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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메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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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ime II
가문 바르셀로나 왕조
출생 1267년 4월 10일
아라곤 왕국 발렌시아
사망 1327년 11월 2일 (향년 65세)
아라곤 왕국 바르셀로나
재위
기간
시칠리아 왕국 국왕 1285년 ~ 1295년
아라곤 왕국 국왕 1291년 ~ 1327년
아버지 페드로 3세
어머니 쿠스탄차 2세
형제자매 알리폰소 3세, 이사벨, 프리드리히 3세, 비올란테, 페드로
배우자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앙주의 비앙카, 뤼지냥의 마리, 몽카다의 엘리센다
자녀 하이메, 알리폰소 4세, 마리아, 이사벨라, 페드로 등
종교 기독교 ( 가톨릭)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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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곤 왕국 제12대 국왕, 시칠리아 왕국 제15대 국왕.

왕호는 스페인어로는 '하이메 2세', 아라곤어로는 '차이메 2세'이다.

2. 생애

1267년 4월 10일 아라곤 왕국 발렌시아에서 페드로 3세 쿠스탄차 2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 알폰소 3세, 아라곤의 이사벨, 페데리코, 비올란테, 페드로가 있었다. 1283년 4월 어머니 쿠스탄차 2세, 형 알폰소 3세와 함께 시아버지가 장악한 시칠리아로 이동했다. 1283년 4월 19일, 페드로 3세는 메시나에서 아라곤과 발렌시아는 알폰소에게 물려주고, 시칠리아는 하이메에게 물려주겠으며, 쿠스탄차가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시칠리아의 섭정을 맡을 것이라고 선포했다. 그 후 페드로 3세는 아라곤으로 돌아가 '아라곤 십자군'을 자처한 프랑스군의 공세에 맞섰고, 하이메는 팔레르모 궁정에서 살았다.

1285년 11월 11일 아버지 페드로 3세가 사망한 후 어머니가 아라곤으로 귀국하면서 시칠리아의 단독 국왕이 되었다. 그는 새 교황 호노리오 4세에게 사절을 보내 시칠리아를 교황에 봉헌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교황청은 거부하고 그와 시칠리아 군주 즉위식을 주재한 주교들을 파문했다. 당시 포로로 잡혀 있던 나폴리 왕국의 국왕 카를로 2세도 석방과 평화 조약에 대한 대가로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양보하려 했지만, 교황은 이 합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하이메의 형인 알폰소 3세는 아라곤 왕위에 오른 뒤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중재를 통해 프랑스와 아라곤 사이에 14년간의 휴전을 맺었다.

1287년 봄, 교황과 앙주, 프랑스 귀족들이 소집한 원정군이 시칠리아 공략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해 6월 23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 제독이 이끄는 시칠리아 함대가 원정군을 섬멸했고, 많은 프랑스와 프롱방스 귀족들이 체포된 후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이후 교황 호노리오 4세는 선종했고, 새 교황으로 니콜라오 4세가 선출되었다. 1287년 7월, 아라곤의 알폰소 3세와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는 영국 왕 에드워드 1세의 중재를 통해 울로론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라곤과의 전쟁을 지속했다. 그해 10월, 카를로 2세는 막대한 몸값, 인질을 제공하고 시칠리아 왕의 칭호를 취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마침내 석방되었다.

1289년, 교황 니콜라오 4세는 카를로 2세를 시칠리아와의 왕으로 즉위시키고 전쟁을 이어가라고 독촉했다. 이후 1291년 2월, 아라곤 왕 알폰소 3세, 프랑스 왕 필리프 4세, 나폴리 왕 카를로 2세, 그리고 교황 니콜라오 4세는 브리뇽 협약을 맺었다. 프랑스, 아라곤, 나폴리는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고, 알폰소 3세와 하이메 2세의 파문은 해제되었다. 그러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간의 평화 협약은 정식으로 체결되지 않았고, 아라곤 왕국은 시칠리아에게 더 이상 군사 지원을 하지 않기로 했다.

