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정혼(鄭渾)를 찾으신다면 이쪽으로
정 국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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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9700> 정(鄭)나라 10대 국군 문공 文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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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희(姬) | |
씨 | 정(鄭) | |
휘 | 첩(踕) | |
아버지 | 정여공(鄭厲公) 희돌(姬突) | |
어머니 | 옹길(雍佶)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628년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672년 ~ 기원전 6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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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정(鄭)나라의 제10대 군주. 정여공의 아들. 그는 희란을 제외하고 군주 자리 계승에 가까운 아들 들을 죽였다. 그 이유는 바로 제나라를 믿고 정문공에게 반역을 저질렀기 때문이다.[1] 춘추오패 기준 제환공(齊桓公)과 송양공(宋襄公), 진문공(晉文公)을 겪어본 군주다.[2]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진(晉)나라와 초(楚)나라 사이에서 줄타기를 시작하게 된다.2. 생애
2.1. 당시 상황
이 당시 주왕실이 쇠락하여 제(齊)나라가 강대해져 송(宋)나라, 노(魯)나라, 진(陳)나라, 채(蔡)나라, 위(衛)나라, 정(鄭)나라, 주(邾)나라, 조(曹)나라가 제환공을 맹주로 추대했다.[3]2.2.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서 줄타기
정 문공 6년(기원전 667년), 정문공은 노장공(魯莊公), 제 환공, 송환공(宋桓公), 진선공(陳宣公)과 회맹했다. 다시 남방의 강대국인 초(楚)나라가 그 강대한 힘을 믿고 주 왕실과 제나라에게 불복하며, 중원의 패권을 장악하려 했다.[4]정 문공 7년(기원전 666년), 초성왕(楚成王)은 정나라가 초나라를 배반하고 제나라를 따르자 영윤인 공자 원을 대장으로 투어강, 투오를 선봉으로, 공손 유, 공손 가에게 뒤를 받치게 했다. 그 무리는 600승으로 그들로 하여금 정나라를 치게했다. 공자 원은 정나라의 곡미관의 관문을 치자 정나라의 정경 숙첨(叔詹)이 공성계를 써서 초나라의 군대가 물러나게 했다.[5]
정 문공 9년(기원전 664년), 공자 원이 다시 정나라를 칠 때 싸우지 않고 돌아오자 초 성왕은 크게 분노해 공자 원을 죽여버렸다.
정 문공 15년(기원전 658년), 초 성왕이 병사를 보내 정나라를 치고 정나라의 장수 담백을 사로잡았다.
정 문공 16년(기원전 657년), 그 소식을 들은 제 환공은 송나라, 강(江)나라, 황(黃)나라와 양곡에서 회맹해 초나라를 치기로 했다.
정 문공 17년(기원전 657년), 제 환공이 초나라의 동맹국인 채나라를 쳐부수고, 초나라의 양곡 땅에 이르렀다.
정 문공 18년(기원전 655년), 제 환공은 노희공(魯僖公), 허 희공(許僖公), 조소공(曹昭公)과 주혜왕(周惠王)의 아들 희정(姬鄭) 함께 위나라의 수지 땅에서 회맹했다. 이때 정문공은 주나라 왕에게 제나라를 배신하라고 권했다. 대신에 초나라와 연락하고, 진(晉)나라와도 연락했다.
정 문공 19년(기원전 654년), 분노한 제 환공은 노(魯)나라, 송나라, 진(陳)나라, 위(衛)나라, 조(曹)나라와 함께 정나라의 신정성을 포위했다. 초 성왕은 그 소식을 듣고, 제나라의 동맹국인 허나라를 쳤다. 제환공은 허나라를 구하러 가니 정나라의 포위가 풀렸다.
정 문공 20년(기원전 653년), 정문공은 세자 화(華)를 제환공에게 사죄하는 의미의 사신으로 갔다. 세자 화는 정나라의 대부 예, 인, 조인씨를 제거하려고 했으나 그 일로 정문공의 미움을 사서 제거 당했다. 6년 뒤에 공자 장도 살해했다.
정 문공 21년(기원전 652년), 노 희공은 주 왕실의 사자, 제 환공, 송 환공, 위문공(衛文公), 허 희공, 조공공(曹共公), 정나라의 세자 관(款)과 조(洮) 땅에서 회맹해 복종 의사를 표시했다.
정 문공 30년(기원전 643년), 제 환공이 죽자 제나라가 내란으로 인해 혼란해졌다. 이에 정문공은 지체 없이 초 성왕을 섬겼다.[6]
2.3. 제 환공 사후
정 문공 34년(기원전 639년), 초 성왕은 송양공(宋襄公)과 맹읍에서 제후들과 회맹했다.정 문공 35년(기원전 638년) 여름, 송양공은 정나라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며 공격하자 초 성왕은 병사를 송나라로 보내 정나라를 구원하게 했다. 이것이 홍수 전투로 송양공은 여기서 허벅지에 화살을 맞아 송양공은 이듬해 죽었다.[7] 11월 8일 정문공은 자신의 부인인 미씨(초성왕의 여동생), 강씨와 함께 가택에서 초 성왕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바로 이때 초성왕은 미씨의 딸인 백미와 숙미의 대접을 받았는데, 그녀들이 엄청난 미인들이라 초성왕은 두 조카를 후궁으로 들이고 싶었다. 그래서 여동생 문미에게 백미와 숙미에게 자신을 바래다 달라고 했고, 그 뒤 날름 차지해버렸다.
