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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구국 영웅 잔 다르크의 평가 및 관련 기록이다.2. 각종 기록에서
잔은 인류의 평범한 종족들 중에서 너무나 뛰어난 존재여서 천 년 동안 그녀와 필적할 만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 그녀는 인간의 타고난 선함과 용맹함을 예사롭지 않은 완벽함으로 구현했다. 정복할 수 없는 용기와 무한한 동정심, 단순함의 미덕, 정의의 지혜가 그녀 안에서 빛났다.
— 윈스턴 처칠 #
— 윈스턴 처칠 #
하느님, 우리를 용서하소서. 우리가 성인을 불태웠소.
— 레이시 볼드윈 스미스의 "바보들, 순교자들, 배신자들" (1997년)에 인용된 잔이 처형된 이후 한 익명의 영국 군인이 한 말. #
— 레이시 볼드윈 스미스의 "바보들, 순교자들, 배신자들" (1997년)에 인용된 잔이 처형된 이후 한 익명의 영국 군인이 한 말. #
잔 다르크는 아마도 세상에 살았던 이들 중 가장 놀라운 사람일 것이다. 그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도 이상해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법정에 있던 사람들, 그리고 그녀를 가장 적대시했던 적들로부터, 그녀가 아직 살아있던 시절에 기록되지 않았더라면 그 누구도 사실이라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 앤드류 랑
— 앤드류 랑
때때로 역사의 결과는 군대의 힘으로 결정되기도 하고 우연한 사건으로 결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15세기 프랑스의 역사는 어린 소녀의 의지로 결정되었다. 이 소녀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전 군을 통솔한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3. 사후 프랑스에서
잔 다르크는 사후 프랑스 왕국 내에서 계속 존경받았다.[1] 공식적으로 시성하려는 움직임은 그저 오를레앙 일대의 주민들과 스코틀랜드 왕국 정도에 그쳤다.[2]공식적인 시성과는 별개로 민중들한테는 꾸준히 사랑받았고[3], 1580년에 프랑스 퐁타무송의 예수회 학교 학생들이 잔 다르크를 묘사하는 연극인 '오를레앙의 소녀'를 상연하는 등 결코 듣보잡은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스 왕실에서는 루이 11세를 제외하면[4] 시골 출신 평민 처녀가 왕국을 구했다는 사실을 외면하려 했다. 심지어 위그노 전쟁 때 개신교도들은 오를레앙에 있는 잔의 기념물을 부수기까지 했다. 계몽사상이 보편화된 근대에 와서는 오히려 잔의 행동 자체를 광신도의 전형으로 보았는데, 몽테스키외, 볼테르[5] 같은 학자들로부터 '까놓고 말해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게 딱 잔 다르크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식으로 전방위로 까이는 처지로 전락한다. 프랑스 혁명 때 혁명공화파들은 한술 더 떠 잔 다르크를 왕당파이자 가톨릭의 끄나풀로 규정짓고 오를레앙에서 잔을 기리는 기념행사를 폐지하는 한편, 위그노가 그랬던 것처럼 기념물들을 파괴하고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집권을 거치며 사실상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게 되자, 내셔널리즘과 애국심을 고취시킬 만한 떡밥으로 잔 다르크를 다시 들고 나와 잔 다르크에 관한 저작들이 프랑스 정부의 지원하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는 나폴레옹과 잔 다르크가 프랑스 본토 출신이 아니면서도 프랑스를 위해 싸운 것, 시민군을 주력으로 쓴 것 등등 닮은 점이 많아 나폴레옹의 이미지를 높이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에 대해서 잔 다르크가 과장 된 인물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 대한 내용과 반박은 아래에 따로 서술되어 있다.
이후 19세기 중반에서부터는 좌우파 모두가 자신들의 상징으로 여겼는데, 앙드레 모루아[6](André Maurois, 1885.7.26 - 1967.10.9)의 "프랑스사(Histoire de la France, 1947)"에 따르면 좌파는 잔이 하층민 출신임을 내세우고, 우파는 잔이 왕권의 회복을 위해 싸웠음을 내세웠다고. 한편 전 프랑스 및 프랑스령 식민지에 걸쳐 잔 다르크의 동상이 2만 기 가까이 세워졌는데, 그 중 알제리의 수도 알제에 있던 동상은 알제리 전쟁 당시 참수형을 당하기도 했다. 이슬람 국가에 세워진 지배국의 여성 우상이지만 해방의 상징이기도 하기에 그대로 있었으나, 프랑스의 몇 년째 계속되는, 갈수록 강도가 높아지는 무자비한 진압에 알제리인들이 분노했기 때문에 이들의 행동을 반달리즘이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이 동상은 결국 프랑스로 옮겨져 수리한 다음 보쿨뢰르에 다시 세워졌다. 보쿨뢰르로 옮겨진 동상 모습.
