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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05:50:13

유프 하인케스

하인케스에서 넘어옴
유프 하인케스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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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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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3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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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대행, 52대, 5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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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대, 5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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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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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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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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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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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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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프 하인케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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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74 · 19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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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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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월드컵 우승 멤버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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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프 하인케스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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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 HALL OF FAME DES DEUTSCHEN FUSSBA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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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데스리가 역대 득점 순위 Top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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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선수 국적 득점
1 게르트 뮐러 파일:UEFA GER.png 365
2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파일:UEFA POL.png 312
3 클라우스 피셔 파일:UEFA GER.png 268
4 유프 하인케스 파일:UEFA GER.png 220
5 만프레트 부르크스뮐러 파일:UEFA GER.png 213
6 클라우디오 피사로 파일:UEFA PER.png 197
7 울프 키르스텐 파일:UEFA GER.png 181
8 슈테판 쿤츠 파일:UEFA GER.png 179
9 디터 뮐러 파일:UEFA GER.png 177
9 클라우스 알로프스 파일:UEFA GER.png 177
11 마리오 고메스 파일:UEFA GER.png 170
12 요하네스 뢰르 파일:UEFA GER.png 166
13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파일:UEFA GER.png 162
14 베른트 횔첸바인 파일:UEFA GER.png 160
15 프리츠 발터 파일:UEFA GER.png 157
16 마르코 로이스 파일:UEFA GER.png 156
17 토마스 알로프스 파일:UEFA GER.png 148
18 토마스 뮐러 파일:UEFA GER.png 144
18 슈테판 키슬링 파일:UEFA GER.png 144
20 베른트 니켈 파일:UEFA GER.png 141
21 우베 젤러 파일:UEFA GER.png 137
22 호르스트 흐루베슈 파일:UEFA GER.png 136
23 지오반니 에우베르 파일:UEFA BRA.png 133
24 루디 푈러 파일:UEFA GER.png 132
25 미하엘 초어크 파일:UEFA GER.png 131
26 카를 알괴베르 파일:UEFA GER.png 129
27 디터 회네스 파일:UEFA GER.png 127
27 베다드 이비셰비치 파일:UEFA BIH.png 127
29 마르틴 막스 파일:UEFA GER.png 126
30 게오르크 볼케르트 파일:UEFA GER.png 125
}}}}}}}}}}}}}}} ||
독일의 축구인
파일:Jupp Heynckes.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유프 하인케스
Jupp Heynckes
본명 요제프 "유프" 하인케스
Josef "Jupp" Heynckes
출생 1945년 5월 9일 ([age(1945-05-09)]세)
프로이센 자유주 묀헨글라트바흐시[1]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신체 180cm
직업 축구 선수 (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그륀바이스 홀트 (1956~1962 / 유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62~1964 / 유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63~1967)
하노버 96 (1967~1970)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70~1978)
감독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79~1987)
FC 바이에른 뮌헨 (1987~1991)
아틀레틱 클루브 (1992~1994)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94~1995)
CD 테네리페 (1995~1997)
레알 마드리드 CF (1997~1998)
SL 벤피카 (1999~2000)
아틀레틱 클루브 (2001~2003)
FC 샬케 04 (2003~2004)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2006~2007)
FC 바이에른 뮌헨 (2009 / 감독 대행)
바이어 04 레버쿠젠 (2009~2011)
FC 바이에른 뮌헨 (2011~2013)
FC 바이에른 뮌헨 (2017~2018)
국가대표 39경기 14골 ( 서독 / 1967~1976)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전술 철학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5.1.2. 개인 수상
5.2. 감독
5.2.1. 대회 기록5.2.2. 개인 수상
6. 여담

[clearfix]

1. 개요

독일의 前 축구인.

선수 시절 포지션은 스트라이커로, 분데스리가 통산 220골을 기록하였다.[2] 출신지의 연고 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전성기인 1970년대에 주축으로 활약하며 분데스리가 4회 우승 및 UEFA컵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서독 국가대표팀에서도 유로 1972 1974 월드컵 우승에 기여했다.

현역에서 은퇴하고 1년 뒤, 묀헨글라트바흐의 감독으로 부임해 8년간 팀을 지휘하였다. 이후, 1997-98 시즌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을 맡아 32년 만의 UCL 우승을 거두었으나 리그에서의 부진으로 한 시즌 만에 경질당했다.[3]

그러나 2009년 레버쿠젠 감독으로 복귀한 뒤, 2011년 바이에른 뮌헨에 다시 부임해 2011-12 시즌에는 트리플 러너업[4]의 비극을 겪었지만 2012-13 시즌 막강한 전력을 구축하여[5] 트레블을 달성하고[6] 명예롭게 은퇴하였다. 2017년에는 안첼로티가 경질되며[7] 위기에 빠진 바이에른의 소방수로 다시 돌아와 팀을 빠르게 재건하기도 했다.

2. 선수 경력

하인케스는 12살때부터 고향에 있는 아마추어 구단 그륀바이스 홀트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그 후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유스로 자리를 옮겼다. 1964년 당시 2부 리그 소속이었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성인팀에 데뷔했다. 다음 시즌 팀은 헤네스 바이스바일러 감독의 휘하에서 팀의 분데스리가 승격을 이끌었다. 1967년엔 하노버 96으로 이적해 3시즌간 활약했다.

