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제17계획(Plan XVII)은 1913년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 채택된 동원계획이다.동원계획이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의 전쟁계획인 슐리펜 계획과 흔히 비교되는 계획이다.
2. 배경
조제프 조프르는 빅토르 콩스탕 미셸 장군이 예비군 문제로 상임전쟁심의회에서 고립당해 메시미에게 해임된 후 신임 육군참모총장으로 지명되었다. 참모총장이자 전시 총사령관으로서 그의 첫 업무는 현 동원계획인 제16계획을 갱신하는 것이었다. 1908년으로 돌아가 여러 동원계획을 보면 프랑스군의 무게중심이 누가 봐도 벨기에 국경쪽으로 북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북단에 배치되는 부대는 롱위와 메지에르 북부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병력의 숫자엔 변화가 없기에 프랑스군의 종심이 짧아짐을 의미했다. 또한 북해와 아르덴 사이 벨기에 국경을 감시할 어떤 부대도 없었다. 이러한 동원계획을 실시하면 침략에 무방비한 300km 폭의 거대한 회랑이 생겨난다. 이 노출된 회랑이 이전의 모든 계획에서 발견된다. 유일한 예외는 미셸 장군의 1911년 계획 뿐이나, 그의 동원계획을 실행하려면 예비군이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는 상식에 반기를 들고 개혁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가 참모총장직을 잃는 결과로 끝났다.[1]프랑스군 총참모부가 독일군이 벨기에 중부를 통과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이유는 다양하다. 물론 독일군이 병참을 위해 벨기에 최남단 주인 뤽상부르를 침범하리란 생각 정도는 했다.[2] 하지만 독일군이 상브르-뫼즈 선 북쪽으로 전선을 확장하리라고 결론내린 분석가는 거의 없었다. 상브르-뫼즈 선에 있는 나뮈르 요새와 리에주 요새, 벨기에군의 저항, 벨기에를 전면 침공하면 영국이 참전하리란 명백한 사실이 이러한 결론을 뒷받침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군은 독일군에겐 벨기에를 침공함과 동시에 프랑스-독일 국경을 방어하기에 충분한 병력이 없다고 착각했다.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이 모든 추론이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졌다. 다시 전쟁이 터지면 전투가 벨기에와 스위스 사이에서 벌어질 것이며, 전선이 북쪽으로 확장될 수는 있겠으나 북해까지 이어지진 않으리라는 결론이다.
1904년에 복수자라는 정체불명의 정보원이 프랑스 침공 계획을 프랑스군에게 넘겼다. 그의 정보에 따르면 독일군의 진격축선이 뫼즈와 상브르 계곡을 따라 통과하여 리에주, 나뮈르, 모뵈주를 지향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동의 규모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었다. 그래서 소르브 대위는 1907년에 '독일군은 전역 초기에 뫼즈와 안트베르프의 방어를 뜷느라 시간 지연과 상당한 사상자를 초래함으로써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결론내리기도 했다. 독일군이 벨기에를 통해 공격할지에 대한 의견도 분열되었다. 벨기에를 통과할 것이라고 주장한 논쟁자들조차 그러한 기동이 얼마나 대규모로, 즉 얼마나 북쪽으로 신장하여 이루어질 지에 대해선 확신하지 못했다. 벨기에 내부에서도 의견이 다양했다. 뒤카른 대령은 독일군이 뫼즈 강 북쪽으로는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뒤자르당 장군은 뫼즈 강 좌안이 주요 작전에 적합한 유일한 지역이라고 주장했으며, 메스트로 장군은 뫼즈 강 좌안, 즉 브뤼셀을 통과하는 대규모 기동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독일군의 우익이 북쪽으로 얼마나 펼쳐질지에 대해 명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의 직관은 조프르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14년에 프랑스는 러시아와 영국을 삼국 협상을 통해 동맹으로 두었다. 러시아와의 동맹 관계는 1892년에 군사협정을 맺은 이래 양호하게 발전해나갔고, 양쪽의 총참모부가 정기적인 회의를 가졌다. 조프르는 1913년에 러시아군의 기동훈련을 참관한 후 질린스키 및 니콜라이와 논의했다. 러시아측은 독일과 전쟁이 발발하면 러시아군이 동원 2주 후에 작전 실행이 가능하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셋은 그리하면 독일군 전력의 20%를 붙잡아 서부전선에 대한 압력을 줄일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영국 측과의 논의는 일급기밀이었다. 영국 대륙 개입의 성격과 규모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조프르는 1912년 1월 9일에 최고국방협의회에서 동원이 시작되고 약 2주 후 6개 보병사단과 2개 기병사단이 도착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영국원정군의 위치에 대한 협의와 참모부의 연구도 완성되었다. 그러나 실제 협정을 맺은 것은 없었기에 참전은 의회 투표에 달려있었다. 이것은 조프르가 영국군의 개입에 덜 의존해야만 했다는 뜻이다.
조프르는 1912년 2월 21일에 외무부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해 레몽 푸앵카레 대통령, 전쟁장관 밀르랑, 해군장관 들카세, 정치재정관 팔레올로게, 해군참모총장 오베르 앞에서 벨기에 선제공격을 제시했다. 조프르는 긴 연설 도중 이렇게 발언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 야전군이 나뮈르와 리에주 사이 남쪽을 향해 벨기에로 진입해야 가장 유리합니다.
조프르가 영국의 지원이 취소되지 않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덧붙이긴 했으나 그런 방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따라서 푸앵카레가 이런 계획이 영국이 지원을 취소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프랑스군은 벨기에로 우회해 공격할 수 없게 되었고, 병력 집중이 벨기에를 위협하는 인상을 주어서도 안 되게 되었다.
따라서 제17계획이 만들어질 당시 1912년의 상황은 이렇다. 조프르는 벨기에를 공격하고 싶어했으나, 영국이 중립을 지키거나 독일 편으로 참전할 가능성 때문에 포기했으며, 벨기에를 위협해서도 안 되었다.
3. 작성
조프르의 의도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공격 자체는 목적도 목표도 아니었다. 프랑스 참모대학에선 목적 혹은 목표를 탄착점으로 정의내렸다. 달리 말해, 프랑스군에서 목표란 왜 공격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 대답이 독일군의 물리적 섬멸이었을 수도 있고, 베를린 점령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둘 다거나.[3]조프르는 대답이 무엇인지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이것은 결국 제17계획이 완료되면 실행할 작전계획은 뭐냐는 의문이다. 조프르는 어떤 작전계획도 만들지 않았다. 달리 말해 프랑스군에겐 독일군의 슐리펜 계획에 해당하는 작전계획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조프르는 일단 공격해놓고 결과에 따라 결정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조프르는 작전계획이 작전 진행 중 발생한 사태와 도착한 정보에 따라 세워져야 한다며 작전계획을 수립하길 거부했다. 그에 따르면 군이 추후에 어떤 작전계획이라도 실행가능하도록 만드는 초기 배치가 제17계획이었다. 그는 브리에 위원회에서도 이러한 맥락에서 계획이 머릿속에만 있었고 문서화되지는 않았다고 증언했다.
프랑스 정치인들은 물론 전간기 프랑스 역사학자들은 작전계획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조프르의 말을 믿기를 거부했다. 이들은 프랑스군에 작전계획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기록을 찾지 못하자 모든 증거가 기록보관소에서 조직적으로 파기되었다고 판단했다. 이건 말도 안되는 음모론이다. 제17계획 하나만 해도 뱅센에 문서가 17상자나 있고, 다른 문서에서의 언급까지 합치면 셀 수도 없다. 작전계획과 관련된 문서와 언급하는 수많은 문서까지 파기하는 대규모 증거조작이 일어나면 당연히 흔적이 남고, 당시 조프르가 샌드백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증인이 안나타났을 리도 없다. 작전계획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정황증거만 있을 뿐이다. 당대 참모대학, CHEM, 군사언론에서 동원계획이 이루어진 후 실행될 작전계획이 존재해야 하느냐를 주제로 격렬한 논쟁이 있었던 것이다. 조프르는 이렇게 말했다. '요약하자면 나는 전쟁 첫날의 결과가 명백해지면 사태를 이용할 기회주의적 접근법을 취했다.' 그에겐 어떤 지리적인 목표가 없었으며, 일단 공격하고 첫 전투가 발생한 이후 계획을 수립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게 조프르가 밑그림도 없이 머리를 비워두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제17계획이 어떤 작전계획이라도 실행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 작성되었다면, 염두에 둔 바가 있었다는 뜻이며, 그가 증언했듯이 머릿속에 존재했다. 그가 공격방향은 미리 정해두었다는 의미이다. 사실 공격방향이야말로 제17계획에 관한 여러 문서화된 지침의 주제였다. 따라서 전쟁 발발 당시 GQG 장교들은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선 윤곽을 공유하고 있었다. [4] 이에 대한 증거는 갈리에니가 1913년 7월 8일에 조프르에게 보낸 서신이다. 그는 당시 5군 사령관이었는데, 제17계획이 완료된 후 공격작전 계획을 준비해야만 한다는 내용이었다.[5] 이는 상임전쟁심의회 장교들은 프랑스군이 제17계획 이후 공격할 것임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격전을 추구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프랑스군은 이러한 전투를 가용한 최대한의 전력으로, 혹은 조프르가 말했듯이 '집결된 모든 병력으로 공세를 취한다는 결심 외 어떤 선입견도 없이'수행하고자 했다. 선입견이라는 말은 사전 작전계획이라는 의미고, 집결된 모든 병력이라는 말은 예비대 없이라는 의미다. 참고로 이로 인해 국경 전투 당시 프랑스군에겐 예비대가 예비군 사단집단이라는 군단 규모의 예비군 부대 4개밖에 없었다. 사실 조프르한텐 프랑스의 장교와 부사관 부족 때문에 예비군 군단을 편성할 방법이 없었다. 동원령이 내려지면 예비군이 일단 현역 부대 완편에 쓰인 후 거의 예비역으로만 이루어진 예비군 부대를 편성하는데 쓰였는데, 이 부대에서 현역 간부가 핵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전력에 많은 관심을 보내고 있었다. 독일군의 규모를 늘릴 징병법의 통과를 지켜보았고, 수비대 주둔 도시를 전부 파악했고, 부대 조직과 그 구성부대도 대체로 알고 있었다. 중대, 대대, 연대, 사단, 군단 인원이 프랑스군의 것과 비슷하다는 것도 말이다. 상비군, 예비군, 보충군, 향토군, 향토예비군 체계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었다. 조프르는 이에 기반한 계산에서 양쪽이 30개 군단을 배치할 수 있으니 서부전선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두 군대에겐 중대한 구조적 차이가 있었다. 독일 군단 중 10개 이상이 예비군 군단이었다. 프랑스군은 4개 예비군 사단집단 뿐이었다. 이 사단집단은 간부 부족으로 인한 임시방편일 뿐, 현역 부대가 주작전을 치루는 동안 후방에서 결속력을 키우며 나중에나 일선에 투입될 준비를 하고[6], 만일의 사태에 예비대로 투입되는 것이 임무였다. 조프르의 계산은 지휘통제 측면에서 보면 심각한 오산이었다. 게다가 조프르는 제2 서부군사행진계획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고, 슐리펜 계획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총참모부는 독일군의 계획을 파악하기 위해 대규모 분쟁이 발발할 시 동원엄호부대의 척후전과 야전군의 교전을 통한 정보수집 계획을 마련했으나, 꽤나 완벽한 계획이었음에도 프랑스군의 심각한 질적 문제로 인해 실패해버렸다.
