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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16:51:37

제갈각/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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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
1.1. 어렸을 때의 일화들
1.1.1. 제갈자유지려(諸葛子瑜之驢)1.1.2. 숙부가 더 현명한가, 아버지가 더 현명한가1.1.3. 장소와의 1차전: 연회장 사건1.1.4. 신동 초딩을 상대로 거둔 장승의 재치1.1.5. "촉한은 오나라의 마구간입니다!"1.1.6. 태자 손등의 말똥드립1.1.7. 비의와의 재치대결1.1.8. "촉(蜀)의 글자는 어떻고 오(吳)의 글자는 어떻소?"1.1.9. "말의 귀를 상하게 했으니 미덕도 상하지 않았겠는가?"1.1.10. 장소와의 2차전: 이것은 무슨 새인가?
2. 손권 시대 (234년~252년)
2.1. 단양을 평정하다
2.1.1. 234년: 순탄찮은 승인2.1.2. 235년: 화려한 성공2.1.3. 왜 제갈근은 제갈각의 단양 평정을 그리 경계했을까?
2.2. 위나라와의 잦은 충돌2.3. 외전: 승상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다2.4. 이궁지쟁: 아들을 희생하여 살아남다2.5. 250년: 탁고대신(託孤大臣), 손권이 뒤를 맡기다
2.5.1. 외전: 노장 여대에게 오만함을 뽐내다
3. 손량-제갈각 시대(252년~253년)
3.1. 손량의 즉위: 연호는 건흥(建興)이다!
3.1.1. 외전: 손분에게 편지를 보내서 위협하다3.1.2. 외전: 손화의 죽음을 초래하다
3.2. 사마사와의 대결3.3. 몰락을 재촉하다3.4. 253년: 손준에 의한 주살3.5. 사후
3.5.1. 외전: 제갈각의 시신을 수습하도록 요청하다
4. 손휴 시대 (258년~264년)
4.1. 258년: 복권되다

1. 초기

제갈각은 203년에 태어났다. 숙부 제갈량이 무려 46세의 나이에 제갈첨을 가진 것과 달리 제갈근은 고작(?) 29세에 제갈각을 봤다. 덕분에 제갈첨이 8살이었을 때 사별한 제갈량과 달리 제갈근은 제갈각이 장성해서 38살이 될 때까지 지켜봤다. 그러나 제갈근은 제갈각을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아마 제갈각의 오만한 성품이 원인일 것이다.

제갈각은 동생 제갈교와 더불어 어려서부터 이름이 알려졌다고 한다. 당대인들이 평하기를 제갈각이 제갈교보다 능력이 뛰어났다면 제갈교는 제갈각보다 인품이 뛰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제갈교는 숙부 제갈량의 양자로 삼아져서 그런지 기록이 별로 남지 않은 반면 제갈각은 빼어난 두뇌를 보여주는 일화를 어려서부터 매우 많이 남겼다.

약관의 나이[1]에 기도위로 임명되었으며 고담 장휴와 함께 태자 손등을 모셨다. 손등과 도리와 육예에 대한 담론을 자주 했는데 덕분에 제갈각, 고담, 장휴는 손등과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이 4명을 통틀어 일명 태자사우로 칭했다고 한다. 다 같이 한 침구에서 잘 정도로 친했다고 「손등전」에서 전한다.

『오록』에 의하면 제갈각은 7척 6촌(약 180cm)에 눈썹과 수염이 적었으며 코가 꺾여있는데다가 이마가 넓고 입은 크고 그와 걸맞게 목소리 또한 컸다고 한다. 8척 장신에 빼어난 미남으로 알려진 숙부 제갈량이나 얼굴이 조금 길되 용모를 갖추었다고 전해지는 아버지 제갈근에 비하면 외모가 상당히 특이했던 듯.

1.1. 어렸을 때의 일화들

어려서부터 재치가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능하기로 유명한만큼 수많은 일화를 선보이며 손권의 총애를 받았다. 두 사람의 첫 만남부터가 범상치 않은데 손권이 제갈근의 아들 제갈각을 보고서 “남전에서 옥이 나온다더니, 정말 빈말이 아니다.”라고 탄식했다는 고사가 있다.[2] 섬서의 남전현(藍田縣)은 미옥(美玉)의 생산지로 유명한데, 이후로 훌륭한 집안의 뛰어난 자손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다음은 그와 관련된 일화들 모음이다. 이중 몇 가지는 『 삼국지연의』에도 실려있다.

1.1.1. 제갈자유지려[3](諸葛子瑜之驢)

파일:f7OSWmz.jpg
제갈자유지려 일화를 묘사한 그림[4]
제갈각의 아버지 제갈근은 얼굴이 길어서 마치 당나귀와 비슷했다고 한다. 이에 어느 날, 오나라 황제 손권은 많은 신하들이 모인 연회 자리에서 당나귀 한 마리를 끌고 와 얼굴에 큰 봉투를 붙이고 제갈자유(諸葛子瑜-제갈근의 자)라고 쓰도록 시켰다. 이는 제갈근의 긴 얼굴을 놀리는 손권의 짓궂은 장난이었다.

그 자리에 제갈근은 물론 아들 제갈각도 있었는데 제갈각은 무릎을 꿇고 손권에게 요청했다.
"붓으로 두 글자를 더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손권은 허락하고 제갈각에게 붓을 주었다. 제갈각은 '제갈자유' 뒤에 지려(之驢)를 더 써서 '제갈자유지려(諸葛子瑜之驢)'로 고쳐, '제갈근의 당나귀'라는 뜻으로 바꾸었다.

두 글자만으로 뜻을 완전히 바꾼 제갈각의 뛰어난 재치에 좌중은 모두 즐겁게 웃었으며, 손권 또한 어린 제갈각의 기지를 영특하게 여겨 그 당나귀를 정말로 제갈근에게 하사했다. 여기서 손권이 제갈근에게 제갈각을 칭찬할 때 이렇게 말했다.
"남전(藍田)이 옥을 낳는다더니, 과연 허언이 아니구려."
이 말에서 유래한 고사성어가 바로 남전생옥(藍田生玉)이다. 현명한 아버지가 재주 좋은 아들을 낳는다는 의미.

삼국지연의』에서도 등장하는 유명한 일화다. 그런데 『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 려(驢)를 노새라고 오독해, 손권이 노새를 끌고 와서 장난친 것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노새는 생식능력이 없는 동물이라, 이렇게 오독하면 손권이 제갈근 부자의 면전에서 그대는 성불구자인데 저 아이는 누구 자식인가라고 조롱한 꼴이 된다. 얼굴 생김새를 짓궂게 놀린 정도의 일이, 자식까지 불러놓고 초대형 패드립을 친 일로 돌변한 것. 리동혁의 『 삼국지가 울고있네』에서 이를 지적한다.

1.1.2. 숙부가 더 현명한가, 아버지가 더 현명한가

손권이 제갈각을 만나자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네 아비와 숙부(제갈량) 중에서 누가 더 현명하냐?"
상당히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제갈각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신의 부친이 뛰어납니다."
손권이 이유를 묻자 제갈각은 답했다.
"신의 부친은 섬길 곳을 알지만 숙부는 모르기 때문에 뛰어난 것입니다."[5]
아버지 숙부 중 아버지야말로 섬겨야 하는 사람을 알았기에 더욱 뛰어나다는 답변인데 사실상 답이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아버지 뿐만이 아니라 손권을 치켜세워 주는 답변을 내세운 것으로 제갈각의 뛰어난 재치를 엿볼 수 있다. 일화가 상당히 직관적이고 지금 읽어도 별 다른 지식없이 의도를 이해하기 쉬워서 그런지 제갈각의 일화들 중에서 제갈자유지려와 함께 상당히 유명한 편이다.

1.1.3. 장소와의 1차전: 연회장 사건

연회장에서 손권은 제갈각에게 여러 사람들에게 술잔을 돌리도록 명령했다. 여러 사람을 지나서 제갈각이 원로대신 장소 앞을 지났을 때 장소는 이미 취기가 심해 마실 수 없었다. 장소는 제갈각에게 말했다.
"이것은 노인을 공양하는 예의가 아니다."
그러자 손권은 제갈각에게 말했다.
"그대가 장공(張公)으로 하여금 말을 굽힐 수 있으면, 응당 마실 것이다."[6]
제갈각은 장소의 말을 반박했다.
"옛날 사상보(師尙父)는 90세 때도 깃발을 잡고 월(鉞)을 가지고는 여전히 아직 늙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군사적인 일에 있어서는 장군은 후방에 있지만, 술 마시고 밥 먹는 일에 있어서는 앞에 있으면서 어찌 노인을 공양하지 않는다고 말합니까?"[7]
"옛날에 강상부(姜尙父- 강태공)는 아흔이 되어서도 백모를 쥐고 황월을 들어 군사를 거느리면서, 자신이 늙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싸움에 나갈 때에는 선생께서 뒤에 계시고, 술을 마실 때에는 선생께서 앞에 앉으시는데 어찌 노인을 잘 모시지 않는다고 하실 수 있습니까?"[8]
할말이 없어진 장소의 술잔에는 술이 가득히 담겨졌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도 거의 그대로 등장하는 일화다.

1.1.4. 신동 초딩을 상대로 거둔 장승의 재치

이런저런 일화들을 뽐내며 이름을 떨치던 어린 제갈각을 두고 사람들은 매우 기이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장소의 아들 장승은 그런 제갈각을 상대로 논쟁을 벌이며 끝내 여러차례 승리를 거뒀다고 한다.

재미난 점은 장승은 178년생으로 174년생 제갈근에 비해 겨우 4살차 밖에 나지 않았고, 제갈각과 장승간의 나이차는 무려 25년이다.

물론 노신 장소를 완패시킨 제갈각의 재치와 말빨을 고려하면 승리를 거둔 장승도 나름대로 뛰어난 말빨을 가졌다고 볼 수 있겠지만, 25년 많은 어른에게 대등한 말빨을 가진 제갈각의 비범함을 볼 수 있는 일화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장승의 성격과 인물됨을 잘 파악한다는 기록, 제갈근과 친한 친구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단순히 이겨보자고 이런 일을 벌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자의 기록을 감안하면 자신의 통찰력으로 제갈각의 문제점을 파악했을 수도 있고, 후자의 경우를 감안했을 땐 친구인 제갈근이 제갈각의 오만한 성격에 대해서 걱정했다는 기록이 사실이라면 친구인 장승에게 관련 이야기를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친구 아들 성격 좀 죽여보려는 훈육차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그래도 『오서』 「장소전」에서 굳이 이 일화를 언급한 것을 봐선 제갈각의 재치와 말빨은 매우 뛰어난 평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1.5. "촉한은 오나라의 마구간입니다!"

촉한의 사자가 오나라를 방문하자 손권은 사자에게 말했다.
"이 제갈각은 말타기를 매우 좋아한다. 돌아가서 승상에게 말하여 좋은 말을 보내오도록 하라."
제갈각은 무릎을 꿇고 손권에게 감사했다. 아직 말이 도착한다는 소식조차 없는데 먼저 감사를 청한 제갈각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손권은 제갈각에게 물었다.
"말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무엇을 감사해 하시오?"
제갈각은 즉시 답했다.
"촉나라는 폐하의 외부에 있는 마굿간[9]인데, 오늘 은혜로운 조서를 내렸으므로 말은 반드시 이를 것입니다. 어찌 감히 감사해 하지 않겠습니까?"
배송지 주석이 아닌 『오서』 「제갈각전」 본전에서 전해지는 기록으로 일화 말미에 "제갈각의 재능과 민첩한 사고는 모두 이러한 류였다."고 기록했다. 말 한 마디로 자기 삼촌을 마구간지기로 만들어버리는 패기 뭐 동맹국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경쟁의식이 있었고, 손권이 가진 그 경쟁의식을 근거로 해서 적절한 타이밍에 후빨했다 할 수 있겠다.

다만 손권이 요청한 말이 왔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1.1.6. 태자 손등의 말똥드립

『제갈각별전』에서 전해지는 일화로 어느날 손등이 제갈각에게 조롱하며 말했다.
"제갈원손은 말똥이나 처드시오."
제갈각은 이에 답했다.
"태자께선 계란을 드시도록 하십시오."
그러자 손권은 제갈각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이 경에게 말똥이나 먹으라고 하였는데 경은 남에게 계란을 먹으라 하니 어찌하여 그리하오?"
제갈각은 이에 답했다.
" 똑같은 곳에서 나왔을 뿐입니다."[10]
손권은 이를 듣고 크게 웃었다고 한다.

