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에 선정된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에 대한 내용은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 문서 참고하십시오.
|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
정민태 (우완 선발투수),
김광현 (좌완 선발투수),
조웅천 (구원투수),
박경완 (포수) 김경기 (1루수), 정근우 (2루수), 박진만 (유격수), 최정 (3루수) 김강민 (외야수), 박재홍 (외야수), 이진영 (외야수), 김기태 (지명타자) |
1. 개요
OF / SSG |
OF / SK |
OF / SK |
||
SS / SK |
2B / SK |
|||
3B / SSG |
''' ''' LHP / SSG RHP / 현대 |
1B / 현대 |
||
'''''' DH / SK |
'''''' C / SK |
'''''' RP / 현대 |
인천일보에서 프로야구 출범 40주년 기념으로 선정한 인천 프로야구 40년 포지션별 최고의 선수 12명. 2022년 7월 20일 우완투수, 좌완투수, 구원투수, 포수부문 선정자 발표를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명단을 발표하고 있다. 7월 27일 1루수, 2루수, 유격수, 3루수 부문 선정자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8월 5일 남은 외야수 3명과 지명타자 1명을 발표하면서 선정자 발표를 마무리했다.
각 선수들의 소속팀의 경우 선정 당시 기준으로 현역 선수는 소속되어 있는 팀으로, 은퇴 선수는 현역 시절 가장 오랜 기간 소속되었던 인천 연고 팀으로 기재하였다.
이중 일부 선수들은 KBO 40주년 레전드 올스타 40인에 선정되었고, 각자 전성기, 혹은 말년을 보낸 소속팀에서 시상식이 진행될 예정이다. 다만 KBO 40주년 레전드 올스타 40인의 경우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와는 달리 선정 당시에 현역 선수들은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2. 선정 방법
인천일보가 프로야구 출범 40주년을 맞아 인천 야구인 40명과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를 선정했다. 투수 3명(우완·좌완·구원)과 포수, 내야수(4명), 외야수(3명), 지명타자 등 총 12명이다.올스타 후보는 42명이 추려졌다. 후보 기준은 인천 연고팀에서 3년 이상 활동한 선수 가운데 KBO 공식 시상식과 골든글러브 수상자, 올스타전 베스트 멤버이다. 또, 국가대표로 각종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도 목록에 올랐다. 2000년대 이전에는 프로 선수들의 국가대표 출전이 불가능했던 점을 고려해 리그 최고의 선수로 구성됐던 한일 슈퍼게임 멤버도 반영했다. 2002년 SK 와이번스가 선정한 '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도 포함했다.
5월18일부터 6월22일까지 진행된 투표에는 야구인 40명이 참여했다. 특정 시기에 몰리지 않도록 투표인단을 20대(5명), 30대(10명), 40대(10명), 50대(10명), 60대 이상(5명) 등 세대별로 배분했다. 20대는 SSG 랜더스 현역 가운데 인천 출신 선수로 한정했고, 30대는 인천 출신이거나 인천 연고팀 3년 이상 활동 선수로 추렸다. 공정한 투표를 기하기 위해 올스타 후보는 투표인단에서 제외했다.
2.1. 투표인단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투표인단[1] | |
20대(5명) | 김교람 (SSG 내야수), 김정우 (SSG 투수), 김택형 (SSG 투수), 이정범 (SSG 외야수), 하성진 (SSG 내야수) |
30대(10명) | 김성현 (SSG 내야수), 김태훈 (SSG 투수), 문승원 (SSG 투수), 박민호 (SSG 투수), 서진용 (SSG 투수), 오준혁 (SSG 외야수), 이현석 (SSG 포수), 이흥련 (SSG 포수), 정정호 (서화초 감독), 하재훈 (SSG 외야수) |
40대(10명) | 고효준 (SSG 투수), 김영수 (인하대 코치), 손지환 (SSG 코치), 송순석 (동인천중 감독), 엄정욱 (엄정욱베이스볼아카데미 감독), 이대진 (SSG 코치), 이양기 (동산고 감독), 정경배 (SSG 코치), 정상호 (SSG 코치), 조동화 (SSG 코치) |
50대(10명) | 강필선 (제물포고 감독), 계기범 (인천고 감독), 김원형 (SSG 감독), 김정준 (SSG 데이터센터장), 김홍집 (부평구리틀야구단 감독), 류선규 (SSG 단장), 장광호 (덕적고 감독), 전형도 (SSG 코치), 정원배 (인하대 감독), 조원우 (SSG 코치) |
60대 이상(5명) | 김시진 (KBO 경기운영위원), 김재현 (전 동산고 코치), 김학용 (전 동산고 감독), 양후승 (전 인천고 감독), 임호균 (한국독립야구위원회 대외협력위원장) |
2.2. 포지션별 후보
파일:1153657_438643_3935.jpg |
3. 최종 선정 대상
3.1. 우완 선발투수
|
우완 선발투수 정민태 |
인천 프로야구 20년, 40년 올스타 선정 |
20세기 마지막 20승, 정민태
정민태가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에 이어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에서도 우완선발 부문 주인공으로 뽑혔다. 투표에서 정민태는 26표를 얻어 프로야구 초창기 불멸의 기록[2]을 남긴 장명부(12표)를 제쳤다.
