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 상원의원 (뉴욕 주 클래스 1) | ||||
제90~91대 찰스 구델[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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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94대 제임스 버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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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106대 패트릭 모이니한 |
미합중국 제92-94대 연방 상원의원
제임스 레인 버클리 James Lane Buckle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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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8000> 출생 | 1923년 3월 9일 |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 |
사망 | 2023년 8월 18일 (향년 100세) |
워싱턴 D.C.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정당 |
(1976년 이전) (1976년~2023년) |
학력 |
예일 대학교 (
B.A.) 예일 대학교 (법학 / J.D.) |
종교 | 천주교 |
가족 | 배우자 앤 프랭스 쿨리 , 자녀 6명 |
경력 |
미합중국 해군 중위 연방상원의원 (1971~1977 / 뉴욕) 국무부 군축 및 국제안보 담당 차관 (1981~1982) 미국 국무부 고문 (1982) 연방항소법원 워싱턴 D.C. 지원 판사 (1985~1996) 연방법원 워싱턴 D.C. 지원 명예판사 (1996~2023) |
{{{#ffffff 군사 경력}}} | |
복무 | 미국 해군 |
1943년 ~ 1946년 | |
최종 계급 | 중위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태평양 전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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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법조인2. 생애
뉴욕시 맨해튼에서 석유 재벌[2] 윌리엄 F. 버클리 시니어의 넷째 자녀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 해군으로 레이테 만 해전,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했다. 예일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한 그는 변호사로 일했고 1965년 뉴욕시장 선거에서 동생 윌리엄 F. 버클리 주니어의 뉴욕시장 선거운동을 도와줬다. 정계에 입문하고 나서 캠퍼스, 인종 폭동과 베트남전 반전 시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1968년 미국 상원의원 선거에서 현직 록펠러 공화당원 상원의원 제이컵 재비츠 상대로 지역정당인 뉴욕 보수당 소속으로 출마했지만 17%의 득표율을 받아 3위로 떨어졌다.1968년 6월 6일 로버트 F. 케네디가 암살당하자 뉴욕 주지사 넬슨 록펠러는 찰스 구델(Charles Goodell) 하원의원을 대체 상원의원으로 임명했다. 구델은 록펠러 공화당 중에서도 급진적인 반전주의 성향으로 진보주의자들에게 호감을 산 만큼 뉴욕주의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반발을 받았다. 1970년 중간선거는 결국 록펠러 공화당과 뉴욕 자유당[3], 반전 운동가들[4]의 지원을 받는 구델, 민주당 후보인 리처드 오팅어(Richard Ottinger), 뉴욕 보수당과 보수파 공화당 지역 조직의 지원을 받은 제임스 버클리 사이의 3자 구도로 치러지게 되었다. 버클리는 중산층에게 법과 질서, 감세를 내세우면서 지지를 호소했고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의 지지를 얻으며[5] 보수층을 결집시켰다. 그와 대비되게 진보층은 구델과 오팅어 지지로 분열되어 버클리에게 어부지리를 줄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2%p의 근소한 차이로 버클리가 오팅어를 꺾고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6]
당선 후 그는 대체로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정책을 지지하고 평등권 수정안,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닉슨의 대중 화해 정책에는 반대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에는 닉슨에게 공개적으로 하야를 권유했다. 버클리의 하야 권유를 닉슨은 거부했지만 배리 골드워터 등 공화당 보수파 상원의원들마저 사임을 권유하자 닉슨은 결국 사임했다. 1974년에 로 대 웨이드를 전복하고 낙태를 제한하는 헌법 수정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경선 종반부 로널드 레이건이 온건파 회유를 위해 리처드 슈바이커(Richard Schweiker)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겠다고 약속하자 실망한 제시 헬름스같은 초강경 보수 정치인들은 버클리 추대 운동(Draft Buckley)을 벌였다.[7] 1976년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공화당에 입당해[8] 재선을 시도하였지만 주 UN 미국 대사 출신 패트릭 모이니한(Patrick Moynihan)에게 큰 차이로 밀려 낙선했다.
