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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락궁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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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도성 및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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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고려2.2. 조선
3. 주요 건축
3.1. 나성(羅城)3.2. 황성(皇城) / 평양성(?)3.3. 궁성(宮城)
3.3.1. 정전으로 가는 길3.3.2. 정전(正殿)3.3.3. 기타 건축
3.4. 사서에 등장하는 대문

1. 개요

대동강수(大同江水)는 보석같이 푸르고,
장락궁화(長樂宮花)는 비단같이 붉다.
옥련(玉輦)이 노니는 것은 혼자서 좋은 일이 아니니,
태평한 풍월을 민(民)과 함께 즐기고자 함이다.
서도 구호, 이지저 작. 동문선 19권 칠언절구 중 발췌.

고려 서경 황성(皇城) 내에 있던 궁궐이다. 동시에 평양성 내에 있었다고 추정되며 서경에 있는 궁궐 중 가장 우대받았던 궁궐이다.

2. 역사

고려 때엔 평양시는 제 2수도로 서경(西京)이란 명칭을 가졌으며 소성경(小城京), 호경(鎬京), 웅도(雄都), 서도(西都) 등 수많은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서경엔 대화궁, 구제궁, 용덕궁 등 많은 궁궐이 있었고 그 중 황성, 궁성 내에 확실히 있었다고 추정되는 "장락궁(長樂宮)"이 있었다. 궁궐의 뜻은 "오래토록 즐거운 궁전"이며 전한의 궁궐 중에도 같은 이름의 궁궐이 있어 여기서 따온 듯 하다.[1] 미앙궁(未央宮)과 장락궁은 전한의 황제가 거처하던 두 주궁으로 장락미앙이라는 줄임말이 부귀영화의 대명사로 쓰이기도 했다.

장락궁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구제궁처럼 알 수 없다. 최사위(961 ~ 1041)가 장락궁 개수에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장락궁에 오는 임금들은 태조 이래의 전통대로 제 2수도 서경에 의무로 오는 경우도 있었고 3대 임금 정종처럼 아예 천도하려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2.1. 고려

고려 초엔 태조 왕건이 고려(고구려)의 옛 수도를 존중하자는 의미로 크게 우대했으며 이후 군주들은 분사(分司), 나누어진(분) 정부기관(사)을 설치했으며 자주 행차하였다. 제3대 정종은 서경으로 완전히 천도를 시도했다. 제4대 광종은 서경을 서도(西都)로 개칭했다. 이후 서도는 서경의 대표적 별칭이 된다. 제 6대 성종은 서경을 웅도(雄都, 웅장한 도읍,도시)라고 칭한 뒤 직접 행차해 정무를 보고 조카 왕송(나중의 목종)을 개령군으로 봉해 자신의 후계자로 공인했다. 제7대 목종은 서경을 호경(鎬京)으로 개칭했다. 이후 호경은 서경의 별칭 중 하나가 된다. 고려사에 따르면 목종은 거의 매년마다 호경에 행차했다.

1012년, 현종은 서경에 개경 본궐처럼 황성(皇城)을 둘러 황성 > 궁성으로 이루어진 천자식 궁궐을 완성한다. 1014년에 김훈·최질의 난이 일어나 현종은 정권을 빼앗긴다. 김훈·최질의 난 강조의 정변 이후 일어난 두번째 무신의 난으로 후에 일어날 무신정변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 1015년 현종은 서경에 행차해 장락궁에서 연회를 열고 그들을 크게 우대했다. 김훈, 최질 일당이 취해 경계를 풀자 왕가도를 시켜 모두 체포해 총 19명을 주살했다.

고려사 기록엔 현종, 정종, 선종, 숙종, 예종이 자주 행차했다. 특히 정종, 숙종, 의종은 용선(龍船)을 타고 대동강을 내려와 아주 화려하게 장락궁으로 갔다고 한다. 숙종, 예종은 자신의 왕권 확장 및 여진 정벌을 위해 자주 행차했다. 숙종은 붕어 전 마지막까지 서경 장락궁에 있다가 개경으로 돌아오던 중 사망했다. 예종은 이 곳에서 윤관의 여진정벌 성과를 보고 받고 성을 추가로 짓게 했다.

인종은 서경 세력을 육성하기 위해 장락궁에 힘을 쏟았고 아들 의종은 반란을 피하기 위해 장락궁을 찾았다. 묘청의 난이 터지면서 서경 나성, 황성, 궁성은 반란군의 거점지가 된다. 진압군의 수장인 김부식이 표현한 서경의 성곽은 북쪽엔 산으로 둘러 쌓였고 동서남쪽은 대동강으로 둘러 쌓였다고 했다.

1233년, 고종 재위 20년 차에 여몽전쟁이 벌어졌고 서경이 폐허가 됐다고 한다. 장락궁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서경의 중심지에 있던 궁궐로서 전란을 피해가진 못했을 것이다.

