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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호(1981)/선수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이승호(1981)
1. 개요2. 쌍방울 레이더스 지명3. SK 와이번스 1기
3.1. 2000~2007 시즌3.2. 2008 시즌3.3. 2009 시즌3.4. 2010 시즌3.5. 2011 시즌3.6. FA
4. 롯데 자이언츠
4.1. 2012 시즌
5. NC 다이노스
5.1. 2013 시즌5.2. 2014 시즌5.3. 2015 시즌
6. SK 와이번스 2기
6.1. 2016 시즌
7. 연도별 주요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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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K 와이번스, 롯데 자이언츠, NC 다이노스 소속 좌완 투수 이승호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

2. 쌍방울 레이더스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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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레이더스 지명 직후.[1]

3. SK 와이번스 1기

파일:2003이승호.jpg
SK 와이번스원조 에이스 시절
군산남초, 군산남중, 군산상고 출신으로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의 1999년 우승을 이끌며 우수투수상을 수상했다.[2] 2000년 쌍방울 최후의 1차 지명 신인이다. 이후 쌍방울 선수단이 SK로 인계되면서 자연히 팀 창단 멤버가 되었다. 신인이던 2000년에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팀에 예선 경기 도중 부상을 입은 송지만의 대타로 선발되어 동메달을 획득하며 병역 면제가 되는 행운을 잡았으나, 2000년의 SK는 투수진이 완전히 거덜난 상황이었다. 쌍방울 시절 주축 불펜이었던 조규제 김현욱은 1998년과 1999년 현대와 삼성으로 팔려갔고 2차 1번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던 마일영도 단 돈 5억에 현대에 넘겼다. 제대로 던져주기라도 할 투수가 이승호, 오상민, 김원형 밖에 없었다. 게임 던지고 가비지 이닝을 맡을 투수마저도 없던 게 당시 SK의 상황이었다.

그나마도 김원형은 1999년 7월 장종훈의 타구에 맞아 광대뼈와 코뼈가 함몰된 여파로 인해 2000년 2승 13패(평균자책점 5.81)로 한용덕과 공통 다패왕을 먹는 불명예를 안았다. 그해 팀내 평균자책점 1위는 44이닝을 던지고 ERA 4.30을 기록한 불펜투수 박상근이었다. 이승호는 3위이나, 2위의 박주언이 단 18⅔이닝을 던졌기 때문에 사실상 2위나 다름없었다.

3.1. 2000~2007 시즌

2000년 성적 10승 12패[3] 9세이브, ERA 4.51로 신인왕을 수상했으며[4], 2001년에는 선발 투수로 정착하지만 2경기에는 마무리로 출장해 2세이브를 거두는 등 14승 14패 2세이브, ERA 3.55, 그리고 220⅔이닝을 던졌다.[5] 2002년에는 평균자책점 3.15에도 불구하고 6승 12패로 2007년 윤석민의 모습과 같은 꼴찌 팀의 소년가장 역할을 담당했다. 스탯을 보면 이 때가 기량상 절정기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절대적으로 관리가 필요한 20대 초반에 3년 간 503이닝을 던졌고 이후 등장한 신인에서 비슷한 예를 찾는다면 오직 류현진 외에는 찾을 수 없는 처참한 기록을 남긴다.

덧붙이자면 이승호는 2012년 기준으로 마지막 포스트시즌 탈락 팀 출신 신인왕이는데, 2012년에 넥센 히어로즈 서건창, 2013년에 NC 다이노스 이재학이 신인왕을 수상하며 떼냈다. 다만 서건창, 이재학은 중고신인이다. 순수 신인으로 간주 하면 이정후 이전까진 최후의 포스트시즌 탈락 팀 출신 신인왕이었다.

조범현 감독 시기인 2004년 15승을 거두면서 선발 라인업에서 김원형과 함께 제 역할을 수행해 줬지만 평균자책점은 4점대[6]였고, 결국 휴식이 필요할 때 한 번 더 굴려진 이승호는 2005년에 팔꿈치 부상을 얻고 만다. 그 후 2년 동안 한 번도 마운드에 올라가지 못했고 어깨 수술도 받았으며, 2007년에는 아예 엄정욱과 함께 임의탈퇴[7]로 공시되기까지 하며 팀의 첫 우승을 밖에서 지켜봐야 했다.

