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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12:39

카롤루스 대제/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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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즉위 이전2. 프랑크 왕국의 단독왕으로
2.1. 아키텐 반란 진압(768~769)2.2. 형제 간의 분쟁과 프랑크 왕국 재통합(769~771)
3. 카롤루스 대제의 외정
3.1. 랑고바르드족과의 전쟁
3.1.1. 북이탈리아 정복 - 롬바르디아 철관을 쓰다3.1.2. 남이탈리아 장악 시도
3.2.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
3.2.1. 이베리아 반도 원정(778 ~ 779)3.2.2. 바스크족과의 분쟁(778 ~ 812)3.2.3. 에스파냐 변경백령의 성립3.2.4. 이슬람 해적 방어(798 ~ 799)
3.3. 동, 북부 전역
3.3.1. 작센 전쟁(772년 ~ 810년대)3.3.2. 바이에른 제압(788 ~ 789)3.3.3. 북부 슬라브족 원정(789)3.3.4. 아바르, 남부 슬라브족 전쟁(788~792, 795~799)3.3.5. 동로마 제국 전쟁(802 ~ 812)3.3.6. 데인족 전쟁(808 ~ 811)
4. 카롤루스 대제의 내정
4.1. 반발의 진압4.2. 카롤루스의 경제정책4.3. 카롤루스와 교회
5. 카롤루스와 교황
5.1. 로마 교회와 동로마 제국의 대립5.2. 프랑크 왕국과 교황 간의 관계5.3. 카롤루스 대제와 교황 간의 관계5.4. 서방 제국의 황제 즉위
6. 말년

1. 즉위 이전

카롤루스의 전기학자인 아인하르트는 <카롤루스 대제의 생애>를 저술하면서 카롤루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 "카를의 출생과 유년기 혹은 소년기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 문제에 관해 전해지는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다만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부왕이었던 단신왕 피핀 3세의 별장이 있던 아르스탈 시에서 피핀 3세와 그의 부인인 랑의 베르트라다(Bertrada of Laon)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했을 것으로 보인다.

카롤루스는 피핀 3세를 따라 많은 전쟁에 종군하였다. 그는 자기 아버지 피핀이 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쟁취하고 교황을 도와 랑고바르드 왕국을 물러서게 하며 셉티마니아로 진격하여 피레네 산맥 너머의 이슬람 세력의 교두보를 제거하고 아키텐 공국으로 쉬지 않고 원정을 가 결국 아키텐을 복속시키는 데 함께 하였다. 또한, 교황 스테파노 2세가 프랑크 왕국으로 직접 도움을 요청하러 왔을 때 이를 마중 나갔으며, 피핀 3세가 교황에게서 왕관을 받을 때 그의 동생 카를로만과 함께 그도 후계자로서 왕관을 받았다.

또한, 첫 번째 아내인 히밀트루드와의 결혼 기간은 이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카롤루스는 그녀가 기형아 자식[1]을 낳은 후부터는 그녀를 멀리하였다.

768년, 피핀 3세는 5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프랑크 왕국은 전통적인 분할계승에 따라 두 왕자에게 계승되었다. 당시 26세였던 카롤루스는 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 아키텐의 서쪽 및 북쪽을, 동생인 카를로만은 셉티마니아, 아키텐의 남동쪽, 부르고뉴, 슈바벤, 이탈리아 접경지역을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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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프랑크 왕국의 단독왕으로

2.1. 아키텐 반란 진압(768~769)

프랑크 왕국의 분할상속 전통은 오랫동안 내전을 유발하는 주요 요소가 되었다. 피핀 3세의 분할상속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전에 두 왕자가 직면한 것은 아키텐 공국의 반란이었다. 아키텐 공국의 지배자였던 오도 대공은 피레네 산맥 너머의 이슬람 세력과 프랑크 왕국 사이에서 오랫동안 반독립적 공국으로 버티다가 피핀 3세의 지속적인 원정에 결국 굴욕적으로 항복하고 말았는데, 그의 증손자였던 후날드 2세가 유폐되었던 수도원을 박차고 나와 아키텐의 독립을 되찾고자 한 것이다. 이에 카롤루스는 반란 진압에 들어가면서 카를로만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는데 카를로만은 이를 무시해 버렸고, 형제 간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어찌되었든 아키텐의 반란은 1년 만에 진압되었다. 반란의 주동자였던 후날드는 카롤루스의 공격을 피해 가스코뉴로 달아났는데, 카롤루스는 가스코뉴에 대해 후날드를 넘기든가 아니면 전쟁을 택하든가 둘 중 하나를 강요했고, 가스코뉴 공작 루퍼스 2세는 후날드를 카롤루스에게 넘기고 투항하였다.

2.2. 형제 간의 분쟁과 프랑크 왕국 재통합(769~771)

아키텐 반란은 두 형제 간의 분쟁을 격화시켰다. 카를로만은 카롤루스를 밀어내기 위해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인 데시데리우스와 동맹을 맺고 카롤루스를 몰아내기 위한 물자와 병력을 얻었다. 이는 교황을 경악시켰는데, 이 당시 교황과 동로마 제국 사이의 관계는 별로 좋지 못했고 설령 관계가 좋았다 하더라도 동로마 제국 또한 그리 여유있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랑고바르드족을 위협하던 프랑크 왕국이 랑고바르드족과 손을 잡는다면, 로마가 무방비 상태로 랑고바르드족에게 노출될 형편이었다.

여기에 두 형제의 어머니인 랑의 베르트라다까지 개입하여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베르트라다는 프랑크 왕국의 분열과 내전을 회피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카롤루스가 랑고바르드족과 동맹을 맺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우선 자치를 유지하던 바이에른 공작 타실로 3세를 중개인으로 삼아 랑고바르드족과 협상했고, 카롤루스와 데시데리우스의 딸, 당시 13살이었던 데시데라타와 정략결혼을 성사시켰다. 이는 카를로만과 랑고바르드족의 동맹에 위협받던 카롤루스의 위기를 넘기는 데에는 도움을 주었으나 교황의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사태였다. 당시 교황 스테파노 3세[2]는 이에 베르트라다를 격렬히 비난했지만 몇 개월 후에 사망하면서 교황이 개입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이러한 프랑크-랑고바르드족 동맹은 얼마 안가 파기되었다. 카롤루스가 데시데라타를 친정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이에 분노한 데시데리우스는 다시 카를로만과 협력하기 시작했지만, 정작 그 카를로만이 771년 봄에 사망했고, 곧바로 카롤루스는 카를로만의 영토를 접수했다. 카를로만의 아내인 게르베르가와 두 아들은 롬바르디아로 도주해야만 했다.

카롤루스는 이로써 프랑크 왕국의 단독 왕이 되었다.

3. 카롤루스 대제의 외정

이 당시 프랑크 왕국 동로마 제국이나 이슬람 세력보다 경제적 기반이 빈약했다. 왕국은 지속적이고 끊이지 않는 군사적 성공에 기반하고 있었으며, 지속적인 전쟁의 승리를 통한 전리품의 획득으로 군대를 유지했었다.

그렇기에 카롤루스는 47년에 걸친 치세 동안 매년 전쟁에 나섰다. 그의 원정은 헝가리 초원지대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전리품으로 국가를 꾸리고, 군대를 강화시켜 나갔다. 그에게 있어 전쟁은 곧 외정이자 내치였다.

물론 그가 외국과의 관계에 있어 전쟁만 벌인 것은 아니다. 카롤루스는 잉글랜드의 브레트왈다(Bretwalda)인 머시아의 군주 오퍼(Offa)와는 상당한 친교를 맺었었다. 거기다 그는 서방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로 인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세력인 아바스 왕조와 교류하여 하룬 알 라시드와 긴밀한 동맹 관계를 맺어 후우마이야 왕조 및 동로마 제국을 견제하였다.[3]

3.1. 랑고바르드족과의 전쟁

3.1.1. 북이탈리아 정복 - 롬바르디아 철관을 쓰다

초창기 카롤루스의 주요 공격 목표는 작센족과 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 왕국이었다. 이 시기 카롤루스의 군사적 행보를 보면 작센 족을 공격했다가 이탈리아로 넘어와 랑고바르드 왕국을 공격했다가를 반복한다.

프랑크 왕국의 재통합 과정에서 랑고바르드 왕국 사이의 관계는 매우 약화되었다. 또한 교황 스테파노 3세가 선종한 후 교황청과의 관계도 갈수록 약화되었다. 772년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즉위 후 바로 교황청 내의 친랑고바르드 세력을 일소하고 시종장을 투옥시키는 강경책을 수행하였다. 이에 대해 데시데리우스는 다시 한번 교황청으로 군대를 파견, 막 즉위한 교황 하드리아노 1세를 위협했으며, 이에 교황은 랑고바르드군을 상대로 파문시키겠다며 위협하는 동시에 카롤루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카롤루스는 최초의 대외원정인 작센족 원정을 나가 있는 상태였고, 이에 결국 하드리아노 1세는 데시데리우스의 무력에 굴복하며 카를로만의 두 자식이 카를로만이 남긴 유산의 정당한 상속자라는 선언을 하고 말았다. 이는 카롤루스에게는 상당한 정치적 위협이었다. 카롤루스가 카를로만의 영토에 대한 적법한 상속자라는 주장은 여러모로 헛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교황 입장에서도 '야만인'인 랑고바르드족의 무력에 굴복하고만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773년 초, 교황 하드리아노 1세와 데시데리우스는 거의 동시에 카롤루스에게 자신을 지지해 달라고 사절을 보낸다. 이에 대해 카롤루스는 교황의 편을 들기로 결정하고, 6월에 마치필드[4]로 군을 소집,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 기록에 따른 차이가 있지만 이때 프랑크군은 최소 1만, 최대 3만 5천에 달하는 강력한 군대였다. 6월, 프랑크군은 제네바에서 둘로 나뉘어 움직였고, 카롤루스는 그의 숙부인 베른하르트에게 절반의 군사력을 맡겼다. 이후 알프스를 돌파한 두 군대는 8월 중순에 재합류, 수사에서 데시데리우스의 군과 격돌하여 이를 깔끔하게 완파하고 파비아로 몰아넣었다.