1291년 6월 18일 알폰소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하이메 2세는 즉각 바르셀로나로 이동해 그해 7월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시칠리아 왕위를 동생인 페데리코에게 물려주라는 형의 유언을 무시하고 아라곤과 시칠리아 왕위를 겸임했다. 페데리코는 그저 총독 자격으로 시칠리아를 대리 통치해야 했다. 또한 일전에 프랑스와 손잡고 페드로 3세에 대항했다가 알폰소 3세에게 축출된 후 앙주에 피난가 있던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발레아레스 제도를 넘긴다고 합의했던 브리뇽 조약의 이행을 거부했다. 발레아레스 제도는 아라곤 왕국의 필수적인 영토이니 절대로 넘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니콜라오 4세는 하이메 2세를 재차 파문했고 전쟁이 재개되었다.

1292년 4월 4일 교황 니콜라오 4세가 선종한 후 새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2년간의 공백기가 있었다. 그 사이, 카를로 2세는 1293년 말 카스티야 국왕 산초 4세의 중재를 통해 아라곤 궁정에 인질로 잡혀있는 아들들을 보내주면 교황청과 아라곤 왕국간의 평화 협약을 주선하겠다고 제안했다. 1294년 오랜 공백기 끝에 비로소 선출된 교황 첼레스티노 5세는 카를로 2세의 제안을 지지했지만 얼마 안가 사임했고, 뒤이어 선출된 보니파시오 8세는 카를로 2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하이메 2세와의 평화 협약을 지지했다.

그 결과 1295년 6월 12일 아나니에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하이메 2세는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교황의 왕좌로 양도하고, 발레아레스 제도를 사르데냐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돌려줬다. 그러면서 카를로 2세의 아들들을 석방시켰다. 카를로 2세의 딸 블랑카는 하이메 2세의 동생인 페데리코와 결혼하고, 교황은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카를로 2세에게 양도하고 블랑카에게 막대한 지참금을 주며, 하이메와 페데리코를 파문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그러나 카를루 1세의 압제에 맞서 봉기한 바 있던 시칠리아인들은 이제와서 카를루 1세의 아들 카를로 2세를 왕으로 받들 수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1296년 몇 년간 시칠리아 총독을 맡고 있던 페데리코를 시칠리아 왕으로 추대했다. 페데리코는 증조부 프리드리히 2세(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2세와 자신과의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왕호를 프리드리히 3세라고 칭했다. 하이메 2세는 이 소식에 분노해 앙주 가문과 동맹을 맺고 시칠리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신속하게 공세를 개시해 칼라브리아를 침공해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나폴리 왕국 내부의 불만 세력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했으며, 토스카나와 롬바르디아의 기벨린 파(친 황제파)와 협상했고, 보니파시오 8세의 정적인 콜론나 가문을 지원했다. 하이메 2세는 이런 동생을 응징하기 위해 그동안 시칠리아의 해군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지만 이번에는 하이메 2세를 지지하기로 했던 라우리아의 루지에로에게 함대를 맡겨 시칠리아를 치게 했다. 1299년 7월 4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올랜도 곶 해전에서 시칠리아 해군을 격파했다. 또한 카를로 2세의 아들 로베르토와 필리포가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에 상륙해 카타니아를 포위했다. 필리포는 트라파니를 포위하기 위해 별동대를 이끌고 진군했지만, 팔코나리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3세에게 패배하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1300년 6월 14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폰자 해전에서 시칠리아 해군을 재차 격파했고, 프리드리히 3세는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1302년, 샤를 드 발루아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요청으로 이탈리아로 내려와서 시칠리아에 상륙했지만, 역병이 도는 바람에 군대가 궤멸되다시피하자 시칠리아군에게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의했다. 왕이 사로잡혀 있던 시칠리아군 역시 이에 동의하면서, 8월 19일 칼타벨로타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시칠리아의 왕으로 인정받았고, 카를로 2세 역시 시칠리아의 왕으로 자처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다만 프리드리히 3세가 사망하면 시칠리아 왕위는 앙주 가문에 돌아가기로 했다. 1303년 5월, 보니파시오 8세는 프리드리히 3세로부터 공물을 받는 대가로 조약을 비준했다. 여기에 프리드리히 3세와 카를로 2세의 딸 엘레오노르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한편, 하이메 2세는 카스티야 왕국이 산초 4세와 페르난도 데 라 세르다(Fernando de La Cerda) 왕자의 내분으로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무르시아 공략을 시작했다. 1296년 4월, 그는 알리칸테를 점령한 뒤 엘체, 오리우엘라, 과르다마르 델 세구라를 공략했다. 1298년에는 알하마 데 무르시아와 카르타헤나가 아라곤 왕국의 수중에 넘어갔고, 1300년에는 로르카가 아라곤 왕국에 넘어갔다. 여기에 나스르 왕조 무함마드 2세와 연합하여 카스티야 왕국을 협공하려 했지만, 무함마드 2세가 1303년 초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무함마드 2세의 뒤를 이어 타이파에 오른 무함마드 3세는 아라곤 왕국과 계속 손을 잡고 카스티야 왕국을 공격했다. 그러나 잇따르는 반란에 직면한 무함마드 3세는 카스티야 왕국과 협상하기로 했다. 페르난도 3세가 파견한 사절단의 대표 페르난도 고메스 데 톨레도는 그라나다가 점령한 영토를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고, 무함마드 3세는 그 대가로 자신이 카스티야 국왕의 봉신이 되고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조했다.