원종 재위 2년째인 1261년에 당시 태자가 서경에 행차했는데 대동강에서 흑룡이 보였다고 한다.

2.2. 조선

장락궁으로선 조선왕조실록에 마지막 기록이 나오는데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 1394년) 2월 23일에 하륜이 평양장락궁(平壤長樂宮)의 예를 들며 한양으로의 천도를 주장한다. 당시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를 논의하던 중 한양의 부지, 즉 경복궁의 부지가 작다는 의견이 나오자 하륜은 경복궁 부지가 전왕조 고려의 평양장락궁(前朝 平壤長樂宮) 부지와 비슷하다며 옮겨가도 상관없다고 강조한다.

장락궁은 조선 대에 영숭전(永崇殿)으로 바뀌어 궁전에서 사당으로 그 기능이 전환된다. 조선 태조의 어진이 걸렸으며 세종대왕은 감독관 두 명을 두게 시켰다. 세조는 직접 영숭전에 가 제사 지냈고 명종은 영숭전과 평양의 모습을 병풍에 그리게 시켰다.

3. 주요 건축

3.1. 나성(羅城)

고려사에 따르면 태조 재위 2년(919년) 3월에 무너진 절을 고치게 하였고 10월에 성을 쌓았다. 태조 21년(938년)에 나성을 쌓았다. 태조는 서경을 평양고도(平壤古都)라고 부르며 자주 행차했고 그가 다닌 곳은 충렬왕 대까지 유적으로 남아있었다.

3.2. 황성(皇城) / 평양성(?)

파일:고구려 군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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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양 천도 이전에 존재했던 평양의 평지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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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려 시대까지 있었던 장안성이 원조라고 생각된다. 평양성은 나성일 수도 있다. 고려사에 등장하는 장락궁의 문 중에 장안성의 문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현종 재위 2년(1011년) 8월에 쌓았으며 서경 궁성이 개경 본궐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의미이다. 별궁 대화궁, 구제궁, 용덕궁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영명사 등 고구려 때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여러 사찰이 있었다. 고려사 김부식 열전엔 평양성으로 추정되는 성의 문 이름이 나온다.

3.3. 궁성(宮城)

고려사에 따르면 태조 신성대왕 재위 5년(922년)에 재성(在城)을 쌓았다고 한다. 재성은 궁성과 같은 의미이며 이 때 쌓은 재성이 장락궁인지는 미상이다. 정종 문명대왕 재위 2년(947년) 서경으로 천도를 시도하며 왕성(王城)을 쌓았다 한다. 역시 이 왕성이 장락궁 궁성을 의미하는지는 불명. 문종 인효대왕 재위 35년(1081년) 서경의 궁궐을 보수하고 동, 서쪽에 좌우궁궐을 추가로 지었다.

3.3.1. 정전으로 가는 길

3.3.2. 정전(正殿)

장락전(長樂殿)

궁궐과 이름이 같으며 장락궁의 정전(正殿)으로 추정된다. 서경을 자주 왔던 숙종이 머물렀으며 연회를 열었다. 숙종이 붕어하기 전 마지막으로 조회를 보았던 전각이 장락전이다. 예종이 장락전학사(長樂殿學士) 직위를 내렸으며 이 곳에서 수성명사(壽星明詞)란 시를 지어 악사에게 부르게 시켰다. 의종이 자신의 절일 하청절을 맞아 이 곳에서 연회를 열었다.

고려사 예지엔 서경 관리들이 승진했을 때 의례를 기록했다. 승진할 관리는 장락궁에 가 장락전을 향해 절한다. 성체만세(聖體萬歲)라 외친 뒤 무용수가 축하하는 의미로 춤을 추면 다시 절한다. 관리가 감사의 뜻을 담은 시를 읽고 나면 무용수가 다시 춤을 추고 관리는 다시 절한다. 이렇게 의례를 마치고 나서야 새로운 관직에 정식으로 임명된다.