그리고 1970년, 친정 팀 글라트바흐로 복귀해 은퇴할 때까지 뛰었으며, 이적 직후 시즌인 70-71 시즌에 팀은 리그 우승을 차지한다. 72-73 시즌에는 팀의 UEFA컵 준우승을 이끌었으며, 하인케스는 12골로 득점왕을 차지한다. 73-74, 74-75 시즌에는 각각 30골, 27골로 리가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74-75 시즌에는 당대 최강 바이에른 뮌헨을 제치고 다시 한번 팀에 마이스터샬레[8]를 선사한 데 이어 UEFA컵에서도 결승 2차전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하는 등 맹활약을 펼치며 팀의 더블을 이끈다. 이후 하인케스는 74-75 UEFA컵에서도 10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76-77 시즌에는 팀의 유러피언컵 결승행을 이끌었으나 결승에서 리버풀에게 3:1로 패하면서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래도 하인케스는 이 시즌 6골로 유러피언컵 득점왕에 오른다. 리가 내에서는 3년 연속으로 마이스터샬레를 가져오는 데에 성공한다.

분데스리가에서만 통산 220골을 기록했고 이 기록은 현재까지 통산 득점 4위으로 남아 있다.

이후 1978년 33세의 나이에 현역에서 은퇴한다.
묀헨글라트바흐 통산 409경기 293골 49도움[9]
클럽 통산 515경기 329골 60도움

3. 지도자 경력

3.1.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 FC 바이에른 뮌헨 1기

은퇴 후 이듬해에 하인케스는 묀헨글라트바흐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곧바로 우도 라테크의 뒤를 이어 8년 동안 친정 팀 글라트바흐의 지휘봉을 잡았다.

1987-88 시즌을 앞두고 하인케스는 독일 최강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에 부임하고, 이후 4시즌 동안 두 번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나 90-91 시즌, 세대 교체에 실패하며 부진에 빠지자 결국 경질되었다.
파일:heynckesflick.jpg
1989년 분데스리가 우승 후 선수들과 시간을 보내는 하인케스[10]

3.2. 아틀레틱 클루브,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CD 테네리페

이후 1991-92 시즌, 하인케스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아틀레틱 빌바오의 지휘봉을 잡는다. 이듬해인 92-93 시즌에는 라리가 5위를 기록하며 빌바오의 UEFA컵 진출을 이끈다. 94-95 시즌에는 잠깐 분데스리가로 돌아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지휘봉을 잡았으나 선수단과의 마찰로 인해 9개월 만에 잔여 시즌을 포기하고 팀과의 계약을 해지하였다.

1995-96 시즌,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온 하인케스는 하위권 CD 테네리페의 감독이 되어 한 시즌 만에 팀의 UEFA컵 진출을 이끌었고 이듬해에는 UEFA컵 준결승까지 진출시키는 쾌거를 이룬다.

3.3. 레알 마드리드 CF

테네리페에서의 성과를 인정받아 1997년 스페인 최고 명문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취임하게 된다. 원래 레알은 당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유럽 제패를 이끈 명장 오트마어 히츠펠트를 영입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차선책으로 라리가 내에서 좋은 지도력을 보이던 하인케스로 선회했다.
파일:attachment/유프 하인케스/article-2330830-000A6C4500000258-543_634x501.jpg
레알 마드리드 사령탑 시절의 하인케스[11]

그렇게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한 1997-98 시즌, 하인케스는 레알 마드리드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끌며 감독 커리어 사상 첫 유럽 대항전 타이틀을 얻는다. 이는 레알 마드리드의 32년 만에 우승이자 7번째 빅 이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리그 내에서는 죽을 쑤며 4위에 그친 데다 엘 클라시코에서 승리하지 못하자 한 시즌 만에 경질되고 말았다는 게 그동안 국내 많은 축구 팬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2019년에 당시 레알 마드리드 회장이었던 로렌소 산스가 하인케스와 결별하게 된 이유를 밝힌 바에 따르면, 하인케스와 작별한 이유는 하인케스가 먼저 떠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유벤투스와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일주일 앞두고 산스는 하인케스에게 안부 전화를 했는데, 그로부터 앞으로 레알 마드리드와 함께 하지 않을 것이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한 직후 하인케스는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게 된다. 그래도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오랜 무관을 끊어내고 레알 마드리드의 황금기를 다시 개막한 공은 크다고 볼 수 있다.

3.4. SL 벤피카, 아틀레틱 클루브 2기

다음 시즌 하인케스는 SL 벤피카 감독직을 맡고, 그 이듬해에는 다시 아틀레틱 클루브의 사령탑으로 부임해 2시즌간 팀을 이끌지만 지난번처럼 성공적인 시즌을 보내지는 못했다.

3.5. 분데스리가로의 복귀와 부진, 은퇴

2003-04 시즌을 앞두고 하인케스 감독은 독일로 돌아왔다. 복귀 무대의 첫 도전은 FC 샬케 04의 사령탑. 하지만 큰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고, 팀은 중위권에 머무르다 시즌을 7위로 마감했다. 하인케스는 그 해 9월까지 감독직을 맡다가 물러났다.