총참모부는 질 가능성이 낮아보이는 도박을 벌였으나 국경 전투 중 심각한 오산이 밝혀졌다. 참모들은 독일군이 예비군을 일선에 두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예비군은 낮은 전투력 때문에 일선에서 전투를 치룰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7] 좌파 정치인만이 예비군에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8] 사실 독일군도 오랫동안 프랑스군과 같은 관점을 지녔다. 슐리펜 계획을 만든 알프레트 폰 슐리펜 본인부터가 1909년에 향토군과 향토예비군이 매우 특별한 상황에서만 극히 제한적으로 군사력의 일부로 간주되어야만 한다는 기사를 기고했다. 프랑스군은 이 기사를 번역해서 읽어보았다. 그들이 몰랐던 것은 후임 참모총장인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가 슐리펜의 관점을 공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 몰트케의 혁신적인 사고방식은 프랑스군이 전역 초기에 당한 두번째로 놀라운 기습이었으며[9], 프랑스군이 초기 4주 동안 패배한 이유 중 하나다. [10]
조프르가 오산을 했을 지언정, 독일군 우익의 길이가 뤽상부르에 닿을 정도밖에 안된다는 옛 분석가들의 오산은 하지 않았다. CHEM에서 1912년 2월 13일에서 29일 사이에 열린 도상연습은 2개 프랑스 야전군이 뤽상부르 북쪽에서 서진하여 나뮈르, 디낭, 로슈포르 사이에 도착한 적 주력을 상대하는 내용이었다. 미슐레의 회고에 따르면 CHEM이 1912년에 벨기에 침공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갈리에니가 이에 따라 파리 근처의 야전군을 모뵈주 지역으로 수송하는 훈련을 실행했다. 또한 조프르는 생껑땅과 기스 근처에서 독일군이 뫼즈 강 좌안 혹은 북쪽에서 진격했다는 전제하에 현지도보답사식 전술훈련을 지시했다. 1911년 10월에 총참모부 3부는 최고국방협의회 회의에서 독일군이 작전지대를 상당한 넓이의 벨기에 영토로 확장하길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적어도 조프르가 참모총장이었을 적엔 총참모부의 모두가 뫼즈 강 좌안 기동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러한 기동의 규모는 여전히 아무도 몰랐지만 말이다. 그래서 제17계획이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하더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긴 했으나 리에주, 나뮈르, 모뵈주보다 훨씬 위에 진격축선이 있어도 제대로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진 않았다.[11]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조프르가 작전계획을 만들진 않았으나 개개인의 구상까지 막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드망주 대령은 '북동 야전군 작전계획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문서를 작업했다. 이 문서는 1912년 봄에 드망주가 제17계획이 실행된 후의 전개를 예상하며 개인적으로 작성한 것이다. 같은 주제의 문서가 수없이 많다.
모든 구상을 끝마친 조프르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로 동원계획을 완성했다. 제17계획은 적과의 시작 거리를 줄이는 일, 첫 대규모 전투가 최대한 빠르게 일어나도록 하는 일, 첫 전투에 적용될 배치의 첫 단추로서 병력이 집중되는 일을 계획이 풀어야 할 문제로 두고 작성되었다. 1913년 4월 18일에 전쟁장관 에티엔이 주재한 상임전쟁심의회 회의에서 제17계획이 발표되었다. 조프르는 회의에서 이렇게 질문했다. '심의회는 새로운 계획이 보고서[12]에 나온 정보에 기반해 준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런 질문 없이 만장일치로 그렇다는 대답이 나왔다.[13] 배치는 이러했다. 4개 야전군 (1,2,3 5군)이 스위스부터 벨기에 국경의 이르송까지 분배되었다. 4군은 그 뒤에 배치되어 상황에 따라 3군이나 5군을 지원할 수 있게끔 되었다. 각 군단은 하루 행군거리인 20 - 30km 간격으로 떨어진 2개 선을 따라 배치되었다. 군단이 1번 문제를 고려하여 국경에 최대한 가까이 배치되었다. 계획이 완성된 후 몇달 동안 준비되었다. 모든 제대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해야할지가 매우 상세하게 나와있는 동원일지를 받았다. 열차 하역이 매우 엄격한 일정을 따랐고 특수 플랫폼이 동원되었다. 조프르는 1912년 이후로 철도망이 전보다 유연해졌으므로 동원과 배치 완료 직전까지도 수정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프르가 독일군이 리에주를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제4야전군을 3군과 5군 사이에 삽입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원 과정의 정확성과 유연성은 조프르가 공병으로서 가진 유능함의 증명이었다.
각 사단이 어느 군관구, 어느 지역에 위치하다 어느 철도 노선을 통하여 이동했는지 등 실행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추가하겠다.
이미 말했듯이 제17계획의 의도는 '공격하기'였다. 이는 1914년 2월에 발표된 지침에 분명히 드러나있다.
프랑스 야전군이 실행할 2개 주작전의 형태가 이렇게 전개될 것이다.
하나는 우익 보주 산맥의 숲으로 뒤덮인 단층 지괴와 툴의 하류로 흐르는 모젤 강 사이 지형에서
하나는 좌익 베르됭-메츠 선 북쪽에서
이러한 두가지 작전이 오트 드 뫼즈와 외브르에서 작전을 실시하는 부대에 의해 면밀히 연결된다.
하나는 우익 보주 산맥의 숲으로 뒤덮인 단층 지괴와 툴의 하류로 흐르는 모젤 강 사이 지형에서
하나는 좌익 베르됭-메츠 선 북쪽에서
이러한 두가지 작전이 오트 드 뫼즈와 외브르에서 작전을 실시하는 부대에 의해 면밀히 연결된다.
이에 따라 야전군마다 임무가 설정되었다. 1, 2군은 라인 강과 모젤 강 사이에서 작전을 실시하고, 5군은 베르됭-메츠 선 북쪽에서 실시하고, 한편 4군은 후방에서 대기하다 상황에 따라 북쪽이나 남쪽으로 이동하고, 3군은 5군과 1, 2군을 연결하게 된 것이다. 각 야전군이 목표가 무엇인지는 모른 채(작전계획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무엇을 해야할지 윤곽을 받았다. 야전군이 마을, 숲, 강 등 특징적인 지형에 따라 하나 이상의 방향으로 공격해야만 했다. 명확한 임무는 없었지만, 조프르는 배치가 완료되면 정보수집계획 덕분에 필요한 정보가 모일 것이라 예상하고 걱정하지 않았다.
4. 알자스-로렌 문제
이쯤에서 전쟁사의 미스테리를 이야기해야 한다. 1912년에 조프르가 벨기에 선제공격을 요청하던 중 그래야할 이유를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메츠와 스트라스부르의 요새, 아르덴의 숲, 디외즈 지역의 호수, 알자스-로렌의 험한 지형 때문에 벨기에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프르의 설명을 읽어보면 벨기에 말곤 어디에서도 공격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조프르는 이렇게 결론내렸다.'알자스에서든 로렌에서든 결정적 전투에 적합한 지형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조프르는 도대체 왜 2년도 지나지 않아 불리한 지형이라고 자기 입으로 말했던 장소에 야전군을 보냈을까? 어쩌면 속으론 공격이 쉽다고 생각했으면서 블러핑을 쳤던 걸지도 모른다. 벨기에 공격을 승인 받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알자스-로렌이 공격에 부적합하다고 주장하는 분석가가 프랑스군에 다수 존재했고, 조프르가 그들의 설명을 못들어봤을리가 없기에 별로 납득되지 않는다. 조프르는 알자스-로렌을 왜 공격했는지 해명하지 않고 죽었다. 그러니 앙리 베르틀로의 회고가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14]
조프르는 군사적 이유 뿐만 아니라 정신적 이유로도 병력을 전진시켰다. 그는 끔찍한 1870년 패배의 기억이 우리 군인들을 심하게 짓누르고 있을까봐, 장성진 보다는 병사들이 더 큰 영향을 받고 있을까봐 두려워했다. 이 환상, 즉 독일군의 우월성이라는 미신을 파괴할 필요가 있었다.
이 증언은 배치 도중에 알자스를 공격한 이유도 설명해준다. 생각해보면 조프르가 알자스-로렌에서 지형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 것은 결정적 전투지 전투가 아니다. 베르틀로의 말을 믿자면 조프르는 결정적 전투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기증진을 위해 공격한 것이고, 지형이라는 물질적 요인보다 사기라는 정신적 요인을 중요시한 것이다. 조프르가 의도, 계획, 목적 등을 의미하는 이러한 이유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조프르는 전쟁이 시작된 후 제17계획 실행 중 새롭게 들어오는 정보에 기반하여 작전계획을 만들기 시작했다. 다음 내용을 포함해서 말이다.
전쟁을 국경선을 넘어서 수행한다.
룩셈부르크와 뤽상부르를 통과하는 주공을 제3,4 야전군에 지시하여 뫼즈 강, 나뮈르, 네덜란드 국경 사이를 통과하는 독일 야전군의 병참선을 위협한다.
