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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샤쿠니 14대 샤 𐭕𐭉𐭓𐭉𐭃𐭕 | 티리다테스 3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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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티리다테스 3세 |
파르티아어 | 𐭕𐭉𐭓𐭉𐭃𐭕 | |
영어 | Tiridates III | |
존호 | 샤 | |
생몰 년도 | 미상 ~ 330년 | |
재위 기간 | 298년 ~ 3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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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메니아 아르샤쿠니 왕조의 14대 샤. 아르메니아의 국교를 기독교로 정하고 중앙집권화 정책을 꾀했다. 티리다테스 대왕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2. 생애
사산 왕조의 샤한샤 아르다시르 1세의 침략으로부터 아르메니아를 지켜낸 티리다테스 2세의 손자이자 호스로프 2세의 아들이다. 여동생으로 호스라비 데크트(Khosravi Dekht)가 있었다. 258년, 사산 왕조 2대 샤한샤 샤푸르 1세는 아르메니아를 공략할 야심을 품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의 방비가 워낙 굳건하고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 제국의 견제도 심한 상황에서 무력으로는 공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호스로프 2세의 친척인 아낙에게 "왕을 시해하면 그의 지위와 재산을 그대가 갖는 걸 용인하겠다"라고 약속했다.아낙은 이를 받아들여 바그하르샤파트에서 호스로프 2세와 그의 아내를 살해했다. 아르메니아 귀족들은 이에 분노하여 아낙과 일가족을 몰살시켰다. 아낙의 어린 아들 그레고리만이 보모 소피아와 예브타그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하여 카파도키아의 카이세리아로 피신했다. 샤푸르 1세는 호스로프 2세의 암살로 혼란에 빠진 아르메니아를 전격 침공해 별다른 저항 없이 공략하고 아들 호르미즈드 1세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혔다.
티리다테스는 나라를 졸지에 잃고 추종자들과 함께 로마로 망명했다. 그는 로마에서 고급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4세기의 신학자로 그레고리의 생애를 저술한 아가탄겔로스(Agathangelos)와 5세기 아르메니아 역사가 모세스 호레나치(Movses Khorenatsi)에 따르면, 그는 비범한 힘을 소유해 검투사 경기에 친히 출전해서 무예를 뽐냈으며, 로마 제국이 벌인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냈다고 한다.
283년 카루스 황제가 사산 왕조를 침공하여 크테시폰을 함락하고 메소포타미아를 파괴하는 등 심대한 타격을 입힌 뒤, 284년 바흐람 2세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평화 협정을 체결하면서 서아르메니아는 티리다테스 3세가 통치하고 동아르메니아는 사산 왕조의 나르세스 1세가 다스렸다. 293년, 나르세스 1세는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바흐람 3세를 폐위하고 샤한샤로 등극했다. 그는 찬탈로 인해 불안한 입지를 다지려면 지난날 로마 제국에 빼앗긴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296년, 사산 왕조군은 서아르메니아로 진격하여 티리다테스를 몰아냈다. 이후 티그리스 강을 건너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동방의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부제 갈레리우스에게 티리다테스 3세를 아르메니아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명령했다.
296년 말이나 297년 초, 갈레리우스는 카라에와 칼리니쿰 사이의 지역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사산 왕조군과 격돌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이었는데도 적에게 공세를 벌이다가 크게 패하고 시리아로 철수했다. 뒤늦게 시리아에 도착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티리다테스를 왕으로서 정중하게 대했지만, 갈레리우스에겐 말을 타지 말고 자신이 탄 병거 옆에서 달리게 하는 굴욕을 줬다. 하지만 그는 갈레리우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하고, 다뉴브 전선의 고트 용병대를 모집한 뒤 다시 시리아로 오도록 하였다.
298년 초, 갈레리우스는 카파도키아로 쳐들어온 나르세스 1세의 사산 왕조군을 사탈라 전투에서 궤멸시키고 나르세스 1세의 아내 아르세나와 다수의 후궁, 상댱량의 보물을 확보했다. 그 후 페르시아로 쳐들어가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하여 약탈을 자행하고 바빌론까지 진격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더 깊숙이 진격하려는 갈레리우스를 제지하고, 나르세스 1세에게 사절을 보내 "크세티폰을 돌려줄 테니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 왕으로 복위하는 걸 용인하라"고 요구했다. 나르세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승락했고, 티리다테스 3세는 그 덕분에 아르메니아 전체의 군주로 등극했다.
301년, 티리다테스 3세는 기독교를 아르메니아의 국교로 확정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조로아스터교가 아르메니아의 국교였고 기독교는 박해대상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뒤집혀진 것이다. 이에 대해 아가탄겔로스는 그레고리의 활약 덕분이라고 기술했다. 그에 따르면,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티리다테스가 아나히타 여신에게 감사 예식을 거행했다. 이때 하급 관료를 맡고 있던 그레고리는 "저는 기독교인이라 여신에게 제물을 바칠 수 없습니다"라며 거절했다. 왕은 그의 행동에 마음이 상했는데, 누군가가 그레고리는 티리다테스의 아버지 호스로프 2세를 살해한 아낙의 아들이라고 밀고했다. 티리다테스는 분노하여 그레고리를 아르탁사타의 지하 감옥 코르 비랍에 가두라고 명했다. 그레고리는 그곳에서 13년간 옥고를 치렀지만 신앙심을 잃지 않았다.
몇년 후 흐립시메(Hripsime) 등 33명의 처녀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를 피해 아르메니아로 탈출했다. 흐립시메의 아름다운 용모에 반한 티리다테스가 자신과 결혼하자고 제안했지만, 흐립시메는 단호히 거부했고 다른 처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분노한 티리다테스는 그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얼마 후 티리다테스는 사냥 도중에 갑자기 이성을 잃고 멧돼지처럼 행동하며 풀을 뜯어먹는 정신질환에 걸렸다. 호스라비는 오빠를 어떻게든 구하려 했지만, 명의로 소문난 의사들조차 손을 대지 못하고 조로아스터교 사제들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던 중 꿈 속에서 감옥에 갇힌 그레고리만이 오빠를 치료할 수 있다는 음성을 듣고, 당장 지하 감옥에서 풀어주고 오빠를 구해달라고 청했다.
그레고리는 먼저 처녀들의 사체를 매장한 뒤 66일간 왕을 위해 기도하고 기독교에 대해 설교했다. 그 결과 티리다테스는 기적적으로 고쳐졌고, 여동생과 함께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티리다테스가 301년 무렵에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그레고리를 아르메니아의 첫번째 총대주교로 삼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레고리는 수도 바가르샤파트에 교회를 세우고 36명의 주교를 선임했다. 왕은 거의 모든 이교 사원을 파괴하고 우상으로 간주된 신들의 동상과 기록물을 파괴했다. 이에 분노한 이교도 신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티리다테스는 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강력한 중앙집권화 정책을 실시했다.
모세스 호레나치에 따르면, 그는 330년 나카라르 가문의 몇몇 구성원에게 독살당했다고 한다. 사후 아들 호스로프 3세가 왕위에 올랐다. 아르메니아 정교회는 티리다테스 3세를 성인으로 시성하고 6월 30일을 그의 축일로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