약 2년간의 공백기 끝에 2006-07 시즌, 하인케스는 고향 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로 복귀한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글라트바흐는 14경기 연속 무승을 달리며 강등권인 17위로 추락했고, 하인케스는 2007년 1월 31일 감독직에서 사임하며 은퇴를 선언했다.[12]

3.6. 은퇴 번복과 복귀

은퇴 후 고향 글라트바흐에서 지내던 하인케스는 08-09 시즌 막바지에 깜짝 복귀했다. 위르겐 클린스만 체제 하의 FC 바이에른 뮌헨이 시즌 내내 졸전을 펼친 끝에 4위로 처지며 UEFA 유로파 리그로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긴급 소방수로 선임된 감독이 하인케스였던 것. 2009년 4월 27일, 클린스만이 짤리자 바이에른의 감독직을 맡게 되었고, 다행히 팀의 연승 행진을 이끌며 바이에른은 2위로 올려놓으며 UEFA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따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2009년 6월 5일, 바이어 04 레버쿠젠은 전임 감독 라바디아가 함부르크 SV로 떠나고 몇 시간 후 하인케스를 영입했다고 공식 발표했다[13]. 하인케스의 레버쿠젠은 많은 공격루트를 양산해내며 09-10 시즌 4위에 오르더니, 10-11 시즌에는 분데스리가 준우승을 차지하며 부흥한다. 특히 아르투로 비달의 가파른 성장, 슈테판 키슬링의 재발견, 바이에른에서 임대해 온 토니 크로스의 잠재력을 알아본 이도 모두 하인케스였다.[14] 그리고 2010-11 시즌 종료를 앞두고 판할의 후임으로 다시 바이에른 뮌헨 감독직에 복귀하는 것이 결정된다.

3.7. FC 바이에른 뮌헨 3기, 4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FC 바이에른 뮌헨/하인케스 체제(3-4기)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8. 은퇴 이후

2018년 7월 20일 본인의 업적을 기리는 특별 전시회가 알리안츠 아레나 내 바이에른 구단 박물관에 열렸고, 개장 행사에 참석했다.

8월말 슈바인슈타이거의 고별 경기에 참석해 오랜만에 만나는 자신의 제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한편 하인케스의 은퇴 후 바이에른은 자국에선 더블을 달성했지만 챔스에선 리버풀한테 무기력하게 홈에서 1:3으로 패하면서 8년 만에 16강에서 탈락한다. 그러나 이후 2019-20 시즌은 하인케스의 제자 한스디터 플리크 감독이 하인케스 시절의 압박과 조직력 높은 공격 축구를 되살리며 팀을 정상 궤도로 올려놓았고, 사상 첫 챔피언스 리그 전승 우승이라는 업적과 함께 팀의 두 번째 트레블을 달성하고 팀 역대 최초 6관왕을 달성했다. 하인케스로서는 사랑하는 제자가 사랑하는 팀을 부활시켰으니 감동적일 수밖에 없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0:6 이라는 치욕스러운 점수 차로 패하자 독일 국민들은 요아힘 뢰브를 경질하고 하인케스를 감독으로 선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 하지만 하인케스의 확실한 은퇴 의사 때문에 가능성 자체는 상당히 낮다. 다만, 그 대신 하인케스의 애제자로서 그의 전술 철학을 그대로 이어 받은, 바이에른 뮌헨의 6관왕의 대업을 이룬 한지 플릭 감독이 국가 대표팀 감독으로 거론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플릭 감독이 뢰브 감독의 사임 이후 독일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15]

여담으로 조 바이든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42년생 바이든이 미국 대통령이 되었으니 나도 감독으로 돌아갈 생각을 해야겠다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

2023년 7월 23일에 구단의 첫번째 트레블 1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했다.[16] 이로써 정말 오랜만에 알리안츠 아레나를 방문했고,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날 열린 바이에른과 도르트문트의 레전드 매치에서는 바이에른이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2대1로 승리했다.

4. 전술 철학

그야말로 다재다능하다. 실리적인 전술, 주도적인 전술, 강력한 압박과 피지컬을 동원한 역동적인 압박 전술, 적절한 교체 카드와 포메이션 활용까지 못하는 게 없는 팔방미인 감독. 선발을 정할 땐 단호하면서도 플랜을 수정해야 할 경우에는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매우 유연하게 대처한다. 11-12 시즌의 경우에도 서브가 부실해 로테이션을 한 거지 한 게 아니다.

강팀뿐만 아니라 아무리 약한 팀을 상대할 때도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는데, 대표적인 예시로 2017-18 시즌 DFB-포칼 8강에서 파더보른과의 경기를 앞두고 휴일에 파더보른 경기를 두 경기나 챙겨보고 분석을 했다고 한다. 참고로 파더보른은 현 독일 3부 리그 소속으로, 당시 포칼컵 8강 진출 팀 중 가장 약한 팀이었다. 분데스리가 선두를 질주하는 바이에른 입장에서는 대수롭지 않을 만한 상대였으나, 하인케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석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6-0 대승을 거두며 4강 진출에 성공했다.