제1,2 야전군으로 메츠와 보주 사이에서 부차적인 공격을 실행하여 적이 제3,4 야전군의 측방을 공격하지 못하게 방지한다.
마지막으로, W야전군(영국원정군을 의미한다)·벨기에군·제5 야전군이 뫼즈 강과 상브르 강 사이에서 나뮈르·안트베르프·모뵈주의 요새를 이용해, 서진하는 독일군의 측방에 자리잡아 지연시키고 저지한다.
룩셈부르크와 뤽상부르를 통과하는 주공을 제3,4 야전군에 지시하여 뫼즈 강, 나뮈르, 네덜란드 국경 사이를 통과하는 독일 야전군의 병참선을 위협한다.
제1,2 야전군으로 메츠와 보주 사이에서 부차적인 공격을 실행하여 적이 제3,4 야전군의 측방을 공격하지 못하게 방지한다.
마지막으로, W야전군(영국원정군을 의미한다)·벨기에군·제5 야전군이 뫼즈 강과 상브르 강 사이에서 나뮈르·안트베르프·모뵈주의 요새를 이용해, 서진하는 독일군의 측방에 자리잡아 지연시키고 저지한다.
앙리 베르틀로가 말한 군사적 이유는 여기에 담긴 것이다.
제17계획이 완료되자 양측이 대치한 북동전역에 한정하여,[15] 프랑스군은 전부 현역 부대인 21개 군단에 덧붙여 15개 군단 병력에 해당하는 10개 예비군 사단, 몇개 독립사단과 10개 기병사단을 배치했다. 독일군은 제2 서부군사행진계획이 완료되자 36개 군단을 배치했는데, 이 중 13개가 예비군 군단이었다. 독일군의 병력이 더 많았으나 프랑스군이 결정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숫적으로 우세해지기 어려울 정도의 물량 차이는 아니었다. 독일군의 숫적 우세는 여러번 말했듯이 예비역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발생했다.
이후의 전개는 제17계획이 끝난 이후의 일이므로 국경 전투로 이어진다.
5. 장점
제17계획의 장점은 아래와 같다. 국경 전투에서 협상국이 우세했다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수준에 도달할 정도로 훌륭했다.- 동원계획답게 현역부대를 작전계획에 따라서 현지에 집중적으로 배치하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 공격에 중점을 두고 일단 프랑스 영토 밖에서 동맹국을 구원하면서 전투를 진행한다는 착상과 옛 영토 수복에 대한 계획을 발상했다. 수비만 해서는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 기존의 요새와 같이 이미 건설된 방어시설물이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것임을 파악하고 요새를 의지해서 전투를 하려는 생각을 버렸다. 그렇다고 요새를 쓸모없다고 본 것이 아니라 요새의 상황에 맞추어서 적당하게 사용하고 필요없으면 버리는 식의 합리적인 운용을 하려고 했다.
6. 한계점
제17계획이 좋지 못한 평가를 받는 이유가 존재한다. 그리고 아래에서 언급한 것 외에 전장의 정보 습득에 실패하거나 예비군을 제대로 된 전력으로 신용하지 못했다거나 예비대가 극히 부족했거나 하는 문제가 있으나 그건 조프르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의 프랑스군 및 프랑스 제3공화국 전체의 문제점이므로 제17계획의 단점만으로 언급하기는 문제가 있다.- 동원계획만 있고 구체적인 작전계획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제2 서부군사행진계획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임기응변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려고 해도 예상되는 독일군의 침공 및 공세방향에 맞추어서 몇개의 가상 시나리오에 맞춘 기본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일선부대에 배포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전황의 변화에 따라서 임기응변을 수행하려고 해도 제대로 동작하지 못한다.
- 구체적인 작전계획이 없으므로 도상작전연습이나 실제기동연습같은 것을 거의 할 수 없었다. 작전실에서 지도를 보고 구상한 작전이 실제로 어떻게 전개되며 고쳐야 할 점이 있는가 파악하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한데 이런 과정이 전혀 없으니 실전에서 제대로 된 작전계획을 만들어도 그게 제대로 실행될 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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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프르가 포함된 총참모부에서도 평시는 물론이고 유사시에도 구체적인 상황에 맞춘 현실적인 작전계획을 빠르게 만들거나 유사시에 현지 부대에 작전계획을 즉시 대량으로 배포할 절차를 전혀 갖추지 않았다. 조프르의 머리 속에만 있는 대략적인 작전구상이나 총참모부 내부의 의견일치나 총참모부 소속 참모들의 개인적인 작전계획 같은 것은 실제 전장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다.
이 정도 상황이면 말이 좋아서 임기응변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실제로는 직무유기죄에 가까울 수준의 문제점이다. 프랑스 제3공화국같은 당대의 1급 열강국에서 작전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총참모부에서 동원계획만 만들어놓고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전혀 수립하지 않았다는 소리가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들릴 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실제로도 매우 비상식적인 일이었는지 프랑스 정치인들은 물론 전간기 프랑스 역사학자들은 작전계획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조프르의 말을 믿기를 거부했으며 프랑스군에 작전계획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기록을 찾지 못하자 모든 증거가 기록보관소에서 조직적으로 파기되었다고 오해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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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전쟁의 규모가 너무 커져서
나폴레옹 전쟁부터는 군인들만의 전쟁이 아니게 된 시점에서도 프랑스 정부 및 정치인들과의 소통이 전혀 없었다. 실제로도 당시 프랑스의 정치인들은 조프르가 공격할 생각이라는 것 외엔 거의 아무것도 몰랐다.
실제로 그는 사라예보 사건 당시 전쟁장관에게 전략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형편없는 지도 한장만 들고와선 독일군의 우익을 뫼즈 강 중류에서 잘라낸다는 간단한 설명만 하고 가버렸고, 국경 전투 중엔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건지 정부에 알려주고 싶은 정보만 알려줬다.
아무리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치가 혼란하고 프랑스 군부와 정부의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조프르가 쿠데타 위험이 없는 공화파라는 이유로 참모총장이 된 조프르조차 군인만이 전쟁에 전적으로 관여해야 한다는 식의 왕당파 군인들과 같은 견해를 유지하는 것은 이미 시대에 크게 뒤떨어진 생각이었다. 물론 당대의 프랑스 군부의 상식적인 판단이었기에 조프르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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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프 조프르가 스스로
임기응변을 잘못 사용했다. 가장 큰 문제점이다. 스스로 2년전에 공격하기 안좋은 지역이라고 공언까지 한
알자스-로렌을 공격하는 바람에 슐리펜 계획의 회전문 효과를 스스로 일으키면서 국경 전투의 대참사를 불러왔다.
제1차 마른 전투에서 조프르가 반격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졸장 취급을 받을 정도로 오판이 엄청났다. 여기에 더해서 전쟁은 일단 결과가 우선이기 때문에 조프르의 평판이 매우 나빠지면서 조프르가 착상했던 좋은 아이디어들이 프랑스 정부 및 군부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상당한 부분이 그대로 어둠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조프르가 원래 생각하는 것처럼 알자스-로렌에서는 방어에 전념하고 벨기에 방면으로 공격을 개시하려고 적극적인 시도라도 했다면 슐리펜 계획을 막는 것에 실패하더라도 조프르가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당시 프랑스 육군의 한계점을 더 많이 지적당할 것이기에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7. 요새 옹호론
국경 전투에서 기동전이 실패로 끝나고 참호전이 벌어진 후 어째서 제17계획의 의도를 방어에 두지 않았냐는 비판이 나왔다. 이들이 제17계획에 북해부터 스위스까지 600km 길이에 걸치는 참호를 판다는 내용을 넣어야 했다는 우스운 주장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리비에르 요새 체계에 의존해야만 했다고 주장했다.이들의 주장은 큰 문제점이 있으나 프랑스 침공때까지 프랑스 육군의 방어전략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문제점도 많지만 장점도 많았기 때문이다.
문제점을 살펴보면 전간기 프랑스인들은 요새가 공성포에 어떻게 파괴되는지 목격했으면서 여전히 요새를 신뢰했다. 심지어 현대에도 베르됭 전투가 프랑스군이 춘계 공세 전에 국경 전투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보병이 기동전 경험을 쌓을 기회였음을 모르고 요새를 둘러싼 채 근세식 공성전이라도 한 것 마냥 망상하며 중요성을 과장하는 시선이 남아있다. 정치인과 학자를 포함해 전간기 요새 옹호론자들은 어째서 조프르가 영구적 축성물에 기반한 개념을 채택하지 않았는지 의문을 가졌다.