이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손등이 뜬금없이 제갈각을 조롱할 정도라면 손등과 매우 친했다고 봐도 무방할 듯싶다. 특히 손등은 창작물에 의해 상당히 점잖은 이미지로 그려지는데 의외로 짓궂은 면모도 있는 듯하다.

1.1.7. 비의와의 재치대결

말빨 좋기로 유명한 비의와도 일화를 남겼는데 이 또한 『제갈각별전』에서 전해지는 일화다.

촉한의 사절로 오나라를 방문한 비의를 맞이하면서 손권이 칙명을 내렸다.
"사절이 올 것이니 엎드려서 먹고 일어나지 말라."[11]
비의가 오자 손권은 먹기를 멈췄지만 신하들이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비의는 이를 보고 오나라의 신하들을 조롱했다.
"봉황이 날아오자, 기린은 먹던 것을 뱉었는데, 당나귀는 무지하여, 예전처럼 엎드려 먹는구나"[12]
그러자 제갈각이 답했다.
"오동나무를 심는 것은 봉황을 맞이하려 함인데, 어찌하여 제비나 참새가 스스로 날아왔다고 하느냐? 활로 쏴버리지는 않을 것이니, 사절은 고향으로 돌아가시게!"
비의는 제갈각의 반격에 떡을 먹기를 그만두고 붓을 찾았다. 비의는 붓으로 '맥(보리)부'를 지었는데 제갈각은 또한 붓을 청하여 이에 응답하기를 '마(보리를 가는)부'를 지었다. 사람들은 두 인물의 재치를 두고 훌륭하다 칭찬했다.

『촉서』 「비의전」에 의하면 남정을 끝마친 제갈량이 비의를 오나라에 사절로 보냈는데 제갈각과 양도는 비의를 마구 힐난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의는 의(義)를 따르며 이치에 의거해 답변하니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 일화를 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서로 재치가 뛰어나다보니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엎치락 뒤치락한 모양이다. 장승>제갈각=비의?

1.1.8. "촉(蜀)의 글자는 어떻고 오(吳)의 글자는 어떻소?"

배송지주로 인용된 『강표전』에서 소개된 일화로 『오서』 「설종전」 본전에 장봉은 비의 포지션에, 설종은 제갈각 포지션에 치환한 거의 동일한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어느쪽이 원조인지 불확실하지만 아무래도 장봉과 설종간의 논쟁을 서술하는 본전을 신뢰하는게 옳을 것이다. 그래도 제갈각과 비의간의 논쟁 또한 이 항목에는 기재한다.

비의가 오나라의 사신으로 왔는데 손권을 만난 이후 공경대신과 함께 거하게 연회를 열었다. 비의는 제갈각과 서로 농담을 주고 받았는데 나중에는 촉(蜀)과 오(吳)의 글자까지 미쳤다고 한다. 비의가 제갈각에게 물었다.
"촉(蜀)의 글자는 어떻습니까?"
제갈각이 답했다.
"'水'가 있으면 탁(濁)이요 없으면 촉(蜀)이 됩니다. 눈목(目)이 누워있고, 몸은 꾸부정하고 굽어있고, 벌레가 그 몸속에 들어 있는 모습입니다."
비의가 또 다시 물었다.
"오(吳)글자는 어떤가요?"
제갈각이 대답했다.
"입구(口)가 없으면 하늘천(天)이요, 있으면 오(吳)입니다. 아래쪽에 창해(滄海)를 아우르고 있으니, 천자의 수도라는 것입니다."
「설종전」에서 전해지는 장봉에 대한 일화는 오히려 장봉이 손권 앞에서 감택을 조롱하는 무례를 저지르는 것을 설종이 난입해서 쳐바르는 형식인 것에 비해 『강표전』에서 수록된 일화는 훨씬 더 훈훈한 분위기 속에 펼쳐진 제갈각의 뜬금없는 공격처럼 보인다.

다만 두 일화가 좀 묘한게 촉한의 국호는 어디까지나 한(漢)이었지 촉(蜀)이 아니었다. 이 시기 굳이 촉한을 촉이라 부름은 비하적 의미를 내포했다.

1.1.9. "말의 귀를 상하게 했으니 미덕도 상하지 않았겠는가?"

제갈각은 일찍이 손권에게 말을 바쳤는데 귀에 구멍을 뚫어놨다.

이 광경을 본 친구 범신은 제갈각을 놀렸다.
"말이 비록 큰 짐승이고, 하늘로부터 품성을 타고났지만, 지금 그 귀가 상했으니, 어찌 그 미덕(仁)이 상하지 않았겠는가?"
제갈각은 이에 답했다.
"모친은 여인 중에서도 은애가 지극한 사람인데, 귀를 뚫어 구슬을 걸은들, 그 미덕(仁)에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이에 대한 범신의 반응은 따로 기록되지 않았다.

"니 애미는 말(馬) 같은 년이다" 라는 패드립이라고 보는 관점도 있는데 확대해석이고, 그저 '형태가 상한다고 본질도 상하겠냐?'는 일반론에 가깝다. 다른 일화와 같이 제갈각의 말빨을 보여주는 대화 한 토막. 게다가 정말 패드립이었으면 보통 사서에 촌평(물론 패드립 친 쪽을 까는 의미)이라도 붙는다.

1.1.10. 장소와의 2차전: 이것은 무슨 새인가?

「제갈각전」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달았던 『강표전』에서 전해지는 일화다.
파일:e2hfsbz.jpg
백두옹(白頭翁)의 사진
손권과 대신들이 궁전 앞의 정권에 있었는데 머리가 흰 새가 날라왔다. 새의 종류가 궁금했던 손권은 대신들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슨 새인가?"
제갈각이 답했다.
"백두옹(白頭翁)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냥 평범한 문답이었지만, 장소가 이를 오해하면서 일이 커졌다. 백두옹은 풀이하면 '머리가 흰 영감'이라는 뜻이 되니, 당시 모여있던 대신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장소가 자신을 조롱하는 걸로 착각한 것이다.

장소는 이렇게 말했다.
"제갈각이 폐하를 속이는 것입니다. 백두옹이라는 새 이름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제갈각에게 백두모(白頭母: 흰 머리 어미)라는 새를 구하도록 하십시오"
이에 제갈각이 반박했다.
"앵모(鸚母)라는 이름의 새가 있는데, 이것과 대(對)를 이루는 새가 반드시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보오[13]에게 앵부(鸚父)를 구하도록 하십시오."
그러자 장소는 답하지 못했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웃었다고 한다.

장소도 명색이 오나라의 명신으로 찌질한 인물이 결코 아닌데 자신의 아들뻘만큼 어린 제갈각에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털린 것을 봐선 상성이 영 안맞는 듯하다. 앞서 장승이 저런 것도 우스운 꼴이 된 아버지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그런 걸지도.(...) 재미있게도 아들 장휴는 제갈각과 친구 사이다. 아마 그래서 제갈각이 유독 장소에게 강하게 나설 수 있던 것일지도.

2. 손권 시대 (234년~252년)

2.1. 단양을 평정하다

2.1.1. 234년: 순탄찮은 승인

234년 8월, 제갈각은 변방의 단양을 평정하고자 했다. 일찍히 오나라는 단양을 제대로 정비하고자 했으나 산이 험하고 주민들이 굳세고 사나워서 번번히 실패했다. 육손이 산월에 사는 주민들을 군사력으로 삼은 바가 있었지만 주민들이 더욱 깊숙히 들어감으로 제대로 평정하지 못했는데 제갈각은 여러차례 단양의 관리가 되겠다고 청구하며 3년이면 무려 4만의 군사력을 얻을 수 있으리라 장담했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제갈각의 단양 평정에 대해서 비관적으로 생각했다.
"단양은 지세가 험하고 막힌 곳이고, 오군·회계·신도·파양 네 군과 인접하여 있고, 면적이 수천 리이며 산골짜기는 만 겹이나 됩니다. 그 깊은 산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일찍이 성읍으로 들어오지 않았으며, 장리를 보지도 못하고 모두들 들녘에서 무기를 쥐고 있으며 최후에는 수풀 속에서 늙어 죽습니다. 도망자나 오랫동안 사악한 행위를 한 자는 모두 함께 이곳으로 달아나 숨어 있습니다. 산 속에서는 구리와 철이 생산되므로 직접 병기를 주조합니다. 그곳의 습속은 무예를 좋아하고 싸움을 익히며 기력(氣力)을 높이 숭상합니다. 그들이 산을 오르고 험난한 곳을 넘으며 가시덤불을 뚫고 지나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연못 속에서 질주하고, 원숭이가 나무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틈을 살펴 나와서 소란을 일으키고 약탈하여, 매번 병사들이 출정하여 토벌하려고 그들이 숨어있는 소굴을 찾습니다. 그들이 싸울 때는 벌이 이르는 것처럼 하고, 패배하면 새처럼 사방으로 달아나 버립니다. 그래서 이전 시대로부터 현재까지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제갈각의 아버지 제갈근은 제갈각의 단양평정책에 대해서 들었을 때 탄식하며 말했다.
"제갈각은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키지 못하겠구나. 장차 우리 집안을 싹 쓸어 버리겠구나."
그러나 제갈각은 단양평정책을 내세우며 호기롭게 반드시 이기리라 계속 이야기했다. 손권은 끝내 제갈각을 무월장군으로 삼고[14] 단양태수의 일을 겸양하게 해서 제갈각의 계책을 수행하게 했다. 손권은 더불어 제갈각에게 적흑색의 비단으로 싼 나무창을 지닌 기병 300명을 내렸다. 관직임명식이 끝난 이후 제갈각에게 위의를 갖추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행렬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명했다. 제갈각은 당시 32세에 불과했다.

2.1.2. 235년: 화려한 성공

임지에 도착한 제갈각은 오군(吳郡), 회계군(會稽郡), 신도군(新都郡), 파양군(鄱陽郡)의 장리들에게 문서를 보냈다. 문서에서 제갈각은 장리들에게 각영의 경계를 보호하고, 군대를 정돈하여 세우며 귀화한 평민들을 모두 둔지[15]에 머물게 했다.

제갈각은 제장들을 지휘해 산월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병사를 벌려놓았는데, 방어하는 울타리만 수선할 뿐 교전을 엄금했다. 그리고 곡식이 익을 때마다 매번 수확해서 남겨진 곡식이 없게 하였다. 이렇게 하니 산에 사는 사람들은 보관된 곡식이 모두 떨어지고 나자 굶주리다 못해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제갈각은 다시 한 번 칙령을 내렸다.
"산에 사는 백성 가운데 악한 짓을 버리고 교화를 좇는 자들은 모두 마땅히 위무하고서 밖에 있는 현으로 이사시켜 내보내고, 혐의를 주어 구속하여 잡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 때 구양의 현장 호항이 이들 중 주유(周遺)[16]라는 자를 잡아냈다. 그는 예전부터 백성들에게 악행을 저지르는 악질 범죄자였는데 제갈각의 계책으로 인해 사정이 어려워지자 잠시 나왔다가 호항에게 포박당한 것이다. 호항은 주유를 관부에 이송했다. 그러나 제갈각은 호항이 교지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목을 베고 여러 사람들에게 돌렸다.

아직까지 산에 틀어박혀 있던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는 관부에서 그들이 오직 나오기만을 원한다는 것을 깨닫고 전부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갈각은 1여년만에 호언장담했듯이 수많은 병사를 모으는데 성공했다. 제갈각은 스스로 1만의 병력을 거느렸고 나머지는 제장들에게 나눠주었다.

제갈각의 공로는 조금 과장섞어서 미니 남만정벌이라 할만큼 뛰어났다. 단양의 규모도 규모지만 산월의 반란으로 거듭해서 곤란해했던 오나라 입장에서는 제갈각만큼 수월하게 이들을 토벌한 예는 그리 많지 않았고 군사적 방법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을 썼기에 인력이나 물자소모 또한 비교적 적었을 것이다. 이렇게 제갈각은 말빨과 재치 뿐만이 아니라 행정가이자 지략가로써의 혜안도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해내며 성공가도의 첫 번째 관문을 돌파한 것이다.

손권은 제갈각의 공로에 기뻐하며 그를 위북장군으로 임명하고 도향후에 책봉하였으며 여강환구에 주둔하게 했다.

