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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샤쿠니 15대 샤 Խոսրով | 호스로프 3세 |
||
제호 | 한국어 | 호스로프 3세 |
아르메니아어 | Խոսրով | |
영어 | Khosrov III | |
존호 | 샤 | |
생몰 년도 | 미상 ~ 339년 | |
재위 기간 | 330년 ~ 33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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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메니아 아르샤쿠니 왕조의 15대 샤.2. 생애
아르메니아의 국교를 기독교로 확정한 티리다테스 3세의 아들이다. '코타크(Kotak)'라는 별칭이 있는데, 키가 작았기 때문에 이런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330년 티리다테스 3세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올랐지만, 곧 각지에서 분란의 조짐이 일었다. 북동부 아르메니아 통치자 사나투르케스 아르샤쿤은 왕위를 갈망했고, 남부 아르메니아 총독 아그드즈니크 브데쉬흐-바쿠르는 사산 왕조 샤한샤 샤푸르 2세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그는 동로마 제국의 지원에 힘입어 반란을 물리쳤다. 또한 분쟁 영지인 보르두니스와 마나바지아를 위해 서로 싸운 신하들을 해임하고 그들의 영지를 몰수하는 조치를 내렸다. 바체 마미코니안(Vache Mamikonian)이 왕의 명령을 그대로 집행해 보르두니스와 마나바지아의 분란을 잠재웠다. 한편, 그는 사산 왕조에 일정한 액수의 공물을 매년 바치는 조건으로 샤푸르 2세와 화해했다.
그러나 로마군이 아르메니아를 떠난 후, 사나투르케스 아르샤쿤이 군대를 기습적으로 일으켜 에프탈의 지원에 힘입어 바그하르샤파트를 장악했다. 호스로프는 카고빗 지방의 다루운크 요새에서 농성했다. 마미코니안은 호스로프에 충성하는 장군들의 사병대를 모은 뒤 요새를 포위한 적군에 돌격해 격멸한 후 바그하르샤파트를 기습 점령했다. 그 후 왕의 군대는 오샤칸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반역자 사나투르케스를 처단했다. 호스로프는 오사칸 전투에서 승리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바한 아마투니에게 오사칸을 영지로 하사했으며, 충성을 바친 다른 장수들에게 여러 영지를 하사했다.
그 후 아르메니아는 평온을 되찾았고, 호스로프는 토목 공사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두인 시를 건설해 행정수도로 삼았으며, 호스로바케르트를 사냥과 군사훈련을 병행하는 장소로 삼고 그곳의 숲을 벌목하는 걸 금지했다. 그러던 337년, 샤푸르 2세의 군대가 아르메니아로 침공했다. 1개 부대는 므츠빈을 포위했고, 또다른 부대는 헤르자레반드를 통과하여 아르메니아 영역 깊숙히 침투했다. 바체 마미코니안과 바한 아마투니 장군이 3만 병력을 이끌고 출전해 이들을 막아섰고, 양군은 반 호수 북동쪽 해변에서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사산 왕조군은 참패했고, 사산 왕조군과 손잡은 다타베 일족은 처단당했다. 그 후 호스로프는 1,000명 이상의 군인을 거느린 신하들은 궁정에서 자신의 통제하에 생활하도록 해, 또다른 반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다.
338년, 샤푸르 2세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아르메니아를 또다시 공격했다. 그해 3월, 바체 마미코니안이 수만 병력을 이끌고 샤푸르 2세와 격돌했다.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고, 샤푸르 2세는 공세를 중단하고 귀국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의 명장 마미코니안은 불행히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훗날 아르메니아 정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호스로프는 339년 사망했고, 아들 티그라네스 7세가 왕위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