그리고 의문은 곧 정치적이면서 단순하고도 이념적인 생각으로 이어졌다. 공격전을 추구해 승리하여 정치적으로 야심찬 목표를 노리는 게 정당한 일인가? 요새 옹호론자들은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공격이 정당한지 아닌지 문제를 두고 그들은 독일은 공격 말곤 아무 생각도 없는 무조건적인 침략자로, 프랑스는 방어만 해야 하는 희생자로 상정한다. 프랑수아 오스카 드 네그리에 장군 등 많은 프랑스인이 공화국 군대는 공격의 도구가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공화국 군대는 전쟁을 시작하기 위한 공격의 도구라고 수정하는 게 역사적으로 더 정확하다는 건 제쳐두고, 이건 방어를 공화주의 이념과 엮어서 반공화주의자가 많았던 프랑스 군부를 저격하며 공방의 문제를 좌우 정치 문제로 가져가는 발언에 불과하다. 즉 이들에게 방어주의는 프랑스 공화국을 사랑하는 애국자들의 이념이고 공세주의는 공화국을 쿠데타로 전복시키려는 반동주의자들의 이념이었다. 이들은 공화국이 대체 어떤 전쟁 목표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적국이 동맹국을 멸망시키는 꼴을 구경만 하기? 아니면 수도를 내주고 항복하기? 정상적인 공화국은 이런 목표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도 제쳐두고, 그럼 위협을 어떻게 제거하라는 걸까? 방어의 문제점은 전쟁으로 이어진 상황을 바꾸지 못하고 고착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1918년에 전쟁이 끝나기 전, 페르낭 앙주랑이 어떤 공격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꾸짖는 책을 하나 출판했다. 그 책의 이름은 국경의 비밀이다. 놀랍지도 않게 리비에르 요새 체계를 찬양하는 책이다. 책 내용 중 1871년 국경과 공세정신은 아주 흥미롭다. 앙주랑이 이 장에서 펼친 주장을 요약하자면 국가를 방어하는 것이 군대의 유일한 역할이자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이므로 다른 모든 것을 (공격이라던가) 제쳐두어야 한다. 앙주랑의 또다른 주장을 보자면, 1815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패배로 프랑크푸르트 조약 이후 독일이 프랑스를 전략적으로 지배하게 되었으며 공격 배치에 유리한 지형이 사라졌다. 1871년 이후엔 기동전을 국내에서만 수행할 수 있게 되었으나 적을 대기동을 벌이기 위해 자국 영토로 끌어들이는 행위는 매우 위험하다. 그러므로 기동전보다 전례없는 악수이자 전략적 아마추어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앙주랑에 따르면 프랑스는 1815년 이후로 영구적인 군사적 열등함에 놓이게 되었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스스로를 요새로 둘러싸 틀어박히는 것 뿐이었다. 마치 수십년이 지나도 동맹 구도든 기술력이든 정권이든 여론이든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듯이 말이다. 앙주랑은, 이폴리트 랑글루아 장군의 말을 인용하자면, 프랑스가 매 맞은 개처럼 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요새 옹호론자들의 주장에는 장점도 있었다. 그들도 구식 요새가 공성포에 취약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그걸 최신식 요새로 메꾸자는 결론을 곧 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노선이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 전전기에 만들어져서 1차대전에서 공격을 받은 요새의 상당수가 현대전에는 써먹기 곤란하여 곡사포의 포격을 받으면 순식간에 개박살이 나는 구식 요새였으며 벨기에의 신형 요새라고 하는 것들도 철근도 제대로 넣지 않고 두께도 얇은 그냥 콘크리트 상자에 불과하여 독일 제국군이 공격해오자 조금만 전투를 진행해도 요새 내부에 소음이 작렬하고 화기 발사시 나오는 유독가스가 실내를 꽉 채우며 장시간 전투시 필요한 의식주를 해결할 시설도 존재하지 않아서 요새 수비군이 버틸 수 없었기에 쉽게 함락된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벨기에의 리에주 요새는 애초에 4만명이 필요한 요새이지만 개전 당시 2만5천명만이 수비하는 상황에서 병력부족문제만 따져봐도 오래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구식 방식인 도시를 원형으로 둘러싸서 독자적으로 생존하는 방식으로 방어하는 요새 배치 때문에 침공군이 쉽게 요새지대를 서로 분단시켜서 고립시킨 후에 요새 외곽 방어선부터 공성포와 습격대를 사용해서 하나씩 공략하는 방식을 사용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전간기의 기술력 발전을 사용해서 요새를 방어선 형태의 일렬로 만들어놓는 요새 방어선을 설립하고 요새 내부 시설을 확충해서 장시간 전투시에도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고 요새를 서로 연계하도록 구성해놓아서 요새들이 서로 지원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참호, 철조망, 대전차 장애물과 연계해놓고 요새포를 확충하고 요새선 후방에 열차포를 비롯한 거포를 배치하면 공성포의 타격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게 되었고 그런 식으로 마지노선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도 마지노선은 최서단 1개소만 제외하면 함락되지 않았고 낫질 작전으로 우회당한 후에 후방을 공격당해서 항복했다. 1차대전과는 달리 요새선이 정면공격으로 돌파당하지는 않은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요새를 강화하고 요새선을 설치하는 것은 프랑스만의 특별한 특징도 아니었다. 벨기에도 에반-에마엘 요새를 준비했고 기존의 버려진 요새를 다시 수복 및 강화했으며 소련도 스탈린 선과 몰로토프 선을 만들었으며 핀란드도 만네르헤임선을 만들고 그리스도 메탁사스선을 만들었다. 심지어 미국도 필리핀 자치령에 드럼 요새를 비롯한 요새 시설물을 만들어놓았고 영국도 싱가포르와 지브롤터에 강력한 요새를 만들어놓았다. 심지어 나치 독일도 지크프리트 선을 만들 정도였다.
이러한 요새와 요새선들은 공격군에게 구스타프 열차포같은 만들기 힘들고 매우 비싸며 운용이 매우 어려운 특수무기를 제작 및 투입하게 만들고 목표가 된 요새를 공략하는 작전에 맞춘 특수부대와 강력한 화기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함락당했으나 공격군에게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히거나 공략전에 시간을 오래 소모하고 병력을 한 곳에 묶어놓았으며 식량, 탄약, 무기등의 각종 자원을 낭비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드럼 요새나 동물원 대공포탑처럼 직접적인 공격은 막강한 방어력과 강력한 화력으로 계속 버티다가 상부의 명령으로 항복하거나 현지 협상으로 항복하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이렇게 각국이 요새를 강화하고 요새선을 설치한 이유는 총동원령이 선전포고로 즉시 인정되는 상황 때문이었다.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총동원령을 섣불리 내릴 수 없으니 개전 극초반에 요새선과 현역 병력으로 시간을 끄는 사이에 총동원령을 내려서 충분한 병력을 확보할 필요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국경이나 요충지역에 요새선이 없던 폴란드 제2공화국이 연합국의 압박으로 인해 총동원령을 발령했다가 취소하는 사태까지 겹쳐서 폴란드 침공에서 나치 독일군이 전쟁을 개시하자마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밀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요새선을 활용해서 영토를 적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생각도 충분했다. 병력을 몰빵해서 단기전식 국지전을 일으켜서 자국에게 필요한 타국의 영토 일부분을 빼앗은 후 버티기를 해서 해당 영토를 뜯어가겠다는 생각을 가진 국가들이 워낙 많았기에 애초에 그런 시도를 못하게 하거나 구원군이 최전선에 충분하게 배치될 시간까지 버틸 수준의 요새화가 필요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당시의 프랑스군의 답없는 수준의 심각한 상황은 요새 옹호론자들도 1차대전의 경험으로 이미 충분히 알고 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상태가 심각하게 안좋은 프랑스군으로 기동전을 벌이다가 독일군에게 한방에 털리느니 일단 요새선에서 방어전을 하며 독일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힌 후에 상황을 판단하고 전황에 맞추어서 영국과 같은 동맹국과 같이 반격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이렇게 요새 옹호론자의 주장에는 장단점이 존재하므로 요새 옹호론자의 주장에서 장점을 추려내서 공격과 방어를 균형있게 추구했다면 프랑스 침공에서 프랑스 육군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제프 조프르의 1차대전 극초기 실책이 워낙 큰지라 요새 옹호론자들의 주장에 매우 큰 힘이 실리고 말았다.
결국 역사적 흥망성쇠에 순응하고 적과 운명이 무슨 짓을 하든 결단력을 가지고 체념해야 한다는 앙주랑의 주장에 전간기 프랑스인들이 열광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앙주랑의 저서가 전간기 프랑스에서 얼마나 자주 인용되었는지는 셀 수도 없다. 프랑스인들은 기동전을 조롱하는 국경의 비밀을 성서처럼 여기며 논의를 편리하게 진행하기 위해 제17계획이 '공격' 작전계획이라는 정치적 선동을 일으켰고, 영어권에서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방어주의로 이어지는 조프르와 조프르의 제17계획에 대한 공격은 전술과 작전에서 매우 무능했던 총사령관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로 인해 불이 붙은 면이 있다. 여기에는 조프르가 고위 장성에게 꼭 필요한 능력 중 하나인 정치나 사교 측면의 능력이 매우 많이 부족하다는 게 크게 작용했다. 여기에 더해서 사람을 상대할 때 자신이 판단하기에 별로다 싶으면 매우 무뚝뚝하게 대응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태도도 매우 심각했다.[16]
그리고 이들은 조프르가 수많은 요새를 건설하거나 개선한 공병장교이자 퐁텐블로 공병학교의 강사이며 프랑스의 영구적 축성물을 책임지던 공병감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던 모양이다. 조프르는 요새 옹호론자들과 달리 프랑스에 건설된 요새 중 매우 소수만 철근 콘크리트와 개폐식 강철포탑으로 강화되었다는 사실을, 따라서 동원계획을 요새 기반 방어에 의도를 두고 만드는 것이 미친짓임을 알고 있었다. 1910년 5월 2일 상임전쟁심의회 회의에서, 심의회에 들어간지 얼마 안 됐고 참모총장도 아니었기에 발언력이 약했던 조프르가 요새 해체에 관한 주제가 나오자 적극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장기간 실제 방어가 가능한 요새만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롱위, 몽메디, 그리고 특히 랭스, 라옹, 라 페르의 요새처럼 작고 오래된 요새를 유지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총사령관의 관할에 놓아 총사령관이 요새가 유지하기에 적합한지, 아니면 버려야 하는지 결정하고 또한 요새가 야전부대를 지원하는 용도로 이용될 수 있도록 해야만 합니다.
저렇게 허약한 요새를 요새라고 불러도 괜찮은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총사령관이 요새를 어느 수준까지 방어할지 결정하도록 권한을 줘야 하지 않을지, 필요하다면 요새총독에게 요새를 포기하라고 명령할 권한을 줘야 하지 않을지도 의문입니다.
저렇게 허약한 요새를 요새라고 불러도 괜찮은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총사령관이 요새를 어느 수준까지 방어할지 결정하도록 권한을 줘야 하지 않을지, 필요하다면 요새총독에게 요새를 포기하라고 명령할 권한을 줘야 하지 않을지도 의문입니다.