3.2. 2008 시즌

다행히도 오랜 재활이 무사히 끝나고 2008년 5월에 팀에 복귀했다. 전과 같이 선발로 뛰지는 못하는 대신 중간계투로 맹활약했고, 특히 한국시리즈에서 5경기에 모두 등판해 위기 순간마다 팀을 구해내 4홀드, 평균자책점 1.59을 기록하여 팀의 두 번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3.3. 2009 시즌

2009년에는 68경기에 나와 106이닝 동안 7승 5패 6세이브 7홀드와 4.42의 평균자책점으로 전병두, 정우람과 함께 좌완 중간계투로 활약했다. 다만 중요할 때 실점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불의 요정으로 좀 까이기도 했지만[8], 팀의 창단 때부터 마운드를 이끌어서 그런지 팬들이 가혹하게 까지는 않는 편이었다.

3.4. 2010 시즌

정대현의 부상으로 2010 시즌에는 마무리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사실상 셋업, 클로저, 스윙맨, 선발까지 등 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등판했다. 65경기 출장 6승 4패 20세이브로 구원 3위를 차지했으나 보통의 마무리 투수라면 좀처럼 보기 힘든 4이닝 마무리까지 하는 통에 무려 89⅔이닝을 던졌다.

시즌 초중반까지 세이브 1위와 매우 좋은 비율스탯을 기록하고 있었으나, 구원 1위 손승락이 63⅓이닝, 2위 이용찬이 이승호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41⅔이닝을 던진 것을 보면 확실히 무리가 안 갈 수가 없는지라, 8월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볼질 끝에 풀카운트 채운 다음 볼넷이나 안타를 허용하는 등 구위가 확연히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며 시즌 막판에는 송은범에게 마무리 자리를 내주었다. 6월까지 1점대 중반을 찍던 평균자책점은 시즌 종료 시점에는 4.22까지 치솟고 말았다.

팀이 시리즈 전적 2승으로 이기던 2010년 10월 18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 팀이 스코어 4:2로 이기던 9회말 1사 2, 3루 상황에서 7번째 투수이자 마무리 투수로 등판해 첫 타자이자 1번타자인 이영욱의 대타로 나온 진갑용을 삼진, 다음 타자 조동찬도 삼진으로 잡고 세이브를 따냈다. 이날 이승호는 ⅔이닝 9투구수 2탈삼진 무실점으로 세이브를 따냈고, 이날 승리 투수는 다른 이승호였다.

이승호는 2010년 한국시리즈 4경기 중 3경기에 등판하여 5이닝 4피안타 3볼넷 2몸에 맞는 공 7탈삼진 1실점 1자책점 평균자책점 1.80, 1홀드 1세이브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으로 우승했다.

3.5. 2011 시즌

2011년 4월 5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LG와의 경기에서 스코어 3:5로 지고 있는 6회말 2아웃에 등판해서 아웃카운트 하나 잡고 내려갔는데 7회초에 바로 6:5로 역전이 되어서 승리투수가 되었다. 그리고 7회말 정대현으로 교체되었다. 김광현 지못미.

4월 9일 한화전에서 스코어 9:6으로 이기고 있던 9회말 2아웃에 주자가 없던 상황에서 등판했는데 4사구 3개, 안타 하나로 2실점을 해서 때아닌 똥줄을 타게 만들었다. 다행히 이양기를 삼진잡으면서 게임 종료.

2011년 7월부터 2011년 시즌 끝까지는 박희수가 새로운 노예로 등장하게 됨에 따라 이승호는 필승조에서 벗어나게 되어 노예 생활을 접게 되었다.

2011년 페넌트레이스에서 51경기 64⅓이닝 6승 3패 2세이브 2홀드, 평균자책점 3.50, WHIP 1.48을 기록했다.

