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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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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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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한자 표기가 다르더라도 한글 표기가 같으면 합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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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베풀 진)
2.1. 여양 진씨(驪陽 陳氏) 계열2.2. 광동 진씨(廣東 陳氏)2.3. 양산 진씨(梁山 陳氏) 계열
3. (나라 진)
3.1. 풍기 진씨(豊基秦氏)3.2. 진주 진씨(晉州秦氏)
3.2.1. 본관 통합 문제 및 조상 정립 문제
3.3. 하타씨(秦氏)
4. (진나라 진)
4.1. 남원 진씨(南原 晋氏)
4.1.1. 집성촌
5. (참 진)
5.1. 서산 진씨(瑞山 眞氏)
6. 기타 국가의 진씨7. 인물

1. 개요

한국의 성씨로 陳, 秦, 晉, 眞 네 종류가 있다. 네 가문의 전체 인구가 2015년 통계청 조사상으로는 185,813명이지만, 바로 아래문단에 서술하겠으나, 진씨(陳氏)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양진씨대종회에 따르면 약 45만명 이상이다. 막상 찾아보면 그리 흔한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드문 편도 아니다. 그냥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정도는 된다. 적다고 하기엔 많고, 많다고 하기엔 적은 편.[1] 대충 보거나, 표기나 보는 거리에 따라서 전씨, 발음에 따라서 지씨, 김씨[2], 신씨와 헷갈릴 수 있는 성씨.

2. (베풀 진)

십중팔구가 사용되고 있는 진씨로,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157,599명으로 조사되었다. 그런데 근거는 알 수 없으나 여양진씨대종회에 등록된 사람들 수는 45만명인데 이쪽이 가족관계등록부(호적)상 인구이자 실제 인구로 추정된다.[3] 따라서 이 통계청 자료의 신빙성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백제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성씨로 등장한다.

중국에서는 리(李), 왕(王), 장(張), 류(劉)씨와 함께 중국의 5대 성씨이다. 특히 남부에서 인구순 상위에 랭크되는 대성이다.[4] 중국 성씨와 관련된 책인 백가성 중에서는 10번째. 홍콩, 대만 싱가포르에서는 가장 흔한 성이며 베트남에서도 두 번째로 흔하다.

표준 중국어로는 Chen(천)이라고 쓰지만, 홍콩에서는 광동어로 찬(Chan)[5], 대만이나 싱가포르에서는 민남어로 탄(Tan)이라고 많이 쓴다. 베트남 발음은 쩐(Trần). 조주어로는 탕(Tang)이라고 한다.

간혹 일본 매체에서 이 성씨나 한자가 포함된 중국인 캐릭터 이름이 '친'으로 표기되는 경우도 있는데(ex. 친 신잔, 홍콩97의 친) 陳자의 일본어 독음이 친이라서 그렇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중국 인명을 일본어 독음으로 읽는 영향으로 보인다. (ex. 시진핑을 슈킨페이라고 읽음)

2.1. 여양 진씨(驪陽 陳氏) 계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여양 진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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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진(陳)씨 중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본관이며 한글로 따져도 진씨 중 가장 많다.

조선 숙종 때 여양 진씨 대동보(大同譜)가 발간되었으나,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하였기에 문중의 대종손들만 소장하고 다른 종인들은 각자 필요한 부분만을 필사한 가승(家乘)을 소장하여 필사 과정에서의 기록 착오나 누락, 전란과 사화를 거치며 분실 또는 소실되어 구전으로 관향을 전하였다. 조선 건국기부터 삼척 진씨, 나주 진씨와, 경주 진씨, 강릉 진씨, 신광 진씨 등 여양 진씨의 인물들을 시조로 두는 여러 본관이 존재해 왔으며, 상술한 과정을 거쳐 분화가 가속화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현재 한국의 진(陳)씨 중 광동 진씨와 양산 진씨 계열 외에는 모두 여양 진씨 계열로 보며, 이들 중 많은 본관이 1992년에 간행된 임신(壬申)대동보에 족보를 합보하며 여양 진씨에 흡수되었지만, 일부 문중은 선계와 후계가 다르다며 합보를 거부하고 여양이 아닌, 전부터 칭하던 본관으로 독자 세계를 잇고 있기도 하다.
특히 삼척 진씨는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이성계에게 왕지를 하사받은 바 있는 진충귀(陳忠貴)가 본관을 삼척으로 녹권에 명시하고 있으며, 가문사람들도 고려대 인물인 진경(陳鏡)을 시조로 하고 있는 등 여양 진씨와는 다른 성씨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2.2. 광동 진씨(廣東 陳氏)

시조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 진린의 아들 진구경 명-청 교체기에 청군과 싸우다 애산에서 전사하자 진린의 손자 진영소(陳泳溸)가 원수와 같은 하늘에서 살 수 없다며 조선으로 망명하여 정착해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관향인 광동은 이들의 고향인 중국 광둥성이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직계인 진린의 목숨을 구하고 전사한 것으로 인해 덕수 이씨와의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2.3. 양산 진씨(梁山 陳氏) 계열

양산 진씨의 시조는 원나라 말기 주원장과 대립했던 진우량(陳友諒)의 아버지 진보재(陳普才)이며 양산(梁山)은 그의 출신지다. 본래 사씨(謝氏)였는데 진보재의 아버지가 진씨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며 진씨가 되었다. 진우량이 주원장에게 패한 후 진우량의 아들 진리(陳理)가 주원장에 의해 고려로 보내져 세계를 이어오게 되었다.