조프르는 자기가 이 때 제안했던 개념을 잊지 않고있다가 1915년에 교리의 요새와 관련된 조항 몇가지를 수정하여 베르됭에 적용했고, 1916년에 베르됭의 위기를 자초하면서도 작년에 도입했던 선진적인 요새 개념으로 만회에 성공했다. 이건 프랑스군이 요새를 필요할 때만 필요한 만큼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 합리적인 접근법이었다. 그래서 조프르가 제17계획을 요새 기반 방어에 의도를 두고 만들지 않은 것이다. 애초에 조프르가 참모총장이 되었을 쯤엔 요새를 강화할 돈도 시간도 없었다. 조프르가 요새에게 기대한 역할은 전쟁이 발발하면 동원엄호부대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또한 조프르는 구식 요새를 방어선에 통합하는 새로운 개념에 따라 유용하게 활용했다. 이 개념은 요새화지대라는 개념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조프르는 참호, 철조망, 기관총의 조합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요새를 무시하지도 않았다. 사실 정반대다. 프랑스군이 러일전쟁을 관찰하고 야전축성에 관한 교리를 제작했기 때문에 참고할 수도 있었다. 조프르는 1913년 4월 18일에 리비에르가 요새화하지 않은 그랑 쿠론네 언덕을 훗날 참호망 건설이 가능하도록 미리 측량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반영구적 축성물이 적에게 저항하기에 충분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조프르는 제17계획의 뼈대 내에서 우선순위를 정했다. 낭시의 우선순위가 가장 높았고, 갈리에니의 요청으로 오트 드 뫼즈가 추가되었다. 벨기에 국경의 몽메디도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대전쟁이 발발할 때까지도 실제 작업이 진행된 건 거의 없었다. 낭시에서의 작업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고 몽메디에서의 작업은 아예 시작되지도 않았다. 20군단은 페르디낭 포슈가 군단장으로 앉고 나서야 무거운 궁둥이를 움직여 삽질을 개시했다.[17] 이건 프랑스군에 자기네 교리가 뭔지도 모르는[18] 사람이 대다수였기 때문이지만, 이 사실은 오랫동안 묻혀버렸다. 왜냐하면 조프르가 국경 전투 중 대숙청을 시작하기 전까지 프랑스 장교단의 상태가 극도로 심각했음을 군부가 알리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19]
그러므로 조제프 조프르가 제17계획에서 임기응변을 잘못 사용해서 알자스-로렌을 공격함으로서 국경 전투를 말아먹지만 않았어도 프랑스 육군이 요새 옹호론자들의 주장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없었을 것이기에 아쉬움이 크다.
8. 예비군과 3년 징병법
제17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예비군을 제대로 써먹도록 강화하고 유사시 대량으로 소집해서 전선에 바로 투입하는 과정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거나 언급을 회피하는 등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치적 혼란과 함께 국민위병이라고 하는 프랑스의 특수한 민병대 겸 준군사조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징병제를 채택한 국가에서는 매년 성인 남성이 대규모로 징병되어 같은 기수로 복무하고, 동시에 현역 복무를 마친 기수가 대량으로 전역한다. 예비역은 현역에서 벗어났으나 국방의 의무를 여전히 지고있는 이들이다. 프랑스군은 징병제를 채택한 국가이므로 상비군 혹은 현역군(armée active)[20]과 예비군으로 구성되었다. 현역은 야전군, 군단, 사단, 여단으로 편성된다. 하지만 예비역은 민간으로 돌아가 자기 직업에 종사하므로 평시에는 현역 간부라는 예비군 부대의 핵을 제외하곤 예비역을 위한 조직적 뼈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이 선포되고 동원령이 실시되면 예비역이 보통 2가지 방법으로 활용된다. 첫번째로 예비역이 현역 부대를 완편하는데 쓰이고, 두번째로는 부대의 핵이 되는 현역 간부와 일부 현역병을 제외하면 예비역만 있는 예비군 부대를 편성하는데 쓰인다.
프랑스에선 옛날부터 현역병이 예비역보다 훨씬 능률적이라고 여겨졌다. 예비역이 체력, 훈련, 결속력 면에서 능률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비군 훈련이 있긴 했으나 생계 때문에 참여율이 낮았다. 동원령이 내려지면 예비군이 지정된 장소에 모여 장비를 받고 예비군 연대로 편성된 후, 예비군 연대가 상위부대로 편성되었다. 이 부대에 충분한 장교와 부사관을 배치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프랑스군이 심각한 인적자원 부족 문제를 겪었기 때문이다. 간부 부족 때문에 독일군과 달리 예비군 군단 편성이 불가능하고 사단까지만 가능했다. 예비군 군단이 등장하는 동원계획은 19세기에 만들어진 계획 하나밖에 없다. 조프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전임자들의 선례를 따라 예비군 사단집단을 두고 후방에서 결속력을 키워주다가 격렬한 전투가 끝나면[21] 전선에 투입할 계획을 세우는 것 뿐이었다.
조프르가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을 적에 프랑스는 2년 징병법을 시행하고 있었다. 2년 징병법은 1905년 3월 21일에 통과되었고, 1889년에 발효된 프레시네 모집법을 대체했다. 2년 징병법은 현역 기간을 2년으로 단축한 후 프레시네법에서 병역면제하는[22] 성인 남성도 징집하여 병력 숫자를 맞췄다. 그리고 이는 평등 이념으로 정당화되었다.
1889년 프랑스군엔 현역군, 예비군 뿐만 아니라 향토군, 향토예비군도 존재했다. 모든 프랑스 성인 남성은 현역으로 3년, 예비역으로 10년, 향토역으로 6년, 향토예비역으로 6년을 복무했다 1905년부터는 병역의 의무 기간이 달라지진 않았으나 현역 기간이 1년 짧아졌고 예비역 기간이 1년 늘어났다. 목적은 예비군이 4주 동안의 기동훈련에 2번 더 참여하게 해서 질을 높이는 것이었다. 총참모부는 계산 결과 특정 계층에 대한 병역면제를 폐지하면 현역 기간이 줄어들고도 같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고, 병력의 전체적인 질이 높아지리라 기대해 새로운 징병법을 환영했다.
하지만 1905년 징병법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2번의 기동훈련 기간이 28일에서 각각 23일, 17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요즘엔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대엔 예비군 훈련 소집이 어려웠다. 농사 때문에 집을 비울 수 없다고 하면 할 말이 없었고, 투표기간과 겹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개인의 편의를 봐주겠다고 예비군 훈련이 지연되거나 취소되기도 했다. 1907년엔 예비군 훈련에 37%나 되는 인원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문제가 있었음에도 병역의 의무 기간이 25년이었으니 25개 기수를 전부 소집한다면 약 5,00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 상당한 병력이지만 군부대는 인력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병사에겐 장비가 필요하고 지휘할 장교도 필요하다. 게다가 병사의 체력은 나이에 달려있는 법인데, 1910년 프랑스 성인 남성의 기대수명은 50살에 불과했다. 프랑스에선 모든 인구를 동원하는 군사적 강대국이라는 개념이 1798년 징병제 군대 덕분에 국민 의식 속에 살아있었다. 1870년 프로이센군에게 포위된 파리를 양과 열정으로 해방하기 위한 파도같은 출격이라는 개념이 20세기에도 살아있었다. 여기까지는 다른 국가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현상으로 프랑스만의 독특한 특성은 아니었으므로 프랑스의 정계에서 예비군 동원체제를 제대로 수립하고 예비군을 양성했으면 수량은 부족하지만 상비군을 보조해줄 예비군을 양성했을 것이다.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계에서 일어난 프랑스 좌파와 프랑스 우파의 대립은 단순한 정치적 대립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사생결단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여기서는 군사적인 면만 다루겠지만 프랑스 우파는 병력의 질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고, 프랑스 좌파는 병력의 양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본질적인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프랑스 좌파는 프랑스 정규군을 적군으로 보았으며 기회만 있으면 해산해버리고 예비군이나 시민군이나 신군이라는 미명 하에 국민위병을 다시 부활시키려고 획책했으며, 프랑스 우파는 예비군을 잠재적인 반란군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았기 때문에 프랑스 정규군을 강화시키는 것에만 중점을 둔 것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국민위병이 프랑스 혁명으로 탄생하여 당시의 프랑스 왕국의 부르봉 왕조 소속의 프랑스 정규군과 충돌하면서 역사가 시작되었고 그 후에도 정치적 사건마다 자체적으로 개입하고 혁명을 일으켰기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 나폴레옹 3세같은 프랑스의 집권자들이 기회만 있으면 국민위병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했던 긴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국민위병의 내부 상황도 부대원들의 선거로 장교가 임명되는 등 프랑스 정규군과 상이한 체제를 유지했기에 사실상 섞일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특히 국민위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파리 코뮌에서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아나키즘등 프랑스의 좌익이 주축이 된 파리 코뮌의 군사력이 국민위병이었으며 파리 코뮌을 제압한 병력이 당시 프랑스 임시정부가 독일 제국에게 요청해서 프랑스군 포로 40만여명을 돌려받아서 구성한 프랑스 정규군이 진압군이었다. 결국 내전이 벌어진 끝에 파리 코뮌은 붕괴되고 국민위병도 1872년 3월 14일에 최종적으로 해산된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 이념이란 종교와도 같은 법인지라 가혹한 탄압에 입을 다물고 숨었지만 기회만 있으면 다시 국민위병을 되살리려는 시도가 계속 이어진 것이 제17계획을 작성할 무렵의 프랑스 정계의 상황이었다.
1905년엔 프랑스 의회에 사회주의자가 거의 없었다. 곧 사회주의자 의원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준의 세력이 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당연히 군에 관심을 보냈고, 1910년에 장 조레스가 '신군'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여기서 조레스가 말했듯이 국방엔 여러 방법이 있다. 프랑스는 1798년에 징병군을 탄생시켰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싸운 군인들은 징병된 이들이었다. 이후 1815년엔 프랑스군이 반전문직업군으로 변했다. 그리고 보불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엔 독일을 모방해 징병군으로 돌아갔다. 1905년 징병법은 1798년, 1899년과 달리 진정 평등주의적인 징병법이었다. 다른 방식을 채택한 나라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스위스가 있는데, 스위스군은 자기 땅을 자기가 수호하는 시민군 개념으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고대 로마군을 롤모델로 여겼다.
