묘호와 시호가 아니다.

호계리는 타인호아(淸化, 청화)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선조는 5대 10국시대 후한 시절 저장성에서 남하해 대월로 이주한 중국계 호족 가문 출신으로 본래 성씨도 본래 여(黎, 레)씨였다. 이후 집안의 여식들이 쩐 왕조 제5대 명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쩐씨 황실과 가까워졌고, 후에 태상황으로 실권을 휘두르게 되는 예종(藝宗, 제9대)을 낳게 되자 중신(重臣)이 되어 조정의 여론을 장악하고, 반대파를 제거하며 2명의 황제를 갈아치운 뒤, 쩐 왕조 최후의 황제이자 자신의 외손자인 소제로부터 양위받아 황제로 즉위했다.

황제가 된 호계리는 망가진 황권과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여러 개혁정책을 펼쳤고, 국호를 대월에서 대우(다이응우)로 바꾸는 등 새로운 국가 건설를 향해 나아갔다. 대표적인 개혁으론 기득권의 토지 제한, 노비 수 제한, 행정 제도 개편, 베트남어의 공식 표기문자인 쯔놈 도입, 타인호아 즉 서도 천도가 있었다.[2] 하지만 쩐 왕조 유신들의 반발이 심해 환기 정책으로 재위기간 1년도 채 되지 않아 아들 호한창에게 양위했으나 실권은 그대로 유지했다.

명목상 종주국인 명나라의 성조 영락제가 호계리의 찬탈을 명분삼아 침략 계획을 세우자 명군의 남벌에 대비하기 위해 성벽과 무기제도를 정비했다. 1406년, 명 성조는 진첨평(陳添平)을 쩐 왕조의 후계자로 간주하여 대우로 호송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호계리는 진첨평을 비롯하여 호송병인 명군을 모두 죽였고 명 성조는 이에 크게 분노하여 대우 침략을 감행했다. 호계리는 명의 침략에 맞서 저항했으나 모든 장군과 대신들이 항복하여 참패했고 대우는 멸망했다. 호씨 부자는 나란히 난징으로 압송되었으며 그곳에서 참수당했다.[3]

외척 출신 집안, 황제에게 총애를 얻어 출세하고 권력을 얻었으며 결국에는 기존 왕조를 뒤엎고 황제 등극, 황제 등극 후 각종 개혁정책 실행과 실패, 그리고 전 왕조 지지자들의 반감 결국에는 단명 왕조의 군주로 끝났다는 점에서 왕망과 비슷하다.

2. 생애

2.1. 조상과 출생

대월사기전서》에 의하면 그의 조상의 이름은 호흥일(胡興逸)이었으며, 중국 저장성 출신이었고, 5대 10국시대 후한 시기, 안남으로 이주해 연주(演州)를 방비했다고 한다. 그 후 연주에서 살다 그곳의 채주(寨主)가 되었고 리 왕조에 이르러 월적공주(月的公主)[4]와 혼인해 월단공주(月端公主)를 낳았다고 한다.

그 후, 호흥일의 12대손인 호렴(胡廉)이 타인호아의 대리향(大吏鄉)이란 곳으로 이주해 성을 '여'(黎, 레)씨로 바꿨고 그의 4대손이 여계리였다. 즉 호계리는 호흥일의 16대손이었다.

호계리의 집안은 한미한 일개 관리 가문이었으나 집안의 여인들이 쩐 왕조 제5대 명종의 황후가 되자 외척이 되어 조정과 가까워졌다. 명종의 두 황후 명자황후(明慈皇后), 돈자황후(惇慈皇后)가 바로 호계리의 고모들이었다. 명자황후는 예종(藝宗, 제9대)을, 돈자황후는 예종(睿宗, 제10대)을 낳았다. 예종(睿宗)의 황후 가자황후(嘉慈皇后)도 호계리의 사촌으로 진현의 어머니였다.

