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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0 16:08:22

조비/인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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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치졸함과 뒤끝3. 불효자4. 외모지상주의5. 콩가루 형제6. 조비가 후대했던 이들7. 괜찮은 면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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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가 남긴 것은 개나 쥐도 먹지 않을 거다.
조비의 친모 무선황후 변씨[1]

조비의 인간성에 관해 서술하는 문서. 조비는 성격이나 인성 면에서 별로 좋지 않기로 유명한 조조보다도 여러모로 인간성에 문제가 많았다. 당장에 이 문서에 인간성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이 무척 많다. 여러 이유가 있기는 했지만 조조가 조식을 오랫동안 후계자로 고려한 것은 조비의 이 인간성 문제도 있었다. 결국 방계종친인 하후상을 죽음으로 내모는 최악의 선택을 저지르고, 아내 문제와 자식 방임은 아들 조예의 인생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게 되어[2] 초반부터 위나라 멸망의 씨앗을 제대로 뿌리게 된다. 개인적으로 오질 같은 소인배를 총애한 것도 문제로 꼽힌다.

원인으로는 조비의 동생 조창 조식이 문무에 뛰어나 아버지 조조에게 유독 총애를 많이 받은 반면 평범한 조비는 늘 동생들의 타고난 재능에 압도당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조가 다소 조비를 멀리한 묘사가 많다. 거기까지면 모르지만 뛰어난 동생들로 인해 후계자리를 두고 처절하게 경쟁해야되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있던 선천적인 인성 문제가 더욱더 극대화된 사례라고 분석할 수 있다.

이렇게 표현했지만 조비 또한 무능하지 않았다. 즉 무능한데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후계자가 된 것은 절대 아니어서 조식이 칠보시로 유명하지만 조비 또한 그 조식과 아버지 조조와 함께 문재를 인정받아 삼조라 일컬어졌다. 즉 평범하다 쳐도 어디까지나 두 동생이 각자의 분야에서 조비보다 뛰어나서 그렇지 조비 또한 능력은 있었다. 문제는 그런 나름대로의 장점과 능력을 덮는 단점과 실책들이 워낙 부각되었다는 것.[3]

2. 치졸함과 뒤끝

조비는 사서에서 항상 언급되듯 근본적인 위신 없이 그저 오만하고 귀하게만 자라 쓴소리를 싫어했으며, 아첨을 좋아했고 한번 마음에 안든 사람은 한참 뒤까지 기억했다가 기어이 보복했고, 친한 사람한테는 지나칠 정도로 오지랖이 넓었다. 거기다 하필 이 인간이 황제였으니, 맘에 안 드는 사람은 유배를 보내거나 죽이곤 했다. 심지어 조비의 능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조비의 성격을 쉴드치는 경우는 잘 없다.

이런 인성질의 대부분이 조비가 황제가 되고 난 후에 벌어졌는데, 조비의 재위기간은 불과 6년이었다. 만약 조비가 장수하면서 수십년 동안 황제 자리에 있었다면 지금보다 몇 배, 몇십 배는 더 분량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몇몇 부분은 조비의 입장,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할 문제도 있기에 몇몇 인물에 대해서는 다른 시선도 서술해두었다.

이렇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미워하다보니 공계 같이 조비에게 찍히고서도 황제가 된 후 저 사람들을 다 때려잡느라 바빴던 조비가 깜빡 잊어버렸는지 넘어간 경우도 있다.