프랑스에선 좌파 정치인들이 시민군 개념에 빠져들었다. 이들은 국방의 수단이 필요하긴 하나, 장군들은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보기에 프랑스 장성진은 파리 코뮌을 파괴한 반동주의자들이자 같은 프랑스 국민을 제압하기 위해 독일 제국과 영합했던 잠재적 내란범이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초전에 패배한 무능력자였다. 그리고 쿠데타가 가득한 프랑스 근대 역사는 그들의 생각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음을 증명했다. 여기서 국민위병도 쿠테타나 정변에 자주 가담했다는 것은 애국적이자 자주적인 행동이었다는 아전인수적인 편파적인 해석을 동원해서 가볍게 무시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이 보기에 국방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국민위병을 명칭만 바꾸고 다시 부활시켜서 전쟁을 맡기는 것이었다. 사실 이들은 아예 현역병을 없애버리고 오직 예비군으로만 이루어진 군대를 만들 생각이었다. 예비군은 전통적으로 상비군의 보조였으나 사회주의자들은 예비군을 진정한 국가의 수호자로 여겼다. 실제로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 정규군은 초반에 패배하고 포로로 잡히거나 고립된 요새를 수비하는 처지에 몰려서 일찍 전선의 주력에서 밀려난 반면에 그 후의 저항은 국민위병을 비롯한 민병대가 수행했으니 역사적 근거도 존재했다. 그러므로 장 조레스가 주장한 신군이란 주장도 시민군이자 민병대이며 예비군인 국민위병을 명칭만 바꿔서 부활시키겠다는 소리나 다름이 없었다.
정치적인 의도가 많이 들어간 만큼 장 조레스의 신군은 현실적으로 실행하기에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노출한다. 당장 독일군이 날이 갈수록 거대해지고 있는 상황에선 신군 조직이 매우 위험한 행위임은 자명했다. 프랑스 좌파도 군사적인 분야 외에는 업적이 많으므로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으며 내부적으로도 군사적 통찰력이 있는 사회주의자들은 징병제 폐지 후 신군 조직에 최소 15년이 걸린다고 지적했다.[23] 독일의 위협이 실존하던 당시 상황에서 군대로 검증받지 않은 위험한 실험을 하기에 최적의 시기가 아님도 자명했다. 조레스는 양 국가의 적대관계가 40년 동안 지속되어 왔으니 최적의 시기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므로 지금이라도 해야 한다며 스스로를 변호했다. 너무 극단적인 주장인데, 프랑스 정부의 군사적 관심사는 바티칸 침공밖에 없다는 농담이 있었을 정도로 3공화국의 정치 진영 간 갈등이 치열했다. 국방과 그 도구인 군대는 교육 제도 다음으로 좋은 싸움거리였다. 이런 정치적 분위기에서 사회주의자든 아니든 논의를 차분하고 냉정하게 진행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차분하지도 냉정하지도 않은 조레스의 주장은 무엇인가? 그는 13개 기수의 예비역으로 구성된 군대를 제안했다. 2년마다 기동훈련을 위해 소집하고 말이다. 책에 따르면 10살에서 20살 사이의 모든 남성이 훈련을 준비하기 위한 특수군사교육을 받아야 한다. 특수군사교육 후엔 6개월 동안 군부대 대신 신병학교에서 훈련을 받는다. 시민군이 제복과 장비를 스스로 보관하고, 국경 부근에 거주하는 경우엔 무기도 보관한다. '신군'에선 군 조직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프랑스군을 스위스군처럼 만들었다 치자. 공병, 철도부대, 통신부대 등 기술과 관련된 것은 어떻게 할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는 이 철저히 방어적인 군대가 순수히 이념적인 개념임을 숨기지도 않았다.
여기에 더해서 국민위병이라는 개념이 시대가 흐를수록 실제 전장에서 뒤떨어진다는 것을 다들 모른척하기도 했다. 의욕은 높으나 행정, 보급, 통합지휘가 안되는 국민위병은 이미 프랑스 혁명 시절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나폴레옹 전쟁시기에는 예비병력 수급처가 될 지경이었다. 국민위병의 위대한 투쟁이라고 앞서 언급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도 축차투입과 비효율적 전투로 희생이 많았고 결국 패배를 피할 수 없었으며 최후의 무대인 파리 코뮌을 수비하는 전투에서도 독일 포로 상태에서 방금 풀려나와서 진압군이 된 프랑스 정규군에 비하면 매우 답없는 능력을 보였다. 이래서는 몰려오는 독일 제국군에게 방어적인 전투를 하는 것조차 장담할 수 없었으나 프랑스 좌파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잘 해봐야 일이 닥치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임기응변을 믿거나 말 그대로 흐린 눈을 보여주면서 애써서 무시했다. 이렇게 몇 가지만 열거해도 문제점이 넘친 것이 신군이었으나 몇년 후, 조레스는 3년 징병법에 대항해 이 비실용적인 개념을 법안으로 통과시키려고 했다.
매우 당연한 일이지만 프랑스 우파에서도 프랑스 좌파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픈 국민위병을 간판만 바꿔서 부활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즉시 알아챘다. 그리고 이런 시각은 프랑스 군부와 장군들도 공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일 제국처럼 예비군을 강화하고 유사시에 대량 동원한 후 전선에 바로 투입한다는 식의 발상을 일부러 전혀 하지 않은 것이다. 예비군이 강화되면 곧 프랑스 좌파들이 그걸 구실로 해서 예비군을 국민위병으로 전환하려고 시도할 것이며 위의 신군에서 나오는 억지가 넘치는 주장을 보면 프랑스 좌파들이 그렇게 하고도 남을 위인들이기도 했다.
조프르는 참모총장이 된 후 2년 징병법 개정을 요구했다. 당연히 변덕으로 갑자기 그러지는 않았다. 그와 함께 발표를 준비한 르그랑 지라르드 장군은 조프르가 이 계획을 싫어했으나 다른 수가 없어 받아들였다고 회고했다. 조프르가 공화주의자였음을 떠올려보자. 개정이 제안된 1913년 3월 4일 상임전쟁심의회 회의는 엘리제궁에서 열렸다 각료회의 의장 아리스티드 브리앙도 있었고, 전쟁장관 에티엔도 있었다. 모두가 총참모부 기록보관소에서 가져온 통계 자료 및 장문의 취지서를 받았다. 이래적이게도 푸앵카레 대통령이 직접 회의를 주재했다. 그는 매우 중요한 사안 때문에 심의회를 소집했다는 말로 회의를 시작했다.
먼저 몇가지 질문이 던져졌다. 첫번째 질문은 '독일이 취하고있는 정책에 대항하여 우리의 군사력, 특히 동원엄호부대의 전력을 늘려야하는가?'였다. 독일은 1911년부터 1913년까지만 살펴봐도 현역병의 숫자를 85만명으로 늘려 긴장을 만들어냈다. 독일은 프랑스와 달리 방대한 인력풀 덕분에 굳이 징병법을 바꿀 필요도 없었다. 수많은 청년 인구 덕분에 가용한 모든 인력을 징집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잠재적 병력을 확보하며 재정 여건에 맞게 군의 규모를 조절할 수 있었다. 조프르는 이 사실을 지적해 독일군이 동원령조차 내리지 않고 동원엄호부대를 압도해 동원계획이 실패할 가능성이 있음을 설명한 후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동원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려면 11개 사단이 필요하며, 동원엄호사단 보병중대 당 최소 200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내륙에 위치하는 현역 사단의 경우엔 중대 당 최소 150명이 필요했다. 이러면 동원령이 실시되어 사단이 예비군으로 완편되었을 때 예비역과 현역의 비가 2:3이 된다.
브리앙과 푸앵카레는 의회를 설득하기 힘들 것이라고 한탄했다. 둘은 독일이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 정확히 어떤 조치를 취한 거냐고 질문했다. 조프르는 지휘 스타일만 봐도 알겠지만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청산유수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대답은 폴 포 장군에게 맡겼다.[24] 포는 1815년 틸시 조약을 언급하며 길고 자세한 이야기를 시작했고, 프로이센 군국주의와 군국주의에 기반을 둔 군법에서 나타난 징후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는 이렇게 끝마쳤다.
이를 바탕으로 탄생한 군대는 일류 공격의 도구이며, 언제라도 사용될 준비가 되어있는 도구입니다.
사라예보 사건 당시 독일의 행보를 생각하면 과장된 분석은 아니다.
기병 또한 논의에 올랐다. 2년 징병법으로는 기병을 양성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간 드러났다.[25] 보병과 달리 말을 길들일 시간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기병 복무기간이 보병과 달리 3년이었다. 엘리제 궁전에 모인 이들은 독일군보다 뒤떨어지고있는 분야가 생겼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따라서 2년 징병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조프르의 요구에 모두가 찬성했다.
그 다음 2년 징병법의 대안이 여러가지 논의되었는데, 그 중엔 장 조레스의 신군도 있었다. 사실 신군은 제일 처음 언급되었고, 언급되자마자 헛소리 취급당하며 만장일치로 치워졌다. 아마 처음 말을 꺼낸 사람도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공식 기록상에서 신군도 일단 공식 논의에 올라갔음을 기록해보려고 그랬을 것이다. 예비군 복무기간 연장, 27개월 징병법 등 여러가지 방안이 나왔는데, 결국 3년 징병법이 채택되었다. 프랑스 예비군에 손을 대지 않고 프랑스 상비군만을 강화시키는 방안에 군인도 정치인도 모두가 만족스러워하며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여담으로, 2년 징병법을 유지하되 몇몇 병과만 현역을 3년으로 정하자는 이야기도 나왔으나 조프르가 거절했다. 평등에 어긋난다며 말이다. 조프르가 공화주의자였음을 다시 떠올려보자. 실질적으로도 그렇게 하면 복무기간이 늘어난 병과를 기피하려는 현상만 일어나서 더 안좋아질 것이었다. 식민지인으로 인력을 충당하는 방안도 검토되었는데, 그냥 프랑스군의 예비 병사로 두자는 결론이 나왔다. 대가족 출신 남성을 병역면제 시켜줘야 하는지도 논의되었다. 자원 입대도 주제에 올랐다. 지라르드에 따르면 1901년부터 11년간 자원입대자가 30% 줄어들었고 막장 인생들이나 자원입대 했기에 하나같이 평판이 몹시 나빴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솔직히 제대로 된 자원입대자는 찾아보기가 힘들었습니다.'
