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코무로 마코/결혼소동/반응
1. 개요2. 아키시노노미야 家의 실상과 그림자
2.1. 아키시노노미야 家에 대한
언론플레이2.2.
아키히토 천황의 양위 발표와
궁내청-후미히토 내외-주간지의 실수2.3.
코무로 마코의 결혼 문제를 통해 아키시노노미야 家의 이미지가 허울에 불과함이 밝혀지다2.4. 자식은 부모의 거울2.5.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의 학창시절을 통해서 본, 후미히토 내외의 황족관2.6.
키코 비가 잘한 것은 없다2.7.
후미히토의 문제점2.8.
후미히토가 파탄인격이 된 이유
3.
후미히토 일가와 너무나 다른
나루히토 家4. 그리고
키코 비5. 여파6.
일본의 여론 변화와
일본 황실의 미래[clearfix]
1. 개요
아키히토 덴노의 맏손녀인 아키시노노미야 마코 공주의 결혼 소동.1990년대부터 이어진 일본 황실의 황위 계승을 둘러싼 암투의 실상이 까발려지는 계기가 된 사건이자, 아키히토 덴노의 양위 발표가 있게 한 배경을 짐작케 한 금세기 일본 황실 최대 논란 중 하나이다.
2. 아키시노노미야 家의 실상과 그림자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는 후미히토 내외의 교육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아키시노노미야 일가가 실제로는 실속은 없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진실을 일본 국민이 모두 알게 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는 실제로 달린 댓글의 내용이기도 하다.2.1. 아키시노노미야 家에 대한 언론플레이
2006년 9월 6일, 일본 황실의 유일한 후계자(남자)인 히사히토([age(2006-09-06)]세)가 탄생한 후 후미히토, 키코 비, 마코 공주, 카코 공주는 차남 일가인데도 황태자 일가보다 엄청난 스포트라이트와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 황실은 물론이고, 국민들까지 우익이 아니더라도 후계자 문제를 해결한 후미히토 일가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우익 주간지들은 마치 잘 만났다는 듯 황태자 일가에 대한 비난조의 기사를 쏟아냈다. 히사히토 탄생 이전부터 후미히토 내외를 우대했던 궁내청도 훨씬 노골적으로 황태자 부부의 공무에 여러 가지로 훼방을 놓는 것[1]을 넘어서 대놓고 엿을 먹이는 등 앞장서서 비난을 일으켰다.여기에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도 후미히토와 키코 비를 총애하니, 히사히토가 탄생하고 약 10년 간은 후미히토 일가의 세상이었다.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의 공무조차 주간지와 기사는 "황실의 의지를 잇는다"는 둥의 묘사를 했고, 댓글도 칭찬 일색이었다. 부모 덕에 두 딸도 이미지에 덕을 본 셈이었다. 이런 추세는 아키히토 덴노가 양위 발표를 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히사히토 탄생 이후 일본 사회에는 후미히토 일가를 " 일본 황실의 미래를 짊어진 중요한 가문"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현실을 보면 이런 인식은 당연하다. 궁내청과 주간지의 태도도 황태자 일가를 들러리로 취급했다. " 나루히토 황태자가 후미히토에게 황태자의 자리를 넘겨야 한다"는 기사가 나왔을 정도였다. "후계자도 없고, 아내도 아픈데, 굳이 황태자일 필요가 있겠냐"는 견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 그야말로 황태자 일가는 사면초가였고, 후미히토 일가는 날개를 단 상태였다. 궁내청과 주간지, 우익들은 마치 입을 맞춘 듯 후미히토 일가를 공무에 상당히 열심인 부부와 공주의 정석처럼 보이는 미인인 두 딸, 거기에 후계자(아들)까지 있는 완벽한 황족 가문의 이미지로 구축해 나갔다. 그리고 원래부터 야심 많던 후미히토와 키코 비도 이들의 움직임을 제지하지 않고 이들이 만든 분위기에 편승했다.
즉, 히사히토 탄생 이후부터 궁내청&주간지&우익이 힘을 합해 적법한 황태자인 나루히토를 무시하고 후미히토를 황태자인 것처럼 떠받들었고, 후미히토 내외는 이를 방관하고 오히려 즐겼던 것이다.
실제로 아키히토 상황이 덴노이던 시절에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가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 황태자비를 대하던 태도를 보면, 히사히토 탄생 후 황실 서열이 얼마나 심하게 흔들렸는지 잘 알 수 있다. 양위 발표 후 후미히토가 주최했던 파티에 천황 부부와 나루히토 내외가 참석한 적이 있었을 때, 기사에서는 " 히사히토 탄생 후 황실의 균형이 흔들렸다. 황후는 그 흔들린 균형을 다시 잡기 위해 두 아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것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대놓고 "황후가 황실의 서열을 다시 잡기 위해 출동했다"고 쓴 셈이니,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보인다. 2004년 인격 부정 발언 때 나루히토를 후미히토가 공개적으로 비난한 후, 황태자 내외는 후미히토가 주최한 파티에는 전혀 참석하지 않았다.
사실 황위 계승은 전임 국왕의 사후에 후계자가 계승하는 것이 원칙이다. 양위를 하더라도 굉장히 불가피한 정치적인 이유가 있어야 했으며(대표적으로 조선의 단종- 세조), 그마저도 무력인 경우가 대다수였다. 오히려 평화로운 양위는 전 세계의 황실 역사를 통틀어 많은 편이 아니다.
특히 동아시아 황실 내지는 왕실에서는 아키히토- 나루히토처럼 화목하게 이루어진 양위는 별로 없고, 대개는 쿠데타였다. 당장 조선 건국부터 살펴보면 부모자식형제 간에 칼부림이 많았다. 태종- 세종대왕처럼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이는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정말로 보기 드물었던 평화로운 양위였다. 오히려 국왕이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하면 입에 게거품을 물고 반대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특히 선조- 광해군 관계는 조선 역사상 가장 많은 양위 파동을 일으켰는데 이러한 잦은 양위 파동은 선조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한 쇼였다는 게 현대의 평이다. 왜냐하면 일단 선조가 양위를 언급하면 전쟁 중임에도 하던 일 다 멈추고 신하들은 선조를 말리며 자신의 충심을 보여야 했고, 광해군 역시 쉴 새 없이 대궐 뜰에 엎드려 "어명을 거두어 달라"며 빌어야 했다. 그리고 그 태종과 세종도 처음 양위를 하려 했을 때는 충녕대군이 몇 번이나 "명령을 거두어 달라"며 부왕을 만나러 왔다갔다 했다.
이 정도로 양위는 웬만해서는 쉽게 발생하지 않는다. 최근 들어 유럽 왕실에서 연이어 후계자에게 양위하겠다는 발표가 줄을 이었지만, 역사적으로 거기 역시 흔한 일은 아니다. 이쪽은 왕실의 이미지를 젊게 유지해 국민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어느 국왕의 말마따나 영국의 찰스 3세 사례도 있고(...) 하물며 유교적 가부장제 가풍이 강한 동아시아 황실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무엇보다 현재 천황은 정치적 실권이 전혀 없는 상징일 뿐이다. 아키히토가 아베 신조 총리의 개헌에 제동을 걸기 위해 양위를 발표했다 한들 잠깐에 불과하다. 이를 아키히토가 모를 리가 없다. 아키히토는 일전에 야마모토 타로 의원이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문제에 대해 적은 편지를 자신에게 건넸을 때, 그 의원의 안전을 위해 그 자리에서 읽지 않고 바로 시종에게 건넸다. 이런 현명한 대응을 즉각 할 정도의 아키히토가, 양위 발표가 총리의 개헌에 미치는 효과가 얼마일지 전혀 몰랐을까? 언론에서는 "총리의 개헌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그 목표가 궁극적이라고 보기에는 양위의 효과는 지나치게 일시적이다.
따라서 개헌 제동은 꼽사리고, 실제로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봐도 된다. 아키히토의 본인 건강 문제도 예를 들 수 있지만, 현재 아키히토는 그가 30년 전 황태자 시절에 섭정을 할 때의 쇼와 덴노처럼 오늘내일 할 정도로 건강이 위험한 상태도 아니라, 수술을 한 차례 받은 사람치고는 상당히 건강한 편이었다. 여차하면 자신이 그러했듯이 장남 나루히토 황태자가 섭정하다가, 자신이 붕어하면 자동적으로 승계하면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생전 양위 발표를 했다. 이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루히토에게 황위를 물려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발동한 것일 수 있다. 자신이 죽을 때가 오면 마땅히 나루히토가 섭정을 하는 게 원칙이지만, 지금 황실의 세력 균형을 보면 그러지 못할 것 같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아키히토가 양위를 결정한 것은 "장남 일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봐야 한다. 아키히토는 작은며느리 키코 비에게 늦은 나이에 임신해 아들을 낳게 할 만큼, 여계 천황에는 매우 부정적이다. 만약 남계 계승을 부모자식 간의 정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면 양위는 필요 없었다. 자신이 죽은 후 그냥 원칙에 맞게 나루히토가 되든지, 아니면 권력 균형에 따라 후미히토가 되든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안정적인 남계 계승을 위해서라면, 엄밀히 말해 후미히토가 다음 천황이 되는 편이 훨씬 낫다. 나루히토가 천황인 이상 여성/여계 천황 논란이 언제라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의 양위 발표를 통해 일본 정부가 천황의 말을 거스르지 못한다는 것을 손수 보여주었다.
아이코 공주 vs 히사히토 구도의 차차기 황위 계승 논란이 일어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키히토는 아이코 공주의 아버지인 나루히토에게 양위를 결정했다. 단순히 장남이어서, 적법한 후계자여서가 아니라, 지금 자신이 비교적 정신이 맑을 때 양위를 해야 장남 일가도 지키고 황실의 서열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아키히토의 생각은 미치코 황후가 큰며느리 마사코 황태자비를 대하는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다. 미치코 황후는 양위를 위한 법 개정이 한창 있던 시기에 나온 주간지의 말도 안 되는 기사, 즉 "미치코 황후가 '마사코 황태자비보다 키코 비가 황후에 더 걸맞다'고 확언했다더라"라는 내용에 대항해, 심야에 교통 통제를 감안하고 마사코 황태자비를 만나러 동궁으로 갔다. 그 후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역대 황후에게 내려오던 양잠사업( 누에치기)을 전수했고 기사에 따르면 키코 비, 마코 공주, 카코 공주는 몇 번 왔지만 마사코 황태자비는 온 적이 없다고 한다. 자신의 명예총재 자리도 키코 비가 보는 앞에서 직접 마사코 황태자비를 옆으로 불러내 청중에게 인사를 시키는 파격적인 행보로 물려주었다.
이 3번째 사례만 봐도, 미치코 황후가 작정을 많이 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황후가 그렇게 직접 챙겨줘야 할 만큼 황실 서열이 엉망이었던 것이다. 만약 후미히토 내외와 궁내청이 황태자 내외를 차기 천황과 차기 황후로 인정하고 굽히고 있었으면, 황후가 직접 나서서 마사코 황태자비를 앞으로 불러내 인사를 시킬 필요는 없었다. 굳이 자기들이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황위 계승이 이뤄질 테니 말이다. 현직 천황과 황후가 직접 후계자 내외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만큼 서열이 무너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후미히토 내외는 히사히토(아들/후계자)도 있고, 궁내청과 우익이 자기들 편이니 천황 사후 그 뒤를 잇는 게 가능하다고 봤다. 또 그렇게 되고 싶어 했다. 궁내청과 우익 주간지도 후미히토 내외가 황태자 내외보다 더욱 적합한 후계자 집안이 것처럼 열심히 포장했다. 그러나 아키히토는 후미히토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으며, 미치코 황후도 키코 비를 자기 뒤를 이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천황 내외의 생각이 똑같았으니, 아키히토가 나루히토에게 양위를 하겠다고 하자 미치코 황후까지 마사코 황태자비를 공개적으로 밀어주는 것이다.
2.2. 아키히토 천황의 양위 발표와 궁내청-후미히토 내외-주간지의 실수
후미히토 일가에 위기가 닥친 원인은 기본적으로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이긴 하나, 사실은 아키히토의 생전 천황 양위 발표에서부터 낌새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때 아키히토의 양위 발표에 궁내청 차관이 나서서 직접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유례 없는 사태가 발생하였으며, 후미히토 내외는 영 좋지 않은 얼굴로 천황 내외와 슬하의 3남매의 저녁 식사 자리에 참석했다. 이를 보면 궁내청과 후미히토 내외가 나루히토 황태자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그러나 아키히토의 의견은 관철되었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까지 개헌 이전에 이 문제부터 해결하려 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적어도 아베 총리는 극우이기는 해도 나루히토를 황태자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2016 리우 올림픽 때 궁내청이 황태자 부부에게 한 짓에 대해 "궁내청이 한 번만 더 사고를 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었다는 말로 보아, 천황의 성향이 어떻든 아베 총리가 정석적이고 보수적인 관점에서 황실을 생각하고 있음이 보인다. 천황은 어디까지나 상징이기에, 천황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반드시 해야 하지만 정치 권력을 줘서는 안 된다는 관점이다. 참고로 극우들은 이러한 현 천황에 대한 상황을 일본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중대한 행위로 보고, 과거처럼 천황에게 상당한 수준의 정치 권력을 줘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뒤집어서 말하면, 그런 극우까지 자신들의 정치적 지지 기반으로 만들려면 천황에게 정치 권력은 주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에서 예우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아베 신조 총리는 개헌을 해야 하는 급한 상황에서도 아키히토 덴노의 의견을 받아들여 양위 문제부터 법으로 확실하게 못 박았다. 이를 통해 궁내청과 주간지가 저지른 실수를 알 수 있다.
