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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투디안테스 데 라플라타 | |
Estudiantes de La Plata | |
<colbgcolor=#e40b12><colcolor=#fff> 정식 명칭 | Club Estudiantes de La Plata |
별칭 | Los Pincharratas (로스 핀차라타스) |
창단 | 1905년 8월 4일 ([age(1905-08-04)]주년) |
소속 리그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Argentine Primera División) |
연고지 | 라플라타 (La Plata) |
홈구장 |
에스타디오 시우다드 데 라플라타 (Estadio Ciudad de La Plata) 53,000명 수용 가능 |
라이벌 | 힘나시아 LP - 라플라타 클라시코 |
회장 |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Juan Sebastian Veron) |
감독 | 에두아르도 도밍게스 (Eduardo Domínguez) |
공식 웹사이트 | |
우승 기록 | |
프리메라 디비시온 (1부) (6회) |
1913(아마추어), 1967 메트로폴리타노, 1982 메트로 폴리타노, 1983 나시오날, 2006 아페르투라, 2010 아페르투라 |
프리메라 B 나시오날 (2부) (1회) |
1994-95 |
프리메라 B (3부) (2회) |
1935, 1954 |
CONMEBOL 리베르타도레스 (4회) |
1968, 1969, 1970, 2009 |
코파 인테라메리카나 (1회) |
1968 |
인터컨티넨탈컵 (1회) |
1968 |
클럽 기록 | |
최다 출장 | 마누엘 펠레그리나(Manuel Pelegrina) - 508경기 (1938~1952, 1954~1956) |
최다 득점 | 마누엘 펠레그리나(Manuel Pelegrina) - 240골 (1938~1952, 1954~1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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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주도 라플라타(La Plata)를 연고지로 하는 클럽이다. 라플라타는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아니라 우리나라로 치면 경기도청 소재지 격이다.2. 역사
1905년 힘나시아 라플라타라는 클럽의 축구 애호가들이 클럽과 결별하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힘나시아 라플라타가 경기장을 폐쇄하고, 축구 부문을 운영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05년 8월 4일 그들은 새로운 클럽을 창설하기로 하였다. 명칭은 'Club Atletico Estudiantes(클루브 아틀레티코 에스투디안테스)'였다. 설립 시 지도부가 모두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에스투디안테스(학생)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965년 오스발도 주벨디아 감독이 취임하였다. 주벨디아 감독은 오프사이드 트랩의 사용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전략과 매우매우 거친 반칙성 플레이의 적극적인 활용[1] 등을 이용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들을 이끌고 황금기를 만들었다.[2] 1967년에는 아르헨티나 5대 클럽이 아닌 팀 중 처음 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다. 1968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는 준결승에서 라싱 클루브를 꺾었고, 결승에서 SE 파우메이라스를 꺾고, 아르헨티나의 클럽으로는 인데펜디엔테와 라싱 클루브에 이어 세 번째로 남미 제패를 이루었다. 후안 라몬 베론은 파우메이라스와의 결승전 3경기 모두 골을 넣으며 9골을 기록했다. 1969년 같은 대회에서 나시오날 몬테비데오( 우루과이)를 물리치고 2 연패를 달성하였고, 1970년 대회에서는 리버 플레이트와 페냐롤(우루과이)을 꺾고 3연패를 달성하였다. 1971년 대회에서도 결승에 진출했지만, 나시오날 몬테비데오에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1968년 인터컨티넨탈컵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대전하였다. 보비 찰튼과 조지 베스트, 데니스 로 등이 현역으로 뛰던 잉글랜드의 명문 팀에게 1승 1무로 승리하여 인터컨티넨탈컵 우승을 차지하였다. 1969년 같은 대회에서 잔니 리베라 등을 보유한 AC 밀란과 대결했지만 합계 2-4로 패배를 하며, 아쉽게 우승에 실패한다. 1970년 이 대회에서는 유러피언 컵에서 AC 밀란, 셀틱 FC 등을 꺾고 우승한 페예노르트와 대결했지만 합계 2-3로 패배하여 또 다시 우승에 실패하였다.1970년에 은퇴한 카를로스 빌라르도는 1971년 자신의 스승인 오스발도 주벨디아 감독의 후임으로 친정 팀 감독으로 취임해 총 4차례에 걸쳐 에스투디안테스의 감독을 맡았다. 3번째가 된 1982년에는 15년 만의 리그 우승을 이룩하였고, 1983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4번째 남미 타이틀에 도전했지만 준결승에서 그레미우에게 패해 탈락하였다. 빌라르도가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던 1986년 월드컵은 디에고 마라도나를 위한 대회라고하지만, 결승전 서독과의 경기에서는 1982년 리그 우승 시에 에스투디안테스에서 주장을 맡고 있던 호세 루이스 브라운이 선제골을 넣었다. 1983년 이후 20년 이상 무관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1994년에는 클럽에 2번째 프리메라 B 나시오날 (2부 리그) 강등을 경험했지만, 이듬해 프리메라 디비시온(1부 리그)에 복귀하였다. 1993년 후안 라몬 베론의 아들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이 유럽 클럽을 떠돌아 다닌 후 2006년 에스투디안테스에 복귀하였다.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이 이끄는 팀은 우승 결정전에서 보카를 꺾고, 23년 만의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2008년 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 보타포구와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를 꺾고 결승에서 인테르나시오나우에 패해 준우승하였다. 2009년에는 제 50번째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출전해 조별 리그를 2위로 통과하였고, 결승전에는 조별 리그에서 선두를 내준 크루제이루와의 대전이 다시 열렸다. 홈에서의 경기는 0-0 무승부로 마쳤고, 원정에서 선제골을 허용하며 불안한 경기였지만, 가스톤 페르난데스와 마우로 보셀리의 득점으로 역전해 39년 만에 4번째 우승을 이룩하였다.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이 대회 최우수 선수로 선출되었다. 아버지 후안 라몬 베론에 이어 2대째 같은 팀에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 선수가 나오게 되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아랍 에미리트에서 개최된 FIFA 클럽 월드컵에 출전했지만, FC 바르셀로나에게 패하였다.