이승호는 KIA 타이거즈와의 2011년 준플레이오프에서 1경기 1이닝 1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1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이승호는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1년 플레이오프에서 1경기 1⅔이닝 2피안타 1피홈런 1탈삼진 1실점 1자책점 평균자책점 5.40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이승호는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 5경기 중 4경기를 연달아 등판(1~4차전)하여 오랜만에 노예 생활을 하며 4⅔이닝 4피안타 3볼넷 5탈삼진 1실점 1자책점 평균자책점 1.93, 1홀드를 기록했다. 그리고 팀은 시리즈 전적 1승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이승호는 2011년 포스트시즌 14경기 중 6경기에 등판하여 7⅓이닝 6피안타 1피홈런 3볼넷 7탈삼진 2실점 2자책점 평균자책점 2.45, 1홀드를 기록했다..

3.6. FA

2011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했고 2011년 11월 22일, 4년 최대 24억 원[9] 롯데 자이언츠와 FA 계약을 맺었다. 보상 선수로는 좌준혁이 SK로 갔다.[10] SK팬들은 차기 레전드 예약이었던 프랜차이즈 선수 립서비스까지 하며 허무하게 훌쩍 가버린 것에 충격을 먹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몸상태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고, 이를 빌미로 프런트가 협상을 질질 끌며 영 진전이 없는 분위기어서 못 잡을 수도 있겠다 싶은 느낌도 있었다.

반면 임경완을 푸대접하며 어이없이 SK로 이적시킨 프런트를 가루가 되도록 까던 롯데 팬들은 환호하였다. 결과적으로는 임경완 - 이승호 맞 트레이드 격의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정대현까지 FA로 롯데로 이적하여 두 선수는 계속해서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4. 롯데 자이언츠

4.1. 2012 시즌

파일:external/sccdn.chosun.com/2012090201000044200001771.jpg
롯데 자이언츠 시절.
양승호 감독이 에이스 장원준의 자리를 이승호로 메운다는 구상을 했지만, 시범경기 때부터 말 그대로 완전히 탈탈 털려버렸다. 결국 시즌을 2군에서 시작하게 됐지만 구위를 완전히 상실한 것인지 2군에서조차 털려버렸다. 2012년 롯데 먹튀 역사의 한 획을 그을 것으로 보였으나 6월 초부터 다시 구위가 올라왔는지 이후 양호한 성적을 유지하였다. 아예 드러누웠다가 8월이 넘어가서야 복귀한 정대현에 비해서는 확실히 팀에 기여를 했다.

그러나 8월 16일에 친정 팀인 SK 와이번스 상대로 스코어 5:5인 9회초에 등판해서 호투했지만, 10회초에 최정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주고 김재현에게 희생번트를 내줘 1사 2루의 위기를 만들더니, 박정권에게 1타점 2루타를 맞고 6:5로 역전을 허용했다. 그리고 결국 10회말 롯데가 1사 만루를 삼진과 우익수 플라이 아웃으로 기회를 날려먹으면서 이승호는 패전투수가 되었다.

시리즈 전적 2승 무패인 상황에서 10월 11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2012 팔도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팀이 스코어 3:0으로 지던 1회초 2사 1, 2루 상황에서 등판하여 양의지를 초구에 중견수 플라이로 잡아내어 더 이상의 실점을 막았고, 2회초~4회초를 무실점으로 막고 스코어 3:2로 팀이 지던 5회초 1사 1, 2루 상황에서 마운드를 내려왔다. 다음 투수 김성배 최준석을 삼진으로 잡고 오재원에게 몸에 맞는 공을 내줬지만 이원석을 초구에 유격수 땅볼로 잡고 이닝을 끝내면서 이승호는 이날 실점을 기록하지 않았다. 이날 이승호는 3⅔이닝 54투구수 4피안타 1볼넷 무실점으로 롱릴리프로서 좋은 활약을 했고, 팀이 스코어 7:2로 패하여 승패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팀이 3승 1패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하면서 이날의 경기가 이승호가 등판한 2012 팔도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의 유일한 경기가 되었다.