파비아 공성전은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었다. 그러나 카롤루스는 파비아에만 붙들려있지 않았다. 대군의 이점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크군은 파비아를 포위공격하면서 동시에 일부 군을 나누었고, 카롤루스는 이를 직접 지휘하였다. 그는 베로나에 있던 데시데리우스의 아들 아달기스를 혹한을 뚫고 기습공격을 가해 격파, 곧바로 밀어붙여 제노바까지 함락했으며 이후 남진하면서 곳곳에 흩어져있던 랑고바르드족의 군대를 모두 격파하고 774년 4월, 로마로 입성하여 교황과 회담을 가진 후 다시 북상, 파비아를 공격하는 프랑크군과 합류하였다. 그리고 그해 6월, 파비아는 함락되었고 데시데리우스와 카를로만의 자식들은 포로로 잡혔으며[5] 7월에 카롤루스는 롬바르디아 철관을 쓰고 랑고바르드 왕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랑고바르드 왕국의 잔존세력들은 여전히 많았다. 랑고바르드 왕국은 워낙에 귀족의 세가 강한 국가였으며, 각지의 공작들은 거의 왕에 준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775년 작센족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파비아에 수비대를 남겨두고 알프스를 넘어간 사이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은[6] 베네벤토, 스폴레토, 프리울리, 토스카나 등 중부~남부 이탈리아 일대의 랑고바르드족 공작들은 반프랑크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카롤루스는 776년 다시 알프스를 넘었다. 작센족 원정 와중에 돌아와야만 했던 카롤루스는 랑고바르드 봉기에 대해 초토화작전을 수행했으며, 프리울리 공작을 전사시키고 베네벤토 공작 아라키스에게 굴복을 강요, 복종시켰다. 때마침 랑고바르드 봉기를 지원하던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5세가 사망하면서 동로마 제국이 손을 떼자 더 이상 랑고바르드 왕국의 잔존 세력들은 카롤루스에게 대향할 힘이 없었고, 결국은 굴복하였다. 이로써 북부 이탈리아는 프랑크 왕국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3.1.2. 남이탈리아 장악 시도[7]

786년, 베네벤토 공작 아레치스 2세 교황청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이에 대응하여 카롤루스는 로마로 직접 행차하여 이를 저지했다. 그러나 카롤루스가 북쪽으로 돌아간 직후 아레치스 2세는 곧바로 동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 다시 반기를 들었다. 그는 동로마 제국에게서 남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중북부 이탈리아 지배권을 공인받은 황제의 대리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카롤루스는 다시 이탈리아로 내려와 살레르노를 공격, 베네벤토 공국을 일시적으로 복종시켰으나, 곳곳에서 전쟁을 진행 중이던 카롤루스는 오랫동안 이탈리아에 있을 수 없었고, 그가 귀환하자 상황은 다시 되풀이되었다. 791년, 792~793년, 800년, 801년 카롤루스는 직접, 또는 자신의 수하를 움직여 베네벤토 공작을 공격해 복종시키고자 했지만 설령 우위를 점해 복종을 받아낼 때에도 언제나 바로 그 직후 원상태로 되돌아갔다. 카롤루스의 남 이탈리아 장악 시도는 결국 베네벤토 공작이라는 벽을 넘지는 못한 셈이다.

베네벤토 공작은 이탈리아 내에서 카롤루스와 교황의 연합을 지속적으로 견제해 온 동로마 제국의 대리인이었고, 그와의 전쟁은 동로마 제국과의 대리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슬람의 진격 속에서도 에게해와 아드리아해의 제해권을 지켜낸 동로마 제국의 해군은 베네벤토 공작에게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지원군이나 마찬가지였고, 경제력 측면에서 프랑크 왕국과는 넘사벽이나 다름없었던 동로마 제국의 재원은 베네벤토 공작에게는 무한에 가까운 재기의 발판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카롤루스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했지만 몸이 하나뿐인 카롤루스가 프랑크 왕국에서 상당히 머나먼 곳에 있는 남 이탈리아에 집중하기에는 전선이 너무 많았다. 어쨌든 카롤루스는 죽을 때까지 남 이탈리아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지만, 남 이탈리아 지역 또한 마찬가지로 끝까지 카롤루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카롤루스는 중북부 이탈리아에선 우위를 점했으나 남 이탈리아에선 동로마 제국에게 우위를 내준 것이었다.[8]

3.2.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

프랑크 왕국이 서유럽에서 가장 강성한 기독교 세력임을 입증한 것은 투르 푸아티에 전투 등을 통해 그들이 이슬람 세력들을 군사적으로 저지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맞상대한 것은 동로마 제국에 비하면 약소한 지방 세력에 가까웠지만[9] 무시할 만한 세력인 것은 아니다. 카롤루스 왕조가 들어선 것도 이들이 이슬람 세력 저지에 앞장섰고, 그만한 실적을 올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슬람 세력과의 투쟁에서 카롤루스는 다른 지역처럼 인상적인 실적을 올리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성공을 거두었다. 이전처럼 이슬람 세력을 저지하는 정도를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공세를 가해 카탈루냐 일대를 차지하는 등 레콩키스타의 신호탄을 울렸으며, 이슬람 해적들의 발호도 군사적, 외교적 수단을 동원해 어느 정도 지연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이슬람 세력과의 투쟁은 카롤루스 전설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샤를마뉴의 12기사로 대표되는 무훈시를 보면 많은 부분이 이슬람 세력과의 싸움으로 되어 있다.

3.2.1. 이베리아 반도 원정(778 ~ 779)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을 지배하는 알안달루스 세력은 프랑크 왕국과 대등한 국력과 잘 구축된 행정조직체계, 군사력을 보유한 강국이었다. 카롤루스는 이런 알안달루스 세력을 상대로 대대적인 원정을 가했으나, 최초의 군사적 실패를 맛본다. 이는 군사적 성공이 체제 유지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카롤루스 정권 입장에선 뼈아픈 타격이었다. 결국 그는 '히스파니아의 왕(rex Hispanicum)'이 되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777년 봄, 카롤루스는 랑고바르드족 반란으로 중단되었던 작센족과의 전쟁을 겨울 내내 지속하는 강행책을 통해 어느 정도 승리를 거두고 베스트팔렌의 파더보른으로 귀환해 의회를 소집했다. 이때 바르셀로나와 지로나, 우에스카 지사가 파더보른까지 와서 카롤루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는 크게 세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하는 알-안달루스 왕조( 후우마이야 왕조), 이에 복종하지 않고 멀리 아바스 왕조에 충성을 바치며 자치를 누리던 지사들, 그리고 서북부 산악지대에 존재하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세력이 그것이다. 이 중 가장 강성한 세력은 알-안달루스 왕조로, 이때 이미 이베리아 반도의 2/3을 장악하고 꾸준히 북상해왔다. 이에 자치권을 누리던 바르셀로나, 사라고사, 우에스카, 지로나 등 동북부 지역의 친아바스계 지사들은 알-안달루스조의 세력팽창을 저지할 수단으로 한참 기세등등하던 프랑크 왕국을 끌어들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또한 이들은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 또한 알-안달루스 왕조의 세력팽창을 당혹해하고, 이들 지사들의 중개를 통해 아바스 왕조와도 협력작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들 지사들은 프랑크족에게 피레네 북동쪽 약간의 땅을 넘겨주는 대가로 알-안달루스의 군대를 막아낼 용병을 기용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카롤루스와 프랑크 귀족들은 이에 응했다. 이들의 생각은 단순히 용병 수준이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베리아 반도도 정복하겠다는 것을 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카롤루스는 778년 여름 "자신이 총력을 기울여 동원한 부대의 선두에 서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섰던 것이다. <프랑크 왕 연대기>는 당시 프랑크군이 프랑스 거의 전 지역에서 동원된 군대라고 기록하고 있다. 언제나처럼 군을 둘로 나누어 신뢰하는 베른하르트 공작에게 절반을 맡기고, 카롤루스는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이들은 사라고사에서 다시 재합류, 약속된 지사들의 군대, 그리고 아바스 왕조의 원정군과 합류해 남진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알-안달루스 측은 이에 신속히 대응하였다. 우선 아바스 왕조의 원정군을 먼저 격퇴한 후 성전을 내세우며 지사들에게 자신들과 협력할 것을 강요하여 프랑크족의 군대로 가는 지원군을 끊고자 시도하였고, 이는 상당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거기다 프랑크 왕국의 군대가 너무 규모가 컸기 때문에 이들의 의도에 대한 의심이 확산되었고, 협력을 약속했던 지사들의 대표격인 사라고사 지사는 약속을 취소해 버렸다. 이에 분노한 프랑크군은 사라고사를 공격해 보았지만 1달여에 걸친 공성에도 도시는 함락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작센족이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켜 라인 강 서안까지 확산되자 카롤루스는 결국 귀환을 택한다. 거기다 장기 원정을 위한 중간기지로 활용하고자 한 바스크족의 도시인 팜플로나까지 문을 닫자 분노한 카롤루스는 바스크족이 이슬람과 동맹을 맺고 있다고 여겼으며 팜플로나를 함락시키고[10] 파괴해 버린 후 철수하였다. 이에 바스크족은 철수하는 프랑크 군대의 후미를 론세스바예스(롱스보) 고개에서 공격하였고, 브르타뉴 변경백 흐로들란드(Hrōþiland)가 지휘하던 프랑크 후위부대를 전멸시켰다.

