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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20:59:35

제2차 초공작전

제2차 초비작전에서 넘어옴
第二次 剿共作戰
Second Encirclement Campaigns

1. 개요2. 배경3. 전개
3.1. 국민혁명군의 전진3.2. 홍군의 반격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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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1년 4월 1일부터 5월 31일까지 진행된 국민정부 중국공산당 홍군에 대한 두번째 토벌작전. 첫번째와 마찬가지로 실패로 돌아갔다. 제2차 소공작전, 제2차 위초작전, 제2차 초비작전이라고도 한다.

2. 배경

제1차 초공작전의 실패 이후, 장제스와 입법원장 후한민이 약법 제정을 놓고 갈등한 끝에 2월에 장제스가 후한민을 감금하는 탕산 사건이 일어나 충격을 받은 광동파가 반장 세력에 합류하고 서산회의파, 개조파, 광서파 등이 광동에서 결집하고 있었지만 장제스는 이와는 별개로 즉각 2차 초공작전을 결정하여 2월 10일 군정부장 허잉친에게 육해군총사령관 겸 난창행영주임 자리를 겸임하여 2차 초공작전의 총지휘관으로 삼았다. 1차 토벌전에 참여한 6로군, 9로군, 19로군을 보강하는 한편 호남에서 5로군, 산동에서 26로군의 정예부대를 투입하여 총 11개 사단 11만 3천명의 병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다른 지역 소비에트 토벌군까지 합치면 국민당의 병력은 17개 사단, 20만에 달했다. 하지만 이들중 절반 이상이 중원대전 중에 중앙군에 투항한 군벌군들을 개편한 부대로 북부 출신이라 강서성의 음식과 기후가 맞지 않아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장제스는 강서성의 공산당 근거지 영도를 목표로 설정하여 1차 초공작전의 전훈을 바탕으로 '보보위영, 온찰온타', '분진합격, 호상책응' 전술을 내세워 강서와 복건을 아우르는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하여 천천히 전진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홍군은 이념적으로 무장하고 마오쩌둥의 지시 아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반면, 국민당은 공산당을 여전히 비적떼 정도로 무시하고 그저 포위 공격에 홍군이 무너질 것이라고 얕잡아보고 있었다.

강서성의 중국 공산당은 석성, 루이진까지 지배지를 확장하고 6만 6천 명으로 병력을 증강한 상태였는데[1][2] 국민정부가 2차 초공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비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식량을 비축하고 있었다. 1931년 1월 상하이의 중국 공산당 중앙에서 샹잉을 강서성에 파견하여 소비에트 구역 중앙국을 수립하고 샹잉을 대리 서기로 임명했다. 또한 강서성에 소비에트 구역 중앙국이 지도하는 중앙군사혁명위원회를 수립, 주석에 샹잉, 주더가 부주석, 마오쩌둥을 총정치부 주임으로 삼고 마오쩌둥의 홍군 제1방면군 총전선위원회를 폐지했으며 4월 당중앙위원회 6기 4차 전원회의 이후 런비스, 왕자샹, 구쭤린으로 구성된 중앙대표단을 파견하여 지도사업을 실시했다.

3. 전개

3.1. 국민혁명군의 전진

4월 1일 2차 초공작전이 시작, 부전, 수남, 등전 등 7갈래 길로 토벌군이 접근해왔다. 그 당시 장제스는 2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고, 국민혁명군은 강서 남부에서 800리에 걸쳐 홍군 제1방면군 포위를 시도하였으나 각 부대 간의 연계가 불충분하여 포위망이 제대로 완성되지 못했다. 홍군은 저번처럼 국민혁명군을 내부로 깊숙이 유인하기로 결정하고 약한 부대부터 차례로 각개격파하기로 계획을 짰다. 홍군은 홍콩에서 입수한 무전기와 소련에서 훈련받은 무전기술자들을 바탕으로 국민혁명군의 통신을 도청하며 국민혁명군의 작전을 미리 간파할 수 있었다. 또한 자질이 좋지 않은 토벌군들이 약탈를 일삼자 주민들이 홍군의 정치공작에 포섭되어 홍군의 전투수행을 적극적으로 원조하였다.