“인천을 대표하는 우완투수”라는 투표인단 선정 이유처럼 구도의 부활은 정민태의 전성기와 함께 시작했다. 고교야구가 침체기였던 1980년대 중반에는 황금사자기 4강, 전국체전 준우승을 이끌며 동산고 야구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동산고 감독이었던 김학용은 “공에 힘이 있었고, 사인 내면 그대로 던질 만큼 제구도 좋았다”고 떠올렸다.
국가대표 에이스로 성장한 정민태는 1992년 고향팀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했지만,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재활 끝에 정민태가 진면목을 보인 건 1994년이었다.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5이닝을 무안타로 틀어막은 정민태는 인천구장을 가득 메우고도 준우승에 아쉬워한 팬들에게 위안거리였다.
정민태는 1996년 15승, 평균자책점 2.44를 기록하며 리그를 지배한 에이스로 거듭났다. 정민태는 그해부터 현대 유니콘스가 인천을 떠나기 직전 시즌인 1999년까지 해마다 200이닝을 넘게 던졌고, 4년간 65승을 거뒀다. 1999년에는 '20승 투수' 반열에 올랐다.
통산 124승, 골든글러브 3회 수상 기록을 남긴 정민태는 위풍당당했던 풍모와 달리 마운드 아래에선 에이스의 중압감을 짊어진 투수이기도 했다. 박경완은 “등판하는 날이면 물만 마셔도 게워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학창 시절부터 프로 무대까지 인천 마운드 기둥이었던 정민태는 2008년 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은퇴식은 이듬해 8월 목동구장에서 열렸다. 2000년 현대 유니콘스 연고지 이전으로 떠나보낸 그를 인천 야구팬들은 다시 마주하지 못했다. SSG 랜더스 코치 이대진은 “동시대에 활동했는데 구위와 성적이 월등했다. 정말 좋은 공을 가진 선수였다”고 말했다.
3.2. 좌완 선발투수
|
좌완 선발투수 김광현 |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선정 |
대한민국 에이스, 김광현
김광현이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좌완선발 부문 투표에서 투표인단 40인 중 무려 37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로 선정되었다. “대한민국 에이스”, “비교 불가”라는 평가도 뒤따랐다.
데뷔 이듬해인 2008년 김광현은 KBO 리그 MVP, 다승왕, 탈삼진왕을 석권했다. 2009년 평균자책점과 승률 1위를 차지했고, 2010년에도 다승왕에 올랐다. 스무살을 갓 넘긴 나이에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였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도 '일본 킬러'로 등극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인천 야구가 에이스라는 칭호와 김광현을 동일시하는 건 승승장구했던 모습 때문만은 아니다. 김광현은 2011년부터 어깨 부상에 시달리며 3년간 4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지만, 다시 10승 투수로 복귀했다. 2016년 시즌을 마치고 팔꿈치 수술로 재활을 거친 뒤에도, 다시 2점대 평균자책점과 함께 돌아왔다. 2018년 한국시리즈에선 150㎞ 중반에 이르는 강속구로 명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김광현은 2020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인천 연고팀 선수로는 처음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한 시즌 단축과 부상 여파에도 2년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2점대 평균자책점으로 10승을 올렸다. 2022년 SSG 랜더스 유니폼을 입고 국내 무대로 돌아온 그는 한층 노련해진 투구로 평균자책점 1위를 달리고 있다. 스무살의 나이에 리그를 들썩였을 때도, 산전수전을 겪고 리그를 호령하는 지금도 인천은 그를 '에이스'라고 부른다. SSG 랜더스 코치 조동화는 “현재진행형 대한민국 레전드 좌완”이라고 말했다.