3. 불효자

한무제 이후 본격적인 유교 장려로 인해 당시 지배층 사이에서는 유교적 질서와 도덕이 가치 기준으로 자리잡아 있었다. 따라서 조비 자신도 통치 정당성을 얻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유교 도덕과 장유유서의 질서를 강조했으나, 정작 본인은 그에 걸맞는 행동거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국가이념 및 황권과 관련된 정책을 실행하려면 뚝심을 가지고 행동거지 하나하나 절제해서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게 중요한데, 조비의 행적에는 유독 기본적인 식욕과 물욕을 못 참거나 감정에 지나치게 충실해 절제가 없는 등 나이만 먹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간혹 드러난다. 세자로 낙점받은 뒤 체통도 잊고 신비를 끌어안으며 기뻐했다는 일화, 맹달의 투항을 받은 뒤 신하들 모인 자리에서 촉에선 고기를 꿀에 절여 먹는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일화, 그리고 아래의 기타 일화들이 그렇다.
다만 이는 당시의 시대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상술되었듯 한문제 이후 왕/황제는 삼년상을 치르지 않는 것이 관습화되면서 위진 시기에는 상례 문화가 많이 유연해졌다. 훗날 하증이 죽림칠현의 일원인 완적에게 모친상중에 술과 고기를 먹었다며 디스하자 '효로 나라를 다스리는' 입장인 사마소가 오히려 완적을 쉴드친 사례도 있다.[20]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 와중에 사마소 본인의 아들이었던 진무제 사마염이 '백성들을 예로 교화해 온 집안의 사람인 내가 그래서야 되겠느냐'고 준엄하게 꾸짖으며, 관습을 깨트리고 삼년상을 강행하고 후세 사가의 극찬을 받으며 이러한 전통은 끝난다. 하긴 진나라의 태생적인 원죄 때문에 충보다는 효를 더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감안해야 할 듯 싶다.

4. 외모지상주의

조비는 사람이 잘생기면 우대하고 못생기면 박해했다.

5. 콩가루 형제

조조는 조비는 물론 조식이나 조창보다도 마음에 들어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은 조충이며 10대 초반에 일찍 병사했지만 굉장히 사려 깊고 지혜가 뛰어나 조조가 이미 후계자로 마음 두고 있었다 한다. 조비도 제위에 오른 후에 '만약 창서(조충의 자)가 살아있었다면 나는 천하를 지배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종종 얘기했을 정도. 조조는 조충이 죽자 남은 자식들에게 '조충이 어린 나이에 죽은 게 나에게는 불행이나 너희들에게는 행운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문무 양방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두루 보인 조조의 자식들 답게, 조비의 형제들은 뛰어난 재능을 갖추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위에서 보듯이 조비 역시 나름대로 능력을 타고 났으며, 무엇보다 조앙과 조삭의 사망으로 인한 것이긴 하나 장자의 자리를 타고 났으니 나름대로 행운아라고 할 만 하다.

그러나 동시에 유능한 아우들과 비교되어야 했던 불운아이기도 했다. 이 중 조비와 가장 갈등을 많이 빚은 형제들은 칠보시로 유명한 조식과 오환족을 토벌한 것으로 군사적 재능을 입증한 조창이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무선황후의 아들이었다. 즉, 이들은 형제 이전에 제위 경쟁자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견제 속에 왕(그리고 황제)이 되고 난 후에는 형제들을 권력의 핵심에서 몰아낸다. 조식과 조창 등의 형제들을 경계하여 각각 왕위를 줘서 지방 임지에 묶어두고 감시하면서 수도로 절대 올라오지도 못하게 했고, 벼슬이나 일도 맡지 못하게 했다. 사실 형제로서는 좀 비정하지만, 친족들이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차단하여 권력의 안정성을 높인 선택이었다고 보면 군주로서 비판할 일은 아니다. 실제로 조비는 자신의 권력에 해를 끼칠 여지가 전혀 없는 막내동생 조간에게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등, 형제들에 대한 냉랭한 태도는 조비가 본성적으로 사이코여서 그렇다기보다는 일종의 통치술이라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다.

다만 이것이 조예 대로 가면서는 황제의 친위세력이 될 만한 친족들이 빌빌거릴 지경이 되어 사마씨의 권력 찬탈에 유리한 환경이 되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한다.

이지만 사실 정사에 칠보시거 나온 것은 아니다. 어찌 되었건 결국 조비는 조식을 죽이는 걸 포기하고 그를 추방하는 데에 그쳤다. 조식은 왕으로는 봉해졌지만 항상 봉지가 바뀌었다.(견성왕 - 옹구왕 - 준의왕 - 옹구왕 - 동아왕 - 진왕) 다만 조비가 바꾼 것은 견성에서 옹구로 한 번이고 나머지는 조예가 바꾸었다.

6. 조비가 후대했던 이들

조비는 다른 세력에 있다가 조위를 섬긴 항장들을 비교적 후하게 대우했는데, 몇 가지 사례가 있다.