순덕후(順德侯) 진리가 죽고 자식은 진명선(陳明善) 뿐이라는 진리의 처의 말이 태종실록에 실려있는데, 양산 진씨 족보에 진리의 아들은 진치화(陳致和)로 되어있고 진명선은 진치화의 아들로 되어있어 당대의 기록과 모순되는 점이 있다.

임피 진씨(臨陂陳氏)는 진'이'(陳理)의 아들 진여안(陳汝安)이 시조라는 설이 있어 양산 진씨와 같은 가문으로 여겨지는데, 고려의 판정주목사(判定州牧使) 진영안(陳永安)이 시조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어떠한 설이든 진리의 자식은 진명선 뿐이라는 태종실록과 모순된다.

흥덕 진씨(興德 陳氏) 또한 진리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는데 흥덕이라는 본관이 진리가 조선에서 흥덕후(興德侯)에 봉해졌다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걸 근거로 들고 있으나 진리는 귀덕후(歸德侯), 순덕후(順德侯)에 봉해졌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첫 기록부터 죽은 후의 기록까지 일관되게 순덕후로 기록되어있다. 참고로 여양 진씨에 합보된 여러 본관 중엔 흥덕 진씨도 있다.

3. (나라 진)

2015년 기준 19,301명으로 진씨의 4~5%라 상당히 희귀하다. 제주도에 집성촌이 있는데, 아래에 서술할 진계백이 제주도로 피신하면서부터 이곳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집성촌
경상북도 영주시 봉현면 노좌리
경상북도 예천군 하리면 송월리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제주특별자치도

3.1. 풍기 진씨(豊基秦氏)

시조: 진필명(秦弼明)

당나라 태원(太原) 출생.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소정방 백제 정벌군에 참여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신라에 정착하여 태원백(太原伯)에 봉해졌다고 한다.

15세손 진질명(秦礩明)이 고려 의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으로 정중부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기주부원군(基州府院君)에 봉해졌는데 기주의 지명이 풍기로 바뀌었으므로 후손들이 풍기를 본관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정중부의 난의 다른 이름은 무신정변으로서 성공한 반란이기에 평정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의종이 폐위되고 많은 문신들이 죽임을 당하고 무신들이 정권을 잡았으므로 뭔가 착오가 있는 듯 하다. 아마도 정중부가 경대승에게 살해를 당할 때에 진질명이 경대승의 편에 가담한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와전된 것 같다.

2015년에 12,974명으로 조사되었다.

3.2. 진주 진씨(晉州秦氏)

시조: 진욱(秦郁)

고려 때 보리공신(補理功臣)에 책록된 진욱을 시조로 삼는다. 그의 조상은 공자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진상(秦商)이다.

3.2.1. 본관 통합 문제 및 조상 정립 문제

풍기진씨세보와 진주진씨세보를 대조해 보면 진계백(秦季伯)이라는 이름이 겹쳐 나온다. 풍기 진씨에서 봤을 때 진질명의 증손자로, 진주 진씨에서 봤을 때 시조인 진욱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진계백 이후로 세계는 양쪽 모두 대체로 일치하나 1대 차이가 난다. 통계청의 인구조사를 비교해보면, 1985년에는 풍기 진씨와 진주 진씨는 각각 9,856명과 4,949명이었다가 2000년에는 각각 11,046명과 1,582명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진주 진씨였다가 풍기 진씨로 통합한다는 이야기인데, 진계백에게는 (증)손자가 3명이 있는데 그 중에서 둘째인 진인한(秦仁漢)은 진주 진씨로, 나머지는 풍기 진씨로 갈렸다가 진인한의 후손들도 풍기 진씨로 통합하고 있다는 의미로 봐야 타당할 것이다. 더불어 풍기 진씨와 진주 진씨가 하나의 일족이라고 가정한다면 진계백의 조상을 어떻게 정립하느냐가 문제로 남는다.

3.3. 하타씨(秦氏)

고대 일본의 씨 중 하나.[6] # 구마모토현의 기쿠치성에서 진인(秦人)이라고 쓰인 목간과 백제계 유물로 추정되는 불상이 발굴되었다. 이 발굴을 주도한 일본학자는 이를 토대로 기쿠치성이 백제계 관리에 의해 축조되었다는 논문을 썼다. 기사에 따르면 기쿠치성은 백제 멸망 이후 북큐슈에 세워진 성이다.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하타씨의 시조인 유즈키노키미(弓月君)는 진시황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신찬성씨록과 일본서기에 백제에서 귀화했다는 기록이 나오므로 백제계 도래인으로 본다. 즉 진시황의 후예라고 한 건 자칭으로 추정되는데, 진나라의 황족은 영성 조씨인데다 이들은 일본이 생기기 한참 전인 초한전쟁 시절에 항우에 의해 멸족 되었다.