현재의 알제리에도 잔 다르크 동상이 있긴 있다. 스킥다에 있는데, 알제에 있던 동상처럼 광장에 높이 세워져 있는 게 아니라 박물관 근처에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모습으로 있다. 보기 크게 보기
잔 다르크의 시성 움직임 역시 국가적인 지원하에 일어나, 1910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고, 1920년 교황 베네딕토 15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엔 잔 다르크를 앞세운 포스터가 나오기도 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연간에 패텡 정권하에서는 반영[7]/반유대[8] 및 프랑스 통합의 상징으로 잔 다르크가 이용되기도 했다. 나치 독일과 필리프 페탱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인 자유 프랑스 역시 국기에 잔 다르크를 상징하는 로렌의 십자가를 넣어 잔 다르크를 추종했다. 특히 샤를 드골이 잔 다르크를 대단히 호평했다고 한다.[9]
4. 현대 프랑스에서
프랑스의 극우 정치인 장마리 르펜은 종종 잔 다르크 동상 앞에서 유세를 하고, 잔 다르크를 자신의 정치이념 아이콘으로 이용하여 유색인종과 이민자들의 차별을 정당화하려고 해서 논란이 일었다. "잔 다르크가 잉글랜드인을 추방한 것처럼, 지금 프랑스인들도 쳐들어온 외국인을 추방해야 한다"는 괴상한 논리. 우습게도 잔 다르크가 이끌던 병사들 전부가 프랑스인은 아니었고, 외국인 용병들도 상당수 있었다.[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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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말까지만 해도 잔 다르크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프랑스의 상징 중 하나로서 존경받았는데, 극우파가 하도 자신들의 행각에 잔 다르크를 방패처럼 이용하며 설쳐서 좌파 진영에서는 혁명 정신을 형성화한 ' 마리안'이라는 가상의 여성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쓰는 경향이 강해졌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 잘 표현되어 있는 바로 그 인물. 그 뒤로는 잔 다르크가 우파 정확히는 극우파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몇몇 잔 다르크 동상들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하곤 한다. 일부 프랑스 좌파가 잔 다르크에 대해서도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 심할 경우 잔 다르크를 왕당파와 파시즘의 상징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2012년 1월 6일 탄생 600주년을 맞아 역시나 르펜 부녀가 잔 다르크를 팔아먹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도 잔 다르크의 고향을 방문하여 극우의 상징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으려고 시도했다. 이런 프랑스 정계의 움직임에 대해 잔 다르크는 외국인 혐오의 상징도 아니고, 정치적 이용의 도구도 아닌 모두의 인물이라고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가 지적했다. 해당 신문은 잔 다르크가 전장에서 진두지휘한 것이 아니라 군량미를 나른 수준이었다는 등 직책이 다소 과장된 것임을, 또 당시 프랑스인들이 배신한 것을 강조해서 언급했다.[12] 선거를 앞둔 노동절을 맞아 또 르펜 부녀가 잔 다르크 동상 앞에서 유세하기로 하자, 보다 못한 좌파 진영에서는 하루 먼저 같은 곳에서 집회를 열어 우파의 잔 다르크 독점에 반대하기도 했다.
앙드레 모루아는 잔 다르크를 가리켜서 "프랑스인이 진지하게 행동할 때 불가능할 것 같은 일도 이루어 낼 수 있음을 증명한다"고 평했다.
5. 한국에서
정히 가련하다! 장대한 영웅의 여자가 옥이 부러지고 구슬이 잠김은 국민을 위함이로다. 붉은 분총 중에 이 같은 사업은 꽃다운 이름이 몇 봄을 유전하는고.
{{{#!wiki style="text-align:right"
- "애국부인전(1907년)" 중}}}{{{#!wiki style="text-align:right"
대한민국에서는 잉글랜드와 싸운 잔 다르크의 모습이 구국 영웅의 모습으로 비춰진 듯, 잔 다르크를 '성녀'라기보다는 '애국자'로 생각하고 있다.[13] 한국에 잔 다르크에 대해 처음 알려진 것은 구한말 개화기 때였다. 경술국치 3년 전인 1907년, 장지연은 잔 다르크의 생애를 다룬 《애국부인전》을 발표했다.[14] 애국부인전에선 정덕, 약안아이작으로 이름을 표기했다. 제목 그대로 조선 내의 모든 국민들이 일제의 침탈에 맞서 싸우자는 취지인 듯하지만 현실은… 이때 잔 다르크를 그린 삽화는 갑옷을 입은 일반적인 모습이 아닌 당시 선교사 부인들 차림새이다.[15] 이 작품이 잔 다르크가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음을 증명하는 흔적인데, 사실 그보다 먼저 잔 다르크를 처음 알게 된 한국인은 프랑스에 다녀온 민영익과 그 일행이거나 아니면 홍종우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들이 잔 다르크에 대해 전혀 기록을 남기지 않아 추측에 그칠 뿐이다. 일단 최소한 프랑스 파리를 다녀온 이상 잔 다르크가 어떤 인물인지는 몰라도 파리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잔 다르크의 동상 자체는 봤을 것이다.
유관순이 잔 다르크에 대한 위인전(아마도 애국부인전)을 읽고 감명받았다는 내용이 소개되는데 확실하게 기록된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러모로 겹치는 면이 많아 평행이론, 환생 등의 이야기에 종종 언급된다. 이웃 섬나라에 침범당한 조국을 위해 깃발을 들고 일어서다가 10대의 나이에 비극적으로 죽음을 맞은 공통점이 있다. 굳이 더 들자면 잔 다르크의 탄생 590주년 되는 해에 유관순이 태어났고, 유관순이 순국한 해는 잔 다르크가 시성된 해이다.
어린이들 위인전 시리즈에 높은 확률로 포함되기도 한다. 설령 빠진 경우라도 유관순의 위인전에 곁다리로 소개되기도 한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펴낸 어린이 잡지인 <어린이> 1930년 1월, 8권 1호에 실은 위인 이야기가 잔 다르크의 이야기였는데, 그의 성향 상 독립정신을 고취하려는 의도였던 듯. 그 밖에도 독립운동가 한용운의 시 이별 마지막 행에 잔 다르크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하는 등, 당시 잔 다르크는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많이 언급되었다.
한편 진취적인 여성의 상징으로, 김우진의 산돼지에서 최영순을, 박경리의 토지에서도 유인실을 잔 다르크에 비유했다. 현대 한국에서는 여성 개혁가나 운동가, 지도자 등에게 'XX계의 잔 다르크'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스토리 잡스에서는 잔 다르크를 신으로 모시는 무당의 사연이 소개되기도 했다. 실제로 무속신으로서의 잔 다르크 초상화도 존재한다.
세계사 과목 교과서나 참고서에 적어도 이름이 한 번이라도 꼭 나오는 인물이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품종은 아니지만 무궁화 중에 잔 다르크라는 이름의 품종이 있다. #
평범하게 살던 시골소녀가 어느 날 우연히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전쟁터에 나서서 활약한다는 내용 때문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잔 다르크 일대기를 그대로 담아내면 흔해빠진 양판소가 된다는 말도 있다.