손권은 상서복야 설종을 보내 제갈각의 군대를 위로하도록 했다. 설종은 제갈각에게 편지를 보내며 그의 업적을 크게 칭송했다.
"산월의 백성들은 험난한 지세에 의지하고 있어 복종시키지 못한 지 몇 해가 지났습니다. 그들을 느슨하게 하면 의심많은 쥐가 머리를 내놓고 관망하는 것처럼 하고, 급박해지면 이리같이 뒤를 돌아보며 두려워하였으므로 황제는 상당히 노여워하여 장수들에게 서쪽을 정벌하도록 했습니다. 신기한 책략이 조정 안에서 전해지고 군대의 무용은 먼 곳까지 진동시켰습니다. 병기에는 혈흔이 묻어있지 않으며, 갑옷은 땀으로 젖지 않았습니다. 원흉과 사악한 자의 목을 베어 내다 걸자 무리들은 정의로 뒤순했으며 깊은 산 속의 도적들은 소탕되었고 포로 10만 명을 바쳤습니다. 들에는 남은 도적들이 없고, 성읍에도 잔존하는 간사한 사람이 없습니다. 흉악한 자들을 소탕했을 뿐만 아니라 또 군대 비용을 충실하게 했습니다. 명아주와 강아지풀이 유익한 풀로 변했습니다. 도깨비는 다시 용감한 병사가 되었습니다. 비록 실제로는 국가의 위엄과 신령스러움이 더해졌을지라도 또한 확실히 원수가 직접 도달하여 조상한 것입니다. 비록 《시경》에서는 포로를 찬미하고 심문하고, 《역경》에서는 목을 벤 일을 칭찬했으며, 주왕조의 방숙(方叔)·소백호(召伯虎), 한왕조의 위청(衛靑)·곽거병(藿去病)을 어찌 나란히 논할 수 있겠습니까? 공적은 옛 사람을 뛰어넘고 공훈은 이전 시대를 초월합니다. 주상(主上)께서는 기뻐하며 먼 곳에서 감탄하고 있습니다. 《사두(四?)》편의 유전(遺典)에 감동하여 승리하고 돌아오는 병사들에게 연회를 내린 옛날 예의제도를 사모했습니다. 때문에 중대(中臺)에서 가까이 있는 관리를 파견해 장군을 영접하고 상을 내려서 위대한 공적을 빛내고 수고로움을 위로하도록 했습니다."
-『오서』 「제갈각전」에 기재된 설종의 편지

2.1.3. 왜 제갈근은 제갈각의 단양 평정을 그리 경계했을까?

흔히 제갈근이 제갈각의 안하무인 성격과 심하게 총명함을 과시하게 모습을 까면서 "제갈각은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키지 못하겠구나. 장차 우리 집안을 싹 쓸어버리겠구나."라 예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제갈각이 단양평정을 요청했을 때 저 말을 한 것이다. 물론 대부분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어려운 과제를 마냥 쉽게 생각하는 아들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는 있는 법이지만 "장차 우리 집안을 싹 쓸어 버리겠구나"같은 평은 결코 쉽게 할만한 말이 아니다. 마초가 용맹하다고 호평받으면서도 사가들에게 어김없이 까임받는 부분이 가문을 망쳤다는 것인데 다름아닌 아버지인 제갈근이 제갈각에 대해 내린 평가라면 이건 사가들 이상으로 가혹한 평이라 볼 수 있다. 도박과도 같은 북벌을 지휘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내부 평정에 도움을 주겠다는 아들의 요청에 대해 이리 가혹하게 평한 것은 아무리 오만함이 걱정되었다곤 하나 과민반응으로 보아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이에 대한 추측 중 하나로, 제갈근이 진정하게 경계한 점은 단양 평정을 성공해서 아들이 사병을 거느리게 된다면[17] 제갈근 본인이 유지했던 손권의 직계관료 포지션이 아닌 주유 육손같은 오나라 휘하의 군벌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는 것이 있다.[18]

특히 제갈각은 무려 1만의 병력을 사병으로 거느렸는데 오의 사성이자 명문이었던 육씨 가문의 수장인 육손이 21세에 확보한 병력이 8천 명이고 그의 아들 육항이 물려받은 병력이 4천 명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제갈각이 갑작스레 얻은 사병은 어마어마하다 평해도 무방하다. 제갈각은 세병제 덕분에 군사력을 독점하고 있던 오나라의 호족 세력에게 돌직구를 던지며 도전한 셈인데 외부인이 갑작스레 신흥 세력으로 도약한 셈이니 기존 호족 세력이 이를 탐탁찮게 봤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제갈각의 오만함에 대한 경계로 이해되었던 「육손전」에 기재되어 있는 제갈각에 대한 육손의 편지도 기존 호족 세력의 경고라는 측면으로 해석한다면 본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손권만 하더라도 이전의 기록을 보면 아들 손등의 친구로 붙여준다던가 제갈각의 재치에 크게 웃는다던가 훈훈한 일화들이 줄을 잇는다면 제갈각이 사병을 얻은 다음부터는 제갈각에 대한 태도가 바뀐 느낌이 강하다.
손권은 병상에 있게 되자, 뒷일을 누구에게 의탁하면 좋을지 논의하도록 했다. 당시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제갈각에게 주의하고 있었는데, 손준이 표를 올려 제갈각의 기량은 군주를 보좌하여 정치를 하기에 충분하므로 큰 일을 맡길 수 있다고 했다. 손권은 제갈각이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여 일을 처리했으므로 그를 꺼리고 있었으나, 현재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그에게 미치지 못함이 확실하게 보증할 만하다고 여겼으므로 제갈각을 불렀다."
-『오서』
제갈각은 병사들을 인솔하여 여강(廬江)의 환구(喚口)에서 둔전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가볍게 무장한 병사들로 서현을 습격하여 그곳의 백성들을 체포하여 돌아왔다. 또 먼 곳으로 정찰할 사람들을 파견해 도로와 요충지를 관찰하도록 하여 수춘을 취하려고 도모했다. 그러나 손권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서』 「제갈각전」
이전까지 마치 친아들 대하듯이 촉한의 사자에게 말을 대령하라고 명령하는 등 훈훈한 모습을 보인 둘이지만 단양 평정 이후로는 상당히 경직된 느낌이 강하고 배송지가 주석으로 참고한 『오서』에서는 아예 손권이 꺼렸다는 언급이 나온다. 『오서』 「제갈근전」에 의하면 제갈각이 "스스로" 후작위를 얻었기에 제갈융이 제갈근의 작위를 이었다고 언급하는데 이런 측면에서 보면 뭔가 섬뜩하다.

결론을 짓자면 아버지 제갈근은 제갈각의 오만한 성품을 넘어 외부인 출신이라는 한계에 불구하고 사병확보를 통해 기존의 호족 세력에게 돌직구를 던지는 무모한 모습을 보고 계속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손씨 황가의 총애 외에는 확고한 기반이 없는 제갈씨 가문이 말 그대로 박살날 수 밖에 없다는 점에 대해 걱정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제갈근이 아들 제갈교를 제갈량의 양아들로 삼도록 한 덕분에 촉한에 남아있던 제갈교의 아들 제갈반이 동오 제갈씨 집안의 대를 이어 멸족의 화는 피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제갈교가 제갈각의 최후를 예견했던 제갈근의 마지막 보험이었다 가정하기도 하나 제갈교가 제갈량의 양자가 된 시점은 234년의 단양평정보다 한참 전[19]이라서 다소 억측이다.

2.2. 위나라와의 잦은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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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군의 지도
여강에 주둔한 제갈각은 환구(喚口)에서 둔전하기를 원했다. 제갈각은 경보병에게 서현을 습격해서 지역의 백성을 체포하게 했다. 제갈각은 사람들을 멀리 정찰하도록 파견해서 인근의 도로와 요충지를 관찰해 수춘을 도모하고자 했는데 손권은 이를 불가능한 목표라 여겼다.[20]

제갈각이 여강에 주둔한 238년에서 240년 사이까지 별 다른 기록이 없다. 아마 손권의 반대로 평화롭게 여강을 다스리면서 기회를 엿봤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241년, 은례 손권을 설득하면서 오나라는 어린 조방의 즉위로 혼란스러운 위나라를 향해 총력전을 벌여야한다고 설득했다. 손권은 이를 채용하지 않았으나 비교적 소규모의 전쟁으로 선회했다. 전종은 회남을 공격해 작피의 둑을 터뜨렸다. 제갈각은 육안을 공격하고 주연은 번성을 포휘했으며 아버지 제갈근은 조중을 공격했다. 그러나 왕릉 손례와의 교전에서 전종이 패배하고 5월에 사마의가 형주에서 반격을 지휘함으로 북벌은 끝내 실패했다. 「제갈각전」에서는 참전여부를 기록하지 않고 「오주전」에서만 제갈각의 참전이 확인되는데 중장랑 진황 등 10명의 장수가 죽었던 격전으로 기록하니 아마 활약이 적었던 것으로 예상된다.

241년 5월, 제갈각의 친구이자 오나라의 태자인 손등이 병사했다. 젊고 총명해서 아버지 손권을 비롯한 모두의 기대를 받고 있던 손등이지만 제대로 활약을 펼치기도 전에 죽은 것이다. 특히 제갈각 입장에서는 친구의 죽음 뿐만이 아니라 친구의 즉위로 마음 편하게 능력을 펼칠 수 있었던 기회가 물건너간 셈이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손등의 죽음은 제갈각의 득세에 큰 도움이 된 이궁지쟁의 기폭제가 되었다.[21]

6월, 친구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아버지 제갈근이 죽었다. 이미 제갈각은 후작위가 있었고 동생 제갈교는 제갈량의 양자로 갔다가 요절했으므로 동생 제갈융이 제갈근의 작위를 이어받았다.

243년 6월, 제갈각은 육안을 다시 습격해서 위나라의 장수 사순의 진영을 깨뜨리고 그의 백성들을 수용했다. 이 또한 「제갈각전」에서는 등장하지 않고 「오주전」에서만 확인되는데 비교적 소규모의 국지전으로 추측된다.

다만 『 진서』 「선제기」에 의하면 제갈각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변경을 습격하며 도발을 감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갈각이 환현에서 주둔해서 지속적으로 변경지역을 괴롭혔다.[22] 어그로가 만만찮게 심했던 모양인지 제갈각의 습격을 중단시키기 위해 사마의는 몸소 출정해 공격하고자 했다. 의논하는 자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적(賊)이 견고한 성에 의거해 곡식을 쌓아놓고 관병(官兵-위나라 군대)을 유인하고자 하는 것이며 지금 외떨어진 군사로 멀리 공격해왔으니 그들의 구원군이 필시 당도할 것이라 진퇴가 쉽지 않고 유리한 점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마의는 반박했다.
“적(賊)의 장점은 물에서 싸우는 것이니 이제 그들의 성(城)을 공격해 그 변화를 살펴야 하오. 만약 그들이 자신의 장점을 쓴다면 성을 버리고 달아날 것이니 이는 조정(廟)이 승리하게 되는 것이오. 만약 감히 성을 고수한다면 겨울이라 호수가 얕아 배가 다닐 수 없어 사세상 필시 물을 버리고 서로 구원할 것이니 이는 그들의 단점을 쓰는 것이 되어 또한 우리가 유리하오.”
243년 9월, 사마의는 몸소 제군을 이끌고 제갈각에게 향했다.

243년 12월,[23] 서현에 당도한 사마의군은 제갈각을 공격하고자 했다. 손권은 병사를 출동시켜 맞대응하고자 했으나 점을 쳐보니 형세를 살피는 자가 오히려 불리할 것이라 예견되었다. 그래서 손권은 제갈각을 시상으로 옮겨 주둔시켰다. 「선제기」에서는 제갈각이 비축한 군량을 불태워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고 서술하는데 아마 시상으로 옮기라는 손권의 명령으로 인한 행동으로 추정된다. 결과적으로 사마의의 예측이 맞았던 셈이지만 점쟁이의 도움을 통해 이뤄진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좀 미묘한 편이다(...).

다만 사마의의 서현 위협은 『 자치통감』에서 기록되지 않고 6월의 제갈각의 육안 습격만 기록되어 있다. 물론 서현 위협 자체는 「오주전」을 통해 교차검증이 가능해서 의심할만한 기록이 아니다.

지명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진서』 「천문지」에 따르면 사마의가 대군을 보내 제갈각을 공격하자 그 성을 버리고 급히 달아났다고 하며, 이를 인용한 「개원점경」에 따르면 사마의가 제갈각이 주둔해 지키고 있어서 대군을 보내 토벌하자 그 성을 버리고 급히 달아났는데,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만여 명에 달했다고 표를 올렸다.