이 일은 롤랑의 노래의 소재가 되었다. 다만 '기독교 vs 이슬람'이라는 대립구조 속에서 론세스바예스 고개에서 프랑크군을 전멸시킨 게 '기독교 세력' 인 바스크족이었다는 사실은 어느샌가 잊혀졌다. 전설이 구전되면서 적 세력은 바스크족이 아니라 이슬람 세력으로 잘못 이해되었다. 덤으로 롤랑의 노래에서는 롤랑이 죽은 후 프랑크군이 이교도 대군단과 전투를 벌이고 사라고사까지 함락하지만 실제로 프랑크 왕국은 아바스 왕조와 동맹을 맺고 있었고 사라고사 함락은 실패하였기 때문에 순수한 창작이다. 승리에 대한 열망이 반영되어 대리만족을 위한 대체역사물같이 된 셈이다.

3.2.2. 바스크족과의 분쟁(778 ~ 812)

이베리아 원정 과정에서 카롤루스는 피레네 서쪽을 중심으로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와 프랑크 왕국 남서부에 거주하는 바스크족과 마찰을 빚게 되었다. 이 지역은 가스코뉴 백작이 투항한 이래로 프랑크 왕국의 영향력 하에 들어있다고 간주된 지역이었으나 카롤루스가 팜플로나를 공격, 함락시킨 시점에서 더는 그렇지 않았다. 바스크족은 프랑크 왕국과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 양쪽 모두에 대해 투쟁하기 시작했고 작센족과 피튀기는 혈투를 벌이고 있던 카롤루스 입장에선 무척 난감한 상대가 되었다.

카롤루스는 이에 대응해 아키텐 왕국을 세운다. 이 왕국은 아키텐 지역에 세워진 것으로, 어디까지나 프랑크 왕국에 종속된 왕국이었으나, 이찌되었든 자체적으로 군사 활동이 가능한 종속 국가였다. 최초의 왕으로 세워진 것은 루이 1세, 나중에 카롤루스가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로 '경건왕 루이 1세'라 불리는 바로 그 인물이었다. 카롤루스는 이렇게 함으로써 많은 인구를 보유한 아키텐 지역은 오로지 바스크족과 피레네 산맥 너머의 이슬람 세력을 상대하는 데에 전담하도록 하고 자신은 동부, 북부지역으로 나아간 것이다.

바스크족과의 분쟁은 788년, 툴루즈 백작이 알라릭이라 불리는 지역 지도자에게 포로로 잡히면서 확대된다. 이는 카롤루스에게는 자신의 봉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졌고, 자신이 신임하는 신하였던 젤노르의 윌리엄을 새로운 툴루즈 백작으로 내려보내 대응하게 한다. 그는 790년 알라릭을 제거했고, 뒤이어 바스크족을 압박해 들어갔다.

거기다 피레네 산맥 너머에 설치된 에스파냐 변경백령이 서쪽으로 확대되면서 바스크족은 이쪽 방향으로도 압박을 받았다. 이 지역의 프랑크 왕국 지도자들은 이슬람의 북진 당시에도 고집스럽게 기독교를 고수한 바스크족이야말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가는 것을 뒷받침하는 적절한 발판이 되리라 생각했고 바스크족을 다시 프랑크 왕국의 지배권 안으로 넣고자 압박하였다.

결국 812년, 카롤루스 왕조는 피레네 산맥을 온전히 점유했고, 바스크족은 굴복하고 말았다.

3.2.3. 에스파냐 변경백령의 성립

카롤루스의 이베리아 원정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카롤루스가 이 지역을 포기한 것만은 아니다. 카롤루스와 그의 대리인, 후에 그의 후계자가 되는 아들 루이는 지속적으로 공세를 퍼부어 결국에는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하는 카탈루냐 지역을 영향력 하에 넣어 에스파냐 변경백령(Marca Hispánica)를 설치하는 데 성공한다. 에브로 강 이북지역을 프랑크 왕국의 영역으로 집어넣은 것이다. 이는 이제까지 종종 피레네 산맥을 넘어 노략질을 자행하던 이베리아의 이슬람 세력이 프랑크 왕국에게 오히려 수세로 몰렸음을 나타낸다 할 수 있다. 물론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갖춘 알-안달루스 왕조를 상대로 완전한 정복은 불가능함이 입증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베리아를 포기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에 카롤루스는 그의 아들인 루이(후의 경건왕 루이 1세)를 아키텐 왕으로 세우고(781년) 이 지역을 전담시켰다. 루이는 부친의 기대에 부응하여 785년 지로나를 잠깐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에브로 강 근방까지 프랑크 왕국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이에 대응하여 793년 압드 아르-라흐만 1세의 후계자, 히샴 1세가 지하드를 선언하고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공격함과 동시에 피레네 동쪽 셉티마니아 탈환까지 시도했다. 이 당시 카롤루스와 그의 군대는 헝가리에서 아바르의 군대와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주력군이 빠진 틈을 타서 단신왕 피핀 이전 상황까지 되돌려 놓고자 한 것. 그러나 이 군대는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두고 막대한 인질과 보물을 얻었지만 결국 완전한 정복에는 실패하고 물러나고 만다.

이에 이쪽 방면을 맡은 아키텐의 루이는 기스코니, 나바라 및 기타 기독교 영지들의 연합군을 이끌고 반격에 들어가 결국 801년, 2년여에 걸친 공성전 끝에 바르셀로나를 함락시키고 에스파냐 변경백령을 설치했다. 이후로도 프랑크 왕국은 나바라 왕국과 에스파냐 변경백령을 중심으로 히스파니아 일대를 거듭 습격했고, 에브로 강 이서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3.2.4. 이슬람 해적 방어(798 ~ 799)

랑고바르드 왕국 정복은 카롤루스에게 서 지중해의 중요한 섬들, 즉 코르시카, 사르데냐, 발레아레스 제도들에 대한 지배권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당시 지중해의 제해권을 잡고 있던 것은 무슬림 해적들이며, 에게 해와 아드리아 해를 꽉 잡고 있던 해군 덕분에 해적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동로마와 달리, 해군이 없었던 카롤루스는 이들을 막을 방법이 전혀 없었다.

798년~799년 사이 무슬림 해적들은 이들 섬들을 약탈하고, 지배권을 빼앗아갔다. 이를 빌미로 제노바와 토스카나의 귀족들은 카롤루스의 권위에 반항하였다. 카롤루스는 이들의 반항을 제압하면서 801년,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와 협정을 맺고 이들을 통제해 줄 것을 요구하여 응답을 받았다. 하룬 알 라시드는 인도코끼리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3.3. 동, 북부 전역

3.3.1. 작센 전쟁(772년 ~ 810년대)[11]

작센족과의 전쟁은 카롤루스 치세의 거의 2/3을 차지할 정도로 길었고, 매우 잔인한 전쟁이었다. 명분은 이단 척결과 기독교의 전파였다. 카롤루스는 정복과 지역 흡수에 공격적인 기독교 선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최초의 왕 중 한 명이다.

카롤루스는 개종을 명분으로 무력토벌을 지속적으로 밀어붙였고 굴복(개종)하지 않을 경우 초토화와 대량 학살 등의 잔혹한 수단을 동원했다. 무력 선교를 조장했던 교황청에서조차 지나치게 잔혹하다면서 말릴 정도였다. 카롤루스의 이런 잔혹한 만행에 대한 작센족의 저항 또한 맹렬하여 라인 강 이동 프랑크 왕국 본토까지 유린하는 등 혈전이 벌어졌다. 작센족이 완전히 무릎을 꿇기 전까지 카롤루스는 몇 번이나 다른 곳에서 전쟁을 벌이다가도 작센족과 싸우기 위해 돌아와야만 했고, 이는 카롤루스를 매우 분노하게 했다.

이들의 대족장은 데인족 왕의 동서인 비두킨트였다. 그는 매우 용맹스런 전사였다고 한다.[12] 주요 교전 지역은 베스트팔렌으로, 이 지역에서 카롤루스는 몇 번이나 반복된 전쟁을 벌였다.

최초의 전쟁은 772년 여름이었다. 카롤루스는 프랑크 왕국을 통합한 직후 최초의 원정 대상으로 작센족을 짚었는데 이는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던 작센족과의 분쟁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 해에 그의 군대는 엠스 강을 건너 베스트팔렌에서 승리를 거두고 비두킨트를 추격했지만 덴마크 지역으로 달아나는 그를 잡지 못하고 놓쳤다. 그래도 작센족의 성지이자 토템인 이르민술을 베어버리고 그 근방에서 적지 않은 전리품을 얻었으며, 이는 다음 해의 랑고바르드 왕국 원정의 주요 군자금이 되었다.