2.2. 쩐 왕조 입궐

2.2.1. 태상황 예종의 등용

호계리는 제7대 유종의 치세동안 지후[5]에 불과했으나 1371년 폭군 양일례를 몰아내고 즉위한 예종(藝宗, 이하 철제/哲帝로 칭함)이 사촌인 호계리를 추밀원의 대사로 중용해 호계리는 철제의 신임을 바탕으로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철제는 사촌[6]을 매우 신용했는데 한 예로 여동생 휘령공주(徽寧公主)의 남편 진인영(陳仁榮)이 폭군 양일례에게 살해당하자 공주는 과부가 되었다. 철제는 사촌 호계리와 휘령공주를 결혼시켰으며, 같은 해 호계리를 응에안에 파견해 변경 일대를 지키게 하고, '충선국상후'(忠宣國上侯)의 작위를 내렸다.

이후 철제는 동생 예종(睿宗, 이하 흠제/欽帝로 칭함)에게 양위했으나 쩐 왕조의 태상황 섭정제도를 통해 실권을 유지했고, 그에 따라 호계리도 중신으로 남았다. 1375년 흠제는 참파 정벌을 계획했고 호계리는 흠제의 명령으로 군 통솔권을 맡았다. 그리고 1376년, 상황 철제와 흠제가 친정하여 참파를 토벌하고 호계리는 군 식량을 운반했는데 당시 참파 국왕은 포 비나수오르로 왕이자 동시에 참파 최고의 전성기를 이끈 명장이기도 했다. 결국 흠제는 전사하고, 대월의 수도 탕롱이 점령당하는 수모를 맞게 되었다.

한편 후방을 통솔하던 두자평(杜子平)은 전방이 패배하자 두려워 도망쳤고 식량을 운반하던 호계리도 흠제가 전사하자 도망쳤다. 그런데 똑같이 도망쳤음에도 불구하고 두자평은 무단이탈죄로 폐서인[7]되었지만 호계리는 철제의 사촌이었기에 철제의 두둔으로 면죄부를 받았고 여전히 중신으로 남게 되었다.

2.2.2. 조정 장악과 반대파 제거

흠제가 전사한 후, 철제의 조카이자 흠제의 아들인 후폐제가 즉위했다. 1379년 호계리는 소 사공(小司空)을 겸직했고 자신과 의형제를 맺은 완다방(阮多方)을 장군으로, 자신의 오른팔 범거론(范巨論)을 권도사(權都事)로 삼는 등, 조정 내에 자신의 일족들을 두어 쩐 왕조의 대권을 장악했다.

호계리 자신도 재능이 있었고, 이전 참파와의 전쟁에서는 특출함도 보였다. 1380년 포 비나수오르 신평 일대를 무력화하고 순화, 예안, 연주, 청화(타인호아)를 습격했다. 호계리는 수군을 이끌고 두자평은 보병을 이끌며 방어를 담당했다. 그들과 포 비나수오르는 청화강에서 맞붙었는데 대월군의 장군 금오(金鰲)가 무서워서 움직이지 않자 호계리는 그를 죽이고 포 비나수오르를 격파했다. 이 전쟁은 대월이 포 비나수오르가 집권한 이래 그를 처음으로 격파한 전쟁이었는데, 같이 참전한 두자평은 병으로 면직되어 호계리가 군권을 장악했다. 완다방은 그가 군권을 차지하자 급속도로 관계가 악화되어 철제에게 그를 여러번 참소하기도 했다.

이후 1382년, 1383년 다시 참파를 정벌했고 1387년엔 동평장사(同平章事)에 봉해져 철제가 친히 하사한 보검과 깃발을 하사받았다. 보검엔 「文武全才,君臣同德」(문무전재, 군신 동덕)이라 적혀있었는데 이는 문과 무에 완전한 재능이 있고 임금과 신하가 같은 덕을 지녔다는 뜻이다. 철제가 그를 얼마나 신임했는지 알 수 있다. 호계리는 받자마자 "상황의 은혜에 감사를 표합니다..."라고 중얼거렸고 자신의 동생 호계비(胡季貔)를 판수지좌우반사(判首知左右班事)에 임명시켜 조정의 한 축을 잡게 했다.