2.3. 외전: 승상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다

손권의 뜬금없는 행동으로 양국은 제갈각과 사마의의 대결이라는 대규모 교전을 회피했으나 계속해서 위나라를 도발해온 정황이 존재하는 제갈각은 고작 점 때문에 본인을 시상으로 옮긴 손권의 행동이 매우 거슬렸던 모양이다. 제갈각은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 이를 항의했다.

편지의 전문은 「제갈각전」에 기재되어 있는데 워낙 장문이라 부분씩 끊어서 해석하는게 이롭다.
"양경숙[24][25](楊敬叔)이 고아한 이론을 강술하여 전했는데, 바야흐로 현재 인물들은 그것을 글로 새겼으며, 도덕과 사업을 지키는 자는 또 몇 명 없으므로 마땅히 서로 돕고 보조하여 위로는 국사(國事)를 일으키고 아래로는 서로 중히 여기고 아껴야 합니다. 또 세상 풍속이 서로 훼방하기 좋아하여 이미 성취한 것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중도에 손상을 입도록 하니, 장차 앞으로 나아가려는 무리들은 마음으로 즐거워하며 웃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일을 듣고 탄식했으며 진실로 혼자 손을 치며 격분하였습니다.
여기서 강조된 내용만으로도 제갈각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제갈각은 손권의 조치로 빡친 셈이고 별 연관없는 육손에게 좋게 보면 불평, 나쁘게 보면 화풀이하는 것이다. 마지막 두 문장은 제갈각이 편지를 쓰면서 감정을 말그대로 쏟아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군자는 한 사람에게 완전히 갖추기를 요구하지 않으며, 공자의 문하생 대략 3천 명 중에서 특별하게 돌출되는 72명, 자장(子張)·자로(子路)·자공(子貢) 등 70명의 무리에 이르러서는 아성(亞聖)의 덕을 갖추고 있지만, 각기 단점이 있어 전손사(?孫師: 자장)는 편벽되고, 중유(仲由: 자로)는 법을 만들지 못했고, 단목사(端木賜: 자공)는 자신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어찌 이들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결점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중니(仲尼: 공자)는 이런 제자들이 갖추고 있지 못함을 문제 삼지 않고 손을 이끌어 친구로 간주했으며, 사람들의 단점 때문에 그들의 단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제갈각은 공자의 예를 들어서 단점에 불구하고 공자는 제자들을 모두 이끌었다고 말한다. 매우 직관적인 부분인데 공자가 이러한 제자들의 단점에 불구하고 모두를 수용했는데 왜 손권은 자기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느냐고 불평하는 것이다.
게다가 현재는 인재를 채용함에 있어 마땅히 지난 옛날보다 관대해야 하는데, 무엇 때문입니까? 현재의 시세는 복잡하지만 훌륭한 인물은 적으며 국가의 각 부처의 관리들은 항상 충족되지 않아 고통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만일 성정이 사악하지 않고 재력을 다하려는 뜻이 있으면, 곧 임용을 장려하여 본래의 직책에서 재능을 발휘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작은 것에서는 취할 만한 재능이 있지만 개인적인 행동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 모두 마땅히 너그럽게 용서해야지 하나하나 꾸짖어서는 안됩니다.
상당히 재미있는 대목으로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만 봐도 240년대가 되면 이전까지 무시당했던 능력치 70대, 80대의 인물들이 초특급 인재로 취급되는데 제갈각 또한 인재들이 줄어들고 있음을 주목한다. 그리고 능력이 있고 사악하지 않으며 노력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당연히 임용을 장려해야한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서 언급하는 "능력있는" 인물이 누구일지를 고려하면 상당한 자뻑발언이라 할 수 있다. 거의 제3자식 주장으로 자신을 찬양하는 식인데 지금봐서는 상당히 귀엽다 평할 수 있겠지만 당사자인 육손으로서는 황당했을 듯.
그리고 재능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세미하게 논의하고 가혹하게 요구하는 것을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가혹하게 요구하게 된다면 옛날의 현인과 성인도 오히려 완미(完美)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그들과 거리가 먼 사람들에 있겠습니까? 때문에 도덕으로써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곤란하며, 보통 사람의 표준으로서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쉽습니다. 이와 같으면 현명한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간에 알 수 있습니다.
뒷대목과 거의 동일한 의도성을 가졌는데 결국 "성격이 나쁘더라도 능력좋은 자신을 써야한다"는 것이다(...).
왕조 말년 이래부터 사대부, 가령 허자장(許子將: 허소)의 무리들 중에서는 더욱 서로 비방했기 때문에 어떤 때는 화를 야기시키기도 했는데, 이 일이 일어나게 된 까닭을 살펴보면 크게 원수가 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을 억제하는 예절은 다할 수 없으면서 오로지 다른 사람에게는 바른 도의로써 질책한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가 예의에 부합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복종하지 않습니다. 공정한 도의로써 다른 사람을 꾸짖으면 사람들은 참아내지 못합니다. 내심으로는 다른 사람의 행동에 복종하지 않고, 겉으로는 다른 사람의 질책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서로 원수가 안될 수 없습니다. 서로 한 차례 원수가 되면 소이들이 그 중간에 모이게 됩니다. 두 사람 사이에 모이게 되면 뜬소문이 여러 차례 전해지며 나날이 참언이 쌓여 혼란스럽게 뒤섞여 이르게 됩니다. 비록 지극히 현명하고 매우 가까운 사람이라도 이 말을 듣게 된다면 스스로 진위를 결정짓기 어려운 것인데, 하물며 이미 틈이 생겼으며, 게다가 사리를 명백히 할 수 없는 자는 어떠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장이(張耳)·진여(陳餘)는 서로 피를 흘리는 지경에 이르렀고, 소육(蕭育)과 주박(朱博)이 끝까지 좋은 사이가 될 수 없었던 것은 본래 이로부터 말미암은 것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작은 과실을 버리지 않고 미미한 일에서 서로 꾸짖으며, 이것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가가호호 원수가 되어 한 나래에 품행이 완전한 선비는 다시 없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초한쟁패기 장이와 진여는 당대에도 우정의 덧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되었고 후한의 소육과 주박의 경우에는 서로를 천거하며 관직길에 오른 친구 사이였지만 한순간 틀어져서 다시는 화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자신을 중히 써달라고 요구하는 글에서 이 둘을 언급한 것은 "나를 안쓰면 둘도 없는 웬수가 될 수 밖에 없다"라고 협박하는 셈인데 육손 입장에서 이 편지는 둘도 없는 발암물이었을 것이다( 이 편지에 대한 대략적인 해설).

평소에 온후한 성격을 가진 육손이지만 이런 발암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인지 「제갈각전」에 의하면 육손은 이 편지를 받은 후로부터 제갈각을 책망했다고 한다. 이에 제갈각은 육손의 취지를 칭찬했다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육손과의 관계회복을 위한 행위로 보인다.
"나보다 높은 관직에 있는 자에게 반드시 받들어 함께 승진하고, 나보다 낮은 관직에 있는 자는 도와줍니다. 지금 당신을 보니, 기세는 윗사람을 능멸하고 있고, 마음은 아랫사람을 멸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덕행의 기초를 안정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서』 「육손전」에 기재된 육손의 서신.
위의 단양 평정에 대한 가설과 달리 제갈각을 제갈각의 오만함을 비판하는 이 서신은 제갈각의 서신에 대한 답변내지 반응이라는 추측이 존재한다.

재미있는 점은 245년에 승상 육손이 화병으로 죽자 제갈각은 대장군으로 승진했으며 부절을 받고 육손을 대신해서 형주자사를 맡았다. 서로간 관계가 상당히 미묘한 시기에 제갈각이 거의 대놓고 육손을 승계한 셈이다. 「제갈각전」에서는 육손의 죽음을 다루며 "때마침"이란 표현이 등장하는데 어지간히 제갈각과 육손 사이가 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약간 외전격 이야기로 「육항전」에 의하면 246년에 육항은 입절중랑장으로 승진하여 제갈각을 대신해서 시상에 주둔했다고 한다. 손권의 조치에 좀 많이 빡친 모양인지 제갈각은 시상을 그리 관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시상은 제갈각이 떠난 이후에 "매우 심하게 파괴되어" 있었다고 한다. 임지에 도착한 육항은 모든 성벽을 다시 보수하고 집과 담장을 수리하며 오두막집에 살면서도 과일 나무와 뽕나무조차 훼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훗날 제갈각이 시상을 방문했을 때 모든 것이 달라보여서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고 한다.

2.4. 이궁지쟁: 아들을 희생하여 살아남다

242년, 손등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삼남이 손화가 태자로 세워졌다. 그러나 손권은 8월에 손패를 노왕으로 책봉했는데 손권은 손패를 워낙 총애해서 사실상 태자인 손화와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한다. 이에 오의 조정은 두 파벌로 갈라져서 손화를 지지하는 손화파와 손패를 지지하는 손패파로 나뉘어졌다. 제갈각은 육손과 함께 손화파였다.

사실 제갈각은 손화파 인물 중 관직상 육손 다음으로 높은 인물이었고 손화의 본처 장비(張妃)의 외삼촌이었던만큼 손화파의 그 어느 누구보다 깊게 가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손화파와 손패파 막론하고 관여한 인물 대부분이 갈려나간 상황에서 거의 유일하게 멀쩡히 살아남은 것을 보면 제갈각이 처신이 굉장히 훌륭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오랫동안 변방에서 조용히 지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2차 매체에서의 막무가내 이미지와 달리 훨씬 더 간교한 측면이 있었다. 사마의 그늘 아래서 활동하며 독자적인 활약은 251년 이후에나 펼친 사마사와 달리, 홀로 매서운 오나라의 정치판을 헤쳐나간 것은 제갈각 본인의 능력이었다. 만약에 제갈각의 정치 능력이 조금만 부족했더라도 험악하고 살벌한 이궁지쟁을 헤쳐나가지 못하고 훨씬 더 일찍 죽었을 것이다.

워낙 조용히 지낸 탓인지 「제갈각전」에서는 이궁지쟁에 대한 기사가 별로 없고 거의 바로 손권이 후사를 부탁하는 기록으로 스킵한다. 「오주전」에서도 마찬가지로 제갈각에 대한 내용은 243년에 시상으로 옮겼다는 기사 이후에는 이궁지쟁이 끝난 시점인 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이다.

기록이 이렇게 적으니 그냥 쥐 죽은 듯이 지내면서 운좋게 넘어간 것이냐는 말이 나올 수 있는데, 그게 결코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는 기록이 있다. 「제갈각전」에 의하면 제갈각의 아들 기도위 제갈작은 어느날 노왕 손패와 친근하게 굴며 손패파에 가담했다. 손권은 이를 보고 제갈각에게 아들을 재교육해야한다고 충고했는데 제갈각은 즉시 제갈작을 독살해서 자칫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을 잘 넘겨 손권의 눈밖에 나지 않았다. 처세를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제갈각의 행동력과 재치를 보여주는 반면 뒤틀린 제갈각의 심성을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2.5. 250년: 탁고대신(託孤大臣), 손권이 뒤를 맡기다

250년, 손화파와 손패파의 전쟁이었던 이궁지쟁의 최후 승자는 의외로 어린 황자 손량이었다. 손패파의 음모를 알게된 손권은 손패에게 자살하도록 지시했으나 손화를 총애한 것도 아니어서 손화를 폐하고 유배보냈다. 11월에 손권은 손량을 태자로 삼았다.

손권에게 중병이 생기자 제갈각은 대장군의 신분으로 태자태부를 겸임하도록 하고 중소령 손홍[26]은 태자소부를 맡아서 태자 손량을 보좌하도록 했다.

251년, 손권은 병상에 누웠다. 손량이 아직 8살에 불과함으로 의탁할 인물이 필요했는데 신하들 모두 제갈각을 추천했다. 황족 손준은 표를 올려서 제갈각의 기량이라면 황제를 보좌하며 정치를 하기에 충분하고 큰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27] 손권은 고집이 강한 제갈각을 좋아하지 않아서 스스로 멋대로 할 것이라 의심하며 그를 꺼리고 있었다. 손준은 말했다.
"현재 조정의 신하 가운데 재주로 제갈각에 미치는 자가 없습니다."
이에 손권은 무창에 있는 제갈각을 불렀다. 손권이 위독해지자 제갈각 등을 병상으로 불러서 침대 아래에서 조서를 받도록 했다.