11-12 시즌과 12-13 시즌은 중원에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를 빌드업의 코어로 삼으면서 그의 파트너로 수비적인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인 루이스 구스타보, 하비 마르티네스를 배치한 4-2-3-1 포메이션을 필두로 한 압박 전술과 빠른 템포의 빌드업을 주 무기로 한 팀을 운용했는데, 감독처럼 팔방미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 슈바인슈타이거를 공-수 및 전환에서 매우 유연하게 활용하면서도 빠른 빌드업 플레이를 지향하는 전술을 펼쳤다. 당시 바이에른의 에이스로는 리베리나 로번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슈바인슈타이거야 말로 당시 하인케스의 진정한 전술적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기에서는 바이에른이 강한 압박과 역동적인 빌드업을 베이스로 상대의 혼을 빼놓는 선굵은 축구를 추구했기 때문에 슈바인슈타이거는 자연스레 박스 투 박스처럼 양 박스를 끊임없이 왔다갔다 하면서 공-수에 모두 고르게 기여했지만, 끈질기게 점유하며 지공을 펼쳐야 할 상황에는 후방에서 경기의 전체적인 템포와 조율을 담당하면서 롱패스 기회도 틈틈이 노리는 후방 플레이메이커의 역할까지도 담당했다. 또한 공격 숫자 및 전방 압박 숫자가 더 필요할 때는 롱패스 능력을 장착한 수비수들인 제롬 보아텡, 홀거 바트슈투버, 단테 본핌 등에게 후방 플레이메이킹을 맡기고 2선에 가담해 공격에 가담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전술적으로 프리 롤이라고 봐도 무방한데, 이 모든 건 하인케스의 슈바인슈타이거의 결단력과 유연함을 향한 신뢰, 그리고 그의 파트너인 하비 마르티네스의 슈바인슈타이거가 특정 역할을 담당할 때 여백의 역할을 담당하는 커버 및 수비 능력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과감한 운영이다.

주 공격 루트는 후방 및 중원에서 바이에른이 자랑하는 양 측면을 향한 빠른 전진 패스 후 측면에서 공격 전개를 하는 동안 두 젝서[17]가 번갈아가며 순간적으로 공격에 가담해 볼경합 상황에서 수적 우위를 확보하며, 이 공백을 두 명의 센터백 사이에 다른 미드필더 한명이 위치하고 그 앞의 2선 자원이 압박으로 시간을 벌어주며 마치 3백 앞에 미드필더 한 명 있는 라볼피아나 형태로 배치해 재정비할 시간을 번다. 그렇다고 모든 중앙 전개에 대한 부담을 슈바인슈타이거에게 맡긴 건 아니고 공격형 미드필더에 선 토니 크로스가 빌드업과 템포 조절을, 최전방 공격수 아래에 포진한 토마스 뮐러는 연계 플레이와 공간 창출을 각각 담당하며 볼 전개에 대한 임무를 나눠가졌다. 하인케스 감독이 이렇게 기술적으로도, 활동량 면에서도 완벽한 중원 밸런스를 구축하며 바이에른의 중원은 공-수 및 전환 상황에서 매우 역동적인 템포를 보여줄 수 있는 엔진이 되었다.

바이에른이 전통적으로 자랑하는 강력한 측면 공격도 11-12 시즌 및 12-13 시즌 하인케스 부임 당시 절정에 이르렀다. 우측면에서 아르연 로번 토마스 뮐러[18], 그리고 그 뒤를 돌아들어가는 필립 람의 정교하고 깔끔한 부분 전술과 좌측면에서 프랑크 리베리의 개인 능력과 플레이메이킹, 리베리에게 향하는 압박을 폭발적인 오버래핑과/언더래핑으로 분산시키는 데다 기동성까지 뛰어난 데이비드 알라바의 조합은 현대 축구계에서 측면 공격력이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는 클롭의 리버풀, 현 바이에른 이상의 위력이었다. 중원 패스 길의 1명을 포함한 3 대 1 패스, 뮐러가 중앙 쪽으로 들어가면서 한 명을 끌고 가서 공간 열어놓으면 람이 오버래핑, 로번이 2명 시선 뺏으면 뮐러나 람이 불쑥 침투 → 한 명이 박스 아크에서 약속된 대로 기다리다가 컷백 받아먹기 등등 엄청나게 다채로운 플레이가 나왔다. 람과 뮐러는 축구계에서 지능캐로 손꼽히는 선수들이라 전술적으로 문제가 없었으나 로번 같은 경우 지능적인 면모보다는 스피드와 폭발력이 더 돋보였던 선수였으며 11-12 시즌 부진 이후 자신감도 많이 떨어지던 시기였는데 그런 로번에게 완벽히 전술과 팀 플레이를 이해시키고 팀에 녹아들게 유도하며 다시 에이스급 면모를 보이게끔 각성시킨 하인케스의 역량이 실로 대단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 양 측면 사이의 완급을 조절하고 2-3선에서 치명적인 파이널 볼을 비롯한 패스를 공급해주는 토니 크로스[19]의 맹활약, 그리고 원톱에 마리오 고메즈, 마리오 만주키치 등 최정상급 타겟맨들을 조합해 최강의 공격력을 보여줬다. 좌로 보고 우로 봐도 세계 정상급 스피드를 갖춘 풀백, 윙어들이 머리까지 잘 돌아가고 전술적으로도 다기능성이라 온갖 패턴 플레이를 보여주면서 매 경기 측면을 갈아마시니 상대 감독의 입장에서는 거의 미쳐버릴 지경. 빠르고 강력하면서도 상대 키 플레이어 봉쇄, 중원 쪽 숫자 가담 등 독특한 임무를 상황에 따라 수행할 수 있는 유연성까지 갖춘 바이언의 측면 라인은 하인케스 감독의 팔색조 같은 유연한 전술과 디테일을 중요시하는 특성, 선수 개개인의 캐릭터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임무와 부분 전술을 부여하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날개를 달았고, 바이에른의 속전속결 공격 전개의 핵심이었다. 하인케스 은퇴 이후에도 스피드와 파괴력을 두루 갖춘 측면 공격력은 바이에른의 강력한 아이덴티티로 남을 정도.