또한 한 나라의 구국영웅이자 신성시된 영웅, 그리고 앞뒤로 적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상황 등으로 인해 이순신과 비교되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잔 다르크의 주군인 샤를 7세와 이순신의 주군인 선조 모두 정치적 면에서는 유능했지만 의심이 많아 자주 신하들을 숙청했다. 또한 숙청대상 중 하나가 현재 자기 나라의 구국영웅으로 추앙받는 바람에 암군 수준으로 기억되다가 재평가되고 있는 점도 공통점이다. 거기다가 자식문제를 겪은 것도 똑같다. 특히 자기 후계자와 사이가 나빴다.[16]
6. 기타 국가에서
아일랜드, 인도, 이라크, 케냐, 나이지리아 등 과거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국가들이나 아프가니스탄과 네팔처럼 대영제국 시기 영국과 전쟁을 치뤘던 일부 남아시아의 내륙국에서는 영국의 폭압적인 식민지배와 학살, 침략에 따른 트라우마 때문에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심리로 100년 전쟁 당시 영국과 싸웠고 영국과 역사적으로 앙숙 관계에 있는 프랑스의 영웅 잔 다르크를 '원수 영국을 박살낸 위대한 전사', '한낱 미천한 계집애였지만 콧대높은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코를 단칼에 자른 이교도 여장군'이라며 좋게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알제리, 마다가스카르, 가봉, 세네갈, 사헬 지대 국가[17] 등등 구 프랑스 식민지령이었던 아프리카의 국가들에서는 프랑스의 폭압적인 지배에 따른 트라우마 때문에 잔 다르크가 자신들과 직접적인 악연이 없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잔 다르크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편이다.7. 잔 다르크와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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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참정권자 잡지 표지의 잔 다르크[18] | 1911년 조지 5세의 대관식 날에 잔 다르크로 분장하며 행진하는 여성참정권자 |
한편 잔 다르크와 다른 여성들 사이에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카트린 드 로셀이라는 여자가 잔 다르크를 만나 "내가 만난 성인이 밤마다 나타나 금은보화를 놓는다"는 주장을 해서, 어이가 없다고 생각한 잔이 "집안일이나 돌보라"고 하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직접 확인해 보라"고 말했고, 잔도 궁금해져서 그에 동의했다. 그런데 첫째 날 잔이 그만 피곤해 잠이 들어서 확인하지 못했고, 카트린은 "그날 성인이 왔다 갔다"고 말했는데, 아마 거짓말일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어이가 없어진 잔이 둘째 날엔 중간에 잠들지 않고 끝까지 확인했으나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카트린 드 로셀이 거짓말을 했다고 판단한 잔은 "어리석은 일 하지 말라"고 무안만 주고 헤어졌다. 사실 카트린 드 로셀의 행위는 미신 수준을 넘어서 사기꾼에 가까운 행태라서 강력히 처벌해도 모자라지 않은 지경이었으나 그냥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잔이 종교재판에 회부될 때 카트린 드 로셀의 얘기가 인용되었는데도 잔에게 유리한 증거가 되지 못한 듯하다.
또한 군사들을 따라다니는 매춘부들을 비롯한 여성 장사꾼들을 쫓아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중 한 명이 생계를 보장해 달라고 매달리자 열받아서 칼등으로 뒷목을 때려 기절시켜서 내보냈다고 한다. 21세기 기준으로 볼 땐 이런저런 구설수가 나올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당시는 15세기였고 잔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니 자신의 병사들이 매춘부를 사서 놀아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당대에도 잔 다르크를 경애하고 추종한 여성들이 존재했다. 브르타뉴 출신의 피에론(Pierronne)이라는 여인은 신비체험을 주장하고 잔 다르크를 추종하며 다니다가 잔 다르크가 붙잡히기 전인 1430년 3월에 친잉글랜드파에게 체포되었고 종교재판을 거쳐 같은 해 9월에 화형당했다. 천사들의 차림새에 대한 질문에 지혜롭게 돌려 말하며 대처한 잔 다르크와 달리[19] 천사들의 옷차림을 자세하게 말해버리는 바람에 이단으로 신속하게 판정되어 화형당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피에론이 잔 다르크를 동경하고 따른 것에 대한 보복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랭스에서의 대관식 때 잔을 성녀로 여기며 공경하는 여인들이 성화와 기도서를 들고 잔이 그걸 만져주길 바랐는데, 잔은 웃으면서 "자기 손으로 쓰다듬으세요, 여러분들 손이나 내 손이나 마찬가지인 걸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잔 다르크가 출정을 할 때 지원을 해준 이는 샤를 7세의 장모인 욜란다 데 아라곤[20], 또한 포로로 붙잡힐 때 적의 진영에서 그나마 상대적으로 잘 해준 이들 중에선 같은 여성인 리니 백작의 이모 잔과 베드퍼드 공작 부인 등 귀족 여성들이 있었다. 그리고 잔 다르크를 만난 적이 있는 헝가리 왕국의 공주 Eugelide가 있었다.
8. 군인으로서의 잔 다르크
8.1. 특징 및 기록
전쟁을 떼놓고 보면 잔은 그냥 여자아이일 뿐이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잔은 창을 쥐는 법, 군대를 소집하는 법, 전투명령을 내리는 법, 포를 치우는 법에 두루 정통했다. 군사적 문제에서 잔이 수십년간 전장을 전전한 지휘관처럼 뛰어난 현명함과 혜안을 보여주는 데에는 모든 사람이 매료되었다. 특히나 포를 배치하는 데에 그녀는 자신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알랑송 공작
알랑송 공작
횃불을 가진 자가 너무 가까이 가서 잔의 깃발에 불이 붙고 말았다. 그러자 잔은 말에 박차를 가해 부드럽게 깃발 쪽으로 향하게 하고, 마치 다년간의 전쟁 경험이 있는 사람처럼 깃발의 불을 껐다. 이것을 본 군사들과 오를레앙 시민들은 모두 놀라움에 사로잡혔다.