그리고 뜬금없이 SK 와이번스와의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친정 SK에 칼을 갈고 있다라고 전 팀 팬들이 들으면 싫어할 법한 충격 발언을 하였다. 그러나 이승호는 SK 와이번스와의 2012년 플레이오프에서 아예 엔트리에서 제외되어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탈락했다.

5. NC 다이노스

파일:/image/076/2015/07/29/2015072901003322900238381_99_20150729185120.jpg
NC 다이노스 시절
FA로 이적한 이후 좋은 성적을 보이지 못하면서 NC 다이노스 특별지명 때 20인 보호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결국 11월 15일 NC 다이노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시즌 중반에는 먹튀냐 아니냐 얘기가 좀 있었지만 1군에 못 올라오면서 'NC 다이노스 최초의 먹튀'로 전락했다.

5.1. 2013 시즌

NC 다이노스에서도 별다른 활약을 못 하고 주로 2군에서 뛰었다. 5월 13일 기준 1군 기록은 4경기 3이닝 평균자책점 9.00. 롯데가 NC 특별지명 방어용으로 영입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지경이다.

고창성과 더불어 김경문 감독이 팀에서의 고참 역할을 해 투수진을 이끌어주길 바랬지만, 둘 다 부진하면서 6월 14일 1군 경기 이후 2군에서만 등판했다.[11][12]

그러던 중 10월 5일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했다. 팬들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고, 실제로 1회 2사에 2루를 만들고 박정권에게 홈런을 맞으며 2실점했다. 그 이상의 실점은 하지 않았고, 3이닝 3피안타 1홈런 1사사구 2자책점 40투구수를 기록하며 조기 강판되었다. 이 날 경기는 8회 5:4 한 점차로 리드 중 마무리로 등판한 김광현이 4번 타자 박정준[13]에게 투런 홈런을 맞으면서 블론세이브를 기록하며 NC는 5:6으로 승리했고 이승호는 패전을 면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12경기 9⅓이닝 1패 7볼넷 5삼진 11실점 10자책으로 방어율 9.64. 전력보강 선수로 특별 지명된 다른 선수들에 비해 확연하게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팬들에게 까였다.

여담이지만 NC 다이노스가 전력보강 선수로 지명한 투수들은 좋지 못한 성적을 기록했다. NC가 특별지명으로 영입한 투수는 고창성, 이태양, 송신영, 이승호인데, 고창성은 필승조를 기대했지만 부진하며 패전조로 강등되었고, 이태양이 5선발로 가능성을 보이는 듯 싶더니 다시 가라앉은 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승부조작을 저지르며 쓰레기로 전락했다. 그나마 송신영이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2013년 시즌 중에 넥센 히어로즈로 트레이드되었다.

5.2. 2014 시즌

부활 조짐이 보인다고 한다. 부활에 성공한다면 아직은 불안한 NC 불펜진, 혹은 마땅한 5선발이 아직 안보이는 선발진에서 좋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부활 조짐이 보였었는데... 스프링캠프 중이었던 2014년 2월 6일 KT와의 연습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하여 선수로써는 어린아기나 다름없는 KT 선수들에게 2이닝 1피안타 1볼넷 1사구 2실점(2자책)하며 여전히 고인임을 유감없이 증명했다.

그리고는 5월 첫주 기준으로 퓨처스리그에서도 9점대 ERA를 찍으면서 1군 콜업은 요원해 보인다. 8월 7일 기준, 퓨처스리그에서 27경기 2패 4홀드 ERA 8.28을 기록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올시즌이 끝나도 1군에 올라오지 못할 듯...

결국 퓨처스리그 성적을 ERA 8.07로 마치면서 1군에 단 한 번도 콜업되지 못하고 시즌을 마쳤다. 여러가지 억측이 난무하지만 한가지 확실한것은 NC에선 지금의 이승호는 전혀 필요가 없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특별지명으로 NC로 건너온 8명의 선수들중 가장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2014년 시즌 종료 후에는 1군에서 한때 0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이혜천보다도 못한 활약을 보였다.