UEFA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 같은 큰 경기에서는 마치 위르겐 클롭과 흡사한 게겐 프레싱을 기본으로 온갖 카운터 전술을 구사한다. 덕분에 12-13 시즌에 M-V-P 라인의 유벤투스와 드림팀 3기 시절의 바르셀로나를 관광 보냈다. 특히 바르셀로나 킬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바르셀로나에게 강한데, 역대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세 번째로 많은 elo 레이팅을 가져온 감독이며, 하인케스 개인적으로도 가장 많은 elo 레이팅을 빼앗아 온 상대 클럽이 바로 바르셀로나다. 11-12 시즌 레알 마드리드에게 힘겨운 승리를 거뒀을 때도 메수트 외질, 사비 알론소 등 레알 마드리드 중원의 핵심 자원들은 바이언의 구스타보 등에게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 역대 압도적인 최고 승률(70.6%)이 대변하듯 강팀 담그는 전문가다. 특히 그 강팀의 키 플레이어를 어떻게 해야 꽁꽁 묶어버릴지 잘 안다. 예를 들면 유로 2012에서 독일을 관광 보낸 바 있는 역대 최고의 미드필더 중의 한 명인 안드레아 피를로를 중원에서 맞대응하는 대신 포워드로서는 최고의 활동량과 수비력을 자랑하는 마리오 만주키치를 마크맨으로 붙여서 힘도 못 쓰게 만들어버리고, 오히려 뮐러와 로번이 만주키치를 대신한 전방 공격수 역할을 하며 유벤투스의 빌드업 체계를 무너뜨리고 8강에서 0실점을 기록했다. 바르셀로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경우 상대 우측 풀백들의 공격력을 의식해 프랑크 리베리를 낮게 배치시켜 다니 알베스, 우카시 피슈첵 등을 막아버리고 리베리가 내려가 있는 위치는 로번을 프리 롤처럼 활용해 공격 숫자를 충당, 리베리가 공격으로 전진 시 둘이 같은 위치에서 공격을 하는 장면까지 여럿 나왔다. 여기에 끊임없이 3각 대형을 형성하는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하비 마르티네스, 그리고 전방에서 압박하러 수비로 가담하는 마리오 만주키치 토마스 뮐러까지 더해 경기장 전역에서 볼 소유는 커녕 어디로 패스할지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을 거친 압박을 지속했다.


바르셀로나 전 4-0 승리 당시 분석 영상. 말 그대로 물 흐르듯 팀이 하나의 유기체인 것처럼 한 명의 선수도 놓치지 않고 바르셀로나가 자랑하는 크루이프이즘을 철저히 붕괴시켰다. 패스 길을 담당해야 할 세르히오 부스케츠,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사비 에르난데스에 대해 뮐러, 만주키치, 슈바인슈타이거, 마르티네스가 한 명이라도 놓쳤다 싶으면 바로 뛰쳐가서 커버를 쳐주는 조직력은 경이로운 수준. 예시로 다니 알베스가 전진할 때 리베리가 커버를 빠르게 들어온다거나, 리베리가 알베스를 놓치면 센터백 한명이 불쑥 튀어나가 시간을 벌어주는 형태의 수비로 동료가 다시 커버를 들어오는 시간을 벌어주는 등, 수비 부분 전술과 조직력 결성의 결정체였다. 수비 위치까지 내려간 리베리는 공격 전환 시에는 아예 측면이 아닌 중원 프리 롤로 이동해 특별한 마크맨 없이 프리하게 볼 배급이 가능했으며, 공격 시 뮐러가 오프 더 볼로 공간을 벌어주면 로번 등이 순식간에 그 공간을 이용한다거나, 풀백이 빠르게 전진해 수적 우위를 확보하고, 바르셀로나에게 압박을 당해도 필드 플레이어 버금가는 볼배급 능력을 갖춘 마누엘 노이어의 롱패스와 바르셀로나에 대한 피지컬 우위로 대부분의 공중볼 경합과 세컨볼 경합에서 승리하는 식으로 득점을 만들어냈다.
4-5년 동안 공백기를 보낸 뒤 펩 과르디올라 카를로 안첼로티 체제에서 망가지고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잃으며 위기를 맞은 바이에른의 소방수로서 17-18 시즌에 복귀했는데, 공백기가 무색하게 자신의 아이덴티티인 선 굵고 빠르면서도 유연한 전술을 재빠르게 주입시켜 바이에른의 정상화에 크게 기여했다. 마법이라도 쓴 건지 폼이 바닥을 달리던 토마스 뮐러, 하비 마르티네스, 데이비드 알라바를 다시 과거 전성기 시절 역할을 주며 정상급 선수들로 변모시켰고, 최후방 수문장으로서 안정감이 너무나도 부족했던 스벤 울라이히를 정상급 골키퍼로 성장시켜 장기부상을 당한 노이어를 대체했으며, 임대 이적 후 고전하던 하메스 로드리게스와 전 시즌 성장이 멈췄다고 비판받던 킹슬리 코망, 요주아 키미히를 팀의 중심 플레이어들로 만들었다. 은근히 활동량에 강점이 있던 하메스의 경우 하인케스하에서 위치가 메짤라로 완전히 조정되어[20] 12-13 시즌의 토니 크로스처럼 2선과 3선을 오가며 전방에서 창의적인 패스와 압박을 하는 것은 물론, 후방까지 내려와 롱 패스나 전환 패스로 공격을 풀어주는 볼 배급 및 빌드업까지도 유연하게 가담했다.