손권은 조서에서,
"나의 병세는 절망적이다. 아마 여러분과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일을 여러분에게 부탁한다"
라고 말했다. 제갈각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 등은 모두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므로 응당 죽음으로서 조서를 만들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정신을 안정되게 하고 생각을 하여 외부 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손권은 관리들에게 조서를 내려 국가 시험 등외에는 모든 일을 제갈각에게 결재받도록 했다.[28] 또한 회계태수 등윤을 태상으로 삼았다. 등윤은 손권의 사위이자 제갈각의 아들 제갈송의 장인으로 제갈각과 사돈관계였다.

251년 4월, 손권이 세상을 떠나자 대장군 제갈각, 중서령 손홍, 태상 등윤, 장군 여거, 시중 손준를 침실로 불러 뒷일을 맡겼다.

손홍은 제갈각과 사이가 좋지 못해서 손권의 죽음을 은폐하고 거짓조서로 제갈각을 죽이려했다. 이를 포착한 손준은 제갈각에게 보고했다. 제갈각은 손홍에게 어떤 일에 대해 자문을 부탁하지만 손홍이 제대로 답하지 못하자 그 자리에서 주살했다. 그후 손권의 죽음을 선포하고 모두와 함께 상복을 입었다. 제갈각은 공안독 동생 제갈융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달 16일 을미시(乙未時)에 대행황제(大行皇帝)가 만국(萬國)을 버리고 떠나갔고, 지위의 높고 낮은 신하들은 슬퍼하며 애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우리 부자와 형제에 이르면, 한결같이 특별한 은혜를 받아 단지 평범한 신하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매우 슬퍼 간과 심장이 찢어지는 듯하다. 황태자는 정유일(丁酉日)에 황제의 지위에 즉위하니, 나의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며 공존해 취할 바를 모르겠다. 내 몸은 임종할 때 남긴 명령을 받아 어린 군주를 보좌하고 있는데, 스스로 사사로이 헤아려 보면 재능은 박육(博陸;?光)에 미치지 못하는데 희공(嬉公)이 어린 성왕(成王)을 보좌하여 제후들의 알현을 받는 것같은 중임을 받아 승상이 한왕조를 보좌한 효과를 더하는 일을 두려워하고, 선제께서 중임을 맡긴 영명함을 손상시키게 될 것이 두렵다. 이때문에 걱정하며 두려워 매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위에 있는 자를 싫어하여 행동하면 주시를 받게 되는데, 언제나 이것을 바꾸겠는가? 현재 어리석고 노둔한 자질로 군주를 보좌하는 고관의 위치에 있으면서 어려움은 많고 지모는 부족하고, 임무는 무겁고 모략은 얕으니 누가 입술과 치아처럼 되어 돕겠는가? 가까이로는 한왕조의 시대에 연왕(燕王) 단(旦)과 개장공주(蓋長公主)가 결탁하여 상관걸(上官桀)이 곽광을 살해하려고 했던 변란이 있었다. 현재 나의 처지는 그때와 거의 같은데, 어찌 감히 편안히 머뭇거리고 있겠는가? 또 동생이 있는 곳은 적과 경계가 교차되어 있으니, 이러한 때에는 군수물자를 정돈하고 장수와 병사들을 격려하고 평상시보다 경계와 방비를 강화하고, 만번이라도 나와 함께 죽을 생각을 하여 한 번의 삶을 돌아보지 않음으로서 조정에 보답해 조상에게 부끄러움이 없어야만 한다. 또 각 장수들은 각기 자신의 지역을 수비하며 적군이 황제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임의로 침입하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변방의 각 관소에는 이미 별도로 약속한 문서를 내려 수하의 독(督)이나 장(將)은 임의로 자신의 방위 임무를 버리고 직접 달려오지 못하게 했다. 비록 마음속에는 참지 못할 처참한 심정이 자리하고 있을지라도 공의(工義)로 사사로운 감정을 빼앗아 백금(伯禽)도 상중에 출정했던 것이다. 만일 공의를 어겼다면 단지 작은 잘못이 아니었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의 모양으로 소원한 사람을 바로잡는데, 이것은 옛사람들이 분명하게 경계했던 것이다."
거의 쓸데없는 소리를 하며 육손의 화를 돋우던 이전의 편지와 달리 진심으로 손권의 죽음을 슬퍼했는지 상당히 진중한 내용으로 보인다. 실제로 손권은 어려서부터 제갈각과 이런저런 일화를 뽑아내며 놀던 친구 아빠이자 제2의 아버지와 비슷한 관계였을 것이다. 훗날 사이가 좀 미묘해진 후대의 기록들을 읽다보면 둘 사이가 허물없이 친했던게 확연해보이는 어렸을 때의 일화가 오히려 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할 정도.

2.5.1. 외전: 노장 여대에게 오만함을 뽐내다

손권의 호출로 무창으로부터 제갈각이 막 길을 떠나려 하던 참에 91세의 상대장군 여대가 경계하며 말했다.
"세상은 바야흐로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대는 매사에 반드시 열 번 씩 생각하십시오."
제갈각은 답하였다.
"옛날에 계문자(季文子)는 세번 생각한 다음에 실행하였고, 부자(夫子)는 이르기를 '두 번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라 이야기했는데,[29] 이제 그대는 저 제갈각에게 열 번 생각하라고 하니 저 제갈각이 열등하다는 것이 분명하오."
여대는 대답할 말이 없었고, 모두 그가 실언한 것이라 여겼다.

후대에도 이 일화를 어이없게 여긴 모양인지 우희는 아예 평론을 내렸다. 이 평론은 『 자치통감』에서 발췌했다.
"무릇 천하를 가지고 부탁한다는 것은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신하로서 군주의 권위를 시행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 두가지 지극한 것을 겸하고서 만 가지의 기틀을 총괄하며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여후[30]는 나라의 으뜸가는 기로인데, 뜻과 도량은 놃고 먼 곳에 있어서 겨우 열 번 생각하라는 말로써 그에게 경계하였으나, 열등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져서 거절당하였다. 이것은 원손[31]의 소홀함이며 기민함과 영명함이 모두 찾추어지지 않은 사람임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에 열 번 생각하라는 뜻을 통하여 당시 해야 할 일에 대해 널리 자문을 구하고, 좋은 일을 번갯불보다 빨리 듣고, 간하는 소리를 바람이 옮기는 것보다 더 급하게 좇았다면, 어찌 전당에 엎드려져서 흉악한 녀석의 칼에 맞아 죽었겠는가?[32]

세상 사람들은 그의 뛰어난 말재주를 기이하게 여겼고, 급작스럽게 볼만하다고 하고, 여후가 대답하지 못한 것을 구차하였다고 비웃었지만 안전함과 위험한, 처음과 나중의 염려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봄기운의 번성함을 즐긴 것이며, 가을 열매가 입에 달다는 것을 잊은 것이다.

옛날에 위나라 사람들이 촉을 정벌할 때 촉 사람들이 방어하는데, 정병이 엄하게 갖추고 바로 출발할 즈음 비의는 바야흐로 내민과 바둑을 두었는데 속으로 싫어하거나 귀찮아하는 기색이 없었다. 내민은 반드시 적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고, 그는 밝은 전략을 마음속에 확실하게 정해놓고 있기 때문에 겉모양에서 아무런 근심하는 기색을 찾아보지 못하였다고 말하였다.[33]

하물여 장녕[34]조차도 '군자가 일을 맡아서 다가갈 때 두려워하여야 꾀를 잘 내어 성공한다'고 하였으니, 촉은 풀 같이 작은 나라인데 바야흐로 큰 적을 향하여 계획하는 바가 있고 오직 지키며 싸우기만 한다고 하여도 어찌 자기를 자랑하고 여유를 가지며 편안히 하면서 근심이 없었겠는가!

이는 비의의 성품이 관대하고 간결한 것 때문이지만 세세한 것을 막지 않아서 갑자기 항복한 사람인 곽순의 해침을 당하게 되엇으니, 어찌 저쪽에서 징조가 보이고 이쪽에서 화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과거에 장녕이 비문위[35]를 논평하였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은 원손이 여후의 충고를 거역한 것을 보니, 두 가지 일은 같은 성질의 것이고 모두 세상을 위한 거울이 될만하다."
우희는 치졸한 제갈각이 여대를 거역한 것을 두고 가루같이 까며 반대로 한없이 관대한 비의가 오히려 관대함 때문에 곽순에게 암살당한 일을 언급하면서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같은 결말을 맞이했으니 둘 다 "세상을 위한 거울이 될만하다"는 평론을 내렸다.

하여튼 성공가도에 취한 제갈각은 노장 여대의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36] 결국 이 일화는 후일 주살당하는 결말을 예고하는 복선으로 보이게 된다.

3. 손량-제갈각 시대(252년~253년)

3.1. 손량의 즉위: 연호는 건흥(建興)이다!

252년 4월 태자 손량(孫亮)이 즉위했다. 손량이 즉위하면서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쳤는데 이는 숙부 제갈량 촉한 승상으로 군림하던 시절의 연호와 동일한 연호다. 유비의 탁고대신으로 나라의 실권을 장악했던 숙부를 의식하고 지은 연호로 보인다.

손량은 대장군 제갈각을 태부로 삼고, 등윤을 위장군으로 삼았으며, 여대를 대사마로 삼았다. 제갈각은 시청하는 제도를 혁파해서 교관을 철혜했다.[37] 또한 미납한 부세를 면제했으며, 관세를 받는 것을 없애고, 은택을 높였다. 제갈각의 조치로 인해 많은 백성들 중 즐거워하지 않은 이가 없으니 제갈각이 다닐 때마다 백성들은 제갈각을 보고 싶은 마음에 목을 늘렸다고 한다.

「위요전」에 의하면 위소를 태사령으로 임명하고 『오서』를 편찬하도록 했다고 한다.

3.1.1. 외전: 손분에게 편지를 보내서 위협하다

제갈각은 친왕들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 거쳐하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제왕 손분을 예장으로 옮기고, 낭야왕 손휴를 단양으로 옮겼다. 손분은 거처를 옮기는 것을 원하지 않자 제갈각은 손분에게 서신을 보내며 말했다.
"제왕(帝王)의 존귀함은 하늘과 같은 지위입니다. 이 때문에 제왕은 천하를 집으로 여기고 부모와 형제를 신하로 여기며, 사해(四海) 안의 사람들은 모두 그들의 노복입니다. 원수이지만 선행이 있으면 추천하지 않을 수 없고, 친척이지만 악행이 있으면 주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천명을 이어받아 만물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국가를 앞에 두고 자신을 뒤에 두는 것으로, 아마도 성인이 세운 법도이고 백대에 바뀌지 않는 이치인 것입니다.

옛날 한(漢)왕조가 막 창립되었을 때, 많은 자제들을 왕으로 삼았으며, 이들의 세력이 매우 강하여 항상 불법적인 행동을 하였으므로 위로는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했고 아래로는 골육상잔(骨肉相殘)의 비극으로 치달았습니다. 이 이후로 이 일을 인용하여 경계로 삼고 크게 꺼리게 되었습니다. 광무(光武) 이래부터 각 왕들에게 규제가 있게 되었는데, 오직 궁궐 안에서만 스스로 즐길 수 있을 뿐, 백성들과 접촉하거나 정사에 간여할 수 없게 했으며, 왕들과 왕래함에 있어서도 모두 엄격한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 안전해지고 각각 자신의 복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전 시대의 성공과 실패의 실례입니다. 가까이로는 원소(袁紹)와 유표(劉表)가 각기 국토를 점유하고 있었으며, 토지는 협소하지 않고 사람들은 허약하지 않았는데, 적자와 서자를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 종묘의 제사를 끊어지게 했습니다. 이것은 천하의 어리석은 자든 지혜로운 자든 간에 공동으로 탄식하고 고통스러워한 것입니다.

고인이 된 황제께서는 옛 것을 보고 오늘날의 일을 경계하였고, 이러한 근심을 싹틔워 발전시킨 것은 천 년 후의 일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질병으로 누워있을 때, 각 왕들을 나누어 파견하여서 각기 일찍 봉읍으로 돌아가도록 명령했으며, 조서는 매우 간절했고 법률은 매우 엄격했습니다. 그가 경계하여 명령한 것은 이르지 못하는 바가 없으며, 확실히 위로는 종묘를 안정되게 하고 아래로는 각 왕들을 보전하여 백대가 서로 이어지게 하며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후회가 없도록 하려고 한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위로는 주나라 시대의 태백(太伯)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였고, 중간에는 하간헌왕(河間獻王: 유덕)과 동해왕(東海王: 유강)의 공경하는 기절을 생각하고, 아래로는 교만하고 방자하고 음란함을 눌러 경계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제가 듣기로는 당시은 무창(武昌)으로 온지 오래되지 않아, 여러 조서를 어기고 제도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독자적으로 많은 장수와 병사들을 동원하여 궁실을 보호했다고 합니다. 또 주위에서 항상 따르는 자들로 죄나 허물이 있는 자는 응당 표를 올려 보고하여 담당 관리에게 넘겨주어야만 하는데, 마음대로 사사로이 죽여 사건을 명백히 하지 않았습니다.

