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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1:25:10

만네르헤임선

만네르헤임 선
Mannerheim-linja
Mannerheimlinjen

Mannerheim line
지도
파일:Mannerheim line.jpg

1. 개요2. 배경3. 역사
3.1. 1918년의 계획3.2. 1919년부터 1924년의 소형 벙커3.3. 1932년부터 1937년의 대형 벙커3.4. 1938년에서 1939년의 강화와 미완성
4. 구조5. 소련의 정보 수집6. 실전
6.1. 겨울전쟁
7. 말로8.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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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핀란드가 소련의 침공 방어를 목적으로 카리알라 지역에 건설한 방어선이다.

겨울전쟁당시 핀란드의 주요 방어선이었으며 명칭은 핀란드의 장군인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에게서 따온 것이다. 본래 만네르헤임선은 정식 명칭은 아니었는데 겨울전쟁 당시 요르마 갈렌-칼렐라(Jorma Gallen-Kallela)가 만들어서 외국 기자들에게 퍼뜨린 것이 정착된 것이다.

2. 배경

핀란드 대공국이라는 허울 좋은 명칭을 가진 괴뢰국으로 러시아 제국의 가혹한 지배에 시달리던 핀란드는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소련이 성립한 1917년에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러시아 내전의 혼란이 끝나면 소련이 다시 핀란드를 침공할 것은 명확한 일이었고 실제로도 핀란드 내전에서 독일 제국이 지원하는 백위군과 소련이 지원하는 적위군이 심각한 수준의 내전을 벌이는 바람에 상당한 인명손실이 있었다.

그리고 핀란드 내전이 백위군의 승리로 끝난 후에도 핀란드의 핵심 지역인 카리알라 지협은 국경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너무 가깝게 붙어있기 때문에 소련이 할양을 요구할 가능성도 높았고 카리알라 지협은 핀란드의 다른 국경지대와 달리 교통망이 잘 갖추어져 있고 자연적인 장애물도 별로 없어서 방어가 힘든 지역이었기에 강력한 요새식 방어선을 만들 필요성이 높았다.

3. 역사

핀란드가 독립하면서부터 겨울전쟁이 발발하기까지 수 십년동안 계획부터 건설까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의외로 역사가 길다.

3.1. 1918년의 계획

독일 제국의 보호국인 핀란드 왕국 시절인 1918년부터 카리알라 지협 일대에 방어선을 만든다는 초기 계획이 등장하였고 해당 계획의 첫번째 시안은 1918년 5월 초에 스웨덴에서 의용병으로 들어온 A. 라페 (A. Rappe) 중령에게 만네르헤임이 계획작성을 지시하면서 만들어졌다.

첫 계획에서 제시된 방어선은 핀란드 국경에서 가깝게 설치되는 방식이었고 방어선을 통과하는 2개의 철도 노선을 소련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도록 설계되었다. 하지만 만네르하임이 1918년 5월 말에 사임하자 해당 계획은 일단 폐기되었다.

하지만 계획이 사라졌다고 해서 국경 방위의 필요성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카리알라 지협은 반드시 방어할 필요가 있어서 1918년 6월부터 해당 지역의 방위를 담당하는 핀란드 제2사단과 지역 백위대는 자체적으로 참호선을 건설하고 미약한 수준이었지만 요새시설도 설치하였다. 하지만 콘크리트도 사용하지 못한 강화된 참호선 수준이라서 방어력은 미약했다.

한편 독일 제국군은 오토 폰 브란덴슈타인(Otto von Brandenstein) 대령에게 카리알라 지협의 적절한 방어지역을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오토 폰 브란덴슈타인 대령이 1918년 7월 16일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경선에 가까운 지역보다는 쿠올레마얘르비(Kuolemajärvi) 호수, 무올라 (Muolaa) 호수, 수반토(Suvanto) 호수 및 타이팔렌요키(Taipaleenjoki) 강 같은 자연적인 장애물이 지협 지대를 촘촘하게 나누면서 각각의 통행로를 좁게 만드는 선을 따라서 방어선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이 때 방어선도 최대한 자연지형을 이용하며 그러한 자연장애물이 없는 서쪽을 강화한다는 기본방침이 정해졌다.