3.3.3. 기타 건축

전각의 뜻은 "상서로움이 모이다."
고려사 숙종 세가엔 숙종 재위 7년(1102년)에 숙종이 집상전에 가 신하를 시켜 "전문(殿門)"의 글씨를 쓰게 시켰다고 한다. 이 전문이 집상전의 전문인지, 아니면 전각들의 문을 통칭해서 부른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전각의 뜻은 "바람을 관람하다." 인종 재위 5년(1127년)에 조령(詔令)으로 유신지교(維新之敎) 15조가 발표된 곳이다. 또한 묘청의 난을 평정한 김부식이 관풍전 서쪽에서 부하들과 축하했다고 했다. 북쪽은 군주의 자리고 김부식은 군주가 아니라 북쪽에 앉을 수 없어 서쪽에 앉았다.
상안전의 뒤쪽엔 화단이 있었다고 한다. 전각의 뜻은 "늘 안락하다." 묘청과 백수한이 이 전각에서 불교도량을 연 적이 있다.
태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으로 이름도 "거룩한 얼굴의 전각"이다. 최사위가 태조진전 건축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시대 때 군주가 직접 가거나 조정 서열 3위 안에 드는 고위 관료를 보내 꼭 숭배하던 대상이었다. 숙종 대엔 감진전(感眞殿)이란 이름으로 불린 듯 하다. 숙종은 죽기 두달 전 이 곳을 참배했다. 묘청의 난 때 인종의 명을 받고 반란군을 회유하기 위해 파견된 분사대부경(分司大府卿) 윤첨(尹瞻)이 태조의 진영을 서경 밖으로 가지고 나가려다 죽임을 당하였다. 별칭은 태조진전(太祖眞殿), 비궁(閟宮), 원묘(原廟) 등이다.
개경 본궐에도 같은 이름의 전각이 있었다. 오성전(五星殿)으로 개칭했다.
정자의 뜻은 "아름다운 꽃." 숙종이 유미정(有美亭)으로 바꾸었다. 뜻은 "아름다움이 있다."
관풍전과 이름이 같다.
의종이 폐위 당하기 1년 전 이 곳에서 연회를 열었다.
의종이 관풍전에서 백성을 사랑하자, 불교, 도교를 숭상하자는 여섯 가지 명령을 내린 뒤, 이 곳에서 연회를 열었다.
숙종이 이곳에서 자신의 친위대 장교들을 사열했다. 누각의 뜻은 "복이 조회하러 오다."
행재소는 "임금이 임시로(행) 머물던(재) 장소(소)"란 뜻이다. 행재소는 임금이 있었던 건축일 수도 있고 장소일 수도 있다. 즉 여기의 태조행재소란 태조 신성대왕이 왔었던 장소(건축)란 뜻이다. 명종 대에 등장하는 예조묘와 동일 장소(건축)일 수 있다.
성종이 세운 고려 이전에 쓰인 책, 중국의 책을 모아둔 일종의 창고이다. 또한 목록에 빠져있는 책들을 찾아 채워 넣는 역할도 하였다.
개경에 설립된 국자감은 차세대 인재 육성에 사용된 기구였다. 이 기구를 서경에도 설치해 분사국자감(分司國學監)을 설치, 두 수도를 동등한 위치에 두고 서경 세력의 육성에도 사용했다.
서경에 설치된 기관. 개경에 위치한 기관과 동등하게 영(令)(현대의 장관급.)을 두었다.
서경에 있던 건축, 토목 관련 담당 부서. 영작원문(營作院門)이 있었으며 숙종이 무사들을 사열한 것을 보아 앞에 넓은 공간이 있었던 듯 하다.

3.4. 사서에 등장하는 대문

고려사엔 장락궁에 대해 단편적인 기록 밖에 없어 대문들이 나성의 문인지, 황성의 문인지, 궁성의 문인지 알기가 어렵고 추정만 할 수 있다. 평양성의 성문이 장락궁의 문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나성 혹 황성(평양성)의 문으로 보인다. 개경 나성에 선(宣) 자 돌림 문들이 있었는데 이걸 보아 나성의 문으로 보기도 한다. 평양성에 같은 이름의 문이 있다.
궁성 내의 문으로 추측된다. 고려사 김부식 열전에 묘청의 난 때 김부식이 서경을 수복하고 경창문을 통해 관평전으로 들어 갔다고 한다. 평양성에 같은 이름의 문이 있다.
인종 때 대동문, 문과 연결된 성벽이 불탔다고 한다. 평양성의 문과 동일한 문으로 보인다. 문서 참조.
고려사 김부식 열전에 묘청의 난 당시 성을 넘어 흥례문을 공격했다고 한다. 흥례문은 서울 경복궁에도 있다.
고려사 김부식 열전에 묘청의 난 당시 목책성을 넘어 연정문을 공격했다고 한다.
고려사 김부식 열전에 묘청의 난 당시 성을 넘어 함원문을 공격했다고 한다. 윤언이 열전엔 사원문(舍元門)이 등장하는데 함원문과 동일한 문으로 보인다.
고려사 김부식 열전에 묘청의 난 당시 김부식이 광덕문을 공격했다 한다.
고려사 김부식 열전에 묘청의 난 당시 김부식이 양명문을 공격했다 한다.
숙종이 이 문 앞에서 무신, 문신이 활 쏘는 것을 사열했다. 이 기록을 보면 문 앞에 큰 공간이 있었을 것이다.
윤언이 묘청의 난 진압을 위해 진입한 문. 평양성에도 같은 이름의 문이 있었다.
[1] 오묘하게도 후대의 평양 천도의 기틀을 다졌던 광개토대왕의 연호였던 영락(永樂)과도 뜻이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