작센족은 774년 프랑크 왕국을 상대로 선공을 걸었다. 이들은 두 해 전의 카롤루스의 원정으로 주요 성지였던 이르민술이 파괴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라인 강 동쪽 마을들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프리츨라르 수도원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에 775년 파비아가 함락된 후 카롤루스는 정예군을 이끌고 북상, 키에르지에서 대의회를 소집하고 "신앙 없는 이교도 작센 사람들을 압도적으로 패배시켜 기독교에 굴복시키든지 아니면 전멸시킬 것"을 선언했다. 카롤루스는 잉글랜드 지역 노섬브리아 왕국에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로 야만적이고 잔혹한 보복공격을 가하여 이를 굴복시켰다. 그러나 776년 랑고바르드족 공작들이 봉기하면서 이는 일시적으로 중단된다.

777년 가을, 작센 정복은 재개되었다. 파더보른 개간지를 거점으로 한 프랑크 왕국 군대는 작센족에 대한 무력을 동반한 공격적인 강제개종, 강제이주, 그리고 프랑크 귀족들에 대한 토지 하사와 정착을 실행하였다.[13]

778년, 카롤루스는 작센족의 재봉기로 인해 이베리아 원정에서 귀환해야만 했다. 프랑크 군대의 잔혹한 공격에 복수의 칼을 갈던 작센족의 봉기는 매우 격렬하여 프랑크 왕국의 중심부인 라인 강 서안의 상당수 지역까지 작센족의 약탈이 계속되었다. 거의 왕국의 존망까지 위협받은 카롤루스의 반격 또한 격렬했다. 779년 6월부터 782년까지 실시된 카롤루스의 반격은 대량학살이 동반된 것이었다. 베네딕토회 수도원장 스투르미가 전사하자 카롤루스는 수도원 세력도 통제하여 작센 지역을 지역별로 나눈 후 주교를 파견하였다. 강제이주와 대규모 강제개종이 이루어졌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강압에 의한 것이었고 일시적인 일이었다.

782년 여름 카롤루스는 작센 지역에서 회의를 소집했고 작센 지역의 평정을 과시했다. 하지만 바로 그해 가을, 작센족 대족장 비두킨트는 최대의 작센족 반란을 일으켰다.[14] 작센 지역에 주둔하던 프랑크군은 쥔텔에서 괴멸당했고, 카롤루스의 시종장, 근위대장마저 전사했다. 신뢰받던 작센족 용병대까지 이탈했으며 프리지아족, 벤드족까지 작센족 군대와 합류했다. 그러나 카롤루스는 이 또한 결국 진압한다. 그가 직접 지휘하는 군대가 작센족의 숲속 정착지인 베르덴 부근으로 작센족 주력군을 몰아넣어 4,500여 명에 달하는 포로를 생포했는데, 카롤루스는 4,000여 명의 포로 전원을 모두 학살했다. 이를 베르덴 학살이라 부른다. 이 충격적인 학살로 작센의 저항의지가 한풀 꺾이며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학살은 상당히 충격적이어서 하드리아누스 교황마저 이를 '잘못된 열광의 결과'로 칭할 정도였다.[15] 어찌되었든 베르덴 학살로 작센족의 핵심 전사계급이 대거 제거당하자 작센족의 기세는 꺾였고, 결국 785년 지도자였던 비두킨트가 항복하여 개종하면서 작센족 정벌은 일단락된다.[16]

785년 비두킨트가 항복하자 카롤루스는 작센 법령집을 만들어 반포하는데, 이에 따르면 34가지 비기독교적 관행은 사형, 11가지는 무거운 벌금형을 언급하고 있다. 이때 사형으로 언급된 죄로는 왕에 대한 불경한 행동, 성직자 살해, 명문가 처녀에 대한 강간, 교회 모독, 교회재산에 대한 독단적인 절도와 파괴, 반발하는 이교도인과 음모 꾸미기, 우상숭배, 마녀의 희생,[17] 인육 먹기 등이 있었다. 또한 이후에도 작센 지역에 지속적인 강제이주와 종교적 제제, 제약을 부과했다.

하지만 비두킨트의 항복 이후에도 작센족의 저항은 20여년간 지속되었다. 카롤루스가 아바르 정벌을 떠난 사이 792년 작센족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규모가 커서 아바르에게 향했던 원정군이 귀환해야만 했다. 카롤루스의 장남 곱추 피핀의 반란이 실패한 후 795년 다시 작센족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으나 카롤루스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796년 다시 작센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으나 카롤루스는 작센족을 진압하는 동안 주력군을 크로아티아로 원정보내는 여유를 보이기까지 했다. 비록 작센족의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크로아티아로 원정간 주력부대는 참패를 겪었다. 804년 작센족의 반란이 진압되고 작센 공국이 설치되면서 작센족은 프랑크 왕국에 완전히 복속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810년대를 끝으로 카롤루스에 대한 작센족의 40년에 가까운 항쟁사는 막을 내린다. <카롤루스 대제의 생애>에 따르면 작센족의 반항은 33년에 걸친 장기간이었다고 하며, 기타 서적에서도 작센족의 저항은 810년대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3.3.2. 바이에른 제압(788 ~ 789)

랑고바르드 왕 데시데리우스의 사위로 자치권을 누리던 바이에른 공작 타실로 3세는 확장되어 가는 프랑크 왕국의 영역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바이에른 지역은 메로빙거 왕조 시절부터 프랑크 왕국의 영역이기는 했으나 이는 사실상 명목상의 종주권이었고, 그 지역 토착 유력자를 공작에 임명하고 자치권을 보장해준 정도에 불과했다. 그는 바이에른 지역의 자치권이 프랑크 왕국의 멈추지 않는 팽창 속에서 위기에 처했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에 788년, 그는 아바르족과 방어 동맹을 맺으며 카롤루스에 대해 저항하였으며, 그가 바이에른 지역을 아바르족에게 개방하면서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북부, 프리울리 등 내륙지역이 아바르족의 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프랑크 왕국과 바이에른 공작령 사이에는 압도적인 실력 차가 존재했다. 카롤루스는 바이에른과 게르마니아 지역의 경계선인 레흐 강가에 군을 모아 바이에른을 압박하는 동시에 교황을 움직여 바이에른을 파문하겠다는 협박을 이끌어냈고, 결국 1년만에 타실로 3세는 굴복하고 만다. 그는 프랑크족 법정에 붙여졌고, 직위와 생명은 유지했지만 영토는 빼앗겼다. 그는 바이에른 지역에 대한 정당한 지배권을 계속 주장했지만, 끝내 79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바이에른에 대한 지배권 주장을 포기하고 두 아들과 함께 수도원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바이에른 지역이 프랑크 왕국에 편입되면서 잘츠부르크에 설치된 대주교좌에 편입되었다. 이 당시 교회조직은 곧 카롤루스의 행정조직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는 바이에른 지역이 완전히 프랑크 왕국의 소유가 되었다는 뜻이다.

3.3.3. 북부 슬라브족 원정(789)

아바르족은 판노니아 지역을 기점으로 다뉴브 강 중, 하류 일대를 아우르며 강력한 세력을 지녔던 유목민족 국가였다. 이들은 626년 사산조 페르시아와 연합해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시도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보유했고[18] 이후에도 막대한 공물을 받을 정도로 세력이 강했다. 그러나 679년 불가르 왕국이 성립되면서 아바르족의 힘은 크게 약화되었고, 거기다 동로마 제국이 종종 분열 공작을 벌이면서 자주 내전이 벌어져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세력이 많이 약화된 상태였다.

788년 아바르족의 내륙 습격은 카롤루스의 군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후 곧바로 바이에른을 무릎꿇린 카롤루스는 우선 아바르족의 영향력 하에 있던 슬라브족들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넣고자 하는 원정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카롤루스의 오랜 적이었던 작센족과 연합해 카롤루스에게 대항한 적도 있기 때문에 카롤루스는 이 지역에 대한 자신의 우위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789년, 카롤루스는 아우스트리아와 작센 지역에서 징집된 군대를 이끌고 북부 슬라브족 중 가장 강성한 빌츠족(Witzes)을 목표로 엘베 강을 넘어 원정을 수행하였다. 빌츠족의 지도자인 비친(Witzin)은 곧 포로로 잡혀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외에는 <카롤루스 대제의 생애>에 따르면 이 원정에서 큰 교전은 없었던 걸로 보이는데 이는 당시 북부 슬라브족들이 데인족( 바이킹)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카롤루스와 싸우기보단 그의 우위를 인정하고 대신 데인족을 상대하는 데 도움을 얻고자 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카롤루스는 이후 793년, 노달빙기아(Nordalbingia)와 베스트팔렌을 점령하여 이 지역의 거점으로 삼고 수도자들을 파견해 개종작업에 들어갔다. 이후 이들 슬라브족은 최소한 카롤루스 생전에는 충실한 동맹세력으로 남았다. 795년의 작센족 반란 당시 이 지역의 슬라브족들은 카롤루스에게 전사들을 지원해 주었다.

3.3.4. 아바르, 남부 슬라브족 전쟁(788~792, 795~799)

카롤루스가 북부 슬라브족에 대한 원정을 수행하는 동안 다뉴브 강 일대에는 카롤루스의 아들 피핀의 지휘 아래 아바르족에 대한 방어와 반격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당시 카롤루스는 이전에 군대를 둘로 나눠 움직이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군을 셋으로 나누어 움직였는데, 이는 그만큼 프랑크 왕국의 군대가 한층 강력해졌음을 뜻한다.

