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제17계획(Plan XVII)은 1913년 프랑스 제3공화국에서 채택된 동원계획이다.조제프 조프르는 빅토르 콩스탕 미셸 장군이 예비군 문제로 상임전쟁심의회에서 고립당해 물러난 후 신임 육군참모총장으로 지명되었다. 참모총장이자 전시 총사령관으로서 그의 첫 업무는 현 동원계획인 제16 계획을 갱신하는 것이었다. 1908년으로 돌아가 여러 동원계획을 보면 프랑스군의 무게중심이 누가 봐도 벨기에 국경쪽으로 북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북단에 배치되는 부대는 롱위와 메지에르 북부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병력의 숫자엔 변화가 없기에 프랑스군의 종심이 짧아짐을 의미했다. 또한 북해와 아르덴 사이 벨기에 국경을 감시할 어떤 부대도 없었다. 이러한 동원계획을 실시하면 침략에 무방비한 300km 폭의 거대한 회랑이 생겨난다. 이 노출된 회랑이 이전의 모든 계획에서 발견된다. 유일한 예외는 미셸 장군의 1911년 계획 뿐이나, 그의 동원계획을 실행하려면 예비군이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는 상식에 반기를 들고 개혁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가 참모총장직을 잃는 결과로 끝났다.[1]
프랑스군 총참모부가 독일군이 벨기에 중부를 통과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이유는 다양하다. 물론 독일군이 병참을 위해 벨기에 최남단 주인 뤽상부르를 침범하리란 생각 정도는 했다.[2] 하지만 독일군이 상브르-뫼즈 선 북쪽으로 전선을 확장하리라고 결론내린 분석가는 거의 없었다. 상브르-뫼즈 선에 있는 나뮈르 요새와 리에주 요새, 벨기에군의 저항, 벨기에를 전면 침공하면 영국이 참전하리란 명백한 사실이 이러한 결론을 뒷받침했다. 무엇보다도 프랑스군은 독일군에겐 벨기에를 침공함과 동시에 프랑스-독일 국경을 방어하기에 충분한 병력이 없다고 착각했다. 이게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이 모든 추론이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졌다. 다시 전쟁이 터지면 전투가 벨기에와 스위스 사이에서 벌어질 것이며, 전선이 북쪽으로 확장될 수는 있겠으나 북해까지 이어지진 않으리라는 결론이다.
1904년에 복수자라는 정체불명의 정보원이 프랑스 침공 계획을 프랑스군에게 넘겼다. 그의 정보에 따르면 독일군의 진격축선이 뫼즈와 상브르 계곡을 따라 통과하여 리에주, 나뮈르, 모뵈주를 지향하는 듯 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동의 규모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었다. 그래서 소르브 대위는 1907년에 '독일군은 전역 초기에 뫼즈와 안트베르프의 방어를 뜷느라 시간 지연과 상당한 사상자를 초래함으로써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결론내리기도 했다. 독일군이 벨기에를 통해 공격할지에 대한 의견도 분열되었다. 벨기에를 통과할 것이라고 주장한 논쟁자들조차 그러한 기동이 얼마나 대규모로, 즉 얼마나 북쪽으로 신장하여 이루어질 지에 대해선 확신하지 못했다. 벨기에 내부에서도 의견이 다양했다. 뒤카른 대령은 독일군이 뫼즈 강 북쪽으로는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뒤자르당 장군은 뫼즈 강 좌안이 주요 작전에 적합한 유일한 지역이라고 주장했으며, 메스트로 장군은 뫼즈 강 좌안, 즉 브뤼셀을 통과하는 대규모 기동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독일군의 우익이 북쪽으로 얼마나 펼쳐질지에 대해 명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의 직관은 조프르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14년에 프랑스는 러시아와 영국을 동맹으로 두었다. 러시아와의 동맹 관계는 1892년에 군사협정을 맺은 이래 양호하게 발전해나갔고, 양쪽의 총참모부가 정기적인 회의를 가졌다. 조프르는 1913년에 러시아군의 기동훈련을 참관한 후 질린스키 및 니콜라이와 논의했다. 러시아측은 독일과 전쟁이 발발하면 러시아군이 동원 2주 후에 작전 실행이 가능하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셋은 그리하면 독일군 전력의 1/5를 붙잡아 서부전선에 대한 압력을 줄일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영국 측과의 논의는 일급기밀이었다. 영국 대륙 개입의 성격과 규모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조프르는 1912년 1월 9일에 최고국방협의회에서 동원이 시작되고 약 2주 후 6개 보병사단과 2개 기병사단이 도착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영국원정군의 위치에 대한 협의와 참모부의 연구도 완성되었다. 그러나 실제 협정을 맺은 것은 없었기에 참전은 의회 투표에 달려있었다. 이것은 조프르가 영국군의 개입에 덜 의존해야만 했다는 뜻이다.