모두가 이제 의회와 싸울 차례라는 데 동의했다. 이 문제로 공화파가 분열되어 급진 공화주의자가 사회주의자와 동맹을 맺고 온건 공화주의자를 공격했다. 조프르와 포가 정부 대표로 하원과 상원에서 열린 토론에 참석했다. 몇몇 의원이 신성한 장소에 군인이 나타났다며 분노하고는 헛소리를 퍼부었다. 당시 프랑스 좌파의 민낯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조프르는 몇년 후 파리가 독일군에게 함락될 위기에 처했을 때 만큼이나 신경쓰지 않았다. 포는 쿠데타를 참느라 혼났다. 토론이 1913년 6월 2일에 시작되어 7주 동안 이어졌다.
장 조레스가 3년 징병법에 가장 공격적이었다. 그는 예비군을 찬양한 뒤 정부와 총참모부가 프로이센 군국주의를 모방하고 있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그의 연설에서 알 수 있듯이 3년 복무하는 현역을 만들어내는 징병법은 '반동과 굴욕의 법, 파멸과 패배의 법, 프랑스의 재앙,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자 전세계 인민에 대한 공격, 국방을 위태롭게 만들고 모든 외부의 재난과 내부의 재난에 길을 열어주는 행위'였다. 참으로 그 시대 사람들의 사전에 과소평가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 과격한 어조보다 흥미로운 점도 몇가지 있었다. 조레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3년 징병법이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왜냐하면 독일의 인구가 프랑스보다 훨씬 많고, 출산율은 2배였기 때문이다. 조레스는 현역 기간을 늘리는 대신 더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도 조레스 정도면 양반이었다. 사회당의 젊은 부대변인 쇼탕은 뻔뻔스럽게도 조프르를 반동주의자 장군이라고 비난한 후 3년 징병법이 군대를 수동적이고 멍청하고, 공화주의를 증오하는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무슨 짓이든 할 준비가 된 집단으로 만들 것이라고 소리질렀다. 브리송 의원은 순응하는 군대를 원하는 총참모부와 그 수뇌부의 기습 공격이라고 음모론을 펼쳤다.
의회에서만 난리가 난 게 아니었다. 프랑스 전국에서 3년 징병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다. 약 360명의 저명한 지식인이 개정을 반대하는 청원서에 서명했다. 그래도 결국 하원에선 찬성 358표 대 반대 204표로, 상원에선 찬성 244표 대 반대 36표로 법안이 통과되었다. 대가족 출신의 현역 기간을 줄이는 등 몇가지 수정이 이루어졌으나 조프르가 원하던 그림으로 흘러갔다.
징병법 토론에서 신군을 원하는 사회주의자들의 관점 때문에 예비군이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정작 예비군을 군사적으로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예비군 부대를 일선에 둬야 하는지 아닌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예비군이 현역 부대를 완편하고 예비군 사단을 편성하는데 쓰이리란 사실만 모두가 알고 있었을 뿐이다. 좌파는 예비군을 신성한 삼위일체의 위격 중 하나로 여기고, 우파는 신성모독적인 무신론자들이라는 사실을 서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굳이 이야기를 안 꺼냈을 것이다. 군부에선 정치 성향에 관계없이 미셸을 제외하고 아무도 예비군을 신뢰하지 않았으니 이대로만 가자는 생각에 이야기를 안 꺼냈을 것이다.
3년 징병법은 마른 강의 기적에 비견될 만한 위대한 승리였다. 이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으나, 가장 큰 공은 조프르에게 있다. 그러나 위태로운 승리였다. 1914년 5월에 사회주의자들이 의회를 다수 차지하는데 성공했고, 3년 징병법 폐지를 반대하는 정부를 2번 연속으로 무너뜨렸다. 사라예보 위기가 바로 터지지 않았더라면 확실히 폐지되었을 것이다.
징병법 및 예비군 문제와 관련해 장교와 부사관의 처우를 개선하고자 했던 조프르의 노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2년 징병법은 프랑스 부사관의 양과 질을 망쳐놓았다. 조프르는 이러한 부사관단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의회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프르가 간부 월급을 대폭 인상했다. 인상폭은 계급에 반비례했다. 이러한 부사관, 장교단의 양적, 질적 증가 덕분에 예비군 부대가 기본적인 전투력은 갖출 수 있게 되었다. 1912년 12월 23일엔 현역 부대에 간부를 더 많이 배치하기 위한 법안이 통과되었다. 각 현역 연대가 3명의 영관급 장교와 6명의 대위를 추가로 얻었고, 예비군 중대에 부사관이 2명이 아닌 6명이 배치되었다. 조프르는 예비군 연대가 충분한 간부를 갖추도록 각 예비군 연대의 대대를 3개에서 2개로 줄였다. 상임전쟁심의회는 1913년 4월 13일에 각 현역 군단의 여단 하나를 폐지하고 2개 대대로 구성된 예비군 연대를 각 현역 사단에 추가하기로 했다. 조프르는 예비군을 못믿겠다고 방치하는 대신 조금이라도 개선하는 합리적인 시각을 보인 것이다. 폴 포 또한 상원에서 3년 징병법 토론 중 예비군 사단이 현역 사단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진 못하겠지만 이러한 조치 덕분에 제17계획상에서 더욱 잘 조직되고 훌륭한 지휘를 받게 될 것이라고 연설했다.
1914년 여름, 제17계획이 실행되었을 때 프랑스군은 목적에 맞게 변화해 있었다. 독일군에게 제17계획이 방해받지 않도록 동원엄호사단 중대가 200명으로 표준화되었다. 1914년 8월 1일엔 프랑스군에 80만명이 군복무를 하고 있었다. 3년 징병법 덕분에 20만명이 늘어난 수치다. 8월 2일부터 15일 사이에 동원으로 280만명이 소집되어 총 360만명이 배치되었다.
이제 어떤 징집기수가 어떤 부대를 완편하는데 쓰였는지를 보자. 프랑스에선 현역 연대를 완편하는데 쓰이는 예비군이 가장 젊은 4개 기수였다. 그 중 가장 많은 나이가 27세였다. 예비군 연대에선 각 중대가 20명의 현역과 1903~1906년 기수인 230명의 예비역으로 편성되었다. 가장 많은 나이는 31세엿다. 이보다 나이 많은 기수는 보급창에서 대기했다. 독일에선 현역 중대에 최대 나이 26세인 예비역이 들어가고 예비군 부대엔 30세 이상이 들어가지 않았다. 1살 차이가 많아보이지 않지만, 머릿속에 담아둬야할 디테일이다. 우린 프랑스군에서 징병기간이 1년 길어지자 현역병이 20만명 늘어났음을 보았다. 만약 프랑스의 인구와 인구구조가 독일과 같았다면 40만명이 늘어났을 것이다.
만약 조프르가 3년 징병법을 통과시키는데 실패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제17계획으로 배치된 프랑스군의 규모가 지나치게 작았을 것이고, 안그래도 안좋았던 질은 바닥 밑에 지하가 있음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조프르가 갑자기 직감이 뛰어난 총사령관으로 변해서 슐리펜 계획을 정확히 맞받아쳐봤자 아무 소용 없었을 것이고, 마른 강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비군에 대한 논란은 주로 좌우 정치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앞서 살펴보았듯이 예비군으로 상비군을 대체하며 궁극적으로는 국민위병을 부활시키겠다는 프랑스 좌파의 헛짓거리를 막기 위해서 예비군 강화나 효율적인 운용 및 투입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 부담은 조프르에게 쏟아져 내렸다.
전후 조프르는 국경 전투 중 예비군에게 보조적인 임무만 부여하거나 보급창에 방치했다고 조롱당했다. 조프르는 자기가 전임자들이 만든 22개 사단보다 많은 숫자인 25개의 예비군 사단을 편성했다고 반박했지만, 예비군 연대의 대대 수를 2개로 줄여 전임자들이 만든 396개 대대보다 적은 300개의 예비군 대대만 편성해서 실제 병력이 줄어들지 않았냐고 재반박당했다. 사실 이 논쟁은 전쟁 중 조프르에게 숙청당한 후 복수심을 품었던 르노, 페르상 등 여러 장군이 조프르를 증오하던 좌파 진영에 편승해 의미없이 원수의 머리채를 잡고 늘어진 꼴일 뿐이다. 그 장군들이 51개월간의 경험으로 예비군을 고쳐보게된 게 사실인지도 의심스럽다. 굳이 누군가의 편을 들어보자면, 오늘날엔 조프르의 판단이 맞았다는 의견이 대세다. 조프르는 25개의 가벼운 사단이 22개의 무거운 사단보다 융통성 있으므로 예비군 대대를 줄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질도 개선하고 말이다. 조프르 비판자들 말대로 그가 틀렸을 수도 있지만, 전쟁 내내 모든 참전국이 조프르와 같은 접근법을 취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그랬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비판자들은 인력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무시하거나 잊어버렸다. 작전부대가 오합지졸이 아니기 위해선 훈련된 병사, 훌륭한 장교와 부사관, 장비 모두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의회는 예비군에 돈쓰기를 싫어했고, 프랑스인들은 예비군 훈련을 피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예비군을 위해 실제로 노력한 사람은 예비군 찬송자들이 아니라 조프르였다. 그런 조프르의 조치는 제17계획이 독일군에 맞설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는 능력상으로 후방사령관에 적합한 조제프 조프르가 자신의 부대에 대량으로 지급된 기존의 전투 교리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답 없는 상태인 1914년 시점의 처참한 프랑스 장교단 때문에 전방에서 지휘를 하는 비극이 발생하고 말았다. 전략적이나 전술적으로는 무능하고 임기응변에도 능숙하지 못한 것은 조프르의 한계점이 맞으나 1차대전 개전 당시에 조프르 수준이나 그 이상의 능력을 가진 프랑스 고위 장교가 없다시피 한 것이 당시의 프랑스 제3공화국의 비극이기도 했다.
9. 같이 보기
[1]
미셸이 제시한 현역과 예비역의 혼합 편성 방식을 채택하면 프랑스군이 북해까지 병력을 배치할 수 있게 된다.
[2]
뤽상부르로 진입하려면
룩셈부르크를 통과해야 하는데, 룩셈부르크도 영국에게 독립보장을 받긴 했으나 프랑스, 독일은 물론 영국 본인조차 신경쓰지 않았다.