해당 계획은 1918년 8월에 핀란드의 최고위 지도부에 의해 승인되었고 1918년 10월에는 300,000마르크의 예산을 조달하여 독일과 핀란드 공병이 기술자로 활약하고 러시아군 포로로 노동력을 충당하는 방식으로 방어선 건설에 돌입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예산이 부족하고 요새 건축용 자재가 모자라며 건설 전문가와 숙련된 작업자까지 모자라서 실제 방어선 건설에는 어려움이 많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배하면서 방어선 건설 계획은 사라지고 건설공사도 중지되었다.

3.2. 1919년부터 1924년의 소형 벙커

1918년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으나 카리알라 지협에 방어선을 건설하는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1919년 10월에 핀란드 참모총장을 역임중인 오스카르 엥켈(Oscar Enckell) 소장은 1918년에 독일 제국이 수립한 방어선 계획의 대부분을 그대로 수용해서 요새 방어선 건설을 재개하였다. 그리고 실무진으로 프랑스 군사위원회 위원인 J. 그로스-코이시 (J. Gros-Coissy) 소령을 위촉하여 핀란드의 요한 파브리티우스 (Johan Fabritius) 중령과 함께 요새를 설계하게 하였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많은 갈등이 있었다. 먼저 요한 파브리티우스 중령은 방어선의 위치를 남동쪽으로 더 이동시킬 것을 제안했다. 이렇게 할 경우에는 방어선의 길이가 짧아지고 핀란드의 영토도 더 많이 방어선 안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후대의 VT-line이 겪은 문제처럼 자연적인 방어물을 거의 이용하지 못하며 평야지대에 방어선을 건설해야 하므로 아주 강력한 요새선을 만들어야 하기에 결국 논의 끝에 원안대로 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더해서 후대의 VT-line과 비슷한 수준으로 국경선 근접한 방어선을 만들고 병력을 집중시켜서 유사시에 크론시타트를 봉쇄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위협하는 과격한 안건도 등장했다. 여기에 대해서 오스카르 엥켈 소장은 평시에 유지가능한 핀란드군의 33%를 집중시키는 무리수를 써서 다른 국경의 방어력을 제로에 가깝게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감수하더라도 카리알라 지협 방어선 유지는 곤란하며 핀란드군이 각개격파나 당할 것이라고 반론했다. 애초에 배이내뫼이넨급 해방함도 계획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소련 해군의 발트함대 모항인 크론시타트를 어떻게 봉쇄할 것인지도 전혀 대책이 없던 과격한 안건이었다.

그 외에도 요새 건설 예산의 부족으로 실무진들 사이에 의견충돌이 잦았고 화포를 사용해서 넓은 범위에서 엄호 사격을 하려는 오스카르 엥켈 소장의 계획이 예산 부족등의 이유로 인해 핀란드 최고위층들이 소규모 벙커에서 십자포화를 날리는 기관총이 더 낫다고 판단하는 바람에 결국 1924년에 오스카르 엥켈 소장이 사임하면서 방어선 건설 공사가 중단되었다.

해당 기간동안 요새선을 건설한 업체는 핀란드의 건설 회사인 애브 그라니트 오이 (Ab Granit Oy) 였다. 해당 업체가 1920년에서 1924년 사이에 건설한 100개의 소형 벙커는 건설비용 문제로 인해 철근이 없는 그냥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콘크리트의 질도 별로 좋지 않아서 야포중에서 중간급 구경을 가지는 105mm 구경의 포탄에 명중당해도 방어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 때까지 만네르헤임선에 배치된 벙커는 서부 지협에는 기관총 벙커 62개와 포병 진지 2개가 배치되었으며 동부 지협에는 기관총 벙커 20개와 ​​포병 진지 6개가 설치되었다.

3.3. 1932년부터 1937년의 대형 벙커

기존의 소형 벙커가 워낙 방어력이 좋지 못한 관계로 방어거점의 핵심이 되는 대형 벙커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1932년부터 다시 만네르헤임선 건설을 다시 시작하려고 했고 1934년 4월 1일부터 파브리티우스 중령의 지휘하에 건설공사가 재개되었다. 그리고 서부 지협쪽 방어선이 약간 남쪽으로 수정되었다.