조프르는 1912년 2월 21일에 외무부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해 푸앵카레 대통령, 전쟁장관 밀르랑, 해군장관 들카세, 정치재정관 팔레올로게, 해군참모총장 오베르 앞에서 벨기에 선제공격을 제시했다. 조프르는 긴 연설 도중 이렇게 발언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 야전군이 나뮈르와 리에주 사이 남쪽을 향해 벨기에로 진입해야 가장 유리합니다.
조프르가 영국의 지원이 취소되지 않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덧붙이긴 했으나 그런 방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따라서 푸앵카레가 이런 계획이 잉글랜드가 지원을 취소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따라서 프랑스군은 벨기에로 우회해 공격할 수 없게 되었고, 병력 집중이 벨기에를 위협하는 인상을 주어서도 안 되게 되었다. 그러니 제17계획이 만들어질 당시 1912년의 상황은 이렇다. 조프르는 벨기에를 공격하고 싶어했으나, 영국이 중립을 지키거나 독일 편으로 참전할 가능성 때문에 포기했으며, 벨기에를 위협해서도 안 되었다.
조프르의 의도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공격 자체는 목적도 목표도 아니었다. 프랑스 참모대학에선 목적 혹은 목표를 탄착점으로 정의내렸다. 달리 말해, 프랑스군에서 목표란 왜 공격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 대답이 독일군의 물리적 섬멸이었을 수도 있고, 베를린 점령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둘 다거나.[3] 조프르는 대답이 무엇인지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이것은 결국 제17계획이 완료되면 실행할 작전계획은 뭐냐는 의문이다. 조프르는 어떤 작전계획도 만들지 않았다. 달리 말해 프랑스군에겐 독일군의 슐리펜 계획에 해당하는 무언가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조프르는 일단 공격해놓고 결과에 따라 결정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조프르는 작전계획이 작전 진행 중 발생한 사태와 도착한 정보에 따라 세워져야 한다며 작전계획을 수립하길 거부했다. 그에 따르면 군이 추후에 어떤 작전계획이라도 실행가능하도록 만드는 초기 배치가 제17계획이었다. 그는 브리에 위원회에서도 이러한 맥락에서 계획이 머릿속에만 있었고 문서화되지는 않았다고 증언했다. 프랑스 정치인들은 물론 전간기 프랑스 역사학자들은 작전계획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조프르의 말을 믿기를 거부했다. 이들은 프랑스군에 작전계획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기록을 찾지 못하자 모든 증거가 기록보관소에서 조직적으로 파기되었다고 판단했다. 이건 말도 안되는 음모론이다. 제17계획 하나만 해도 뱅센에 문서가 17상자나 있고, 다른 문서에서의 언급까지 합치면 셀 수도 없다. 작전계획과 관련된 문서와 언급하는 수많은 문서까지 파기하는 대규모 증거조작이 일어나면 당연히 흔적이 남고, 당시 조프르가 샌드백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증인이 안나타났을 리도 없다. 작전계획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정황증거만 있을 뿐이다. 당대 참모대학, CHEM, 군사언론에서 동원계획이 이루어진 후 실행될 작전계획이 존재해야 하느냐를 주제로 격렬한 논쟁이 있었던 것이다. 조프르는 이렇게 말했다. '요약하자면 나는 전쟁 첫날의 결과가 명백해지면 사태를 이용할 기회주의적 접근법을 취했다.' 그에겐 어떤 지리적인 목표가 없었으며, 일단 공격하고 첫 전투가 발생한 이후 계획을 수립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게 조프르가 밑그림도 없이 머리를 비워두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제17계획이 어떤 작전계획이라도 실행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해 작성되었다면, 염두에 둔 바가 있었다는 뜻이며, 그가 증언했듯이 머릿속에 존재했다. 그가 공격방향은 미리 정해두었다는 의미이다. 사실 공격방향이야말로 제17계획에 관한 여러 문서화된 지침의 주제였다. 따라서 전쟁 발발 당시 GQG 장교들은 무엇을 해야할지에 대해선 윤곽을 공유하고 있었다. [4] 이에 대한 증거는 갈리에니가 1913년 7월 8일에 조프르에게 보낸 편지다. 그는 당시 5군 사령관이었는데, 제17계획이 완료된 후 공격작전 계획을 준비해야만 한다는 내용이었다.[5] 이는 상임전쟁심의회 장교들은 프랑스군이 제17 계획 이후 공격할 것임을,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격전을 추구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프랑스군은 이러한 전투를 가용한 최대한의 전력으로, 혹은 조프르가 말했듯이 '집결된 모든 병력으로 공세를 취한다는 결심 외 어떤 선입견도 없이'수행하고자 했다. 선입견이라는 말은 사전 작전계획이라는 의미고, 집결된 모든 병력이라는 말은 예비대 없이라는 의미다.[6]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전력에 많은 관심을 보내고 있었다. 독일군의 규모를 늘릴 징병법의 통과를 지켜보았고, 수비대 주둔 도시를 전부 파악했고, 부대 조직과 그 구성부대도 대체로 알고 있었다. 중대, 대대, 연대, 사단, 군단 인원이 프랑스군의 것과 비슷하다는 것도 말이다. 상비군, 예비군, 보충군, 향토군, 향토예비군 체계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었다. 조프르는 이에 기반한 계산에서 양쪽이 30개 군단을 배치할 수 있으니 서부전선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그러나 두 군대에겐 중대한 구조적 차이가 있었다. 독일 군단 중 10개 이상이 예비군단이었다. 프랑스군은 위에서 말했듯이 사단집단 하나 뿐이었다. 조프르의 계산은 지휘통제 측면에서 보면 심각한 오산이었다. 게다가 조프르는 제2 서부군사행진계획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고, 슐리펜 계획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이 때문에 총참모부는 미래에 대규모 분쟁이 발발할 시 동원엄호부대의 척후전과 야전군의 교전을 통한 정보수집 계획을 마련했으나, 꽤나 완벽한 계획이었음에도 프랑스군의 심각한 질적 문제로 인해 실패해버렸다.
