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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
2017년) 출처(EFP: 유럽 영화 프로모션) |
|
인구 | 980만 명 |
순수 자국생산 장편영화 | 41편 |
관객 수 | 1,510만 명 |
1인당 연간 영화 관람 횟수 | 1.54회 |
자국영화 점유율 | 9.5% |
스크린 수 | 438개 |
1. 개요
헝가리의 영화 산업에 대해 서술한 문서.2. 영화 시장
헝가리는 헝가리 포린트를 쓰면서 유로화를 쓰고 있지 않지만, 유로화로 자국 박스오피스가 나타난다. 2016년 기준으로 6,671만 유로의 연간 총 박스오피스를 나타냈다.2011년 기준으호 헝가리 영화관 스크린은 411개, 2010년 기준으로 헝가리 국민 1인당 연간 영화 관람 횟수는 0.95회이다. 자국 영화 비중은 3% 미만에 그친다. 유럽 영화계에서도 가장 자국 영화 비중이 적은 영화 시장이다. 80% 전후에 해당하는 점유율을 미국 영화가 차지한다. 동아시아 국가의 영화들은 헝가리에 제대로 수출 실적을 낸 바 없다.
3. 역사
3.1. 오스트리아-헝가리
유럽의 대제국이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던 1896년 최초의 영화관이 설립되고, 1896년 연말 헝가리 자국영화가 등장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은 당대 유럽의 열강 중 하나였으므로 영화 문물도 최신식으로 도입한 것이다.당대 유럽의 대제국 버프를 받아, 헝가리의 영화관은 이미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인 1910년이 되면 부다페스트를 넘어서 헝가리 전역에 설치되었다. 영화관 인프라가 급속히 깔리다보니 오헝 제국 시절부터 헝가리 영화감독 인재가 발굴되기 시작하였다.
3.2. 전간기
제1차 세계 대전이 베르사유 조약으로 끝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독립한 헝가리 왕국에서는 오헝 제국 기간의 인프라가 붕괴하여 영화 인재는 있는데 돈을 벌지 못해 파산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헝가리 왕국은 전간기 동안 영화 산업을 발전시키려 애를 썼다. 1925년 헝가리 영화 산업 기금(Hungarian Movie Industry Fund)을 헝가리 왕국 정부에서 조직하여 헝가리 영화 제작사 및 영화인들한테 지원하였다. 그리고 이 조직은 민주화가 된 21세기에도 이름을 헝가리 국립 영화 기금(Hungarian National Film Fund)으로만 바꿔서 존속중이다.헝가리 정부의 노력으로 1927년부터 다시 헝가리 영화관들이 재건되고 헝가리 영화들이 상영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929년 세계 대공황은 또다시 헝가리 정부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영화 제작사들과 영화관들이 동반 도산하면서 1933년까지 헝가리 영화 시장은 마이너스 성장을 반복했다. 다행히도 1934년부터 영화 시장이 성장하였다.
3.3.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헝가리 왕국은 나치 독일이 이끄는 추축국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망했어요(...).2차대전 기간동안에는 헝가리를 선전하는 선전영화 위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헝가리에 살던 유태인 출신 영화인들은 나치 독일과 헝가리 왕국에서 벌렸던 홀로코스트로 인해, 모두 헝가리를 떠나게 되었다.
3.4. 헝가리 인민 공화국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이 패망하자, 헝가리는 잠시 헝가리 제2공화국으로 독립하는 듯 했으나 강철의 대원수가 헝가리를 집어 삼키고 공산주의 국가인 헝가리 인민 공화국을 세웠다.전후 헝가리 영화의 원년은 1953-54년으로 꼽는데, 이 시절 졸탄 파브리와 펠릭스 마시아시, 카를리 막크 같은 감독들은 이 시절에 왕성한 활동을 했다. 이 중 졸탄 파브리는 고전적인 헝가리 영화의 대표주자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1956년 10월 민중혁명이 좌절되면서 움트던 헝가리 영화에 된서리를 뿌리게 된다. 몇몇 인재들은 헝가리를 떠났고 남아있던 인재들은 농촌을 다룬 문예 영화 비슷한 제작 체제로 버티게 된다. 헝가리 영화는 민족주의적인 고찰이 자주 등장하는데 공산권 최초의 민중혁명 시도와 좌절에서 찾는 사람도 많다.
