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클라우스 킨스키 Klaus Kinsk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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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니콜라우스 카를 귄터 낙신스키 Nikolaus Karl Günther Nakszyński |
출생 | 1926년 10월 18일 |
[[단치히 자유시| ]][[틀:국기| ]][[틀:국기| ]] 소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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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1년 11월 23일 (향년 65세)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캘리포니아 주 라구니타스-포레스트 놀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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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배우 |
활동 | 1948년 ~ 1989년 |
자녀 |
폴라 킨스키 나스타샤 킨스키 니콜라이 킨스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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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인 배우.2. 생애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끼어있던 도시인 단치히 자유시의 소포트에서 폴란드인 약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상당히 궁핍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집주인이 어머니에게 성관계를 요구하자 화가 난 아버지가 집주인에게 폭행을 가했기 때문에 가족들은 몇 없는 살림살이를 들고 거리로 나왔고 킨스키는 공공보육원에 보내졌다. 그 후 구두닦이, 시체 운반 같은 험한 일을 전전해 살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성격이 좋지 못했는데 금고를 털기도 했으며 학교에서는 선생님을 폭행하고 도망치다가 체포되기도 했다.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군 육군 사병으로 징집되었으나, 전쟁 후기에 탈영을 해 사형선고를 받았고, 그러자 또다시 탈옥해 총에 맞아 체포됐다. 네덜란드에서 영국군과 전투 중 사로잡혀 포로가 되기도 했다.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돌아왔을때는 부모가 모두 전쟁중에 연합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배우 일을 시작한 뒤로 무려 135편에 달하는 작품에 출연하였다. 그가 출연작을 선택하는 기준은 언제나 출연료였다고 하며 일본 포르노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과 일한 적이 많다.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작품 《 석양의 건맨》에서 리 밴클리프와 벌인 신경전 장면[1]은 영화사 명장면 가운데 하나로 꼽히며 영화 《 위대한 침묵》에서도 악당으로 나왔다.
3. 성격
원래 배우들이나 연출자, 감독들 중에서는 악역으로 나왔어도 실제로는 선량하고 점잖은 경우가 많다. 영화 상에서의 배우가 연기하는 광기와 실제 배우의 모습은 다르니까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킨스키는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그는 뛰어난 연기력과 별개로 막장스럽고 모난 성격으로 인해 연예계에서 평판이 최악이었다. 특히 《 아귀레, 신의 분노》 촬영 내내 헤어초크 감독과 싸우지 않은 날이 없었다. 밑의 예시들은 이 영화의 제작 당시에 있었다고 하는 그의 기행들이다.
- 부하를 혼내는 장면을 촬영할 때 단검으로 부하 역을 맡은 배우의 머리를 내리치는 장면에서 진짜로 너무 세게 내리치는 바람에 배우가 다쳤다.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지 철로 된 투구가 움푹 패였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이 배우는 촬영기간 동안 킨스키를 싫어했다.
- 중간에 영화를 그만두겠다고 하자, 제작비에 전 재산을 쏟아 부은 헤어초크 감독은 그에게 총을 겨누면서 처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를 죽이고 자신도 죽겠다고 협박했다. 헤어초크 본인은 이 일화가 사실이 아니라며 부정했다. 하지만 일행 중에 총을 가진 사람은 자신 뿐이었다는 이야기를 조심스레 덧붙였다고 한다. 헤어초크 본인의 다큐멘터리 《나의 친애하는 적》을 보면 실제 사건은 이랬다. 킨스키가 광분하며 촬영장을 떠나려 보트를 타자, 헤어초크가 그 뒤에 대고 말하길 "내 텐트에 권총이 하나 있는데, 당신이 여기를 떠나면 난 그 물건을 당신에게 쏠 것이고 마지막 남은 한 발로 내 머리를 쏠 테요."라고 통보했다고 한다. 이에 아무리 또라이인 킨스키라도 이 정도까지 협박하자 바짝 쫄아서 연기를 계속했다고 한다.