총참모부는 질 가능성이 낮아보이는 도박을 벌였으나 국경 전투 중 심각한 오산이 밝혀졌다. 참모들은 독일군이 예비군을 일선에 두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군에서나 의회에서나 예비군은 낮은 전투력 때문에 일선에서 전투를 치룰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좌파 정치인만이 예비군에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7] 사실 독일군도 오랫동안 프랑스군과 같은 관점을 지녔다. 슐리펜 계획을 만든 알프레트 폰 슐리펜 본인부터가 1909년에 향토군과 향토예비군이 매우 특별한 상황에서만 극히 제한적으로 군사력의 일부로 간주되어야만 한다는 기사를 기고했다. 프랑스군은 이 기사를 번역해서 읽어보았다. 그들이 몰랐던 것은 후임 참모총장인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가 슐리펜의 관점을 공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군이 전역 초기에 당한 두번째로 놀라운 기습이었으며[8], 프랑스군이 초기 4주 동안 패배한 이유 중 하나다. [9]
조프르가 오산을 했을 지언정, 독일군 우익의 길이가 뤽상부르에 닿을 정도밖에 안된다는 보수적인 분석가들의 오산은 하지 않았다.
2. 같이 보기
[1]
미셸은 현역과 예비역의 혼합 편성을 제시했다. 그리하면 프랑스군이 북해까지 병력을 배치할 수 있게 된다.
[2]
뤽상부르로 진입하려면 룩셈부르크를 통과해야 하는데, 룩셈부르크도 영국에게 독립보장을 받긴 했으나 프랑스, 독일은 물론 영국 본인조차 신경쓰지 않았다.
[3]
1913년에 조프르의 지시로 갱신된 프랑스군의 교리인 Conduite des grandes unités :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 Décret du 2 décembre 1913, portant règlement sur le service des armées en campagne : Service en campagne 중 전자의 4조는 결정적 전투로 적 주력을 물리적으로 섬멸해야 한다는 내용이며, 그 뒤에 영토 일부와 요새 점령은 결정적이지 않다는 문장이 덧붙는다. 독일군을 섬멸하는 게 제일 중요하고 수도쯤 되어야 점령이 거기에 미치는 중요성을 갖는다는 의미다.
[4]
정치인들은 조프르가 공격할 생각이라는 것 외엔 거의 아무것도 몰랐다. 프랑스 군부와 정부의 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며, 쿠데타 위험이 없는 공화파라는 이유로 참모총장이 된 조프르조차 이런 문제에 대해선 여타 군인들과 같은 견해였다. 실제로 그는 사라예보 위기 당시 전쟁장관에게 전략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형편없는 지도 한장만 들고와선 독일군의 우익을 뫼즈 강 중류에서 잘라낸다는 간단한 설명만 하고 가버렸고, 국경 전투 중엔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건지 전쟁부에 자기가 알려주고 싶은 정보만 알려줬다.
[5]
이것은 프랑스군에 작전계획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또다른 정황증거다.
[6]
그래서 국경 전투 당시 프랑스군에겐 예비대가 사단집단이라는 군단 규모의 부대 하나밖에 없었다.
[7]
그리하여 예비군 문제는 좌우 정치대립 문제로 번졌다.
[8]
첫번째는 당연히 독일군의 거대한 우익이다. 1914년 기동전 중에 중포 부족 문제는 예비군 문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9]
특기할만한 사실로,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자기네와 달리 예비군단을 주작전에서 1선에 배치할 것이라는 정보는 얻었었다. 조프르는 이 정보를 무시했을 뿐더러 1914년 8월 중반까지도 독일군이 현역 군단으로만 공격작전을 펼치고 있다고 착각했는데, 왜 그랬는지 죽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예비군의 전투력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했던 것일까? 예비군의 낮은 전투력과 부족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통계 숫자로 보이는 것보다 양적으로 압도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