3.3. 구원투수
|
SK 와이번스 (2001~2009)
|
구원투수 조웅천 |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선정 |
인천의 허리, 조웅천
인천 야구인 40명이 참여한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투표에서 가장 치열했던 부문은 구원투수였다. 역대 최고 마무리 투수 중 한 명인 정명원(13표), SK 와이번스 벌떼 불펜의 '여왕벌' 정대현(9표), 최다 출장 기록 보유자인 정우람(4표)보다 많은 표를 얻은 선수는 구원투수 역사를 새로 쓴 조웅천 (14표)이었다. SSG 랜더스 감독 김원형은 “데뷔 때부터 인천에서 가장 오래, 많은 활약을 한 선수”라고 말했다.
현대 유니콘스에서 '현대판 마당쇠'로 불린 그는 1996년부터 '기록 제조기'로 명성을 쌓았다. 그해 조웅천은 전체 126경기 가운데 68경기에 등판했다. 1983년 삼미 슈퍼스타즈 장명부가 세운 60경기를 뛰어넘은 신기록이었다. 한국시리즈 2차전에선 연장전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인천 연고팀의 한국시리즈 첫 승리이자, 첫 번째 승리투수였다.
'필승조'로 자리매김한 조웅천은 2000년 연고지를 옮긴 현대 유니콘스 소속으로 초대 홀드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듬해부터 SK 와이번스에서 중간과 마무리를 전천후로 오갔다. 2003년 1점대 평균자책점으로 30세이브를 올려 구원왕도 차지했다.
그 이후 행보도 신기록의 연속이었다. 2005년 김용수(613경기)의 기록을 넘어서며 투수 최다 출장 신기록을 세웠다. 'KBO 1호' 통산 700경기 출장(2007년 4월), 800경기 출장(2008년 8월)도 조웅천의 몫이었다. SK 와이번스가 왕조로 군림한 2007년에도 평균자책점 1.57을 기록하며 2승 9세이브 16홀드로 활약했다. 200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그는 813경기에서 마운드에 올랐다. 지금은 SSG 랜더스 코치로 투수진을 이끌고 있다. SSG 랜더스 단장 류선규는 “오랜 기간 안정감 있는 투구로 셋업맨과 마무리 역할을 잘 소화했다”고 말했다.
참고로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 때에는 구원투수를 따로 선정하지 않았다.
3.4. 포수
|
현대 유니콘스 (1998~1999) |
SK 와이번스 (2003~2013)
|
포수 박경완 |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선정 |
인천 연고 팀사상 최초 영구 결번, 박경완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부문에서 35표를 얻은 박경완이 선정되었다. 초중고를 거쳐 프로까지 그와 배터리를 이뤘던 SSG 랜더스 감독 김원형은 “300홈런을 기록하며 인천에서 많은 활약을 했던 레전드 포수”라고 말했다.
인천 야구 영광의 순간마다 포수 마스크를 쓴 박경완이 있었다. 1998년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차지했을 때도 '투수왕국'의 포수는 박경완이었다. SK 와이번스가 '왕조'로 불리며 일궈낸 우승도 박경완의 손에서 비롯했다. 2007년과 2010년 마지막 공을 잡아낸 것도 그였고, 2008년 접전을 마무리한 더블플레이도 그의 송구로 완성됐다.
1991년 쌍방울 레이더스에 연습생(육성선수)으로 입단한 박경완은 1994년부터 주전 포수로 발돋움하며 4할이 넘는 도루저지율과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 1998년 시즌 현대 유니콘스 유니폼을 입으면서 인천 야구와 박경완 모두 전성기를 맞았다.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과 함께 박경완은 골든글러브를 받았다. 연고지를 옮긴 현대 유니콘스에서 MVP·홈런왕·골든글러브를 차지하고, 포수 최초 '20(홈런)-20(도루)' 클럽에 가입한 그는 2003년 인천으로 돌아왔다.