대사마(大司馬) 여대(呂岱)가 선제의 조서를 직접 받아 대왕을 보좌하여 인도하는 일을 맡았지만, 당신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쓰지 않았으므로 그로 하여금 근심하고 두려워하도록 했습니다. 화기(華錡)는 선제의 측근에 있던 신하로 충성스럽고 선량하며 정직한 사람이므로 그가 진술한 이치는 마땅히 받아들여 사용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의 의견을 듣고 화기에게 화를 내며 그의 말을 붙들어 매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중서(中書) 양융(楊融)은 직접 조서를 받았고, 그가 담당하고 있는 사무는 공경스럽고 엄숙한데도 당신은, ‘나 스스로 금령을 듣지 않는데 당신이 나를 어떻게 할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었을 대, 크고 작은 관리들은 놀라고 이상하게 여겼으며 마음이 섬뜩함을 느끼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밝은 거울은 형체를 비출 수 있고, 옛 일은 현재의 일을 알 수 있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노왕을 경계로 삼아 그 행동을 바꾸어 조심하고 근신하며 진심으로 조정을 공경해야만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당신은 구하여 얻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선제의 법제와 가르침을 버리고 있어서 경솔하고 오만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신하는 차라리 대왕을 저버리지 감히 선제께서 남긴 조서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고, 차라리 대왕에게 원망과 질시를 받지 어찌 감히 존귀한 군주의 위엄을 잊어버리고 조서를 하여금 번신(藩臣)에게 실행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고금의 정확한 도의이며, 대왕께서 명백히 한 것입니다.

복이 온 것은 원래 말미암은 것이고, 화가 오는 것은 과정 중에 있는 것입니다. 재앙이 발전하는 과정 중에서 걱정하지 않으면 장래에는 후회할 가능성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노왕이 일찍 충직한 말을 받아들여 놀라고 두려워하는 생각을 품었다면 복을 끊임없이 향유할 수 있었을 것이며, 어찌 멸망의 재앙이 있겠습니까? 좋은 약은 입에 씁니다. 오직 질병을 앓고 있는 자만이 단맛을 알 수 있습니다. 충성스런 말은 귀에 거슬립니다. 오직 통달한 자만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현재서 제갈각(恪) 등은 진심으로 대왕(大王)을 위해서 위태로움의 싹을 제거해 행복과 길상의 근원을 확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자신의 말이 분수에 넘음을 알지 못했는데, 세 번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손분은 이 편지를 받고 두려워하니 즉시 남창으로 이사를 갔다.

요약하자면, "옛부터 황족들이 군란을 일으키며 말썽을 부리니 그 싹을 자르려 하는데 만약 이에 저항한다면 죽일 수 밖에 없으니 빨리 이사가시는 게 나을 겁니다."가 되는데 이를 듣고 두려워하지 않는 황족이 어디에 있을까 싶다. 딱히 의미있는 에피소드는 아니지만 거만한 제갈각의 행보의 예시로 봐도 무방하다. 하나 더하자면 저 마지막 문단에서 서술한 문제의 원인이 자신의 현재 모습이고, 결과는 결국 자신의 미래모습이 되었으니 어지간히 내로남불도 심했다고 볼 수 있겠다.

3.1.2. 외전: 손화의 죽음을 초래하다

제갈각은 이궁지쟁 와중 상당히 조용히 보내며 사실상 손화의 몰락을 관망한 편이지만 손화의 비 장비(張妃)의 외삼촌으로써 근본적으로 손화파였다. 손화파였던 제갈각이 실세로 군림하자 장비는 황문 진천을 보내서 건업으로 갈 수 있도록 상소를 보내고 제갈각에게 안부를 묻도록 했다. 제갈각은 진천에게 말했다.
"나를 위해 비에게 전하시오. 때가 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뛰어넘게 해줄 것이라고 하시오."

이 말이 누설되었고, 제갈각이 천도를 위해서 무창의 궁을 수리하자 민간에서는 제갈각이 손화를 다시 황제로 삼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후 제갈각이 손준에게 주살당한 뒤 손준이 이 말을 트집잡아서 손화를 죽이게 되었으니, 결국 손화의 죽음을 초래한 셈이 되었다.

참고로 장비는 손화의 죽음을 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좋은 일이든 흉한 일이든 간에 저는 당신을 따라야만 합니다. 끝까지 혼자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장비 또한 손화를 따라서 자살했다고 한다.

3.2. 사마사와의 대결

3.2.1. 252년: 동흥에서의 대격돌

3.2.2. 253년: 합비신성에서 몰락하다

3.3. 몰락을 재촉하다

합비신성 전투 이후 제갈각의 행보는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인데, 그는 동흥제 전투에서 패한 사마사와 정반대의 조치를 취한다. 바로 패배의 원인을 본인이 아닌 남에게 전가하는 것이었다.

253년 8월, 제갈각군이 끝내 건업에 돌아왔다. 병사를 배열해서 관소로 돌아온 제갈각은 중서령 손묵을 불렀다. 제갈각은 사나운 목소리로 손묵을 질책했다.
"당신들은 어떻게 감히 망녕되게도 몇 차례나 조서를 작성했소?"
오군의 후퇴가 극악으로 느려진데 있어서 수많은 후퇴조서가 한꺼번에 도착해서 후퇴로가 꼬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를 조율해야하는 임무는 총사령관인 제갈각에게 있는 바였는데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에도 결국 일이 꼬이니 손묵을 질책한 것이다. 손묵은 두려워하며 병을 핑계로 집으로 돌아갔다.

전투에서 돌아온 제갈각은 오히려 선조[38]에서 상주하며 임명한 관원들을 일제히 파면시키고 다시 선발했다. 본인의 위엄을 되찾기 위해 제갈각은 관원들을 자주 책망하고 죄를 주기 일쑤였다. 제갈각을 만나는 사람마다 놀라서 숨을 죽이지 않는 인물이 없었다. 또한 숙위를 바꿔서 본인과 친한 인물을 임용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제갈각은 병사들을 다시 무장시키고 청주와 서주를 다시 공격하려고 했다. 선치와 동흥에서의 승리로 절정에 이르던 제갈각의 인기는 곤두박질치고 백성은 물론 대신들마저 제갈각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이 일련의 행동은 앞서 말했듯이 사마사의 행동과 상반된다. 사마사는 최종적으로 패전의 책임이 본인에게 있음을 인정해서 형식적인 것이었을지언정 자신의 작위를 한직급 강등하고, 동생 사마소를 처벌하는 것 외에는 부하들에 대한 처벌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덕분에 사마사는 부하들의 신망을 얻었으며 패전에도 불구하고 권위가 심하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에 비해 제갈각은 반대로 패전의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며 오히려 적반하장의 태세로 위엄을 되찾기 위해 죄없는 사람을 꾸짖고 오히려 친한 사람을 마음대로 임용하는 등 부정부패를 행한데다가 한 술 더 떠서 다시 전쟁을 준비했다. 본인의 잘못을 시인해서 스스로 관직을 깎거나 권위를 포기하는 행동을 보여도 지지도 하락은 피할 수 없는 부분인데 거의 자폭을 목표로 둔 듯한 제갈각의 일련의 행동은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흔히 추측하기로는 성공가도의 인생을 살아온 제갈각이 합비신성의 패배를 결코 인정할 수 없어서 거의 일련의 멘탈붕괴 때문에 폭주하기 시작했고, 다시 한 번 동흥에서처럼 승리를 쟁취해서 지지도를 올리려 했다는 것이다.

만약 이게 실로 제갈각의 계획이었다면 교만해질대로 교만해진 상태에서의 대패는 정치인이자 사령관이자 지략가인 제갈각을 완전히 망가뜨린 셈이었다. 이궁지쟁 당시 살아남아 베테랑 정치인으로의 기량을 증명하고 여러 번 날카로운 식견을 선보이며 동흥제 전투의 승리를 이끈 명신 제갈각은 이렇게 사라졌다. 끝에는 더 이상 처신이고 뭐고 할 생각없이 권위로 밀어붙이는 방법밖에 모르는 찌질이만이 남은 격이었다.

허나 대부분 호족들로 이루어진 오나라 조정은 외부인 제갈각의 폭주를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계속 밀어붙일 뿐인 제갈각의 폭주는 마치 꾹꾹 눌려진 스프링처럼 이제 반동을 맛봐야했다. 그 반동을 주도한 인물은 본인을 탁고대신으로 추천한 손준이었다.

3.4. 253년: 손준에 의한 주살

손준은 대부분 백성들이 원망하는데다가 많은 이들이 제갈각을 싫어하기 때문에 손량에게 제갈각이 변란을 일으키려한다고 고했다.

10월, 손준과 손량은 제갈각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했는데, 계책의 일환으로 연회를 베풀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갈각을 이 연회로 초청했다.

「제갈각전」에 의하면 제갈각도 낌새가 상당히 이상했던 모양이다. 손량과 만나기 전날밤, 제갈각은 정신이 어지러운 나머지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아침이 밝아서 제갈각은 세수하려 했으나 물에서 비린내가 난다는 소리를 들었다. 시종들에게서 받은 의복에서도 역한 냄새가 났다. 제갈각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서 물과 옷을 바꿨는데 역한 냄새는 여전했다고 한다.

제갈각은 단장을 마치고 걸어나오자 집안에서 기르는 개가 제갈각의 옷을 물고서 가는 것을 놓아주지 않았다. 제갈각은 이를 보고 말했다.
"개가 나를 가지 못하게 하는구나."
그러고선 다시 돌아와서 앉았다. 다시 일어나자 그 개는 다시 제갈각의 옷을 물었다. 제갈각은 시종에게 개를 쫓도록 명하고 마침내 수레에 탔다.

「제갈각전」에서는 과거의 요상한 사건들까지 수록하는데, 예전에 제갈각이 회남으로 출병할 당시[39] 효자가 상복을 입고 제갈각의 안방에 들어와 있었다. 시종들이 제갈각에게 이 일을 고하자 제갈각은 효자를 밖으로 쫓아내라고 문책했다. 효자는 이렇게 말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밖에 서있던 수비병들도 효자가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해서 이 일을 매우 요상하게 생각했다. 제갈각이 밖에 나간 후[40] 관청의 대들보의 중간이 부러졌다. 이 또한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신성에서 출발해서 동흥에서 머물고 있는데 흰 무지개가 제갈각의 배에서 나타났으며 장릉[41]에서 제사지낼 때도 흰 무지개가 제갈각의 수레를 애워쌓았다.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은 이 일화들을 워낙 요상하게 여겼는지 『자치통감』에서는 단순히 "집안에서도 요괴한 일이 생겨서 제갈각은 의심을 품었다"고만 서술한다. 이게 야사집에 나온 일화도 아니고, 『정사 삼국지』같은 상당히 신뢰도 높은 역사서의 본전에서 나온 일화치곤 상당히 괴상한 편이다.

제갈각은 손량을 알현하기 위해서 수레를 궁궐 문앞에 멈췄다. 손준은 이미 휘장 내에 병사들을 매복시켜놨기 때문에 제갈각이 불시에 들어와 일이 탄로날까 두려워 직접 나서서 제갈각에게 말했다.
"사군께서 만일 귀한 몸이 불편하시다면, 이후에 만날 수 있습니다. 제가 주상께 상세히 보고하겠습니다."
손준은 제갈각에게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해서 그의 의중을 떠본 것이다. 그러나 제갈각은 답했다.
"당연히 저는 들어갈 것입니다."
산기상시 장약 주은의 밀서가 제갈각에게 전해졌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오늘 평상시와 다르게 진술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으로 의심스럽습니다."
제갈각은 그제서야 손준의 음모를 깨닫고 떠났다. 아직 궁궐을 벗어나기 전에 등윤을 만났다. 제갈각은 등윤에게 말했다.
"갑자기 복통이 있어서 조정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손준의 음모를 모르고 있던 등윤은 제갈각에게 같이 가자고 권유했다.
"당신은 행군에서 돌아와 아직 만나지 않았으니, 오늘 주상께서 주연을 베풀어 당신을 초청하였고 당신은 이미 문까지 이르렀으므로, 마땅히 힘을 다해서 가야합니다."
제갈각은 잠시 주저했으나 이내 궁궐에 다시 들어갔다. 제갈각은 칼을 차고 신발을 신은 채로 손량에게 인사하고[42] 자리에 앉았다. 술상이 차려지자 제갈각은 의심을 풀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손준은 제갈각에게 말했다.
"사군의 질병이 아직 낫지 않았으니, 당연히 늘상 마시는 약주가 있을 것이니 직접 그것을 마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갈각은 안정하게 되었으며 이미 준비된 술을 마셨다.

