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청동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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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청동기 개발이 아닌 본격적인 농경 사회와 민무늬 토기의 제작, 간석기의 본격적 사용, 사회 복합도의 증가로 정의된다. 청동기는 청동기 시대 중기쯤 돼서야 나온다.한반도 지역의 청동기 시대의 시작 시점으로는 7차 국정 국사교과서 초판까지는 기원전 10세기경이라고 나와있었는데, 7차 국정 교과서 개정판(2006년) 이후로는 기원전 2000~1500년경이라고 나온다.
2. 고고학적 근거
고령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 암각화. 청동기와 석기가 같이 그려져 있다. #
현재 청동기 시대 분기 편년안으로 가장 유력시 되는 것은 신 3분기설이다. 이는 청동기 시대를 아래와 같이 구분하는 것이다.
2.1. 초기
-
하남시
미사리 유형: 판석 부위 석식(바닥에 판돌 깔고 주위에 돌로 둘러친 형태) 또는 위석식 노지(화덕) 방형(정사각형) 또는 장방형(직사각형)의 주거지로 가끔 기둥자리에 초석이 설치되는 경우가 있으며, 덧띠 새김 무늬
토기(각목돌대문 토기)라는 아가리 쪽에 오돌토돌한 것들이 붙어 있는 토기로 대표된다.
덧띠 새김 무늬 토기
판석 부위 석식 노지
2.2.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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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역삼동 유형: 토광형 노지(즉 그냥 땅만 판 화덕)이 있는 장방형 주거지와 공렬문 토기 흔히 박물관에는 구멍 무늬라고 되어 있는 토기로 대표된다.
역삼동 유형의 주거지
구멍 무늬 토기(공렬문 토기), 구연부에 뚫린 구멍이 공렬문(구멍 무늬)
-
부산
가락동 유형: 위석식 노지와 장방병 또는 세장방형(한쪽이 매우 긴 직사각형)주거지를 가지면 이중구연 또는 이중구연 단사선문(짧은 선이 여러 개 그어진) 토기 박물관에는 겹아가리라고 되어 있다.
가락동 주거지는 흔히 둔산식 주거리로 불린다. 노지에 돌이 둘러진게 보이는데 저게 위석식 노지
이중구연 빗금 무늬(단사선문) 토기, 이중구연은 아가리가 겹쳐졌다는 뜻이다. 즉 아가리가 토기벽보다 더 두꺼움. 다만 흔암리는 최근 들어 역삼동과 같은 유형으로 취급하고 있다.
2.3. 후기
-
부여군 송국리 유형: 무시설식 노지의 원형 또는 방형의 돼지콧구멍 기둥 자리가 있는 주거지로 외반구연의 장란형 토기(쉽게 말해서 계란처럼 생겼는데 입구 부분이 벌어진 토기)로 대표된다. 참고로 이 유적의 집자리는 도무지 이전 청동기 문화 양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화덕이 사라져버려서 한국 청동기 고고학 최고의 미스터리 문화로 관심이 집중된다. 현재 외래 유입설과 자체 발생설이 논쟁중인데 어느 쪽도 확실한 증거가 없어 논쟁만 계속되고 있다.
송국리 문화는 후기를 대표하지만 이 시기에 남한에는 북한강의 천전리식 주거지와 울산-포항-경주 지역이 검단리 유형이 나온다. 당연히 북한에는 송국리 유형이 현재까지는 발견 례가 없다. 게다가 미사리, 가락동, 역삼동-흔암리, 송국리 유형 등의 구분도 남한 기준이고 북한 쪽은 공귀리, 서포항 등 그쪽만의 다양한 유형이 있는데 남한과는 구분 방식이 다른 경우도 있어 전체적인 이해는 좀 복잡해진다.
그러나 송국리 문화는 본격적인 도작 농경(쌀농사)을 시작한 문화로 보고 있는데 이들 문화의 파급력은 상당해서 춘천-홍천 등 북한강 일부 지역과 울산-경주 등 영남 동부 해안 지역 일부 제외하면 남한 전 지역과 제주도, 일본 큐슈까지 퍼진 문화다. 특히 이들은 일본 야요이 문화 형성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실제 큐슈 지역에서는 송국리형 집자리가 발굴되었고, 일본 도작 문화 전파 루트에 나타나는 옹가가와식 토기는 송국리식 호형 토기를 모태로 만들어진 것이다.)
송국리의 원형 집자리
송국리식 토기
일본 야요이 전기의 옹가가와식 토기. 송국리 호형 토기의 영향을 받았지만 구연부가 단이 지면서 외반하고, 조몬 토기를 연상시키는 문양이 그려져 있어 약간은 변형된 모습을 보인다. 호형 토기는 도작농경이 발전하면서 도입된 걸로 보인다.
- 참고로 가끔 후기에 초기 철기 시대를 넣는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는 초기 철기 시대 대표 유물이 세형동검과 다뉴세문경이기 때문이다. 또한 토기도 무문토기인 점토대토기여서 같은 시대 설정으로 넣어도 무리가 없다.
3. 한반도 역사의 시작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언급되는 고조선과 여타 성읍국가들이 청동기 시대에 출현했으며 사료에 묘사되는 이러한 한반도 집단들은 다른 지역의 청동기 시대와 유사한 모습을 띄고 있다.이는 한반도가 청동기 시대에 선사시대에서 기록의 역사시대로 진입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고조선과 삼한의 원류인 진나라 중후기에야 비로소 차츰 철기 제련이 시작되었다.