2014년 10월 4일 선거를 통해 75%의 지지율로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을 신임 회장으로 지명하였다. 직전 회장인 엔리케 롬바르디는 25% 득표율에 그쳤다. #
3. 애칭
에스투디안테스의 애칭 Los Pincharratas(로스 핀차라타스 : 쥐에 주사하는 놈들)는 Pinchar (주사)와 Rata(쥐)을 합친 조어이다. 이것은 의대생들이 연구 실험을 위해 쥐에 주사를 놓는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에스투디안테스는 학생이라는 팀이기 때문에 학생을 이미지하여 만들어진 애칭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Pinchar을 더 축약하여 단순히 "Pincha"(핀차)라고 부르기도 한다. 1960년대 후반의 클럽 황금기 카를로스 빌라르도 등이 실제 핀으로 상대 선수를 찔렀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4. 서포터 및 라이벌
에스투디안테스의 서포터는 우루과이의 페냐롤과 사이가 좋다. 계기는 에스투디안테스의 축구 지도자 엘 바르 곤잘레스가 우루과이 출신으로서 페냐롤의 서포터였기 때문이다. 그가 발단이 되어 두 클럽의 교류가 시작되었고, 친교는 1990년대부터 공식적으로 시작하여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에스투디안테스의 라이벌 팀은 동일한 라플라타를 연고지로 하는 힘나시아 라플라타이다. 이 더비 경기는 클라시코 플라텐세(Clásico Platense)로 알려져 있다.
5. 주요 선수
- 마누엘 페레이라(1924~1933, 1935~1936)
- 엑토르 카스트로(1932~1933)
- 카를로스 빌라르도(1965~1970)
-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1994~1996, 2006~2012, 2013~2014, 2017)
- 마르코스 로호(2008~2011, 2020)
- 하비에르 마스체라노(2020)
- 후안 포이스(2017)
- 헤로니모 룰리(2011~2014)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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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 클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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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 우승팀 | 국가 | 첫 우승연도 | 우승 횟수 | |
1 | CA 페냐롤 | 1960년 |
★★★★★ 5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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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산투스 FC | 1962년 |
★★★ 3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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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CA 인데펜디엔테 | 1964년 |
★★★★★★★ 7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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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라싱 클루브 | 1967년 |
★ 1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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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에스투디안테스 데 라플라타 | 1968년 |
★★★★ 4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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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클루브 나시오날 데 풋볼 | 1971년 |
★★★ 3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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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크루제이루 EC | 1976년 |
★★ 2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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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CA 보카 주니어스 | 1977년 |
★★★★★★ 6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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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클루브 올림피아 | 1979년 |
★★★ 3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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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CR 플라멩구 | 1981년 |
★★★ 3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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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그레미우 | 1983년 |
★★★ 3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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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AA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 1985년 |
★ 1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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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CA 리버 플레이트 | 1986년 |
★★★★ 4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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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아틀레티코 나시오날 | 1989년 |
★★ 2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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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콜로-콜로 | 1991년 |
★ 1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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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상파울루 FC | 1992년 |
★★★ 3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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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CA 벨레스 사르스필드 | 1994년 |
★ 1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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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CR 바스쿠 다 가마 | 1998년 |
★ 1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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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SE 파우메이라스 | 1999년 |
★★★ 3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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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온세 칼다스 | 2004년 |
★ 1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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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SC 인테르나시오나우 | 2006년 |
★★ 2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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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LDU 키토 | 2008년 |
★ 1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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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SC 코린치안스 | 2012년 |
★ 1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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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 2013년 |
★ 1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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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CA 산 로렌소 | 2014년 |
★ 1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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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 플루미넨시 FC | 2023년 |
★ 1회 |
[1]
아무리 선수 보호가 부족한 시기라고는 하지만, 이 시기 축구는 아르헨티나 축구의 암흑기라 불린다. 상대 선수들의 허리에 태클이 들어가는 것은 예사이고, 머리가죽을 찢어놓거나 바늘로 찌르는 등 온갖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했다.
훌리건들도 절대 만만치 않아서 상대 선수들이 터널에 있을 때 펄펄 끓는
마테차나
커피를 부어버리기도 했다.
[2]
수벨디아가 보여준 실리 축구는 아르헨티나 축구의 한 줄기를 이뤘는데, 그의 제자 격인 카를로스 빌라르도가 86년 월드컵에서 우승하며 꽃을 피웠고, 그의 라인이
1978년 월드컵을 우승시킨 메노티의 공격 축구 라인과 더불어 아르헨티나 감독계의 양대 라인을 이루게 된 것. 그래서 아르헨티나의 축구사라는 측면만 본다면, 메노티의 메노티즘의 시초격의 축구를 보여준 리버 플레이트와 더불어 에스투디안테스가 가장 중요한 클럽이라는 평가도 있을 정도다. 명실공히 아르헨티나 국민 클럽인
보카 주니어스보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