킹슬리 코망은 폭발적인 스피드에 비해 스탯 생산성 및 후속 플레이의 정확성이 너무 부족해 비판받았으나 박스 주변에서 속도를 줄이고 시야를 확보하라는 하인케스의 조언을 받고 폭발적으로 성장해 상당한 공격 포인트 창출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2선 자원들의 장점을 파악해 최선의 부분 전술 및 각자의 역할을 배정하는 데에 매우 능한 하인케스의 노련미가 보이는 대목. 키미히의 경우 람의 은퇴 이후 자연스레 주전 라이트백이 되었고 원래도 유망했던 선수였으나 하인케스 부임 이후 공격적인 재능을 더더욱 만개해 람을 완벽히 대체했다. 이렇게 하인케스가 순식간에 선수들을 다시 본 궤도로 올려놓으면서 바이에른의 장기인 유기적인 측면 패턴 플레이와 2선의 지속적인 스위칭 및 뮐러/하메스를 축으로 한 상호 오프 더 볼 무브먼트 및 부분 전술을 활용한 침투, 빠르고 선 굵은 빌드업과 유연성을 갖춘 팀 컬러까지 구축하게 되었다.

여러 중원 자원들을 적절히 섞어 4-1-4-1 4-2-3-1을 번갈아 사용하며 유연성을 늘렸고 측면에서도 노장이 된 로번과 리베리는 물론 본인의 지휘 하에 크게 성장한 코망과 재차 부활한 뮐러를 로테이션으로 적절히 출전시간을 분배해 활용하며 자신의 유연성을 증명했다. 아르투로 비달 - 하비 마르티네스를 볼란치에 두고 하메스를 2선으로 전진 배치해서 안정성을 강화한 4-2-3-1, 하메스 - 티아고 알칸타라를 전진 배치하고 그 뒤에 하비의 피보테가 받치는 공격적인 4-1-4-1, 하메스의 짝으로 박스 투 박스 역할의 비달이나 코랑탱 톨리소를 놓고 밸런스를 맞춘 4-1-4-1 등 여러 조합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며 전술적인 선택 가짓수를 늘렸다. 거기에 16-17 시즌 공격형 미드필더로 포텐셜이 터진 티아고를 시즌 막판 피보테 자리에도 완벽히 적응시키며 선수를 한 단계 성장시켜주었다. 여담으로, 개인의 능력보단 팀 플레이가 더 돋보이는 하인케스의 전술이지만 17-18 시즌 바이언 중원의 주요 키 플레이어는 누가 뭐라 해도 하메스였다. 하메스의 은사로는 레알 마드리드, 바이에른 뮌헨, 에버튼에서 함께한 안첼로티가 단연 1순위로 꼽히지만, 어찌보면 전술에 따라 기복을 타는 하메스를 가장 현대 축구의 틀에 맞는 형태로 잘 써먹은 감독이 안첼로티보다도 하인케스이다. 하인케스 은퇴 이후 하메스의 뮌헨과 레알 마드리드 내 행보를 보면 그저 아쉬울 따름.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는 아쉽게 실패했으나, 17-18 시즌에도 하인케스의 강팀 킬러 본능은 여전했다. 조별리그 6차전 파리 생제르맹을 1.5군으로 격파할 때도 과거 바르셀로나전과 비슷하게 리베리를 이용해 상대의 핵심 풀백인 다니 알베스를 묶어버리고, 파리의 공격이 안 풀리자 알베스가 무리하게 올라간 공간을 자유도가 부여된 하메스와 알라바가 털어먹어서 결과적으로 레반도프스키의 첫 번째 골과 톨리소의 두 번째 골이 모두 알베스가 지키던 파리의 오른쪽에서 나왔다. 30대 중반에 접어든 알베스가 공격에도 가담하면서 이 모든 걸 제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리베리 역시 34세의 노장이었는데, 90분동안 뛸 활동량을 모조리 60분 동안 쏟아붓게 주문해서 알베스의 체력을 쏙 빼놓고 교체시켰고, 리베리가 빠지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포지션을 바꾼 코망이 지친 알베스의 뒷공간을 폭발적으로 돌파해 코랑탱 톨리소의 3번째 골을 만들어냈다. 또한 중원에서는 젊고 압박이 강력한 코랑탱 톨리소- 제바스티안 루디 + 하메스까지 압박에 참여시켜 네이마르를 향하는 패스 길을 모조리 차단하고 네이마르가 공을 잡을 시 강력한 바디 체킹과 택티컬 파울을 동반해 그의 흐름을 끊어내는 등 일명 안티 네이마르 플랜으로 파리의 키 플레이어들을 모두 무력화시키고 3-1 쾌승을 거뒀다.