- 첫째, 궁내청은 그들 자신의 인사권을 쥔 사람이 일본 총리라는 것을 망각한 채, 자기네들의 주장이 절대적인 법인 것처럼 행동했다. 아베 신조 총리가 극우고, 일본 정치 전반이 우익이다 보니, 자기들이 어찌어찌 하면 왕위를 빼앗아 자기들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아키히토가 나루히토에게 양위하겠다고 하자, 궁내청 차관이 반대했는데도 아베 총리는 반대 의사 한 번 없이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결국 아베 총리는 성향이 극우긴 해도 궁내청의 편은 아니었다.
- 둘째, 궁내청은 일본 총리라 할지라도 천황의 의견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2] 양위 발표는 아키히토가 정치적인 의사를 표명할 수 없는 입장에서 최대한 문제가 안 되게 총리의 개헌에 제동을 건 사건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속으로야 어찌 생각했건 겉으로는 불평하지 않고 천황의 말을 들었다. 궁내청은 본인들이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천황이 싫다고 하면 총리가 들을 수밖에 없음을 간과했던 것이다.
- 셋째, 결국 황실 문제는 천황의 의견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후미히토 내외도 생각지 못했다. 사실 아이코 공주의 여계 천황 즉위가 물 건너간 것은, 후미히토 내외의 야심보다는 천황 내외의 만세일계에 대한 집착이 근원이었다고 봐야 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여계 천황 논의를 하고 있을 때, 천황 내외가 후미히토 내외에게 아들을 낳으라고 무척 강요했고, 그에 따라 히사히토가 태어난 것이기 때문. 즉, 이미 여기서부터 황실의 큰 문제, 특히 황위 계승은 천황의 의견이 크게 작용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황태자 교체도 천황의 의사에 달려 있다는 소리다. 후미히토 내외와 궁내청은 바로 여기서 판단을 잘못했다. 아키히토가 누구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싶어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행동하지 않았던 것. 설사 아키히토의 의중을 정확하게 알았다 하더라도, 그건 또 그거대로 천황을 거스르는 짓이다.
-
넷째, 아키히토가 분명 가부장적이고 만세일계에 집착하는 인물임은 주지의 사실이나, 궁내청은 그에게 만세일계보다 몇 배로 중요한 것이 바로 일본 황실과 천황제의 유지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아키히토는 10대 초반
제2차 세계 대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본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겪으면서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천황의 존재가 당연하지 않은 시대임을 절감했다. (일례로 1969년
고쿄에서 일반 참하를 진행하던 도중 파칭코 구슬 테러를 당했고, 6년 뒤인 1975년에는 황태자 자격으로
오키나와를 방문하던 중에 화염병 테러를 당했다.) 재위 기간 동안 헌법의 문구 그대로 '일본의 상징'으로서 온몸으로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통해 천황과 황실에 대한 여론을 우호적으로 돌려놓았다. 반대로 말하자면 함량 미달의 천황 혹은 천황 일가가 저지르는 구설수나 일탈 행위로 인해 자신의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어 황실 폐지론이 들끓을 가능성 역시 충분히 고민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도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을 계기로 인터넷상에서 그런 현상이 벌어졌다. 후미히토가 일본 국민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도 후계자 교체를 고민할까 말까인 판국에, 후미히토 일가에 대한 여론이
언플빨로최정점을 달릴 때조차도 온갖 구설수와 추문들이 돌아다닌 데다가, 비장의 카드였던 히사히토마저도 나이를 먹어갈수록 구설수 제조기가 되고 있으니, 결국 미치코 상황후마저도 공공연히 아이코 공주의 여성 천황 등극에 전향적인 입장을 피력할 지경이 되었다. 혈통 논란이든 뭐든 어찌되었건 현재로서는 천황제를 존속시킬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방안이니까.
아키히토의 양위 발표가 있기 전, 일본에서는 '아키히토 사후 일본 황실에 감당 못할 내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있었다. 모 정치학자가 대놓고 '황태자는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황실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일본인 만큼, 결코 혼자만의 의견이라고 여길 수 없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아키히토가 지난 2백 년 동안 없었던 생전 퇴위라는 초강수로 나루히토에게 생전에 왕위를 물려주기로 직접 발표한 것은 아베 신조 총리의 행보에 제동을 거는 동시에 장남 일가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다.
또 큰며느리 마사코 황태자비가 아프고 남성 후계자가 없어도 나루히토 황태자는 어렸을 때부터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가 직접 곁에 두고 후계자로 키웠다. 그런 귀하게 키운 아들을 남성 후계자가 없다는 이유로 내침은 고대에도 없던 일이다. 거기에다가 자라면서 온갖 문제를 일으켜서 황실의 골칫거리였던 후미히토와 달리, 나루히토는 황실 등이 반대한 오와다 마사코와의 결혼을 끝까지 관철한 것 이외에는 별 문제도 없이 무난하고 모범적이었다. 마사코는 앞의 작은 결점들을 빼고는 딱히 차기 황후로서 결점이 없다. 공무도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고 계속 수행하는 중인 데다, 아들은 못 낳았어도 하나뿐인 아이코 공주를 수재로 키워냈다. 오죽하면 황태제로서 현재 정식 계승권 후보 내에 들어있는 후미히토(1순위 나루히토, 2순위 후미히토, 3순위 히사히토)가 천황 계승을 하는 건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도, 아이코 공주가 천황 계승을 함은 여계 승계의 문제 말고는 다른 반대가 안 나오는 지경. 더군다나 황태자 내외에 대한 온갖 비방이 이어지던 시절에도 '불분명한 병명을 대며 세금으로 놀고 먹는다.', '아들도 못 낳는다.'는 비방이었지 황태자비의 인격 자체를 비방하고 까내릴 만한 큰 소재가 없었다. 그에 반해 키코 비는 가장 호의적인 여론이 지배적이던 시절에서조차도 시종들에 대한 갑질 보도가 제법 되었을 정도로 인격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물론 이 때는 호의적인 여론이 있었으니 저 정도는 뭐 '공무에 바빠서 스트레스 해소할 데가 없으니 그럴 만도 하지.' 넘어갔었다.
실제로 양위 발표 후 궁내청과 후미히토 내외의 태도를 보면, 아키히토 사후 나루히토가 황위를 제대로 계승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나루히토가 천황에 즉위하기로 하면서 궁내청과 주간지는 뻘짓한 셈이 되었고, 그동안 아키히토 다음 천황을 노리던 후미히토 일가는 신세가 우스워졌다. 황위를 가져오기 위해 궁내청과 주간지까지 나서서 황실 공식 서열을 무시하고 행동했는데도, 결국 형의 아래를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양위 발표로 궁내청, 주간지, 후미히토 내외의 기는 확실히 꺾였다. 비록 황실 회의로 나루히토- 후미히토- 히사히토로 계승 순위를 정했지만, 황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우선 황태자 일가에 대해 궁내청과 주간지의 태도가 공손해졌다. 그리고 후미히토 일가의 황태자 일가에 대한 태도도 변화했다. 특히 키코 비가 히사히토의 계승과 마코 공주의 결혼에 대한 협력을 얻기 위해 황태자 일가와의 정양을 원한 사실이 이런 변화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2.3. 코무로 마코의 결혼 문제를 통해 아키시노노미야 家의 이미지가 허울에 불과함이 밝혀지다
1번과 2번을 통해, 후미히토 일가에 대한 이미지는 궁내청과 주간지와 우익들이 만든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가 터지지 않았으면, "허울뿐인 황족"이란 묘사는 안 나왔을 것이다.사실 후미히토 일가는 유일한 후계자( 히사히토)를 둔 집안이라서, 예전부터 문제가 있어 보여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궁내청과 주간지도 굳이 치부를 보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는 후미히토 이후 41년 만에 태어난 황족 남성인 히사히토에 대한 강력한 보도 규제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물 밑에서는 하나둘씩 문제가 쌓여가고 있었다.
우선은 히사히토에 대한 상당히 이례적일 정도의 강력한 보도 규제,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 유치원&부속 소학교 부정입학 의혹, 두 공주의 낮은 학업 성적과 수상쩍은 대학 입학, 마코 공주의 박사 학위 문제 및 카코 공주의 편법을 쓴 입학 등 3남매들의 학업 관련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게 시작이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황족이고, 공무도 열심히 하고, 무엇보다 미래에 천황을 배출할 거의 유일한 가문이니 짜증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참고 넘어갈 수 있었다. "차세대 천황의 누나들이니 구색 맞추기"라는 설명도 가능했다. 키코 비가 시종들에게 갑질을 하고 횡포를 부린다는 이야기도 잊을 만하면 기사에 나왔지만, 후계자를 낳은 어머니라서 비난 정도로 그쳤다.
그러나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는 차원이 다르다. 공주의 결혼은 일본인들이 그간 황실에 세금을 바친 자신들의 노고를 황실이 알고 있는지 평가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편이다. 신랑 및 그 집안의 면면을 통해 공주와 그 부모의 황족관(황족으로의 가치관)을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런데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에서, 후미히토 일가와 궁내청은 일본 국민을 배신했다.
본디 옛날부터 황족의 결혼은 국가적인 행사로 취급되었다. 공주의 남편감도 함부로 뽑지 않았다. 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면 황실의 인척이 되니, 권력에서 한 자리 할 수도 있었다. 옛날에야 백성들이 왕에게 절대복종하느라 세금의 관념이 없었지만 현대는 다르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세금으로 키운 공주가 좋은 집안의 좋은 남성에게 시집 가기를 원하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공주가 시집 가서 평민이 되더라도 품위유지비조로 지급되는 수 억 엔 가량의 지참금은 또 국민의 세금으로 나간다. 자신들이 번 돈이 함부로 쓰이는 것을 원하겠는가? 그렇기에 황족의 결혼은 국민의 의사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사실 대부분의 왕실들은 수백년 전 봉건시대부터 축적해 온 각종 재산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국민 여론에 쩔쩔매지는 않는다. 유럽 왕실들이 이혼녀를 세자빈으로 들일 수 있는 것은 사회가 개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개방적이고 관대한 것도 있지만, 어차피 여기에 들어갈 돈이 왕실 재산이기 때문에 이 재산 다 탕진하고 국민 세금에까지 손 댈 지경만 아니면 그냥 넘어가주는 것도 크다. 하지만 일본 황실은 과거부터 소문난 알거지 집안이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각종 기업 주식과 부동산을 황실 재산을 돌려서 제법 풍족했지만 (그나마도 황실 직계만 이렇고 방계들은 얄짤없었다.) 이마저도 2차대전 이후 연합군 사령부가 도로 없애버려 이제는 정말로 세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집안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후미히토 일가는 국민들의 의사를, 그것도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하게 "남편감을 좀 잘 선택하길 바란다"는 것조차도 완벽하게 무시했다. 일단 마코 공주가 황족의 수준에 어울리지 않는 상대를 골랐고, 그로 인해 황실의 체면이 구겨졌는데도 후미히토는 막지 않는다. 거기다 마코 공주는 그렇게 키코 비가 뭐라 해도 마음을 굽히지 않는 등, 굉장히 고집불통이다.
정치적 판단력이 뛰어난 키코 비의 경우에는 이 사단을 해결하기 위해 큰딸 마코 공주를 달달 볶아가면서 극렬히 반대를 일삼았지만 영 통하지 않는다. 5달 동안 부모와 언니의 사이에서 중재하던 작은딸 카코 공주도 결국 집안 싸움에 지쳐서 나 몰라라 하는 상황이고, 히사히토는 아직 어린 아이이므로 애초에 개입하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다.
이전부터 온갖 논란 때문에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집안이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막장으로 치닫는 참 아름다운(...) 집안이라고 자주 불렸지만, 진짜 막장 드라마를 찍고 있는 콩가루 집안이라는 게 여기서 밝혀진 상황.
