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의 성문 및 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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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0호 한양도성 | |
이간수문 二間水門 | Yigansum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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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f>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281 (을지로7가 2-1) |
건축시기 |
1396년 (창건 추정) 2009년 (복원) |
시설 | 1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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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이간수문[1] |
[clearfix]
1. 개요
한양도성 성곽의 일부로 남소문동천의 일부 지류가 도성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만든 수문(水門)이었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 도성 안의 모든 물줄기는 오간수문을 통해 흘러나갔다.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281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에 있다.한양도성 중 가장 낮은 지대에 위치한다.
2. 남소문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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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이간수문으로 흘러들었던 남소문동천. 사진 속 장소는 장충단공원 경내이다. |
광희문 인근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는데, 한 물줄기는 지금의 동대문 패션타운 인근에서 청계천과 합류하여 오간수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나갔고, 다른 물줄기는 이간수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나가 창신동 인근에서 청계천과 만났다. 그래서 남소문동천을 ‘이간수문천(二間水門川)’으로도 불렀으며, 1950년대에는 장충동을 흐른다하여 ‘장충천(獎忠川)’으로도 불렀다.
현재는 장충단공원에 일부 구간이 드러나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부 복개되었다.
3. 역사
1396년(태조 5년)에 한양도성을 지을 때 창건한 듯 하나 정확한 건 모른다. 이후 큰 변화 없이 조선시대 내내 존재했다.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이간수문 일대에 경성운동장(광복 후 동대문운동장)을 세우면서 땅 속에 묻었다. 서울특별시에서 2008년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및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조성하던 중 그해 9월에 발굴되었다. 처음에는 홍예 및 교각 상부 일부만 모습을 보였으나 이내 바닥까지 발굴하여 그해 11월에 전체 모습을 드러냈다. 80년 넘게 땅에 묻혀있었는데도 홍예 일부를 제외하고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참관한 문화재 위원들이 놀랐다는 후문이다. 이후 서울특별시에서 정비 복원 작업을 한 후 2009년 10월에 일반에 공개하여 오늘에 이른다.
4. 구조
- 높이는 약 4m, 폭은 3.3m, 길이는 7.4m이다.
- 하천 바닥에 선단석을 설치하고 그 위에 홍예를 얹었다. 홍예는 2칸이며, 그 주변에 화강암 석축을 구축했다. 남, 북 홍예 사이에는 물가름을 편하게 하기 위해 배머리 모양의 물가름돌을 두었다. 오간수문과 달리 홍예 위에는 여장이 없다.
- 엄연히 도성의 경계를 나타내는 방어 구조물이었지만, 아무래도 물이 나가다 보니 다른 문이나 성벽처럼 막혀있지 않았다. 그래서 홍예마다 목책을 두어 외부인이 멋대로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목책이 오물 및 쓰레기들이 걸릴 수 있는 장애물이 되었고, 그래서 목책을 쉽게 장, 탈착 할 수 있게 홍예석에 구멍이 여러 개 나있다.
- 수문 가장자리마다 하천 물을 수문으로 유도하기 위해 만든 날개 모양의 석축 시설이 있다.
- 바닥에는 판상석을 깔았다. 수문의 하중을 버티면서 침하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 홍예의 이맛돌과, 부형무사석을 비롯한 석축 윗부분, 치성 등 일부만 2009년에 복원했고 나머지는 예전 부재를 그대로 사용했다. 그래서 조선 시대 때 쌓은 돌과 복원한 돌의 색 차이가 많이 난다.