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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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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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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2년 7월 14일 | ||
오스트리아 제국 빈 | |||
사망 | 1918년 2월 6일 (향년 55세)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빈 | |||
국적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
직업 | 화가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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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묘소 | 히싱 묘지 | |
사조 | 상징주의, 아르누보 | ||
배우자 | 에밀리 플뢰게 | ||
세레나 리더너 | |||
콘수엘라 후버 | |||
마리아 짐머맨 | |||
마리아 우치츠카 | |||
자녀 | 1남 | ||
종교 | 가톨릭 | ||
제자 | 에곤 실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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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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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대표작 ' 키스' (1907년 작품) |
19세기 말 ~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한 화가이자 상징주의과 아르누보스타일의 대표적인 작가. 작품은 주로 초상화와 누드그림, 장식적패턴과 금색을 사용한 화가로 유명하다.
미술이 격동하던 19세기 말에 장식 회화가로 교육받았으나 곧 건축 장식 회화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사실적인 회화에도 능하였으나 점점 더 평면적이지만 장식적이고 구성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화풍뿐만 아니라 대학 회화라고 불리는 일련의 문제작들에서 특유의 반항적/회의적 주제 의식을 보여줘 큰 비난과 함께 명성을 얻은 바 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서 모더니즘 계열의 미술이 빠르게 기존 회화 경향을 대체하였고, 클림트 이후의 작가들은 더 이상 클림트와 같은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된다. 자신만의 독창적 화풍으로 확고한 위상을 구축했지만, 그 이전 전통과도 다르면서 훗날 미술과도 다른, 고립된 섬과 같은 위치에 있는 작가.
2. 생애
14살 때인 1876년에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한 이후 장식 회화가로 교육받았다. 1883년에 졸업하고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 동료인 프란츠 마치와 함께 공방을 세우고, 이후 건축물 벽면의 회화 작품 등을 제작한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지극히 전통적인 사실적 화풍을 보여주었다. 이후 초상화나 우의화 등 장식과 독립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점점 자신만의 화풍을 발전시키게 된다.19세기 말에 영국, 프랑스 등에서 벌어진 인상파와 같은 진보된 아방가르드 미술 운동들을 접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낙후된 오스트리아의 미술 경향과 미술 협회의 보수성에 반발하게 된다. 이후 반아카데미즘 운동을 하면서 1897년 빈 분리파(제체시온;Secession)를 결성하고 아르누보 미술의 거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후 구스타프 클림트는 동료인 마치와 함께 빈 대학교 대강당의 천장 패널화를 의뢰받게 되는데, 그가 의뢰받은 부분은 대학의 주요 학문인 '철학', '의학', '법학'을 상징하는 그림들이었다. (마치는 '신학'을 의뢰받았다.) 클림트가 그린 3점의 대학 회화는 역시나 화풍이 기존 건축물의 패널화와 달랐지만, 특히 그 그림이 담고 있는 주제 때문에 관계자들을 격분시켰다. 마치 인간이 우주 이치를 알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존재이며(<철학>), 인간은 삶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고(<의학>), 정의보다는 고통과 무질서가 더 가까이 있는 것(<법학>) 처럼 해석되는 그림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클림트의 학력을 문제 삼으며 그에게 너무 벅찬 주제라 비난하였고 특히 빈 대학교 교수진 87명은 <철학>을 반대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지만, 교육부 장관 리터 폴 하르텔 박사와 같이 클림트를 지지한 사람도 있었다. 빈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철학>은 결국 훗날 제4회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클림트 예술의 가치를 입증해 주게 된다.
그러나 패널화는 끝내 대강당에 걸리지 못했고, 클림트는 이 그림들을 새로 교정하라는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리고 국가로부터 받았던 제작비는 전액 되돌려주고 ‘학부 회화’ 최종판을 자기 소유로 하였다. 하지만 훗날 나치에 의해 퇴폐 미술이라 낙인찍혀 압류당했으며, 전쟁 중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세 작품을 찍은 흑백 사진은 아직 남아 있다. Klimt University of Vienna Ceiling Paintings (위키백과 영어 문서)
학부 회화 사건 이후 클림트는 더 이상 공공 작품을 의뢰받지 않았으며, 기하학적이고 지적인 추상 양식으로 변모해 갔다. 그리고 이탈리아 라벤나의 모자이크와 장식적인 패턴, 금을 사용하여 눈에 띄는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켜 나간다. 덕분에 <키스>(1907~1908), <다나에>(1907~1908) 등 이른바 ‘황금 시기’의 대작을 잇따라 탄생시키며 생의 말년을 화려하게 장식하게 된다.
그 뒤 오스트리아 빈 알저보르슈타트 병원에서 55세를 일기로 스페인 독감의 증상이 악화되어 뇌경색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3.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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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 유디트 I |
4. 기타
- 그가 후원했던 학생 중에는 에곤 실레나 오스카 코코슈카 같은 거장들도 있는데, 이들의 작품과 클림트의 작품을 비교해 보면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 클림트의 유명 작품 중 하나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은 한때 세상에서 가장 비싼 미술 작품이었다.[1][2] 클림트가 자신의 후원자이기도 한 아델레에게 초상화를 그려서 선물한 것으로, 아델레가 사망한 후 남편이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가 나치에게 몰수당했고, 남편은 사망할 때 조카에게 그림을 상속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나치 때문에 부모를 잃고 미국으로 도피했었던 조카 마리아 알트만(Maria Altmann)은 전후 그 그림을 소장한 오스트리아 정부에게서 반환받기 위해 길고 고통스러운 소송을 걸었고, 결국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은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옆의 노이에 갤러리에[3] 소장되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우먼 인 골드가 2015.07.09 개봉하였다. 마리아 배역으로는 헬렌 미렌이 출연했다.
-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지배할 당시에 아돌프 히틀러의 명으로 그의 작품들도 압수당했는데, 이때 그의 그림들이 히틀러의 맘에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태워지거나 쓰레기장에 버려졌다고 한다.
- 'Never leave VIENNA without a KISS'라는 문구가 유명하다.[4] 클림트의 작품 ' 유디트(Judith)'는 자주 국외 전시 되지만, 'kiss'는 단 한 번도 외국으로 대여된 적이 없는 작품이니 빈에 방문할 일이 있으면 벨베데레 궁전으로 가서 꼭 보도록 하자.
-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칸베 마모루가 클림트 빠순이 기질이 좀 있는 편, 그가 연출, 감독을 맡은 엘펜리트, 하늘의 소리 오프닝에 클림트의 미술 작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야기 노리히로의 연재작 중 하나인 클레이모어에 등장하는 조직의 수장인 림트의 어원도 바로 이 사람.
- 영화 '우먼 인 골드(Woman in Gold, 2015)'는 클림트가 금색 시기에 그린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 초상에 관한 영화이다.
- 동양의 그림과 장식으로 응접실을 꾸몄던 것이 공개됐다. #
[1]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위키백과 영어판)
[2]
우리나라에서는
종근당 펜잘의 표지에 있는 명화로 잘 알려져 있는 작품.
[3]
에스티 로더 가문이 소유한 미술관이다.
[4]
https://musiciansutahsymphony.com/the-musical-journey-pt-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