4.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특징
- 한반도에서는 무늬가 없는 민무늬 토기가 널리 사용 되었다.
-
한국의 경우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
고인돌이 생겨났다. 고인돌 자체는 한반도에서 특징적으로 발견되는 유물이지만, 세계적으로 거석 문화가 이 시기에 발생했던 것은 맞다. 예를 들면
스톤헨지라거나. 거석 문화가 생겨났다는 것은 그만큼 큰 돌을 아무런 실용적인 이유도 없이 어떤 사람의 의도에 의해 옮겨야 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계급 사회가 발생했다는 증거로 본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그 이유는 고인돌의 경우 생각보다 너무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인데, 일례로 가장 많이 나온 전라남도에는 90년대까지 2만 개가 확인되었다...전라도가 아니라 전라남도만이다. 현재는 아마 전라남도에만 2만 5천 개까지 확인되지 않았을까라는 말이 나오는데 규모도 엄청나게 크다. 흔히들 북방식이라고 불리는 탁자식과 비교해서 남방식이 볼품없다고 보는데 전체적인 묘역 시설과 묘광 그리고 개석의 무게를 보면 북방식은 남방식에게 게임이 안 된다. 심지어 진주에서 발견된 것은 개석 무게만 350톤이고 묘역 시설은 가로 80m이상에 세로 10m 이상이었다. 헌데 당시 한반도 남부 지역이 뚜렷한 계급 사회였냐면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다지 손을 들어주기 힘들다[1].
5. 여담
- 대한민국 선사 시대 연구자들 중에서는 청동기 시대 전공자가 제일 많다고 한다. 연구할 수 있는 유물도 많고 유적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들어서는 무문 토기 시대라는 말로 사용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98년도까지 동검을 포함 청동기가 무려 100개나 나왔다고 하는 게 한국 청동기 고고학의 상황이다. 이 정도면 서주 시기에 남중국에 있었던 서주와는 다른 문화인 삼성퇴 유적의 구덩이 하나에서 나온 청동기 숫자보다 못하다. 그래서 한국 청동기 문화에 대해 설명할 때 그 문화 유형을 나누는 기준은 토기와 주거지지 청동기가 아니다. 심지어 기원전 15세기로 편년되는 미사리 유형은 청동기가 없다. 덕분에 실상 문화 유형 파악에서 가장 큰 도움을 주는 무문 토기를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 최근에는 요하 일대의 청동기 시대 유적이 발굴되면서 이 지역의 문화와 요서 지역 그리고 요동의 예맥족 세력과의 관련성과 상호 교류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으며, 국사책의 고조선건국 연대가 올라간 것도 이런 경향과 관련있다. 물론 아무런 근거없이 이런 주장 하기를 좋아하는 분들이 문제가 되긴 하지만, 동북아 역사 재단에서 최근 펴낸 연구서 <요하 문명의 확산과 중국 동북 지역의 청동기 문화>, <요하유역의 초기 청동기 문화>에서 보이듯이 주류 학계도 이쪽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분명 관련성이 있긴 한데, 연구는 좀 더 필요하다"는 게 정론으로 그 이상으로 확실하게 딱 결론내릴 만한 가시적인 연구나 결과물은 나오지 않았다.[2]
- 한국 학계에서 기자조선이 부정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이렇게 요하- 만주- 한반도 청동기와 황하유역의 청동기가 확실히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상나라의 기자가 정말로 조선 왕에 봉해져 왔다면 한반도에서도 황하 계통의 청동기가 발굴되어야 하나, 현재 한반도에서 발굴된 청동기를 보면 황하 유역 청동기는 발견된 바 없고, 오히려 만주-요하 지역의 청동기와 유사하다.
- 춘천 중도에서 대규모 청동기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청동기 시대 유적지 중 가장 규모가 커서 청동기 시대 연구에 큰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으나 문제는 해당 지역이 레고랜드 등 대규모 레저 관광 시설이 들어설 예정이였는데 유적지 발굴로 취소되게 생겨서 사업에 큰 지장이 생길 예정이다. 게다가 현재 발견되는 수준으로 보면 중도 전체가 경주에 맞먹을 만큼 유적 밀집 지역이라고 한다(...). #
[1]
한반도 남부가 계급 사회였느냐를 따지기 이전에, 고인돌이 너무 많다. 오늘날처럼
한반도 남부에만 4~5천만의 인구가 거주하면 모를까, 청동기 시대에. 그것도 전라남도에만 지배층이 2만 5천 명일 수는 없는 일.
[2]
이 부분은 사학계, 고고학계 모두 학자마다 엄청나게 이론이 분분한 상태다. <요하 문명의 확산과 중국 동북 지역의 청동기 문화>만 봐도 다소 급진적인 경우는 하가점 문화의 수축과 중국 연나라계 유적/유물의 요동 진출이 넓어진다는 것을 고조선이 연에 패해 연군현이 설치된 문헌 기록과 연결시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유의미한 관련성 인정 이상으로는 최대한 나가려 하지 않는 경우 등 논문들의 내용과 연구 방향이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일단 관련성은 인정한다'를 뺀 나머지는 상당히 극과 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