한편 킨스키의 말에 따르면, 위대한 피츠카랄도 촬영 당시 헤어초크가 완전히 자제력을 잃고 엑스트라들에게까지 함부로 대했고, 심지어 눈에 띄는 동물들을 모두 잔인하게 학대했다고 한다. 퐁고 강 급류에 라마를 집어넣어 익사시킨 적[2]도 있다. 한 번은 킨스키를 그렇게 만들어서 급류에 떠밀어 보낸적도 있다고도 한다. 일단 무사히 살긴 했다. 하지만 킨스키가 워낙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라 그의 말을 어떻게 믿을지, 얼마나 믿어야 할지 의문이다.[3]
특히 촬영장에서 킨스키는 본인의 다혈질적인 성격을 감추지 않은 덕에, 감독 본인은 물론 다른 배우들이나 제작진들과의 관계 또한 원만하지 못했고 그를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한 번은 촬영 중에 킨스키의 민폐가 심해지자 원주민 역 배우로 분했던 현지 원주민들이 킨스키에게 화가 폭발해 헤어초크 감독에게 "저 사람, 죽일까요?"라고 물어 왔다고 한다. 이때 원주민들은 헤어초크 감독을 킨스키보다 더 무서운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킨스키가 매일같이 화를 내는 반면 헤어초크 감독은 그 꼴을 매일 보면서도 꿈쩍 하나 안 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화 내는 놈보다 그 꼴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있는 놈이 더 무서웠던 것. 어쨌든 이 질문에 헤어초크 감독은 "영화를 촬영해야 하니 지금은 안 됩니다"라고 답했다. 물론 영화 촬영이 끝나고도 킨스키는 죽지 않았지만, 헤어초크 역시 킨스키한테 악감정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 때 원주민 배우들을 말린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킨스키와 헤어초크 이 두 사람이 얼마나 골 때리는 콤비였는지 단편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
하지만 본인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 헤어초크의 촬영 과정도 킨스키의 발광 못지않게 배우들과 제작진에게는 말 그대로 큰 고난이었다. 당시 헤어초크는 진짜 남미 페루의 정글에 영화 제작팀을 끌고 들어가서 촬영을 하였는데, 장소가 장소인지라 촬영장도 막장이어서 벌목꾼 한 명이 활영 도중 독사에게 물려 다리를 절단했을 정도였다. 덕분에 보상비로 10년 치 벌목비를 줘야 했는데, 이 난리는 예고에 불과했다. 그 다음부터도 사고가 잇따랐는데, 촬영 당시 현지 원주민들이 아닌 다른 원주민 부족이 촬영 현장을 습격하여 부상자가 발생하는가 하면[4] 스태프 6명을 태운 비행기가 산에 충돌하여 비행기에 탑승한 인원이 전원 사망하기도 했다. 그나마 이건 보험도 있고 했지만 두둑한 보상금도 따로 내줘야 했다. 이런 사고 말고도 영화 제작도 난항을 맞아서 주인공 피츠카랄도 역을 맡기로 한 배우는 몇번이고 갈렸다.[5] 참고로 이 《위대한 피츠카랄도》의 내용은 배가 산으로 가는 영화였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배를 산으로 끌고가서 산을 넘어버리는 내용이다. 당연히 스탭들이 배를 산으로 끌고가야 했기에 이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촬영을 끝내고 나서 하나같이 감독에게 치를 떨기도 했다.
- "위대한 피츠카랄도" 예고편
이하는 킨스키와 헤어초크와의 신경전에 관련된 일화.
- 킨스키는 주기적으로 헤어초크에게 전화를 해서 독설을 퍼부었다. 특히 그의 연기력을 감독이 지적하면 감독과 제작진들의 면전에서 입에 흰 거품이 나도록 독설을 하였다. 다만 이와 별개로 감독의 지적을 받아들여 연기를 수정했다.
- 그런데 헤어초크도 만만치 않았다. 헤어초크는 겉으로는 무덤덤하게 대응했으나 실제로는 킨스키의 계속된 독설에 화가 치밀어 그의 집을 불태울려고 가솔린이 가득 담긴 통을 가지고 그의 집까지 찾아내서 갔으나 '킨스키의 개'가 무서워서(...) 실행에 못 옮겼다고 한다.
저렇게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면서도 《아귀레, 신의 분노》에서 시작된 헤어초크와의 인연은 결국 그 뒤로 《보이체크》, 《노스페라투》, 《위대한 피츠카랄도》, 《코브라 베르데》 등을 같이 작업하면서 15년간 계속 이어진다. 킨스키가 사망한 뒤 헤어초크 감독은 애증이 많았던 그를 기리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인 나의 친애하는 적 (My Best Fiend)를 만들었다.