788년 아바르족의 공격에 대한 방어로 시작된 전쟁은 790년부터는 아바르족 본토에 대한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피핀이 이끈 랑고바르드 군대는 791년 드라바 계곡을 지나 아바르족의 본토인 판노니아로 진격했으나 페스트로 인해 군대가 타격을 받았으며 작센족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면서 그 이상의 진격을 멈췄다.

작센족의 반란이 정리된 후인 795년, 카롤루스가 직접 지휘하면서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다. 카롤루스의 전기인 <카롤루스 대제의 생애>에서도 이 전쟁은 매우 치열했고 어떤 전쟁보다도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796년 아바르족의 핵심 야영지[19]가 프랑크 왕국군의 손에 떨어지고 그곳에 비축되어 있던 모든 재화가 프랑크 왕국에게 빼앗겼다. 카롤루스는 이후 귀환하여 자신이 획득한 전리품들을 주변의 여러 세력들에게 배분할 수 있었다. 프랑크 왕국은 다뉴브 강과 드라브 강 사이의 아바르 세력권 서쪽 부분을 흡수했다. 결국 796년에 아바르족들이 항복하자 그들을 개종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프랑크 왕국의 세력권 하에서 국경선 일대에 위치한 변방 왕국으로 존속시켰다. 그리고 804년, 아바르족은 1차 불가리아 제국의 지도자 크룸의 공격을 받아 다시 서쪽으로 떠밀려왔다.

아바르 세력의 붕괴는 곧 크로아티아 일대의 남부 슬라브족에 대한 정복으로 이어졌다. 796년 아바르족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 후 카롤루스는 달마티아, 슬라보니아, 크로아티아 일대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였다. 이 지역을 담당하던 프리아울 공작 에리히가 테르사토 공성 도중 기습공격을 받아 전사하는 등 저항이 거셌기에 완전한 편입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카롤루스는 이 지역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다.

3.3.5. 동로마 제국 전쟁(802 ~ 812)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은 카롤루스가 800년 황제로 추대되면서 일어났다. 물론 이는 카롤루스 입장에서도 좀 당황스러운 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교황에 의해 황제의 관이 씌워졌기 때문에 자신의 황제로서의 정통성이 교황의 손에 달려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카롤루스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802년 당시 동로마 제국을 지배하던 여제 아테네의 이리니에게 청혼하였다. 살리카법에서도 알 수 있듯 게르만족의 입장에서 여성 통치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동로마 제국에는 황제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는 동로마 제국 입장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20] 아무리 제국이 어려운 상황이라도 그렇지, 글자를 몰라서 열십자를 긋는 걸 서명으로 대신하는 야만족을 황제로 받아들인다는 건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던 동로마 제국의 구성원들로서는, 바로 그 때문에 이리니가 이를 수용할 것처럼 보이자 쿠데타를 일으켜 그녀를 폐위시키고 니키포로스 1세를 옹립하기까지 하였다.

이리니가 폐위되면서 혼담이 중지되자 카롤루스는 제위를 인정받기 위해 동로마 제국과도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애초에 두 나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전쟁은 주로 아드리아 해 일대를 중심으로 펼쳐졌는데, 카롤루스는 이 전쟁의 대부분을 자신이 랑고바르드 왕으로 세운 아들 피핀을 대리인 삼아 전담시켰다.

주요 교전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펼처졌다. 805년 베네치아 내부의 파벌분쟁 및 인접 도시 그라도와의 분쟁으로 인해 베네치아는 카롤루스에게 자신들을 보호령으로 삼아 줄 것을 요청하는 사신단을 보냈고, 이에 응한 카롤루스가 베네치아를 접수하자 동로마 제국은 즉각 함대를 파견해 베네치아를 다시 장악하였다. 이를 수복하고자 한 피핀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고, 807년 임시 휴전조약을 맺었다. 이 사건의 주모자들은 베네치아의 손에 의해 동로마 제국에 양도되었고, 이내 추방당했다. 피핀은 810년 코마키오의 선박을 빌려 재차 베네치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중심지역인 리알토 군도는 프랑크 왕국에 계속 저항했고, 케팔리니아 총독 파블로스가 지휘하는 동로마 함대가 즉각 반격하자 피핀은 결국 열병에 걸린 채 철수하고 말았다. 피핀은 그 해 7월 8일 사망하였다.

전쟁은 812년 끝났다. 카롤루스는 거듭된 베네치아 장악 시도에 실패하여 유능한 아들 하나를 잃었고, 동로마 제국은 당시 새롭게 강적으로 등장한 1차 불가르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크 왕국과 화친을 맺는 것이 좋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피핀 사후 동로마 제국의 사절단은 아헨으로 들어가 평화협상을 개시했고, 니키포로스 1세가 811년 1차 불가리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그의 두개골이 은으로 칠해지는 참극 속에서 잠깐 중단되었던 협상은 미하일 1세가 새롭게 즉위하면서 다시 진행되었다. 결국 평화협상은 812년에 타결되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카롤루스는 동로마 제국이 베네치아 속주들과 이스트리아 속주들을 지배함을 인정하고, 그 지역에 대한 권리 주장을 그만두었다. 다만 베네치아가 프랑크 제국에서 상업에 종사할 수 있는 권리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대신 동로마 제국으로 하여금 자신의 제위를 인정[21]해 줄 것을 요구하여 이를 승인받았다. 물론 동로마 제국은 그를 그냥 바실레우스로만 보고 로마의 바실레우스(Ο Βασιλεύς τών Ρομαιών)가 아니라는 점을 명시하였다. 그리고 양국은 동맹을 맺어 평화를 이룬다. 이 정도에 불과했다. 즉, 어디까지나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선임임을 못박아 놓은 것이다. 이후로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는 9세기 중·후반까지 기독교 세계에 두 제국이 공존하던 국제체제를 'Pax Nicephori', 곧 '니키포로스의 평화'라고 한다. 실제로 후대에 아드리아해 및 남이탈리아에서 양국이 연합하여 이슬람 세력을 막아낸 적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카롤루스는 이에 만족했다. 그는 생전에 황제보다는 프랑크 왕국 랑고바르드 왕국의 왕이라는 칭호를 더 많이 썼으며 여기에 익숙했다. 거기다 황제로서 인정도 받았으니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3.3.6. 데인족 전쟁(808 ~ 811)

카롤루스 치세의 후반기, 그는 데인족( 바이킹)과도 충돌한다. 해군이 없었던 카롤루스는 바다에서 밀어닥치는 이들 데인인들을 미리 눈치챌 방법이 전무했다. 거기다 이들은 뛰어난 전사이기도 하고 수로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기에 기동력도 출중했다. 거기다 이들은 다른 적들과는 달리 가진 것도 별로 없었다. 따라서 기껏 전투에서 이겨도 잘해야 본전치기였던 셈이다.

물론 이는 데인족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작센 지역에 카롤루스가 수행한 가혹한 점령책에 두려움을 느꼈고 가장 강력한 슬라브 부족들이 카롤루스에게 대응도 못하고 무릎꿇은 데 대해 우려를 품었다. 작센족들의 대족장이었던 비두킨트는 데인족에게 여러 번 도움을 받을 정도로 데인족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데인족들은 카롤루스가 강압적으로 토착 종교를 제거하고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에 두려움까지 느꼈다. 그래도 카롤루스는 그의 후손들보다는 적극적으로 데인인들에게 대항할 수 있었다. 이는 당시 프랑크 왕국의 국력이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808년 덴마크 왕 구드프레드(Gudfred)는 다네베르케 지협에서 슐레스비히에 달하는 장벽을 쌓았다. 이는 카롤루스의 공격에 대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직후 데인족들은 해안선을 습격, 프리슬란트와 플랑드르를 약탈하였다. 프랑크 왕국과 잉글랜드 사이를 오가는 것은 더이상 안전하지 않았고, 라인 강을 중심으로 하는 프랑크 왕국의 상업은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카롤루스는 이에 대한 보복원정을 계획하나 곧 포기하였다. 구드프레드가 아헨으로 협상을 위해 왔다가 살해되는 등의 사건이 있긴 했으나 결국 811년, 힐리겐 조약을 통해 국경을 정하고[22] 일시적으로 이들의 왕으로부터 사적 약탈을 저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데 만족해야만 했다.

4. 카롤루스 대제의 내정

그는 내정에 있어서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내치에 있어선 기존의 200여 주를 다스리던 공작, 백작에 더불어 부중백,[23] 궁중백 제도를 설치하였으며 이 봉읍 귀족들 위에 자신의 아들을 각지의 왕으로 봉하고 속인이랑 성직자가 한팀이 되어 지방을 순시하는 순찰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 제국을 시도하였다.