공성 일지
당시 전우들의 기록에서 볼 수 있는 잔의 첫번째 특질은 전쟁의 모든 분야에 걸친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군사적 천재성이다. 특히 포병의 활용에 매우 능숙했다고 한다.공성 일지
누군가가 잔에게 "당연히 당신은 자기가 안 죽을 걸 아니까 두렵지 않을 테죠"하고 말했다. 잔은 "나도 여기서 같이 싸우는 사람들과 똑같은 심정에 불과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마게리트 라 투룰드
마게리트 라 투룰드
성녀와 군사들이 도시 포위를 꽤 지속한 후에 돌격 명령이 떨어져 모두가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그러나 방어가 워낙 튼튼했고 수비측의 저항이 강해서 프랑스군은 후퇴를 강요받았다. 내가 발꿈치에 화살을 맞아 부상당해서 목발 같은 것도 찾을 수 없어 꼼짝달싹도 못하고 있을 무렵, 성녀가 불과 몇 명의 군사와 함께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서 말에 타고 급히 그녀에게 달려가 후퇴하지 않고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것이냐고 물어봤는데, 성녀는 얼굴가리개를 올리더니 "전 혼자가 아닙니다! 5천명의 군사들이 같이 싸우고 있으며 저는 이 도시를 함락시킬 때까지 후퇴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녀가 뭐라 하든 간에 거기엔 4~5명의 군사밖에 없었고, 지켜보는 자들이 있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다른 병사들처럼 후퇴하라고 강권했다. 그러자 그녀는 나무와 덤불 묶음을 가져다 해자를 메꾸어 다리를 놓고 돌격하자고 다른 병사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장 둘롱, 오를레앙 공성전에서
잔의 다음 특징은 돌격전에 앞장서는 것도 꺼리지 않는 적극성과 모범이다.장 둘롱, 오를레앙 공성전에서
8.2. 정말로 군사적 천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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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 나선 잔 다르크 (Joan in Battle, 크레이그 프랭크(Craig Franck) 작, 1907, 캔버스에 유화). |
잔 다르크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논란은 정말 오랜 세월에 걸쳐 이어져 왔다. 대관절 뭘 어떻게 했길래 아무런 군사적 교육을 받긴커녕, 문맹이기까지 했던 17세의 시골 농촌 소녀가 고작 1년 만에 위기에 처한 한 나라를 극적으로 회생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먼저 따져 봐야 하는 점은 잔이 실제로 총지휘를 맡았느냐 하는 점이다. 사실 이 점이 그동안 가장 논란이 큰 문제였는데, 관련 기록과 주변 인물의 기록 등을 참고해 봤을 때 실제로 총사령관의 직위를 행사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적군 잉글랜드군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인 베드포드 공작이 자신의 조카이자 잉글랜드 국왕인 헨리 6세에게 오를레앙에서의 패배 상황을 설명하면서 시말서 비슷하게 쓴 편지와, 샤를 7세에게 '적법한 헨리 6세를 두고 프랑스 왕을 참칭하는 발루아의 샤를'이라며 가짜 왕이라는 식으로 비난하는 편지를 보낸 바 있다. 이 두 편지 모두 잔 다르크를 비난하는 언급을 했다. "사탄의 추종자이자 끄나풀인 남장한 퓌셀[21]이 백성들을 홀리고 있다"고 했다. 이를 볼 때, 적군에서도 잔 다르크를 단순히 얼굴마담 수준으로 본 게 아니라 실질적인 위협을 주는 적장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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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중심으로 한 대포위망 형성 작전 |
전술적인 부분에서도 뛰어났다. 잔 다르크 하면 '하느님의 이름으로 닥치고 돌격'이나 명령하는 광신도 이미지가 있지만, 사료에 따르면 그녀가 제시한 작전은 훨씬 세세하고 세련되었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군 화포 운영방법과 스펙, 그리고 적국인 잉글랜드군의 전술과 병력 구성을 꿰고 있었다. 실제로 샤르트르에서의 공성전에선 성벽에 설치된 적군의 캐논포의 사거리와 접근시 위험지역에 대해 잔 다르크가 면밀하게 경고해서, 알랭숑 공작은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또한 독도법을 통한 지리 분석 및 전장 선정 능력이 훌륭했다. 예를 들면 오를레앙의 승리 이후 프랑스군의 공세계획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나오는데, 잔 다르크는 르와강을 신속하게 도하하여 랭스로 진군하는 최단지점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 르와강 인근의 특정 다리들을 신속히 확보해야 하는 전술목표를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22] 게다가 이를 샤를 7세에게 직접 설득하여 오를레앙 전투 이후 중구난방이던 공세계획을 단번에 정리해버리는 주도면밀함을 보인다.
결국 알랭숑 공작은 잔 다르크의 전략을 채택하게 되지만, 알랭숑을 비롯한 다른 프랑스군 지휘관들이 "잔 다르크의 계획이 무모하기는커녕 매우 합리적이고 효과적이라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었다"는 기술이 많이 등장한다. 잔 다르크의 공세계획이 효과적이란 건 샤르트르 공방전, 파타이 전투 이후엔 프랑스군은 별다른 저항없이 랭스로 접근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증명되며, 잉글랜드군은 이에 대해 손을 쓸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즉 오를레앙부터 랭스 함락 이후 파리 포위까지 잔 다르크가 주도적으로 행한 공세작전을 검토해보면 백년전쟁기 프랑스군 지휘관 중 잔다르크 만큼의 능력을 보여준 장군은 찾아볼 수도 없다.
배운 것 없는 시골 처녀가 이처럼 아군과 적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이고 이를 바탕으로 성공적인 전략과 전술을 제시한 것은, 여러모로 잔이 천재가 아니라면 보일 수 없는 것이었다. 동시대 잉글랜드의 신학자나 역사가는 "농부의 딸내미 같은 무지랭이가 이렇게 세련된 군사작전으로 잉글랜드군을 패배시켰다는 것은 악마의 도움을 받았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음"이라고 기록하는 걸 보면, 잔 다르크의 작전은 같은 프랑스군이나 적군인 잉글랜드군이 보기에도 매우 훌륭했음을 시사하고 있다.[23]
다만 무학의 한계로 눈앞의 전투를 지휘하는 능력은 대국을 그리는 능력에 비해 확실히 떨어졌다. 파리를 포위하는 기동은 훌륭하게 수행하고도 막상 전투에 돌입하고선 지지부진한 성과를 냈다. 수 차례의 공성전과 연이은 소규모 야전에서 잔은 파리 함락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뿐더러 무리하게 공성을 감행하다 부상을 입고 물러나기도 했다. 잔이 내린 지시 중 90% 이상은 공격 또는 공세적 지시였으며, 세부적인 명령을 내린 기록은 드물었다. 이 점에서 알 수 있는 잔의 면모는 매우 공격적인 지휘관, 나쁘게 말하면 무리한 공격[24]을 일삼는 무모한 지휘관이었다는 것이며, 추상적인 목표(공세)를 잡고 세부사항을 휘하 장수들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군사용어로 따지면 대단히 공세지향적이고 임무형지휘를 적극 활용하는 스타일의 지휘관으로, 굉장히 리스크가 큰 타입이다.