「제갈각전」 본전을 읽어보면 위와 같이 등윤이 본의 아니게 제갈각을 연회로 끌고간 것처럼 서술되지만 배송지가 주석으로 첨부한 『오력』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 묘사한다. 『오력』에 의하면 제갈각은 등윤에게 장약과 주은의 밀서를 보여주고 오히려 등윤이 제갈각에게 돌아가자고 권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갈각은 반대하며 말했다.
"손준(孫峻)같은 어린 놈이 무엇을 할 수 있겠소! 다만 술과 음식을 통해서 사람을 해칠까가 두려울 뿐이오."[43]
"어린애 같은 녀석들이 무얼 어쩌겠는가? 바로 술이나 식사를 통하여 사람들을 중독시킬까만 걱정할 뿐이오."[44]
그러곤 약주를 가지고 들어갔다고 한다. 즉, 『오력』에 의하면 제갈각은 등윤의 제안까지 뿌리친 채로 본인의 명을 제촉한 셈이다. 이미 준비한 약주를 가졌다는 부분은 본전과도 내용[45]이 잘 맞물리는 편이고 제갈각의 안하무인 성격과 상식적으로 장약과 주은의 밀서를 받았음에도 등윤의 설득에 연회에 들어간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 『오력』의 내용을 신뢰하는 듯하다. 『자치통감』에서도 「제갈각전」 본전의 내용보다는 『오력』의 내용을 채택했다.

동진 시대 사람 손성은 『오력』의 내용을 옹호하며 무모한 제갈각의 행동에 대해 평했다.
제갈각은 등윤과 친해 정이 두텁고, 장약 등이 소를 올린 것은, 심상치 않은 큰 일이라, 정세상 응당 등윤에게 보여줘서, 함께 안위를 모의해야 했다. 그러나 제갈각의 천성이 강하고 사나우며, 게다가 손준을 본디 업신여겨, 스스로 믿지 않았기에 들어간 것인데, 어찌 등윤이 조금 권했다고 해서, 곧 이 때문에 화를 무릅썼겠는가? 본전보다 오력이 낫다.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이미 술잔이 몇 순배 돌아갔다. 손량이 마침내 물러나자 손준 또한 일어서서 측간에서 긴 옷을 벗고 짧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손준은 나오면서 제갈각을 꾸짖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렸는데 제갈각을 체포하라."
손준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제갈각은 일어나서 칼을 뽑으려 했지만 손준의 칼이 교차해서 내려 제갈각을 여러차례 찔렀다. 제갈각을 호위하던 장약은 옆에서 손준을 찔렀는데, 손준의 왼쪽 손에 상처를 입히는데 성공했지만 손준은 장약을 내려쳐서 오른쪽 어깨를 잘랐다. 제갈각을 호위하던 병사들이 모두 달려나가 전당으로 올라오자 손준은 이들에게 말했다.
"체포하려던 사람은 제갈각이다. 지금 이미 죽었다."
병사들에게 칼을 다시 집어넣으라 명령한 손준은 주변을 치우고 다시 술을 마셨다. 제갈각의 시체는 풀자리로 싸매고 대나무를 허리에 묶어서 석자강의 공동묘지에 던졌다.

향년 51세. 제대로 권력을 잡은지 2년도 안돼서 맞이한 비참한 말로였다.

3.5. 사후

제갈각의 차남 장수교위 제갈송과 삼남 보병교위 제갈건은 어머니를 수레에 태우고 도망쳤다. 손준은 기독 유승을 파견해서 백도까지 추격하여 제갈송을 죽였다. 제갈건은 위나라로 망명하려 했지만 수십 리를 도망간 이후에 추격병에게 체포되었다.[46]

손준은 무난독 시관에게 명을 내려서 제갈각의 동생 공안독 제갈융을 체포하도록 명했다. 시관은 시적, 손일, 전희 등을 파견했다. 병사들이 성을 포위하자 제갈융은 자결했다.

「강표전」에 의하면, 제갈각의 주살에 앞서 공안에서 영험한 악어가 울음소리를 냈고 당대에 동요로 불러졌는데 다음과 같다고 한다.
"흰 악어가 울고, 거북 등(背)은 평평하니, 남군의 성중은 오래 살 수 있지만, 지키다 죽으니 의를 저버리지 않지만 이룬 것이 없어라."
이 말대로 제갈각이 주살되자 제갈융은 가지고 있던 거북 모양 금인장의 등 부분을 깎아서 먹어 자살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제갈각의 외숙이자 도향후 장진, 주은 등의 삼족이 멸해졌다.

이로써 제갈각의 가문은 대가 끊겼다. 그러나 다행히도 제갈각의 동생 제갈교의 가족이 촉한에 남아있었기에 제갈각이 복권된 후 동오로 돌아와 대를 이었다.

3.5.1. 외전: 제갈각의 시신을 수습하도록 요청하다

앞서 서술했듯이 제갈각의 시신은 제대로된 장례없이 석가장의 공동묘지에 버려졌다. 그러나 제갈각의 부하들이 모두 제갈각을 버린 것이 아니라서 장약 주은만 해도 제갈각을 살리려 노력했다. 제갈각의 초라한 말로에 안타까움을 느낀 사람들도 많았던 모양이다.

임회 사람 장균은 제갈각이 황제의 명으로 주살당한지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표문을 올려서 제갈각의 수신을 거두어 장사지내게 해달라고 빌었다.
"번개가 치고 우레 소리를 내는 것은 하루아침을 마칠 정도까지도 계속되지 못합니다. 큰 사람이 불고치고 지나가는 것이 하루 종일 계속되는 일도 아주 드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것을 뒤이어서 구름이 끼고 비가 와서 이것을 통하여 만물을 윤택하게 합니다.

이리하니 천지의 위엄이라도 늘 협진을 지나갈 수 없는 것이니, 제왕이 화를 내도 정리를 다 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신은 미치고 어리석어서 기휘할 줄을 모르니 감히 파멸할 수도 있는 죄를 무릅쓰고 바람과 비와 같은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구합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옛 태부 제갈각은 죄악을 많이 지어 스스로 이멸될 일을 자초하였고, 그의 아버지[47]와 아들 세 사람의 목이 저자에 걸린지 여러 날 되었으며, 본 사람이 수만 명이고, 욕하는 소리는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나라의 큰 형벌로 떨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장로와 아이들도 끝까지 다 보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48]

사람의 정이란 많은 사물에 대하여 즐거움이 지극한데 이르면 애달파하는 것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제갈각이 귀하고 왕성한 것을 보건대, 세상에서 그와 더불어 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이 없어서 태보[49]의 자리에 있으면서 몇 년의 세월을 지내왔으나 지금 주멸되고, 금수와 다를 바가 없게 되어 사람의 정리를 돌이켜보니, 아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미 죽은 사람은 흙과 마찬가지인데, 이를 뚫고 자르고 찌르는 것도 다시 덧붙일 것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성스러운 조정에서는 건곤을 본받으셔서 노여워하는 것도 열흘을 넘기시지 마시고, 그의 향읍 사람들과 그의 옛 부하들에게 그의 시체를 수습하여 사오[50]의 복장을 입히게 하시고, 세 치의 관[51]을 사용하도록 은혜를 내려주십시오.

옛날에 항적이 빈장의 혜택을 받았고, 한신도 수렴의 은혜를 얻게 되었는데, 이것은 한고조가 신명 같은 명예를 드러낸 것입니다. 오직 폐하께서 삼황과 같은 어짊을 두텁게 내려주시고, 슬프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내려주셔서 나라의 은택이 죄를 짓고 죽은 해골에게까지 미치게 하시며, 다시금 그침 없는 은혜를 받아서 이 말이 먼 지역에까지 소문이 나게 하여 천하 사람들에게 권고하는 것이 어찌 위대하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난포는 명령을 위반하고 팽월에게 제시지냈는데, 신은 이것을 가만히 한스러워하면서 먼저 주상에게 청구하지를 아니하고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서 명예를 오로지 하였으니, 그가 주살되지 아니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실제 다행일 것입니다. 지금 신은 감히 어리석은 저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천자의 은혜가 내려지기를 삼가 엎드려 손으로 글을 써서 올립니다.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의견을 개진하여 보고드리오니 성스러운 밝으심으로 애달프게 살펴보아주시기를 빕니다."[52]
"신이 듣건데 우레가 울려도 온종일 지속되지 않으며 태풍이 불어도 종일 계속되는것은 드믈지만, 우레와 태풍을 이어 구름과 비가 있기 때문에 만물을 윤택하게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와 같으면 천지의 위엄은 12일간 계속될수 없고 제왕의 노여움도 감정대로 처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신은 망녕되고 어리석은 생각으로 꺼리는 것을 모르며 감히 집안과 자신을 파괴하고 멸망시킬 죄를 무릅쓰고 군왕의 비바람이 이르는 것과 같은 은택을 요청합니다. 엎드려 생각해보면, 태부 제갈각은 선친들이 남긴 훌륭한 공훈을 이었고 백부와 숙부들은 한왕조의 국운이 다하고 천하에 세 나라가 정립하여 나누어지자 세 방면에 의탁하여 모두 충성과 근면함을 이행했으며, 제왕의 사업을 융성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일을 이어 받은 제갈각은 오나라에서 성장하고 오주의 교화에 훈도되어 영명하고 위대한 명성을 얻었으니, 오나라에 복무한 지 수십년이 되었지만 화란을 일으키려는 마음을 싹 튀우지 않았습니다. 선제께서는 이윤과 주공과 같은 중임을 그에게 주어 국가의 모든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습니다. 제갈각의 평소 성격은 강직하고 괴팍하며, 교만하고 자부하며, 다른 사람을 능멸하여 국가 정권을 존경스럽게 지켜 국내를 안정되게 할수 없었고 공업을 세우기 위해 군대를 출동시킨지 1년도 안되어 다시 출병하여 병사와 백성들을 헛되이 소모시키고 창고 속에 쌓아놓은 물자를 다 사용하여 텅 비게 하였습니다. 그는 독자적으로 정권을 잡아 관리들을 파면시키고 임용하는 일을 자기 생각대로 했으며, 형법에 의지해 백성들을 위협하였으므로 직위의 높고 낮음에 관련없이 말하지 못했습니다. 시중, 무위장군, 도향후 손준은 그와 함께 선제가 위탁한 조서를 받았는데 그의 간사하고 포악함이 나날이 더욱 심해짐을 보게 되자, 장차 천하를 뒤흔들어 놓고 사직을 기울여 위태롭게 하게 될 것을 걱정하였으며, 이 때문에 위세를 떨쳐 노여워하였으며 정성은 하늘을 관통하였습니다. 그는 신명보다 앞서 계획하고 지혜와 용맹은 형가나 섭정보다 백 배는 되어서 직접 날카로운 칼을 잡고 내전에서 제갈각의 목을 베어 버렸으니 공훈은 주허를 초과하고 동모를 넘었습니다. 나라의 큰 위해가 하루아침에 대대적으로 제거되었으며, 그의 머리를 말에 매달아 달리게 해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육군은 기뻐 뛰었고 일월은 광채를 더했으며 풍진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실제로 종묘의 신령이 하늘과 사람에게 나타난 징조인것입니다. 오늘 제갈각 부자 세명의 머리가 저자에 걸린지 며칠이나 되어 그것을 본자는 수만 명이나 되며 욕하는 소리는 바람을 만들었습니다. 국가의 큰 형벌에는 진동되지 않는 사람이 없어 늙은이든 어리이든 간에 모두 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이 만물을 관찰할 때 즐거움이 지극하면 슬픔이 생기게 되는데, 제갈각이 귀하고 흥성하여 세상에는 그와 견줄 만한 자가 없었으며 몸은 태보의 지위에 있으면서 여러 해를 지냈지만 오늘 주살되고 멸족되어 금수와 다름없이 되었습니다. 이런 정경을 보면 감정에 기복이 일어나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미 죽은 사람은 토양과 같은곳에 있어 파내어 찌르는 형벌을 다시 더할 수 없습니다. 성스런 조정에서는 천지를 본받아 노여움이 열흘을 넘지 않아 그의 고향에 있는 자나 과거의 부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병사들의 복장으로 거두어 염하도록 하고 3촌의 두께의 관으로 장례지내도록 원합니다. 옛날 항적은 예우받아 매장되는 은혜를 받았으며 한신은 거두어 염해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한고조는 신같이 밝은 명예를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오직 페하께서 삼황의 인덕을 발휘하여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드리워서 국가의 은택이 죄를 지은 시체 위에 더해져 또 다하지 않는 은혜를 받도록 하시고 이러한 은덕을 먼 곳까지 선양하여 천하 사람들을 징계하고 권면하시면 어찌 커다란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난포가 한고조의 명령을 어기고 팽월을 제사지냈을 때, 신은 마음속으로 한탄했었습니다. 이전에 주상에게 요청하는 일 없이 독단적으로 자신의 마음대로 행동하였는데도 그가 주살되지 않은 것은 실로 요행일 뿐입니다. 지금 신은 감히 저의 어리석은 감정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황상의 은혜를 나타내지 못하고 공손히 엎드려 글을 적어 생각한 것을 몽매하게 진술하였습니다. 성명한 주상께서 불쌍히 여겨 살펴보기를 희망합니다."[53]