철제의 과도한 신임과 애(愛)는 현왕인 진현(폐제)의 시기를 불러왔고 진현은 친척 태위 장정왕(莊定王)[8]과 공모하여 호계리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자 왕여주(王汝舟)의 아들 왕여매(王汝梅)[9]가 일련의 계획을 호계리에게 알렸다. 완다방은 호계리에게 대리산(大吏山)으로 도망가자 했으나 범거론의 건의를 받아들여 철제에게 역으로 진현의 반역을 참소하기로 생각했다. 그리고 몰래 철제에게 아뢰어,
未有賣子而養姪,惟見賣姪而養子
아들을 팔아 조카를 키우는 자 없으며, 조카를 팔아 아들을 키우는 자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베트남의 옛 속담으로, 철제는 그 뜻을 바로 알았으며 오래지 않아 철제는 진현을 자신의 궁으로 유인해 감금하고 영덕왕(靈德王)으로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 진옹을 순종으로 세웠다. 순종은 호계리의 사위이기도 하여 호계리의 입지가 더욱더 올라가는건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호계리는 자신을 제거하려는 반대파 완쾌(阮快), 완운아(阮雲兒), 완가(阮訶), 여륵(黎勒), 완팔색(阮八索) 그리고 폐제와 가까운 유상(劉常)을 주살했고 폐제가 의문사하자 동생 호비장(胡貔將)을 시켜 대배산(大排山)에 그 시신을 매장했다. 정적들이 없어진 호계리의 권세는 나날히 팽창해나갔고 측근 범거론은 첨서(簽書, 정3품)가 되어 직위를 남용해 호계리의 일당들을 조정에 들어오게 했다. 호계리가 한바탕 조정을 뒤흔들 때 참파군이 다시 청화로 쳐들어오자 호계리는 완다방과 방어에 전력했지만 패배했다. 철제는 그 책임마저 용서했고 완다방에게 패배의 책임을 물어 그를 사사했다. 참파의 침입은 1390년 포 비나수오르가 전사하면서 대월은 참파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된다. 점성에게 대승을 거둔 호계리는 반대파를 제거함으로써 서서히 왕위 찬탈을 꿈꾸게 되었다.

이전에 자신을 제거하려고 영덕왕과 공모한 태위 장정왕은 봉호가 장정왕인데, 진현이 폐위된 후 황제 후보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러나 장정왕이 호계리와 사이가 안좋아 호계리는 철제에게 간언해 그를 계위하지 못하게 했다. 이전에 자신을 죽이려고 했기에 호계리는 장정왕을 끊임없이 모함했고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어진 장정왕은 남정(南定)으로 도망쳤다.

철제가 장정왕이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자 완인열(阮仁烈)에게 추격을 명했고 장정왕에게 귀경을 요구했다. 그러나 완인렬은 호계리의 일파중 하나였기에 호계리와 추격군은 장정왕을 죽이곤 폭도들에게 맞아죽었다고 철제가 물으면 수하들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이후 철제가 호계리의 죄를 묻자 완인열에게 죄를 뒤집어 씌어 자살을 강요했다. 이어 자신을 반대하는 종실 진일장(陳日章)을 죽이고 범거론을 추밀원사로, 자신의 일파인 여경기(黎景琦)[10]를 조정에 들어오게 했다.