자녀들 중에서 배우가 된 자녀는 딸 폴라 킨스키, 나스타샤 킨스키, 아들 니콜라이 킨스키[6]이다. 폴라와 나스타샤는 빼어난 미모에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야성적인 분위기가 더해져 독특한 매력을 발산했다. 특히 나스타샤는 8-90년대를 풍미하던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우였는데 무보수로 비단뱀을 감고 찍은 누드로도 유명하다. 나스타샤 킨스키의 대표작으로 《 테스》[7], 《 캣 피플》 등이 있다. 하지만 킨스키는 가족들과도 관계가 파탄나서 3번의 결혼 모두 이혼으로 끝났고 자식들도 그를 미워하여 [8] 의절하고 살았기에 그의 장례식에도 참석한 가족이 아들 니콜라이 킨스키 밖에 없을 정도였다. [9]
니콜라이 킨스키는 영화 《 클림트》에서 클림트와 친했던 화가 에곤 실레 역을 맡았는데, 실제 실레의 모습과 놀랄 만큼 닮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유작으로 감독과 각본, 주연까지 맡은 파가니니(1989)에서도 그의 막장인 성격이 드러나 배우들이 촬영하다가 크게 다투었고 킨스키한테 치를 떨며 같이 하기 싫다며 그만뒀고 여배우인 토스카 다퀴노는 실제로 연기하면서 그에게 멍이 들도록 맞아서 다퀴노도 화가 나 욕을 퍼붓고 폭행으로 고소한다며 경찰서에 가려고 촬영장을 나가려 한 걸 제작자가 죽어라 애원하여 겨우 참았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한 시대를 대표했던 탄탄한 경력의 스타로 보이겠지만 아래 논란으로 이미지가 크게 하락했다.
4. 친딸 성폭행 논란
사후 22년이 지난 2013년, 친딸 폴라 킨스키가 아버지가 자신을 5세~19세까지 성적으로 학대했다고 증언했다. 폴라는 아버지를 대 배우라고 존경해하는 사람들 앞에서 늘 마음의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나스타샤 킨스키 역시 이복 언니인 폴라의 주장을 두둔하고 자신도 성폭행까지는 아니라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고 증언하였다. 나스타샤의 아버지가 폭군이었다는 발언 내용으로 볼때 전형적인 가정폭력범으로 의심된다. 나스타샤는 독일 신문 『빌트』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4 ~ 5세였을 당시 클라우스 킨스키가 도망갈 수 없을 정도로 껴안았고 성폭행하려 했던 사실을 밝혔다. 실제로 킨스키는 1950년대에 여성을 스토킹하고 교살하려다 경찰에 체포당해서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이때 반사회성 성격장애를 진단받았다고 전해진다. #폴라의 자서전과 별개로 이복 동생 나스타샤의 증언도 있고, 상술한 과거의 전적들로 폴라의 주장이 설득력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 이게 사실로 밝혀질 경우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겠다. 고인드립은 덤. 무엇보다 실제 영화상의 광기에 찬 모습과 《 아귀레, 신의 분노》에서 딸과 결혼하겠다고 외치던 광기에 찬 모습이 오버랩된다는 반응도 있다. 100만 달러 저예산 B급 호러물인 《크롤 스페이스》(1986)[10]에서 변태적인 집주인으로 나와 여성 세입자들을 몰래 훔쳐본다든지 스릴러 《줄리의 공포》[11]에선 목욕하고 나온 친딸이 대충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전화를 하는데 괴상한 눈으로 쳐다보던 아버지 배역같이 꽤나 변태적인(물론 영화상에서 연쇄살인 범인이 아니긴 했지만) 연기를 보여서 이 사건 보도를 보면서 영화상 그 연기들이 그럼....? 놀라던 사람까지도 있다고.
실제로도 크롤 스페이스 촬영때도 민폐를 워낙 끼쳐서 감독인 데이빗 슈모엘러는 회고하길
- 촬영 들어간지 사흘만에 킨스키가 제작진들이랑 주먹다짐을 여섯 번이나 시작했기에 정말로 싸울뻔했다.
- 영화상 옷이 마음에 안든다고 밖에 나가 옷을 여러벌 사고 영화사 측에 옷값을 청구하고 옷을 가져갔다.
- 조연여배우들에게 자꾸 집적거려서 여배우들이 화내서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 컷! 액션! 이란 말을 하면 쌍욕을 하면서 신경질을 부려댔다. 본인은 이런 말이 싫다나?
