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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일신라와 일본의 관계를 나타낸 문서이다.2. 내용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은 발해와 가깝게 지냈지만 신라와는 비교적 긴밀한 관계는 아니었다. 물론 나당전쟁 이후 신라와 당의 국제 관계가 파탄나면서 신라가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물색하였고 잠시 양국간 우호관계가 이어지기는 하였지만 향후 발해가 건국되고 신라가 당과의 관계를 회복하면서 양국 간 관계는 다시금 예전처럼 소홀해졌다.하지만 양국은 의외로 교류를 굉장히 많이 했다. 삼국사기 등 한일 양국의 사료를 종합해보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670년부터 779년까지 1세기 동안 일본으로 사신단이 39차례나 파견됐고, 동시기 일본 사신단도 신라를 25차례나 방문했다. 훗날의 조선 통신사가 총 20회 파견되었던 것과 비교하면 훨씬 많은 파견 횟수였다. 사신단의 규모에 있어서도 성덕왕 2년(703년)에 204명의 사신단을 파견했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훨씬 많은 횟수까지 감안했을 때 1회에 300~500명을 파견한 조선 통신사에 크게 밀리지 않는다. 또한 신라는 왜전(倭典)이라는 일본 외교사신 접객을 담당하는 관청을 따로 두어 체계적으로 대일관계를 관리했다.
8세기 중후반으로 가면서 일본의 자존 의식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자국을 상국으로 모실 것을 신라에 요구하는 형식적 외교 관례에 집착했고, 이러면 신라도 무례하다고 사신을 쫓아내고 무시하면서 차츰 정부간 교류가 줄어들게 되는데 그래도 장보고로 대표되는 사무역이나 민간 교류는 9세기에도 꽤 많았다. 다만 성덕왕 시기인 734년에 벌어진 왕성국 사건으로 인해 벌어진 갈등도 있었다.
한편 통일신라 후기에는 신라구가 일본 해안을 노략질하는 일이 벌어지며 삼국시대 내내 지속되었던 왜구의 신라 침입이 역전되는 현상도 발생하곤 하였다.[1] 사실 현행 국사 교육에서는 아주 짧게만 언급하고 지나가는 부분이지만,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회복될 때까지 신라구의 일본 약탈은 계속되었으며 헤이안 시대 일본의 대외정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심지어 고려왕조와도 건국 후 약 100여년간 공식 교류가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3. 관련 사건
4. 관련 문서
[1]
심지어 894년에
쓰시마섬을 공격했다가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현춘이라는 신라구는 자신들이 신라 왕의 명령을 받고 온 부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이 주장이 사실임을 입증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