특히 그의 문화 진흥책은 카롤링거 르네상스로 부른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독해가 가능한 학자들을 양성하고 각지의 수도원에서는 로마와 그리스 고전들의 필사본을 대량으로 제작하게 하였다. 이 시기 개혁된 카롤루스 문자에서 현존하는 알파벳 소문자가 유래되었으며 중세 번역본의 10분의 9가 바로 이 카롤루스 시대에 번역된 판본이다. 라틴어 고전들 중 8세기 이전에 유래한 판본은 숫자도 적지만 띄어쓰기 부재나 난삽한 필체로 해독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으나 카롤루스 시대 이후에는 그런 문제는 거의 없어지는 등 그의 사후에도 지속되는 적지 않은 유산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프랑크 왕국에 안정적인 행정체제를 구축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프랑크 왕국의 붕괴는 행정시스템이 거대한 제국을 지탱할 정도로 구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4.1. 반발의 진압

프랑크 왕국의 정치적 안정성은 군사적 업적과 전리품의 배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메로비우스 왕조의 초창기 통치자들은 부하들에게 무한히 베푸는 관대한 자였고, 후기의 왕들이 이러한 관대함을 잃었을 때 그들은 권위와 권력을 잃었다. 카롤루스 왕조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카롤루스의 대외원정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막대한 전리품과 토지를 가져다 주었고, 이것을 적절히 배분하였기 때문에 47년의 기나긴 치세에도 불구하고 내부반발은 의외로 적었다(물론 작센족처럼 피정복인들의 맹렬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에 그게 그거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카롤루스는 단순히 베푸는 것만으로 반발을 막지는 않았다. 그는 교회의 협력을 통해 당시 교회가 보유한 강력한 지역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었고, 또한 그의 압도적인 군사적 권위는 이전처럼 베푸는 것뿐만이 아니라 몰수하는 것도 가능하게 하였다. 그는 실패로 끝난 이베리아 원정 이후 보르노, 툴루즈, 푸아티에, 리모주 백작들이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지를 몰수하고 충성스러운 봉신들에게 이를 나누어주었다. 또한 둘째 아들 카를로만, 넷째 아들 루이(후의 경건왕 루이 1세)[24]를 로마로 보내 대관식을 올리고 루이를 아키텐 왕국의 왕, 카를로만을 랑고바르드 왕국[25]으로 세워 지방 통제를 강화하였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자들은 785, 792년 반란을 계획한다.

4.2. 카롤루스의 경제정책

카롤루스 왕조 치하에서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은 일시적으로 경제적인 부흥을 누렸다. 이는 카롤루스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7세기 중반부터 8세기 중반까지 프랑크 왕국의 인구는 추정 750만에서 추정 900만까지 증가하였으며, 라인 강 하류의 저지대[26]에서 프로방스 및 베네치아까지 라인 강을 중심으로 여타 강들과 연계된 프랑크 왕국 중부지역의 상업망은 고대~중세 초기까지의 주요 경제지역이었던 지중해와 북해를 잇는 경제권을 형성했다.[27] 이 지역에서는 카롤루스의 대대적인 경제적 지원을 받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도시를 감독하며 국제적인 시장을 열기도 했다. 파리 근방의 생 드니, 솜 지역에 위치한 아미앵 근방의 생 리키에, 로렌 일대의 중심지인 메스 근방에 있었던 코르비는 이러한 경제망 속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카롤루스 시기의 프랑크 왕국 수도인 아헨, 프랑스 왕의 대관식이 열리는 도시인 랭스도 이 경제망 안에 위치할 정도.

물론 이쪽 경제망만이 상업의 중심지인 것은 아니어서, 톨루즈(생 세르냉) 등 부유한 아키텐 지역에서도 상업적 중심지는 존재했다.

카롤루스는 화폐도 개혁하였다. 이 당시 이슬람 세력이 남부 지중해 일대를 장악하면서 금이 귀해졌기에 자체적인 금화 통용은 어려워져 이전까지 쓰이던 트리엔스 금화는 발행이 중지되었고, 그 대신 은을 단일 기축통화로 하기 시작한 것이다. 순은 1파운드를 1리브르로 하여 240 데나리우스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정하고 이를 발행했다. 이는 20 솔리두스에 해당한다. 이는 카롤루스 생전 그 가치가 유지되었다. 영국의 머시아 군주 오퍼도 이를 수용하였고, 새로이 페니를 주조하였다. 이로써 솔리두스를 중심으로 하는 지중해 경제권에서 벗어난 새로운 화폐망이 구축되었다.[28]

카롤루스는 또한 군사적 필요에 의해 친유력자적인 경제 정책을 폈고, 이들 유력자들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농노들을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전시에 이들은 중무장한 기병대가 되어 정복전쟁에 참전하였다. 카롤루스의 치세는 봉건제도의 시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4.3. 카롤루스와 교회

카롤루스 왕조는 "기도하는 자들(oratoribus), 경작하는 자들(agricultoribus), 싸우는 자들(pugnatoribus)"로 구성되어 있다 할만큼 교회의 비중이 컸다. 카롤루스의 통치력은 군대와 교회에 의해 유지되었으며, 당시 프랑크 왕국은 별다른 행정적 체제가 구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지방행정은 교회가 담당하였다. 이것이 카롤루스가 작센 지방에 강제한 가톨릭 선교의 이유였다. 프랑크 왕국의 지방행정이 교회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상 그 일원으로 거주하기 위해서는 교회를 다니는 것, 즉 가톨릭 신앙을 가지는 것이 필수적이고 이를 거부하는 것은 곧 프랑크 왕국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롤루스는 자신이 장악한 지역에는 곧바로 수도원에서 선교사들을 차출하여 해당 지역으로 파견해 선교작업에 들어갔다. 이들 선교사들은 거의 전사에 가까운 성격을 보였는데, 실제로 많은 수도자들이 전쟁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사하였다. 이는 이전 시대의 선교사들의 모습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또한 해당 지역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면 카롤루스는 그 지역을 지역별로 나누어 주교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조직을 통하여 지방을 통제하였다.

카롤루스에게 교회가 이토록 중요하였기 때문에 그는 교회에 매우 많은 토지를 증여하였다. 이슬람 세력의 발호로 로트링겐 지역을 제외한 기타 지역의 무역은 쇠퇴하였기 때문에 토지는 갈수록 경제 수단이 되었고, 카롤루스는 이 토지를 수여하여 교회의 힘을 실어준 것이다. 다만 이는 메로비우스 왕조 말기에 궁재직을 차지한 카롤루스 가문이 많은 교회령을 압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한 것이 기원이기 때문에 빼앗았던 것을 다시 돌려주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카롤루스 가문은 프랑크 제국 3분 이전까지 제국의 왕실인 동시에 제국 최대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가문이었다.

또한 직접 궁정예배당인 아헨 대성당을 세우도록 명하는 등 교회 건축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라벤나의 성 비탈레 성당의 천장 모자이크 등을 보고 감탄한 카롤루스가 모방할 것을 지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교회가 동로마의 교회와 대립적인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에 관련된 비잔틴 건축의 아름다운 양식은 도입하려고 했던 것.

하지만, 이로 인해 정복지의 토착민들에게 기존의 종교[29]를 버리고, 기독교로의 개종을 강요하며, 거부시 잔혹한 형벌을 부여하는 등 강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카롤루스는 게르만 박수 무당을 완전히 탄압하고 그들의 주술에 대한 기록과 토템인 이르민술도 활활 태워버렸다. 이에 반발한 독일 지방의 작센족들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 역시 강경하게 진압되었다.

이토록 강경하게 개종을 강요한 이유는 카롤루스 왕조의 지지 기반이었던 가톨릭의 영향력을 확장시키는 점도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제정일치 사회였던 게르만 다신교를 탄압함으로서 그 지방 토착 지배세력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점도 노린 것. 서유럽에서의 씨족주의 약화에 큰 기여를 하기도 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간혹 학계에서는 카롤루스를 기독교 근본주의의 시초, 또는 최초의 '기독교 근본주의자'로 보기도 한다. 다만 관용이 부족했던 전근대 시대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5. 카롤루스와 교황

5.1. 로마 교회와 동로마 제국의 대립

이 당시 로마 교회는 동로마 제국에 종속되어 있었다. 로마 교회는 황제에게 종속된 위치였고, 황제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황제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하였다. 콘스탄티노플에는 교황의 대리인이 상주하고 있었고 황제가 소집한 시노드 등 여러 회의에 충실하게 참석하였다. 동로마 제국 황제들도 대부분의 경우 로마의 주교, 즉 교황이 제국의 첫 번째 주교이자 다른 주교보다 우선시되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존경하였다.

그러나 랑고바르드족의 침입과 단성론, 성상파괴령은 상황을 반전시켰다. 랑고바르드족은 이탈리아를 휩쓸었고 이탈리아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던 동로마 제국은 이를 저지할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유스티누스 2세는 교황에게 랑고바르드족을 매수하고 프랑크족과 동맹하여 랑고바르드족을 막아내라는 권유를 하였지만 아무런 성과는 없었다. 라벤나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 총독부는 살아남았으나 랑고바르드족의 침입에 대항하여 로마를 지킬 힘은 없었다.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직접 로마의 민병대를 조직하고 지휘하여 몇 번이나 밀어닥친 랑고바르드족의 공격을 방어해야 했다.

이슬람의 침입은 가톨릭 교회와 동로마 제국 사이를 더욱 약화시켰다.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이슬람의 침략에 대응해 단성론 교파와 양성론파 교회의 대립을 극복시키고자 <엑테시스>를 선포하였지만(638) 교황 요한 4세의 반발만 샀다. 이로 인한 대립은 갈수록 극심해져서 교황 마르티노 1세가 라벤나 총독부에 체포, 콘스탄티노플로 압송되어 반란 선동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크림 반도로 유배 가 거기서 사망하는 사건(655)이 벌어지게 된다. 이는 이슬람의 맹공을 받는 상황 속에서 로마 교회와 척을 지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여긴 동로마 황제들이 단성론을 버리면서 진정된다.