2.4. 자식은 부모의 거울
8월 초의 어느 기사에 " 마코 공주가 이 결혼이 반대에 부딪힌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부모가 캠퍼스 커플로 결혼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왔다. 일단 대학 때의 인연으로 결혼한 건 사실이기는 한데, 후미히토와 키코 비가 정상적이고 건전한 연애로 결혼한 게 아니다. 후미히토가 대학 시절 만들어 키코와 함께 활동했다는 테니스니 자연문화연구회니 등의 동아리는, 실제로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하렘(...)이었다는 말도 있다. 후미히토는 마음에 드는 여학생을 보면 부하를 시켜 동아리로 데려오게 했고, 그렇게 모인 여학생들 중에서 끝까지 남은 인물이 키코였다는 것.당장에 1950년대 당시 일본 재계 20위 안에 드는 굴지의 그룹이였던 닛신제분의 회장인 아버지와 소에지마 백작가 영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재벌가 영애인 미치코 상황후마저도 평민 출신이라며 가혹한 이지메를 가했었다. 이미 신분제는 폐지되어 화족들은 평민으로 전락했고, 황족들조차 직계 가족이 아니면 황적이탈을 당해 구황족이 되면서 공식적으론 일본 사회에선 황족을 제외한 국민들 전체가 평민이였다. 그러나 '평민이여도 다 같은 평민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이들의 사상이었으며, 시대가 시대였던지라 울며 겨자먹기로 아키히토의 부인은 평민으로 들였지만, 그 다음 세대의 아들들은 구 화족, 황족 여성과 혼인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비화로는 후미히토가 가쿠슈인 대학 시절 가와시마 키코를 갖고 놀고는 버리려다가 키코의 아버지 가와시마 타츠히코(川嶋辰彦) 교수가 알고 아키히토 덴노에게 강력하게 항의하여
게다가 결혼 후에도 여자 좋아하는 그 버릇을 못 버려서, 키코 비가 마음 고생이 심했다. 히사히토가 태어나기 전인 2003년 태국 순방에 키코 비, 마코 공주(당시 초6), 카코 공주(당시 초3)와 함께 갔을 당시 태국인 여성과 바람을 피웠다는 게 밝혀지자, 사람들이 ' 아내와 어린 딸들도 같이 있는 상황에 저건 좀 너무하지 않냐'고 했을 정도였다. 이 때 키코 비는 그냥 참으며 공식 석상에서 내내 미소를 짓고 있어야만 했다.
당장 아버지인 후미히토부터 이런 사상을 갖고 있으니, 황족의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은 게 분명하다. 심지어 후미히토는 딸들에게 " 대학 시절에 상대를 만나는 게 좋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이것은 그렇다 쳐도, 그 대학이라는 게 후미히토는 그래도 괜찮은 집안 자제들이 모이는 가쿠슈인이었지만, 두 딸이 다닌 국제기독교대학은 평범한 일반인들이 다니는 대학이었다 "그래도 기독교대학이니 종교적인 색채나 분위기는 남아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설립 이념이란 시간이 지날수록 변질되고 퇴색되기 마련이다. 저 유명한 아이비 리그 대학교들인 하버드 대학교나 프린스턴 대학교, 그리고 예일 대학교는 원래 신학교로 출발했다. 그러던 것이 세상 학문을 가르치는 일반 고등 교육 기관으로의 전환과 전인 교육을 표방하기 시작하면서 그 설립 취지는 사라지고, 본래의 목적인 신학은 자취를 감추거나 따로 분리되어 나오는 과정을 겪었다. 현재 한국에도 수많은 미션스쿨들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율성을 보장하는 까닭에 별 의미는 없다. 이를테면 교단 차원의 단체국제결혼으로 유명한 통일교 계열의 선문대학교조차도 학생들의 연애 그 자체를 막지는 않는다. 아니면 독신 성직자 제도가 있는 불교계의 동국대학교, 금강대학교나 가톨릭계의 가톨릭대학교, 가톨릭관동대학교 등을 생각해보면 된다.
키코 비도 양친이 모두 살아 있고, 아버지가 저명한 경제학자에 두 사람이 사귈 때 가쿠슈인 대학 경제학부 교수였으며, 친정 가와시마 가문도 학구적인 교육자 집안이었다. 적어도 왕자의 비(妃)가 될 조건에는 집안 차원의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마코 공주가 간 국제기독교대학은 일반인들이 다니는 대학이었고, 상대가 일반인 기준으로도 꺼리는 집안임에도 자유연애 사상을 너무 별 거 아니게 받아들인 나머지 나라를 뒤집어놓고야 말았다. 어머니 키코 비와 여동생 카코 공주가 그렇게 말해도 마코 공주가 태도를 전혀 바꾸지 않는 점을 볼 때, 마코 공주는 폐쇄적인 환경에서 떠받들어지며 자라난 탓에 성격 자체가 고집이 세고 자기중심적일 가능성이 높다. 마코 공주는 초등학교( 가쿠슈인 초등과) 시절에는 "내가 누군 줄 알고!"라며 성질을 부린 적도 있다고 한다.
마코 공주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황실에서 태어난 진짜 황녀이다. 전 일본 국민이 보고 있는 황가의 황녀로써 인성과 품위는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지만, 궁내청과 아키시노노미야 일가가 엉터리로 키워놓았다. 그러니 마코 공주의 성격은 박근혜보다 결코 덜하진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일개 친왕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코 공주와 히사히토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3세대 황족들 중 서열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마코 공주는 아이코 공주와 히사히토가 태어나기 전인 10여년 간은 사실상 천황의 딸과 같은 예우를 받았다.
2.5.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의 학창시절을 통해서 본, 후미히토 내외의 황족관
후미히토 일가의 과거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면, 일반인의 눈에 좀 이해가 안 가는 점들이 눈에 띈다. 대표적으로, 어린 공주들을 수시로 공무에 데리고 다니던 것이다. 아주 어려서부터 공주 자매는 카메라 앞에서 능숙하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고, 성장하면서 점점 부모의 공무에 동반하는 일이 늘었다. 심지어 마코 공주는 미성년이던 고2 때 그동안의 관례[3]를 깨고 처음으로 후미히토의 인정을 받아서 단독 공무를 하기도 했다.두 공주의 학업 성적이 최하위였던 것은 아버지를 닮아서일 수도 있지만, 공부할 학창 시절에 지나친 공무에 시달린 탓도 있다. 참고로 할머니 미치코 황후와 어머니 키코 비는 우등생이었다. 외할아버지 가와시마 타츠히코 교수는 도쿄대학 출신에 가쿠슈인 대학 경제학부 교수를 지낸 저명한 경제학자이고, 외삼촌 가와시마 슈(川嶋舟)는 수의사이다.
황태자의 유일한 자녀인 아이코 공주가 방학 때가 아니면 부모의 공무에 동행하지 않고, 고등학생 시절에도 단독 공무가 없는 것과 비교할 때 매우 대조적이다. 어머니 마사코 황태자비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했고, 하버드 대학교는 미국 아이비 리그 대학들 가운데서도 학구적인 분위기로 유명한 학교이다. 괜히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란 외화가 등장한 게 아니다. 이러한 경험이 훗날 아이코 공주에게로 그대로 물려내려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미히토도 옥스포드 출신인데도[4], 자식들의 성적이 매우 좋지 않았던 건 선천적인 문제가 아닌 부모의 훈육 방식의 문제라고 할수 있다.
한창 공부하고 친구들과 놀아야 할 시기의 공주들을 매스컴에 자주 노출시키고,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체력 소모가 큰 공무에 수시로 데리고 다니는 것이, 아이의 성장과 발달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다. 운전을 하지 않더라도 차를 타는 것은 피로가 큰 일이듯이, 다수의 카메라 앞에 서야 하는 것은 매사에 자신을 신경 써야 하는 긴장되는 일이다. 게다가 공무는 단순히 손 한 번 흔들면 되는 것도 아니고, 공식석상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며 버텨야 한다. 최근 아역 배우도 아닌 아동 모델들의 노동에 대해 아동 학대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실제로 마코 공주가 학교 다닐 때 "쉬는 시간을 잠 자는 시간으로 보내야 하는 내 신세"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고 한다.
후미히토 내외가 자녀 교육에서 실패한 제일 큰 이유는, 다름아닌 자녀들의 성적 관리를 제대로 안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적 관리는 안 해주고 자신들의 지위를 올리기 위한 목적의 공무에만 열을 올리는 부모 밑에서, 공주 자매가 배운 것은 '황족이면 공무만 잘하면 된다.'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실제로 마코 공주는 결혼 논란 사건을 벌인 와중에도 공무만큼은 변함 없이 진지하게 임하고 있어서 궁내청이 "어느 의미로는 대단하다"고 평했으니, '황족으로서 해야 할 역할인 공무만 잘하면 사적으로 무슨 일을 벌이든 별다른 문제 없다'고 여겼을 공산이 크다.
후미히토 본인부터가 자신의 대학 진학 때 가쿠슈인과 궁내청이 머리를 써서 엄청난 특혜를 받았다. 반면 나루히토의 경우에는 가쿠슈인대학에 다니던 시절 우수한 성적으로 영국 유학을 다녀왔다고 한다. 즉 마사코 황태자비|아내만큼은 아니더라도 공부를 잘한 사람이다. 게다가 황족답지 않은 처신으로 망나니란 소리를 들었던 인물이지만 그에 대한 처벌 같은 것 없이 오히려 황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옹호 받던 사람이었다. 즉 황족의 자세에 대해 진지한 사람은 절대 아니다. 자녀들이 특혜로 대학에 진학해도 "황족이니까"로 전부 넘어갈 수 있다는 자세다. 그러나 아무리 황족의 임무가 공무라고 해도, 공주 자매는 후미히토 자신과 달리 여자로 태어났다. 언젠가 시집을 가면 결국 평민이 될 운명인데, 여성 미야케 허용 등의 법 개정으로 인해 평민으로 격하되지 않는다고 해도 여성 황족들은 천황으로 즉위하지 않는 이상 황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그런 딸들의 학업에 부모 양쪽 모두 신경을 안 썼다는 것은, 자녀 교육에 얼마나 무책임했는지를 드러낸다.
반면 후미히토의 5촌 당숙인 노리히토 친왕과 그 아내인 히사코 비는 딸만 셋을 두었는데, 딸들이 언젠가는 시집 가서 평민으로 살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철저하게 교육했다고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장을 보는 것 등까지도 일반인과 같이 해내지 못하면 곤란하다"고 했다고. 거대재벌 같은 상위 0.001% 최상류층 집안에 시집 가지 않는 이상은 웬만한 건 스스로 해야 한다. 더군다나 재벌가 부인들도 음식을 하거나 장 보는 정도는 혼자서 할 수 있는 편이다. 황자이자 후계자였던 큰아버지도 가쿠슈인 초등과 시절 사회 공부를 겸하여 생에 첫 쇼핑을 하러 백화점에 있는 장난감 매장을 방문하거나, 시장의 채소 가게에서 직접 계산을 하고 거스름돈을 받는 등의 교육은 했다. 물론 상당한 경호원들을 대동하였지만.
그 때문인지 노리히토의 차녀 노리코 공주와 3녀 아야코 공주는 별 논란 없이 순조롭게 결혼했다. 방탕한 성격으로 알려진 장녀 쓰구코 공주는 아직 미혼이긴 하지만 결혼할 상대가 있고, 그녀의 결혼에 대해서는 몇 년 동안 집안 단위에서 논의 중인 상황이나 어머니인 히사코 비가 반대를 하는 모양인지 결혼이 지연 중인 상태인데, 그걸 보면 집안에는 어느 정도 결혼 상대에 대한 기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리히토의 형이자 과거 황실의 망나니라고 불리던 토모히토조차도 슬하의 두 딸들에게 황족으로서의 여러 가지 교육을 제대로 하도록 독려하여 장녀인 아키코 공주가 자력으로 박사 학위를 땄을 때 엄청나게 좋아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토모히토 친왕은 아키코 공주가 유학을 떠날 때 "국민들의 세금으로 공부하는 것이니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라고 당부했고, 아키코 공주 본인도 황족이라서 특혜를 받았다는 등의 말이 나오는 것을 싫어해서 정말로 피땀 어린 노력 끝에 자력으로 학위를 딸 수 있었다.[5]
미치코 황후가 전부터 작은며느리 키코 비를 자녀 교육 문제로 불신했다는 말은, 어린 두 공주를 공부시키지 않고 공무에 데리고 다니는 것에서부터 기인했을 수도 있다.
2.6. 키코 비가 잘한 것은 없다
" 키코 비는 엄격하고 후미히토는 방임형"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렇다고 키코 비가 잘한 것은 없다. 후미히토가 방임형이라는 것은 아내에게 전부 일임했다는 소리기 때문에, 키코 비라도 잘 했으면 결혼 문제는 안 벌어질 수 있었다. 실제로 키코 비가 엄격하다는 소리는, 황족으로써의 자세를 엄격하게 가르쳤다는 게 아니라 "장녀니까, 언니니까."라는 말로 이것저것 간섭하고 규제한 것을 뜻한다.당초 키코 비가 황실로 시집을 온 것은 야심 때문이었다. 결혼 전 가와시마 키코는 학창 시절 후미히토 친왕을 만났는데, 그가 친왕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 때부터 평소 쓰던 말씨를 황실 특유의 말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황실로 시집 가리라고 마음 먹고 부단히 노력했다는 것. 황실을 위해 뭘 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게 아니고, 개인적인 신분 상승에 대한 권력욕으로 온 거다. 다만 학창 시절부터 후미히토와 그 주변의 친구로 포장한 부하들, 넓게 잡으면 황실에게 당한 피해를 생각했을 때, 자신에게 그만한 피해를 주고도 후미히토와 황실이 무책임하고 뻔뻔한 태도를 보이자 '힘을 손에 넣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는 "황태자비가 되어서도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설득을 듣고서야 황실에 시집 온 마사코 황태자비와는 정반대이다. 본래 오와다 마사코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외교관이 되었을 정도로 유능한 커리어우먼이었다. ' 일본을 남녀 차별 없는 세상으로 만들고 싶다'는 강한 포부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면서 외무성 내에서도 유능한 인재라고 호평을 받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계속 외교관으로 일하길 원했고, 그래서 7년이나(!) 나루히토 황태자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렇게 완고하던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황실에 시집 와서도 국내외 공무, 해외 순방, 왕실 외교 등의 활동으로 공헌할 수 있다"는 설득이었다. 그리고 궁내청은 깔끔하게 약속을 씹고(...) 원래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나루히토의 아내라는 이유로 엄청나게 핍박했고, 결국 한동안 칩거 상태에 들어가야 했다. 그 때문에 2004년 나루히토는 역풍을 무릅쓰고 "그동안 마사코 황태자비의 경력이나 인격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라며 상황을 폭로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얼마간 아키히토와 사이가 멀어졌었지만, 다행히도 ' 아이코 공주를 보고 싶으니 다 같이 오너라'라고 해서 화해했다고 한다.