그제서야 철제는 호계리의 횡포를 인지했으나 이미 그의 권위는 진 황실을 위협할 정도였고 호계리의 권한은 철제 이상이라 누를수 없었다. 철제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부르더니 사보도(四輔圖)[11]를 그리게 했다. 철제는 이 그림을 호계리에게 하사하고 저 넷처럼 황제를 보좌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호계리를 조용히 궁에 불러 말했다.
平章亲族,国家事务一以委之,今国势衰弱,朕方老耄,即世之后,官家可辅则辅之,庸暗则自取之。
평장[12]이시여, 국가의 대소사를 위임하오. 지금 국가가 쇠락하고 짐 또한 노쇠했으니, 내가 죽은 후에 관가를 도울만하면 도와주고, 희망이 안보이면 그대가 대신 취하시오..

호계리는 이 말을 듣자 바로 머리를 조아리고 철제의 은혜에 감동하여 천지를 가리켜 맹세했다.
臣不能尽忠戮力官家,传之后裔,天其厌之。
신이 불충해 관가에 협력하지 못하면 후대에 전해져 하늘이 미워할것입니다.

2.2.3. 찬탈

같은 해에 철제는 사망했다. 철제 사후 호계리는 제위 욕심이 커져갔고 자신을 반대하는 종실 진원연(陳元淵)을 죽인 뒤 그의 성을 매(枚)자로 바꾸는 만행을 저질렀다. 예종 사후엔 순종이 즉위했고 순종이 나이가 어려 섭정을 명목으로 호계리는 태사, 평장군국중사(平章軍國重事), 선충위국대왕(宣忠衛國大王)이 되었다.

호계리는 자연스레 어린 순종의 스승이 되었는데, 상서 쯔놈으로 번역해 순종을 가르쳤으며 조서를 반포할 땐 보정해교황제(輔政該教皇帝)[13]라 칭했다. 이후 1397년 호계리는 신하들과 일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훗날 호 왕조성이 되는 서도성(西都城)을 자신의 고향인 청화에 짓고 같은 해 후한의 권신이자 자신과 비슷한 조조 허도에서 입지를 높인 모습을 본떠 승룡으로 천도해 백성들을 그곳에 이주시켰다. 그리고 이듬해엔 순종을 겁박해 진안에게 양위시켜 그를 출가하게 만든 후 명목상으론 태상원군황제(太上元君皇帝)로 높여주었다. 그리고 시를 써서 그에게 자결을 권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사람을 보내 목졸라 죽였다.

무려 소제는 즉위 당시 3살의 나이로 호계리의 딸 성우(聖偶) 소생이었다. 즉 진안(소제)은 호계리의 외손자이다. 나이도 적어 아무런 행동도 못한데다 황제의 외조부가 된 호계리는 무서울게 없어져 찬탈을 기정사실화하게 된다. 진씨 황실 일파가 자신을 죽이려 들자 그들을 포함한 남자 황족 370여명을 죽이고 여인들은 관비로 만들었다. 어린 아이들에게도 자비없이 1살 이상이면 다 익사시켰다. 그러자 일부 반군들이 쩐씨를 상징하는 깃을 들고 사방으로 봉기했다. 호계리는 봉기를 뿌리뽑기 위해 쩐씨에 충성하는 이들을 수색하게 해 백성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어찌됐건 호계리는 이전 리 왕조를 찬탈한 권신 쩐투도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정도로 권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강했기에 아예 자신을 그저 보좌한다는 뜻의 교황제가 아닌 국조장황(國祖章皇)을 칭하곤 황룡포를 입은 후 인수궁[14]으로 거처를 옮겼고 행차할땐 황제의 예를 갖췄다. 그리고 차남 호한창을 섭태부(攝太傅)라 거창한 관직에 봉한 뒤, 황원전(皇元殿)의 오른쪽에 지내게 했고 맏아들 호원징도 사도로 봉했다. 다만 쩐 황실에 충성하는 신하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기에 두려워 ''이란 표현은 쓰지 못했다.