SK 와이번스에서 박경완은 김성근 감독의 표현대로 “전력의 반”이었다. 그의 등번호 '26번'은 인천 프로야구 유일무이한 영구결번이 됐다. 박경완의 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도(WAR)는 67.63(스탯티즈 기준)으로, 역대 포수 가운데 1위다. 허구연 KBO 총재는 2021년 저서 '그라운드는 패배를 모른다'에서 “박경완은 포수로서의 리드, 타자 대처 능력, 포구 능력, 센스 등에서 최고의 수준을 자랑했다”며 “공수 양면에서 그를 능가할 포수가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3.5. 1루수
SK 와이번스 (2000~2001) |
1루수 김경기 |
인천 프로야구 20년, 40년 올스타 선정 |
미스터 인천, 김경기
프로야구 출범 40주년올스타 1루수 부문중 22표를 얻은 김경기가 1루수 부문 주인공으로 선정됐다. 김경기 외에 '미스터 옥토버' 박정권(18표), 제이미 로맥 등이 표를 얻었다. 야구인들은 “인천 하면 떠오르는 선수”라고 김경기를 기억했다.
1990년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한 김경기는 곧장 4번타자를 꿰찼다. 1992년 21홈런(7위)을 치며 리그를 대표하는 거포로 떠오른 그는 1996년 20홈런(4위)을 기록하며 골든글러브를 받았다. 인천 프로야구 40년 역사에서 거포의 상징인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자는 그가 유일하다.
선수 생활 내내 부상에 시달렸던 김경기가 100경기를 넘게 출전했던 1994년과 1996년, 그리고 1998년 인천 연고팀은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1996년 1차전에서 터졌던 인천 연고팀 한국시리즈 첫 홈런도 그의 방망이에서 나왔다. 2년 뒤인 1998년 현대 유니콘스는 인천 최초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궜고, 김경기는 우승패를 들어올렸다.
2000년 3월15일은 인천 야구에도, 김경기 야구 인생에도 분기점이었다. 현대 유니콘스가 연고지로 옮겼고, 인천에는 SK 와이번스가 들어왔다. 수원구장에는 '인천 자존심 김경기 고향의 품으로'가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현대 유니콘스는 그해 7월 김경기를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했다. 하지만 눈앞의 성적이 중요하지 않은 신생팀에서 베테랑이 설 자리는 좁았다. 김경기는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내주며 이듬해까지 97경기에만 출장했고, 홈런도 6개를 추가하는 데 그쳤다. 그의 마지막 홈런은 2001년 10월 3일 현대 유니콘스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 9회 마지막 타석이었다.
이후 2002년 문학야구장 개장 경기에서 은퇴식을 가지면서 그라운드와 완전히 이별하였다.
인천 야구팬들에게 김경기는 누구와 맞붙어도 밀리지 않는 4번타자였다. 홈런으로 이기는 경기를 즐길 수 있게 해준 존재는 그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20세기 인천 야구가 경험한 세 차례 한국시리즈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코치와 선수로 한솥밥을 먹었던 김시진 KBO 경기운영위원은 “설명이 필요없는 인천의 레전드”라고 말했다.
3.6. 2루수
파일:1154569_439887_851.jpg |
SK 와이번스 (2005~2013)
|
2루수 정근우 |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선정 |
날쌘돌이, 정근우
정근우가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2루수 부문에서 38표라는 압도적인 선택을 받고 올스타로 선정되었다. “비교 불가”, “역대 최고 2루수”라는 선정 이유처럼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었다.
정근우는 입단 이듬해인 2006년 45도루를 기록하며 리그 2위에 올랐고, 골든글러브까지 차지했다. 인천 야구에서 2루수가 골든글러브를 품에 안은 건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삼미 슈퍼스타즈와 청보 핀토스에서 3년 연속 수상한 정구선 이후 21년 만이었다.
차세대 2루수로 떠오른 정근우와 SK 와이번스의 전성기는 일치했다. 정근우는 2007년 3할2푼3리를 시작으로 2011년까지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다. 특히 2009년 3할5푼(5위)의 고감도 타격감을 선보이며 득점왕을 차지했고, 최다안타 2위(168안타)·도루 2위(53도루)에 올랐다. 그해 정근우 타율은 인천 프로야구 40년 역사에서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 기록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다.
공격과 주루 모두 뛰어났지만 정근우를 '역대 최고 2루수'로 만든 건 '악마'와도 같은 수비였다. 좌우로 빠질 법한 타구를 그는 안간힘을 쓰며 따라가 글러브에 담았고, 그라운드에 뒹굴면서도 1루에 공을 던졌다. 혹독한 훈련이 밑거름이었다. SK 와이번스 왕조를 이끌었던 감독 김성근은 저서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2013)에서 “정근우는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는 선수다. SK에서 제일 야단맞았던 게 정근우”라고 했다. 정근우는 2020년 11월 은퇴 기자회견을 통해 “펑고를 워낙 많이 받아서 악마 2루수가 되지 않으면 안 됐다. 경기에 나갈 때 위로는 몰라도 양옆으로는 절대 빠뜨리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임했다”고 떠올렸다.