키코 비가 두 딸을 공무에 극성맞게 끌고 다닐 때는, 아직 아이코 공주가 태어나기 전이었다. 아직 어린 공주 자매를 꽁무니에 데리고 다니며 계속 매스컴에 노출시킨 의도가 무엇이었을지 생각해 볼 만하다. 아이코 공주가 태어나기 전까지 3세대 황족들 중 서열이 제일 높은 사람은 마코 공주였다. 다시 말해 만약 황태자 부부가 끝내 아이를 낳지 못했고, 마사코 황태자비의 가임 연령이 지나간 뒤 키코 비마저 히사히토를 낳지 못했다면, 마코 공주가 여계 천황 후계자가 될 수도 있었다는 소리다. 또한 여계 미야케에 대한 이야기는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만 있었을 때에도 솔솔 흘러나오던 떡밥이었다. 거기다 후미히토가 실제로 두 딸의 미야케 창설을 총리에게 요청했다 거절 당했다는 일화를 보면, 알다시피 여성 미야케는 실제로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공주의 성적을 소문처럼 제대로 관리했다면 최소한 가쿠슈인 대학이나 가쿠슈인 여대 에는 최하위로나마 보낼 수 있었을지 모르고, 마코 공주도 그곳에서 적당히 좋은 남자를 만났을지 모른다. 가쿠슈인 여대는 가쿠슈인 대학보다 규모가 작다. 또한 쓰구코 공주의 진학 과정에 대한 일본 네티즌들의 이야기를 보면, 가쿠슈인 여대는 가쿠슈인 대학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낮게 취급되는 듯하다. 학업에 충실한 자세를 가르쳤다면 카코 공주가 특혜로 입학한 가쿠슈인 대학 교육학과에서 자퇴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만약 대학은 어쩔 수 없었어도 미리미리 황족관을 잘 심어주었다면, 마코 공주가 코무로 케이를 포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결혼 과정에 대한 진실은 말할 수 없어도 " 캠퍼스 커플로 만난 사이라도, 상대의 직업과 집안이 괜찮아야 한다"는 것만 잘 가르쳤어도 지금과 같은 결혼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수 있었다.
마코 공주가 영 말을 안 듣는 탓인지, 키코 비는 카코 공주와 히사히토에 대한 억압이 매우 심해졌다고 한다. 결국 피해는 동생들이 다 받은 셈. 더군다나 사촌동생 아이코 공주에게도 피해가 갔다.
2.7. 후미히토의 문제점
사실 이 일가의 제일 큰 문제는 궁주 후미히토다. 키코 비도 잘못한 게 많지만, 후미히토가 자녀 교육에 무관심한 것도 공주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또한 후미히토는 황태자도 아니면서 후계자( 히사히토)가 있다고 방약무인하게 행동한 것이나,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데도 대놓고 바람을 피우는 것을 알 수 있듯이 매우 제멋대로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무도 못 건드리는 자리에 있으면 문제가 많아진다.2018년 당시에는 후미히토가 마코 공주의 편을 들면서 논란을 키웠고, 2019년에 접어든 이후에는 마코 공주와 코무로 이외에 스스로의 권한만으로도 결혼 문제를 강제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파혼하기를 바란다"는 식으로 사태를 방관하고 있다. 황실에서는 궁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궁주(가장) 외에는 설령 천황이라도 직접적으로 관여하기 상당히 어려운데, 궁주가 이 정도로 사태를 수수방관하고 있기 때문에 일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마코 공주는 큰 사고를 치고도 여전히 사고를 몰고 다니고, 키코 비는 "이대로 놔두면 안 된다. 당장 떼어놓아야 한다."고 말하고, 천황 부부와 곧 즉위할 나루히토 황태자조차 "새로운 천황 즉위 전에 사건을 해결해라"고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태도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후미히토의 태도는 본인의 일가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을 더 악화시키게 된다.
이쯤 되면 후미히토 친왕은 지금 이러한 상황을 당하고도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마코 공주가 이렇게 일을 벌이고 있음에도 알아서 해결하라고 구경하는 것도 엄연한 방임주의이며, 아들 히사히토를 발판 삼아 권력을 쥐고자 한다면 그만큼 처신을 더 조심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건 '어떻게 행동해도 문제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으로밖에 볼 수 없다. 마코 공주 결혼 소동이 벌어지기 이전부터 이미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상당히 컸다. 그러한 여파로 그동안 모함에 가까운 구박을 받았던 아이코 공주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좋아진 상태이며, 그동안 후미히토 일가를 옹호해오던 일부 우익들이나 궁내청 내부에서조차도 '아이코 공주의 부마가 구황족일 경우라면 아이코 공주가 천황이 되더라도 허용하겠다'는 의견이 제법 될 정도이다.
나루히토 황태자 부부에게서 끝내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고, 나루히토 내외는 겨우 낳은 자녀인 아이코 공주가 3살이 되기 전까지는 자녀를 낳지 않겠다고 하였다. 조바심이 생긴 아키히토 덴노는 만세일계를 이어나가기 위한 목적으로 차남 후미히토 내외에게 "셋째(아들)를 낳으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권력욕이 강한 후미히토 내외는 아키히토 덴노의 요구를 받아들여, 권력을 쥐기 위해 실질적 황태손인 히사히토를 억지에 가깝게 낳았다. 그에 따라 일본 궁내청을 위시로 전국민들의 환호를 받기 시작하자, 본격적인 권력욕이 생긴 후미히토는 황제 자리를 차지하고자 여론전을 벌여, 친형인 나루히토 황태자를 강하게 압박해서 동궁을 몰아내고 자신이 천황 자리에 즉위하고자 하는 야심을 불태웠다. 하지만 아키히토 덴노는 10년 동안 가만히 지켜보다 "생전에 천황 자리에서 퇴위할 것이며, 그 다음 천황에는 나루히토 황태자가 즉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시기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에서는 집안의 장녀이자 천황 내외의 첫 손주인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가 발생했으며, 그러한 논란 속에서 동궁은 10년 동안 각지에서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문제 없이 여러 밑바탕을 깐 효과를 발휘해서 여론을 뒤집게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차남인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에서 황태손이 나왔다고 해서 바로 위에 친형인 나루히토 황태자가 살아있는 한 자신이 바로 황태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건 알았을 것이다.
자신의 형인 나루히토는 쇼와 덴노 치세 때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 황태자비 사이에서 태어난 적장손으로, 현행 황실전범 상 황태손 책봉이 불가능했을 뿐 태어났을 때부터 황태손이나 다름없었고, 1989년 쇼와 덴노가 죽고 아키히토 황태자가 덴노로 즉위하자 적장자로서 황태자로 정식으로 책봉되었다.
즉 동궁은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를 기준으로 보면 위에 서자 형도 없는 적장자이자 적장손으로 태어나 원손-황태손-황태자 순으로 혈통적으로 흠 없는 적통이자 완벽한 정통성을 지닌 인물인 셈이다. 문제가 있다면 어머니가 당대 황실 기준으로 미천한 신분이라는 거지만, 아키히토에게 있어 여자는 미치코 황후뿐이고 정실이니 큰 문제도 아니다. 어차피 다른 형제들도 전부 미치코 황후의 소생이라서 다를 것도 없는 상황.
물론 일본의 역사에서 호겐의 난처럼 차기 후계자를 즉위시키기 위한 징검다리로서 친왕을 황태자 책봉도 없이 천황으로 올린 적도 있기는 하지만, 이게 문제가 돼서 교토 전체가 파괴될 정도로 심각한 내전이 벌어진 것처럼 일반적인 사안은 아니다. 자신의 아들이 황태손이고 자신은 아무리 황제의 아들이라고 해도 종친 중 하나의 개념에 지나지 않는 친왕이고, 자신이 자리를 빼앗고자 했던 동궁은 아들이 없다는 걸 제외하면 본인에게 문제가 없는 황제의 후계자인 황태자다.
이 시점에서 서열이 절대적인 아래이며, 아들인 황태손도 황태손일 뿐 천황으로 즉위한 것이 아닌 이상 자기가 동궁의 지위를 빼앗으려는 것처럼 황제의 의사에 따라 황태손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아무리 젊은 종친이 아키시노노미야 일족에만 있다 하더라도 1대에 한정되는 여왕은 이미 선례가 10번이나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나루히토 황태자를 자극하면 동궁이 천황으로 즉위한 뒤 새로운 천황이 된 나루히토가 천황으로서의 권한을 이용해서 전대에서 정한 후계자를 갈아치우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후미히토는 아버지인 아키히토 덴노가 살아있을 적 여론전을 펼치며 천황이 죽은 뒤 이러한 여론을 바탕으로 문제가 많다는 누명을 받은 형 나루히토 황태자 내외를 몰아내려고 했지만, 천황은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백성들도 다 알고 있던 그런 속셈 같은 건 뻔히 알고 있었다.
애시당초 아키히토 덴노는 양위 발표를 할 때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것'이라고 했다. 즉 10년 동안 궁내청과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이 난리를 피우면서 황태자 가문을 두들겨 패던 것을 단순 방관만 한 게 아니라, 이 때부터 황실의 서열에 대한 대책으로 때가 되면 나루히토 황태자를 자기가 살아있을 때 천황으로 옹립시킬 생각이었고, 그 때 자연스럽게 그동안 어지러웠던 황실 내 서열을 확실하게 바로잡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생전 퇴위 선언할 당시 당시 천황 자신이 양위한다고 밝힌 이유가 "늙어서"이며, "즉위 30주년을 기점으로 아내 미치코 황후와 여생을 편히 보내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퇴위 떡밥을 뿌리고 퇴위 선언을 했던 시기는 첫 손주이자 후미히토의 장녀인 마코 공주의 결혼을 둘러싼 사건이 벌어지기 전이라, 폭발만 안 했던 것 뿐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이 이미 여러 문제와 논란으로 인하여 언론 등을 통한 여론전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던 시기이다. 이러한 언론들의 배신으로 인하여 그동안 무고하게 비난을 받기만 하던 차기 천황이 확정이 된 나루히토 가문에 대한 지지로 돌아서고 있었다. 천황은 퇴위하기 가장 적합한 시기를 기다렸고, 그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자 실행한 것이다.
그리고 천황은 만세일계에 대한 집착이 여전했기 때문에, 나루히토 황태자가 천황에 즉위하면 후미히토에게 황태자 자리를 맡기고 후사를 진행하라고 했다. 전근대 시절 같았으면 종가에서 쫓겨나다 못해 목숨까지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일들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후사 부족이라는 명분하에 후계자 지위를 약속했으니, 오히려 아키히토 덴노 입장에서는 충분히 '자비'를 내려준 셈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후미히토는 장녀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계속 방관하여 문제만 키우고 있어서, 자신이 퇴위하고 나루히토가 천황에 오른 뒤 마코 공주 결혼 문제를 핑계로 후계 구도가 뒤집혀도 방관만 할 가능성이 높다. 애시당초 아키히토가 천황에서 퇴위한 이후 상황이 되면 관련 법률에 의거하여 현 천황에 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 자체를 자제하도록 되어 있기에, 이걸 이유로 더더욱 나루히토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아키히토 내외는 방관을 정당화할 것이다.
2.8. 후미히토가 파탄인격이 된 이유
후미히토는 형인 나루히토와 여동생 구로다 사야코, 아키히토, 미치코 상황후와 비교하면 돌연변이로(...) 봐도 좋을 정도로 외모부터 성품까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 반면 나루히토와 구로다 사야코는 아버지 아키히토와 외모가 닮았다.외모는 타고나는 거니 뭐 그렇다 치지만, 성품까지 형제가 도저히 섞이지 못할 만큼 차이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인 사이에서도 이 지경일 만큼 극과 극인 형제는 드문데, 한 집안에서 자란 이상 모범생과 문제아여도 어느 부분은 닮아 있기 때문이다. 당장 아키히토와 남동생인 마사히토의 경우에는 둘 다 성격이 비슷한 면이 있고 사이도 엄청나게 좋은 편이며, 5촌 당숙인 노리히토와 토모히토도 나루히토/후미히토 형제처럼 성격이 서로 다른 편이지만 서로간의 싸움이 없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후미히토가 저리 된 제일 큰 원인이 미치코 황후에게 없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 그녀가 차남 후미히토가 어떠한 문제를 일으켜도 제지하지 않았다는 것은 일본 국내에서도 매우 유명한 사실이다. 다만 고준 황후와 구황족 및 화족들이 미치코 황후에게 극심한 시집살이를 시켰던 시절, 미치코 황후를 후궁 취급하면서 '네가 감히 왜 후미히토에게 뭐라뭐라 하느냐!'라고 했던 것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고준 황후는 그토록 미워하던 며느리가 낳은 손주들은 남녀 차별도 없이 정말 예뻐했다.