2.4. 진 문공(晉文公)과의 악연
정 문공 36년(기원전 637년), 진(晉)나라의 공자 중이(重耳) 즉, 미래의 진문공이 망명길에 정나라를 지나가게 되었다. 그가 신정성에 이르자 신하들을 불러모아 그 일에 대해 상의하니 숙첨은 그를 후히 대접하라고 했다.[8] 그러나 정문공은 그것을 거절했다. 숙첨이 공자 중이의 상이 대단히 비범하니 그가 진(晉)나라로 돌아가게 하지 말고 죽여버리자고 했으나, 정문공이 그것 또한 거절했다.[9] 결국 공자 중이는 초나라를 거쳐 진(秦)나라로 가게 된다.정 문공 37년(기원전 636년) 봄, 공자 중이가 자신의 조카인 진회공(晉懷公)을 몰아내고 진(晉)나라의 후작이 되었다. 그가 바로 진문공(晉文公)이다. 이때 중나라에서 활나라를 치니 활(滑)나라가 굴복했다가 위나라를 섬겼다. 정문공이 활나라를 치는데, 주양왕이 활나라를 용서하라고 했다. 정문공은 그것에 앙심을 품고 사신인 백북을 가두니 주양왕은 적(翟)나라와 함께 정나라를 쳤는데, 적나라가 주양왕을 배신해 정나라로 피난했다. 그리하여 정문공은 주양왕을 범 땅에 머물게했다.
정 문공 38년(기원전 635년), 정나라는 초나라를 도와 진(晉)나라를 쳤다.
정 문공 41년(기원전 631년), 진 문공(晉文公), 제소공(齊昭公), 송성공(宋成公), 노 희공, 채 장공(蔡莊公), 진 목공(秦穆公), 정 문공, 진공공(陳共公), 주(邾)나라, 거(莒)나라 군주와 온 땅에서 주양왕에게 입조했다.
정 문공 43년(기원전 630년), 진 문공(晉文公)이, 진 목공과 함께 정나라를 쳤다. 그리고 진(秦)나라의 군대는 숙첨의 활약으로 물러나게 했으나, 진(晉)나라 군대는 여전히 물리치지 못했다. 숙첨이 역시 힘을 다해 설득하니, 진 문공(晉文公)은 정나라의 공자 란을 세자로 삼는 조건으로 물러났다.
정 문공 45년(기원전 628년), 정문공이 죽고 세자 란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정 목공(鄭穆公)이다.
3. 평가
아버지 정 여공의 뒤를 이어 나라를 안정시키던 찰나에 제나라, 초나라, 진(晉)나라가 대단히 강력해져, 이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정문공의 잘못은 아니고, 그 윗 세대의 권력 투쟁 탓이 대단히 컸다. 그리고 이 뒤에는 주로 진(晉)나라와 초나라의 쟁패전 속에서 줄타기를 하게 된다.
[1]
아버지가 임명한 대부를 죽이려 했으니 정문공 입장에서는 반역으로 비쳐질만 했다. 왕위 계승과 거리가 먼 아들들도 세자를 죽이자 망명을 시도해서 죽였다고 한다. 사실 희란도 사형 대상이었으나 이 사람은 유일하게 망명에 성공하여 훗날 용서받고 돌아와서 왕위를 잇는다.
[2]
진문공과는 악연이 있는데, 그 이유는 후술.
[3]
물론 송나라가 지위가 높고, 국력이 제법 되지만, 제 환공을 맹주로 인정한 것은, 공짜로 해준 것 일리 없고, 제나라에게 털렸기 때문이다.
[4]
이 당시 왕은
초성왕(楚成王)인데, 그 당시에는 끝내 패권을 쥐지 못했지만, 그 손자인
초장왕(楚莊王) 대에는 끝내 춘추오패로 등극한다.
[5]
이 것이 공성계의 유명한 실례 중 하나다.
[6]
당시 춘추시대의 정세가 그러했는데, 제나라는 관중이 죽은 뒤에 패업을 서서히 잃다가 제 환공이 죽자
안영(晏嬰)이 상국으로 있던
제경공 대까지는 패권을 넘볼 여유가 없었으며, 진(晉)나라는
진(秦)나라와의 다툼과 내부 사정이 안정되지 못해 감히 중원의 패권을 다툴 수 없었다.
[7]
의술이 발달한 현재에도 허벅지에 동맥이 터지면 회복하기 어려운데, 당시 의료 기술로는 말할 필요가 없다. 멀리갈 거 없이
삼국지의
장합이 서기 231년에 그렇게 죽었다.
[8]
숙첨이 후히 대접하라 한 이유는 당시 예법도 있었지만, 그 못지 않게, 공자 중이가 이끄는 무리의 가능성과, 그들이 진(晉)나라의 권력을 쥐었을 때의 일을 가늠해서 조언한 것이다.
[9]
손님으로 온 사람을 죽이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대단한 실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