무엇보다도 정근우는 '끝내주는' 선수였다. 그는 현역 시절 끝내기 안타를 16번이나 쳤다. 프로야구 역대 최다 기록이다. SSG 랜더스 코치 조동화는 “공수주 삼박자가 모두 뛰어났고, 투지·근성을 갖춰 팀의 사기를 올려주는 선수였다”고 말했다.
3.7. 유격수
현대 유니콘스 (1996~1999) |
SK 와이번스 (2011~2015) |
유격수 박진만 |
인천 프로야구 20년, 40년 올스타 선정 |
국민 유격수, 박진만
2022년 7월 27일 공개되었다. 박진만은 연고지를 옮긴 현대 유니콘스와 2005년부터 5년간 몸담았던 삼성 라이온즈에서 전성기를 보냈지만,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투표에 참여한 야구인 40명 가운데 37명이 박진만을 투표하였다. “유격수의 대명사”, “대한민국 유격수 수비를 논할 때 1순위”라는 평가도 뒤따랐다.
박진만의 플레이는 '메이저리그급 수비'라는 표현을 유행시켰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동메달도 그의 글러브에서 확정됐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또한 그의 더블플레이로 완성됐다. 인천에서 나고 자라 인천 프로야구의 첫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견인했던 유격수 이름 앞에는 '국민 유격수'라는 훈장이 붙었다.
박진만은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88년 서화초등학교를 전국야구선수권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고등학교로 진학한 뒤에는 유격수 포지션에 자리잡았고, 1995년 전국체전 우승 주역으로 활약했다.
1996년 입단한 박진만은 '불세출의 유격수'로 명성을 떨쳤던 감독 김재박과 조우했다. 둘의 만남은 인천에도, 프로야구에도 전환점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재박 등번호인 '7번'을 물려받은 박진만은 첫해부터 주전 유격수를 맡았다. 1998년 인천 연고팀이 첫 우승을 거둔 한국시리즈 1차전에선 결승 2타점 2루타를 쳤고, 마지막 6차전에선 적시타로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현대 유니콘스 연고지 이전은 박진만과 인천을 갈라놓았다. 인천은 골든글러브를 5회 수상하며 기량이 절정에 오른 박진만을 먼발치에서 지켜봤다. 그가 유격수를 맡았던 현대 유니콘스와 삼성 라이온즈는 2003년부터 4년 동안 한국시리즈 우승을 번갈아 차지했다.
2011년 박진만은 10여년 만에 고향팀 SK 와이번스 유니폼을 입었다. 3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2할8푼 타율로 녹슬지 않은 공격력도 선보였다. “시간이 지나도 대한민국 최고 유격수”라는 응원가 가사처럼 수비는 명불허전이었다. '박진만 시리즈'로 불린 2012년 롯데 자이언츠와의 플레이오프는 백미였다. 박진만은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호수비로 SK 와이번스를 6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올렸다.
박진만은 2015년 무릎 부상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통산 2000경기 출장 기록에 7경기를 남긴 채였다. SK 와이번스 수비코치로 지도자 경력을 시작한 박진만은 삼성 라이온즈 퓨처스팀(2군) 감독을 맡고 있다. SSG 랜더스 수비코치 손지환은 “가장 안정적인 수비력을 보유한 선수였다”고 말했다.
3.8. 3루수
3루수 최정 |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선정 |
야구 천재, 최정
인천 야구인 40명이 고른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3루수 부문 주인공은 최정이었다. 최정은 투표인단 중 38표를 받았다. SSG 랜더스 타격코치 정경배는 “KBO를 대표하는 3루수”라고 했다.
최정은 끊임없이 한계를 뛰어넘는 선수였다. 2006년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던 그는 감독 김성근이 부임하면서 붙박이 3루수로 발돋움했다. '지옥훈련'에서 수비를 가다듬은 결과였다. 스물을 갓 넘긴 나이에 최정은 3할2푼8리를 기록한 교타자였고, 리그 최고 수비수였다. 과감하게 뛰어들어 땅볼을 부드럽게 걷어쥐는 손놀림과 강한 타구를 반사 신경으로 잡은 뒤 뿌리는 빨랫줄 같은 송구는 트레이드 마크였다. 김성근은 저서 '김성근이다'(2011)에서 “하루에 펑고를 1000개씩 쳐줬다. 최정의 장점은 잡으려고 달려든다는 점이었다. 의지와 욕심이 있는 선수였던 것”이라고 했다.