그러나 이 분쟁은 로마 교회가 동로마 제국에서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고, 교황들은 차츰 동로마 황제의 간섭을 불편하게 여기게 된다. 그리고 726년, 콘스탄티노플을 지켜내어 진격해오는 이슬람을 막아내고 이사우리아 왕조를 연 레온 3세에 의해 시작된 성상파괴령은 이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았다.

레온 3세가 성상 공경을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하자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즉각적으로 그건 이단이라고 선언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교회가 황제의 권위 아래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교황은 "속권과 교권은 분리되어야 하며 속권이 교리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거기다. 교황은 이탈리아를 방어하지 못하는 동로마 제국의 무능력을 비난하며 로마 시민들이 제국에 세금을 바치는 것을 금지하였고, 랑고바르드 공작들이 교황에 지지를 보이면서 이탈리아 속주는 마비 상태에 빠진다.

교황이 아직 황제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하고 있었기에 이런 마비 상태는 얼마 못 가 풀렸지만 성상 파괴에 대항하는 교황의 반발은 멈추지 않았다. 랑고바르드 왕국 리우프란트의 거듭된 군사적 위협으로 인해 교황 측에서 제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는 않았지만, 만약 새로운 보호자가 등장한다면 교황이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새로운 보호자에게 보호를 부탁할 만한 분위기가 충분히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5.2. 프랑크 왕국과 교황 간의 관계

새로운 보호자는 곧 나타났다.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군의 진격을 막아낸 카롤루스 마르텔이 바로 그 인물이다. 보나파시오의 선교 사업을 매개로 카를 마르텔과 밀접한 관계가 된 교황은 그에게 랑고바르드족에게서 자신들을 보호해주면 동로마 제국과 관계를 끊겠다고 제안했다. 비록 카를 마르텔이 랑고바르드 왕국과 가까운 관계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도움까지는 주지 못했지만 랑고바르드 왕국은 이 정도의 압박만으로도 군사적 위협을 감소시켰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단신왕 피핀 치세에 더욱 가까워졌다. 메로비우스 왕조 찬탈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대가로 군사적 보호를 요청한 셈이다.

751년 랑고바르드족 왕 아이스툴프가 라벤나를 완전히 함락해 버렸고 752년 로마가 포위되자 교황측은 처음에는 동로마 제국에 구원 요청을 하였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이 사신을 보내는 것 이상은 하지 않자 당시 교황 스테파노 2세는 직접 피핀의 궁정으로 떠나 피핀에게 군사적 보호를 요청하였고, 피핀은 2차례의 원정을 통해 아이스툴프를 저지한 다음 교황에게 로마 인근 토지를 돌려줘 교황령을 만들었다.

교황과 피핀과의 관계는 가까웠지만, 늘 친밀하지는 않았다. 피핀은 교황을 옹호하면서도 랑고바르드 왕국 및 동로마 제국과 계속 협상을 벌였으며, 아이스툴프를 이어 랑고바르드의 왕이 된 데시데리우스는 이를 이용해 이전에 반환하기로 약속했던 여러 지역을 계속 랑고바르드 왕국의 영역으로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동로마 제국 또한 피핀과의 협상을 통해 로마와 라벤나를 다시 점유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피핀은 결정적인 순간에 교황의 편을 들어주었고, 교황측은 피핀에게 전적으로 방위를 의존하게 된다.

5.3. 카롤루스 대제와 교황 간의 관계

카롤루스는 피핀의 정책을 이어받았다. 773년 그는 교황의 청을 받아 랑고바르드 왕국을 공격해 데시데리우스를 굴복시키고 랑고바르드 왕으로 즉위하였다. 파비아 공성전 와중 카롤루스는 부활절에 맞추어 로마를 방문, 스폴레토와 베네벤토 공작령을 포함한 넓은 땅을 교황에게 기증하였다. 그리고 랑고바르드 왕으로 즉위하면서 그는 공식적으로 '프랑크인과 랑고바르드인의 왕으로서 로마의 파트리키우스'가 되었다. 그는 로마의 수호자가 된 것이다.

780년 부활절에 카롤루스는 다시 로마를 방문한다. 그리고 이때 그는 교황령을 스폴레토로 확대하는 약속을 파기하였다. 카롤루스는 랑고바르드 왕으로서 스스로 이탈리아 반도 전체의 지배자가 되고자 했고 그 권리를 교황에게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거기다 이때 카롤루스는 동로마 제국과 결혼동맹을 맺을 계획[30]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이탈리아에 있는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침해하고자 하는 교황의 의도에 대해 지지할 수 없었다. 786년에도 카롤루스는 로마를 방문하는데, 이는 베네벤토 공작의 복종을 받아내기 위한 것으로,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위에 언급한 바 있다.

이런 카롤루스의 행보에서 알 수 있듯, 카롤루스는 교황을 비호하였지만 교회에 복종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하드리아노 1세 선종 후 후임 교황인 레오 3세에게 카롤루스가 보낸 서신으로도 파악할 수 있다. 이 서신에서 카롤루스는 스스로를 " 모든 기독교인의 지배자요 아버지요 왕이요, 수장이자 지도자"라고 주장하면서 교황이 준수해야 할 노선을 지정하였다. 레오 3세는 이에 대해 카롤루스에게 로마 시의 기를 보내고 카롤루스가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즉위한 시기를 기점으로 하는 연대 산정 양식을 채택하는 것으로 화답하였다. 이를 통해 카롤루스는 기독교의 보호자로 행동하였고 중세의 그 어떤 군주보다도 교회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누렸다. 아직 교황은 동로마 제국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이미 정치적으로도 교황은 동로마 제국이 아닌 프랑크 왕국의 산하에 들어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5.4. 서방 제국의 황제 즉위

800년, 카롤루스는 4번째이자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로마를 방문한다. 이는 전임 교황 하드리아노 1세의 조카와 로마 교회의 관료들, 귀족들이 귀족 출신이 아닌 레오 3세가 교황이 된 것에 반발하여 그에게 간통죄와 위증죄를 지었다고 비난하면서 799년 4월에 그를 습격, 폭행한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레오 3세는 이 공격을 피해 스폴레토 공작의 도움을 받아 파더보른으로 피신한 후 카롤루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카롤루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내려와 레오 3세와 함께 로마로 입성한 후 사건 주동자들을 색출해 처형시키며 레오 3세의 직위를 복귀시켜 주었다. 레오 3세는 800년 12월 23일에 자신의 결백함을 입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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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3년에 그린 상상화.



이틀 후, 크리스마스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성 베드로 대성당을 방문했던 카롤루스는 그 자리에서 교황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추대되었다. 미사를 드리던 도중 참석한 로마 귀족 전원이 그를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환호했고 미사는 곧 황제 추대식이 되었다고 한다.

여러 기록으로 볼 때 카롤루스가 이 사건을 예상했을 가능성보다는 예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높은 듯 보인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카롤루스는 교황보다 우위에 서서 교황을 지켜주고, 교황이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까지도 정해주는 보호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이 왕관을 씌워줬다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누려온 교회와 교황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레오 3세에게는 황제를 추대할 법적 권리가 없었고,[31] 그보다 더 정치적 힘이 있었던 전임 교황들도 그처럼 황제를 추대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는 데서 알 수 있듯 황제 즉위의 정통성 자체가 상당히 취약했다. 이 점을 인식했는지 카롤루스의 전기문인 <카롤루스 대제의 생애>에 따르면 카롤루스는 교황이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을 알았다면 결코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그가 이 칭호를 전혀 바라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박도 있다. 그 대표적인 논거는 그 당시 카롤루스가 교황에 대해 누리던 우월한 지위를 생각할 때 과연 교황의 황제 추대가 카롤루스의 동의 없이 가능은 한 일이었겠냐는 것이다. 실제로 카롤루스는 황제 추대에 화를 냈다고는 하지만, 이후 그 직위를 인정받기 위해 동로마 제국과도 전쟁을 벌이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새침데기 그야 자기 쫄따구가 준 걸 딴 놈에게 빼앗기면 꼴불견이잖아[32]

이 추대를 통해 가장 이득을 본 것은 교황이었다. 이 추대가 선례가 되면서 교황은 새로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임명하고 왕관과 왕홀을 수여할 권리를 얻었다. 이는 이전의 그 어떤 교황도 누리지 못한 엄청난 특권이었다. 은연중에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위를 나타낸 것이다. 이전까지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 종속되어 황제에게 교황으로 선출된 것을 인정해 달라는 서신을 보내 허락받고, 카롤루스의 보호 아래서 카롤루스가 정해주는 정책 진로를 따라야 했던 교황이 이제는 역으로 황제를 임명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일이고, 실제로는 카롤루스 왕조의 황제,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교황에 대해 정치적 우위를 점하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어쨌든 상황에 따라서는 그 반대 상황을 연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만으로도 교황의 입장에선 더없이 큰 이득이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완전히 부정하고 대등한 관계를 확보할 토대를 쌓은 것도 또다른 성과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동로마 제국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는 오만이자 황권에 대한 모독적인 행위였다. 그렇기에 동로마 제국이 본인의 황제 즉위를 인정할 때까지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811년에 이르러서 동로마 제국이 자신보다 서열이 앞선다는 평화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어쨌든 카롤루스는 이 때부터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일컬어지기 시작했고, 그의 정통성은 대체로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졌다고 여겨지고 있다.