2015년에도 못하면 FA기간이 끝나는지라 방출이 가장 유력하다. 그리고 2군에서만 뛰어서 큰 연봉삭감이 있을지라도 이 선수가 먹튀인 사실은 변함이 없다.

팬들에게는 사실상 잊혔고, 박명환이 부활할 것이라는 설레발 기사가 나오자, '이승호는 여전히 부활 못했다.' 라면서 한 줄로나마 언급되었다.

5.3. 2015 시즌

5월 말 기준으로 몇경기 등판하지 못했지만, 지난 2년과 비슷한 성적을 보이고 있다. 올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사이에 2군 성적을 끌어올리며 올해는 부활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7월 24일 부로 1군 승격되었다. 특히 올해는 FA 마지막 해인지라 은퇴의 기로를 벗어날 수 있는지 궁금증을 주고 있다.

2015년 7월 29일 대구 삼성전에 선발로 등판했다. 1회는 삼자범퇴로 막아 냈지만 2회 말에 무사 만루 위기에 놓이고 결국 채태인에게 적시타까지 허용해 1실점하고 무사 만루 상황에서 조기 강판당했다. 뒤이어 등판한 강장산이 만루 상황에서 지석훈이 평범한 2루 땅볼을 흘려 주자 2명을 불러들이는 초대형 삽질 등으로 그의 승계 주자를 모두 불러들이면서, 최종 결과는 1이닝 4자책 1삼진 1볼넷 3피안타 평균자책점 36.00.

결국 7월 30일 2군으로 다시 강등당했고, 시즌 후 NC 다이노스에서 방출당했으며 박석민이 나올 때까지 NC 구단 역사상 최악의 먹튀로 자리잡았다.

6. SK 와이번스 2기

6.1. 20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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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팀 SK 와이번스로 돌아온 후
SK 와이번스는 NC 다이노스에서 방출된 이승호를 다시 데려왔다.

다만 이승호의 재영입에 대한 SK 팬들의 반응은 크게 엇갈린다. 팀 내에서 유일하게 신인왕을 차지한 선수이자 '원조 에이스'였던 이승호의 귀환을 크게 반기며 환영하는 팬들이 있는가 하면, 이승호가 과거 롯데로 FA 이적한 후 SK 팬들이 서운할 법한 인터뷰를 자주 한 전력 때문에 그의 컴백을 탐탁지 않아하는 팬들도 존재한다. 가령 "사직구장 마운드가 평생 꿈이었다"라던가 "친정 SK에 칼을 갈고 있다"와 같이 SK에게는 전혀 미련이 남지 않은 듯한 태도를 고수하다가 뒤늦게 돌아와서는 "문학에서 은퇴하는 게 소원"이라고 인터뷰를 했으니 이런 이중적인 이승호의 태도에 반발하는 팬들이 생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SK 1기 시절부터 롯데, NC에서 모두 20번을 달았으나 현재 SK에서는 이재원이 20번을 달고 있어서 대신 이한진의 방출로 빈 21번을 달았다.

2016년에는 1군에 올라오지 못하다가 시즌 최종전이자 전병두의 은퇴 경기가 있던 10월 8일 1군에 콜업되었다. 전병두가 왕조 시절을 함께 한 선수에게 헹가래를 받을 수 있도록 한 배려인 듯. 그러나 경기 상황이 박빙으로 흘러가며 등판하지는 못했다.

