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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20 21:08:50

양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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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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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양왕(襄王)
(姬)
정(鄭)
아버지 혜왕
생몰 기간 기원전 ???년 ~ 기원전 620년
재위 기간 기원전 651년 ~ 기원전 620년

1. 개요2. 재위 기간3. 기타

1. 개요

주나라의 제18대 . 혜왕의 아들이며, 경왕(頃王)의 아버지.[1] 그는 춘추오패의 셋을 만난 왕이다. 그들은 바로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 진목공(秦穆公)이다.[2]

2. 재위 기간

양왕 원년( 기원전 651년), 제환공은 (宋)나라 계구 땅에서 노희공(魯僖公), 송양공(宋襄公),[3] 위문공(衛文公), 정문공(鄭文公), 허희공(許僖公), 조공공(曹共公)과 함께 회맹을 하였다. 양왕은 주공을 보내 천자의 사신 자격으로 이 회맹에 참여하게 해 주 양왕이 선조에게 제사한 고기를 돌렸다. 이것을 계구지맹이라 한다.

양왕 7년(기원전 645년),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이 죽었다.

양왕 9년(기원전 643년), 제환공이 관중이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간신배 역아, 수초, 개방의 손에 굶어 죽었다. 그리하여 송양공은 그 상황을 바로잡으려고 나섰다.

양왕 10년(기원전 642년), 송양공은 조(曹)나라, (衛)나라, (邾)나라와 함께 제나라로 가서 역아, 수초의 무리와 공자 무휴(無虧)[4]를 죽이고, 강소(姜昭)를 왕위에 올리니 그가 바로 제효공이다.

양왕 13년(기원전 639년), 송양공은 그 일을 성공시키고 기고만장하여, 패자(霸者)를 칭하려 했으나 국력이 약해 초성왕(楚成王) 등에게 인정을 못받는 굴욕을 당했다.

양왕 14년(기원전 638년), 송양공은 초성왕과 회맹을 하려다가 이복형인 목이(目夷)의 말을 듣지 않고 병사를 데리고 가지 않아 결국 잡히고 말았다.

목이가 송나라 공작이 된 척 연기를 하는 바람에, 초성왕은 송양공과 목이의 내분을 노려 송양공을 풀어줬으나, 목이가 사심없이 송양공을 모시는 바람에 그것은 실패하였다.

양왕 15년(기원전 637년), 송양공은 초성왕과 홍수(泓水) 전투를 벌였으나 그놈의 송양지인 때문에 애꿎은 송나라의 병사만 죽었을 뿐 아니라 자신도 다쳐서 그 해에 죽고 말았다.

지금껏 양왕과 직접 관계가 없는 이 이야기를 왜 했느냐면 이 왕 대에 일어난 패자 자리를 둘러싼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양왕 16년(기원전 636년), 공자 중이(重耳)가 진목공(秦穆公)의 지원을 받아 19년의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진후(晉侯)가 되었다. 그가 바로 유명한 진문공이다.

양왕 17년(기원전 635년), 자신의 아우인 태숙대(太叔帶)가 형수인 외후와 사통했다가 그 사실을 들켜서 반란을 일으켜 주 양왕이 쫓겨나 정나라로 피신했다. 진문공이 그를 구해주고 태숙대를 죽였다. 그러자 양왕은 진문공에게 하내, 양번 등을 주어 그를 위로했다. 그러나 그 땅의 사람들은 진문공을 따를 마음이 없었으나 진문공은 신의를 지키는 마음을 보여주어 결국 그 땅을 차지하였다.[5]

양왕 20년(기원전 632년), 성복 전투에서 진문공은 초성왕이 보낸 성득신(成得臣)을 물리쳐 성득신이 초나라로 돌아가 자결하게 했다.

양왕 32년(기원전 620년), 그가 죽고, 그의 아들 희임신이 왕이 되니 그가 바로 경왕(주 19대)이다. 사후 한동안 장례가 치러지지 못했는데 주 왕실의 사정이 너무 궁해서였다. 결국 2년 뒤 노나라에서 지원받고서야 비로소 장례가 치러질 수 있었다.

3. 기타

재위 후반부의 위(衛)나라 제후 위성공(衛成公)과 이름자(姬鄭)가 같다.

[1] 시호의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다른 주경왕이 2명이 더 있다. 景, 敬 순이다. [2] 다른 춘추오패로 알려진 초장왕(楚莊王)은 그 다다음 세대 사람이다. [3] 송양지인으로 유명한 바로 그 사람이다. [4] 달리 무궤(無詭)라고도 한다. [5] 3일 동안만 공격하겠다고 해서 정말로 그렇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