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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87><colcolor=#fff> 한심석 韓沁錫 | Shim-Suk Hahn[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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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청주 한씨[2] |
출생 | 1913년 5월 23일[3] |
평안남도
강서군 거암면 가현리[4] (現 남포시 강서구역 수산리) |
|
사망 | 1983년 10월 12일 (향년 70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학력 |
영신학교 (
졸업)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 ( 졸업) 경성제국대학 ( 의학 / 학사) 경성제국대학 대학원 ( 의학 / 박사[5]) |
경력 |
서울대학교 교수, 총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장 대한내과학회장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의사, 교수. 본관은 청주(淸州).독립유공자 한예건은 그의 5촌 당숙(堂叔)이다.[6]
2. 생애
1913년 5월 23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아버지 한제건(韓濟建, 1853. 7. 20 ~ 1916. 10. 9)[7]과 어머니 청풍 김씨 김정건(1873 ~ ?. 4. 26)[8] 사이에서 7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9살 때 영신학교에 입학해 졸업한 뒤 1927년 평양 광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1931년 졸업했다. 광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동조하는 의미로 시험 때 백지 답안지를 내고 퇴장한 일로 평양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고 강제 귀향조치를 받은 바 있다.
1932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제9회, 이과)에 입학했다. 1934년 대학예과 수료 후 의학부로 진학하여 1938년 졸업했다. 학부 졸업 후 곧바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미생물학교실 제1강좌에서 의학부 교수 호소카와 쇼이치(細川正一)의 부수로 연구를 계속했다. 한 달 뒤 조수 발령을 받고,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 전염병실과 경성부립 전염병 전문병원이었던 순화원(順化院)을 다니며 당시 유행하던 디프테리아 균주(菌株)들을 분리해 배양하는 작업을 했다. 1940년 12월에는 호소카와 쇼이치 교수의 소개로 의학부 내과학교실 제2강좌 이토 마사요시(伊藤正義) 교수의 조수로 자리를 옮긴 뒤 임상수련을 받았고, 1943년 경성제국대학 대학원에서 '경성에서 유행하는 디프테리아균형에 관한 연구'(京城に流行するヂフテリア菌の菌型に関する研究)로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43년 전임강사에 채용되었고, 1944년 6월 이토 마사요시 교수가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장에 취임하자 의학부 제2내과의 책임자격으로 부상했다.
8.15 광복 후 1945년 경성대학 의학부 제2내과에 조교수로 부임했다. 1946년 남해안 일대에 콜레라가 발생하자, 의학부 방역반장으로서 현지 방역에 종사하기도 했다. 같은 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부교수로 승진했고, 1951년부터 1954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장 및 이대동대문병원장을 3년간 겸임했다. 1952년에는 교수로 승진해 1978년까지 재직했다. 그 사이 1955년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따라 교환교수 제1진으로서 미네소타 대학교에 파견돼 간질환 연구에 대한 연수를 받은 뒤 이듬해인 1956년 귀국했고, 이후 1958년 의과대학 부속병원 내과 주임교수,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제1·2대 대한기생충학회 회장, 1960년 국제간연구회 한국지부장, 1963년 대한내과학회 부회장, 1963년부터 1970년까지 부속 풍토병연구소 소장, 1964년 10월 1일부터 1968년 9월 4일까지 제8·9대 의과대학 부속병원장, 1965년 대한병원협회 회장, 1966년부터 1967년까지 대한내과학회 회장, 1968년 9월부터 1970년까지 제9대 의과대학장, 1968년 대한소화기병학회 회장, 1970년 4월 부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1966년 4월 23일 대한민국 학술원 자연과학부 제4분과 회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1970년 11월 11일부터 1975년 5월 26일까지 제11·12대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서울대학교 역사상 유일한 연임 총장이다. 총장 재임 중 1975년 서울대학교의 각 단과대학이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여 관악캠퍼스에서 첫 입학식이 열렸다. 그러나 1975년 4월 김상진 할복 사건이 발생하자 농과대학장이 사임했고, 대규모로 시위가 거세짐에 따라 같은 해 5월에 총장직을 사임했다. 1979년 이후 명예교수가 되었다.
1974년 척추에 종양이 발견된 이래 1980년 11월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해 3년 10개월간 5차례의 수술을 받았고, 1983년 8월 종양이 재발해 다시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1983년 10월 12일 오후 4시 30분 별세했다.
2012년 3월 29일 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
국내 내과학, 특히 소화기내과학 및 간장학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한국인의 간디스토마, 간경변증 및 간암에 관한 연구, 간흡충증을 포함하는 장내 기생충에 관한 연구 등 20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고, 대한의학협회 제1회 학술상, 대한민국 학술원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3. 가족
부인 김성옥(金星玉)과의 사이에 1남 4녀를 두었으며 사위 3명이 의사다.- 한심석 / 妻 김성옥
[1]
서울대학교병원 공식 홈페이지상의 표기.
대한민국 학술원 홈페이지에서는 Han, Sim Sok으로 표기한다.
[2]
등제공파(登第公派) 29세 석(錫) 항렬. 족보명은 한필석(韓泌錫).
[3]
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홈페이지
[4]
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홈페이지. 1914년
부군면 통폐합, 강서군 수산면 가현리 → 1952년
군면리 대폐합, 강서군 수산리 → 1978년
대안시 수산리 → 1979년
남포시 대안시 수산리 → 1983년 남포시
강서구역 수산리.
[5]
박사학위논문 :
京城に流行するヂフテリア菌の菌型に関する研究(1943)
[6]
한심석의 조부 한용국(韓用國, 1834. 4. 28 ~ 1870. 6. 20)의 둘째 남동생 한용설(韓用卨, 1843. 11. 1 ~ 1917. 2. 11)의 장남이 바로
한예건이다.
[7]
자는 사여(士汝).
[8]
김성보(金聖甫)의 딸이다.
[9]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소아청소년과 의사
[10]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세계 최초 B형 간염 예방 백신을 개발하는 등 간질환 연구의 권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