이후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 4세가 군대를 국경지대에 집중시킨 뒤 무르시아를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하이메 2세는 협상에 나섰다. 1304년 두 국왕은 토랄레스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르면, 아라곤 왕국이 1296~1300년 사이에 카스티야 왕국의 내전을 틈타 빼앗아갔던 무르시아 주요 지역을 카스티야 왕국이 돌려받되 카르타헤나, 오리후엘라, 엘체, 카우데테, 엘다, 알리칸테 등지는 아라곤 왕국으로 귀속되었다. 그럼에도 국경 분쟁이 여전히 지속되자, 1305년 5월 19일 토랄레스 협약을 수정한 엘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에서는 카르타헤나가 아라곤 왕국의 영역에서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아가며, 양국의 경계는 세구라 강으로 정하기로 했다. 또한 알폰소 데 라 세르다는 알바, 베야르 및 지브랄레온 일대의 영주권을 확보하는 대가로 카스티야 왕위 계승을 더이상 주장하지 않기로 했다.

1313년 아란인들이 마요르카 왕국과 프랑스 왕국의 종용을 무시하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 것에 보답하고자 행정적, 정치적 자치권을 부여했다. 1317년에는 사라센의 침략에 대비해 왕국의 남쪽 국경을 강화하기 위해 몬테사 기사단을 설립한 뒤 사라센과의 국경에 위치한 몬테사 성을 관장하게 했다. 1319년 아들 알폰소 4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아라곤 왕국과 발렌시아, 바르셀로나는 분리할 수 없는 왕실의 소유물로 선언하는 법령을 반포했다.

1321년 프랑스 나병 환자들이 유대인들과 짜고 우물을 독이나 가루로 오염시켜서 일반인들이 자신들과 같은 병에 걸리게 만들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을 덮어놓고 믿은 프랑스 민중들이 폭동을 일으켜 나병 환자와 유대인들을 대거 학살했다. 이때 많은 환자와 유대인들이 박해를 피해 아라곤 왕국으로 달아나 은신처를 제공해달라고 호소했다. 하이메 2세는 처음에는 나병에 걸린 자들을 체포하고 추방하라고 명령하면서도 유대인들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질병에 걸린 자들을 체포해 고문을 가할 뿐만 아니라 나병에 걸리지 않은 외국인들까지 체포하고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만레사, 에제 데 로스 카발레로스, 우에스카, 몽블랑, 타라조나, 바르셀로나에 외국인들을 조사하는 기관이 설립되었고, 자신이 나병 환자라고 자백하거나 그들의 가루를 가지고 있다고 한 자들은 화형에 처해졌다. 1322년, 아모난트(Amonant)라는 이름의 의사가 가스코뉴에서 아라곤으로 이주했다가 우에스카에서 체포되어 물에 나병 가루를 넣으려던 나병 환자로 기소되었다. 아모난트는 하이메 2세의 아들 알폰소 4세에게 억울함을 호소했고, 알폰소 4세는 지역 의사들로부터 검사를 받게 한 뒤 그가 무고하다고 밝혀냈다. 하지만 이후에도 의심을 받자, 아모난트는 견디지 못하고 아라곤을 떠났다.

1323~1324년, 하이메 2세의 아들 알폰소가 1295년 교황이 그에게 부여했던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정복했다. 하이메 2세는 그로부터 3년 후인 1327년 11월 2일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고, 알폰소 4세가 아라곤의 새 왕으로 등극했다.

3. 가족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