7. 괜찮은 면모들

물론 조비도 마냥 인간성이 모자란 면모들만 보여준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인간성에 문제'만' 있었다면 조조의 후계자가 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그래서인지 미담도 있다.


[1] 다만 이것은 위진시대 인물에 대한 가십성향이 강한 세설신어에 나온 발언이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2] 조예 항목을 보면 알다시피 조예가 망가진 근본적인 원인은 전부 조비 때문이다. [3] 평가 항목에서 보다시피 그의 실책이나 단점이라 평가되는 것의 대부분은 그의 인격적 결함에서 기인되는 것이었지, 개인의 지적능력 자체는 뛰어난 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진수의 평가는 조비의 문학적 소질, 지식, 기억력 등을 칭찬했으나 도량이 작고 덕망이 넓지 못했으며 도의의 존립에 뜻을 세우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하고 있다. 진수가 살았던 서진이 위나라의 뒤를 이은 나라여서, 선황제 격의 인물인 조비에 대해 안 좋은 기록을 하기 힘들었단 것까지 감안하면 '머리는 좋은데 덕망이 없고 생각도 딴데 가 있고 그릇도 작았다' = '똑똑하지만 인간성이 쓰레기에 지혜롭지도 못하다' 로 요약이 가능하다. 이 정도면 통치자로써 받을 수 있는 평가 중 최악의 평가를 받은건데, '그래도 머리는 좋았다' 라는 것만은 인정해주고 있다. 어찌보면 능력은 평범하지만 인품은 좋았던 유선과 정반대이다. [4] 위략》에 의하면 장수를 일부러 잔치에 초대한 뒤 형을 죽인 네가 뻔뻔하게 말을 거냐는 식으로 쏘아 붙였으며 이런 짓을 여러 번 반복했고 장수는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고 나온다. 다만 년도에 오류가 있는데 위략에는 207년에 오관장 조비가 장수를 갈구어서 죽게 했다는데 실제로 조비가 오관중랑장이 된 것은 위서 문제기에 따르면 211년이다. [5] 덕양향주의 아버지는 진백남였는데, 그는 조조의 목숨을 구해주고 대신 죽었다. 이에 조조는 그 공을 기려 그의 성을 조씨로 바꾸고 그의 아들 조진, 조빈과 딸 덕양향주를 자기 자식들과 같이 길렀다. 그러니 조비와 덕양향주가 친남매는 아니었어도 친남매처럼 같이 자란 사이였다. [6] 조비 또한 정실인 견씨를 제쳐두고 첩인 곽씨를 총애하였으며, 급기야는 견씨를 죽여버리고 곽씨를 새로 정실 삼는 짓까지 했다. [7] 이를 보면 조비가 실제로 반사회성 성격장애였을 가능성이 있다. 하후상을 총애했다는 기록이나 어린 시절부터의 친분, 자신의 여동생이나 다름없는 조씨와 결혼시킨 것이나 그가 죽어갈때 울었다는 것을 보면 그가 하후상을 아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위의 행보를 보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극도로 떨어지고 극단적인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고한 친구의 첩을 죽여놓고 죽어가는 그를 붙잡고 슬퍼한다는 것은, 하후상이 슬픔의 원인이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반사회성 성격장애가 있는 이들은 기본적인 애착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공감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이용하는 식의 자기중심적 관계가 될 확률이 높다. 즉 하후상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아끼는 친구이자 부하와 인척관계가 되어 내 권력을 공고히 한다', '내 동생같은 아이가 홀대당하다니 그 원인을 없앤다'는 식으로 타인에 대한 공감 없이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보면 그가 저지른 다른 비인간적인 행위도 전부 설명이 된다. 즉 조비는 비유가 아닌 진짜 소시오패스였을 확률이 있다. [8] 조비의 자기중심적 애착의 비슷한 사례로 모친상을 당했던 조휴에게 위로를 한답시고 상복을 빼앗고 억지로 고기를 먹였다. 이에 조휴가 더 상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자기딴엔 총애하는 신하가 모친상을 지내다가 건강이 상할것을 염려하여 한 행동이지만 이는 어머니가 죽은 조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행위였다. [9] 《촬요(撮要)》의 기록이다. 