1960년대부터 야누스 카다르 정권이 다시 숨통을 틔우면서 헝가리 역시 새로운 물결이 불어닥친다. 졸탄 파브리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이어가는 와중에, 1958년 데뷔한 미클로시 얀초는 길고 느릿한 롱테이크 형식으로 국내에서는 찬반양론을 불러일으켰다. 카다르 정권은 얀초의 영화를 싫어하고 좀 더 고전적인 파브리의 영화를 선호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칸타타와 적과 백은 새로운 헝가리 영화의 시금석으로 꼽히며 전세계 평단의 지지를 받게 된다. 미클로시 얀초의 영화들은 동유럽 영화사의 고전으로 꼽히며, 벨라 타르나 코르넬 문드럭초 같은 후배 헝가리 영화 감독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후 이들보다 후배인 이스트만 자보와 헝가리 최초 여성 감독인 마르타 메자로스 같은 감독들이 데뷔하면서 헝가리 뉴웨이브가 도래했음을 알리게 된다. 이스트만 자보는 졸탄 파브리에 이어 프랑스 및 해외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성공한 감독으로 남게 되었다. 전통적인 농촌 영화 역시 세대 갈등 같은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되었다. 한편 카롤리 마크는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다뤘는데, 1982년 발표한 또 다른 길은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헝가리 퀴어 영화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게 되었다.
197-80년대에는 부다페스트 학파의 영향을 받아 다큐멘터리 형식을 적극적으로 탐구한 조류가 등장하기도 했다. 한편 선배들의 느리고 성찰적인 영화에 영감을 받은 벨라 타르가 1977년 데뷔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인민 공화국 말기엔 일디코 옌예디가 데뷔작 나의 20세기로 칸 영화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하면서 주목받기도 했다. 1989년 국영 영화 제작 체제가 해체되면서 인민 공화국 시절은 막을 내리게 된다.
3.5. 헝가리 제3공화국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헝가리 인민 공화국이 붕괴하고 헝가리는 헝가리 제3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친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로 복귀하였다. 그리고 2004년 유럽연합에 가입하였다.헝가리 제3공화국 체제가 들어서면서 미국 영화와 독일 영화, 프랑스 영화 등 서구 영화 위주로 헝가리 영화 시장이 재편되었다.
1990년대엔 벨라 타르가 400분에 달하는 사탄탱고로 평단의 격찬을 받았으며,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리다를 각생한 열정, 일디코 옌예디의 더 매직 헌터와 마법사 시몬 같은 작품들이 주목 받았다. 다만 산업적으로는 영 아니었던지, 벨라 타르는 해외에서 활동하게 되고 일디코 옌예디는 한동안 영화를 찍지 못하게 된다.
3.6. 2010년대
헝가리 영화 시장은 2010년 이후 성장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다. 그리고 주피터스 문과 같은 작품이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한다.블랙 유머와 그로테스크한 내용의 택시더미아로 관객들을 경악하게 만든 팔피 죄르지라던가, 터르 벨러 감독의 조감독으로 시작해 사울의 아들로 격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네메시 라슬로, 에바 그린과 맷 스미스가 출연한 움과 집시 차별 문제를 다루는 바람처럼을 통해 베를린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플리가우프 베네데크, 주피터스 문을 감독한 문드룩초 코르넬이 2000년대 말부터 젊은 헝가리 영화를 대표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지 못하던 일디코 에녜디 역시 오래간만에 황금곰상을 수상하는 등 전반적으로 인재 면에서 활기를 띄고 있다.
4. 작품
- 주피터스 문
-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 화이트 갓
- 토리노의 말
- 사울의 아들
- 나의 20세기
- 붉은 시편
- 칸타타
- 적과 백
- 사탄탱고
-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
- 택시더미아
-
바람처럼
5. 영화감독
- 라즐로 네메스 (영화 ' 사울의 아들' / '선 셋')
- 벨라 타르
- 이스트반 자보
- 일디코 엔예디 (영화 '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