여러 주전 선수들의 부상으로 인한 조기 교체 및 톨리소, 하피냐, 울라이히 등 후보 선수들의 어이없는 치명적인 실수,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의 유례없는 결정력 부족으로 아쉽게 챔피언스 리그 여정의 끝을 봤던 4강 레알 마드리드 전에서도 전술 싸움에서는 하인케스가 상대인 지네딘 지단보다 한 수 위였다는 평가가 중론이다.[21] 당시 챔피언스 리그 3연패에 도전하던 막강한 레알 마드리드를 정공법으로 맞서며 180분 동안 가두고 패는 엄청난 밀봉 압박과 빠른 전환을 그대로 선보였다. 1-2차전 내내 대단한 득점력을 보여주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꽁꽁 묶으며 침묵시켰고, 마르셀루의 극단적인 오버래핑과 그에 의존하는 레알 마드리드의 전술을 공략해 우풀백 요주아 키미히를 엄청나게 전진 배치 시키고 주로 왼쪽 메짤라였던 하메스의 동선을 우측으로 조정해 역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좌측면 뒷공간을 털어먹는, 한쪽 측면에 포커스를 둔 전술로 재미를 봤다. 이에 지단도 한 수 접고 4강 내내 실리적인 전술을 쓰며 막판에는 자신들의 홈그라운드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똥줄 타는 지키기에 들어갔을 정도. 실제로 키미히는 당시 4강에서 1, 2차전 합계 무려 2골을 기록했고 하메스도 1골 1도움을 기록했다. 하지만 다니 알베스를 공격적으로도 무력화시켰던 파리전과는 달리 물이 오른 마르셀루의 공격력을 제어하지 못했던 점은 유일하게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1.2. 개인 수상