파브리티우스 중령은 Ink 1과 Ink 2라는 두 종류의 벙커를 설계했다. 해당 벙커들은 일반적으로 길이가 15미터에서 20미터였고 폭이 5미터에서 6미터였다. 벙커의 주목적인 병력의 수용이었으나 1938년부터 1939년 사이에 병력의 빠른 출입을 위해 개구부가 만들어졌다. 해당 벙커들은 잉킬라 (Inkilä) 지역에 6개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1932년부터 1938년까지 핀란드의 국방 예산은 너무 적어서 1년에 고작 2개에서 3개 수준의 대형 벙커만 건설 가능할 수준이었다. 그래서 숨만퀼래(Summankylä)에 핵심 거점용 대형 벙커인 Sk 10과 Sj 4를 건설했다. 그 외에도 레이패수오(Leipäsuo) 지역에 소형 벙커인 Le 6과 Le 7를 건설하고 잉킬라(Inkilä) 지역에도 Ink 6을 증설하였다.

이렇게 새로 만들어진 벙커들은 철근 콘크리트 자재와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전투실 사이에 병력대기실을 만들었으며 벙커의 지붕 위에는 2미터에서 3미터 두께의 흙을 올려놓고 1미터에서 3미터 수준의 자갈과 잡석을 추가로 깔아놓아서 포격에 대비하였다.

3.4. 1938년에서 1939년의 강화와 미완성

유럽에 전운이 감돌자 1938년 5월부터 핀란드의 국방 예산이 크게 증액되기 시작했고 상당한 부분의 금액이 만네르헤임선에 투자되기 시작하며 방어선 건설에 속도가 붙었다.

숨만킬래(Summankylä)와 숨마야르비 (Summankylä)에는 새로운 규격의 대형 벙커인 Sk 11 2개소를 건설하고 펠톨라 (Peltola)라는 고유명칭을 붙였으며 Sj 5 형식의 벙커 1개소를 추가로 건설하고 밀주날리나케 (Miljoonalinnake)라는 고유명칭을 붙였다. 그 외에도 Sk 17 3개소를 건설했으나 개전시까지 완성하지는 못했다. 이들 벙커들은 향상된 화생방 방호시설, 환기시설, 관측소등을 갖추었다.

쉬르니에미 (Suurniemi) 근처의 므워우란지르비 (Muolaanjärvi) 호수 근방에서는 Su 1에서 Su 7에 이르는 7개소의 새로운 벙커가 만들어졌다. 이들 중에서 Su 3과 Su 4는 병력 수용 및 거주용이었고 나머지는 기관총용 벙커였다. 그 외에도 1920년대에 건설된 구식 방어물을 현대화했는데 주로 측면으로 우회하는 적을 사격할 용도로 총안구나 포곽이 설치되었고 크기도 대형화하면서 증설되었으며 일부 벙커들은 병력의 숙소나 지휘소용으로 만들기 위해서 방어력 강화 측면에서 개구부가 폐쇄되었다. 이런 식으로 구식 기관총 벙커 중 서부 지협에 25개소를 개조하고 동부 지협에 17개소를 개조하여 총 42개소를 근대화했다.

1939년이 되자 핀란드 국민들의 자원봉사 및 군대의 축성진지공사로 최종적인 강화조치가 시행되었다. 기관총을 배치한 엄폐 가능한 참호는 서부 지협에 438개소, 동부 지협에 168개소를 설치해서 총 606개소를 만들었고 철조망 지대는 서부 지협에 214km, 동부 지협에 117km을 부설해서 총 331km를 설치하였다. 자연지물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철조망 대용 겸 임시 장애물인 2톤에서 3톤 무게의 바위를 서부 지협에 85km, 동부 지협에 51km를 일렬로 깔아놓아서 총 136km 거리를 깔아놓았다. 이를 통해서 전체 방어선 길이인 140km 길이에 방어선 1km 당 기관총 참호 4곳과 철조망 지대 1km와 바위를 비롯한 방벽 장애물 1km가 배치될 수 있었다.