2.3. 대우 건국

2.3.1. 소제 폐위와 즉위

결국 1400년 호계리는 자신을 따르던 일파, 신하들의 건의 하에 즉위를 결정했다. 사실 호계리는 처음엔 핑계를 대며 거절했지만 나중에는 받아들여 진안을 폐한 뒤 자립해 연호를 성원(聖元)이라 한 뒤 칭황식을 올려 대월국의 황제로 즉위한다. 리 왕조를 찬탈한 쩐 왕조도 똑같이 외척인 호계리에게 찬탈당한 꼴이었다.

즉위엔 성공했지만 호계리는 멸망한 진조의 유신들의 반대라는 큰 난관에 부딪쳤다. 그들의 강력한 압박으로 1년도 안되어 아들 호한창에게 양위했으나 실권을 유지하여 태상황 자격으로 아래의 개혁정책을 시도한다.

2.3.2. 개혁 정책

대월은 이전 진유종이 국사를 신경쓰지 않아, 조정의 기강이 무너지고 귀족, 백성, 노예들 간 격차도 심해져 나라가 황폐해져갔다. 호계리는 진철제에게 중용된 이후 이러한 폐단들을 없애고자 일련의 개혁을 단행했다. 이러한 개혁은 호조가 1407년 멸망할 때까지 집행되었다.

실용적이고 진취적인 정책이 으레 그렇듯, 특히 토지, 노예제한, 과거개편은 기존 기득권의 입지를 위협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호 왕조에 불만을 품게 만들었다. 호계리는 그들의 반발엔 강압적으로 대응하여 그들을 강제로 옥에 잡아넣었다. 자연스레 민심이 악화되어 하층민들은 개혁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게다가 지나친 징집과 군사시설 건설에 중용되는 강제 노역으로 백성들의 부담이 더해져 전국 단위로 호씨에 대한 불만이 커져가 호씨 일가는 위기에 처한다.

2.4. 내우외환

이전 쩐조에서 일련의 변란과 외적이 침입했을 때, 북방에선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고 주원장 명나라를 건국하고 각지의 군벌들을 굴복시켜 새로운 한족 왕조를 세웠다. 진조는 처음엔 명과 사이가 좋았지만 철제가 양일례를 몰아낸 것을 주원장이 철제를 도적으로 매도하면서 사이가 악화되었고 1377년부턴 명나라의 광시 지역과 대월의 국경 충돌로 인해 완전히 관계가 파탄났다. 1388년엔 진현이 호계리에게 시해당하고 순종을 옹립했지만 순종은 폐제의 명의로 조공을 바쳤다.

당시 명은 이를 몰랐고 수년 후에야 광시의 신하들에게 안남의 공물을 금지하게 했다. 호계리는 1394년 명에게 청해 겨우 조공관계를 세웠지만 쓰밍토관(土官) 황광성(黃廣成)이 안남 토벌을 건의하는 등 비록 무산되었지만 명 내부엔 안남에 대한 인식이 해결되지 않았다.

1400년 호계리가 즉위하고 국호를 대우로 변경했고 진조의 유신들의 반발로 태상황이 된 후 호한창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청화에 호조태묘(胡朝太廟)를 세울 때, 동태묘(東太廟)엔 호씨 조상들을 제사지내고, 서태묘(西)엔 명종과 철제의 제사를 지내 진조를 공경한다는 인식을 보여주려 했으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또한 상술했듯 명나라가 침입할 것을 대비해 성곽을 수리하고 화약총 등 장비들을 점검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403년 명에서 정난의 변이 일어나 영락제가 집권하자 호한창은 영락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쩐조의 황실이 멸족당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신하들에게 추대받았다고 주장해 정식 안남국왕 책봉을 요구했다. 영락제는 안남으로 사절을 파견한 뒤 호한창을 정식 안남국왕으로 책봉했다.