다만 싱어송라이터 하타 모토히로(秦基博)처럼 현대 일본인 중에도 남아 있는 듯. 덕분에 하타 모토히로는 재일 논란이 자주 나온다(...).

4. (진나라 진)

2015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7,566명으로 진씨 중에서 상당히 보기 드문 희성에 속한다. 본관은 남원 단본.

4.1. 남원 진씨(南原 晋氏)

시조: 진함조(晋含祖)

국가에 대사(大事)가 있으면 현종이 매번 그에게 도참(圖讖)으로 질의(質疑)하였는데 술수(術數)로 크게 기용되어 관직이 내사시랑(內史侍郞)에 이르렀다. 그의 후손 진석(晋錫)이 고려 고종 때 거란군의 침입을 크게 무찌른 공으로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지고 남원(南原)을 식읍으로 하사 받아 후손들이 그곳에 정착, 세거하며 본관을 남원으로 하게 됐다.

인구는 2015년 기준 7,128명.

과거 급제자로는 958년( 고려 광종 9) 향공진사(鄕貢進士)로서 무오방(戊午榜) 문과에 명경(明經) 1위로 급제해 광문원 소감(光文院少監)에 오른 진긍(晉兢)이 있었고, 1705년( 숙종 31)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충좌위 부사과(行忠佐衛副司果)로서 식년 무과에 병과 35위로 급제한 진수창(晉壽昌, 1661 ~ ?)과 1725년( 영조 1) 부사과(副司果)로서 증광 무과에 병과 136위로 급제한 진영찬(晉英纘, 1690 ~ ?)이 있었다. 두 사람은 부자지간으로 당시 거주지는 모두 한성부였으며, 진수창의 자는 여장(汝長), 진영찬의 자는 찬징(纘澄)이었다. 진수창의 아버지는 별파진(別破陣) 진기룡(晉起龍)이었고 아래로 진이창(晉二昌)·진세창(晉世昌)·진명창(晉明昌)·진만창(晉萬昌)·진우창(晉祐昌) 등 5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또한 1860년( 철종 11) 유학(幼學)으로서 정시(庭試) 문과에 을과 2위, 즉 탐화랑(探花郞)으로 급제해 1866년(고종 3) 성균관 박사(정7품)에 오른 진명복(晉命復, 1819 ~ ?)[7]과 1885년(고종 22) 유학으로서 식년 진사시에 2등 2위로 입격한 진창욱(晉昌旭, 1837 ~ ?)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당시 거주지가 전라도 남원도호부(南原都護府)였고, 진명복의 아버지는 진정표(晉廷表), 조부는 진순응(晉順應), 증조부는 진방한(晉邦漢)이었다. 진창욱의 자는 희백(希伯), 아버지는 학생(學生) 진기문(晉璣文)이었고, 아래로 진태욱(晉台旭)·진경욱(晉慶旭)·진철욱(晉喆旭)·진관욱(晉寬旭) 등 4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4.1.1. 집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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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참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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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백제(百濟)의 귀족층을 대표하는 대성팔족의 일원으로, 건국 초기부터 멸망 이후인 8세기 초까지의 기록에 등장한다. 진모씨(眞牟氏)라고도 한다. 일각에서는 신라 제31대 신문왕 때 대아찬을 지낸 진공(眞功), 상대등을 지낸 진복(眞福)과 연관짓기도 하나, 진골만이 오를 수 있는 관등을 지낸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들의 실제 성은 김씨(金氏)로 추정된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에는 전국에 함경북도 종성군에 살던 개성 본관의 진규석(眞圭錫)씨의 1가구가 유일하게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7, 8대 이전에 지금의 지역으로 이주해왔던 것으로 알고 있을 뿐, 성씨의 내력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고 언급한 바가 있다.

5.1. 서산 진씨(瑞山 眞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세계 등을 알 수 없다. 백제 대성팔족 중의 하나인 진씨(眞氏)의 후예가 아닌가 하는 추정이 있다.

2000년도 인구조사 당시 서산 1,555명 등 전체 1,579명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15년 후인 2015년에는 오히려 45명까지 크게 감소하여 266위까지 격감했다.

6. 기타 국가의 진씨

중국에서는 김씨가 진으로 발음된다.

7.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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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자 상관없이 한글만으로는 그렇지만 통상적으로 쓰이는 陳씨가 절대적이다. [2] 하술하겠으나 중국에서는 김씨가 진씨가 된다. [3] 이 본관 홈페이지 게시글 여기, 여기가 출처로, 후자에서는 '45만여 명의 후손', '50만 정체성'이라고 되어 있는 조형물 사진이 올려져 있다. [4] 광동성, 저장성, 푸젠성에서 매우 흔하다고 [5] 성룡의 영어 이름 재키 찬이 여기서 나왔다. [6] 성(姓)이 아니다. 고대 일본에서 카바네(姓)와 우지(氏)는 구분되는 개념이었다. [7] 1864년(고종 1) 1월 9일 진창복(晉昌復)으로 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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