흥미롭게도 이 대목은 조선왕조실록 〈정종실록〉에서도 등장하는데, 영락제 건문제를 두고 일으킨 정난의 변에 대한 당시 정황과 연관되어 있다. 문서 참조. 여기에 따르면 유엽은 손권이 훼이크치는 거라며 믿지 말라고 했는데 조비는 낚였다는 식이다. [10] 비단 100필을 달라 했다고도 한다. [11] 무선황후는 행동을 가볍게 하는 인물이 아니었으며, 사서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최대한으로 봐도 그녀가 개입을 한 건 자신의 동생이 빈곤하게 산다고 남편 조조에게 벼슬 좀 올려달라고 부탁한 것과 아들 조비를 살리기 위해 나선 것 밖에 없다. 즉 웬만해선 간섭하지 않던 태후가 당시 황후를 압박하면서까지 강하게 나설 정도로 미친 짓이었던 것이다. 조홍은 단순한 종친이 아니라 개국공신이자 황실의 웃어른, 심지어 조조의 생명의 은인이므로 조비 자신의 은인으로 공경해도 모자랄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별 것도 아닌 이유로 처형시킨다면 황실의 권위가 떨어질 것은 자명했다. [12] 정확히는 '오질이 조진의 건강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편을 들어줬다. 오질이 조비라는 뒷배경을 밑고 위나라 원로인 조홍과 친족인 조진에게 대놓고 오만하게 굴면서 도리어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일이 허다했다. [13] 조비가 후일 일찍 세상을 뜨자 조진을 탁고대신으로 삼은 것을 생각했을때 이는 조진이 충분히 불만을 가질 만한 조비의 경솔한 행위가 맞다. 조비가 유사시 탁고를 맡길 정도로 조진은 당대 조씨 황실을 지탱할 유력한 종친 중 한명이었는데 그런 이의 명성을 깎아서 좋을게 뭐가 있겠는가. 또한 앞서 설명한대로 조홍은 황실의 최고 웃어른인 만큼 (조조에게 성을 받아 들어왔다지만) 엄연히 황실 소속인 조진도 말은 못했지만 조홍을 그렇게 대하는 것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14] 비슷한 케이스인 한단순은 조식을 칭찬했을 뿐만 아니라 조식의 사부였음에도 죽지 않았다. [15] 순운의 아내가 조조의 딸이자 조비의 누이인 안양공주였다. 해서 순운의 자식들은 조비 자신의 생질들인지라 총애했다고. [16] 사실 조상 일파의 정치, 특히 하안에 대한 이 두 평가 모두 반론의 여지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하안 항목 참조. [17] 다만, 이렇게 말한 것 치고 조조는 정의를 중용하지 않았다. 헌제 앞에서는 유종을 칭찬했으면서도 손권과 유수구에서 싸울 때 유종을 이복형 유기와 함께 개돼지 같다고 싸잡아 비하한 조조의 평소 언행을 고려해 볼 때, 저 탄식은 느닷없이 혼담이 깨진 정의를 달래주는 립서비스이거나 '내 딸을 하후무 같은 놈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아니었다.'는 아버지로서 후회를 돌려 말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18] 업성에서 옥결을 받았다고 하니 황제 즉위 전, 낙양으로 천도하기 전 얘기다. [19] 유비가 왜 원수가 상을 치르는데 상주에게 조의금을 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비와 조조는 과거 반동탁연합에 함께 종군한 것을 포함하여 한때나마 친분을 나눈 적도 있는 등 단순한 원수 사이가 아닌 복잡한 관계였음을 고려하면 조조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는 차원이었던 것 같다. 사실 유비와 조조는 사적으로 인척 관계였을 가능성도 있다. 유비가 잠시 조정에 몸을 담았을 때 조조는 유비의 의형제들인 관우와 장비에게 자신의 친척들과 혼인을 주선한 일도 있었던 만큼(장비의 처가 하후씨라는 말도 있고 하후패가 촉한에 망명했을 때도 촉한의 황실과 인척관계라며 - 유선의 정실이 장비의 딸이다 - 대우를 받았던 것도 있다.) 사적으로 전혀 교류나 관계가 없을 리는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애초에 당시에는 적대관계라고 해도 사적인 원한이 있지 않으면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고 유비와 조조도 서신을 주고받는 관계이긴 했다. 