20대 중반 최정은 '호타준족'으로 거듭났다. 2012년부터 2년 연속 3할 타율에 20(홈런)·20(도루) 클럽에 가입했다. 특히 2013년에는 28홈런(3위)을 쏘아올리며 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도(WAR, 스탯티즈 기준) 7.11로 리그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2011년부터 3년 내내 골든글러브도 받았다.
서른 무렵 최정은 '홈런공장장'으로 또다시 진화했다. 2016년 40홈런과 106타점·106득점을 기록하며 홈런왕과 골든글러브를 석권했다. 2017년에는 3할1푼6리 타율에 46홈런으로 홈런왕·장타율왕·골든글러브를 품으며 최고 타자 반열에 올라섰다. 최정은 지난해에도 35홈런으로 개인 통산 세 번째 홈런왕을 차지했다. 역대 최초 17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 기록도 세웠다. 득점 생산력을 보여주는 지표 OPS(출루율+장타율)는 지난해까지 12년 연속 특급타자 기준인 9할을 넘겼다. 프로야구 40년 역사에서 모든 포지션을 통틀어 최정(82.71)보다 높은 WAR을 기록한 선수는 선동열(107.07)·양준혁(87.22)밖에 없다. SSG 랜더스 감독 김원형은 “3루수의 역사를 쓰고 있는 선수”라고 말했다.
3.9. 외야수
|
현대 유니콘스 (1996~1999) |
SK 와이번스 (2005~2012)
|
외야수 박재홍 |
인천 프로야구 20년, 40년 올스타 선정 |
리틀쿠바, 박재홍
프로야구 40년을 맞아 인천 야구인 4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투표에서 박재홍은 외야수 후보 8명 가운데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 총 3명(중복투표)을 선정한 외야수 부문에서 박재홍은 33표를 얻었다. “KBO 리그 최고 수준”, “공수주 겸비”, “최고의 공격력” 등의 설명은 그가 걸어온 길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996년 야구계는 박재홍의 일거수일투족으로 들썩였다. 75경기 만에 '20(홈런)·20(도루) 클럽'에 가입했고, 신인으로 처음 올스타 최다 득표 주인공이 됐다. 그해 9월3일 잠실구장 담장을 넘기며 프로야구 최초로 30홈런과 30도루를 동시에 달성했다. 데뷔 시즌 '30·30 클럽'에 가입한 선수는 미국에도, 일본에도 없었다. 전인미답의 고지에 오르며 홈런왕·타점왕을 차지한 박재홍은 역사상 유일한 만장일치 신인왕에 올랐다. 골든글러브 최다 득표도 그의 몫이었다.
신인 시절 활약은 서막에 불과했다. 박재홍은 이듬해 부상으로 한 달 넘게 결장하고도 3할2푼6리 타율에 27홈런·22도루로 골든글러브를 품에 안았다. 현대 유니콘스 코치였던 양승관은 “노림수가 워낙 좋았다. 악력도 대단한 선수였다”고 말했다.
1998년 30홈런·43도루를 기록한 박재홍은 한국시리즈 이틀 전 연습경기에서 발목을 접질렸지만, 진통제를 맞고 출장해 6경기 동안 안타 9개를 몰아쳤다. 2차전에선 한국시리즈 사상 최초 연속타자(백투백) 홈런 주인공이 됐고, 3차전에서도 쐐기포를 터뜨렸다. 인천 연고팀 첫 우승 주역이었다.
2000년 연고지를 옮긴 현대 유니콘스에서 3할대 타율에 32홈런·30도루·115타점·101득점으로 정점을 찍은 박재홍은 5년 뒤 인천으로 돌아왔다. SK 와이번스 톱타자를 맡아 여전한 존재감도 입증했다. 2005년 박재홍의 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도(WAR, 스탯티즈 기준)는 5.51로, 전체 국내 타자 가운데 가장 높았다. 2008년에도 3할대 타율(6위)과 4할대 출루율(2위), 5할대 장타율(3위)로 최정상급 기록을 남겼다.