하지만 잔은 융통성 넘치는 장수였고, 본인의 이런 리스크를 현장 지휘관이나 조력자들의 의견을 (자기 의견에 반하더라도) 경청하는 것으로 최소화 할 수 있었다. 보급이나 상세한 포위작전 등의 세부적인 지휘는 알랑송 공작, 장 드 뒤누아, 라 이르, 질 드 레 같은 숙련된 전투 지휘관들에게 주로 일임하였고 이들이 잔의 손발이 되어주었다.[25]
그리고 잔은 외부인사였기에 선입견과 이해관계 없이 능력에 따라 인사를 배치할 수 있었다. 백년전쟁 내내 보여준 잔의 합리적인 군사 행동은 여기서 도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잔은 귀족, 평민, 용병을 가리지 않았고 필요하다면 적(부르고뉴파)과의 합작 또한 꺼리지 않는 모습에서 잔의 융통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전근대 전쟁사에서 간혹 찾아볼 수 있는 무학의 군사 천재였다. 전술에선 역시 평균 연령대가 젊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빨랐던 부하들에게 많이 위임하는 편이었고, 전략에선 본능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아서 부하들이 망설일 때도 앞장서 타당한 결정들을 내렸다.
사실 잔 다르크같은 낮은 신분의 사람은 애초에 지휘권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이런 약점은 성녀라는 이미지로 해결했다. 잔 다르크는 하느님이 직접 선택하고 왕이 인증한 성녀였다. 이런 무적의 권위, 그리고 여기에 동반된 총지휘관의 직책을 이용해 처음 몇 번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이끈다. 여기에서 실패했다면 모르겠는데 대성공을 거둬 버렸고, 마지못해 따르던 프랑스 장수들도 ‘성녀가 맞나 보구나!’라며 잔을 인정하고 점점 적극적으로 변해서 순순히 그녀의 지시를 따르게 된 것이다.[26] 이 성녀라는 타이틀은 병사들의 사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그 당시 프랑스군은 사기가 크게 저하되어 제대로 전투를 하지도 못하고 패배를 거듭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가 지배하는 중세 사회에서, 둘 다 그리스도교 국가인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받은 성녀가 프랑스에 출현해 군을 지휘한다는 건, 하느님이 프랑스 편을 든다는 의미로 받아져서 마치 하느님이 지원군을 보낸 듯이 프랑스군은 사기가 크게 올랐고 잉글랜드군은 사기가 떨어졌다. 거기에 프랑스가 연패를 끊고 승리를 하자 과장된 신앙적 열정이나 공포가 잔 다르크의 하느님이 내린 군사적 능력에 대한 과장된 소문이나 심지어는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마저 낳았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니 병사들이야 기세등등해져서 이전까지와는 다른 높은 사기를 얻어 전투에 임해 승승장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전투의 승패에 대한 자기 실현적 예언이 된 것이다. 말하자면 잔 다르크가 성녀를 자처한 건 역사상 최고로 성공적인 심리전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공세적 전략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공세종말점은 샤를 7세의 무제한적인 지원으로 해결한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직접 인증하고 사령관의 자리에 앉힌 사람이다. 쉽게 말해서 본인이 투자를 했으니 그를 위해 두 팔 걷고 밀어붙여준 것이다. 즉 랭스 점령까지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에 왕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잔에게 무제한적인 지원을 퍼부은 것. 이를 이해한다면 랭스 점령 이후 잔과 샤를의 관계가 틀어진 것도 사실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셈이다. 랭스 점령 직후 왕실 재정은 잔에게 해온 지원 덕분에 파탄 직전에 이르렀을 것이니 샤를 입장에서는 그간의 지원한 물자들을 갈아마셔가며 싸운 그녀에게 더는 지원을 해줄 수 없었던 것이다.[27]
때마침 잉글랜드의 상태 또한 막장이었다. 군대는 오를레앙만 함락시키면 전쟁은 끝이라는 낙관적인 태도에 빠져 기강이 해이해진지 오래였고, 내부는 젖먹이 헨리 6세가 왕위에 오른 덕분에 귀족들 간에 치열한 권력 다툼이 진행 중이었다. 때문에 잉글랜드는 잔의 미칠듯한 공세에 효과적인 대처가 힘들었다. 아니, 지역적 방어는 가능했을 지라도 이전처럼 국가적인 반격을 펼치는 것은 버거웠을 것이다. 여기에 부르고뉴파와의 동맹은 매일이 위태로웠고, 아무리 때려도 무너지지 않는 프랑스 때문에 국고는 바닥을 찍고 있었다. 때문에 백년전쟁에 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잉글랜드는 장미 전쟁이라는 내전에 돌입한다.
즉 종합적으로 보자면, 성녀 타이틀(+그로 인한 프랑스군의 사기 상승)+잔의 공세적 전략과 정확한 목표 설정+휘하 장수들의 뛰어난 보조+왕의 무제한적 지원+적진의 혼란이 모조리 겹쳐 잭팟이 터졌다고 볼 수 있다. 무명의 소녀였던 잔 다르크가 중세 유럽에 갑자기 나타나 성녀를 자처하며 프랑스를 구할 수 있었던 것에는, 잔 다르크 개인의 능력 외에도 이러한 상황과 행운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던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잔 다르크는 분명히 잉글랜드군을 모든 면에서 압도할 능력이 있음에도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며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기강마저 어지럽던 프랑스군의 정신을 질타하고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제시하여 일으켜세웠으며, 그 길을 가는 동안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일 없이 충실히 수용하여 마침내는 강력한 침략군인 잉글랜드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왕실의 지원에 매우 의존적이었으며, 잔 본인에게는 성녀라는 타이틀을 떼고 보면 기반이라 할 게 없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군사적 천재였음은 자명하지만, 이 천재성을 뒷받침하고 현실에 구현하는 과정에서는 종교와 왕의 권위에 크게 의존했다. 그러나 장수에게 필요한 것은 군사적 능력만이 아니었고, 결국 왕실 재정에 큰 타격이 오는 등 상황이 불리해지자 결국 화형대에서 생을 마쳤다.
