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대 총리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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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함 | 대 | 이름 | 임기 | 정당 | 비고 | |
취임 | 퇴임 | ||||||
통리기무아문 총리대신 | 1 | 박규수 | 1866년 | 1871년 |
개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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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변법 시행 명전법 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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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이유원 | 1871년 | 1880년 | - |
연병법 시행 국제 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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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겸 총리대신 | 3 | 홍순목 | 1880년 | 1884년 | - |
조일동맹 체결 교린삼장 반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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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심순택 | 1884년 | 1888년 | - | 경복궁 중건 | ||
5 | 최익현 | 1888년 | 1892년 |
자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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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직선 총리대신 신촌향약 시행 유라시아 동맹 체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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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민태호 | 1892년 | 1894년 |
만민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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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력 및 개국 연호 도입 계사황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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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김옥균 | 1894년 | 1898년 |
개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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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시행 을미정난 만국평화회의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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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김홍집 | 1898년 | 1902년 |
자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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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시행 격치물성청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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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전봉준 | 1902년 | 1906년 |
만민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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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아주대회 개최 | ||
10 | 김옥균 | 1906년 | 1912년 |
개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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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이후로 전시거국내각 | ||
11 | 박은식 | 1912년 | 현재 |
자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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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내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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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직책 | 이름 | ||
의정부 | 영의점 겸 총리대신 | 최익현 | |||
좌의정 | 민태호 | ||||
우의정 | 김성근 | ||||
이조 | 판서 | ||||
호조 | 판서 | 어윤중 | |||
재무참판 | 홍종우 | ||||
예조 | 판서 | 김윤식 | |||
외무참판 | 김홍집 | ||||
문교참판 | |||||
병조 | 판서 | ||||
형조 | 판서 | 오경석 | |||
공조 | 판서 | 김병시 | |||
※원내 유력 정당이 모두 참여한 연립 내각이다. 총리 최익현은 자유당, 민태호, 오경석은 만민공산당, 김병시는 개화당 소속이다. | }}}}}}}}} |
최익현 崔益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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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34년 ( 순조 34년) 1월 14일 | ||
조선 경기도 포천현 내북면 가채리 | |||
사망 | 1912년 9월(향년 78세)[1] | ||
시베리아 횡단철도 | |||
본관 | 경주 최씨 | ||
자 | 찬겸(贊謙) | ||
호 | 면암(勉庵) | ||
시호 | 문정(文正) | ||
당적 | 자유당 | ||
약력 |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신창 현감(新昌 縣監) 예조 참의(禮曹 參議) 이조 판서(吏曹 判書) 예조 판서(禮曹 判書) 자유당 영수 제5대 영의정 겸 총리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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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부친 최대(崔岱) | |
부인 | 청주 한씨 | ||
자녀 |
장남 영조 차남 영학 삼남 영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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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체역사물 고종, 군밤의 왕에서 등장하는 최익현이다.2. 상세
위정척사파의 거두였던 원 역사와 달리, '개화적 유학자'이자 "무엇이 올바른 정치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탐구를 상징하는 등장인물. 원 역사와 갈라지게 된 계기는 개화당이 일찍 공식적으로 발족한 덕분에 젊은 시절 박규수 등과 교류하며 영환지략 등 '개화사상'을 접하게 된 사건이다.[2]피 끓는 젊은이일 때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조선의 개항이 열강의 침탈 없이 무탈하게 이루어져 이른바 양이를 대하는 태도가 훨씬 더 유연하다. 지금도 성현의 도리가 그 대의만은 틀리지 않았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파리에서의 경험을 통해 조선이, 나아가 유학이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아 고루해졌음을 인정하게 됐다. '조선을 근대화하는' 것이 아닌, '조선이 근대로 나아가는' 광경을 보여주는 이 작품을 상징하는 인물.
3. 행적
신창 현감 시절 도탄에 빠져 땅 위에서 허우적거려야 하는 백성들을 보고 과연 정학의 가르침만이 정답인가 고민하게 되었고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마음을 다잡지 못하였다. 그렇게 방황하던 차에 개화당의 영수 박규수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내심 양이의 기물과 기예를 들여와 올바른 도로 교정하여 그 바른 길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위정척사를 고집하는 스승 이항로를 숭모하는 마음만은 여전하여 차마 개화당이 내민 손을 잡을 수 없었다.결국 벼슬을 제수한다는 것을 누차 사양하고 포천에서 야인으로 지내고 있었는데 귀남식 흑묘백묘론과 탕평론에 감화된 이항로가 물러나면서 스승 눈치보지 말고 출사하여 뜻을 펼쳐보라고 응원해주어 다시 조정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을축변법에 대해 청나라의 양해를 받고자 파견된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사행길에 올랐다. 이때 조선을 방기하겠다는 입장을 취한 청나라에 적잖이 실망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국조차 어쩌 하지 못하는 양이를 조선이 홀로 견뎌낼 수 있을까 걱정했다.