프로야구에서 '호타'와 '준족'으로 이름을 떨친 선수들은 많았지만, 그에 필적할 만한 '호타준족'은 없었다. 2000년 박재홍 이후 20년 넘게 국내 타자 가운데 30·30 클럽 가입자는 나오지 않았다. 허구연 KBO 총재는 지난해 저서 '그라운드는 패배를 모른다'에서 “KBO리그가 메이저리그처럼 162경기였다면 리그 최초 40-40 클럽도 가능했던 선수가 박재홍”이라고 했다.
|
SK 와이번스 (2000~2008)
|
외야수 이진영 |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선정 |
국민 우익수, 이진영
이진영이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외야수 부문 주인공이 됐다. 인천 야구인 40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31명이 인천 프로야구 40년을 대표하는 외야수로 이진영을 꼽았다. SSG 랜더스 코치 전형도는 “인천 연고팀 경력이 길진 않았지만, 임팩트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진영이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한 지 1년이 지난 2000년 프로야구판을 뒤흔드는 일이 벌어진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쌍방울 레이더스는 해체했고, SK 와이번스가 창단했다. '서울 입성'을 내걸며 떠난 현대 유니콘스 대신 SK 와이번스는 인천을 연고지로 삼았다. 이진영은 문학구장에서 실력이 만개했다. 2003년 안타 158개(4위)를 치며 3할2푼8리(5위)를 기록했고, 이듬해에도 3할4푼2리로 리그 타격 2위에 올랐다.
정확한 타격과 강한 어깨로 입지를 굳힌 이진영은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국민 우익수'로 떠올랐다. SK 와이번스 타자 가운데 유일하게 태극마크를 단 이진영은 그해 3월5일 한일전에서 0대 2로 밀리던 4회말 2사 만루, 그림 같은 다이빙 캐치로 한국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승부의 분수령이었다. 같은 달 16일 일본과 다시 맞붙은 경기에서도 레이저 송구로 홈에서 주자를 잡아냈다.
이진영은 SK 와이번스가 2007년부터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르는 동안에도 주축 타자로 활약했다. 3할대 고감도 타격도 여전했다. 2008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선 1루수로 나와 3대 2로 치열했던 9회말 1사 만루, 원바운드 송구를 잡아 살얼음판 승부를 끝내는 더블플레이를 이끌어냈다. 한국시리즈 판세를 기울게 한 결정적 수비였다.
이진영은 2009년부터 2018년까지 LG 트윈스, KT 위즈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며 통산 2160경기에서 2125개 안타를 쳤다. 이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013경기, 1015개 안타는 인천에 남긴 기록이다. 2020년에는 타격코치로 인천에 돌아왔다. SSG 랜더스 단장 류선규는 “국민 우익수로 인천에서 좋은 활약을 펼친 선수였다”고 말했다.
|
외야수 김강민 |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선정 |
짐승수비, 김강민
인천 야구인 40명이 선정한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외야수 부문의 한 자리는 22년간 인천 외야를 물샐틈없이 지킨 김강민에게 돌아갔다. 김강민은 17표를 얻어 SSG 랜더스를 대표하는 '거포' 한유섬(15표), 삼미 슈퍼스타즈 간판타자이자 '강견'으로 명성을 떨친 양승관(9표)을 앞섰다. 입단 동기인 SSG 랜더스 코치 정상호는 “팀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주축 멤버”라고 말했다.
김강민은 대기만성의 전형이다. 20대 초반에는 주목받지 못한 선수였다. 2005년까지 49경기 출장에 그쳤고, 안타도 14개뿐이었다. 수비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2007년 전 경기에 가까운 124경기에 나섰다. 메이저리그 명예의전당에 오른 야구전문기자 레너드 코페트는 1991년에 펴낸 책 '야구란 무엇인가'에서 “외야 수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타트'다. 이것은 직감, 반사 신경,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예측, 그리고 연습의 소산”이라고 했다. 스타트의 중요성을 보여준 선수가 김강민이었다. 빠른 타구 판단을 바탕으로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하며 다른 선수들이 다이빙해야 겨우 닿을 법한 공을 여유 있게 잡아냈다. 외야에서 홈까지 노바운드로 도달하는 송구로 주자를 묶었고, 홈런성 타구는 담장에 기대며 동물적 감각으로 걷어냈다. 외야를 누비는 그에겐 '짐승수비'라는 별칭도 붙었다.