또한 과거 조조가 유비를 포섭하려고 벼슬을 얻어주거나 유비가 조조 휘하에 잠시 있기도 했고, 이때 조조가 '천하의 영웅은 그대와 나 뿐'이라고 할 정도로 높이 평가하기도 했으니 상세히 기록되지 않았을 뿐 인간적 교류 자체는 제법 있었을 것이다.어쩌면 유비 입장에서는 나는 저런 역적에 철천지 원수한테도 조의를 표할 정도로 대인배다 라는걸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사실 따지고보면 조비의 이 행위는 불효보다는 친선 목적의 사신을 별 이유없이 죽였다는 점에서 외교적 결례에 가깝다. [20] 사실 당대에는 유교가 지나치게 교조화되어 본질적인 것은 망각하고 형식에만 치중하여 그 원뜻과는 달라진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당장 삼년상 도중 잠시 어지러워서 옆에 있던 여자한테 기댔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벼슬길에서 쫒겨난 이도 있었을 정도였다. 완적이 모친상 때 술과 고기를 먹은 이유도 그러한 풍조를 비판하기 위한 의도적인 도발이라고 보는 분석이 다수다. 애시당초 죽림칠현이 이런 허례허식에만 치중한 유교 문화를 비판하기 위해 생겨나기도 했고 말이다. [21] 원문에서는 양암(諒闇)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22] 출처: 오서 오주전 주석 강표전 [23] 단순히 아버지의 유언을 어긴 것이라기보다는 아버지의 첩을 취했다는 뉘앙스가 있다. [24] 물론 유봉은 귀순권유를 거절했고 추후 제갈량에 의해 사망했다. 하지만 제갈량은 촉한이 유봉파와 유선파로 갈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조치였다. 아무리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 일단 유비가 자신의 아들이라 선언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했다. 게다가 유봉은 관우에게 지원군을 보내지 않아 관우의 죽음의 원인을 제공하고 요충지인 상용을 함락당해 군법으로 처형해도 할말없는 실책을 저질렀다. [25] 사실 애초부터 문소왕후가 5살이나 연상이란 것을 생각하면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 멀리했다'기보단, 애초에 그저 외모만 보고 좋아했던 거라 시간이 지나서 질렸다고 보는게 더 맞을 것이다. [26] 이러한 배경 속에 조식은 이복동생인 조정과의 이별을 안타까워하며 석사부라는 글을 지었으며 친척들과 교류를 할 수 있게끔 압박을 풀어달라는 식의 상소를 올리기도 한다. [27] 둘의 나이차는 무려 30살이었다. 오늘날에 30살 많은 맏형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짧고 만 15살만 되어도 성인이었던 데다가 조혼 및 조산이 당연하던 그 시절에 30살 차이면 정말 할아버지와 손자뻘처럼 여겨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28] 헌목황후 조씨는 260년 6월 7일에 사망했는데, 같은 달 조모가 사마소에게 살해당하며 결국 그녀는 죽기 전 위가 멸망해가는 모습을 보고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29] 다만 그 성격은 어디 안 가서 황권에게 어서 출두하라고 명령을 내리고는 오는 중에도 사람을 더 보내 닦달했다. 아마 황권이 당황해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걸 보고 싶었던 듯. 하지만 황권은 시종 태연하고 침착했으며, 조비도 장난이었기에 해코지는 안하고 이후에도 계속 중용했다. [30] 또한 가후는 어디까지나 장수의 부하에 불과했기 때문에 조조의 패배, 그리고 조앙의 죽음은 조조에게 원한을 갖고 조조군을 야습한 장수에게 책임이 있다. 이에 따라 조비는 장수를 증오했으며 자살할 때까지 괴롭혔다. 가후도 물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 주군을 위해 계책을 짠 것 뿐이고, 가후 본인도 언행을 조심하면서 조비를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 조비 입장에선 그럭저럭 쓸만한 놈으로 보였을 것이다. [31] 장료는 동탁의 부하 출신, 장합 원소의 부하 출신으로 둘 다 조조의 적대 세력의 장수였으며, 서황 역시 백파적 출신이라는 추측이 있으며 양봉의 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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