한편 그러면서도 '로마인의 제국'이 함의하는 종족적인 인식을 억누르고자 했는데, 이는 마치 프랑크 왕은 당연히 프랑크인이 세우는 것처럼, 로마의 황제 칭호 또한 마땅히 로마 시민이 수여할 수도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고대 로마 제국의 영광은 취하고 싶으면서도, 그 권위가 당대(중세)의 로마 시에서 발원한다는 인식의 형성을 막으려고 한 것이다. 나아가, 알맹이는 엄연히 카롤루스 본인의 프랑크 왕국이며, 이 '로마'는 프랑크 왕국을 좀 더 빛나게 하는 포장이라서 그 포장을 요청하러 오면 그저 포장해 주는 답정너 거수기일 뿐, 다른 엉뚱한 사람을 황제로 추대하려 하거나 혹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립선언하려는 시도 등을 막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33]

6.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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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3년에는 판노니아 밖에 있던 크로아티아 부족장 비체슬라프(Visheslav)를 비롯한 크로아티아의 부족장들이 자발적으로 귀순해왔다. 카롤루스는 그 중 비체슬라프를 크로아티아 공작으로 임명해 이들을 다스리게 하고 자치권을 인정해준다.

806년 카롤루스는 프랑크의 관습대로 제국을 분할해 모든 아들한테 나누어 줄 계획을 세웠지만, 둘째 아들 카를로만이 밀라노에서 사망한 뒤, 셋째 아들 샤를, 첫째 아들 피핀 4세 등이 연이어 죽자 813년 아헨의 법정에서 살아남은 아들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를 합법적인 후계자로 선언했다. 그해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의 공동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고 유일한 후계자로 확정한 뒤, 아키텐으로 되돌려보냈다. 이후 다시 아들 루도비쿠스를 아헨으로 소환했고, 11월 1일 아헨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사냥을 다녔다.

그러고 나서 아헨으로 은퇴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1월 22일 병석에 누웠고, 814년 1월 28일 아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헨 대성당 지하에 매장되고, 11세기 경 아헨 백작 오토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의 능은 성역화되어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재정비되었으며 카롤루스는 성인으로 시성되었다가[34] 뒤에 대공위 시대에 실전, 19세기에 다시 발굴되었다. 그러고서 1980년대에 다시 열어서 조사한 결과 확실하게 카롤루스 대제의 유골인 듯하다고 인정을 받은 상태이다.

[1] 척추가 뒤틀려 있어 '곱사등이 피핀'이라 불리는 아들 [2] 그는 랑고바르드족이 세운 대립교황 필리푸스를 쫓아내고 정식 교황직에 올랐지만, 곧바로 랑고바르드족군에게 공격을 받아 로마가 약탈당하는 꼴을 보았기 때문에 랑고바르드족에게 적개심이 매우 강했다. 로마가 약탈될 때 데시데리우스가 그를 구태여 해칠 필요가 없다고 말해두지 않았다면 랑고바르드족군에게 무참히 살해당했을 것이다. [3] 하룬 알 라시드는 우호의 상징으로 카롤루스에게 예물과 함께 코끼리를 보냈으며, 샤를마뉴는 코끼리를 보고 감명 받은 나머지 자신의 수의에 코끼리 무늬를 넣을 것을 명하였다고 한다. [4] 마치필드는 지명이 아니라 일종의 회의나 의회 비슷한 것이다. 마치필드라는 명칭의 회의를 열어서 병력을 소집한 것. 구글에서 마치필드라는 지명을 찾아보면 바베이도스의 마치필드가 나온다. [5] 데시데리우스는 수도원에 유폐되었고 카를로만의 자식들은 이후 기록이 없다. [6] 당시 동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중부의 동로마 제국 영토가 피핀 3세에 의해 상실되고 그 소유권이 교황청으로 넘어간 데 대해(정확하게는 랑고바르드 왕국이 동로마 영토를 빼앗고 그 영토를 피핀이 빼앗아 교황한테 준 거지만) 크게 분노한 상태였다. 거기다 하드리아노 교황이 동로마를 배제한 채(남부 일대가 여전히 동로마의 영토였음에도) 이탈리아 분할을 기획하자 결국 폭발한 것. [7] 786, 788, 791,792~793, 800, 801. [8] 남이탈리아 일대는 프랑크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으로 대표되는 게르만 세력, 동로마 세력, 그리고 시칠리아의 이슬람 세력의 3세력이 패권을 놓고 벌이는 각축장이었다. 이러한 대립은 11세기 말 갑툭튀 노르만족 시칠리아와 남이탈리아를 장악하고 나서야 끝이 난다. [9] 동로마가 우마이야 왕조의 남동유럽 진출을 저지한 717 - 718년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의 경우 공방전에 참여한 이슬람 군의 숫자가 10만 명을 훌쩍 넘겼다.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 참여한 이슬람 군은 2만-2만 5천 정도로 동로마를 멸망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주력을 다 끌고온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 비하면 확실히 적은 숫자다. 그렇다고 해서 투르 푸아티에 전투의 의의를 무시하는 일 또한 삼가야 할 행동이다. [10] 역설적이게도, 이 도시는 기독교 세력의 도시였다. [11] 생략 연도: 774~5, 777, 778~782, 782~785, 792, 795, 796. [12] 그와 벌인 전쟁에서 프랑크 왕국의 고위 신하 4명이 전사할 정도로 프랑크 왕국의 피해도 컸다. [13] 수백년 후에 기독교화된 작센인들은 동방으로 몰려가서 프랑크 왕국이 자기들 선조에게 했던 짓을 발트 지역의 다신교도들에게 똑같이 하게 된다. 동방식민운동 참조. [14] 작센족들은 대부분이 보병이어서 프랑크 왕국의 강력한 기병과 평지에서 싸우기를 꺼렸고, 대신 프랑크 기병들을 숲속으로 유인한 다음 미리 대기하고 있던 작센족 보병들의 매복으로 포위하여 섬멸시키는 전술을 즐겨 사용했다. 이는 작센족들의 먼 조상인 게르만족들이 로마 군대를 상대로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사용한 전술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었다. [15] <카롤루스 대제의 생애>에서는 이를 "적에게 복수를 하고 정당한 원한을 풀기 위해 필요에 의해 취해진 조치"라고 강변하고 있다. [16] 비두킨트가 어찌나 이름을 날렸는지 하드리아노 1세 교황은 그가 개종하였다는 소식에 3일간 감사기도를 올릴 정도였다. [17] 마녀사냥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녀사냥하려는 자를 처벌하기 위한 조항이었다. 중세 초기에는 마녀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마녀가 문제가 아니라 없는 마녀를 우기는 자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18] 물론 콘스탄티노플은 견뎌냈다. 이때가 바로 그 헤라클리우스 황제 시기. [19] 고리처럼 생겼다 해서 '고리' 요새라고 불렸다. [20] 존 줄리어스 노리치에 의하면 어떤 독일 역사가는 카롤루스와 이리니의 혼담 소식을 전해 들은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마리아 테레지아와 에티오피아 황제의 혼담을 들은 빈 시민들의 충격과 버금갈 거라고 말했다고 할 정도로 쇼킹한 일이었다. 또한 좀더 과격한 일부 역사가들은 "만약에 아프리카 우간다의 잔인한 군사독재자 이디 아민이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한테 청혼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겠는가?"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21] 동로마 제국 시기 황제의 공식적인 칭호로 사용된 바실레우스(Βασιλεύς vasilefs. 그리스어로 군주를 뜻한다)의 칭호를 동로마 제국과의 외교문서에서 사용할 수 있음을 인정. [22] 덴마크 최초의 국경 조약이며 이 국경이 독일-덴마크 국경의 기초가 된다. [23] 후의 후작으로 발전한다. [24] 로타르라는 쌍둥이 형이 있었지만, 그는 4살 때 사망했다. [25] 이때 교황에 의해 이름이 피핀으로 바뀜. [26] 오늘날의 베네룩스 3국. [27] 후대의 프랑크 왕국 3분 과정에서 지리적으로는 전혀 경계선으로 구분될 구석이 없는 로타링기아 지역이 로타르 왕국으로 분리된 것은 경제적인 구분에 의한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28] 다만 여기서 가치가 가장 오랫동안 일정하게 유지된 것은 솔리두스였다. [29] 대표적인 예로 게르만 다신교가 이때를 기점으로 오늘날의 독일 서쪽 지역에선 완벽히 몰락하게 된다. [30] 카롤루스의 딸인 가셀라와 아테네의 이리니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 6세를 혼인시키고자 했다. [31] 오도아케르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서로마 황제 제위를 동로마 제국 황제에게 반납한 뒤 서로마 황제를 임명하는 권한은 동로마 제국 황제에게 있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서로의 제위가 공석일 시 한 쪽의 황제가 다른 쪽의 황제를 임명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32] 동양에선 선위나 추대를 받을 경우 세 번 정도 거절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처럼 여겨지며, 자기의 뜻이 아닌 주변의 뜻이라는 일종의 쇼를 했는데,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33]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중 21p, 원문: 'As Paolo Delogu remarks in his contribution, Charlemagne later sought to suppress the 'ethnic' perception of an imperium Romanorum to avoid the impression that the imperial title could be bestowed by the people of Rome in the same way the Franks could raise a rex Francorum.' [34] 다만 대립교황이 시성한 것이라서 이후 무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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