이후 큰 꿈을 품고서 지금껏 배워온 정학의 틀 바깥을 살피러 유럽 파견 사절단에 참가하였고 젊은 유학생들과 함께 프랑스 파리에 남아 서양의 사정을 공부하였다. 처음에는 막연히 저들의 정예한 화포와 기기를 들여오고 빼어난 재주를 배워오면 절로 나라가 부강해지리라 생각하였는데 그 기술에 나름의 도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자 없이 전자만으로 무언가를 이룩하려 한다면, 이는 결국 사상누각에 그칠 것이라는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꼬박 2년 동안 도서관과 숙소를 오가며 서책에 몰두하였고 때때로 유럽 식자들과 편지를 교환하였다. 국제적십자위원회의 창시자 앙리 뒤낭을 만나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된 것도 이 무렵이다. 도학과 이론은 비슷하면서도 공자를 비판해왔던 헤겔의 철학에 대해 애증어린 관심으로 파고든 바도 있다.
보불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누군가는 이 모든 사정을 기록하여 당대와 후대의 경계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프랑스 공사 서형순과 함께 파리에 남았다. 이때 위풍당당히 친정한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혀 항복을 선언하자 수도에서 새로운 조정(?)이 꾸려지는 것을 보고 토목의 변을 떠올렸다. 프로이센군의 포위에 지친 신 정부가 결국 항복했을 때는 병자호란이 생각나 남 얘기 같지 않아 동정하기도 했다. 이후 농반진반 주코뮌 조선대사로서 뒤낭과 함께 파리 코뮌과 정부군 사이를 훌륭히 중재하였고 상황이 극단으로 치닫기 전에 망명을 원하는 코뮌 시민 일천여 명에 그 가족들까지 대동하여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 활약으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무슈 최'로 명성을 떨치게 됐다.[3]
귀국한 이래 벼슬이 예조참의로 올라 당상관으로 훌쩍 품계가 뛰어올랐다. 이후 외무만 전담하다가 육조와 통리기무아문을 통합하는 관제 개편이 이루어짐에 따라 이조판서에 임명됐다.[4] 이후 예조판서를 역임한다. 현재 성리학 정신에 입각하여 귀남의 도덕주의적 정책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다. 근래 다른 곳도 아니고 스승인 이항로의 아호를 딴 화서학원에서 자강사라고 하여 얼치기 청년 제국주의자들의 모임이 생겨 골머리를 썩는 중이다.
1887년, 감투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조정 내 반세도 유림파 관료들이 사조직을 꾸려 자신을 차기 총리로 미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던 중 영의점 겸 총리대신 자리를 추거의 법도로 정하게 되자 거칠 게 없어져 예조판서직을 내려놓고 박은식을 끌어들여 실용적 자유주의 노선을 채택한 자유당을 차렸다. 이듬해 총리대신 추거에서 당당히 승리하여 조선 역사상 최초로 백성들이 선택한 총리가 됐다.
총리대신 임기를 마친 뒤에는 참의대부 자리에 나아가진 않았지만 여전히 자유당 영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유당에 아직 마땅한 인재가 없어 적어도 십년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거라는 평을 듣는 중이다.
1895년, 원세개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30만 대군을 등에 업고 천자께 시무책을 아뢰러 지부상소하러 가는 길이니 막지 말고 비키라고 일갈하여 북양군 7연대를 와해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조선 입장에서야 흘리는 피를 줄여보고자 꾀를 부린 것이었으나, 바깥에서 보면 기다리고 있다가 대병으로 급습해 위엄 떨친 셈이라 을미년 북벌(?)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고향 돌아갈 채비를 하던 뒤낭에게 "조선은 무언가 다를 줄 알았다."는 말을 들었다. 다만 작중에서 뒤낭은 그 후로도 계속 조선에 남아 있고 둘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친밀한 것으로 보아 만국평화회의 개최를 통해 뒤낭의 마음을 돌린 모양.
이를 계기로 어떻게 하면 조선이 '극동의 프로이센'에서 다시 '도의를 아는 나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조선에서 준비하고 있는 아주대회에 호세 리잘과 그를 따르는 필리핀 대표단이 나타나 스페인 정부에서 우려를 표하자 차라리 이 기회에 식민지 문제를 논의할 자리를 마련하자며 한성 만국평화회의 개최를 이끌어냈다.
또 그와 별개로 아주대회를 앞두고 공산당이 대원군을 필두로 서예모임을 만드는 등 참의원에서 잡기 경쟁이 벌어졌는데, 자유당도 안태훈의 후원을 받아 자동차 경주 모임을 꾸리게 되면서 그 대표로 추대될 뻔 하였으나 대신 젊은 황현을 내세워 떠넘겼다.
1896년, 개화당이 승리한 참의대부 추거가 끝나고 전 대사헌 조병세를 시작으로 조선도 이제 마땅히 칭제건원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자 자유당 영수가 아니라 화서 학통을 이은 사람으로서 없던 황제 칭호를 만들어 스스로 붙이는 것은 진시황과 같다는, 그러니까 '네놈들 성정은 진시황과 같다'는 논설을 청구시무에 게재했다.