이는 나루히토가 장남이라는 사실을 두고 본다면 황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어느 나라나 왕실에 있어서 장남이란 자리는 부왕의 뒤를 이어야 하는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장남은 매우 엄격하게 자랐고, 나머지 자녀들은 즉위 못 하니까 취미 생활을 누리라는 이유로 자유롭게 키웠다. 세종대왕만 하더라도 충녕대군 시절에는 여러 취미 활동을 하면서 자유롭게 컸다고 한다. 이 때의 기억 때문인지 나루히토는 자녀 교육에 대해 황실의 일반적인 인식, 즉 "아이는 엄격히 키워야 하고, 육아는 여자만의 전담물이다."라는 인식과 다른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 일본 황실에 갇힌 나비 마사코>라는 책을 보면, 아이코 공주 탄생 후 황실과 궁내청에서 마사코 황태자비를 향해 "다시 임신해서 아들을 낳으라"는 압력을 시작했을 때 나루히토가 한 생각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나루히토는 "아이코에게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마음이 들게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코 공주를 얻은 뒤, 황태자 부부는 딸이 3살이 될 때까지는 기다리고 싶어했다. 아동심리학에서도 3살까지는 부모가 키우기를 권장한다고 할 정도로, 애착 형성의 제일 중요한 단계이다.
이 일화를 보면, 나루히토가 "성별에 상관 없이 자녀는 부모의 사랑과 지지로 키워야 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계자라서 굉장히 엄격한 교육을 받았는데도, 자신만은 자신의 부모와 다른 부모가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부모의 교육 방침을 그대로 답습할 법도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다만 아키히토 내외는 황태자 내외에게 " 아이코 공주는 자유롭게 기르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이는 황태자 부부의 딸 아이코 공주가 별 제약 없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원인이 되었지만, 당시 황실에 차세대 후계자가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말의 숨은 진짜 의도는 '네 딸은 후계자가 못 된다.'는 의미였을 확률이 크다. 하지만 딸 아이코 공주를 차기 천황으로 만들고자 하는 나루히토가 미래의 사윗감으로 황적이탈된 구황족 출신을 알아보고 있으며, 아이코 공주 역시 이런 아버지의 의도에 찬동하는 입장을 보이는 걸 보면, 앞으로 어찌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황실전범에는 남자만 천황이 될 수 있다고 명시되어있으나, 이는 황실의 오랜 전통이 아니라 불과 메이지 덴노 때서야 생긴 법이라서, 여자가 천황이 되는 건 역사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될 건 없다. 당장 원래의 황실 전범에는 천황의 생전 양위를 금지하고 있었는데, 아베 신조와 국회에 이 조항을 개정하라는 압력까지 넣어가면서 씹은 사람이 바로 아키히토 본인이다.
하지만 어차피 일본의 황실전범은 남자만 즉위가 가능하고, 이건 아키히토라고 해서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도 당시 어쩔까 논의하고 있었지만, 당시에도 동아시아 종법상 남자 쪽이 더 우세했다. 그러니 당시 아키히토의 말은 " 손녀딸은 후계자가 못 되니까, 후계자로 만들고 싶다고 엄하게 키우지 말고 그냥 편하게 키우는 게 좋다"는 뜻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후미히토는 어땠을까? 후미히토의 육아 방임은, 거슬러 올라가면 어머니인 미치코 황후가 후미히토를 방임한 것과 비슷하다. 잘못했을 때 전혀 훈육하지 않는 것도 교육상 방임에 해당되며, 후미히토는 이를 그대로 자녀들에게 적용했다. 그나마 두 딸에게는 이따금 야단을 친 모양이지만, 후계자인 아들에게는 자신이 어머니에게 겪었듯 똑같이 방임하고 있다. 게다가 황실 전반의 분위기가 유독 후미히토에게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이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후미히토는 장남이자 차기 천황이라고 편애 받는 형과 고명딸에 막내라고 편애 받는 여동생 사이에 끼인 신세였다. 원래 이런 식으로 가운데에 낀 자녀들이 상대적으로 관심을 못 받는 일이 흔하다. 한쪽과 1~2살 차이일 경우에는 친구처럼 곧잘 어울리는 경우도 있지만, 후미히토는 위로는 5살, 아래로는 4살 차이로 터울도 큰 편이었다. 중도에 별의별 시집살이에 시달려서 미치코 황후가 유산을 자주 했기 때문. 아키히토와 마사히토도 2살 차이.
나루히토는 후계자여서 체벌을 동반한 상당히 엄격한 교육을 받긴 했어도 부모부터 황실 전반이 나서서 긍정적인 방면에서 상호작용을 했고,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도 어머니와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형과 여동생은 어떤 이유에서든 부모와 상호작용이 되었지만, 후미히토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미치코 황후가 교육상 방임을 했다. 의미 있는 상호작용이 다른 형제들보다 적었다는 소리다.
사실 2004년 인격 부정 발언 때 아키히토 덴노가 나루히토를 질책한 것은 긍정적인 상호작용이다. 자신의 후계자가 논란을 만들었으니 천황 입장에선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후 황태자 일가와 천황 부부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지긴 했지만, 의외로 화해의 손길은 천황 부부가 먼저 내밀었다. 궁내청 장관의 발표를 통해 나루히토에게 '손녀가 보고 싶으니 오라.'고 한다거나, '부왕을 좀 찾아뵈어라.'고 직접 말하게 한 것. 아이코 공주와 현 상황후 부부의 관계는 별로인 것 같아 보여도, 궁내청이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만 너무 부각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미치코 황후는 어디 가서 물건을 살 때면, 손자 히사히토의 것뿐만 아니라 황태자의 딸인 아이코 공주의 것도 산다. 아이코 공주가 장기간 결석하고 있을 때 했던 생일 회견도, 잘 생각하면 아이코 공주를 옹호한 발언이다. 아이코 공주가 아픈 것이 사실이었으면 왜 '모든 가족이 건강해서 다행.'이라고 했겠는가? 어쨌거나 아이코 공주는 아들이 아니어도, 결국은 왕위를 물려주게 될 큰아들의 유일한 자식이다. 무엇보다 아이코 공주의 탄생 당시의 기사에 따르면,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미치코 황후는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나중에 아들 낳으라고 요구한 건 맞지만, 황실로 시집 와 바로 이듬해에 낳은 첫 자식 나루히토는 극심한 시집살이를 당하던 미치코 황후에게 더없이 소중한 아들이었을 것이다. 그런 아들에게서 자식이 태어났다는데 얼마나 기뻤을 것인가.
실제 양위가 확실시 되기 전까지 궁내청과 주간지는 지속적으로 천황 내외와 차남 家의 긴밀한 관계는 다뤘어도, 장남 家와의 관계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양위가 법으로 못박힌 후, 미치코 황후부터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자신의 위치를 넘기는 작업을 착실히 했다. 우선 역대 황후에게만 전수되는 양잠 사업( 누에치기)를 전수했고, 그 다음 자신이 맡고 있던 명예 총재 자리를 자신이 총재로 있는 마지막 행사가 있던 날, 작별 인사를 한 뒤 직접 마사코 황태자비를 옆으로 불러내 사람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거기다 그 장면을 키코 비도 보고 있었다. 대놓고 ' 마사코 황태자비는 내 뒤를 이을 맏며느리'라는 것을 확실히 한 것. 게다가 이건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고 한다. 무대로 불러내 직접 인사를 시킨 것부터가 미치코 황후가 작정하고 마사코 황태자비를 밀어준 것이다!
여론전이 상당히 심했음을 생각하면, 결국 겉에 보이던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없다. 인격 부정 발언 이후 서로 불편해진 것은 틀림없고, 천황 내외와 황태자 家와의 사이가 악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는 그렇다고 장남을 후계에서 내치지 않았으며, 마사코 황태자비를 인정 안 한 것도 아니고 아이코 공주를 천대하지도 않았다. 황태자 내외를 다시 보려고 했을 때 핑계를 댄 내용이 아이코 공주였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아이코 공주는 황태자의 유일한 자식인 이상, 천황 부부가 천대하고 싶어도 못한다. 위치가 차남의 자녀인 마코 공주, 카코 공주와 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키시노노미야 家의 자매인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는 아버지 후미히토가 2019년 5월 1일자로 황태자와 가까운 황태제가 되어도, 지위와 격이 천황의 외동딸인 아이코 공주를 뛰어넘을 수 없다. 또한 천황과 한 집안에 살면서 옆에서 보조할 일도 많을 테니 중요성이 방계 공주인 마코 공주, 카코 공주와 차원이 다르다. 천황의 자식으로서 아이코 공주는 천황 부부의 인식을 좌우하게 될 중요한 아이다.
만약 황태자비 인격 부정 사건이 후계자를 바꿀 만큼 큰 사건이었으면 생전 양위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아키히토는 자신의 양위 발표를 통해 아베 신조의 행보에 제동을 걸면서 장남 일가를 지켜냈다. 누가 봐도 궁내청과 우익 세력들은 아키히토가 죽으면 나루히토 家를 쫓아낼 분위기였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던 부분이었는데 당사자인 아키히토가 몰랐을 리가 없다. 나루히토가 즉위하면 차세대 황위 계승 논란이 계속될 것도 알고 있었을 테지만, 어쨌든 장남에게 물려주었다는 것은 차세대 황위가 불안하지만 장남을 믿었다고 봐야 한다. 아이코 공주가 된다고 하더라도, 아이코 공주는 부모 모두를 닮아서 성품도 훌륭하고 성적도 전국 상위 1% 이내 수준을 유지하였으며, 2019년에 들어와서는 이 성적도 더 올려서 도쿄대학 진학 안정권에 도달하게 된 상황일 정도로 엄청난 능력자이기에, 일본 내에서도 온갖 문제들 속에서도 이러한 재능을 보여주는 아이코 공주가 천황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후미히토가 사고 쳤을 때는 아키히토조차 나서지 않을 때가 비일비재했다. 아무리 파급이 상대적으로 적은 차남이어도 너무 지나쳤다. 심지어 히사히토 탄생 후 황태자 일가의 입지가 위태로워졌을 때도 그 배후에 후미히토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천황 부부는 나서지 않았다. 상술했지만 궁내청의 황태자 부부와 아이코 공주에 대한 행패를 후미히토가 뭐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태가 심각해졌다. 그 정도로 차남이 뭘 하든 내버려둔 것이다. 명백히 황실의 질서를 어지럽혔는데도(!).
오죽했으면 이 반응 때문에 이 시기 " 아키히토 덴노가 후미히토에게 대신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많이 나왔었다. 그런데 막상 나루히토에게 양위한 것을 보면(...) 아무리 히사히토가 후계자여도 차남이 아닌 장남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역사 의식도 좋은 아키히토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즉 그간 일어난 일들을 통해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천황 부부는 후미히토에 대해 '네 마음대로 해라. 넌 무슨 짓을 해도 절대로 천황 못 된다.'였던 것으로 보인다.
후미히토는 말은 안 했어도 궁내청과 우익, 주간지를 통해 '나 천황 되고 싶습니다! 나에게는 아들도 있으니, 나에게 천황 자리를 물려주세요!'라는 속마음이 뻔히 들여다 보이게 행동했다. 당장 천황 부부가 제지를 안 하니, 세간에서는 황태자 家의 입지가 위태롭다고 보았다. 그런데 결국 왕위는 예정대로 황태자에게 갔다. 며느리가 아프고 하나 있는 자식도 딸이었는데도(...) 생각해 보면 후미히토가 완전히 무시 당한 것이다. 후미히토가 나루히토 즉위에 대해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댄 건 그 울분이었을 수도 있다. 게다가 이제는 궁내청과 주간지조차 곧 황위에 오르는 나루히토의 눈치를 보느라 후미히토를 편들지 않는다.
양위를 나루히토에게 한 것은 애초부터 후미히토가 부모의 눈에 들려고 무슨 짓을 하든 처음의 결심을 바꿀 의향이 없었음을 공언한 셈이다. 그리고 어쩌면 후미히토와 궁내청을 제지하지 않은 이유가, 그럴 필요조차 없는 행위로 보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래봤자 넌 차남이고 왕이 못 된다"고 굳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미히토 내외와 궁내청이 뭔 짓을 해도 내버려둔 것이다. 물론 동아시아 왕실의 종법은 물론, 직궁가에서 황족 자체가 너무 부족한 현 상태에서 황태자 家를 쫓아낸다는 것은 가뜩이나 없는 황족의 숫자를 알아서 숫자를 줄이는 바보 짓이라, 천황이 안 그럴 거라는 말이 많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내버려둔 것은,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제대로 대하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천황 부부는 동궁이 딸밖에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군주로서 역할에 충실했지만, 이는 훗날 파란을 불러오게 된다. 사실 전근대 시절 같았으면 황태자가 아들 없고 친왕이 아들 있다고 저렇게 친왕이 날고 기는 것 따위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살벌한 전근대 시절에 황태자가 아들 없고 자기가 아들 있다고 안하무인격으로 굴면 숙청은 물론이고 끔살당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식의 권력 암투가 벌어질 수 있는 것도 현대니까 성립되는 이야기.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면 대원군 지위를 꿈꾸면서도 도중에 죽지 않도록 오히려 더 조심해서 처신한다. 흥선군 이하응이 자신의 차남 이명복이 즉위하기 전에 보인 그 처세술을 생각해보라. 현대 일본의 황실전범에 양자 입적이 불가능하고 아직까지는 소문이지만 동궁에서 황녀를 후계자로 삼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히사히토를 나루히토 덴노 쪽에서 받아들일 이유를 못 느끼고 있기에 양자 입적은 논할 사안이 못 되지만.