5.2. 감독

5.2.1. 대회 기록

5.2.2. 개인 수상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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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치 독일의 명목상 국체인 바이마르 공화국의 행정구역에 따른 것으로 나치는 기존의 행정구역을 명목상 그대로 둔 채 실질적인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가우(Gau)'를 설치하였다. 여기에 따르면 출생지는 뒤셀도르프 가우 글라트바흐라이트(Gladbach-Rheydt)구 묀헨글라트바흐이다. [2] 그의 리그 득점 기록은 게르트 뮐러의 365골,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의 277골과 클라우스 피셔의 268골에 이어 역대 4위에 해당한다. 공교롭게도 레반도프스키를 제외한 셋은 모두 같은 시대에 활약했다. 득점왕은 각각 뮐러가 7회, 하인케스가 2회, 피셔가 1회를 차지하였다. [3] 리그에서 바르셀로나에게 더블을 당한 점이 결정타였다. 사실 이때만 해도 유럽 정상급 감독들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2007년 은퇴하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잊혀졌을 것이다. [4] 리그, 챔스, 포칼 모두 준우승. 성과라면 성과지만 아쉬움이 진할 수밖에 없다. 리그와 포칼은 최전성기를 질주하던 위르겐 클롭의 도르트문트에 모두 밀렸다. 특히 이 시즌 포칼 결승전에서는 일본의 카가와 신지가 뮌헨을 상대로 말 그대로 대활약하며 이를 지켜본 맨유의 퍼거슨이 결국 영입을 결심하는 직접적 계기가 된 것으로도 유명할 정도이다. 특히 챔스는 하필 홈 경기장인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결승전이 열린 데다가 결승 상대인 첼시가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던 바르셀로나를 잡고 오는 바람에 손쉬운 대승이 기대되었으나 로번이 결승 PK를 놓치고 승부차기에서 충격패를 당하는 바람에 두 배의 좌절감을 맛봤다. [5] 이적시장에서 마리오 만주키치, 제롬 보아텡, 단테, 하비 마르티네스, 클라우디오 피사로, 제르단 샤키리, 톰 슈타르케를 모조리 데려오는 분노의 영입을 했다. [6] 2012-13 시즌 뮌헨은 70년대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가 이끌던 시대와 더불어 바이에른 뮌헨 역사상 최강팀 중 하나로 손꼽히는 팀이다. 21세기 클럽으로 범위를 넓혀도 펩 과르디올라 바르셀로나와 더불어 최강의 팀으로 평가된다. [7] AC 밀란 시절 바이에른에게 저승사자로 군림했던 그답지 않게 정작 뮌헨의 사령탑으론 무자격 친인척을 마구잡이로 보직에 앉히고 훈련도 대놓고 태만하게 방치해 위기감을 느낀 뮌헨 주전들은 스스로 자가 훈련을 자청해 보강을 할 지경이었고 심지어 그 훈련도 금지시켜 선수들이 따로 비밀 훈련을 하기도 했다. [8] Meisterschale; 분데스리가 우승 트로피. 접시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마이스터샬레라고 불린다. 방패 모양 위에 역대 우승팀들이 새겨져 있다. [9] 묀헨글라트바흐의 클럽 최다 득점 기록이다. [10] 오른쪽의 선수는 당시 바이에른의 선수였던 한지 플릭이며 훗날 바이에른을 이끌고 하인케스에 이어 구단 역사상 두 번째 트레블을 달성하게 된다. [11] 달려오는 선수는 하인케스가 중용했던 크리스티앙 카랑뵈. [12] 그리고 해당시즌인 2006-07 시즌 글라드바흐는 하인케스 감독이 물러난뒤 수습하지 못했고, 글라드바흐는 결국 최하위로 6시즌 만에 강등을 당하였다. [13] 하인케스를 놓친 뮌헨은 대신 루이 판할을 새 감독에 임명하였다. [14] 시즌 종료 직전 레버쿠젠의 이사진은 크로스의 완전 영입 의사를 표했으나 바이에른에서는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고 한다. [15] 그러나 플릭이 지휘봉을 잡고 난후 독일 대표팀은 발전은 커녕 오히려 퇴보하는 모습만 보여줬고 카타르 월드컵 본선에서 일본에게 1:2로 역전패를 당하며 2회 연속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수모를 겪었으며 불과 10개월 뒤 홈에서 열린 일본과의 평가전에서도 제대로 된 설욕도 못해보고 1:4로 대패하며 결국 역대 독일 대표팀 감독들중 최초로 경질되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16] 하인케스 뿐만 아니라 필립 람,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제롬 보아텡, 단테, 마리오 만주키치, 클라우디오 피사로, 다니엘 반부이텐, 하피냐, 루이스 구스타보, 톰 슈타르케, 홀거 바트슈투버 등 당시 트레블 멤버들이 다수 참석했다. 당시 트레블을 경험한 유이한 현역 바이에른 선수들인 마누엘 노이어 토마스 뮐러도 참석했다. [17] Sechser. '6'이라는 뜻의, 분데스리가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를 가리키는 용어 [18] 원래는 11-12 시즌 막판 대역죄인 수준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로번이 로테이션 자원이었고 뮐러가 주전 윙어였으나 후반기 초반 크로스의 장기 부상 이후 뮐러가 공격형 미드필더로 자리를 옮기고 윙 자리를 로번이 차지하게 된다. [19] 토니가 시즌 아웃 당한 후엔 언급했듯 토마스 뮐러가 이 자리를 담당했는데 플레이메이커인 크로스와는 달리 포워드 성질의 선수라 우측면에서 로번과 람 사이의 연계를 도우면서 박스로 침투하거나 오프 더 볼로 수비를 교란 시키는 역할에 집중했다. [20] 레알 마드리드 시절 주전이었던 안첼로티 시절에도 앙헬 디 마리아의 역할을 그대로 계승해 메짤라로 뛰었다고 볼 수 있지만, 활동 반경을 보면 사실상 프리롤 2선 자원으로 분류될 만큼 공격적으로 활용되었다. [21] 사실 당연한 결과다. 2018년을 기준으로 하인케스는 감독 생활을 40년동안 해온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였던 반면에, 지단은 감독으로 데뷔한지 겨우 4년이 된 초짜 감독에 불과했다. [22] 알프 램지 어워드 [23] 독일의 전구회사이다. 백열등, 형광등, 할로겐등 같은 전구는 가리지 않고 만들며 치아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임플란트로도 유명하다. [24] 해당 기록은 하인케스를 포함해 6명만이 달성했는데 나머지 5명은 에른스트 하펠 (폐에노르트, 함부르크), 오트마어 히츠펠트 (도르트문트, 바이에른 뮌헨), 주제 무리뉴 (포르투, 인테르), 카를로 안첼로티 (AC밀란, 레알 마드리드), 펩 과르디올라 (바르셀로나, 맨체스터 시티)이다. [25] 물론 두 경기를 치르고 무려 50점이나 빼앗아 온 발레리 로바노브스키도 있기는 하다. [26] 레알 마드리드에서 지낸 97-98, 바이에른 뮌헨에서 지낸 12-13 시즌. [27] 바이에른 뮌헨에서 지낸 11-12 시즌. [28] 레알 마드리드에게 패해서 탈락했다. 그리고 바이에른 뮌헨을 간신히 꺾고 결승에 진출한 레알 마드리드가 리버풀에 3 대 1로 이기면서 챔스 3연패에 성공했다. 바이에른에겐 운이 없었다고 보면 된다. [29] 한지 플릭은 선수 시절에 바이에른 뮌헨에서 잠깐 뛰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 감독이 하인케스였다. [30] 그마저도 진 게 아니라 RB 라이프치히와 0:0으로 비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