1898년, 총리 추거에 출마하지 않는 대신 자유당에 입당한 김홍집을 적극 지원하여 그를 총리로 만들었다.
1910년, 결국 유럽 전역에 대전쟁의 겁화가 휩쓸고 유럽에 도의적 지원을 부탁하는 주상의 공갈협박에 가까운(...) 옥음방송이 나오며 전국이 들썩이던 중 노구를 이끌고 유럽 전역에 미곡을 지원하는 창의단의 수장으로 앞장선다. 나라를 가리지 않고 도의적 지원을 하는 동시에
이후 베를린에서 요양하며 담담히 죽음을 기다리던 중, 병문안을 구실로 일평생 쌓아온 조선에 대한 악감정을 늘어놓으러 온 빌헬름 2세를 만난다. 온 유럽이 조선의 의도대로 굴러갔으니 만족하냐며 투정 늘어놓는 빌헬름에게 냉정하게 이후 유럽의 정세를 예측하면서도 선비답게 중국의 고사를 예로 들면서 빌헬름의 심경에 변화를 준다. 빌헬름의 병문안 이후 병세가 더욱 악화되면서 눈 감았다 뜨고 보니 어느새 조선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있는 등, 의식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도 아들들을 다시 만나고 육신이나마 고향에 묻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카이저 빌헬름과 나눈 대화와 먼 옛날 주상에게 받은 군밤을 떠올리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마침내 미소지은 얼굴로 조선으로 향하는 시베리아 철도의 열차 안에서 눈을 감는다.
사후 시호로 문정(文正)을 받았다. 화서 학통 이은 선비들은 최익현이 이룬 바가 마찬가지로 문정을 시호로 받은 조광조, 송시열에 비하고도 남는다고 말하였고, 송시열에 좋은 감정 없는 동인 - 남인 당파 집안에서는 사마광과 범중엄에 빗대어 최익현을 칭송하였다. 사후 청 황제 쟈이티안이 친히 조서를 보내 김귀남이 탄식할 정도로 그 여파가 적지 않았고, 서구에서는 시호인 문정공이 '문명(文)과 정의(正)의 대공'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4. 기타
끝까지 유학자적인 신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서학을 적극 받아들이는 행보로 유학과 서학 양쪽 모두 통달하고 실적도 압도적인 정치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작중 토론계의 최종 보스급 인물로 취급받는 중.유학적인 신념과 별개로 자유당 영수라는 이름값에 걸맞게 경제정책에서는 자유주의를 지지하기도 하였다.
대역갤에서는 작중 생전에 동·서양의 황제를 만나 대화를 나눴더니 황제들이 권력을 포기해 각 국에 큰 영향을 줬다는 점에서 농담 삼아 제국 시해자같은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는데 장병시절 히틀러를 만나 본의 아니게 그의 행보를 완전히 바꿔버린 것을 생각하면 농담이 아니다.[8]
[1]
사인은
티푸스. 원 역사보다 5년 더 살았다.
[2]
저자는 최익현이 원 역사에서
영남만인소 등 1880년대 신사척사운동 등에 침묵을 지켰다는 점 등을 근거로 원 역사 최익현의 위정척사론은 개항 이후의 체험을 근거로 성숙/완성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안한다.
[3]
원래 역사에서는 일본의
사이온지 긴모치가 이 때 코뮌에 갇혀서 자의반타의반 시민군의 바리케이드 구축 등 허드렛일을 도왔는데, 대체역사 나비효과로 인해 서양 유학을 가지 못했다.
[4]
육조와 통리아문 아래 12사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아 어디가 무슨 업무를 맡는지를 두고 부서간에 싸움이 붙어 육조의 옛 관헌과 아문의 새 관료들이 모두 신뢰하는 최익현이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를 맡아 교통정리를 하게 됐다.
[5]
그가 그린 못미더운 동양화 모작을 차마 안 좋게 평가하기 힘들어 에둘러서 평가했는데 정작 히틀러 본인은 자신을 인정해 줬다고 착각해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대신 예술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반전평화를 부르짖게 되었다.
[6]
하지만 노쇠한 최익현이 병세를 버티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진 못했기에 사실상 아버지의 임종이라도 지켜볼수 있도록 하는 마지막 배려에 불과했다.
[7]
사기에 기록된 공자가 남긴 마지막 노래 "태산이 무너지는가! 대들보가 부러지는가! 철인은 죽어가는가!(太山壊乎! 梁柱摧乎! 哲人萎乎!)"를 조금 비틀어 놓은 것으로 이때 죽어가는 최익현이 공자가 이를 들으면 어떤 표정을 할지 궁금해하기도 한다.
[8]
당장 그가 건드린 제국만 해도 청나라, 독일 제2제국/제3제국(미구현)이니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