하지만 비용과 자재와 시간의 부족으로 인해 1939년 11월의 개전 직전 상황에서도 만네르헤임선은 완성되지 못했다. 방어력도 약한 편이라 몇몇 대형 벙커만 구조적으로 튼튼했고 전선에 배치된 소형 벙커나 후방 방어선, 중간 거점등은 야전축성으로 임시적인 강화를 했으며 아직 미완성된 구간도 많았다.

4. 구조

서쪽의 핀란드 만에서 시작해서 수마(Summa)를 거쳐 부옥시강이 흐르는 타이팔레(Taipale) 에서 라도가호를 만나면서 동쪽 끝을 이루는 구조로 만네르헤임선이 만들어졌다.

기본적인 방어선의 길이는 약 140km로 그 중에서 80km은 호수와 하천같은 물로 방어되고 있으며 육상통로는 60km 정도다. 지형의 고도는 매우 낮아서 기본적으로 육지는 습지가 30%에 도달하고 제대로 말라서 통행이 가능한 곳은 70% 수준이다. 육지의 구성은 삼림이 75%고 경작지가 20% 수준이라 숲에서 매복한 방어군이 쏜 총알이 날아오기 딱 좋았다.

방어선은 157개소의 기관총 거치형 소형 벙커와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8개소의 포병 진지형 대형 벙커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수마(Summa) 지역은 지형적 장애물이 없기에 가장 강력하게 요새화되었다.

그리고 핀란드 만 지역은 사렌패 해안포 요새 (Fort Saarenpää), 라도가호 지역은 예리세베 해안포 요새 (Fort Järisevä)로 지원 포격을 받을 수 있는데 해당 해안포 요새에는 러시아 제국제 1892년식 152mm 45구경장 함포를 기반으로 한 6인치 (152mm) 45구경장 152/45C 해안포 러시아 제국제 1891년식 254mm 45구경장 함포를 기반으로 한 10인치 (254mm) 45구경장 254/45D 해안포를 갖추고 있어서 소련군이 해군을 사용해서 우회공격을 하는 것을 막아낼 수 있었다. 해당 해안포들은 러시아 제국이 해안포로 설치했다가 핀란드가 독립하면서 그대로 버리고 간 것을 핀란드에서 입수한 후 포가를 개량 및 강화하고 포신 각도조절을 크게 늘리고 포탄과 장약을 개량하여 6인치 해안포는 약 20km의 사정거리를 가지고 10인치 해안포는 27.5km까지 포탄을 도달시킬 수 있어서 해안포와 육상용 장거리 평사포를 겸임할 수 있었다.

구체적인 만네르헤임선의 배치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포대는 말 그대로 야포를 배치한 곳으로 화포의 수준도 구경 75mm 이하의 경량포가 대부분이었다.

겨울전쟁중에 만네르헤임선의 주 방어선 후방에 2개소의 예비 방어선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전쟁 중의 다급한 상황에서 임시 저지용 방어선으로 만든 것이라 방어력 수준은 매우 의심스러운 수준이었다. 특히 포대는 건설해놓았으나 포대 안에 배치할 야포들이 그 당시에 현역으로 쓰기 곤란할 정도로 낡고 위력도 약한 것들만 배치할 수 있어서 큰 문제였다.

만네르헤임선은 마지노선과는 달리 대부분 자연지형과 현지에서 얻을 수 있는 자재를 이용해서 건설했으며 건설시에 위장을 중시해서 만들어졌고 주요 목적도 소련의 공격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핀란드라는 약소국의 재정 부족에 주 원인이 있었다. 실제로 만네르헤임선에 사용된 콘크리트 양은 14,520㎥ 에 불과하여 헬싱키 오페라 하우스 건설에 사용된 콘크리트 양인 15,500㎥ 보다도 적은 양이다. 오히려 계속전쟁시기에 건설된 방어선인 VT-line은 400,000㎥ 에 이르는 콘크리트를 사용했다.