2.4.1. 명나라의 공격, 왕조의 멸망

그러나 대다수의 쩐조 유신들이 호계리에게 처형당하고 일부 쩐조 유신만 명으로 피신해 호계리의 찬탈을 규탄한다. 1404년 진첨평(陳添平)이 명으로 피신하여 쩐조의 종실을 자처하고 자신을 안남왕으로 책봉해 사직을 돕게 해달라 청했다. 더불어 호계리는 분쟁에 처한 영토를 넘길수밖에 없었다.

1406년 영락제는 여러 신하들에게 명해 진첨평을 안남에 귀국시키게 했다. 호계리는 위의 일들을 알게되자 호원징(胡元澄)을 보내 지릉관(支棱關)에서 매복시킨 뒤 진첨평을 호위하던 명군을 격파하고 진첨평을 생포했다. 그리고 그를 심문하니 진짜 이름은 완강(阮康), 즉 진조 황족이라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종실 진원휘(陳元輝)의 관노였던 완강은 호조에 반발한 민란에 참여했다 그 봉기가 실패하자 애뢰로 도망가 명나라에 도착한 것이었다. 분노한 호계리는 완강을 능지처참형으로 처형했고 완강의 죽음은 영락제의 분노를 일으켰다. 동년 9월 정이장군 주능(朱能), 목성(沐晟), 장보와 80만 대군을 파견해 안남 토벌을 강행하였다.

명의 침략에 호계리는 군사를 징집해 저항을 시도했으나 그렇게 모은 군사와 신하들은 찬탈한 호조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모조리 명나라에게 투항했다. 다방성(多邦城), 함자관(鹹子關) 전투의 패배는 호조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결국 호조는 모든 전투력을 상실하고 1407년 대월은 멸망한다.

멸망한 왕조의 황제였던 호계리와 호한창 부자는 호조의 유신들과 나란히 묶여 명나라의 수도 금릉에 압송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호 부자를 붙잡은 자의 이름은 막투이라고 한다.

2.4.2. 망국 이후 행보

압송된 호계리와 호한창 부자는 처형 또는 사면이라는 등 두가지 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호씨 부자는 명나라 황실을 기만한 죄로 많은 유신들과 참수당했고 장남인 호원징만이 여러 기술에 능해 특별사면을 받았다는 설이 전해진다.

다른 하나는, 호계리는 영락제에 의해 수감당했다가 특별사면을 받아 광시의 지방관으로 발령받고 그의 자손 및 유신들도 무죄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이후 호계리가 죽은 후 금릉에 묻혔다가 그 자손이 그 묘를 이장했다는 설이 있다.

3. 가계도

4. 참고 항목

5. 관련 항목

5.1. 쩐 왕조

5.2. 호씨 일가와 심복

5.3. 대외

6. 둘러보기

대우의 역대 황제
진조 13대 소제 진안 초대 국조 호계리 2대 호한창


[1] 자칭. [2] 수도 탕롱의 이름을 동경(東京, 통낀)으로 개칭했다. [3] 하지만 다른 설로는 특별사면을 받아 광서(廣西)의 지방관으로 일하다 죽었다고 한다. [4] 부왕이 누군지 전해지지 않는다. [5] 祗候,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관직으로 정 7 ~ 6품에 해당한다. [6] 나이로는 호계리가 철제보다 15세나 어렸다. [7] 곧 복직되었다. [8] 중광제의 부친이다. [9] 왕여매는 진현의 스승인데 배신했다. [10] 개명 전 이름은 여인통(黎仁統). [11] 중국 고대에 천자를 보좌하던 네 측근을 그린 그림. [12] 平章은 재상급의 관직을 말한다. 원나라에선 중서성 또는 행중성의 고위직을 뜻하는 명칭으로 사용된 적이 있다. [13] 어린 황제를 도우며 가르치는 황제의 보좌 격. [14] 仁壽宮. 중국 수나라 시기 황제가 살던 궁의 이름이다. [15] (邑)과 비슷하다. 이 진은 응우옌 왕조 시기엔 마치 번국 비슷한 기능을 하기도 한다. 번국과 비슷하긴 하지만 완전히 똑같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