잔 다르크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신화적인 힘으로 적을 홀로 무찌른 완전 무결의 초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은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프랑스군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마침내 지겨운 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끝냈다. 이러한 점이 무엇보다 잔이 역사에 남긴 의의일 것이다.[28]
8.3. 전쟁에 끼친 영향
잔 다르크가 활약한 기간은 길게 잡아 2년에 불과하지만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잔 다르크의 추종자 중 한 명이었던 뒤노아 경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군 1천 명이 잉글랜드군 200명만 만나도 도망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잔 다르크의 등장 이후 이것이 사라졌다." 즉, 적을 보면 등을 보이기 바쁘던 병사들이 드디어 싸우게 되었다는 것.사실 프랑스군의 군사적 역량, 병력 동원 능력과 그 병력을 유지할 경제력은 잉글랜드군보다 한수 위였다. 그러나 오랜 패전으로 인한 사기 저하로 병사들이 사실상 허수아비가 된 점과 여기서 밀리면 끝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인해 프랑스군이 너무 소극적으로 움직인 점이 잉글랜드군에게 군사적 우위를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갑툭튀한 성녀로 인해 프랑스군 본래의 역량을 내기 시작했고, 프랑스 장군들이 구사할 수 있는 전략적·전술적 선택폭은 크게 넓어져 전술적 유연성이 구현될 수 있었던 바탕이 된다.
기존 프랑스군은 그냥 닥치고 돌격의 기사 중심의 전술을 고수해왔다. 그도 그럴 게 중세의 시작이라 불리는 기사가 처음 등장한 나라가 프랑스인 데다가, 당시 프랑스는 자국 내의 평원 지대에서 질 좋은 군마를 생산할 수 있었으니... 즉 오랫동안 쌓여온 기병 양성 체제+훌륭한 자원의 시너지 효과로 인해 발달했던 강력한 중기병 전술을 포기하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기사들의 기득권 때문에 기사 중심의 전술을 포기할 수가 없었던 측면도 있다.[29] 이를 바꾸려면 공동체적 합의와 추진의 중심이 될 만한 강력한 인물이 존재해야 하는데, 백년전쟁 동안 프랑스에는 추진력 있는 인물이 부재했다. 당장 왕이 중심이 되자니 아직 대관식도 치르지 못한 존재였고, 그렇다고 달리 구심점이 될 만한 영주나 귀족도 없었기 때문. 그런데 이 모든 장애요소가 잔 다르크가 등장하면서 해소되어 버렸다. 애초에 기사 계급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던 잔 다르크는 중기병 돌격 전술에 연연할 이유가 없었고,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나름 당대 프랑스군의 구심점까지 되어줄 수 있었기 때문.
물론 기사 중심의 중기병 돌격 전술을 아예 포기했다는 말은 아니다.[30] 다만 중기병에 대한 의존을 떨쳐내고 상황에 따라 적시적소에 쓸 수 있게 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위에서 서술된 파타이 전투인데, 잉글랜드군이 전방에 목책과 말뚝을 설치하자 전면돌격이 아닌 측면으로 우회하여 돌격한 것이었다. 또한 대포의 사용도 등장한다. 물론 당시에 대포는 정확도나 연사력이 크게 낮아 효과적인 타격수단이 아니었지만 알랑송 공작을 위시한 프랑스 장군들이 전투에 대포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부터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잔의 등장 이후 실로 오랜만에 프랑스가 전쟁의 주도권을 쥐었다. 이는 매우 의의가 큰데, 잔의 사후 프랑스가 백년전쟁을 이길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잔의 행보에서 얻는 군사적 자신감을 밑바탕에 깔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대로 말하면 잔이 없었다면 프랑스는 멸망, 또는 최소 루아르강 이남으로 밀려 났으리란 것. 대표적인 증거로 잔 이전 프랑스군은 전투에 패배하면 바로 성으로 퇴각했지만 잔 이후에는 전투에 패배해도 쉬지 않고 끈질기게 잉글랜드군을 몰아쳤다. 전체 인구 수에서 크게 뒤지는 잉글랜드는 결국 질적인 면과 병력 수로 월등히 앞서는 프랑스의 이런 공세를 견디지 못한다. 그 결과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한 대륙의 모든 영토를 상실했다.
9. 과대포장?
잔 다르크는 나폴레옹 시대 이전에는 영웅이 아니라 대단하지도 않은 인물이지만 나폴레옹이 영웅으로 과대포장하여 조작했다는 의견이 있는데, 일단 과대포장되었다는 모습은 전술했던 잔의 활약상 부분과 전쟁에 끼친 영향에 대한 부분만 읽어봐도 충분히 반박되는 주장이며, 영국 측에서도 사탄의 추종자, 악마의 도움을 받은 마녀라고 비난한 사료를 통해 잔 다르크가 영국의 입장에서 매우 위협적인 지휘관이었다는 사실이 교차 검증된다. 나폴레옹이 잔 다르크를 부각시키긴 했지만 그 전에도 영웅으로 알려져서 아는 사람들은 아는 인물이었다.일단 15세기에 잔 다르크는 기사도를 상징하는 인물 중 유일하게 여성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1 2 그리고 오를레앙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지방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했으며, 생전에 베드포드 공이 쓴 잔을 비난하는 내용의 문서와 16세기의 영국에서 쓰여진 연대기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나쁘게 묘사되어 오히려 영국에게 커다란 치명타를 줬음이 확실해지며, 주로 플랑드르에서 활동한 16세기에서 17세기의 화가 루벤스는 항목 상단에 있는 십자가 앞에서 경건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31]
게다가 나폴레옹이 잔 다르크를 찬양하고 공경하면서 기리는 일을 추진한 때가 1803년경인데, 잔 다르크/기타 창작물 문서에서 나와있듯이 그 전에 이미 프랑스의 적대국이었던 영국의 로버트 사우디와 독일의 프리드리히 실러가 이보다 조금 앞서 잔을 찬양하는 작품을 썼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출신의 유명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이 쓴 <영국의 역사>라는 책에도 잔 다르크가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오는데, 흄은 1711년에서 1776년까지 살았는데 나폴레옹은 1769년에서 1821년까지 살았다. 흄이 프랑스에 체류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벽지인 코르시카에 살던 어린 나폴레옹이 늙은 흄을 만나 잔 다르크를 언급했을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흄이 프랑스에서 잔 다르크에 대한 언급을 처음 듣고 그렇게 썼다면 오히려 잔 다르크가 프랑스에서도 무명 인물이었다는 주장이 무색해진다.[32]
한국에서 나폴레옹이 잔 다르크를 띄웠다는 주장은 모 일간지에 실린 칼럼과 그걸 바탕으로 하여 실은 역사서적에 의해 널리 퍼졌는데, 이 책 자체가 가십성 역사를 과장되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해서 쓴 책이기 때문에 정론을 쓴 책이라고 읽고 믿으면 곤란하다.[33] 그리고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소녀를 가지고 단지 이단자로 처벌하겠다고 왕자의 몸값 정도 되는 그런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지는 않을 것이다.