[3]
1913년에 조프르의 지시로 갱신된 프랑스군의 교리인 Conduite des grandes unités :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 Décret du 2 décembre 1913, portant règlement sur le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 : Service en campagne 중 전자의 4조는 결정적 전투로 적 주력을 물리적으로 섬멸해야 한다는 내용이며, 그 뒤에 영토 일부와 요새 점령은 결정적이지 않다는 문장이 덧붙는다. 독일군을 섬멸하는 게 제일 중요하고 수도쯤 되어야 점령이 거기에 미치는 중요성을 갖는다는 의미다.
[4]
정치인들은 조프르가 공격할 생각이라는 것 외엔 거의 아무것도 몰랐다. 프랑스 군부와 정부의 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며, 쿠데타 위험이 없는 공화파라는 이유로 참모총장이 된 조프르조차 이런 문제에 대해선 왕당파 군인들과 같은 견해였다. 실제로 그는 사라예보 위기 당시 전쟁장관에게 전략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형편없는 지도 한장만 들고와선 독일군의 우익을 뫼즈 강 중류에서 잘라낸다는 간단한 설명만 하고 가버렸고, 국경 전투 중엔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건지 정부에 알려주고 싶은 정보만 알려줬다.
[5]
이것은 프랑스군에 작전계획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또다른 증거다.
[6]
프랑스군은 전투가 가장 격렬할 것이라 예상되는 전쟁 초기엔 예비군 사단이 일선에서 전투를 치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7]
일선이니 이선이니 하는 표현은 당대에 전투의 강도를 나타내는 데 썼던 표현이다.
[8]
그리하여 예비군 문제는 좌우 정치대립 문제로 번졌다.
[9]
첫번째는 당연히 독일군의 거대한 우익이다. 1914년 기동전 중에 중포 부족 문제는 예비군 문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10]
특기할만한 사실로,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자기네와 달리 예비군을 주작전에서 1선에 배치할 것이라는 정보는 얻었었다. 조프르는 이 정보를 무시했을 뿐더러 1914년 8월 25일까지도 독일군이 현역 군단으로만 공격작전을 펼치고 있다고 착각했는데, 왜 그랬는지 죽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예비군의 전투력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했던 것일까? 지휘관으로서의 조프르는 베르됭에서도 이런 종류의 무능함을 보였다. 예비군 부대의 낮은 전투력과 부족한 장비가 슐리펜 계획의 실패 원인으로 꼽히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본말전도다. 독일군은 곧장 일선에 투입된 다수의 예비군 군단 덕분에 통계 숫자와 달리 양적으로 압도적이었고, 전역 초기의 성공 원인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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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조프르가 배치를 더욱 북쪽으로 신장할 순 없었을까? 그가 예비군에 믿음이 없었고, 독일보다 먼저 벨기에에 침입해선 안됐고, 당대 프랑스군의 교리가 기동전이었으므로 절대 없다. 프랑스가 인구가 많아서 600km 길이에 전부 병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면 가능했겠지만 말이다. 조프르가 무리해서 더욱 북쪽으로 배치하면 국경이 무방비로 노출되는데, 벨기에에 바로 들어갈 수도 없으니 결정적 전투를 추구하기가 불가능해진다. 조프르는 남에게 대단한 영감을 줄 생각 없이 가장 적절한 타협점을 찾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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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68p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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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조프르는 몇년 후 제17계획에 대한 비판이 나오자 왜 그 땐 반대 안했냐고 대답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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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베르틀로는 프랑스군의 교리를 제작한 7인 중 한명이다. 나머지는 폴 포, 엘리 두아셀, 프랑수아 앙투안, 샤를 브레캬르, 알루앵, 오귀스트 브로세다. 이들을 조프르가 계급에 상관없이 교리 제작에 적합하다 생각하여 직접 지명했다. 교리 승인은 밀르랑이 했고, 최종 결재는 푸앵카레가 했다. 보면 알겠지만 루이 그랑메종과 페르디낭 포슈는 교리 제작에 (둘의 이론이 7인에게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 참고되었는지와는 별개로)끼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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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사항까지 따지지 않고는 잘못된 비교를 하거나 인상을 가지게 될 수 있다. 프랑스군이나 독일군이나 중대가 250명 가량으로 같았고 편제도 똑같긴 했지만, 사단이 보병사단인지, 기병사단인지, 예비사단인지, 향토사단인지까지 따져보지 않고 단순히 숫자만 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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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프르가 좌파라는 이유로 참모총장이 되었음에도 전간기엔 좌파 진영이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우파보다 격렬한 모습을 보였다. 극좌파는 처음부터 조프르가 충분히 공화주의적이지 않다며(조프르가 문민통제를 싫어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지지하지 않았으니 그렇다 치고, 좌파가 보인 증오의 핵심적인 이유는 사실 대전쟁의 사상자가 아니라 실망과 배신감이었다. 그들은 조프르가 피슈 사건을 일으켰던 제2의 앙드레 장군이 되길 원했지만, 그들이 실제로 경험한 건 제2의 카스텔노였다. 특히 민간에서는 조프르가 특정 정당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을 고까워했고, 조프르가 친한 친구 몇명을 제외하고 모든 정치인들에게 거리를 두자 가식적인 얼간이라고 경멸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동요하지 않기로 유명한 조프르는 그들에게 반응도 안해주며 살다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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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텔노는 포슈가 그랑 쿠론네에 작업해놓은 참호 덕분에 낭시를 지켜낼 수 있었다. 물론 포슈와 사이 나쁜 카스텔노는 자기가 낭시를 버릴 생각도 했음을 부정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하며 이 사실을 숨겼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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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선
엘랑 비탈이라는 존재한 적 없는 교리의 자기들이 상상한 내용을 토대로 프랑스군이 교리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데, 프랑스군의 교리에 딱히 칭찬할 점이 있는 건 아니고 좋은 점이 없는 교리가 사상자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기는 무리지만 2000년대 기준으로 봐도 이상한 내용이 들어가있는 것 또한 아니다. 굳이 나쁜 점을 따지자면 1장 일반론에서의 절제없는 표현을 고를 수 있겠으나 당대 사람들은 다들 말을 그런 식으로 했다. 프랑스군의 진짜 문제는 대다수의 장교가 교리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국경 전투만 봐도 프랑스 지휘관들이 교리에서 꽤나 중요하게 다루는 아방가르드를 편성해 제대로 운용하기만 했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참사가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 국경 전투의 전술적 재앙은 공세주의의 결과가 아니라 공세주의 관념과 교리를 모르기에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몰라 발생한 소심하고 느려터진 비공세주의적 실천이 위험하게 결합한 결과였다. 흥미롭게도 포슈는 에콜 드 게르에서 펼친 강의 첫날에 공부를 게을리한 지휘관은 나약하고 소심하고 우유부단해지며, 정력과 투지는 공허해진다고 설명했다. 포슈가 강의에서 여러 차례 강조한 말이 '무엇을 해야하는가?'이다.
리모자주를 당한 수많은 장교들은 이 질문에 답할 능력이 없었다. 사실 이런 오해가 발생할만도 한 것이, 프랑스 장교들이 책임 회피를 위해 교리가 원인이었다는 식의 논리를 펼쳤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교리 제작자인 브로세만 해도 자기가 제작 위원회에 속했다는 사실을 슬쩍 감추고 제3자처럼 굴며 일반적 사고방식을 교리의 기술적 내용과 교묘하게 뒤섞고 단순화를 통해 왜곡하며 헛소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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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프르가 전술적으로 무능했음에 대체로 이견은 없지만 1914년 프랑스 장교단 평균보다는 높았다. 조프르는 국경 전투 초기 엉망진창 전투를 여럿 보고받고는 이러한 내용이 들어간 지령을 각 야전군에 회람시켰다. '승리의 주원인인 기세를 파괴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포병지원을, 특히 축성진지를 공격할 때 기다려야만 한다. 부대가 개활지에서 돌격하여 적의 사격에 노출되서는 안 된다. 장군이 한순간이라도 행동의 통제를 잃어서는 안 된다. 보병이 적을 정면공격해서는 안 된다. 대신 강점에 시간을 쏟아 가능할 때마다 우회기동 해야만 한다. 활동이 시작되는 즉시 포병이 운용되어야만 한다. 용기와 기세만으로는 승리를 거두기에 충분치 않다. 인내심을 배워야 하며, 부대가 행군 중 혹은 전투 중에 너무 일찍 전투력을 소진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조프르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공격을 더 조심스럽게 준비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참모총장이 이걸 알려줘야 했다는 건 아주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저 문장 하나하나가 프랑스군의 교리에 나와있는 내용에 불과하고, 전투의 기본인 수준을 넘어 철자에 불과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건 실전을 통해 얻은 지혜도 뭣도 아니다. 그냥 프랑스 지휘관들이 교리를 한번이라도 읽어봤으면 누가 가르쳐 줄 필요도 없었던 내용이다. 장성급이든 영관급이든 위관급이든 이런 무능에 해당하지 않는 계급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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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조레스의 경멸적인 표현에 따르면 병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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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과는 달리 격렬한 전투가 끝없이 이어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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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성직자. 공화주의자들은 1905년 징병법으로 카톨릭 반동주의자놈들을 군대에 집어넣을 수 있게 되었다며 아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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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나오는 아리스티드 브리앙부터가 사회주의자 출신 총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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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포는 조프르보다 먼저 참모총장을 제안받은 사람이다. 하지만 인사권을 내놓으라는 한마디로 자기가 공화주의자가 아님을 상기시켜 제안이 철회되었다. 정신이 번쩍 든 메시미는 당장 공화주의자 조프르에게 달려가 참모총작직을 제안했다. 사실 조프르의 스승이자 공화주의자인 갈리에니에게 먼저 제안이 가긴 했다. 그러나 미셸을 해임하라고 건의한 사람이 갈리에니라서 그가 참모총장이 되면 그림이 이상해지는 데다가, 곧 은퇴할 나이라 본인이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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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서부전선의 삼국 중 프랑스 기병이 최악이었다. 프랑스 기병의 질적 수준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1914년 6월 지휘소 연습에서 프랑셰 데스페레 장군이 1군단 직할 기병대의 한 대령에게 전술적 문제를 설명한 후 해결방법을 질문했다. 그 대령은 돌격이라고 대답했다. 데스페레가 깜짝 놀라 기관총으론 뭘 할거냐고 묻자 기관총도 가지고 돌격한다고 대답했다. 프랑스 기병 교리의 기관총 파트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정상인의 대답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