2010년 김강민은 처음 3할대 타율을 기록하며 골든글러브를 받았다. 2013년과 2014년에도 2년 연속 3할 타자로 이름을 새겼고, 두 자릿수 홈런과 도루를 기록했다. 김강민은 데뷔 이후 22년간 '원클럽맨'으로 뛰었다. 프로야구 40년 역사에서 그보다 오래 한 팀에서 활약한 선수는 없다. 올해에도 김강민은 중견수로, 결정적 순간에는 대수비·대주자로 나선다. 김강민과 철벽 외야를 구축했던 SSG 랜더스 코치 조동화는 “철저한 관리로 나이가 무색하게 '짐승수비'가 살아 있다”며 “원클럽맨으로 네 번의 우승을 이룬 선수”라고 말했다.
3.10. 지명타자
SK 와이번스 (2002~2005) |
지명타자 김기태 |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선정 |
돌격대장, 김기태
인천 야구인 40명이 참여한 '인천 프로야구 올스타' 투표에서 지명타자 부문 주인공은 2003년 주장으로 SK 와이번스 돌풍에 앞장섰던 김기태(16표)가 선정됐다. 지명타자는 올스타 투표에서 가장 경합이 펼쳐진 포지션 중 하나였다. 특히 선수단을 이끈 주장들이 각축했다. 2000년대 SK 와이번스 중심타자로 활약하며 2011년 주장을 지낸 이호준(11표), SK 와이번스 왕조의 일등공신이자 은퇴 시즌이었던 2010년 주장으로 우승을 일군 김재현(9표), 태평양 돌핀스에 입단해 현대 유니콘스의 '영원한 캡틴'으로 남은 이숭용(4표)이 고른 지지를 얻었다.
김기태는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인하대로 진학했다. 1989년 가을철대학야구연맹전에선 홈런포를 가동하며 준우승 주역이 됐고, 이듬해 백호기 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인하대를 결승으로 이끌었다. 1990년 세계야구선수권은 그의 이름을 각인시킨 대회였다. 김기태는 대만과의 준결승리그, 푸에르토리코와의 3·4위전 경기에서 연달아 홈런을 터뜨렸다. 신생팀 특별지명을 통해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데뷔한 그는 프로에서도 힘과 정확성을 모두 갖춘 방망이를 선보였다.
김기태는 프로야구판을 술렁였던 대형 트레이드 주인공이기도 했다. 1998년 삼성 라이온즈는 선수 2명에 20억원을 얹어 김기태·김현욱을 영입했다. 쌍방울 레이더스는 투타 주축 선수들을 보내고, 구단 운영비를 조달했다. 3년 뒤에는 무려 8명이 유니폼을 갈아입은 트레이드를 통해 SK 와이번스에 입단했다.
김기태는 2004년 타율 3할2푼을 기록하며 지명타자 부문 골든글러브를 거머쥐었다. SK 와이번스가 골든글러브 수상자를 배출한 건 그해 김기태와 이진영(외야수 부문)이 처음이었다. 2005년 시즌 뒤 은퇴한 김기태는 SK 와이번스 타격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LG 트윈스와 기아 타이거즈 감독을 거쳐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 타격코치를 맡고 있다. 김기태와 선수 생활을 함께했던 인하대 감독 정원배는 “타격 능력이 출중한 해결사였다”며 “팀을 하나로 모으는 리더십도 뛰어났다”고 말했다.
4. 서적 출간
2023년 7월 15일 도서 "구도인천 - 인천프로야구 40년"이 발간됐다. 목차는 6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시 부르는 연안부두",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왕조로 비상한 짠물야구", "야구도시의 뿌리", "연장전-끝나지 않는 이야기", "부록"으로 구성됐고 가격은 22,500원으로 책정되었다.
5.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와의 비교
포지션 |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 선정 선수 | 인천 프로야구 40년 올스타 선정 선수 | |
좌완 선발투수 | 이승호 | → | 김광현 |
구원투수 | 미선정 | → | 조웅천 |
포수 | 김동기 | → | 박경완 |
2루수 | 정구선 | → | 정근우 |
3루수 | 이선웅 | → | 최정 |
외야수 | 김일권 | → | 이진영 |
외야수 | 윤덕규 | → | 김강민 |
지명타자 | 이호준 | → | 김기태 |
인천 프로야구 20년 올스타 선정 당시 논란이 있었던 포지션의 선수들이 모두 바뀌었다. 다만 지명타자 부문은 SK 와이번스에서 3시즌동안 활약했던 김기태보다는 기존 수상자였던 이호준이 그대로 수상하는게 맞다는 의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