그래도 4개 사단으로 구성된 핀란드 제2군단과 2개 사단으로 구성된 핀란드 제3군단이 수비군으로 편성되었으며 유사시에 증원군이 투입되므로 수비군의 병력의 밀도가 아주 낮은 편은 아닌데다가 기본적으로 얇고 넓은 방어선이 야전 참호선과 위장된 벙커 등으로 겹겹이 쌓인 구조로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는 소련군이 뚫긴 힘들었다.

5. 소련의 정보 수집

핀란드 내전에서 패배해서 쫒겨난 핀란드 공산당이 건재하고 겨울전쟁 개전 직후에는 괴뢰국인 핀란드 민주 공화국까지 세울 정도로 준비를 해놓았던 소련이 만네르헤임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소련의 정보수집은 내무인민위원부 소련군 정보총국이 주도하고 레닌그라드 군관구, 발트함대, NKVD 휘하 국경경비대들이 실무를 담당하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핀란드 내부에서의 간첩활동도 활발했다. 이미 1930년대에 2건의 굵직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핀란드 참모부에서 근무하던 사진작가 빌호 펜티카이넨(Vilho Pentikäinen)은 1933년에 체포를 피해서 소련으로 탈출했다. 두 번째 사례는 시모 하우카(Simo Haukka)로 1935년에 소련 정보국을 위해 사진을 찍고 도로와 지형을 측정했다. 외부로 공표된 것이 2건이니 실제로는 더 많은 소련의 간첩행위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1938년에 핀란드의 지형과 요새에 대한 사진과 자료가 포함된 소련군 극비문서가 출판될 지경이었다. 해당 문서에는 7페이지 분량의 설명서 및 22페이지에 달하는 사진과 지도가 포함되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점점 심화되어 겨울전쟁 직전에는 소련군 장교를 위해서 200페이지 분량의 지도와 사진이 첨부된 핀란드 내부 진격 안내서가 발행 및 배포될 수준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독소 불가침조약에 따라 핀란드의 수도인 헬싱키에 있는 나치 독일 대사관 무관인 아르니케 (Arniké) 장군이 1939년 9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만네르헤임선을 포함한 카리알라 지협 전체에 대한 방어선을 포함한 상세한 내용이 담긴 지도까지 소련에 직접 전달해주었다.

이 정도면 만네르헤임선에 대한 매우 상세한 수준의 정보를 전달받고 제대로 가공해서 실전부대에 배포까지 완료한 것으로 소련군이 엄청난 삽질만 하지 않는다면 만네르헤임선은 순식간에 붕괴될 것이었다.

6. 실전

만네르헤임선은 겨울전쟁에서만 실전을 겪었다. 겨울전쟁 이후에 소련군이 완전히 파괴했기 때문이었다.

6.1. 겨울전쟁

개전 극초기에는 만네르헤임선이 순식간에 붕괴될 것처럼 보였다. 1939년 11월 30일에 전쟁이 터지자마자 국경에서부터 30km ~ 75km를 진격하여 핀란드군의 방어선인 만네르헤임 선에 소련군이 순식간에 도달했다. 여기서 25만의 붉은 군대는 13만의 핀란드군과 만났다.

이때 핀란드군은 그 중 2만 1천의 병력을 빼서 방어선 앞쪽에서 지연전을 펼치려 했지만 실패했다. 지형적 방어조건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소련군의 전차를 처음 보자 대전차화기가 별로 없던 핀란드군이 순간적으로 공황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만네르헤임선도 상황은 안좋아서 위치가 미리 파악된 벙커들이 소련군의 포격을 집중적으로 얻어맞기 시작하고 개전 시점이 겨울인지라 호수와 늪지대가 얼어붙는 바람에 소련군이 육상 통로뿐 아니라 얼어붙은 호수 표면을 걸어서 건너가기를 시도했으며 덕분에 전면 뿐 아니라 측면의 공격도 신경써야 할 지경에 놓인 것이다.