4년 뒤에는 지역구를 바꿔[9] 코네티컷에서 상원의원에 도전하지만 민주당 크리스 도드(Chris Dodd)에게 패했다. 레이건 행정부에서는 국무부 안보 차관으로 중용되었고 이후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자유 유럽 방송(Radio Free Europe)[10] 회장을 역임했다. 1985년에는 워싱턴 D.C. 항소법원 판사로 임명되어 2023년 8월 18일 낙상 후유증으로 사망할 때까지 재직했다.[11]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76 |
입당 정계 입문 |
|
|
1976 - 2023 |
입당 정계 은퇴 사망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8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뉴욕 | 1,139,402 (17.31%) | 낙선 (3위) | ||
1970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2,288,190 (38.75%) | 당선 (1위) | 초선 | ||
1976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
2,836,633 (44.89%) | 낙선 (2위) | ||
1980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코네티컷 | 581,884 (42.91%) |
5. 여담
- 입법, 행정, 사법부에서 모두 근무해본 희귀한 케이스 중 한 명이었다. 보통 입법부에서 행정부, 또는 그 반대로 이동하며 직책을 맡는 정치인들은 많아도, 사법부까지 경험한 경우는 많지 않다. 미국 연방 판사들은 사직하고 정계에 투신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미국 연방 판사들은 정년이 사실상 무제한[12]이며, 은퇴하더라도 연금도 현역 당시 수준으로 받을 수 있어 연봉, 연금 모두 정치인들보다 많이 받아 굳이 사직할 이유가 없다. 버클리는 특이하게 연방 상원의원 재임 후 항소법원 판사직을 받은 케이스며, 1996년 은퇴 후 죽을 때까지 명예법관직을 유지했다.
- 뉴욕주에서 민주당,공화당이 아닌 당적으로 당선된 마지막 상원의원이다.
- 2023년까지 생존해 미국의 전현직 상원의원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오래 살았는데, 그가 사망할 당시까지 그는 살아있는 미국의 전현직 상원의원 중 최연장자였고 역대 상원의원을 통틀어 봐도 스트롬 서먼드(100세 6개월) 다음으로 장수한 편이다. 여담으로 1970년 대선에서 그의 상대였던 리처드 오틴저도 현재까지 살아있다.[13] 안타깝게도 찰스 구델은 훨씬 이전에 6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1]
전임자
로버트 F. 케네디 사망으로 주지사에 의해 상원의원 임명
[2]
멕시코 군사독재 정권과 유착된 투기꾼에 가까웠다.
[3]
뉴욕 주의 리버럴 성향 군소정당
[4]
무려
노엄 촘스키,
제인 폰다,
하워드 진, 코레타 스콧 킹(
마틴 루서 킹의 배우자)에게 지지를 받았다.
[5]
애그뉴는 상대 후보인 구델을 군인 출신
트렌스젠더 크리스틴 요르겐슨에 비유하면서 원색적으로 비난하였다.
[6]
현직 상원의원이던 구델은 3위로 낙선한다.
[7]
결과적으로는
제럴드 포드 현 대통령이 경선 승리
[8]
76년 이전에도 사실상 공화당 소속으로 활동하기는 했다.
[9]
버클리의 연고지는 원래는 뉴욕보다 코네티컷에 가깝다.
[10]
미국 정부가 공산권 동유럽 상대로 한 라디오 방송.
라디오 프리 저그의 원본이다.
[11]
1996년 이후는 명예 판사였지만 업무와 권한은 동일했다.
[12]
Senior Status라고 한국에서 원로법관으로 벤치마킹한 제도가 있는데, 현역에서 은퇴한 것이지만, 1년에 원하는 만큼 사건을 배당 받을 수 있다. 근데 연봉은 현직 판사들과 동일하게 받는다.
[13]
즉
로버트 F. 케네디가 대선 유세 도중 암살당한 후 공석을 채우기 위해 치러진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두 사람이,
그의 아들이 대선 출마 선언을 할 때까지도 이 세상 사람이었다는 뜻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