후미히토의 역사관과 성품은 완전히 궁내청과 닮았다. 지금 마코 공주와 히사히토의 교육 문제가 불거진 근본적인 이유는 후미히토 때문이다. 후미히토가 자녀 교육에 방임인 것은 미치코 황후의 방식을 답습했다고 볼 수 있지만, 아내를 무시하고 돕지 않는 남존여비가 유난히 심한 것은 마사코 황태자비를 아들 낳는 기계, 남편을 내조하는 여성으로밖에 보지 않던 궁내청의 태도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이는 아키히토도 전형적인 왕이라서 며느리들에 대한 생각이 궁내청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러한 점은 미치코를 혹독하게 시집살이 시키던 어머니 고준 황후를 그렇게 안 말렸다는 점에서 볼 수 있다. 그래도 본인의 아내 미치코 황후를 사랑하는 애처가다. 하지만 후미히토와 키코 비는 옛날부터 쇼윈도 부부로 유명했다. 애초에 허구한 날 바람 피우고, 결혼부터 막장이었던 사이니 당연하다. 나루히토는 애처가인 아버지를 닮았지만, 후미히토는 여성을 무시하는 궁내청을 닮았다. 교육상 후미히토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부모가 아닌 궁내청이었다는 소리다.
즉, 후미히토의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친 것은 궁내청이었다. 후미히토는 궁내청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했고, 히사히토 탄생 후 형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궁내청 등의 지원 하에 형을 몰아내고 천황이 될 뻔 했었다. 어쨌든 나루히토가 부모와 황실의 편애를 받은 것을 고려하면, 두 형제의 사이가 오래 전부터 안 좋았던 것은 일반인 가정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 편애에 의해 사이가 벌어진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보통 부모의 관심을 덜 받거나 욕구불만인 애들이 밖으로 나돌게 되는데, 후미히토도 이 경우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 때 잘해준 사람들이 자신을 황자라고 대우해주는 궁내청이었을 것이고, 교육상 방임이 이뤄지는 동안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동화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분명 후미히토는 참 돼먹지 못한(...) 사람이다. 하지만 부모와의 의미 있는 상호적 교류 부족 및 방임은 현재 일본 황실에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사람이 황태제가 되고 그의 아들이 미래에 천황이 된다는 것은 일본 황실로서는 암담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며, 그 때문에 아직까지도 아이코 공주의 논의가 끊이질 않는 것이다.
3. 후미히토 일가와 너무나 다른 나루히토 家
분명 나루히토 천황 일가는 마사코 황태자비의 긴 요양과 후계자 논란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아이코 공주도 가쿠슈인에서 상당히 힘든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집안이 안정을 되찾고 국민들의 사랑을 받게 된 원인은, 아키히토 덴노의 양위 발표도 있지만 누구보다 가장인 나루히토 황태자가 오랫동안 들여온 공이 제일 크다. 특히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해서는 여전히 일본 내부에서 부정적인 여론이 있긴 해도, 황후가 되었을 때에 대하여 기대를 거는 댓글이 조금씩 보이고 있다.2004년의 기자회견 자리에서 나루히토 황태자가 "그동안 마사코 황태자비의 결혼 전 경력과 인격에 대해 부정하는 움직임이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라고 말한 것. 황족이라 돌려 말한 거지, 당시 궁내청과 황태자가 사이 안 좋다는 건 이미 유명한 상황이고, 수구꼴통의 아성으로 정평난 판국에 누구 소행인지는 보나마나였다. 이렇듯 나루히토 황태자가 애처가이고 아내와 딸을 매우 소중히 여긴다는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얼마 전(2018년) 마사코 황태자비가 생일을 맞아 했던 인터뷰에서 "나와 아이코에 대한 남편의 지지에 대해 매우 고맙다"고 말했다. 이는 나루히토가 그동안 아내와 딸에 대한 황실 안팎의 비난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필사적으로 가족을 지켰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황실 내에서 유일한 자신들의 편이었던 당숙 노리히토의 사후, 황실 내 자신의 편이 없는 사면초가인 상황에서도 나루히토는 아내와 딸의 든든한 방패이자 버팀목이 되어 준 것이다. 나루히토는 결혼을 원치 않았던 오와다 마사코와 결혼해서 마사코의 인생을 막장으로 만들어버렸지만(...) 본인도 그 사실을 몰랐던 건 아니라 그만한 책임을 졌는데, 1993년 결혼 당시 "최선을 다해 마사코를 지키겠다"고 한 그 약속을 단 한 번도 어기지 않고 그대로 실천해주었다. 그 때문에 남편을 원망할 법함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부부간의 금슬이 매우 좋고, 서로 행복하게 미소 짓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상적인 남편이자 가장으로서 자신을 스스로 희생해가면서 아내와 딸을 지켜주고 있으니.
나루히토 황태자는 마사코 황태자비가 요양으로 공무를 못할 때, 여러 가지로 상당히 바쁜 와중에도 딸의 교육에도 상당히 신경을 썼다. 실제로 기사에 나왔는데 나루히토는 아이코 공주의 등교 준비를 도왔고, 아기 때는 기저귀도 갈아줬다고 한다.[6] 그리고 아이코 공주가 불규칙 등교를 할 때는 타일러서 다시 등교하게 만들었다. 당시 나루히토는 아이코 공주에게 "이제는 학교에 가야 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밖에 아이코 공주가 아버지를 매우 믿고 의지하는 영상도 있다. 돌 때 어머니 마사코 황태자비의 품에 안겨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신 고쿄에 들어서던 아이코 공주는, 기자들의 카메라 세례에 바로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손을 뻗어 안겼다. 2006년 사촌동생 히사히토가 태어나 아이쿠(愛育) 병원에 방문했을 때는 카메라에 놀라 나루히토의 뒤로 숨기도 했다. 나루히토가 장기 해외 공무를 떠날 때는 마사코 황태자비의 뒤에 숨어 울고 있기도 했다. 아이코 공주가 과거 등교 거부를 할 때도 황태자 부부가 대화를 많이 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아이코 공주가 가쿠슈인 초등과 저학년일 때는 어느 비 오는 날 나루히토의 손을 잡고 등교하는 영상이 보도되기도 했다. 이 때 아이코 공주는 카메라 때문인지 시선을 돌리고 있었지만, 나루히토는 그 상황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또한 아이코 공주의 운동회에도 마사코 황태자비와 꼬박꼬박 참석했다. 딸들의 운동회는 고사하고 입학식과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후미히토가[7] 아들 히사히토의 운동회, 학예회, 입학식, 졸업식 등에는 꼭 참석하는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후미히토의 이런 자세가 자녀 교육에 좋았을 리가 절대 없다. 반면에 아이코 공주의 영아기 때부터의 영상을 쭉 보면 나루히토가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대로 드러난다. 나루히토가 아기인 아이코 공주를 직접 안고 얼러주는 장면이 있는 반면에, 후미히토내외는 두 공주 자매는 물론 히사히토까지 키코 비만 안고 있는 장면이 대다수다. 물론 자기 자식들이니 키우면서 단 한 번도 안아준 적이 없는 건 아닐 테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선 아내 품에 안겨있는 아이를 자기가 직접 안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나루히토는 아이코 공주와 함께 가쿠슈인 관현악단과 협주도 했다. 자칫 대외적인 일과 체면 문제로 가정에 소홀해질 수 있다. 어느 황실이나 그렇지만, 일본 황실은 특히 육아에 대해 전형적이면서 심각한 보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쇼와 덴노 이후의 황족들 중 나루히토만큼 육아에 큰 신경을 쓰는 남성 황족은 전무하다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 나루히토는 자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아버지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협주는 틈틈이 연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일이다. 아이코 공주와의 협주라면 집에서도 틈이 날 때마다 함께 연습했을 것이고, 최종 합을 맞출 때 같이 학교에도 갔을 것이다.
그럼 마사코 황태자비는 자신의 요양을 핑계로 육아에 손을 놓았냐면 그도 아니었다.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아이코 공주는 남편과 더불어 세상의 전부고, 어떻게 보면 분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마사코 황태자비는 딸의 교육에 전심전력으로 매달렸고, 아이코 공주를 황실 최고의 재원으로 길러냈다. 아이코 공주도 여러가지로 안 좋은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전력으로 보살펴 준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한 결과, 최근 황태자 내외에 대한 일본 여론의 호평을 이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천황 부부의 맏손녀이자 첫손주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가장 많이 편애 받으며 온갖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결혼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마코 공주와는 대조적이다. 실제로 아이코 공주의 성적은 어린 시절부터 우수했지만, 자신의 평판이 좋아진 2018년 후반기 이후 더더욱 공부에 매진해 2019년에 접어들어 편차치가 더욱 올라가서 도쿄대 진학 안정권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아이코 공주 본인의 성격도 매우 성실한 것을 넘어서 어떤 의미에서 독한 면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상위권에서는 성적을 더 올리기가 쉽지 않다. 기존 성적만으로도 일본 상위 1%에 해당되는 엄청난 성적인데, 이걸 올린 건 혹독한 자기 단련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또 아이코 공주에 관한 기사를 보면 황태자 내외의 교육상 제약도 강하지 않은 듯한데, 대여섯 명의 경호원들 때문에 활동 반경이 그다지 넓지 않지만 활동은 다양하게 하고 있다. 눈 여겨볼 점은 학교 친구들과 노래방에 간다는 점과 좋아하는 아이돌이 있다는 보도다. 키코 비가 히사히토에게 TV 시청 금지, 공주 자매에게 대학 동아리 활동 금지 등 이것저것 규제를 많이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아이코 공주가 노래방도 가고 자기가 좋아하는 야구장에도 갈 수 있는 것도 다 나루히토 황태자가 허락했기 때문이다. 나루히토 황태자도 어려서부터 야구를 좋아해서 부모님을 졸라 동궁 고쇼 근처 야구장에서 구경했을 정도다. 아이코 공주가 어렸을 때는 종종 캐치볼을 함께 하며 놀아주었다. 또한 마사코 황태자비도 중학생 때 소프트볼을 했으며, 대회에 나가 우승한 적도 있다.
나루히토가 허락하면 궁내청으로서는 "경호에 문제가 있다"고 뒤에서 궁시렁대도 결국 보낼 수밖에 없다. 사실 마사코 황태자비와 이혼을 시키네 마네 할 때도 나루히토가 꿈쩍도 안 했기 때문에 안 됐던 것일 정도로 일본의 남성 황족의 권한은 상당히 강력하다.
그리고 이런 모습을 통해, 나루히토 황태자 - 마사코 황태자비 - 아이코 공주 사이의 애착과 신뢰가 강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본래 아이가 하나면 과잉보호 내지 엄격하게 흘러갈 수 있는데, 황태자 내외에게 그런 모습은 잘 안 보인다. 물론 마사코 황태자비가 딸과 밀착해 있기는 하지만, 나루히토가 이러한 보호가 부정적인 면으로 흐르지 않도록 잘 중재하고 있는 것 같다.
4. 그리고 키코 비
이런 바람직한 형과 달리, 후미히토는 가장이지만 가족들의 버팀목은 제대로 되어 주지 않으면서 가장으로서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마사코 황태자비가 남편의 전폭적인 보호 아래 때가 올 때까지 몸을 회복하고 있었던 반면, 키코 비는 남편의 무관심과 틈틈히 가족을 배반하는 행동들 속에 3남매의 육아를 해내야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3년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태국 순방 당시의 일이다. 후미히토는 아내와 어린 두 딸(당시 초6, 초3)까지 데리고 떠난 해외 순방에서 밤 늦게 태국 마사지숍을 방문했다. 이러한 보도에 당시 후미히토 일가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이 많던 시기였음에도,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저건 아니다"라는 반응이 많았다. 본인 스스로 야심 때문에 황실로 왔지만, 그 실상은 자신의 예상보다도 더더욱 비참했다.키코 비가 잘한 것은 노력해서 아들을 낳았다는 것과 자기에게 부여된 엄청난 수준의 공무를 열심히 했다는 정도다. 여기에서 마사코 황태자비가 요양 때문에 하지 못한 공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많은 문제가 있지만 황실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냉정하게 보면 지금 후미히토 일가의 위상은 키코 비가 만들었다고 봐야 한다. 어쨌든 늦은 나이에 아들을 낳기 위해 힘쓴 것은 대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처지를 보면, 그 보답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현 시점에서 주간지와 국민 여론의 비난은 키코 비에게 집중되고 있다. 미치코 황후도 키코 비에게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후미히토가 가정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후미히토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에 위기가 닥친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 황실은 남존여비라는 악습 때문에 키코 비만 탓하고 있다.
몇 년 전 어떤 기사에서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키코 비지만, 실제로 행복한 것은 마사코 황태자비"라는 황실 관계자의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이는 사실이라고 볼 수 있는 게, 어쨌든 마사코 황태자비는 남편인 나루히토와 매우 금슬 좋은 부부이며, 자랑스러운 외동딸 아이코 공주도 두고 있다. 반면 키코 비는 그렇지 않다.