이에 손량과 손준은 장균의 상소를 받아들여서 제갈각의 옛부하들이 제갈각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했다. 다행히도 석가장에서 제갈각의 시신을 찾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4. 손휴 시대 (258년~264년)

4.1. 258년: 복권되다

이러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제갈각이지만 다행히도 훗날 황제 손휴 손침을 제거하면서 복권되었다.[54] 손휴는 제갈각, 등윤과 여거를 복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갈각(諸葛恪)· 등윤(滕胤)· 여거(呂據)는 죄가 없는데도 손준(峻)과 손침(綝) 형제에게 잔혹하게 살해되었으니 가슴이 아프다. 신속히 이들을 모두 이장시키고 각각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 제갈각 등의 일에 연루되어 먼 곳으로 유배된 자들은 일체 불러 돌아오도록 하라."
그러나 『강표전』의 내용을 보면 손휴 또한 제갈각에 대해 껄끄럽게 생각했음이 확연하다.

제갈각이 복권된 이후, 조정의 신하들중에서 제갈각을 위해 공훈을 기리는 비석을 세워야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박사 성충은 제갈각을 위해 비석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반대했다. 이에 손휴는 말했다.
“한여름에 군대를 출동시키고 병사들을 손상시켜 척촌(尺寸)의 공도 없으므로 그에게 재능이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어린 군주를 보필하는 임무를 받고 어린아이의 손에 죽었으니 지혜롭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성충의 의견이 옳습니다.”
"무더운 여름에 군사를 출동시켜서 사졸들을 다치게 하고도 한 치의 공로도 세우지 못하니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탁고의 책임을 받고도 무뢰배 녀석의 손에 죽었으니, 지혜가 있다고 할 수 없다."[55]

결국 성충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제갈각을 위한 비석이 세워지는 일은 없었다.

[1] 한 20대로 추정된다. [2] 《三國志 卷64 吳書 諸葛恪傳》 [3] '제갈자유지로'로 더 유명한데 驢는 '로'가 아닌 '려'로 읽는 게 맞다. [4] 그림 속의 한자는 '제갈각 득려', 즉 '제갈각이 당나귀를 얻다'이다. [5] 일전에 이 항목에서 기재된 파성넷본 번역은 "신의 부친은 일을 맡을 만한 자를 알지만 숙부는 모르기 때문에 뛰어난 것입니다."지만, "섬길 곳을 알지만"이 원뜻에 더욱 어울린다. [6] 손권의 술주정 중 하나인 술 권유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다(...). [7] 옛날 조조가 쳐들어왔을 때 항복을 주장한 과거를 언급하며 비꼬는 말이다. [8] 『삼국지연의』를 번역한 『 본삼국지』에서 발췌했다. 정사에서의 기록과 동일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번역이 더욱 매끄러움으로 항목에 기재한다. [9] 사실 오나라는 촉한에서 말을 수입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나라의 말을 보관한다는 의미로 제갈각이 이렇게 말한 듯 하다. [10] 심지어 과학적으로도 포유류는 배설기관과 생식기관이 분리되어 있지만 조류는 총배설강이라는 하나의 기관이라서 정말로 똥과 알이 같은 기관에서 나온다(...) 단순 위치가 그런것만이 아니라 진짜 닭은 항문으로 알을 낳는 셈. [11] 즉, 비의를 모욕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손권은 비의를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었으므로 이 일화는 아마 비의와 손권과의 첫번째 만남이었을 때 벌어진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12] 비의 본인을 봉황에 비유하고 오나라 대신들은 당나귀에 비유해서 계속 먹기만하는 오나라 대신들을 조롱한 것이다. 아울러 손권은 먹는 것을 멈췄으니 당나귀가 아니라 기린에 비유되므로, 외교적으로 항의와 선 넘는 짓 사이에서 적절한 수준으로 대처한 것이다. [13] 輔吳. 장소가 보오장군의 위치에 있었음. [14] 무월은 "산월족을 불려들여 어루만지라는 의미다." [15] 병사들의 주둔지를 칭한다. [16] 동명이인으로 대도독으로 유명한 주유(周瑜)의 이름은 瑜로 이 주유(周遺)와 다르다. [17] 제갈각 본인부터 갑병 4만을 얻을 수 있다는 포부를 외쳤는데 그중 일부분이라도 사병으로 거느리려 들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은 상상이다. 실제로도 그러한 바고. [18] 230년 제갈직과 위온이 이주와 단주 탐색에 실패하여 처형당했으나, 이 둘의 가문이 어찌되었는지는 기록에 없는 것으로 볼 때 멸문당한 것은 아닐 정황이 높다. 또한 단양 평정이 아무리 오래걸리더라도 241년에 제갈근이 사망하기 전까지는 성패가 결론이 날 가능성이 훨씬 컸다. 단양 평정이 질질 끌리더라도 제갈각이 주장했던 3년 이내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손권이 못마땅해하거나, 손권은 이를 놔두더라도 제갈각이 가병을 거느리는 상황을 못마땅해 할 기성 호족 세력들의 견제로 인해) 손권이 이를 실패로 결정지으면 그만이었기 때문. 제갈근은 사망하는 해인 241년에도 번성 공략에 참여했을 정도면 234년 당시에는 정정했을 것이다. 즉, 단양 평정이 대실패로 끝나더라도 손권과 긴밀한 관계인 제갈근이 생존해있는 한 단양 평정의 성패만으로는 멸문을 언급할 정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제갈근은 최소 자신의 사후, 더 나아가서는 자신과 자신을 총애했던 손권의 사후 제갈각의 행보를 내다보고 예견을 했다는 가설이 성립하게 된다. [19] 제갈교의 생몰년은 204년 ~ 228년이며, 적자인 제갈첨의 출생년인 227년임을 감안하면 227년 이전으로 최소 7년 이상의 격차가 발생한다. [20] 윗 내용에서 언급했듯이 손권과 제갈각간의 관계가 처음으로 삐걱거린 사례이며 사병을 얻어서 군벌화한 제갈각을 손권이 더 이상 편하게 보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다. [21] 사실 정확히는 이궁지쟁 때 제갈각도 삐끗했다간 훅 갈 수 있었는데 처신을 잘해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것이 더 타당하겠지만... [22] 위의 뜬금없는 육안 습격은 이런 기습중 하나로 보인다. [23] 「선제기」에서는 정확한 시점을 언급하지 않지만 「오주전」에서는 12월에 사마의가 서현에 당도했다고 서술하며 동일한 사건으로 보이므로 12월로 서술한다. [24] 누구를 칭하는 것인지 상당히 모호한 편이다. 경숙(敬叔)이란 이름이나 자를 가진 인물은 최소한 『 정사 삼국지』에 등장하지 않는다. 위아설을 주창한 양자를 칭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는데 그렇다면 양자를 칭할 것이지 양경숙이라고 언급하진 않았을 것이다. 전한시대 양웅도 후보긴하나 자가 자운이라 탈락. 바이두 백과에 의하면 동오의 관리라고 나온다. # [25] 다만 「화흠전」에서 아직 미번역된 배송지주 화교보서(華嶠譜叙)에서 경숙(敬叔)이 나오는데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26] 회계 사람으로, 오나라 황실 일족이 아니다. [27]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제갈각을 추천한 손준은 후일 제갈각을 직접 주살한다. [28] 「제갈각전」 본전에서는 간단하게 손권이 제갈각등에게 후사를 부탁했다고 서술하지만 배송지주로 달린 『오서』에서 더 자세한 정황이 기록되었다. [29] 계문자는 노나라의 대부인 계손행부며, 부자는 공자다. 여기서 언급하는 일화는 『논어』에 있다. [30] 전한의 여치가 아닌 여대를 칭한다. [31] 제갈각의 자. [32] 『자치통감』에 주석을 단 호삼성은 손준이 원래 제갈각을 추천한 인물이므로 원래 제갈각을 죽이고자하는 의도가 없었고, 제갈각이 마땅히 죽임당할 짓을 했기에 손준에게 죽었다고 해석했다. [33] 244년의 흥세 전투의 일화를 언급한 것이다. [34] 권중달 교수의 주석에 의하면 장녕이 했다는 말은 『논어』에서 나오는 말이므로 정확히 공자의 말이고 장녕이 누군지 정확히 모른다고 한다. [35] 문위는 비의의 자. [36] 사실 여대는 손패파의 일원이었던 인물인지라 제갈각 입장에서는 매우 고깝게 보였을 수도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 손패파였던 자기 아들을 죽이기까지 했으니... [37] 손권은 교관이란 직책을 통해 관청의 문서를 조사해서 황제와 눈과 귀가 되도록 했는데 이를 시청이라 칭했다. [38] 관원을 선발하는 부서. [39] 아마 합비신성 전투를 의미하는 듯하다. [40] 아마 출병했던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제갈각전」의 번역이 아직 직역투가 많다보니 확실하지가 않다. [41] 손권의 묘. [42] 칼차고 신발을 신은 채로 황제에게 인사할 수 있는 권한은 제갈각에게 내려진 특별한 영예로 당시 제갈각의 권위를 상징한다. [43] 파성넷역 「제갈각전」에서 발췌한 발언. [44] 『자치통감』에서 발췌한 발언. 둘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세세한 내용이나 의역이 다름으로 둘 다 기재한다. [45] 손준도 이미 준비된 약주를 언급하고 이를 내어서 제갈각의 의심을 푼다. [46] 말로가 서술되어 있진 않지만 참수당했을 것이다. [47] 제갈각의 아버지라면 제갈근을 칭하는 것일텐데 「제갈각전」은 물론 「제갈근전」에서조차 이미 죽은 제갈근이 부관참시당했다는 기록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부관참시는 보통 일이 아님으로 반드시 둘중 하나에 명시될텐데 기록이 전혀 없으니 매우 이상하다. 오역이거나 제갈각의 어머니를 오해한게 아닌가 싶다. [48] 이 부분만 봐도 제갈각이 얼마나 민심을 잃었는지 알 수 있다. [49] 재보(宰輔)를 뜻한데. 즉, 재상으로써 황제를 보좌하는 자리다. [50] 사오(士伍)는 대열 속의 병사를 칭한다. 진한시대에는 관작을 빼앗긴 사람을 사오라고 칭했다. [51] 당대에서 세 치의 관을 쓰면 매우 간단한 장례를 치른 것으로 인식했다. [52] 『자치통감』에서 기술된 장균의 표문으로 아래의 「제갈각전」에 기술된 표문과 여러 차이가 보인다. [53] 「제갈각전」에 기재되어 있는 장균의 표문으로 위의 『자치통감』의 기록과 번역과 쓰는 단어에서 여러 차이가 보인다. [54] 삼국지연의』에서는 부하 장약을 시켜 손준이 이끌던 어림군 지휘권을 빼앗아 분노한 손준이 등윤과 모의하고 손량을 설득해 제거한 것으로 서술되었다. 정사에서 등윤은 제갈각과 친해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후에 손침에게 살해당했다. 술에 독이 들었을까 두려워 집에서 궁으로 술을 가져오게 했다는 서술은 정사와 연의 전부 같다. [55] 이 버전은 『자치통감』에서 서술된 발언으로 세세한 부분에서 위의 번역본과 차이가 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