3만명의 홍군은 마오쩌둥과 주더의 지휘를 받으며 4월 20일부터 용강과 동고 지구에 배치되어 20일간 매복해 있었다. 국민혁명군은 홍군과 지방유격대의 습격으로 인해 5월 중순에 이르러서야 홍군 근처에 도달할 수 있었다. 5월 13일 5로군 28사단장 공병번과 47사단 소속의 1개 여단이 부전을 출발해 동고를 공격했다.

3.2. 홍군의 반격

1931년 5월 15일, 홍군 제1방면군이 즉각 행동을 개시하여 5월 16일 한나절 간의 전투 끝에 산악지대에서 공격하는 전술로 국민혁명군을 포위, 전멸에 가까운 큰 피해를 입혔고 28사단장 공병번은 수차례 지원요청을 보냈으나 주변의 지휘관들은 모두 핑계를 대며 지원을 거절했다. 결국 공병번은 포로가 되었다가 병사로 위장해서 도망쳤다. 공병번은 <제2차 위초 체험기>를 제어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나는 부대(5사단)를 지휘하여 부전에서 동고로 행진했으나, 마음은 아주 울적했다. 왜 삼일 동안 한번도 홍군을 만나지 못할까? 연도의 각 지역은 모두 잔잔한 호수 같이 안정되어 있다. 부대는 계속 전진했다. 사단 직할부대는 모두 1000여명, 특무대대를 지나면 바로 사단지휘부다. 말 4~50필, 큰 가마 3채(사단장, 부사단장, 참모장용). 내 부대는 이렇게 해서 숭산의 준령으로 들어섰다. 순간, 나팔과 꽹과리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나더니, 함성과 함께 총탄이 비오듯 했다. 공비는 어디 있는지 방향도 알 수 없었다. 주위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홍군은 초기 전투에서 4,000명이 넘는 국민당군 병사들을 포로로 붙잡았고, 소총 5,000정과 기관총 50정 그리고 박격포 20문을 노획했다. 또한, 국민당의 통신 부대 하나도 고스란히 홍군에 편제했다. 이들을 격파한 홍군 제1방면군은 19일에는 곽화종의 43사단과 47사단의 잔여 여단을 백사에서 격파하고 22일에 중촌에서 26로군 27사단 81여단을 섬멸시켰다. 대략 2주 동안 대규모 전투가 네 차례 더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후 주사오량의 3개 사단을 쫓아버리고 27일 광창의 5사단을 격퇴하고 5사단장을 사살했다. 이후 30일에는 푸젠성 건녕을 공격해 유화연의 6로군 56사단 소속 3개 단을 전멸시켰다. 이로서 5월 31일까지 5로군 43사단, 26로군, 6로군의 각 부대를 차례로 격파하여 다섯차례나 승리하고 700리에 달하는 거리를 전진했다. 마오쩌둥의 16자 진법의 효능이 입증된 것이었다. 국민혁명군 6개 사단이 치명적 타격을 입었고 공산당의 근거지는 더욱 확대되었다. 마오쩌둥은 고무되어 다시 시를 지어 승리를 찬양했다.

4. 결과

국민당은 3만의 병력과 2만 자루의 소총을 잃고 참패했고 장사 북부로 후퇴했다. 이때 홍군은 통치영역을 3배로 늘렸고 국민당의 무기로 무장할 수 있었다. 1931년 5월 국민정부는 홍군이 11만 7,400명의 병력과 소총 6만정, 기관총 768정, 포 29문, 박격포 34문을 보유한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이들의 무기의 90%는 국민혁명군에게서 노획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2차 초공작전이 공산당에게 아무런 부정적 영향을 주지 못한 것은 아니어서 병사들은 '걸어가며 잠자고 식사했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피로가 극에 쌓여있었고 공산당은 기존 근거지인 영도를 포기하고 9월 하순 루이진으로 근거지를 이전했다.

장제스는 6월에 즉각 난창으로 이동하여 제3차 초공작전을 준비했다.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강서, 복건, 광동을 모두 합쳐선 12만 7천명으로 추정. [2] 중국 공산당은 당시 홍군이 3만명이라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