사실 키코 비의 히스테리가 나날이 심해져 가는 것도, 그녀 역시 힘들기 때문이다. 세상천지 누구도 이런 상황에서 힘들지 않은 자는 없다. 형님 마사코 황태자비처럼 정신병 안 걸린 것만 해도 용한 수준. 그 때문에 기사에서는 정말 많이 "키코 비의 일생일대의 비원은 히사히토를 훌륭하게 키우는 것"이라고 나왔으며, 심지어 언젠가 한 번 "키코 비의 자존심과 자랑은 히사히토"라고 직접적으로 나오기까지 했다. 키코 비에게 남은 건 아들 히사히토밖에 없는 것이다. 뭐 그 때문에 심한 압박을 해서 히사히토가 갈수록 우울해져 가고 있지만(...)
일본 황실의 후진국 수준의 여성 인권은, 키코 비가 황실에 입성해 걸어온 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마사코 황태자비도 고통을 많이 받았지만 좀 더 극단적이고, 정석적인 형태는 키코 비를 봐야 한다. 우선 일본 황실에 들어온 여성은 '아들 출산'과 '남편 내조', '남편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품'이라는 3가지 틀에 갇히게 된다. 황실에서 마사코 황태자비의 대외 활동을 막은 이유는, 아들 출산과 남편보다 더 잘나 보여서는 안 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영국의 다이애나 스펜서 왕세자비가 영국 왕실의 미움을 받은 이유도, 찰스 3세보다 더 인기가 높은 것 때문이기도 했다.
나루히토 황태자는 황실 안팎의 온갖 비난과 압력에 굴하지 않고 아내를 꿋꿋하게 사랑해 주었으며, 집안에서만큼은 아내가 존중 받을 수 있게 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육아도 아내에게만 일임하지 않고 함께 하며 고통을 함께 나누고 위로해준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다. 그리고 현재는 아키히토와 미치코 황후가 나루히토의 편을 들면서 부부가 천황과 황후라는 자리까지 올랐으며, 지금은 국민들도 나루히토 부부에게 높은 지지를 보내고 있다. 마사코 황태자비 역시 황실로 시집 오면서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남편의 도움과 딸의 지지 아래에 본인도 건강을 회복하고 공무를 이행하기 위해 노력했고, 현재 상황 아키히토도 장남 부부의 노력에 보답해주었으며, 국민들도 황태자 부부를 지지하는 등의 보상을 받았다.
그러나 키코 비는 겉으로는 인생역전의 화려한 길을 걷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개인적인 신분 상승을 위해 황실에 입성해 아들까지 낳아 야심을 이뤘지만, 어디까지나 키코 비 개인으로서가 아닌 일본 황실의 여자로서 인정 받았다. 즉, 황족 여자로서의 조건만 채운 것에 불과했다. 평가를 받아봤자 황실에 필요한 것을 준 여자로 끝나는 것이다. 잘해봐야 본전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나라 왕실이나 다 그렇지만, 일본 황실은 특히 시집 오는 여성에게 그간의 모든 경력 및 주체적인 자아를 버릴 것을 심하게 강요한다.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동네니까. 키코 비는 자진해서 시집을 왔기에 타격이 적었지만, 그렇지 않았던 마사코 황태자비는 정신질환까지 걸려야 했다.
남편 후미히토는 형과 달리 육아에 관심도 없으며, 아내의 노력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가 진정으로 가족을 위했다면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해야 했다. 엄연히 아내 덕분에 아들을 얻었고 가문의 위상이 커졌는데도, 아내의 말을 존중하거나 듣는 시늉도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키코 비도 후미히토를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잘 따를 뿐, 집안에서는 사이가 냉랭한 걸로 유명하다.
그리고 지금 키코 비는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과 히사히토의 교육 문제에 대해 허구헌 날 주간지와 여론의 비난을 받고 있다. 비록 키코 비가 더 눈에 띄게 행동하긴 했지만 후미히토도 명백히 책임이 있는데도 별 비난이 없다. 이를 통해 일본 황실 여자의 또 다른 역할을 알 수 있다. 결국 다 잘해도 "중요한 순간에 남편이 비난을 받을 일이 있으면 대신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이 좋아 인생역전이지, 키코라는 한 사람으로서의 인생을 놓고 보면 결코 행복하다 볼 수는 없다. 잘 생각하면 키코 비는 유일한 후계자를 포함한 세 아이의 어머니이자 황태제의 아내인 이상, 그 막중한 책임만큼 앞으로 욕을 먹을 일이 엄청나게 많다.
결국 키코 비는 노력해서 야심을 이루었지만 남존여비의 틀에서 나오지 못했고, 인정 받기 위해 유일한 후계자인 아들에게 자신의 남은 인생 전부를 건 것이다. 인정 받을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까. 반면에 마사코 황태자비는 최소한 집안 내에 있어서는 남편에게 존중 받고 있다. 후미히토- 키코 비- 히사히토가 같이 승합차를 탈 때 보면 남자 둘이 사진이 잘 찍히는 앞에 타고 키코 비가 사진이 잘 안 찍히는 뒤에 타면서 키코 비를 의도적으로 언론 노출을 시키지 않는 반면, 나루히토 일가의 경우에는 여자 둘이 앞좌석에 앉고 나루히토가 뒤에 앉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습관은 나루히토 덴노가 되고 나서도 여전히 지속 중이라서, 천황임에도 마사코 황후 뒷좌석에 앉아서 해맑게 웃는 나루히토 덴노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분위기와 가장들의 가치관 차이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5. 여파
2017년부터 지금까지 아키히토 덴노의 차남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의 장녀 마코 공주의 결혼 소동은 일본 사회를 뒤흔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일본 황실의 유지까지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실제 댓글들을 보면, 여성 미야케(황족 가문) 창설을 반대하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처음 소동이 시작되었을 때는 괜찮았다. 하지만 갈수록 궁내청과 후미히토 내외가 제대로 된 대응 대신 국민 정서에 반하는 대응만 하고 있으니, 민심이 상당히 뒤숭숭해졌다.황실에 대한 민심이 나쁘다는 것은 곧 황실에 대한 지지를 잃는다는 것이며, 잘못하면 황실의 존재 이유가 정면으로 부정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다. 댓글의 반응 중 '너네들(아키시노노미야 家) 때문에 황실 폐지론까지 나온 걸 아는 건지 모르겠다'라는 말이 있는데, 만세일계와 국가신토를 겪었던 일본의 역사상 단순한 국가의 상징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게 일본의 천황이라는 것을 생각하다면 이게 얼마나 심각한 레벨인지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일본의 왕조는 게이타이 덴노로부터 이어진 단 한 왕조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서도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높다. 오죽하면 1990년에 나가사키시 시장이 " 쇼와 덴노에게도 전쟁 책임이 있다"고 한 마디 했다가 총 맞은 사건이 있었을 정도다.
원래 여성 미야케(宮家)는 여계 천황보다 인정될 소지가 그나마 많은 데다가, 후일 마코 공주의 남동생 히사히토밖에 남지 않게 될 황실을 지탱할 수도 있는 중요한 의제로 다뤄지던 것이었다. 후미히토도 히사히토가 많은 공무에 시달리는 게 염려된다는 이유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나의 두 딸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가 미야케를 창설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국민 반발 등을 감안해서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인터넷 사이트에서 황족 관련 기사의 댓글들을 보면, 이런 의견들이 자주 보인다.
차라리
구황족을 다시 복귀시켜라.
: 하지만
구황족 가문들도 멸문 상태인 가문들이 많아, 복귀할 만한 구황족이 적다. 게다가 1947년의
황적이탈 이래 [age(1947-10-14)]년이나 민간인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살았기 때문에, 과연 이들이 황실에 제대로 어울릴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번 사건으로 황실에 대한 악감정이 심해진
일본인들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네 평범한 민간인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살던 사람들을 갑자기 황족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거리는 의견도 있다.그것이 어렵다면, 이번
아키히토 덴노의 생전 퇴위처럼 여계 천황이라도 이번 대 한정으로 인정해서라도, 차기 천황
나루히토 황태자의 무남독녀인
아이코 공주를 천황으로 옹립하는 게 낫다.
이처럼 황실, 정확히는 이러한 사단을 일으켜서 황실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있는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家에 대한 반대 여론이 상당히 높아진 상태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여론의 발생 원인은 마코 공주의 약혼 예정자인 코무로 케이의 가정 환경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일반 가정집에서도 혼약을 꺼릴 정도로 상당히 좋지 않은 조건들이 많다. 심지어 "부모님의 원수가 딸을 시집 보낸다고 해도 말리겠다."는 반응까지 나올 정도.
코무로 케이의 아버지는 아들 케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2002년에 죽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건 그렇다고 쳐도, 아버지의 사인이 무려 이유 불명 분신자살이다. 그 충격으로 케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얼마 안 있어 모두 돌아가셨다. 어머니 코무로 카요(小室佳代)는 사별 후 원조교제 비슷한 관계를 맺은 남자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있으며, 거액의 빚을 지고 있다는 말도 있다. 코무로 케이 본인은 직업이 안정적이지 않고 수입이 불안정하다. 변호사 사무소에서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비정규직으로, 사실상 프리터에 가깝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문제점만 많은 가정인데, 과연 어떤 집안이 이런 집안과 결혼하려고 하느냐?!"는 것이 일본인들의 대체적인 반응이다.
그런 집안에 세금으로 곱게 키운 공주를 시집 보내는 것부터가 국민의 정서에 반하는 일인데도, 궁내청과 후미히토 내외는 제대로 대처하지 않고 있다.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궁내청과 2019년이 되어서야 친형 나루히토 황태자 차기 천황으로 오르면서 일개 황족에서 황태자에 준하는 직위를 얻게 되는 후미히토와 키코 비 내외가 국민의 혈세를 황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원칙 없이 함부로 쓰는 것 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궁내청은 현 아키히토 덴노의 생전퇴위 과정에서 "전례를 지켜야 한다"는 소리를 자주 한다. 하지만 코무로와 관련된 일들에 대해서는 유독 '전례'를 자주 어기고 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궁내청 또한 강하게 비난하는 것이다.
일련의 사고로 인하여 마코 공주에 대한 일본 내부의 여론이 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본디 마코 공주는 천황 부부의 첫 손주로 태어나 일본 국민들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고, 성년이 되어서도 황족 여성들 중에서는 독보적이라고 할 정도로 여론이 상당히 좋았다. 그런데 마코 공주가 신랑감으로 고른 코무로 케이를 보면, 황족의 눈높이로 고른 상대라기에는 너무도 민망한 수준이다. 게다가 여론이 좋지 않은데도 결혼하겠다며 어거지로 버티고 있으니, 그녀에 대한 시선이 고울 수 없다.
거기에 원래대로라면 이러한 행위에 적극적으로 규제를 가해야 할 키코 비나 궁내청도 침묵만 지키면서 마코 공주와 코무로 집안에 대한 비호에나 전념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가뜩이나 부정적인 여론에 기름을 끼얹는 형국이다. 예전에는 마코 공주의 공무가 언론에 보도되면 대부분 칭찬 댓글이 달렸는데, 요즘에는 호의적인 여론을 찾아보기 힘들다. 한때는 마코 공주가 황실의 아이돌 대접을 받았던 걸 생각하면 지금의 상황은 참으로 격세지감일 따름이다. 그동안 아키시노노미야 家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던 극우 계열 매체들과 극우 블로거들조차도, 마코 공주의 결혼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내놓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자, 기사에 따르면 미치코 황후조차도 마코 공주의 어머니 키코 비를 상당히 불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간 키코 비는 형님 마사코 황태자비와 달리 황족으로서 해야 하는 여러 가지 공무들도 상당히 열심히 하고, 시부모인 천황 내외에게도 싹싹하고 사근사근하게 굴며, 특히 41년만의 남자 황손인 히사히토를 낳아, 그동안 후사가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던 시부모로부터 점수를 많이 따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3남매의 교육 문제 때문에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에게 조금씩 불신을 사기 시작하다가, 결국 이번 큰딸 마코 공주의 결혼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점들로 인해 키코 비에 대한 시부모의 불신이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큰며느리보다 주목이 덜할 수밖에 없는 작은며느리인데도, 키코 비는 1990년 황실로 시집온 이래 지금까지 악전고투해 왔다. 이전까지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에 대해 세간에서 호평했던 것은 그녀의 공로가 크다. 그러나 그녀가 그동안 해온 노력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다만 이 사태를 키코 비의 탓만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2018년에는 후미히토가 마코 공주를 지지한 탓에 일이 꼬였고, 2019년 이후에는 후미히토도 반대로 돌아섰지만 스스로 포기하라는 식이다(...) 키코 비 입장에서는 속 터질 일.