시즌 종료 후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7.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00 SK 와이번스 42 139⅔ 10 12 9 0 4.51 130 75 132 1.43
2001 35 220⅔
(2위)
14
(3위)
14 2 0 3.55
(3위)
200 120 165
(2위)
1.43
2002 27 142⅔ 6 12 0 0 3.15
(5위)
120 45 144 1.12
2003 23 97 5 4 0 2 4.08 88 59 81 1.42
2004 31 169 15
(5위)
9 0 1 3.99 160 87 145
(2위)
1.46
2005 3 3⅔ 0 0 0 0 0.00 2 3 6 1.09
2006 1군 기록 없음[14][15]
2007
2008 29 35⅓ 4 1 2 5 3.57 28 26 28 1.42
2009 68
(3위)
106 7 5 6 7 4.42 110 61 96 1.52
2010 65 89⅔ 6 4 20
(3위)
6 4.22 104 55 96 1.47
2011 51 64⅓ 6 3 2 2 3.50 48 48 50 1.48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12 롯데 자이언츠 41 48⅔ 2 3 0 1 3.70 40 36 27 1.54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13 NC 다이노스 12 9⅓ 0 1 0 0 9.64 13 7 5 2.14
2014 1군 기록 없음
2015 1 1 0 1 0 0 36.00 3 1 1 4.00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16 SK 와이번스 1군 기록 없음
KBO 통산(13시즌) 428 1127 75 69 41 23 3.94 1018 631 971 1.42
완투, 완봉 기록
연도 완투 완봉
2000 1완투 0완봉
2001 6완투
(2위)
1완봉
(4위)
2002 1완투 0완봉
2003 2완투
(4위)
2완봉
(1위)
2004 1완투
(5위)
0완봉
2005 0완투 0완봉
2008 0완투 0완봉
2009 0완투 0완봉
2010 0완투 0완봉
2011 0완투 0완봉
KBO 통산 11완투 3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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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다시피 이승호가 1차 지명을 받은 이후 쌍방울은 해체되었고, 이승호의 지명권은 쌍방울의 선수들을 가지고 창단한 SK 와이번스로 넘어갔다. [2] 최우수선수는 한동희(현대 유니콘스 입단)가 수상했고, 준우승은 부산상고가 차지했다. 윤성환이 3학년, 채태인이 2학년이었다. [3] 그해 SK에서 선발 최다승. 선발 최다승 2위는 시즌 중 합류한 용병 투수인 빅터 콜인데, 8승 10패 2세이브를 거뒀으나, 평균자책점이 무려 6.14(…). 그해 타격 30걸 안에 3위의 브리토밖에 없었던 처참한 SK 타선은 어째선지 콜만 나오면 폭발했다. [4] 2024년 현재까지 SK 와이번스-SSG 랜더스 출신 중 유일한 신인왕 수상자이다. [5] 2001년 투구이닝 2위, 1위는 같은 SK 소속인 에르난데스의 233⅔이닝. [6] 정확히 3.99. [7] 진짜 임의탈퇴한 건 아니고 구단의 보유 선수 한도를 늘리기 위해서 서류상으로만 임의탈퇴 공시한 것이다. 이는 김성근 감독이 한화에서도 이용하던 나름의 묘수였다. 보상선수를 엉뚱하게 뺏겨서 문제였지... [8] 압권이었던건 5월 12일 경기였다. 9:4 1사 2루 상황에 등판해 이 리드를 동점을 내주고 2사 만루 위기까지 가서 겨우겨우 막아냈으며, 10회말 10:9리드에서는 페타신한테 바로 동점포를 얻어맞았다. 이날 기록은 0.2이닝 5실점. [9] 계약금 6억 원, 연봉 3억 5,000만 원, 옵션 4억 원. [10] 그리고 허준혁은 2015년 두산 대체선발의 핵으로 떠오르면서 한국시리즈 우승반지를 따냈다. [11] 고창성은 KILL 라인 시절 김경문이 팔을 갈아버려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12] 결국 고참 역할로 투수진을 이끈 선수는 손민한이며, 2013년 NC 다이노스 전체적으로도 이호준은 아버지 역할을 손민한은 어머니 역할로 잘 팀을 이끌었다는 평을 받는다. [13] 이 날 이호준은 부상으로 인해 쉬고 있었다. 사실 시즌 막판으로 갈수록 이호준은 쉬는 시간이 늘었다지만 야수 최고참이었던 데다 그간 해준 게 너무 많아서 팬들도 특별히 까지는 않고 있었다. [14] 2년 동안 부상으로 인한 재활기간 [15] 2007년에는 형식상이긴 했지만 임의탈퇴 신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