[1]
요한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에서는 이에 대해 '당시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는 쟌느 편에서 혹은 쟌느에 대항해서 싸운 모든 류의 장수들이 동레미의 작은 처녀 농부보다 더 크고 명예로운 위치를 차지했다.'라고 하며,
장 드 뒤누아, 장 뒤 베이유,
장 포통 드 생트라유,
라 이르 등과 그보다 덜 유명한 사람들이
연대기에 등장하더라도 잔 다르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다만, 같은 책 바로 앞 문단에서 기사도의 아홉 용사군에 대해 '데샹은 막 생겨나던 군사적 애국심에 고대 영웅들에 대한 숭배를 연결시켜, 그 당시
프랑스인인
베르트랑 뒤 게클랭을 10번째 용사로 덧붙였다. (중략) 사람들은 11번째
여걸로서 쟌 다르크를 기대한다. 그리고 실제로 15세기는 잔에게 그 위치를 부여하였다'고도 설명하고 있다. 앙드레 보슈아는 '그녀가 살아 있을 때도
프랑스인과 잉글랜드인은 그녀를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 (중략) 16세기에 개신교도들이 그녀의 동상을 파괴해 버렸지만, 다른 가톨릭 동맹측은 그녀를
수호성인 비슷하게 존경했다. 그 후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화적인 인물로, 겨우 콩트의 소재로 사용하기에 알맞는 인물로 만들어져 버렸고, 잔 다르크는 아카데미 회원인 샤프랑이 지은 비루한 시에서부터 볼테르가 지은 파렴치한 시편으로 이행해간다. 간신히 18세기 말기에 이르러서야 그 2번의 재판이 햇빛을 보게 되는 한편, 학자들이 그녀에 관해 언급된
연대기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에 잔의 이야기는 견고한 토대 위에 서게 되었다.
[2]
스코틀랜드 왕국은 1295년에
프랑스와 함께
잉글랜드 왕국에 맞서 동맹[34]을 맺었으며 이는 1560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백년전쟁 시기에도
헨리 5세의 활약으로 궁지에 몰린 프랑스가 스코틀랜드에 구원을 요청해 스코틀랜드군이 샤를 왕자를 돕게 되었는데, 이때 샤를이 지원 온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편성한 것이 1830년에
샤를 10세가 퇴위할 때까지 존속한 스코틀랜드 근위군[35]이다. 이후
위그노 전쟁 때에도 200명의 스코틀랜드군이 위그노 편에 서서 싸웠으며,
2차 대전 때는
자유 프랑스의 수장
샤를 드골이 영국에 스코틀랜드와의 동맹을 기리는 감사패를 전달하기도 했다. 또한 1995년에는, 동맹 7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영국과 프랑스에서 열리기도 했다.
[3]
위그노들은 잔 다르크에게 비판적이기는 했지만, 그게 프랑스에서 잔이 홀대 받았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오히려 존경받는
가톨릭
성인이기에(물론 당시엔
시성이 안 되었으나), 위그노들의 표적이 되어서 까인 것에 가깝다. 일부에서는 20세기나 되어서야 시성된 것을 근거로 홀대론을 펼치기도 하는데, 가톨릭에서 선종 후 한참이나 지나서 시성된 성인은 결코 특이한 사례가 아니다. 단적인 예로, 스콜라 신학의 시작이며 후배 스콜라 학자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며 꾸준한 존경을 받았던 성 보에시오(470/475?~524)는 사후 1400년이나 지난 1883년에 시성되었다. 잔 다르크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며 위상이 올랐음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홀대론의 근거는 될 수 없다. 이는
충무공 이순신이
박정희에 의해 강조되었다는 이유로, 조선시대 내내 충무공이 받던 존경들을 모조리 무시해 버리는 것과 같다.
[4]
어린 시절 로슈 성에서 잔을 보았던 루이 11세는 유일하게 잔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5]
아이러니하게도 볼테르는 잔 다르크와 똑같은 5월 30일에 사망했다. 1878년에 볼테르 사망 100주년에 프랑스 좌파 인사들이 볼테르 추모 행사를 하려고 하자 프랑스 우파 인사들이 '잔 다르크를 모욕한 사람을 그녀와 같은 날에 추모할 수 없다.'며 비난하자 좌파는 '
우파에 속하는 왕정과 교회야말로 민중인 잔을 탄압하고 화형시켰다.'고 반박했다. 참고로 볼테르의 잔 다르크 비판과 조롱을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여겨 긍정적으로만 수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볼테르 문서에 있는 그의 다른 글을 보면 잔 다르크에 대한 태도는 여성혐오와 신분 차별이 없지 않아 보인다.
[6]
본명은 에밀 살로몽 빌헬름 에르조그(Emile Salomon Wilhelm Herzog)로, 알자스계 유대인 출신이다.
[7]
어차피 페탱 정권이나
나치 독일 모두
영국과 전쟁 중이었다.
[8]
종교재판관 중 하나가 유대인이었다는 유언비어를 만들었다.
[9]
이렇다 보니 2차 대전 동안 비시 프랑스와 자유 프랑스로 분열된 프랑스에서는 상호간에 잔 다르크를 들먹이며 비난했다. 비시 프랑스는 자유 프랑스가 잔 다르크를 죽인 영국(잉글랜드)와 손을 잡았다고 비난했고 자유 프랑스는 나치 독일과 손잡은 비시 프랑스는 잔 다르크를 팔아먹은 부르고뉴파와 다를 게 없다고 비난했다.
[10]
당장 문서에 언급된 것처럼 잔과 프랑스군과 함께 싸운 스코틀랜드 동맹군이 있다.
[11]
엉뚱한 옆나라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의 중심도시인
바야돌리드 별명이 바로 불어로 그 오를레앙의 처녀를 뜻하는 La Pucela인데 잔다르크와 함께 프랑스군에 종군한 바야돌리드 기사들을 기리기 위해 붙은 별명이다. 100년 전쟁 자체가 중세말 유럽 최대규모의 전쟁이었고, 애초에 잔다르크가 프랑스 민족 감정을 자극하기 시작했지만 근대적 의미로서 민족주의는 여전히 한창 이전의 시대인지라 유럽 전역에서 모인 다국적 용병단, 모험가 기사, 귀족들이 양측 모두를 번갈아가며 종군했다.