기사에서 말하길, 키코 비와 마코 공주의 사이가 엄청 나빠졌다고 한다. 모녀 간의 대화가 끊겨서, 가정에는 무관심해 보이던 그 후미히토가 웬일로 중간에 중재까지 한다는 모양. 덕분에 아키시노노미야 궁저는 매우 살벌한 분위기라고 한다. 스트레스를 받은 키코 비가 고용인들에게 화풀이를 일삼는데, 그동안 키코 비의 갑질을 버틴 직원마저도 나가버릴 정도로 심각해져 궁저의 고용인들이 매우 자주 바뀐다고 한다. 한 주간지의 보도에 의하면, 한 유명 항공사에서 실력 좋기로 정평이 난 스튜어디스가 고용 면접 등에서 거의 만점에 가까운 높은 점수를 받고 아키시노노미야 궁저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런데 근무하던 중에 아주 사소한 실수를 하나 했고, 그걸 가지고 키코 비가 상상 초월로 갈구는 바람에, 스튜어디스는 이를 견디다 못해 그날로 사표를 내고 아키시노노미야 궁저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더구나 이건 히사히토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키코 비가 자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한다는 데에 더 큰 심각성이 있다. 현재에도 키코 비의 갑질 논란 때문에 "저러다 (히사히토의) 혼인이나 제대로 되려나"라는 우려가 많은데, 키코 비의 갑질에 학을 떼고 사표를 쓰는 고용인들이 속출할 정도로 아예 이렇게 대놓고 나오면, 히사히토가 혼인 적령기에 들어설 즈음엔 더욱 큰 문제가 된다. 어느 여자도 이런 시어머니를 모시기는 싫을 테니 누구도 히사히토의 아내가 되겠다고 나서지 않게 되고, 딸을 히사히토에게 시집 보내겠다고 할 집안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형님 마사코 황태자비와 시어머니인 미치코 황후가 시집 와서 겪은 고초를 생각하면, 키코 비의 이런 신경질적인 갑질은 아들 히사히토의 혼삿길을 떡잎부터 망쳐놓는 자충수다.
초기에는 궁저 내에서 졸업 후 자유 여행(해외 유학을 마치면 1달 가량 자유 여행을 주는 관습이 있어서 그걸 카코 공주가 상당히 기대한다는 언론 보도도 있었다.)을 포기하고 돌아온 카코 공주가 중재를 맡았지만, 도무지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2018년 11월 이후에는 아주 포기했다고 하며 매우 사이가 좋았던 자매 관계도 냉랭해졌다고 한다.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카코 공주는 학업에 옛날보다 집중하게 되었으며, 댄스에 매진하게 되었지만 ( 키코 비도 이건
6. 일본의 여론 변화와 일본 황실의 미래
일본은 당연히 제대로 뒤집어졌다. 안 그래도 아키시노노미야 家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영 여론이 좋지 않았는데, 이번 사태를 통해 궁내청도 아키시노 家를 지지하던 상황에서 손절하고 갈아탈 생각인지 하나같이 아키시노노미야 집안을 욕하는 상황. 이는 사고를 치지 않은 카코 공주와 히사히토의 여론도 매우 냉랭한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반면 양위선언 이후부터 지지가 올라가던 나루히토 家는 대대적인 푸쉬를 받아 사람들의 지지 아래에 천황에 즉위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상단에 나오듯 진지하게 아이코 공주가 차기 천황 후계자로 다시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다.마코 공주 결혼 논란을 통해서 본 후미히토 일가의 실상을 보면, 일본 황실이 다른 의미에서 위태로울 수도 있다. 히사히토 혼자 황실을 지탱하고 후사를 이어야 하는 것 이외에, 일본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계속 잃게 되면 결국 황실 존치의 위기까지 간다. 당장 여성 미야케 창설 반대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이는 이를 마뜩찮아 하는 아베 신조 총리가 더더욱 의제화하지 않을 구실만 만들어 준다. 이것만으로도 일본 황실은 정말로 미래가 불안정해지게 된다. 안 그래도 사람이 적어서 대가 끊어질락말락하는 수준인데, 만약 우려되던 대로 히사히토에서 대가 끊어진다면 그 뒤 진짜 공화정이 될 수도 있다. 여담으로, 예전부터 일본의 공화정을 지지해왔던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는 "황실이 자동 소멸하는 것으로 바뀌면 된다"라고 했는데,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나온 것.
그리고 여러 가지 정황상 히사히토의 승계가 안정적이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우선 나루히토의 승계가 사실상 확정된 뒤 곧바로 키코 비가 나루히토 일가와의 정양을 요청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해당 기사에서는 " 히사히토의 승계와 마코 공주의 결혼에 대한 협조를 얻고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배우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미치코 황후의 신뢰를 되찾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황실 관계자의 말이 있었다. 현재 미치코 황후는 키코 비의 히사히토에 대한 교육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는 등, 자녀 교육에 관한 한 작은며느리 키코 비에 대한 신뢰를 거의 접어놓은 상태다. 초기에 상당히 어려움을 겪은 아이코 공주를 부부가 성심껏 노력해 우등생으로 길러낸 나루히토 부부와 상당히 대조되는 상황. 궁극적으로 나루히토의 즉위 이후를 생각한다면, 키코 비에게 있어서 나루히토 부부의 도움이 절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황실에서는 천황의 말이 곧 황실의 법인데 자기들이 동궁이 된다고 해도 천황이 동궁 갈아치우겠다고 하면 그냥 동궁 나가야 한다. 동아시아 황실 내지는 왕실에서 황제나 왕의 눈 보기에 태자나 세자가 영 아니다 싶어서 갈아치운 케이스는 찾아보면 많다. 평소 사이가 안 좋은 데다 국민들의 여론까지 그러면 더더욱 그렇다.
분명 황실 회의로 히사히토의 승계를 확실하게 못 박았는 데도 불구하고 황실 관계자가 승계에 협조 운운하는 것은 나루히토가 차기 천황이 되면 천황의 권한을 이용해서 히사히토의 승계가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히사히토가 나루히토의 협조로 순조롭게 왕위 승계에 성공했다고 해도, 그 이후가 문제다. 혼인 문제도 그렇고, 무엇보다 히사히토가 승계할 당시의 일본 국내 사정이 어떻게 달라져 있을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이 발목을 잡고 있다.
게다가 히사히토가 천황의 자리에 오를 무렵쯤이면, 이미 황실 어른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그나마 젊은 사람들은 모두 여자라 결혼으로 황적을 이탈하여 히사히토는 사실상 혈혈단신이 되어있다는 건데, 이에 대한 조치 역시 불안정하다. 그나마 아키코 공주가 미카사노미야 家를 지키기 위해 평생 독신 선언한 정도. 후미히토가 아베 신조에게 "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가 미야케를 창설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지만, 마코 공주는 신랑감으로 거론되는 코무로 케이가 영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 당했다.
최근 여성 미야케 반대 논리가 다시 나와 많은 동조를 받고 있는 이유는, "(코무로 케이처럼) 황실 부마에 어울리지 않는 남성이 공주가 결혼할 경우, 이렇게 해서 황족이 된 남자가 일본 황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일본 국민들의 세금을 마구잡이로 낭비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출발한다. 참고로 이러한 논리는 과거 히사히토 출생 전 여성 미야케 창설 논의가 상당 부분 진척도를 가진 상태로 있을 때 우익/극우들의 주요한 반대 논리였다. 그리고 그 논리가 현실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도 원래대로라면 아이코 공주의 남편감에게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서 득을 볼 생각이었을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에서.
아키히토가 퇴위를 선언하자 궁내청 차관은 대놓고 반대하는 초유의 사태를 저질렀을지언정, 아베 신조 총리 이하 내각과 일본 의회는 장기 집권 등을 위하여 심도 깊게 진행하던 개헌 논의도 중단시키고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시켜 생전 퇴위에 관련된 법률들을 성립시켰다. 나루히토가 천황이 된 후 천황의 지위를 이용해 지금의 황위 계승법을 바꾸라고 일본 정부를 향해 무언의 압력을 가할 경우, 일본 정부 그리고 일본 국회는 절대로 그 말에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보인 것이다.
더구나 지금 히사히토의 큰누나인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으로 그동안 쌓인 불만이 한꺼번에 표출됨에 따라, 후미히토 일가의 천황 승계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감이 상상 이상으로 강해지고 있다. 당장 나루히토가 2019년 천황이 된 이후 주변 정리를 끝낸 다음 이러한 후미히토 일가에 대한 부정적인 일본 여론을 바탕으로 아이코 공주 한정 여성 미야케 창설 허락과 여성 천황 등극을 제기할 경우 천황의 요구에 일본 정부는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과거의 일이긴 하지만, 히사히토 출생 전 여성 미야케 논란이 있었을 당시 "황태자 일가의 유일한 자녀인 아이코 공주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천황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제법 되었을 정도로 일본 내에서의 아이코 공주의 천황 승계 관련 여론은 나름대로 호의적이었다. 당시 황태자 일가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상당했으며, 후미히토 일가에 대한 호감도가 상당히 높았던 시점이었는데도 그랬다.
일본의 역대 천황을 보더라도 여자 천황는 총 8명, 복위로 인한 중복을 포함하면 10회의 즉위가 있었다. 그리고 아스카 시대에는 진짜로 권세를 휘두르던 경우도 있었고, 나라 시대에는 아예 황태녀에서 즉위한 자도 있었다. 마지막 여자 천황이 즉위했던 것도 에도 시대로 몇백 년 안 되기에, 전례도 없던 생전 퇴위보다는 반대 측의 논리 자체가 상당히 빈약한 편이다. 정확히는 근대화 시기( 메이지 시대) 제정된 황실전범에 생전 퇴위를 금지했고, 그게 현행 황실전범에도 남은 것이다. 전근대 시절 천황들은 생전 퇴위를 밥 먹듯이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로 인한 후지와라 가문의 섭관 정치나 인세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참고로 마지막 생전 퇴위나 여성 천황 즉위도 대략 200여 년 전의 일. 정확하게는 마지막 여성 천황인 고사쿠라마치 덴노가 조카인 고모모조노 덴노가 어려서 기간 한정으로 천황으로서 활동했고 동생이 나이가 차자 곧바로 생전퇴위했으나, 고모모조노 덴노가 등극 9년만에 사망하자 현 황실 가문의 직계 조상이자 아키히토의 생전 퇴위 전 마지막으로 생전 퇴위한 고카쿠 덴노를 사후 양자로 들여오는 방식으로 옹립했다. 다만 고카쿠 덴노는 나이만 어렸지 촌수로는 오히려 고모모조노 덴노의 아저씨뻘이었다. 하지만 고카쿠 덴노 역시도 나이가 어려서 한동안 섭정을 하다가 완전히 물러났기에 천황의 생전 퇴위나 여성 천황이 사실상 같은 시기에 마지막에 이루어진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이 발생한 이후 황실에서는 구황족을 중심으로 아이코 공주의 부마 후보자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확하게는 현 황족들과 가장 가까운 히가시쿠니노미야 가문을 중심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히가시쿠니노미야, 아사카노미야, 키타시라카와노미야 및 타케다노미야를 제외한 나머지 구황족들은 현 황족들과 공통 조상은 레이겐 덴노로 올라가야 한다. 다만 타케다노미야 가문의 경우 2대 가주가 731 부대에 참여한 자라는 점과 2대 가주의 막내아들은 IOC/JOC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도쿄 올림픽 유치를 두고 뇌물수수 혐의가, 그 아들의 장남은 극우 활동을 해서 이들과 맺어지는 건 힘든 데다, 키타시라카와노미야는 2018년에 남계가 단절된 관계로 부마를 구할 수 없다. 아사카노미야의 경우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며, 이 때문에 사실상 히가시쿠니노미야 쪽과의 결합 가능성이 높다.
이는 아이코 공주의 가장 큰 약점인 여성이라는 걸 구황족과의 결혼으로 해결할 수 있기에 사실상 나루히토는 여전히 아이코 공주를 천황으로 만들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이며, 아이코 공주 역시도 가쿠슈인 초등과 때부터 편차치 70점대로 일본 전체 평균 1%에 달하는 엄청난 점수대를 자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심하지 않고 노력해서 성적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그 와중에도 부모님의 공무에 관심 있어 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아이코 공주 본인도 천황 자리에 제법 신경 쓰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마코 공주가 코무로 케이와의 결혼을 강행, 코무로 마코가 되면서 이러한 전망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생겼다.
[1]
대표적인 사례로는 황태자 부부의 공무 보도보다 후미히토 내외의 공무 보도를 더욱 강하게 해서, 공무를 하는 황태자 부부에 대한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안 좋게 만든 것이다.
[2]
어찌되었든
일본인들에게
천황이라는 존재는 상징 그 이상이다. 즉, 만약 총리라 해도 천황을 건드렸다가는 단번에 자리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3]
보통 황족들은 만 20세 성인이 되고 나서야 단독 공무를 하게 된다.
[4]
Taxonomy, MSc, St John’s College.
[5]
본인 문서에도 언급되어 있는 내용으로, 아키코 공주는 유학 당시 한 주간지에 미술사 관련 칼럼을 연재한 일이 있었는데, 국민의 세금으로 공부하고 있는 만큼 정기적으로 학업 상황에 관해 보고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서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칼럼을 연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6]
그리고 같은 기사에서
후미히토의
육아 참여에 대해서도 나왔는데, 그게 고작 '해외 공무를 갔을 때 전화로
마코 공주와 통화를 한 것'(...)
[7]
2004년 3월,
마코 공주의
가쿠슈인 초등과 졸업식에 참석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바로 다음 달인 2004년 4월 마코 공주의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입학식부터
후미히토는 참석하지 않고
키코 비만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