이 때문에 현재 독일어권에서 클라우스 킨스키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지미 새빌에 대한 영미권 사람들의 인식과도 비슷해진 상황이다. 물론 성범죄의 스케일로만 따지면 지미 새빌이 클라우스 킨스키보다 훨씬 심하다. 자세한 건 지미 새빌 성범죄 사건 문서 참고. 또한 대한민국 기준으로는 독일판 조두순으로 칭하게 될 수도 있다.
5. 출연작
5.1. 영화
- 1962년 누구를 위한 반역인가 - 유대인 난민 킨들러 역
- 1967년 황야는 통곡한다 - 미겔 가르시아 역
- 1972년 아귀레, 신의 분노 - 아귀레 역
- 1979년 노스페라투 - 드라큐라 백작 역
- 1982년 위대한 피츠카랄도 - 피츠카랄도 역
[1]
술집에서 밴클리프가 도발하려고 일부러 킨스키의
멜빵에 성냥을 긋고 담배를 피우려는데 분노한 킨스키는 담뱃불을 꺼버리고 서로 노려보며 신경전을 벌인다. 이 영화의 독일판 포스터 일부는 클라우스 킨스키가 자국 배우라서 그런지 비중이 있는 것처럼 표현한 포스터들도 있다.
1
2
[2]
지금은 그랬다간 동물보호단체에게 고소를 비롯하여 지독하게 당한다. 동물보호법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3]
실제로 킨스키는 후술될 친딸 성폭행 논란을 제외하고라도, 당시부터 베를린의 극장에서 일하다가 모난 성격으로 인해 매니저와 대판 싸우고 해고되었다. 이 극장 외에 다른 회사에서도 일했으나 똑같은 문제를 일으켜 해고당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킨스키는 정신병원에서 공식적으로
반사회성 성격장애 진단까지 받았던 바 있고, 자살 시도도 2번이나 했었을 정도로 정신적 문제가 심각했다.
[4]
참고로 헤어초크 감독은 경찰에 신고하여 경찰이 그들에게 보복을 하면 사태가 더 악화된다고 하여(당시 페루에서는 원주민에 대한 멸시가 굉장해서 경찰에 신고하면 경찰이 이를 구실로 원주민을 무자비하게 소탕하는데 이 과정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할것이 뻔했다.) 부상자를 치료하는 선에서 일을 끝냈다고 한다.
[5]
처음 주인공 역에 캐스팅 된 건
잭 니콜슨이었지만 그는 제작 환경을 보고는 거절하며 촬영장에 나타나질 않았고, 다음 대타인
워렌 오츠 역시 페루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하차. 그 또 다음 대타였던
제이슨 로바즈는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아메바성 이질에 걸려 병원에 입원. 그 뒤로도
믹 재거, 마리오 아도르프 등이 뒤를 이었지만 결국 모두 하차했고 원래 배역 중에 남아 있던 사람은 여주인공 역을 맡은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한 사람 뿐이었다고 한다.
[6]
폴라와 나스타샤, 니콜라이는 모두 어머니가 다른 이복 남매이다.
[7]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작품.
[8]
이미 생전에 클라우스가 자서전에다 거짓말 했다고 나스타샤가 소송을 걸었을 정도다.
[9]
당시 니콜라이는 미성년자였다.
[10]
여담인데 이 영화는
불가사리 시리즈 1편을 감독한 론 언더우드가 조감독으로 참여했다. "굿바이 뉴욕 굿모닝 내사랑"(1991)으로 흥행과 평가에서 대박을 거뒀지만
에디 머피 주연 플루토 내쉬를 감독하여 1억 달러 제작비에서 10% 벌어들이며 쫄딱 망해버려 이후로 주로 티브이 영화전문으로 일하고 있다. 음악은
드레스드 투 킬로 알려진 피노 도나지오.
[11]
삼부비디오에서 83년에 이 제목으로 비디오를 내놓았는데
윤석렬 대통령 아내 관련으로 엮이며
비디오 표지가 넷상으로 스캔된 게 풍자처럼 퍼지기도 했다...원제는 Schizoid. 1980년작으로 35만 달러짜리 저예산 스릴러 영화로
캐논 그룹이 배급을 맡았다.
크리스토퍼 로이드가 조연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