[12]
영국인이 쓴 역사서에는 자신들이 아니라 프랑스가 잔 다르크를 죽였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당연한 책임 떠넘기기. 게다가 잉글랜드 왕의 섭정인 베드포드 공이 잔 다르크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고 변명도 한다.
[13]
애초에 가톨릭의 역사가 짧고 무엇보다 매우 세속적이며 일제강점기를 거친 한국에서는 종교적인 '성녀'보다는 '애국자'에 포커스가 맞춰지는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14]
여기서 말하는 부인은 婦人으로, 결혼 유무와 상관없이 성숙한 여성을 가리킨다. (예전 일본에서도 婦人을 같은 의미로 사용,
여경은 부인경찰관(婦人警察官), 여성자위관을 부인자위관(婦人自衛官) 등으로 불렀다. 오늘날 일본에서 婦人은 다소 예스러운 표현으로, 婦人보다 女性이라고 쓴다고.) 다른 사람의 아내를 가리키는 부인은 夫人이라 한다.
[15]
다만 작품에서는 엄연히 갑주를 착용하고 장검을 들고 영국군을 공격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 묘사가 고전소설 속 영웅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16]
다만 이걸 제대로 비교한 영상이나 글을 찾을 수가 없다.
[17]
차드, 니제르, 말리, 부르키나파소 등.
[18]
표지에 나온 이름인 편집자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는 유명한
여성참정권(
서프러제트) 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장녀이다. 여동생들인 실비아와 아델라도 여성참정권 운동에 참여했다.
[19]
잔 다르크는
미카엘 대천사의 차림새를 묻는 종교재판관들의 질문에 "
하느님께서 그 분에게 옷을 입히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냐"고 대답했고 머리카락에 대한 질문에 대해선 "머리카락이 없어야 합니까?"라고 되물었다.
[20]
공교롭게도 잔 다르크의 원수라고 할 수도 있는
헨리 6세의 왕비
앙주의 마거릿의 할머니이기도 하다. 손녀 마거릿이 어렸을 때 돌보기도 했는데, 마거릿이 태어난 게 잔 다르크가 붙잡히기 해인 1430년 3월이니 잔 다르크와 마거릿이 직접 만났을 가능성은 낮다.
[21]
Pucelle. '처녀'라는 뜻으로, 잔의 별명이기도 하다. 잔은 오를레앙을 수복한 공으로 '오를레앙의 처녀(La Pucelle d'Orleans, 라 퓌셀 도를레앙)'라고 불렸다.
[22]
도하를 실행할 때 도하 지점이 적에게 노출되면
끔찍한 사태가 발생한다는 것을 볼 때, 적의 허를 찌르는 위치 선정과 기동 전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23]
비슷한 예로
스파르타쿠스도 단순 노예라고 하기에는 당시 최강인 로마군을 수년간 괴롭힌 것을 토대로 적어도 트라키아에서 부족민으로 지낼 때 로마군에서 보초병으로 근무했다는 추측을 하기에 잔 다르크 역시 어디선가 군사 교육을 받았기에 군대를 지휘할 능력이 있었지만 실전 경험이 떨어져 공세적 전략에 한계가 온 것이라고 하면 일리가 있다.
[24]
잔 다르크 참전 직전 프랑스군의 상태를 고려해 본다면, 잔의 작전은 조금만 잘못 되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25]
잔 다르크가 몰락할 쯤에는 이런 지휘관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다 떨어져 나가 옆에 아무도 없었다.
[26]
20세기에 이르러서도 이런 사례가 있는데 바로
2차 대전의
아돌프 히틀러와 독일 군부였다. 독일 군부가 프랑스의
마지노선을 돌파하는 방안을 찾느라 고심할 때 히틀러는
벨기에를
침공하여 우회하는 전략을 제시했고, 미친 짓이라는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작전이 대성공으로 끝나자 이후 전쟁 내내 독일 군부는 히틀러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하고 끌려다니게 된다.
[27]
랭스 함락 직후 왕이 대관식을 성대하게 하지 못한 것이 이러한 재정적 압박 때문이라는 추정이 있다.
[28]
잔과 비슷한 유형의 지휘관을 더 뽑으라면
나폴레옹 전쟁의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가 있을 것이다. 블뤼허는 비록 무식했고 저돌적인 성격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큰 패배를 당한 적도 있었지만, 왕을 비롯한 온 국민이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프로이센군을 질타하고 본인부터가 전진원수라는 별명에 걸맞게 나폴레옹에게 끝없이 도전했고 그 도전 동안 아우구스트 나이트하르트 폰 그나이제우나
샤른호르스트 같은 명참모들의 말을 항상 경청하여, 마침내 모두의 힘을 모아 희대의 천재 나폴레옹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29]
달리 말하자면, 기사 중심의 전술을 구사하지 않으면 기사의 필요가 없어지고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던 기득권에 위협을 받는다. 기사 기득권은
백년전쟁 당시와 그 직후에는 몰락하지 않았으나, 이후
파비아 전투에서 몰락하고 만다.
[30]
애초에 중기병을 위시한 돌격 전술이 나쁜 전술인 것이 아니다, 그것'만'에 의존했던 것이 나빴던 것이지, 적재적소에 사용한다면 굉장히 위력적인 전술이 될 잠재력은 충분했다.
[31]
플랑드르 지방은 잔 다르크의 적이었던 부르고뉴파가 다스리던 영토였다. 따라서 그 지방에선 잔 다르크를 좋게 볼 이유가 없는데도 루벤스는 그런 그림을 그렸다.
[32]
근데 어째 흄의 책에서는 오타인지 몰라도 잔의 나이가 20대 중후반 쯤 나이로 나온다.
[33]
해당 책의 저자는 조선 역사에 대한 책도 썼는데, 대표적으로 조선왕조 이전에는 금씨로 불리던 김씨가 음향오행설을 믿어 금씨가 나무를 뜻하는 이씨를 누를 것이라고 두려워한
이성계의 명령으로 김씨로 바뀐 사연이라는,
조선왕조실록이 아닌 야사의 내용을 실제로 기록된 역사의 뉘앙스로 묘사하기도 했다. 꼭 잘못되거나 나쁜 책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비판의 눈으로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