12월 6일 모든 핀란드군은 만네르헤임 선을 비롯한 방어선에 틀어박혀 방어전에 돌입했다. 붉은 군대는 방어선의 일부인 타이팔레에 첫 공격을 가했다. 소련군은 군사력에서 우위에 있었지만 핀란드군은 기후와 강을 이용한 방어로 첫 공격을 격퇴해냈다. 12월 14일이 되자 소련군은 다시 공격을 감행했지만 또다시 물러나야 했다. 소련군 제3사단은 전투에서 예상 외로 강력한 핀란드군의 저항에 직면하자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공격은 계속되었으나, 방어선은 여전히 뚫리지 않고 소련군의 피해만 늘어갈 뿐이었다. 한 번은 1시간 동안의 전투에서 병력 1천 명과 전차 27대를 잃은 적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피해만 늘어나자 1939년 12월부터 1940년 1월까지 발트함대에 소속된 강구트급 전함 2척인 전함 10월 혁명과 전함 마라까지 동원해서 12인치 (305mm) 주포 사격으로 핀란드군의 해안포 요새를 공격하여 방어선을 해안선으로부터 측면돌파하려고 시도했으나 오히려 핀란드군이 해안포를 매우 정밀하게 사격하는 통에 1939년 12월 18일에는 전함 10월 혁명이 위기에 빠지는 등의 타격을 입고 격퇴당했고 방어선의 측면은 제대로 지켜졌다.

결국 전투가 2달 넘게 이어지면서 소련은 계속 만네르헤임선을 마지노선보다 강력한 방어선이라고 적극적으로 스스로 선전하는 촌극을 벌여야 했다. 국내적으로는 소련군의 느린 진격을 포함하여 전쟁이 길어지는 책임을 피하려는 목적과 국내의 사기를 올리기 위함이었고 국외적으로는 소련이라는 국가의 체면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7. 말로

결국 2월이 되면서 날씨가 따뜻해지고 소련군이 대군을 추가로 동원한 결과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가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만네르헤임선도 서부방면이 붕괴되며 비푸리까지 함락당했다. 그리고 만네르헤임선 지역이 소련에게 넘어간 후 소련은 증오스럽기 짝이 없는 만네르헤임선의 모든 구조물을 폭파하고 파괴했다.

그 이후에는 계속전쟁 당시 VT-line VKT-line이 카리알라 지협의 핀란드측 방어를 담당했으나 만네르헤임선과 다른 곳에 건설되었고 요새화된 방어선도 아니었다.

소련도 스탈린 선의 일부분으로 핀란드가 카리알라 지협을 남하해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카리알라 요새지역을 건설한다. 나중에 22번째 요새화 구역으로 명칭이 변경되는 해당 요새선은 1928년부터 건설을 시작해서 1932년까지 1차 건설을 하고 1936년에 2차 건설을 했으며 1938년에서 1939년까지 3차 건설을 하여 일단 완성했다. 그 이후에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계속전쟁이 시작되면서 레닌그라드 공방전의 일부분으로 북쪽을 방어하는 업무를 담당해서 활동했으며 계속전쟁의 말기에 핀란드로 재침공하는 교두보로 활동하였다.

8. 평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만들어진 요새화된 방어선 중에서 가장 성과가 좋았으며 가격 대비 성능이 높은 방어선이었다.

그러나 만네르헤임선 자체는 비용과 시간과 자재와 인력이 모두 부족한 상황에서 완성되지도 못한 방어선으로 엄밀하게 따지자면 요새화된 방어선으로 보기에도 약간 모자란 방어선이었다.

만네르헤임선이 제대로 활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핀란드군이 만네르헤임선에 얽매이지 않고 국토 방어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했으며 그에 따라 적절하게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방어선에 설치된 벙커들은 대부분 임시 대피소나 숙영지 정도의 역할을 하고 병력들은 유사 시에 활용 가능한 다양한 전투위치를 확보해놓고 위장을 철저히 하고 있었기에 소련군이 벙커를 공격해봤자 측면에서 총알세례나 얻어맞으면서 빈 벙커를 공격하는 식이라 피해만 늘어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요새화된 방어선 그 자체로는 만네르헤임선은 턱걸이를 간신히 할 수준의 위치지만 사용자인 핀란드군이 워낙 뛰어났고 대숙청으로 반쯤 병신이 된 소련군의 무능이 합해지면서 2차대전 중에 가장 효율적인 요새화 방어선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